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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정치 능력
제2차 세계 대전이 끝나갈 무렵, 어떤 사람이 스탈린에게 히틀러가 "정신병자였는지 아니면 모험가였는지"에 대해 질문했다. 이에 스탈린은 이렇게 대답했다.
"나는 그가 모험가였다는 점에 동의한다. 하지만 나는 그가 미치광이였다는 점에 동의할 수 없다. 히틀러는 재능있는 사람이었지. 단지 재능있는 자만이 독일 민족을 통일할 수 있는 법이야!"[1]
객관적으로 보면 히틀러는 정치적으로 권력을 잡는 능력은 매우 뛰어났다. 히틀러가 아무런 기반이 없는 무능력자였다면
나치당에서 당수가 될 수 없었을 것이고, 나치당은
뮌헨 폭동 이후에 그저 수없이 사라져간
듣보잡 극우정당 중 하나로 끝장났을 것이라고 보는
견해가 많다. 뿐만 아니라 히틀러가 주동한 뮌헨 폭동 실패 이후에 많은 당 지도자들이 체포되고 또는 당을 떠나는 등 나치당은 거의 망한 것으로 보였으나, 히틀러는 놀랍게도 쿠데타가 아닌 합법 노선으로 집권 전략을 바꾸어서 결국 집권에 성공한다. 여기서도 나치당에서 재건 전에 모든 시도를 해봤으나 지지율이 오히려 떨어졌고[2], 히틀러 없이는 구심점도 없고 선동적인 연설로 흥행도 되지 않았던 점도 작용한다. "나는 그가 모험가였다는 점에 동의한다. 하지만 나는 그가 미치광이였다는 점에 동의할 수 없다. 히틀러는 재능있는 사람이었지. 단지 재능있는 자만이 독일 민족을 통일할 수 있는 법이야!"[1]
사실 히틀러가 한창 떠오를 때에도 그를 길거리에서 난동 피우는 정치깡패의 우두머리라며 무시했던 정치인들이 많았다. 이는 좌우를 가리지 않아 독일 사회민주당과 독일 공산당이 히틀러를 과소평가해서 서로 싸워대는 바람에 정당이 해산당하는 운명을 맞아했고,[3] 우파도 별다를 바는 없어서, 아데나워가 쾰른 시장에 당선되었을 때 나치당을 한날 군소정당 정도로 여겨서 별로 신경을 쓰지 않았다든가, 파울 폰 힌덴부르크가 히틀러를 탐탁지 않게 여겨 히틀러를 총리로 지명하는 걸 거부해서 집권하는 걸 노골적으로 방해했다는 일화에서 알 수 있듯이 독일의 정통 보수세력, 수구세력에서도 히틀러를 하찮게 여겼던 정치인들이 많았고, 히틀러가 집권한 원인도 보수정치인들이 히틀러를 방패막이로 삼으면 대공황 발발에 대한 책임을 지는 걸 피하면서 집권을 연장할 수 있고, 거기에 더해 행정경력이 없던 히틀러를 주물러서 꼭두각시로 쓸 수 있다고 생각해서였다.
그러나 결국 이들은 대부분 히틀러의 정치력에 차례차례 굴복하거나 숙청되었고, 파펜을 비롯해 히틀러를 이용하여 정권을 연장하려던 정치인들은 뒷방으로 밀려나고 말았다. 어찌보면 히틀러의 가장 뛰어난 능력 중 하나가 이렇듯 권력을 잡는 정치질 능력이었는데, 이를 얕보고 이용하려다가 피본 사람들이 많았다. 히틀러는 필요에 따라 다른 정치인에게 친근하게 다가갈 줄도 알았고 비위도 맞출 줄도 알았다. 협박이나 겁박뿐만 아니라 다른 정치인을 살살 구슬려서 타협을 할 줄도 알았다. 많은 사람들에게 단상에서 미치광이처럼 연설을 하는 선동가 히틀러의 모습이 익숙하겠지만 밀실에서 자신에게 유리한 협잡을 하거나 권력을 잡는 정치 기술이라는 측면에서 히틀러는 능력이 있는 사람이었다.
나치당 집회 시 히틀러가 없을 때나 연설 금지령을 먹었을 때는 모이는 사람 숫자 단위와 모금액이 크게 차이가 났다고 한다. 이런 까닭에 1년여의 수감기간 후에 나치당이 재건될 때에도 별다른 반대 없이 당내 절대적 존재로 재추대된다. 물론 1930년 선거에선 지지율이 3.0% 미만으로 떨어지는 시련도 있었다. 집권과정에서는 미국발 대공황과 대통령 비상체제라는 예측 불가능한 운빨이 작용하기도 했다. 하지만 기회가 왔을 때 이를 놓치지 않고 잡아 챈 것도 능력이다. 당장 2.6%에 불과한 득표율을 기록하고도 당내에서 히틀러가 무너지지 않았다는 것만 해도 그렇다. 심지어 히틀러가 당권을 잡은 1921년부터 몰락하기 직전인 1945년 4월까지도 히틀러에게 대놓고 도전하는 사람이 한 명도 없을 정도로 그의 권위는 매우 확고했다.
한때 총애를 받다 숙청된 한프슈탱글이나 오토 슈트라서까지도 히틀러의 이런 능력을 인정한다. 학습이나 지성에서 우러나온 것이 아닌 본능이나 감으로 상대방이나 대중심리를 잡아냈다고. 누가 정치적으로 고립되어 있는지 세력균형이 어떠한지 약점이 무엇인지 잘 파악해서 집권 시에도 블러핑으로 상대방을 현혹시켰고, 상대진영의 병림픽과 세력구도 역학관계를 잘 파악했으며 벼랑 끝 전술과 도박에 가까운 무모함에 질린 상대방이 굴복하게 만드는 역량도 뛰어났다. 이러한 전법은 오스트리아와 체코 합병 시까지 잘 통했다.[4]
애초에 복잡한 독일의 정치지형을 분석하고 각 정파의 장단점을 분석해서 집권전략으로 삼은 것도 보통 지략이 아니면 힘들다. 그를 다른 정파의 수장들이 과소평가하기는 했으나, 어쨌든 집권 후에 공산주의자들과 유대인들을 공적으로 만들며 극우뿐만 아니라 우익들을 모두 휘어잡아 총통에 오른 것을 보면 그가 집권할 수 있었던 것은 단순한 시대적 흐름을 잘 탄 운빨뿐만이 아니라 히틀러의 정치적 재능 때문이었다고 할 수 있다.[5]
히틀러 연구자 이언 커쇼는 히틀러를 현실과 그리 동떨어진 인물이 아니며 기억력이 매우 비상했고 두뇌회전이 빨랐던 사람으로 평가했다. 실제로 흔히 주변의 아첨꾼들한테만 히틀러의 말이 먹혀든 것처럼 생각하지만 냉정하고 비판적인 노련한 정치인과 외교관들도 사안을 신속하게 파악하는 히틀러의 비상한 두뇌에 혀를 내둘렀다는 증언이 많다.
1933년 총리 취임 후 국제 무대에서 히틀러가 거둔 몇 차례의 승리는 영국, 프랑스 등 유럽 국가들이 히틀러를 다시 보게 만들었다. 히틀러의 무기는 국내 정치에서와 마찬가지로 ‘전부 아니면 전무’라는 식의 과감한 승부사 기질이었고, 나치당 선동가 시절부터 즐겨 써 온 공갈 협박도 잘 먹혀들었다.
그러나 계속된 외교적 승리와 제2차 세계 대전 이후 연이은 군사적 승리로 인해 히틀러는 스스로가 ‘무오류의 인간’이라는 자기 확신에 빠져들었으며 모든 일이 자신의 생각대로 풀릴 것이라고 생각하고 점점 더 큰 무리수를 두기 시작했다. 그리고 그 무모한 도박의 결과는 독소전쟁을 통해 한계를 드러냈고, 이전까지 출세길을 열어준 '전부 아니면 전무' 식으로 타협을 하지 않던 자신의 지도력을 신봉하던 히틀러는 궁지에 몰렸다고 협상을 하는 성격이 아니었기에 제2차 세계 대전에서 패색이 짙어진 불리한 상황에서도 결코 협상이나 타협은 없다는 비타협적인 태도를 고수하여 그와 제국을 파멸로 몰고 갔다.
2. 행정 능력
나치즘이 반관료적인 성향을 보인 것처럼 히틀러도 당연히 행정에 대해선 별 관심이 없었다. 자신의 지배에 대한 권력욕은 컸지만 그 자리에 앉고 나선 행정적인 면은 '무능을 넘어선 무관심'이었다. 관료적인 체제를 박살냈지만 다른 체계적인 시스템을 구축한 건 아니고 '예술가'를 자처한 만큼, 항상 즉흥적 판단이나 어려울 경우 최대한 질질 끌거나 부하들의 영역이나 권력 다툼에선 방관하다가 이기는 사람 편을 들어주고 건축 프로젝트 같은 자신의 관심사에 대해선 기존 행정체제를 무시하고 항상 자신의 직속으로 두었기 때문에, 나치 치하에서의 행정은 중첩되고 혼란스러웠으며 비효율적이었다.그의 정치적 최전성기라고 볼 수 있을 무렵, 그는 상당한 정치적, 행정적, 군사적 자리를 겸임하고 있었지만, 그의 능력은 유능했다고 보기에는 너무나 많이 모자랐다. 이는 기본적으로 히틀러의 가방끈이 짧아서 전문지식은 물론, 전반적인 교양과 지성을 갖출 시간을 갖지 못했고, 게다가 장교가 아닌 사병으로 근무했기 때문에 전체적인 군사작전의 그림을 보는 눈도 부족했기 때문이라고도 할 수 있다. 일단 히틀러 집권 이후 제3제국은 대공황에서 비롯된 경제난을 거의 극복한 것처럼 보이긴 했다. 군대를 확장하고, 이런저런 군수공업을 일으키고, 군수물자 수송을 위한 도로나 철도를 대규모로 확충하느라고 많은 실업자들이 고용되었기 때문이다. 또한 히틀러 본인은 무능했지만 측근인 하인리히 힘러나 루돌프 헤스, 파울 요제프 괴벨스, 헤르만 괴링[6] 같은 자들은 나름 자기 분야에서 상당한 능력을 갖고 있었는데 이들이 실무를 맡아 상당한 성과를 이룬 것도 사실이다.
