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밀란 제너레이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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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2. 밀란 제너레이션 이전 상황3. 베를루스코니의 구단주 부임 이후4. 암흑기5. 밀란 제너레이션 2기6. 기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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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유럽 축구계의 손꼽히는 명문 AC 밀란의 최전성기인 1988~1996년을 일컫는다. 멤버를 보면 갈락티코스 레알 마드리드 드림팀 바르셀로나와 비견되는 이름값과, 그에 걸맞은 성적을 보여주었다. 한 마디로 밀란의 최고 리즈 시절.

1980-90년대는 실비오 베를루스코니가 신흥 언론 재벌, 2000년대에는 정치 생명이 아직 살아있는지라 대규모 투자를 자주 감행하면서 지금의 첼시, 맨체스터 시티, 바르셀로나[4], 맨체스터 유나이티드, 레알 마드리드급으로 머니파워를 보여주었다.

2007년 월드 사커에서 선정한 축구 역사상 최고의 팀 4위를 기록하여, 클럽 팀으로는 유일하게 탑10에 들었다. 그 위로는 펠레가 이끌던 1970년대 브라질 축구 국가대표팀, 요한 크루이프가 이끌던 토탈 풋볼 네덜란드 축구 국가대표팀, 1950년대를 풍미한 페렌츠 푸스카스가 이끌던 ‘매직 마자르’ 헝가리 축구 국가대표팀이 있다.

근 몇년 사이에는 최고의 임팩트를 보여주던 펩 과르디올라의 바르셀로나와 밀란 제너레이션이 종종 비교된다.[5] 펩 과르디올라 당시의 티키타카는 21세기 초 세계 축구의 정상에 있었고[6], 아리고 사키의 압박 축구는 현대 축구의 뿌리라 평가받는지라 어느 팀이 강한지는 유명한 VS놀이의 떡밥 중 하나이다.

이때의 밀란은 1988~1989년에 2년 연속 발롱도르 포디움을 독점[7]하는 역사적인 기록을 만들어냈다. 물론 당시 발롱도르는 오직 유럽인만 수상할 수 있었기에 마라도나는 후보조차 될 수 없었으며, 바르셀로나는 크리스티아누 호날두의 존재도 감안해야 된다.[8]

또한, 당시 AC 밀란에게는 바로 그 디에고 마라도나가 이끌던 나폴리, 로타어 마테우스가 지휘하는 인테르를 포함한 강력한 경쟁자가 있었는데도 UEFA 챔피언스 리그 2연패와 세리에 A 무패 우승을 이끌어냈다는 점, 펩의 바르셀로나가 지배한 라리가는 레알 마드리드를 제외하고는 상대적 약체팀들로 구성됐다는 점은 두 팀을 비교시 밀란에게 유리하게 작용된다. 당시의 세리에 A는 지금의 프리미어 리그 이상의 경쟁구도[9]였고, 챔스 2연패 당시 밀란은 우승만 못했을 뿐, 리그 3위, 준우승을 기록하며 좋은 성과를 내기도 하였고 그 와중에 아예 무패 우승까지 달성해버렸다. 다만 펩의 바르셀로나가 지배하던 라리가 역시 아틀레티코 마드리드가 리그 우승을 거두고 챔피언스리그 결승에 2번 올랐으며 UEFA 유로파 리그에서 세비야가 3연패를 이루는 등 중위권도 엄청났다. 단지 두 신계 때문에 묻힌 것뿐. 그리고 마라도나의 나폴리는 마라도나 본인이 어나더 레벨이었던거지 나폴리라는 팀 자체는 결코 밀란 제네레이션에 비견할 만한 전력이 아니었다. 카레카 등 나름대로 당대 월클들을 영입하긴 했지만 역대급 레벨이라 할 만한 선수는 마라도나 혼자뿐이었다.

더군다나 자국 상위권 클럽들 조차 소위 7공주라 불리는 1990년대 말~2000년 초 세리에 A보다 더욱 강력하여 유럽 대항전인 UEFA 챔피언스 리그, UEFA컵, UEFA 컵위너스컵에서 온갖 강팀들을 박살내고 우승 트로피를 휩쓰는 최전성기여서 임팩트가 더욱 강력했다.[10] 특히 FIFA 클럽 월드컵의 전신인 도요타컵에서는 그야말로 깡패로 군림하면서 일본 축구계에 큰 충격을 안겨줌과 동시에 이탈리아 리그를 열렬히 지지하는 결과로 발전하였다. 실제로 일본에선 몰락했지만 현재도 밀란, 나아가 세리에 A의 팬덤이 어마어마하다.