그러나 이것은 모두 엄청난 재정적자로 실시된 것이었으며[7], 메포어음 같은 무책임한 물건이나 전 국민 상대로 뿌려댄 결과였고 군수투자는 다른 산업에 파급 효과가 작기 때문에 침략이 필연적이었다. 또한 몇몇 정책은 단기적인 정책에 불과했다.[8] 1930년대 당시 독일 정부는 무리한 군비 재확장으로 파산 위기에까지 처하게 되었다. 독일 군부가 준비 부족을 이유로 오스트리아, 체코슬로바키아 침공에 미온적이었음에도 히틀러가 밀어붙인 것은, 바로 전쟁으로 한 몫 챙기지 않는 한 독일 정부는 파산하고 자신도 하야할 수밖에 없었기 때문이다. 이러한 도박이 성공하고 나서는 군부에선 폴란드 침공에 별로 이의를 제기하지 않았으며, 소련 침공 때도 동조했다. 이런 동조는 제3제국의 파멸로 이어졌다.[9]
게다가 나치당이나 제3제국의 하부조직들은 자신들의 지도자[10]를 따라 반목을 거듭했으며, 합심해서 총력전을 벌여야 할 때 낭비적인 자존심 싸움만 벌이고 있었다. 이런 엉성한 행정 때문에 1943년까지 독일은 독재국가인 소련뿐만 아니라 민주국가인 영국이나 미국도 실시하던 전 산업의 총력전 체제에 들어서지 못하고 있었다. 알베르트 슈페어가 군수상이 된 이후에야 어느 정도 정리되지만, 이미 때는 늦었고 결과적으로 독일의 패망을 불렀다.
결론적으로 히틀러 본인의 업무능력은 그저 그런 편이지만 집권 이후에 히틀러가 정치적, 외교적, 군사적 도박을 연이어 성공시켰기 때문에 행정에 무능했는데도 성공할 수 있었던 것이다. 문제는 인재들을 잘 활용한 승리자들과 달리 히틀러는 인재들을 관리하는 능력이 떨어졌을 뿐더러, 히틀러는 엄청나게 위험한 망상을 실천하려 했다는 점에 있다.
3. 군사적 능력
자세한 내용은 아돌프 히틀러/평가/군사적 능력 문서 참고하십시오.4. 미술적 능력
히틀러의 그림들 |
뮌헨 로얄 호프브뢰 하우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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겨울의 칼스키르헤 교회 | 노이슈반슈타인 성 |
빈에 거주하던 시절 그림엽서를 그려 팔거나 광고판을 그리는 등의 일을 했는데, 이게 상당히 쏠쏠해서 어지간한 중산층 이상의 수입을 벌며 살았다고 한다.[11] 그리고 이렇게 그림만으로 중산층 이상의 수입을 벌고 살 정도라는 뜻이므로 일반인의 미술적 재능 수준은 한참 넘었음을 알 수 있다. 실제로 히틀러가 그린 그림을 보면 박물관에 걸릴 명화는 절대 되지 못하지만 분위기 좋은 식당이나 카페 벽에는 걸릴만한, '무난한' 풍경화 정도는 된다.
하지만 히틀러가 꿈꿨던 것은 그림을 생업으로 사는 평범한 중산층의 삶이 아닌 파블로 피카소, 바실리 칸딘스키 같은 역사에 이름을 남길만한 미술가였다. 사실 위 그림을 보면 알듯이 히틀러가 원근법 실수가 조금 있지만[12] 모작도 못 하는 수준의 대다수의 일반인과 비교하면 그림을 상당히 잘 그리는 편이었다.[13] 하지만 자신있는 건축물 그림과는 달리 인물의 감정을 표현하거나 인물과 배경을 조화시키는 것에는 미숙했는데, 학교측에서는 바로 그 부분을 평가했기에 불합격할 수 밖에 없었다. 그리고 무엇보다 당시 유럽 예술의 기조는 초현실주의였다. 히틀러의 그림은 기술적인 면에서는 실력이 있었지만 예술을 하는 사람이라면 기본적으로 가져야 할 본인을 작품에 투영해 메시지를 전달하는 재능은 다소 낮았다.
위대한 예술작품으로 불리는 작품들 중에선 '단순히 (현실의 무언가를) 잘 그려서 유명해진 것'도 분명 있지만, 이러한 현실 사물의 모작이 고평가받았던 사실주의 그림의 시대는, 화가보다 더 완벽하게 대체할 수 있는 사진이 등장한 시점에서 종말을 맞이했다. 현대미술이 일견 기괴하기까지 한 추상미술이나 개념예술로 변화하게 된 것도 그런 이유로, 예술가의 역할이 '현실의 모사'가 아니게 된 시점에서 예술작품의 기조는 '창작자가 추구하는 신념이나 고뇌'를 담는 것이 되었다. 그런데 히틀러의 작품에는 히틀러 자신의 신념이나 고뇌가 담겨있지 않다. 그렇다고 빈센트 반 고흐나 파블로 피카소처럼 미적인 독창성( 아이덴티티)가 확고한 화풍을 가지고 있는 것도 아니며, 극사실주의처럼 정밀한 기교로 현실의 극단적인 모사를 추구하는 화풍이라기엔 어긋난 원근법이 곳곳에서 발견되며, 색감 또한 단조로운 편이다.
히틀러의 그림들은 일반인들이 '보기 좋네' 정도의 감상을 느끼고 방에 인테리어 소품으로 걸어놓기 위해 적당한 값에 구입할 정도는 되지만, 전문가들 입장에서는 아무런 상상력이나 느낌도 없이 기계적으로 건축물을 그린 히틀러의 그림은 딱히 평론하고 비평할 가치나 매력을 느낄 수 없는 평범한 그림들이다. 물론 대중예술의 개념에서 보이듯 대중의 인정을 받는 것도 예술의 한 갈래이기에 꼭 평론가의 시선에서만 높은 평가를 받아야만 예술적 가치가 있다고 할 수는 없긴 하다만, 그런 대중예술적인 면에서도 선풍적인 인기를 얻었다고까지 보기는 어렵다는 것.
사실 수입을 얻는 상업성과 예술성은 꼭 연관관계에 있지 않다. 상술한 문단에서 예시로 든 반 고흐의 경우 화풍이 생전에는 인정받지 못해 유화를 공식적으로는 단 한점 판매했을 정도로 엄청난 생활고에 시달리다가 자살했다는 것으로 유명하다. 피카소 역시 입체파로 화풍을 전환하고 난 뒤 얼마간은 대중의 인정을 받지 못했다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반대로 히틀러의 경우는 오히려 일반인의 시선에서는 잘 그린 것처럼 보이는, 너무 튀지 않는 화풍의 평범하고 수요가 있는 그림이어서 오히려 큰 수입을 얻었다고도 할 수 있다. 이는 현대의 상업미술가들의 포지션과 일맥상통한다.
미국의 저널리스터 겸 작가였던 존 건서는 히틀러가 빈 미술 아카데미에 제출한 그림들을 보고 "그냥 건축가의 스케치다. 고통스럽고 정밀한 제도기술 이외에는 아무것도 없다. 히틀러가 순수미술에선 가망이 없으니 건축학교로 가라는 판정을 받은건 당연하다"고 반응했으며, 후대에 발매된 "히틀러의 수채화"라는 화집에서는 '재미없고 하찮은 도시 풍경화만 그리는 싸구려 프로 화가'라고 평가했다. 히틀러에게 그림을 잘 그리는 기술은 있는 건 맞지만 미술적 가치는 낮았다는 것이다.
이렇게 히틀러의 미술적 재능이 있었다는 의견과 없었다는 의견이 혼재하는 이유는 '재능이 있다'의 기준을 어떻게 잡느냐의 문제이다. 히틀러는 일반인 기준으로는 분명히 그림을 매우 잘 그린다고 할 수 있다. 그러나 미술가들의 기준으로 본다면 딱 기본만 가능하며 그 이상의 주목할 만한 부분은 전혀 없는 평범한 화가라고 할 수 있으며 둘 다 맞는 말이다. 비유하자면 전교 3등을 하다가 의과대학에 입학한 후 의대에서 하위권으로 졸업한 동네 의원 의사가 공부에 재능이 있는 사람이냐고 물어본다면 일반인들과 의대 교수들의 대답은 정반대일 것이다.
이를 종합하면 결론적으로 히틀러의 미술적 능력은 "그림으로 자기 밥벌이는 가능하지만 미술사에는 이름을 남길 수는 없는 평범한 상업 화가" 수준이었다고 할 수 있다. 권력 구도를 파악하고 대중의 마음을 휘어잡는, 세계사에 부정적으로나마 큰 족적을 남긴 정치가로서의 천부적 재능과 비교하면 미술가로서의 재능은 평범한 편이었다. 만일 히틀러가 평화로운 시대에 태어났다면 역사에 이름을 남기지 않은 채 그저 조금 극단적인 정치 성향을 가졌을 뿐인 삽화가로 조용히 살다 갔을지도 모른다.
아이러니하게도 정치가로써의 행적 덕분에 미술가로써의 행적이 재발굴되어서 히틀러의 그림 역시도 미술사에 남을 법한 유명세를 얻은 것이 아이러니 그 자체라 할 수 있다. 당대에 명성을 날리던 미술가들과 그들이 그려낸 작품은 일부를 제외하면 대다수 잊혀졌지만 히틀러의 그림은 세계 최악의 독재자로써의 행적과 결부되어 결과적으로 기억되고 있다.
5. 결론
20세기는 히틀러의 시대였을까? 분명한 것은
아돌프 히틀러만큼 20세기에 뚜렷한 흔적을 남긴 개인은 없다는 사실이다.
무솔리니,
스탈린,
마오쩌둥 같은
독재자는 정복 전쟁에 나서서 여러 민족을 공포로 휘어잡고 이루 말할 수 없이 비인간적인 행위를 저지르면서 20세기의 성격에 지워지지 않는 자국을 남겼다. 하지만 아돌프 히틀러처럼 자국의 울타리를 넘어 온 세계로 뻗어나가면서 사람들의 의식에 불을 댕긴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극단의 시대에는 이 세기의 긍정적 가치관을 상징하고 인류에 대한 믿음과 미래에 대한 희망을 몸으로 구현한 지도자도 있었다.
루스벨트,
처칠,
케네디 그리고 가장 최근에
만델라 같은 사람은 그런 인물 중에서도 첫 손에 꼽힐 만하다. 하지만 히틀러가 20세기에 남긴 흔적은 이런 정치 지도자 어느 누구보다도 깊다.
히틀러의 독재는 스탈린이나 마오쩌둥보다 훨씬 더 20세기에 걸맞은 틀을 보여준다. 히틀러의 독재는 극단적이고 강렬한 방식으로 무엇보다도 현대 국가의 전면적 자기 주장, 대중을 통제하고 동원하기 위한 사상 유례를 찾아볼 수 없는 언론 조작, 지독한 극우 민족주의, 인종 우월주의의 가공할 파괴력과 인종주의의 귀결, 엉뚱한 목적에 동원된 현대 과학기술과 '사회 공학'을 드러냈다. 히틀러의 독재는 아직도 환하게 타오르는 경고의 화톳불을 피웠다. 그것은 문화 수준이 높은 현대의 선진 사회도 하루아침에 야만주의로 치달아 이념 전쟁을 벌이고 지금까지 이 세상에서 볼 수 없었고 거의 상상조차 하기 어려운 야만과 착취와 학살을 자행할 수 있다는 것을 여실히 보여주었다. 히틀러의 독재는 현대 문명의 붕괴에 다름 아니었다. 현대 사회 안에서 핵폭탄이 터진 것이다. 그것은 우리가 무슨 일을 저지를 수 있는가를 보여주었다.
히틀러 1권 20~21p, 이언 커쇼
히틀러의 독재는 스탈린이나 마오쩌둥보다 훨씬 더 20세기에 걸맞은 틀을 보여준다. 히틀러의 독재는 극단적이고 강렬한 방식으로 무엇보다도 현대 국가의 전면적 자기 주장, 대중을 통제하고 동원하기 위한 사상 유례를 찾아볼 수 없는 언론 조작, 지독한 극우 민족주의, 인종 우월주의의 가공할 파괴력과 인종주의의 귀결, 엉뚱한 목적에 동원된 현대 과학기술과 '사회 공학'을 드러냈다. 히틀러의 독재는 아직도 환하게 타오르는 경고의 화톳불을 피웠다. 그것은 문화 수준이 높은 현대의 선진 사회도 하루아침에 야만주의로 치달아 이념 전쟁을 벌이고 지금까지 이 세상에서 볼 수 없었고 거의 상상조차 하기 어려운 야만과 착취와 학살을 자행할 수 있다는 것을 여실히 보여주었다. 히틀러의 독재는 현대 문명의 붕괴에 다름 아니었다. 현대 사회 안에서 핵폭탄이 터진 것이다. 그것은 우리가 무슨 일을 저지를 수 있는가를 보여주었다.
히틀러 1권 20~21p, 이언 커쇼
대부분의
독일 국민은 권위주의를 축복으로 받아들였다. 정치적으로 다른 노선을 걷는 사람들,
소수 인종, 사회 부적응 집단을 억누르는 것은 나라를 다시 일으키기 위해 어쩔 수 없이 치러야 할 조그만 희생처럼 보였다. 히틀러도 빈 시절에 맛본 굴욕감은 벗어던진 지 오래였고 민족의 존립을 위태롭게 하는 어둠의 세력과 싸워 이겨서 독일을 혼란에서 구해야 한다는 정치적 사명감에 불탔다. 자아도취에서 나온 자기 미화는 추종자들이 신처럼 떠받들면서 1936년 무렵이면 걷잡을 수 없이 부풀어 올랐다. 이때쯤이면 이미 자기는 오류를 범할 수 없다는 생각을 굳혔고 단적인 오만의 단계로 올라섰다.
지도자 개인의 오만을 낳는 데 일조한 것은 독일 국민이었다. 독일 민족은 유럽 대륙을 완전히 정복한다는 역사적 도박으로 지도자를 따라 성큼 발을 들여놓았고 그 결과를 고스란히 떠안는다. 스스로 자기 파멸의 길을 걸어가려는 의지를 전제로 삼지 않고서는 도저히 이해가 안 갈 만큼 도박의 규모는 컸다. 그런 오만 다음에는 어김없이 네메시스 여신의 복수가 따른다는 사실을 간파한 사람은 드물었다.
히틀러는 20세기의 가장 혐오스러운 인물로 기억된다. 역사는 현대 정치의 악을 온몸으로 드러낸 인물로 히틀러를 기록한다. 그것은 히틀러가 기대했던 자리와는 거리가 멀다. 그러나 악이라는 것은 신학적이고 철학적인 개념이지 역사적 개념은 아니다. 히틀러는 악인으로 불러야 마땅하고 또 그래야만 속도 후련할 것이다. 그렇지만 악인으로 부르는 것은 설명이 아니다. …… 나는 역사적 인물에 드러난 악의 문제를 도덕적으로 단죄하는 데는 관심이 없다. 내가 하려는 것은 히틀러가 도대체 어떻게 한 사회를 휘어잡았기에 그 사회가 그렇게 엄청난 대가를 치르면서도 히틀러를 지지했는가 하는 점을 이해하는 것이다.
2권에서 다루려고 하는 것은 바로 이런 문제들이다. 히틀러는 요행히 손 안에 굴러 들러온 절대 권력을 어떻게 행사할 수 있었는가, 독일의 권력 실세들이 국민의 압도적 지지가 있었다고는 하지만 현대 국가에 어울리지 않는 지극히 개인화된 통치 형식에 어떻게 점점 휘말려들어서 나중에는 보나마나 파멸의 길로 나아간다는 것을 뻔히 알면서도 독재자의 의지에 끌려가고 말았는지, 멀쩡한 현대 국가의 시민들이 인류가 일찍이 겪어보지 못한 끔찍한 살육극의 방조자가 되어 국가가 주도하는 대학살이 유럽 전체에서 자행되고 결국은 독일이라는 나라를 궤멸시켰는지를 설명하는 것이다.
이것은 개인의 파멸담이자 나라의 파멸담이다. 한 민족과 민족의 대변자들이 어떻게 스스로 화를 불러들였고 나아가서는 유럽 문명을 처참하게 망가뜨렸는지를 되돌아보는 이야기다. 결과야 익히 알려졌지만 어떻게 해서 그런 결과가 초래되었는지를 다시 한 번 따져보는 것은 뜻있는 작업이다. 이 책이 그런 방면으로 이해를 돕는 데 조금이라도 기여한다면 더 바랄 것이 없겠다.
히틀러 2권 6~9p, 이언 커쇼
지도자 개인의 오만을 낳는 데 일조한 것은 독일 국민이었다. 독일 민족은 유럽 대륙을 완전히 정복한다는 역사적 도박으로 지도자를 따라 성큼 발을 들여놓았고 그 결과를 고스란히 떠안는다. 스스로 자기 파멸의 길을 걸어가려는 의지를 전제로 삼지 않고서는 도저히 이해가 안 갈 만큼 도박의 규모는 컸다. 그런 오만 다음에는 어김없이 네메시스 여신의 복수가 따른다는 사실을 간파한 사람은 드물었다.
히틀러는 20세기의 가장 혐오스러운 인물로 기억된다. 역사는 현대 정치의 악을 온몸으로 드러낸 인물로 히틀러를 기록한다. 그것은 히틀러가 기대했던 자리와는 거리가 멀다. 그러나 악이라는 것은 신학적이고 철학적인 개념이지 역사적 개념은 아니다. 히틀러는 악인으로 불러야 마땅하고 또 그래야만 속도 후련할 것이다. 그렇지만 악인으로 부르는 것은 설명이 아니다. …… 나는 역사적 인물에 드러난 악의 문제를 도덕적으로 단죄하는 데는 관심이 없다. 내가 하려는 것은 히틀러가 도대체 어떻게 한 사회를 휘어잡았기에 그 사회가 그렇게 엄청난 대가를 치르면서도 히틀러를 지지했는가 하는 점을 이해하는 것이다.
2권에서 다루려고 하는 것은 바로 이런 문제들이다. 히틀러는 요행히 손 안에 굴러 들러온 절대 권력을 어떻게 행사할 수 있었는가, 독일의 권력 실세들이 국민의 압도적 지지가 있었다고는 하지만 현대 국가에 어울리지 않는 지극히 개인화된 통치 형식에 어떻게 점점 휘말려들어서 나중에는 보나마나 파멸의 길로 나아간다는 것을 뻔히 알면서도 독재자의 의지에 끌려가고 말았는지, 멀쩡한 현대 국가의 시민들이 인류가 일찍이 겪어보지 못한 끔찍한 살육극의 방조자가 되어 국가가 주도하는 대학살이 유럽 전체에서 자행되고 결국은 독일이라는 나라를 궤멸시켰는지를 설명하는 것이다.
이것은 개인의 파멸담이자 나라의 파멸담이다. 한 민족과 민족의 대변자들이 어떻게 스스로 화를 불러들였고 나아가서는 유럽 문명을 처참하게 망가뜨렸는지를 되돌아보는 이야기다. 결과야 익히 알려졌지만 어떻게 해서 그런 결과가 초래되었는지를 다시 한 번 따져보는 것은 뜻있는 작업이다. 이 책이 그런 방면으로 이해를 돕는 데 조금이라도 기여한다면 더 바랄 것이 없겠다.
히틀러 2권 6~9p, 이언 커쇼
아돌프 히틀러는 부정적인 면에서 20세기 세계에서 가장 영향력 있는 독재자로, 국가 지도자의 부정적인 면에서의 전형으로 평가받는다. 그는 근현대사에서 가장 영향력있는 인물 중 하나로 평가되며, 그가 일으킨 상흔은 100년이 다 되어가는 현재까지 선명히 남아있다. 대중적으로 히틀러는 이오시프 스탈린, 김씨 3대, 마오쩌둥, 프란시스코 마시아스 응게마[14], 이디 아민, 폴 포트를 넘어서는 독재자의 대명사로 인식된다.[15] 특히 그의 악행을 몸소 겪은 서양권에서의 평가는 동아시아에서의 일본 제국에 대한 평가보다 더 심한 수준.[16]
아돌프 히틀러가 다른 역대 최악으로 거론되는 독재자들과 차별화되는 점은 사악한 목표를 처음부터 가진 상태로 완벽히 민주적인 방법으로 집권했다는 것이다. 물론 각종 선동과 사기를 이용했긴 했으나, 착실하게 국민들, 그리고 의회의 표를 받아 총리가 되었다는 점은 당시의 여타 독재자들과 궤를 달리 한다. 쿠데타로 집권한 베니토 무솔리니와 프란시스코 프랑코 등 대부분은 쿠데타나 무장 봉기, 아니면 아예 전쟁을 통해 집권을 했다는 점을 보면 국민들 손으로 뽑힌 독재자라는 타이틀은 많은 지식인들에게 자칭 인간의 "이성"이라는 것이 얼마나 덧없는가를 깨닫게 해주었다.[17] 아돌프 히틀러의 나치 독일은 인간의 합리성에 대한 의심을 제기하는 포스트모더니즘이라는 새로운 학문적 방향의 결정적 원인이 되었다.