2. 밀란 제너레이션 이전 상황

지아니 리베라 은퇴 이후 1979-80 시즌이 끝나고 구단주 펠리체 콜롬보의 라치오전 승부조작 일명 토토나로 승부조작 스캔들이 발각되어 라치오와 함께 동반으로 세리에 B로 강등된다. 물론 구단주 또한 축구계에서 영구 퇴출된 것은 덤. 1980-81 시즌 세리에 B에서 우승을 차지하고 1981-82 시즌 세리에 A로 1년만에 복귀하지만 이번에는 실력으로 강등되는 수모를 겪게 된다. 당시 주전이였던 선수들이 전부 떠나는 시기에 프랑코 바레시, 알베리고 에바니 등은 묵묵히 팀을 지키면서 서포터들의 절대적인 신뢰와 지지를 얻는다.

실력으로 강등된 1982-83 시즌을 세리에 B 우승으로 장식하고 다시 세리에 A로 복귀하지만 주축 선수들의 이탈 및 승부조작의 여파로 인한 재정난으로 죽을 쑤다 결국 팀이 파산위기에 몰렸고, 당시 신흥 언론재벌이던 실비오 베를루스코니가 팀을 인수했다.

3. 베를루스코니의 구단주 부임 이후

실비오 베를루스코니는 구단 인수 후 감독을 바로 쳐내지 않고 닐스 리드홀름을 신뢰함과 동시에 당대 이탈리아의 스타 로베르토 도나도니 세바스티아노 로시, 다니엘레 마사로 등 굵직한 영입 지원을 하며 1986-87 시즌을 시작했지만 리그에서는 우승 컵을 들어올릴 것이라는 기대와 달리 6위에 그치고, 코파 이탈리아에서는 당시 2부 리그였던 파르마 AC에게 총합 2:0으로 떡실신 당하면서 체면을 구긴다.
이미 리드홀름에 대한 신용을 잃은 베를루스코니는 파르마의 떠오르던 감독 아리고 사키를 감독으로 임명하기 위해 구단의 전설인 리드홀름을 경질하면서까지 사키를 신용한다. 투자는 전년도보다 더 과감해져 네덜란드에서 맹활약을 펼치던 신예 마르코 반 바스텐, 루드 굴리트와 로마의 스타 플레이어였던 카를로 안첼로티와 우디네세의 안젤로 콜롬보를 영입함과 동시에 몬차로 임대되었던 알레산드로 코스타쿠르타를 임대 복귀시킨다. 극성 맞은 이탈리아 언론은 사키의 신데렐라 스토리를 아니꼽게 보고 언론은 매일같이 사키를 구두팔이라고 폄하하며 그가 영입한 젊은 선수들을 까대기 바빳지만 사키는 "기수(騎手)가 되기 위해서 말(馬)이 될 필요는 없다"라는 희대의 명언을 남기고 응수하면서 부임 첫 해에 자신의 커리어에서 처음이자 마지막인 밀란의 리그 우승을 이끌며 자신을 능력에 대해서 비웃었던 모든 이들을 침묵시켰다.
이미 팀의 전력은 충분해서 반 바스텐의 영입으로 출장 기회가 줄어든 마싸로를 AS 로마로 임대보내고, 네덜란드 프랑크 레이카르트 스포르팅으로부터 영입하면서 오렌지 삼총사가 결성된다. 사키의 프레싱 사커는 유럽 유수의 명문팀을 대파하면서 승승장구하고, 준결승전에서 레알 마드리드와의 경기에서 절정에 이른다. 산티아고 베르나베우 원정에서 우고 산체스에게 골을 먹으며 끌려가다 77분 반 바스텐의 동점 골로 1:1 무승부에 그치지만 산 시로에서 벌어진 2차전에서 압도적인 경기력으로 전반전에서만 3골을 넣는 등 5:0으로 레알 마드리드를 박살 내버리면서 전 유럽에 충격을 안긴다. 결승에서도 당시 유럽에서도 최상위권 전력을 뽐내던 스테아우아 부쿠레슈티를 4:0의 스코어로 박살 내버리면서 축구계에 압박 축구의 바람을 몰고 온다. 리그에서는 더비 라이벌 인테르에게 우승컵을 내주는 동시에 나폴리에게도 뒤쳐지며 3위를 기록한다.
유러피언컵 2연패. 바이에른 뮌헨을 4강에서 만나 홈에서 1:0 승리, 원정에서 2:1로 패했으나 원정 다득점 원칙에 따라 결승에 진출하고 결승전에서 벤피카를 격파하고 우승을 차지한다. 리그에서는 디에고 마라도나 SSC 나폴리에게 스쿠데토를 내주며 2위에 그친다.
후일 바이에른의 전설로 꼽히는 지오반니 에우베르를 반 바스텐의 공백을 대비해서 영입했으나 리그 적응에 실패로 인한 영입 실패작이 되고 만다. 유로피언 컵은 3연패를 노리고 준비했으나 8강에서 마르세유 원정에서 조명이 나가자 항명[11]을 하다 몰수패와 '다음 시즌 유러피언 컵 출전불가'라는 징계를 받게 된다. 리그에서는 로베르토 만치니가 이끄는 UC 삼프도리아의 돌풍에 무릎을 꿇으며 또 다시 2위에 그치고 만다.
사키가 이탈리아 국대 감독으로 부임함에 따라 후임으로 밀란의 전설인 파비오 카펠로가 부임한다. 당시 카펠로는 임시직 경험 외에는 정식 감독으로서 경험이 없는 초보 감독으로 실패에 대한 여론의 우려의 목소리가 있었지만 리그에서 22승 12무의 이탈리아 세리에 A 역사상 최초의 무패 우승을 기록하며[12] 다시 한 번 유럽과 이탈리아 무대에 충격을 준다. 신입생으로는 즈보니미르 보반이 있다. 유러피언컵은 징계로 인한 불참.
빅 이어의 열망을 품고 이탈리아로 건너온 장피에르 파팽 데얀 사비체비치와 바리에서 임대 복귀한 보반이 합류하면서 팀 전력이 강화된다. 역시나 어김없이 리그에서의 타이틀 방어에 성공하며 리그 2연패 우승을 달성하고 수페르코파 이탈리아나에서 2연패를 달성한다. 또한 유러피언컵이 개편되면서 UEFA 챔피언스 리그라는 명칭으로 바뀌면서, 2개의 조로 나뉘어 각 그룹의 1위가 결승전을 치르는 방식으로 바뀐다. 밀란은 전승을 거두며 결승에 도달하지만, 결승에서는 올랭피크 드 마르세유에게 1:0으로 석패를 당함으로서[13] 챔스 우승은 내년으로 미루게 된다.

참고로 파팽은 챔스 때문에 밀란에 왔는데 이적한 년도에 전 소속팀이 우승해버린 기이한 경험을 했다.[14]
마르셀 드사이, 브리안 라우드루프, 크리스티안 파누치 등을 영입하며 시즌을 시작하고 리그에서는 밀란이 팀을 창단을 한 이래 현재까지 최초이자 최후의 리그 3연패를 기록하는 영광의 순간을 맞이한 시즌이며 수페르코파 이탈리아나 3연패를 견인한다. 특히나 이 시즌에 리그에서는 34경기 36득점이라는 강등권과 비비는 수준(...)의 득점력을 보여줬지만, 동시에 세리에 A에서 역대 한 손에 꼽힐법한 수준인 15실점만 함으로써 승점을 챙겨나갈 수 있었다.[15] 챔피언스 리그에선 순항하면서 결승전에 진출, 명장 요한 크루이프 감독이 이끌던 드림팀 바르셀로나와 격돌하게 되는데 바레시와 코스타쿠르타의 결장 및 전력의 격차로 인한 세간의 예상과 달리 4:0 압승으로 우승을 차지한다. 상세 내용은 기타항목 참조.
파비오 카펠로 감독이 임시직으로 밀란의 감독으로 부임 하던 시기 1986-87 시즌을 제외하면 밀란의 감독으로 부임한 이래에 처음으로 리그 우승 트로피 사냥에 실패하며 세리에 리그 3위 랭크에 머물게 된다.[16] 뿐만 아니라 리그에서 아쉬웠던 성적을 챔피언스 리그에서 회복하려 했던 밀란의 야심찬 목표는 그 당시에 유벤투스 이전 최초로 챔피언스 리그 역사상 결승 진출을 3회 연속 올라가는 대업을 이루어냈으나 자신의 친정팀과 재회한 프랭크 레이카르트, 훗날 산 시로의 위대한 레전드로 거듭나는 클라렌스 세도르프, 프랑크 더부르- 로날트 더부르 형제, 고글맨 에드가 다비즈의 활약으로 AFC 아약스에게 0-1 스코어로 패배하게 되며 준우승으로 머물게 된다.

이들 외에도 필리포 갈리, 마우로 타소티, 로베르토 바지오, 조지 웨아 등 각 국가대표팀 및 클럽들의 슈퍼스타들까지 영입하지만 밀란의 성공은 슈퍼스타뿐만 아니라 이 당시 밀란의 황금유스가 그야말로 빵빵터져 주면서 파올로 말디니- 프랑코 바레시- 알레산드로 코스타쿠르타- 마우로 타소티로 이어지는 밀란출신 역대급 수비수들과 알베리고 에바니, 딥 라잉 미드필더의 시초인 데메트리오 알베르티니[17]등이 기량을 만개하고 활약한다.