사람들이 나치와 히틀러가 몸서리 치게 만드는 또다른 이유로 홀로코스트를 뽑는다. 대학살은 전쟁이 있는 한 언제든지 있었고, 징기스 칸, 십자군 전쟁 등 전쟁사를 들쳐보면 얼마든지 발견할 수 있다. 하지만 이 홀로코스트를 일반적인 학살과 다르게 치는 이유는 우생학이라는 과학의 명분을 등에 업고 정부 주도하에 근대화된 공업화의 방법론을 적용한 "체계적인 학살"을 자행했다는 점 때문이다. 군대로 우루루 몰려 마구 총질하는게 아닌, 꼼꼼하게 표를 만들고 통계를 이용해 최대한 효율적으로 한 인종을 말살하는, 인간의 이성을 이용한 인종 청소라는 것과, 그런 행태를 군부와 독일 국민들이 묵인하거나 심지어는 동조했다는 점에서 사람들이 더욱더 거부감을 느끼는 것이다.
아돌프 히틀러는 여러 면으로 보았을 때 현대 국가의 고위직이 되기에는 역량이 부족한 것으로 평가받고 있다. 학벌도 변변치 않았으며[18] 게으른 성격에 머리가 남달리 좋은 것도 아니었다.[19] 심지어 사교성도 모자라 가까운 주변인도 다가설 수 없을 정도로 폐쇄적이고 정치인으로 살아간 것을 빼면 빈 통이나 다를 바 없는 삭막한 삶을 살면서 참다운 우정도 못 누려보았다. 또한 높은 자리에 오를 만한 뒷배경도 없었고 독일 총리 자리에 오르기 전까지 공직자로 일했던 경험이 전무했다.
그러나 이러한 단점에도 불구하고 히틀러는 독일 내에서 그 누구도 넘볼 수 없는 독일의 절대 권력자가 되었다. 나중에는 독일의 야전사령관들까지도 일개 상병 출신 지도자가 내리는 명령에 무조건 따르며 충성을 맹세했으며, 자타가 공인하는 재주라고는 대중의 원초적 정서를 자극하는 선동술밖에 없었던 아웃사이더 정치인에게 사회 온갖 분야의 난다 긴다 하는 성직자와 외교관, 법조인 같은 사회 엘리트들까지 히틀러에게 완전히 매료되어 너도나도 덮어놓고 히틀러에게 복종했다. 심지어 제3제국의 파멸이 눈 앞까지 다가온 순간에도 독일 국민들 중 히틀러에게 대놓고 반항하는 사람이 없을 정도로 독일 국민 전체가 히틀러의 통치에 순응했다.
히틀러가 통치한 12년은 독일과 유럽, 세계를 영원히 바꾸어 놓았으며, 히틀러는 만약 그 사람이 없었더라면 역사가 달라졌을 것이라고 단언할 수 있는 몇 안되는 개인 중 하나로 꼽힌다.[20] 히틀러가 독일의 총리가 되고 겨우 몇 년 만에 유럽의 심장부에 자리 잡은 독일이라는 문명화된 국가는 끔찍한 학살 전쟁의 길로 나아갔고 그 학살 전쟁은 독일과 유럽을 철의 장막과 물리적 파괴로 몰아넣었을 뿐 아니라 도덕적으로도 갈가리 찢어놓았다. 히틀러는 시대의 모든 동경과 두려움, 원한 등의 합일점으로 역사의 인물이 되었다. 히틀러는 한 개인이 역사를 진행시킬 수 있다는 것을 보여주었고 그 시대와 히틀러는 완전히 하나가 되어 그 시대를 논할 때 히틀러를 빼고 설명하기 어려운 일치관계를 이루어냈다.
흔히 역사의 전개에 있어서 한 인물의 존재가 없더라도 역사의 흐름에는 큰 영향이 없다는 말이 있다. 어떤 한 개인이 역사적인 업적을 이뤘더라도 그 업적은 그 개인 때문이 아니라 그 시대 상황이나 대중들의 요구에 의해 이루어진 것으로 개인의 영향이 적다는 것이다. 즉 이는 시대변화에 따른 자연스러운 일로써 시간이나 정도의 차이가 있을 뿐 그를 대신할 다른 개인이 역사에 나타날 수 있다는 것이다. 그러나 한 개인이 역사의 전개에 있어서 대체 불가능한 요소로 자리 잡은 매우 드문 경우 중 하나가 바로 히틀러다. 아돌프 히틀러는 인류 역사에서 대체 불가능한 요소가 매우 극단적이면서 부정적으로 작용한 인물이다.
히틀러가 없었다면 나치당의 집권은 아예 불가능했을 것이며 희대의 대량학살정책 홀로코스트는 일어나지 않았을 가능성이 매우 높다.[21][22]또한 제2차 세계 대전은 어떤 한 가지 요인이 아니라 여러가지 요인이 복합적으로 작용해 일어났지만, 아돌프 히틀러라는 단 한사람 때문에 이 전쟁을 피할 수 없는 상황에 놓였기 때문에 히틀러는 제2차 세계 대전을 일으킨 원흉이자 장본인으로 평가받고 있다.[23]
히틀러가 집권하기 전만 해도 원래 유대인은 단순히 ' 유대교를 믿는 사람'으로서 그냥 개종하면 끝이었고, 유대인만의 국가를 만들자는 시오니즘은 대다수의 유대인들도 무관심했을 정도로 비주류였다.[24] 그런데 아돌프 히틀러가 반유대주의를 내세워서 집권한 이후에 뉘른베르크 법을 제정하고 수정의 밤 사건을 일으키면서 유대인으로서의 정체성이 확립되었고, 결정적으로 600만명의 유대인을 학살한 홀로코스트가 밝혀지면서 나라 없는 민족인 유대인들이 자기 민족들만의 국가를 만들어야 한다는 시오니즘이 크게 지지를 받았고, 결국 이스라엘의 탄생으로 이어졌다. 히틀러가 내세운 반유대주의가 오히려 유대인이라는 정체성이 확립되고, 자신이 싫어하는 유대인들이 이스라엘이라는 나라를 건국하게 되는 결과로 이어진 것이다.
히틀러가 일으킨 전쟁과 학살로 수천만 명의 사람들이 죽거나 학살당했으며 수많은 국가가 붕괴되었다. 특히 제2차 세계 대전 발발 후 게르만 민족주의와 아리아인 우월주의에 빠져 지배민족과 노예민족이라는 고대사적 개념을 20세기에 꺼내들어 폴란드와 소련을 비롯한 동유럽에서 슬라브족과 적대적 인종을 말살시키겠다는 "인종 청소"를 감행하였으며, 유대인들은 오로지 척결해야 할 사회적 기생충일 뿐이라는 인종차별적 이데올로기를 내세워 유대민족 전체를 절멸시키겠다는 인류 역사상 그 유례를 찾아보기 힘든 대량학살 정책을 실행하여 현대 문명에 돌이킬 수 없는 거대한 상처로 남겼다. 이로 인해 아돌프 히틀러는 역사학자들과 수많은 사람들에게 20세기에서 가장 혐오스러운 인물로 기억되며, 역사는 현대 정치의 악을 온몸으로 드러낸 인물로 히틀러를 기록한다.
아돌프 히틀러는 선거에 나와 표를 얻는 능력과 한 국가의 권력을 장악하는 능력은 매우 뛰어났다. 히틀러 연구가인 이언 커쇼는 히틀러가 휘두른 권력에서 히틀러 자신이 차지하는 몫을 결코 과소평가해선 안 된다고 주장했다. 히틀러는 나치당에서 당 지도자 자리에 있었을 때부터 단지 높은 자리에 있었기 때문에 권력을 누린 것이 아니라 독일을 구해야 한다는 역사적 사명에서 권력을 이끌어냈다. 한마디로 히틀러의 권력은 제도에서 나온 권력이 아니라 카리스마에서 나온 권력이었고 그는 단순히 운이 아니라 본인의 능력과 매력으로 권력을 잡은 사람이였다. 커쇼는 히틀러가 타고난 연설가이자 선동가, 조직가, 이론가였으며, 히틀러는 “인류의 역사는 곧 인종 투쟁의 역사”라는 발상을 통해 독일 민족의 부활과 재생을 중심에 둔 일관성 있는 세계관을 처음부터 끝까지 밀어붙인 정치 지도자였다고 평가한다.
한편 히틀러는 독일이 강요받은 폭군이 아니라 합법적으로 독일 총리 자리에 올랐고 1933년부터 1940년까지는 세계에서 가장 인기 있는 국가 지도자로 평가받았다. 히틀러는 별 볼 일 없는 환경에서 자라 한 국가의 절대 권력을 쥔 보기 드문 인물이었으며, 히틀러의 비상한 기억력이나 정치적 수완, 연설가로서 능력은 당시 최고의 엘리트 지식인들을 사로잡을 정도의 매력을 보여주었다.
그리고 '만약 히틀러가 정부 수반이 아니었다면 나치 친위대의 무자비한 경찰국가가 과연 만들어질 수 있었을까? 다른 지도자라면 과연 독일이 유럽을 상대로 제2차 세계 대전을 일으키는 것이 가능했을까? 그리고 유대인 차별 정책을 실시했다고 해서 그 정책이 홀로코스트라는 대량살육으로 이어졌을까?'에 대한 대답에 결코 가능하지 않았을 것이라 평가하며 다른 외부적 요인과 그 외 다른 요소들이 작용했다고 하더라도 히틀러가 나치 독일에서 가장 중요한 요인으로 평가받는데는 그 만한 이유가 있다고 주장했다.
이렇게 히틀러가 한 국가의 절대 권력을 장악한 이유는 그가 내세운 지도자 원리가 있었다. 히틀러는 항상 민족은 피라미드를 이루며 그 꼭대기에는 ‘위대한 천재’가 있다고 역설했다. 지도자는 '이념의 구심점'이며 ‘수호자’이기 때문에 지도자에게 무조건 복종하고 충성을 바쳐야 한다고 강조했다. 이러한 지도자 숭배의 확립은 나치 운동이 발전하는 데 결정적 역할을 했다. 만약 히틀러 숭배가 없었더라면 나치당은 분파주의로 갈라져 반자본주의, 반사회주의를 주장하며 타협 없는 과격한 혁명을 부르짖었던 당내 반대파들과의 갈등으로 사분오열되었을 것이나 이러한 문제를 히틀러의 카리스마와 개인 숭배로 봉합할 수 있었다.
나치당은 전략, 파벌 싸움, 해묵은 개인 감정을 둘러싸고 서로 부딪칠 때가 많았으며 대개 이념의 차원보다는 사사로운 감정이나 전략의 차원에서 갈등과 적대감이 끝없이 불거졌다. 지도자 숭배가 모든 당사자에게 받아들여진 것은 이런 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 유일한 방안이었기 때문이었고 단합을 이루기 위해서는 자의든 타의든 히틀러에게 개개인이 충성을 바쳐야 했다.
이러한 지도자 숭배는 히틀러의 권력을 매우 강하게 만들었는데, 실제로 히틀러의 권력은 이미 패전의 기색이 짙어진 1944년까지도 흔들 수 없을 정도로 매우 강력했다. 1944년 7월 20일에 일어난 히틀러 암살 미수 사건이나 뮌헨 대학 학생들과 교수가 참여한 백장미단 사건 같은 저항 운동이 있긴 했지만 히틀러의 임기 내내 저항 운동은 별다른 반향을 일으키지 못했다. 일반 국민들도 그렇고 나치 간부들 사이에서도 지도자의 권위는 패전 직전까지 누구도 부인할 수 없는 절대적인 것이었다.
그러나 이러한 정치적 매력이나 표를 얻는 능력과는 별개로 히틀러가 행정적인 부분에서 매우 무관심했던 것으로 보인다. 실제로 히틀러는 종이를 웬만하면 들여다보지 않으려 했으며 매우 모호하고 추상적인 지시를 내려 그 지시를 체계화하고 문서화하는 관료들이 매우 어려워했다. 실제로 히틀러의 지시사항들이 매우 복잡하고 난해하여 제국 운영에 큰 어려움을 주었다는 사례들이 많이 나온다. 또한 위에서 언급했던 것처럼 히틀러가 자신 휘하에 있던 측근들을 제대로 통제하기는 커녕 방치하여 측근들끼리 반목을 거듭하여 큰 낭비를 가져온 단점들이 있었다.
그러나 아이러니한 것은 이러한 행정에 대한 무관심은 히틀러의 권력을 더 강하게 만든 점도 있다는 것이다. 히틀러 치하의 독일에서 내각은 유명무실했는데 이는 대부분의 독재자들과는 다른 매우 독특한 통치 방식 때문이었다. 다른 독재자들이 중앙 통치 기구를 장악함으로써 자신의 권력을 체계적이고 합리적으로 행사하려 했다면, 현대 국가의 관료제를 혐오한 히틀러는 통치 기구를 무력화하고 모든 것을 자신에게 집중시킴으로써 대단히 이상한 통치 체제를 만들었다.
그 결과 나치 독일은 현대화된 선진국인데 중앙에서 조율하는 구심점이 없었고 국가 수반이 통치 기구에 깊이 발을 들여놓지 않는 국가가 되었다. 심지어 히틀러가 집권한 이후 독일에서는 각료 회의가 사실상 유명무실해졌다. 실제로 1935년에는 각료 회의가 겨우 12번밖에 열리지 않았고 1937년에 이르면 그 숫자는 6번으로 줄었다. 그리고 1938년 2월 5일 이후로는 각료 회의가 아예 열리지 않았다. 히틀러 치하에서 각료 회의가 잘 열리지 않았던 이유는 히틀러가 각료 회의를 워낙에 싫어했기 때문이라는 것이 그 이유였다.
나치 독일의 가장 큰 특징인 누적적 급진화(cumulative radicalization)는 이렇게 개인화된 통치 스타일과 맞물려 나타났다. 이언 커쇼는 이를 “히틀러의 개인 통치가 뿌리를 내리면서 정부의 공식 기구가 와해되었고 이념이 급진화되었는데 공식 기구가 와해되고 이념이 급진화되니까 거꾸로 히틀러의 개인 지배도 모든 제도적 구속에서 벗어나 자유를 구가하면서 절대 권력으로 치달았다”고 설명한다. 한마디로 누적적 급진화는 명확하게 정리되고 세분화된 정책 지침이나 관료 체계가 없는 상황에서 체제의 공무원들과 당 간부들, 체제에 충성을 바쳤던 일반인들이 저마다 지도자의 뜻을 좇아 역동적으로 움직이면서 나타난 현상이었다. 이에 히틀러는 단지 모호한 몇 마디 지시나 자신의 바람을 표현하는 것만으로 나라를 통치할 수 있었다.
히틀러의 개인화된 통치 방식은 시민들로부터 열렬한 호응을 받았고 히틀러가 설정한 목표와 크게 벗어나지 않는 한 히틀러도 이런 호응을 뒷받침해주었다. 이렇게 되자 정부 부처들은 정부 부처들대로, 그 안에서 일하는 개인들은 개인들대로, 체제의 모든 수준에서 뜨거운 경쟁이 벌어졌다. 다윈주의 적자생존 원리가 적용되는 제3제국에서 권력을 잡고 승진을 하려면 위에서 지시가 떨어지기만을 기다릴 것이 아니라 ‘지도자의 의중’을 미리 헤아려서 히틀러가 추구하고 소망하는 것을 이루기 위해 부지런히 움직이는 것이 진급을 위한 자세였다. 그렇게 당 간부와 논객, 친위대는 오직 지도자의 뜻을 따른다는 생각으로 움직였다. 결과적으로 그들은 걷잡을 수 없는 급진화로 치닫는 데 일조한 셈이었다.[26] 히틀러는 언제나 급진적인 방안을 선호했으며, 이것을 잘 알았던 측근들은 앞 다투어 남보다 더 급진적인 방안을 내놓으려 경쟁하면서 체제의 급진화를 가져왔다. 그리고 이러한 급진화가 거듭되면서 홀로코스트와 같은 나치의 야만적 범죄들이 저질러질 수 있는 토대가 되었다.
문제는 히틀러의 능력 중에서 전투지휘관으로서의 능력이 안좋은 쪽으로 부각되다보니 똥별이라는 단어가 마치 히틀러를 칭하기 위해 만들어진 단어인 것처럼 보일 지경이라는 이야기도 나오며 독일의 패망을 전적으로 히틀러에게 돌리기까지 한다. 그러나 히틀러가 군사적인 능력이 전무했다고는 볼 수 없는 것이 제2차 세계 대전 초기에 승승장구했던 것과 독소전 초기 여러가지 승리들에 히틀러의 영향이 상당했으며 또한 히틀러의 몰락 이후 독일 군부는 패전에 대한 책임을 회피하기 위해 히틀러에게 모든 책임을 뒤집어 씌웠다는 점도 부정할 수 없다.
그리고 정치 지도자가 군사 부문의 전문가일 수는 없다는 점을 기억해야 한다. 일례로 처칠이나 스탈린도 군사적 무능함으로 신나게 말아먹었으며 특히 처칠의 군사적 무능은 히틀러가 유능해보일 지경이다. 단지 스탈린은 늦게나마 정신을 차렸고 처칠은 유능한 참모들이 말려줘서 부각이 덜 되는 것뿐 대전 당시 메이저 열강 중 군사적으로 유능한 정치 지도자는 루스벨트 정도뿐이었다. 그리고 루즈벨트의 유능함은 문민통제가 뿌리 박힌 나라에서 자신의 능력 한계를 비전문가로서 확실하게 인정한 것에서 기인했다. 그는 민주 국가의 민간 정치 지도자에게 걸맞게 유능한 장군들이 맘껏 능력을 펼치게 해주고, 다만 장군들 사이의 관계와, 군부와 민간 정부, 군수 기업 간의 관계를 조율해 주는데 초점을 맞추었기에 총력전 시대의 훌륭한 지도자로 평가 받을 수 있는 것이다.
물론 어떤 면으로 봐도 히틀러의 군사적 능력은 뛰어나지 못한 것이 사실이였기에, 그가 독재자로서 전쟁을 지휘하는 위치에 있기보다는 처음에 자신이 자각했듯이 "독일 민족을 위해 준비된 영웅을 위해 북을 치는 사람"으로서 선동가의 위치에 있었거나, 필요할 때 괜찮은 전술적 아이디어나, 위에서 나왔던 날카로운 감이나 배짱을 통한 제3의 시선을 제시하는 하급 야전사령관으로의 역할이나 혹은 철저하게 상징으로 남으면서 추종자들을 확실하게 장악해 놓고는 전쟁의 구체적인 지휘를 맡겼다면 일이 이 지경이 되지는 않았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독일의 패망은 히틀러의 군사적 무지 때문만이라고 볼 수는 없다. 왜냐하면 나치 독일의 몰락은 독일군 자체의 한계점이 있던 것도 있지만[27] 무엇보다도 빈약한 자원을 가지고 재무장을 추진하면서 국민들에게 경제적 풍요를 안겨주겠다는 히틀러의 체제가 결국 전쟁으로 다른 나라의 부를 약탈할 수 밖에 없었기 때문에 나치 독일이 끝없는 침략 전쟁의 늪에 빠져 전선이 넓어지고 수많은 적들을 상대하는데 독일의 모든 힘을 소진시킨 것을 나치 독일의 몰락을 가져온 근본적인 원인으로 보아야 한다. 즉, 나치 독일의 몰락은 히틀러가 침략 전쟁을 진두지휘하여 독일을 끝없는 전쟁의 늪에 빠뜨린 것이 주된 요인이지만 이 침략 전쟁을 지지한 독일 군부와 시민들에게도 나치 독일이 몰락한 것에 대한 책임이 있다는 것이다.
한편 나치 체제는 전쟁을 치르면서 동시에 독일의 행정도 관리해야 하는 상황이 되어 효율적인 시스템이 필요했으나 나치 지도부가 지리멸렬한 상태였던 것도 갈수록 나치 독일의 상황이 엉망이 되고 나치 독일이 빠르게 몰락한 원인 중 하나로 꼽힌다. 전후 알베르트 슈페어는 히틀러의 몰락을 히틀러의 예술가적 능력이 전쟁이 요구하는 격무로 인해 무뎌졌기 때문이라고 주장했다. 즉, 여유롭고 자유로운 생활상에서 나오는 위기상황을 기가막히게 빠져나가고 세계를 경악시킨 성과들을 연이어 성취한 히틀러의 직관이 일에만 집착하고 쉬지는 못하면서 재미도 없는 똑같은 얼굴의 보좌진에 둘러싸여 지내는 격무로 인해 무뎌지고, 스트레스가 쌓이면서 남의 말을 듣지 않고 망하는 것이 뻔한 길만을 고집했다는 것이 슈페어의 진단이다.