1980년대 후반 ~ 1990년대 중반까지의 기간 동안 리그 우승 5회[18], 챔스 3회 등 축구역사에 뚜렷한 자취를 남기고 오렌지 삼총사의 퇴장 및 주역들의 노화로 1995-96 시즌 유로파 리그에서 실망스런 성적을 거두었지만 그들의 마지막 스쿠데토를 사수하여 유종의 미를 거둔 뒤 카펠로 감독의 레알 마드리드 행으로 인한 사임 그리고 그 다음시즌 15년간 주장직을 수행하며 밀란 역사상 가장 오랬동안 주장직을 역임한 프랑코 바레시 & 밀란의 위대한 철의 백포의 멤버이자 당시 오른쪽 풀백 자리를 담당했던 마우로 타소티 은퇴 및 고질적인 발목 부상으로 인해 2년간 시름시름 앓다가 결국 선수 은퇴라는 결정을 하게된 마르코 반 바스텐, 그리고 루드 굴리트의 첼시 이적, 로베르토 도나도니의 MLS 진출 등 주요 멤버들의 노쇠화로 인한 은퇴 및 이적으로 인해서 한시대의 최고 존엄 지위를 유지했던 축구 클럽의 역사가 그렇게 막을 내렸다. 그리고 이 당시 밀란에서 빛을 보지 못하고 다른 클럽으로 떠난 유망주로는 파트리크 비에라, 파트릭 클라위버르트, 옌스 레만, 에드가 다비즈 등이 있다.

4. 암흑기

즈보니미르 보반, 올리버 비어호프, 조지 웨아, 데메트리오 알베르티니, 레오나르두 아라우주, 세르지뉴, 토마스 헬베그로 대표되는 1990년대 후반부터 시작된 암흑기는 선수들의 이름값과 실력에도 불구하고 확치고 올라온 리그 라이벌들과 위닝 멘탈리티의 부재등으로 1998-99 시즌에 알베르토 자케로니가 일궈낸 깜짝 리그 우승을 포함해서 1999-00 시즌 리그 3위를 기록해 챔피언스 리그 대회 티켓을 거머쥐었으나 2000-01 시즌에는 리그 6위로 추락했고 그 다음 시즌인 2001-02 시즌에 다시 반등에 성공 하여 리그 4위를 기록했다 그리고 1999년에 안드리 셰브첸코 젠나로 가투소 영입을 시작으로 개혁의 칼을 빼들면서 기존의 즈보니미르 보반, 데미트리오 알베르티니의 재계약을 포기하고 또한 미국에서 돌아온 도나도니의 은퇴까지 더해 새로운 시대를 맞이하기 위한 세대교체를 하기 시작한다.

밀란 역사상 최악의 먹튀라 평가받는 이브라힘 바[19], 호세 마리, 하비 모레노, 호케 주니오르[20]가 이 시절 선수들이다.

5. 밀란 제너레이션 2기

파일:2003밀란.jpg
파일:2007밀란.jpg
그런 경기력을 다시 볼 수 있을까?
제이미 캐러거
정말 환상적이였던 경험.
무엇이든 할 수 있을것만 같았다.
카를로 안첼로티
일명 New generation. 1996년부터 시작된 팀의 암흑기를 벗어나 2002-2007년 동안 유럽을 호령했던 시기로 당시 감독은 카를로 안첼로티이다. 당시 안첼로티는 초보 감독으로 유벤투스를 2년 연속 2위로 이끌지만 이름 값과 유벤투스의 오직 우승이라는 기대에 부합하지 못했으며, 라이벌 팀의 레전드라는 이유[21]로 서포터들의 지지를 받지 못했다. 하지만 밀란 감독 부임 후 2002-03 시즌 챔피언스 리그 우승, 코파 이탈리아 우승, 2003-04 시즌 세리에 A 우승, 2006-07 시즌 챔피언스 리그 우승을 견인하며 대표적인 젊은 감독으로 우뚝섰다.[22]

이 시대를 대표하는 대표적인 선수들은 카카, 안드리 셰브첸코, 안드레아 피를로, 클라렌스 세도르프, 알레산드로 네스타, 필리포 인자기, 젠나로 가투소, 지다, 카푸, 세르지뉴 그리고 말년을 불태우던 파올로 말디니 정도를 꼽을 수 있을 것이다.