실제로 히틀러가 전쟁을 치르느라 전쟁 전의 느긋한 모습이 사라진 것은 사실이다. 웅장한 건축 사업에 몰두하고 음악과 오페라, 영화를 보고 들으며 느긋하게 게으름을 피던 모습은 사라지고 빽빽한 일과에 쫒겨 늘 군사 전술을 짜는 데만 신경을 썼지 전쟁 수행과 무관한 일을 할 시간은 없었다. 독소전쟁 이후 히틀러는 밤에는 스트레스와 여러가지 병 때문에 잠을 못자고 아침 늦게 일어나 하루종일 긴장된 상태에서 낮과 초저녁에 장군들과 작전을 짜는데 온 힘을 소진했다. 식사는 다른 사람들과는 어울리지 않고 혼자 부실하게 먹었으며, 운동도 하지 않고 셰퍼드 블론디를 데리고 잠깐 산책을 하는 것이 전부였고, 똑같은 환경에 똑같은 보좌진들만 보는 생활의 반복이었다. 이렇게 매일을 보내니 건강이 나빠지는 것은 당연했고 차분하고 합리적으로 성찰을 하기도 어려웠으며, 격무로 인해 생각이나 행동도 마비 상태에서 벗어나지 못했다.
히틀러는 전쟁을 치르면서 하루가 다르게 몸이 망가지고 늙어갔다. 한때 히틀러는 주변 사람들에게 에너지가 넘치는 사람으로 보여졌지만 1944년이 되면 머리카락이 셌고 눈을 충혈되었으며 왼팔을 덜덜 떨면서 잘 가누지 못하는가 하면 걸음걸이도 구부정해졌다. 1941년도에 심전도를 검사해보니 심장이 망가지고 있었으며, 원래부터 안 좋았던 위와 장은 갈수록 상태가 나빠졌다. 1942년부터는 파킨슨병 증세가 보이더니 1944년에는 눈에 띄게 두드러져서 파킨슨병 발병을 거의 확신할 수 있었다. 왼팔을 갈수록 심하게 떨었고 왼쪽 다리도 경련이 일어나 발을 질질 끌면서 힘들게 걸었다. 그럼에도 몸져누운 적은 없었지만 그건 테오도어 모렐이 주사한 알약과 주사약 때문이였다, 전쟁 동안 히틀러는 총 90가지의 약을 복용했고 하루에 28개까지 알약을 먹었다.[28] 이러한 상황에 전황까지 나빠지면서 히틀러가 판단 능력을 잃어버렸기에 주변사람들의 말을 듣지 않고 신경질적인 반응만 보이다가 나치 독일이 몰락했다는 것이다.
히틀러가 즉흥성을 좋아하는 천성이었지만 어울리지 않는 격무로 인한 부담감 때문에 "비범한 재능"을 잃었다는 주장은 일견 일리가 있어보이나 이 주장은 독일의 운명을 히틀러라는 "악마 같은" 개인의 문제로 몰아가는 현실을 호도하는 주장이다. 히틀러가 살인적인 격무에 시달리게 된 것은 우연이 아니다. 그것은 히틀러의 체제가 가진 극단적으로 개인화된 통치방식 때문에 모든 권력을 히틀러가 가졌기 때문에 필연적으로 생기게 된 일이였다. 윈스턴 처칠, 프랭클린 D. 루스벨트 같은 다른 국가의 지도자들, 심지어 독재 국가인 소련의 이오시프 스탈린조차도 히틀러만큼 권한을 독점하지는 않았고 군사문제를 일일이 챙기느라 시간을 보내지도 않았다. 독일에서 통치 구조가 급격하게 허물어진 이유는 패전의 기색이 짙어졌음에도 감히 히틀러에게 대들려거나 넘어서려는 조직은 전무했으며 내각이 허수아비가 되면서 전체를 조율하는 기구가 없어진 상황이 되다보니 군사 문제든 국내 문제든 모든 사안을 히틀러가 허가해야만 하는 상황이 되어버렸지만 모든 문제를 히틀러가 혼자서 처리하는 것이 사실상 불가능했다는 점에 있다.
즉, 나치 지도부는 제2차 세계 대전을 치르면서 수많은 문제를 처리해야 하는 상황이었기에 효율적인 체제가 필요했음에도 히틀러가 권력에 대한 집착이 강하다보니 모든 의사결정권을 틀어쥐고 모든 사안을 혼자서 결정하면서 국가를 운영했지만 히틀러보다 능력이 훌륭한 사람이라도 세계대전을 치르면서 행정 문제를 혼자서 감당하기는 불가능했다는 것이 히틀러의 체제가 엉망이 된 원인이라 볼 수 있다. 이런 상황이다 보니 히틀러는 전쟁의 세부적인 사안에까지 끼어들었지만 원래 군사적인 안목이 떨어졌고 전략적인 면에서도 근시안적인 시각밖에 가지지 못했던 데다가, 격무로 인해 생각이나 행동이 마비 상태에서 벗어나지 못했기에 실패를 거듭했다.
게다가 히틀러는 원래 행정에 무관심한 지도자였기에 국내 문제를 등한시하여 독일 내부의 문제들을 그냥 방치하거나 관심을 가진 몇몇 사안들조차 즉흥적으로 결정하고 끝내는 상황이 반복되었다. 그러면서도 본인의 권력을 끝까지 분산하지 않았기 때문에 독일의 행정은 완전히 엉망진창이 되었고 이로 인해 독일의 모든 시스템이 허물어지는 문제가 발생한 것이다.
이처럼 나치 독일의 몰락은 히틀러의 체제가 끝없는 전쟁을 치르면서 국가의 모든 힘을 전쟁에 쏟았던 것과, 전쟁을 치르면서 국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는 효율적인 체제가 필요했음에도 히틀러의 체제가 극단화된 개인적 통치로 인해 정상적으로 굴러가지 않았던 점이 가장 크다. 그러나 히틀러와 나치 독일의 몰락을 더욱 가속화시키고 처참한 결과로 이어진 가장 큰 이유는 히틀러가 제2차 세계 대전 중반까지 연이은 승리를 얻음으로써 생긴 그의 교만 때문이었다.
이언 커쇼는 히틀러가 1930년대의 잇다른 외교 승리와 1941년까지 전쟁 지도자로서 빛을 발한 것은 알베르트 슈페어가 말했던 예술가의 재능 덕분이 아니라 적의 약점과 분열을 이용하는 정확한 솜씨가 있었고 때를 보아 전광석화처럼 밀어붙이는 능력이 뛰어나서였다고 주장했다. 한마디로 도박판에서 판돈을 크게 걸고 약한 상대를 몰아붙이는 도박사 본능이 뛰어났기 때문이라는 것. 그래서 주도권을 쥐고 있는 동안 그런 공격 본능이 효과가 있었지만 도박에 실패하고 질질 끄는 장기전에서 점점 상황이 불리해지고 절망적이 되자 히틀러의 도박사 능력은 효과를 잃고 오히려 독재가 가진 구조적인 허약함이 점점 드러나기 시작함으로써 문제가 시작되었다고 본다.
히틀러의 몰락의 주요 원인은 자신의 측근과 휘하 장성들에 대한 불신도 있었지만 히틀러의 자기 중심적인 성격이 화를 자초했다. 특히 히틀러는 계속된 승리를 통해[29] 주변에 능력 있고 믿을 만한 인간은 하나도 없고 오직 자신만이 승리를 가져올 수 있다는 망상에 빠져들었고 이로 인해 자기만 옳다라는 고집을 부리면서 자신에게 반대하는 사람들에게 걸핏하면 화를 내는 히스테리적인 성격으로 변해갔다. 대표적인 사건이 바로 1941년 모스크바 전투의 패배 이후 군대 작전 지휘권을 접수한 것으로 히틀러의 이런 증세를 잘 보여준다.
이렇게 측근들의 의견을 무시하고 자신의 고집을 계속 관철시키려 하다 보니 장군들과 고함을 지르며 다투는 일이 잦아졌으며 자신의 명령을 따르지 않는 장군들에게 불같이 화를 내는 상황이 반복되었을 뿐만 아니라, 스탈린그라드 전투에서의 패배와 바그라티온 작전과 같은 군사적 실책들을 연이어 일어나게 만들었다. 이러한 일이 계속 누적되면서 상황은 이미 돌이킬 수 없는 지경에 이르렀고 1944년 정도 되면 하나하나의 군사 위기가 차곡차곡 쌓여 도저히 전세는 뒤집을 수 없는 지경에 이르렀다. 물론 나치 지도자들도 다른 대안들을 생각해보지 않은 것은 아니었기에 파울 요제프 괴벨스, 요아힘 폰 리벤트로프, 헤르만 괴링, 하인리히 힘러 등 히틀러의 측근들도 소련이나 서방 연합국과 휴전하는 것이 어떻느냐고 히틀러에게 제안했지만 히틀러는 이 모든 주장을 일축했다. 상황이 이 지경이었음에도 히틀러는 협상에 나서지 않은 이유는 히틀러는 협상을 할 때 자기가 유리한 위치에 있을 때뿐이어야 한다는 것이 그 이유였다. 집권 초반에 던진 과감한 승부수들이 잇달아 성공을 거둔 것도 그 때문이었는데, 이제는 전세가 불리해졌으니 평화 교섭에 나선다는 것은 있을 수 없다고 말하면서 상황이 불리해질수록 " 의지"만 있으면 아무리 병력과 무기에서 열세라 하더라도 어떤 역경이든 이겨낼 수 있다는 고집만 부렸다.
이처럼 히틀러가 역경을 이겨내려면 의지가 필요하다고 말하는 동안 독일의 모든 국민들을 죽거나 고통을 겪고 있었다. 장군들은 전술적 후퇴를 건의했고 점령한 지역을 포기하더라도 병력을 빼내 중요한 전선에 배치시켜야 한다고 줄기차게 주장했지만, 히틀러는 절대로 양보하지 않았고 장군들과의 갈등은 날이 갈수록 심해졌다. 어떤 군사 논리도 히틀러의 고집 앞에서는 속수무책이었다.
히틀러는 그동안 자신의 모든 승부수들이 성공했으므로 자신의 판단이나 전략, 지도력에는 아무런 문제가 없다는 극도의 오만함에 빠졌고, 이 때문에 자기 능력을 턱없이 과대평가하고 좀 더 신중할 필요가 있다며 합리적인 조언을 한 집단의 의견을 깔아뭉갰다. 아울러 후퇴는 물론이고 타협을 하는 것도 나약함을 드러내는 것이라고 극구 반대했으며, 일이 잘못되면 장군들이 자신의 계획을 제대로 실행하지 못했다고 생각하거나 자신의 계획에 반대하는 장군들 때문에 실패했다고 판단하여 지휘관들에게 작전 실패의 책임을 묻고 성질을 부리는 성격이 되어버렸다. 히틀러의 군부에 대한 강한 불신감은 히틀러 암살 미수 사건 이후 편집증적인 수준으로 발전했고 목숨을 건진 것을 오직 자기만이 독일을 승리로 이끌 수 있는 운명의 인간이라는 그의 확신을 더욱 굳히는 결과만을 낳았다.
이러한 이유로 군사적 근거나 전략적 근거를 놓고 히틀러와 토론하는 것은 하나마나였다. 오히려 '배반을 일삼는 있으나 마나 한' 장군들에 대한 히틀러의 분노만 커질 뿐이었다. 독일 장군들은 모스크바 전투 이후 히틀러의 명령을 거부하고 후퇴하거나 전략을 정하는 일로 히틀러와 다투는 일이 잦아졌고 당연히 군부에 대한 히틀러의 분노는 커져만 갔다. 그러나 독일 군부의 여론은 히틀러에게 불만을 가지거나 이견을 제시하는 정도가 아니라 히틀러의 명령을 무시해도 된다는 분위기였으며, 군 내의 반히틀러 비밀조직에는 군의 고위직 인사들이 포함되어 있었고, 이들은 히틀러의 암살을 수십 차례나 시도할 정도로 히틀러에 대한 적대감이 강했다. 물론 히틀러도 자신에 대한 군부 내의 평판이 나쁜 편이며 군 내의 반항 세력이 있다는 것을 짐작은 하고 있었으나 정확한 실체는 알지 못했던 상태였었다.
그러나 히틀러 암살 미수 사건 이후 군부가 자신의 명령을 거부하는 정도가 아니라 자신을 해치려 하는 반역자들이었다는 히틀러의 의심은 확신으로 변했다. 이후 히틀러는 군부가 전쟁 내내 자신의 발목을 잡았으며, 전황이 불리해지는 이유가 장군들 때문이며 이들은 독일 제국을 몰락시킨 "11월의 범죄자들"과 비슷하다고 판단했다. 히틀러의 의지만 있다면 병력과 장비가 부족하더라도 문제없다는 생각 때문에 수많은 병사들이 희생되었으나 히틀러는 자신은 오류를 범하지 않는다는 생각에 빠져 병사 개인의 죽음은 그들의 나약함 때문이며, 병사 개인의 죽음은 민족의 생존을 위한 투쟁에서는 의미가 없다고 주장했다. 또한 동부전선의 전황이 급격하게 악화되기 시작하자 히틀러는 언제나 그랬듯이 책임을 전가할 희생양을 찾았다. 그런 상황에서 누가 희생양이 되어야 할지는 자명했다. 바로 독일 민족이었다.
히틀러는 "그렇게 무너지는 것은 결국 민족이 약해서 일어나는 일이다." "독일 민족이 약한 것으로 판명되면 더 강한 민족에게 절멸당할 수밖에 없다. 동정은 필요 없다."고 말했다. 즉 히틀러는 전쟁에서 패배한 이유를 독일은 자신 같은 영웅적 노력을 한 지도자가 있었음에도 적의 압도적인 무력을 막아내지 못한 것은 독일인은 약하기 때문이라며 독일인은 결국 약한 것으로 드러났으며 자신의 요구에 부응하지 못했다는 것이 히틀러의 생각이었다. 한 장군에게 말한 대로 독일 국민은 자기 같은 지도자를 가질 자격이 없었다. 심지어 전쟁 막판에는 독일인들은 살 가치가 없다면서 독일의 모든 기반시설까지 파괴하려고 시도했을 정도였다.
이런 히틀러의 오만함 외에도 히틀러가 협상에 나설 수 없었던 것에는 다른 이유도 있었다. 단지 나치 독일이 인류에게 저지른 천인공노할 만행 때문만이 아니라 히틀러의 뒤틀린 생각과 성격 자체가 그 이유기도 했다. 제1차 세계 대전 당시 독일에서 일어난 배신 때문에 독일이 패전했다고 믿었던 히틀러는 반역과 배신이라면 치를 떨었으며 독일이 패전하면서 얻게 된 민족적 수모를 씻어내는 것을 필생의 사명으로 생각하게 되었다. 이런 생각을 가지고 정치에 입문한 히틀러는 1918년이 되풀이되는 것을 막고 비겁하게 항복하여 외세한테 무기력하게 휘둘리는 것을 막기 위해 모든 것을 걸었다. 이러한 확고한 생각이 있었기에 전쟁의 패색이 짙어진 상황에서도 바그너의 가극처럼 웅장하고 장렬한 투쟁으로 가득 찬 히틀러의 사전에 1918년의 수치스러운 항복은 있을 수 없었다. 물론 히틀러도 항복하지 않는다면 독일은 완전히 파괴될 수밖에 없다는 것을 모르지는 않았다.
그러나 히틀러는 승리는 독일 민족의 생존을 보장할 것이지만 패전은 완전한 소멸 즉, 독일 민족의 멸망이라는 이원론에 사로잡혀 있었다. 이 때문에 히틀러는 독일이 패전하게 된다면 제1차 세계 대전에서 패전한 뒤 맺은 베르사유 조약에 휘둘리는 정도가 아니라 독일 민족 전체가 절멸될 것이며 독일이 공중분해될 것이라는 생각에 차 있었다. 따라서 승리를 얻지 못한다면 독일 민족이 완전히 절멸될 것이라 생각했던 히틀러는 자신이 독일 국민에게 희생을 강요할 권리가 있다고 생각했고 독일이 초토화되는 한이 있더라도 굴복은 없으며, 오로지 끝까지 싸워 지금이 아니면 후세에라도 그 장렬한 영웅담을 인정받고 역사에 이름을 남긴다면 결사 항전은 가치가 있다고 생각한 것이다.
독일이 수세에 몰리는 상황에서도 히틀러의 흔들림 없는 자세는 화석처럼 단단했고, 말투도 달라지지 않았다. 잇달아 고배를 마신 것은 배신과 무능, 명령 불복종, 그리고 무엇보다도 나약함의 탓이었다. 자신의 오류나 오판은 단 한 가지도 인정하지 않았다. '항복은 없다', '굴복도 없다', '후퇴도 없다', '1918년은 되풀이되지 않는다', '아무리 승산이 희박해도 어떤 희생이 따르더라도 버틴다' 이것은 히틀러의 메세지였다. 그렇게 힘껏 버티면 결국 형세가 바뀌어서 독일이 승리하는 날이 온다는 굳은 믿음이었다. 속마음은 달랐을지도 모르고 잠 못 드는 밤에는 우울한 기분에 빠져들기도 했을 테지만 이것은 이성이 아니라 맹신이라고나 해야 할 불변의 믿음이였다. 이런 내면의 확신이 있었기에 군 지도자들과 격렬하게 부딪쳤고, 패색이 짙어지던 상황에서도 꿋꿋하게 버텨나갈 수 있었다. 하지만 상상을 뛰어넘는 자기 기만 없이는 그런 낙천주의는 불가능했다. 때문에 히틀러는 시간이 흐를수록 환상 속의 세계에서 살면서 기적을 포기하지 않았다.
히틀러는 이 전쟁의 결과가 명예로운 승리로 이어지든 아니면 희생적 자기 파멸로 이어지든 위엄을 지키려면 벙커에 끝까지 남아야 했다. 군인과 민간인이 과연 이대로 끝까지 살육당해야 하는가에 대한 의문은 히틀러에게 떠오르지 않았다. 이처럼 히틀러의 정치 역정에는 "1918년의 반복은 없다. 등에 칼에 맞는 일은 없다. 항복은 없다."라는 생각이 깔려 있었기에 패전의 기색이 짙어진 이후에도 히틀러는 목숨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역사 속에서 자신의 자리를 차지하기 위한 싸움이 더 중요했다. 전쟁 막판 히틀러에게 남은 것은 나약함과 배신으로 끌어내려진 '인류 역사상 최악의 독재자'라는 역사에 남겨진 자리뿐이었다.
알려진 것과 다르게 현실인식이 떨어지는 편이 아니었던 히틀러는 전쟁 막판에 이미 전쟁에서 졌다라는 것을 잘 알고 있었지만 동시에 어떤 형식이 되었건 휴전 협상에 가장 큰 걸림돌이 본인이라는 것을 너무나도 잘 알았다. 설령 평화 협상이 이루어지더라도, 전쟁에서 완패를 해도 히틀러는 어차피 죽은 목숨이었다. 히틀러 개인으로서는 이렇게 되나 저렇게 되나 마찬가지인 상황이다 보니 자기 자신과 나치 정권, 독일 시민들의 파멸을 불러올 것이 뻔했어도 항복은 있을 수 없다는 고집을 부린 것이다.[30] 이처럼 히틀러의 절대권력이 조금도 줄어들지 않은 상태에서 항복이나 협상을 전부 거부하다 보니 히틀러가 살아 있는 한 독일은 완전히 파괴될 수밖에 없었고 전쟁은 계속될 수 밖에 없었다.