2001-02 시즌 여름 이적시장이 개장하자마자 베를루스코니는 파산해버린 피오렌티나의 후이 코스타 마르첼로 리피의 개혁의 일환으로 내쳐진 유벤투스의 필리포 인자기를 사채 7,000만 유로[23]를 풀면서 영입하였고[24], 이후 인테르에서 영 기량을 보여주지 못하던 안드레아 피를로, 셰브첸코와 함께 디나모발 돌풍을 이끌던 카카베르 칼라제 등을 영입하면서 2001-02 시즌을 4위로 마치면서 지난 시즌만 못한 순위를 기록했지만 가능성을 보여주었고,

2002-03 시즌에는 인테르에서 그저그런 활약으로 네라주리에서 쫓겨나다시피 했던 클라렌스 세도르프 다리오 시미치를 영입, 그 외에도 바르셀로나에서 히바우두를, 페예노르트 로테르담에서 욘 달 토마손을, SS 라치오의 주장이자 유스 출신인 알레산드로 네스타를 영입하면서 1993-94 시즌 이후 8년 만의 챔피언스 리그 6번째 우승 및 코파 이탈리아 통산 5회 우승을 견인하며 다음 시즌에 입게될 유니폼에 코카르다 크리콜로레 패치를 달게됐으나 리그에서는 맹주 유벤투스와 더비 라이벌 인테르에게 밀리며 3위를 기록한다.

2003-04 시즌 개막 전 AS 로마에서 맹활약하던 카푸를 영입하고, 당시 브라질 축구의 10년 대계를 열어줄 대표적인 유망주였던 카카 등을 영입하면서 드디어 17번째 스쿠데토를 차지하지만 챔피언스 리그에서는 데포르티보에게 원정 4:0 참패를 당하면서 일찌감치 짐을 싼다.

2004-05 시즌에는 야프 스탐, 에르난 크레스포를 영입하면서 말네스카라는 역대급 수비라인과 안드리 셰브첸코, 에르난 크레스포라는 막강한 투톱과 그를 받쳐주는 카카, 클라렌스 세도르프, 젠나로 가투소, 안드레아 피를로라는 환상적인 미들진과 그를 받쳐주는 두터운 백업으로 많은 기대를 받았으나, 리그에서는 파비오 카펠로가 부임하고 입맛에 맞게 뜯어고친 유벤투스에게[25], 챔피언스 리그에서는 이스탄불의 악몽으로 준우승에 그치고 만다.

2005-06 시즌에는 마르시오 아모로소, 요한 포겔, 크리스티안 비에리, 알베르토 질라르디노, 마렉 얀쿨로프스키, 젤코 칼라치등을 영입하면서 다시금 기대를 높였으나 크레스포의 대체자로 데려온 비에리의 폭망 등으로 또다시 유벤투스에게 막혀 리그 준우승[26], 챔피언스 리그 4강에서는 바르셀로나에게 1, 2차전 총합 1:0으로 지고 탈락한다.[27]

이후 마지막을 불태우며 준비한 2006-07 시즌은 시작부터가 암울했다. 칼초폴리로 인한 승점 7점 감점 및, 3차예선부터 참가하게 된 챔피언스 리그 및 셰브첸코의 이적과 대체자로 데려온 히카르두 올리베이라의 폭망, 월드컵 우승으로 인한 주전 이탈리안들의 부상 및 후유증으로 리그에서는 챔피언스 리그 마지노선인 4위도 간당간당했으나 챔스에서는 카카의 원맨쇼로 16강에서 셀틱을 격파하고, 이후 인자기와 세도르프의 각성으로 [28] 전력상 열세가 점쳐지던 바이에른 뮌헨을 8강 원정에서 2:0으로 꺾은 후 4강에서 만난 맨유를 다시 한 번 카카의 맹활약으로 5:3으로 격파하고 결승전에서 2년 전 악몽을 안겨준 리버풀에게 2:1 승리로 설욕하며 다시 한 번 빅 이어를 들어 올린다. 한편 리그에서는 겨울 이적시장 신입생 호나우두 마시모 오또의 맹활약으로 4위를 수성하면서 2007-08 시즌 챔스 티켓을 손에 넣는다.

이 시기에도 항상 성공적인 영입만 있던게 아니라서 크리스티안 비에리, 히바우두, 파브리시오 콜로치니, 요앙 구르퀴프, 히카르두 올리베이라등의 실패작도 많았다.

그 후 밀란은 세대교체 실패와 지나친 주전 선수들의 노예화 및 노쇠화로 인해 2007-08 시즌에 리그 5위를 기록한 것을 제외하면 3위권 안에는 용케 들었지만 눈이 썩는 예능 플레이를 보여주었다. 그래도 즐라탄 이브라히모비치, 호비뉴, 안토니오 카사노, 이냐치오 아바테, 잔루카 잠브로타, 티아고 실바 등이 활약한 2010-11 시즌엔 스쿠데토를 차지하며 좋은 모습을 보여주었으나, 그 당시에 지금 시점에서도 이해하기 힘든 베를루스코니의 행동이 컸다. 그리고 그 다음 시즌인 2011-12 시즌에 끝난 뒤 2012년 여름 이적시장에서 즐라탄과 티아고를 파리 생제르맹에 팔아버린 것. 이후 밀란은 나락의 길을 걷게 된다. 한편 밀란의 유명한 경쟁팀인 유벤투스는 이 시즌에 세리에의 역사적인 무패 우승을 기록하고 3년 뒤에 챔피언스 리그 준우승을 기록하고 그리고 또 다시 2년 뒤에 챔피언스 리그 준우승을 기록하는 등 좋은 성과를 내었고 이것을 밀란은 옆에서 구경하는 처지가 되었다.

그나마 현재 밀란은 하파엘 레앙, 테오 에르난데스, 마이크 메냥, 피카요 토모리, 이스마엘 베나세르를 앞세워 부활에 성공했다는 점이다.

6. 기타

밀란 제너레이션 시절 압권인 기록은 최후의 유러피언컵 2연패도 있으며[29] 또한 세계 축구사에서 여덟 번째로 긴 58경기 무패 행진 및 1991-92 시즌을 무패 우승으로 마무리를 한 대기록과 더불어 동시기의 또 다른 강팀인 명장 요한 크루이프 감독이 이끌던 원조 드림팀을 1993-94 시즌 챔피언스 리그 결승전에서 4:0으로 박살낸 것이다. 이는 챔피언스 리그 결승전 역사상 가장 점수차가 큰 승리이며, 이 정도 승리를 무려 호마리우, 스토이치코프, 크루이프(감독)를 상대로 해냈으니 당대인들이 받은 임팩트는 실로 엄청난 것이었다.

사실 이 결승전은 '최강팀 밀란 제네레이션'이라는 타이틀에 무색하게 시즌 전 이미 레이카르트가 이적하여 오렌지 삼총사가 해체되었고, 다른 주전들도 줄부상과 경고누적, 컨디션 난조 등으로 세간의 예상은 '떠오르는 드림팀' 바르셀로나의 완승을 점쳤었다. 심지어 요한 크루이프는 경기전 인터뷰에서 "밀란은 공을 제대로 다룰 줄도 모르는 드사이같이 형편없는 놈을 가장 중요한 자리에 놓는 끔찍하게 멍청한 팀이다. 내일은 우리들이 축구 레슨을 시켜주겠다"[30] 라는 자신감을 내보였으나, 막상 뚜껑을 열어보니 밀란이 평소 전술[31]과 달리 맞불작전을 놓는 바람에 준비한 전술이 모두 물거품이 된데다 팀 내부의 균열과 더불어 밀란의 미친듯한 경기력으로 초장부터 밀리기 시작해 전반전에만 마사로에게 2골을 얻어맞아 패색이 짙어지고, 후반전 사비체비치 1골에다 크루이프 자신이 조롱한 축구 못하는 드사이에게 까지 골을 헌납하면서 4:0 떡실신을 당해 드림팀 해체의 결정적인 원인이 되고만다.

이후 크루이프는 이탈리아 축구계와 수비에 중심을 둔 소위 안티 풋볼[32]에 커다란 반감을 가지게 된다.


[1] 호세 레안드로 안드라데와 함께 역대 최고의 수비형 미드필더로 거론되지만 아무래도 안드라데가 워낙 옛날 사람이다보니 레이카르트가 최고로 평가받는다. [2] 레프트백으로는 이견이 없는 역대 최고이고, 수비수 포지션을 통틀어도 언터쳐블인 프란츠 베켄바워를 제외하고는 사실상 최고 반열에 있다. [3] 프란츠 베켄바워는 논외로 쳐도 바비 무어와 함께 베켄바워의 바로 뒷선으로 평가된다. [4] 2000년대 유스가 빵빵 터져 이미지가 희석된 감이 없잖아 있는데 원래 바르셀로나는 이적시장에서 이적자금을 효율적으로 못 쓰는걸로 유명했다. [5] 바르셀로나에 대해 당시 밀란의 에이스 마르코 반 바스텐은 바르셀로나가 더 강력하다고 했지만 립 서비스인지 진심인지는 불명. 사실 이러한 레전드들의 감탄사를 객관적인 순위매김으로 보기는 어렵고, 파고들면 모순이 한도 끝도 없다. [6] 아이러니하게도 이후 펩이 떠나고 라이벌인 레알 마드리드가 지네딘 지단 감독 하에 챔스 3연패라는 업적을 달성해서 21세기 초의 세계 최고의 클럽은 역사의 평가에 맡기게 되었다. 일단 현재 매체와 전문가, 그리고 대중들의 전체적인 여론은 바르셀로나의 손을 들어주는 편. 레알 같은 경우 챔스 3연패의 위업에 다들 경이를 느끼면서도 한편으로는 라이벌과의 더비전에서 그다지 우위를 점하지 못하거나 리그 우승을 계속 내주거나 하는 등 압도적인 지배자 느낌은 받지 못했다 평가하는 이들이 많다. 때문에 각종 매체나 잡지에서 선정한 역대 최강팀 순위 등을 보면, 1516~1718 레알은 챔스 3연패라는 업적 치고는 생각보다는 순위가 낮은 경우가 많다. 원투펀치에서도 역사상 최강팀 선정 토너먼트에서 펩르샤와 사키밀란이 결승에서 만났다. https://www.fmkorea.com/index.php?document_srl=6062355935&mid=best&cpage=6 [7] 1988년 1위 마르코 반 바스텐, 2위 루드 굴리트, 3위 레이카르트 / 1989년 1위 마르코 반 바스텐, 2위 프랑코 바레시, 3위 레이카르트 [8] 만약 호날두가 없었다면 2009~2012년까지의 발롱도르 포디움은 리오넬 메시, 안드레스 이니에스타, 사비 에르난데스 3명이 4년 연속으로 독점할 수 있었다. [9] 당시 세리에 A 7공주 클럽의 경쟁구도가 지금의 PL 빅6와 닮았다고 보면 된다. 이 당시는 오히려 PL이 세리에 A에서 뛰던 월클 선수들이 말년을 보내러가는 리그였고, 이러한 구도는 밀란 제너레이션 2기때도 마찬가지였다. [10] 이때 기록은 세리에 클럽이 결승에 진출하지 못한 년도가 더 적을 정도(...). 특히 UEFA컵은 1999년까지 딱 한 번을 제외하곤 전부 결승에 진출했다. 2000년대 중반의 PL 클럽들의 유럽 돌풍은 챔스 트로피 갯수도 갯수지만 UEFA컵에선 독일과 스페인의 강세인지라 초라한 감이 없잖아 있다. [11] 0-1로 리드를 내주던 상황이었고, 결국 이 몰수패로 공식 전적은 0-3 패배가 되었다. [12] 아이러니 하게도 당시 준우승 팀이던 유벤투스가 훗날 20년 뒤에 오히려 반대로 최초의 이탈리아 리그 무패 우승팀 이던 밀란을 제치고 이탈리아 세리에 A 2번째 무패 우승 기록한다. [13] 다만 마르세유가 시즌 중에 리그에서 승부조작을 했다는 것이 발견되어 UEFA 슈퍼컵 인터컨티넨탈컵 출전권이 박탈되어 밀란으로 넘어갔다. [14] 이후엔 마이클 오언 또한 같은 상황을 맞이한다. 파팽의 경우는 결승전에서 전 소속팀을 만나 교체 출장, 패배한 케이스인데 오웬보다 파팽과 더 비슷한 예로는 09-10 시즌 빅 이어를 위해 인터 밀란에서 바르셀로나로 이적하였지만 준결승에서 전 소속팀을 만나 1, 2차전 통틀어 최악의 부진을 보이며 팀과 함께 탈락한 즐라탄 이브라히모비치가 있다. 이 때 바르사가 즐라탄을 영입하기 위한 조건으로 4000만 유로와 함께 트레이드 된 사무엘 에투는 인테르로 둥지를 틀었고 08-09 시즌 바르사에서의 트레블에 이어 09-10 시즌에도 트레블을 달성하며 축구 역사상 전무후무한 2시즌 연속 트레블을 경험한 유일한 선수로 남아있다. 그것도 다른 리그, 다른 팀에서. [15] 1929-30 시즌에 세리에 A가 본격적으로 출범하면서 풀리그 제도를 도입한 이래 최소 득점 우승이다. 최소 실점 우승팀은 69-70시즌에 30경기 11실점을 한 칼리아리 칼초. 세리에 A가 16팀 체제를 유지하는 동안에 우승한 다른 모든 팀들도 1993-94 시즌의 밀란보다는 득점을 많이 했다. [16] 그리고 그 당시 챔피언스 리그 본선 티켓 규칙에 의하여 그 다음 시즌 챔스 본선 진출 티켓을 얻는데 실패한다. [17] 밀란 유스이나 파도바에서 기량을 만개하고 돌아온다. [18] 당시 리그 우승 경쟁 상대가 디에고 마라도나의 나폴리, 로타어 마테우스 · 위르겐 클린스만 · 안드레아스 브레메 게르만 삼총사를 앞세운 인테르, 전통의 강호 유벤투스, 잔루카 비알리 로베르토 만치니를 앞세운 삼프도리아 등 일명 7공주 시절보다 더한 경쟁 상대들이 넘쳐나던 시절이였다. [19] 청대나 보르도 시절엔 지단 이상의 기대를 받던 선수였으나 현재의 발로텔리 이상의 또라이 기질을 보여주었다. 매 경기 머리색을 바꾸면서 축구계의 데니스 로드먼으로 불렸을 정도. 결국 임대를 전전하다 방출당하고, 이후 방출을 밥먹듯이 당하다 보다 못한 밀란이 밀란에서 은퇴시켜줬다. [20] 일명 3R. 호케는 월드컵 때 브라질을 우승으로 견인한 동일인물인지 의심스러울 정도로 돌고래짓을 해댔고, 나머지 스페니쉬들은 라리가와 청대에서의 기량은 전부 스페인에 두고왔는지 쓰레기 돋는 플레이를 보이면서 세대 교체의 선두주자에서 먹튀로 전락하며 일명 스페니쉬 징크스와 이탈리아 클럽들이 스페인 선수들을 꺼리는 결과로 나타났다. [21] 안첼로티는 로마와 밀란의 레전드이다. 인테르와 토리노 FC에 비하면 라이벌 의식이 적은 편. [22] 노안이라서 덕장 및 노장 이미지가 심어져서 그렇지 안첼로티는 무리뉴와 꼴랑 4살 차이다(...). [23] 코스타는 4,132만 유로, 인자기는 3615만 유로에 영입. [24] 이는 베를루스코니가 두 선수의 열혈 팬인 이유가 가장 컸다. 더불어 보반 대체자와 안드리 셰브첸코의 파트너를 영입하는 계획도 있었고. [25] 덧붙이자면 이 당시 유벤투스 또한 무시무시한 스쿼드를 자랑했다. [26] 후에 칼초폴리로 인해 4위로 조정. [27] 2차전 캄프 누 원정 경기에서 셰브첸코의 골이 푸욜의 할리우드 액션으로 취소된 것이 결정적이었다. 일명 푸욜 장풍 사건이라고 불린다. 결국 바르셀로나가 1차전 1:0, 2차전 0:0으로 AC 밀란을 합산 스코어 1:0으로 이기고 챔피언스 리그 결승전에 진출하였다. 바르셀로나는 챔피언스 리그 결승전에서 만난 아스날을 상대로 2:1 역전승을 거두어 구단 역사상 두 번째 챔피언스 리그 우승을 하였다. 바르셀로나는 이로부터 약 10여년간 유럽 축구계를 지배하게 된다. [28] 바이에른은 밀란과의 유럽대항전 전적이 1승 3무 6패로 극열세이다. 인자기가 그 당시 뮌헨 킬러였으며, 2경기 합산 스코어 6-1 중에서 3골을 넣었다. [29] 이후 챔피언스 리그에서는 연속 우승 기록이 없다가 레알 마드리드가 2015-16, 2016-17, 2017-18 시즌에 3연패를 달성한다. [30] 다만 인터넷에 떠도는 출처불명의 발언이고, 실제로는 경기 승패 예상을 묻는 기자의 짊룬에 "바르셀로나는 호마리우와 계약했고 밀란은 드사이와 계약했다. 그거면 대답이 될 거다"라는 말을 했다. 물론 이쪽도 상대를 무시한 오만한 말이긴 하다. [31] 당시 감독 파비오 카펠로는 초보 감독에 불과했다. 게다가 밀란의 1993-94 시즌의 주요전술은 1골 넣으면 걸어잠그기라는 무진장 재미없는 경기력으로 악명이 자자했다. 토탈 풋볼의 원조라는 자부심을 가진 크루이프가 자신의 축구와 상반되는 경기를 하는 밀란과 카펠로를 곱게 보지않은것은 당연했다. 2009-10 시즌에도 마찬가지라 펩 과르디올라의 바르셀로나는 자신의 축구철학에 반하지 않아 지지하는 한편 카펠로의 전술과 비슷한 주제 무리뉴의 인테르는 안티 풋볼이라며 산란하게 깟다. 결과는 보다시피 인테르의 합산 스코어 3:2 승리. [32] 수비전술도 하나의 전략인데 자신의 철학에 반한다고 안티 풋볼이라 하는 것에서 크루이프의 독선적이고 고집적인 성격이 잘 드러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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