지도자 숭배와 히틀러의 연이은 승리로 인해 모든 결정은 히틀러가 하는 것이고 히틀러의 결정은 반드시 관철되어야 한다는 것을 사람들은 당연하게 받아들였다. 원래 히틀러는 자기 생각에서 벗어나거나 상충되는 조언에 귀를 기울이거나 장단점을 따져보고서 결론을 내리는 스타일이 아니었다. 하룻밤 생각해보고 이거다 싶으면 사람들에게 들이밀고서 박수가 쏟아지기만을 기다렸다. 아니면 마냥 독백을 하면서 궁리를 하다가 자기 확신에 이르곤 했다. 히틀러 혼자서 결정을 내리다 보니 일관성, 투명성, 합리성이 부족했다. 우왕좌왕하다가 급조되었다는 것, 금세 바뀐다는 것, 두루뭉술하다는 것이 히틀러가 내린 결정의 특징이었다. 히틀러는 자기 성질대로 살았고, 주변 사람들도 그 사실을 알았다. 폴란드 침공 직전 히틀러가 비타협적인 자세를 고수한 것도 뮌헨 협정을 체결한 것은 패배나 다름없다고 생각했기 때문이었다. 1939년 8월 29일 괴링이 "꼭 끝장을 볼 필요는 없지 않느냐"고 말했을 때 히틀러가 "나는 일평생 언제나 끝장을 보았다."고 말한 것은 히틀러의 기질을 명확하게 드러낸다. 그에게는 다른 길이 없었다.[31]
히틀러의 이분법적인 독단, 타협이나 양보를 모르는 원칙주의는 약하고 분열되고 우유부단한 적과 싸우는 동안에는 잘 먹혀들었고 그의 정치적 성공을 이루는 데 도움이 되었다. 그러나 적이 강하고 하나로 뭉쳐 있을 때, 주도권을 잃어버렸을 때는 교섭력이 약해질 수밖에 없었고, 그럴 때는 유연한 군사전술과 섬세한 정치능력이 필요했다. 그러나 히틀러는 정치에 입문한 뒤 협상을 통한 해결을 한 번도 하지 않는 성격으로 1921년 당권을 쟁취했을 때, 1923년 틀어진 쿠테타를 밀어붙였을 때, 1932년 그레고어 슈트라서의 도전을 받았을 때 등 절대 권력을 쟁취하는 과정에서 위기에 부딪쳤을 때마다 드러난 히틀러의 기질은 자기 고집대로 하지 못하느니 차라리 자멸도 불사하겠다는 쪽이었다. 그레고어 슈트라서 사태 당시 당이 분열될 조짐이 보이자 히틀러는 당원들 앞에서 "만약 당이 쪼개진다면, 나는 차라리 자살하겠다."라 말하며 자살쇼를 감행했는데, 이 때 히틀러의 협박은 연기일 수도 있었고 그의 극단적인 히스테리가 드러난 상황일 수도 있다. 그렇지만 이 사건으로 알 수 있는 것은 히틀러의 성격이 인생을 투쟁으로 보는 철학, 모든 갈등 요소를 무조건 '흑'과 '백'으로, '이것 아니면 저것'으로만 몰아가는 버릇, 모든 문제를 급진적으로 풀어 가는 천성이라는 것이다. 이러한 성격 때문에 제2차 세계 대전에서 패색이 짙어지고 수많은 독일인들이 죽어가는 상황에서도 후퇴나 타협은 애당초 불가능했고 자기 의지를 관철하지 못하면 자폭하겠다는 협박 말고는 내놓을 수 있는 대안이 없었던 것이다.
독일을 무모한 도박으로 끌고 갔으며, 과감성과 잔인성, 주도권 장악에서 나오는 비타협성으로 거둔 연전연승으로 세계를 경악시킨 "전부 아니면 전무"라는 투쟁 원칙 위에 수립된 지도력은 궁지에 몰렸다고 해서 외교적 해법을 찾거나 즐기는 지도력은 아니었다. 결국 히틀러의 '전부 아니면 전무'라는 이분법적이고 비타협적인 태도와 이전까지 얻은 연이은 승리들로 생긴 오만은 히틀러 스스로의 몰락과 제국의 멸망을 더욱 가속화시켰으며 패전의 기색이 역력했음에도 항복을 거부하고 결사항전함으로써 독일이 초토화되는 결과로 이어졌다.
6. 현재와 이후의 역사적 평가
유럽 문명은 일찍이 그런 재앙을 겪은 적이 없으며 그 후유증에서 언제쯤이나 조금이라도 벗어나기 시작할지 아무도 장담할 수가 없다.
맨체스터 가디언 1945년 5월 2일
맨체스터 가디언 1945년 5월 2일
아돌프 히틀러는 20세기를 격변시킨 가장 위대한 운동가인지도 모른다. 히틀러만큼 우리 시대 무수한 사람들의 목숨을 좌지우지하고 수많은 증오심을 유발시킨 사람도 없다. 그는 많은 사람들한테 흠모의 정을 불러일으켰으며 수백만 명의 희망과 이상이 되기도 했다. 죽은 지 30년 이상이 되었는데도 적이나 진정한 추종자들의 견해는 바뀌지 않았다. .... 아직도 충실한 극소수에게 그는 영웅이자 좌절한 구세주이다. 그러나 나머지 대다수에게는 여전히 미친 사람, 정치적 군사적으로 실패한 사람이고 범죄적 수단으로 성공가도를 달렸던 용서받지 못할 사악한 살인마이다.
아돌프 히틀러 결정판 1 서문 9페이지
아돌프 히틀러 결정판 1 서문 9페이지
히틀러와 제3제국에 대한 자료는 수준도 높고 양 또한 풍부하다. 역사가 이언 커쇼가 조사한 바에 따르면 1985년 기준으로 1500편이 넘는 연구서가 나왔으며, 논문도 12만 편이 넘어갈 정도로 많았다. 그러나 히틀러를 총체적으로 진지하게 다룬 전기는 손에 꼽을 정도며 히틀러를 보는 시각도 천차만별이다. 1920년대 히틀러가 역사에 등장한 이후 히틀러를 보는 사람들의 시각은 제각각이었다. 히틀러를 "인총철학을 내세웠지만 지배욕과 복수심으로 가득 찬 파괴욕에 가득찬 인물이자 자신의 권력을 연장해야겠다는 기회주의자"로 보는 시각. "독일 국민을 홀려 혼란을 부채질하는 정치적 모사꾼"으로 보는 시각과 히틀러를 "독일의 운명을 담은 신비로운 인물" 또는 "악령 같은 인물"로 보는 시각도 있었다. 또 다른 시각에서는 단순히 "히틀러는 대기업과 대자본가의 사주를 받고 그들의 이익을 대변하는 꼭두각시에 불과하다"는 시각도 있었으며 히틀러를 그냥 단순히 "말만 많은 미치광이"라 말하는 사람도 있을 정도로 히틀러에 대한 시각은 현재까지도 엇갈리고 있다.
독일의 역사가 에른스트 놀테(Ernst Nolte)는 히틀러를 블라디미르 레닌이나 이오시프 스탈린과 똑같은 독재자로 평가했다. 즉, 계급을 철폐하자며 학살을 자행한 볼셰비즘에 증오심을 가진 히틀러가 볼셰비즘을 타도하자는 명분으로 인종 학살을 저지른 지도자로 평가한 것이다. 물론 이 의도는 히틀러는 물론 악독했지만 스탈린보다는 덜 악독했다는 것을 강조한 것으로 진짜 악당은 스탈린이었고 이에 비하면 히틀러는 아류였을 뿐이라는 논리다. 결국 나치가 저지른 인종학살의 원조는 소련이 자행한 계급학살이라는 것이다.
한편 역사가 라이너 치텔만(Rainer Zitelmann)은 히틀러가 사회에 활력을 불어넣고 노동자에게 더 좋은 집을 지어주고 산업을 현대화했으며 복지 제도를 확립하고 과거의 반동적 특권을 없애는데 관심이 많았던 정치인일 뿐이라고 평가했다. 물론 잔인한 방법들을 동원한 것은 사실이지만, 이는 더 좋고 더 발전한 계급에 의해 좌우되지 않는 독일 사회를 건설하기 위한 행동이었다는 것이다. 즉, 히틀러는 아무리 유대인을 악마로 몰아세우고 세계를 지배하기 위해 승산이 희박하고 무모한 전쟁에 뛰어들었지만 "지금까지 알려진 것보다 훨씬 합리적으로 생각하고 행동했던 정치인"이었다는 것이다. 더 나아가 베르너 쉬스는 히틀러가 원했던 것은 "독일의 현대화"였다 말하며 "히틀러가 비록 악독하기는 했지만 독일 사회를 위해서는 선한 의도를 가졌던 사람이며 적어도 긍정적으로 받아들일 수 있는 생각을 지녔던 사람"이라 주장했다,
이언 커쇼의 히틀러 전기 출판 전 대표적인 히틀러 전기로 평가받는 “히틀러 평전“을 서술한 요하임 c. 페스트는 이러한 변명을 넘어서 히틀러 복권의 분위기를 풍기는 주장까지 했다. 즉 히틀러가 아무리 인류를 상대로 천인공노할 만행을 저질렀다고는 하지만 히틀러는 20세기가 낳은 위대한 지도자이고 특히 만약 그가 전쟁이 일어나기 전에 죽었다면 독일 민족의 영웅으로 추앙 받아 마땅한 위대한 인물이었다는 것이다.
물론 히틀러가 정치적 매력과 영향력은 엄청났지만 히틀러라는 사람 자체는 고상한 맛도 없고, 위로 고양시키거나, 풍요로운 맛도 없는 인물이었다는 점을 부정하지는 않고 위대함을 재정의하는 방법을 사용하는 관점이다. 즉, 히틀러가 전통적인 시각에서 위대한 인물이 아니라는 문제를 비켜가는 것은 히틀러에게 "그늘진 위대성"이 있다고 주장하는 것이다. 그늘진 위대성이란 히틀러가 고귀한 위대성을 가지고 있지는 않지만 "그가 역사에 가한 충격은 설령 그것이 아무리 파국을 초래했다고 하더라도 어마어마하게 컸다는 것이다."는 주장으로, 히틀러의 위대성은 히틀러 시대에 일어난 일은 아무리 세세하게 따지고 들어가도 어느 모로 보나 히틀러가 없었다면 상상도 할 수 없었다는 점이라는 사실에서 찾을 수 있다는 주장이다. 페스트가 주장한 그늘진 위대성이라는 말에는 히틀러가 엄청난 노력을 하고 놀라운 업적을 쌓았지만 결국 모든 것이 물거품이 되었고 민족의 영광이 민족의 재앙으로 바뀌었다는 뜻으로 해석할 수 있으며, 이는 히틀러의 복권이라는 뉘앙스가 밴 주장이라 볼 수 있다. 이러한 맥락에서 히틀러와 나폴레옹은 유사한 인물로 볼 수도 있다. 보잘 것 없는 집안에서 태어났던 무명의 인물이 갑자기 한 국가의 절대 권력자가 되었으며, 군사력을 바탕으로 전 유럽을 사실상 지배하여 전 세계를 호령하는 엄청난 인물이였지만, 영국과 대치하던 중 러시아 원정에 나섰다가 패배하여 몰락한 이후 그동안 이루었던 업적들이 평가절하되었다는 점에서 매우 유사한 인물이라는 것이다.
그러나 역사가 이언 커쇼는 이러한 주장들을 전부 쓸모 없는 주장이라고 평가했다. 그에 따르면 이러한 주장들은 사태를 호도할 가능성이 높으며 알맹이가 없는 무익하고 뜬구름을 잡는 변명조의 주장이라는 것이다. 히틀러를 재평가하려는 주장들의 문제점은 그 주장이 평가자 개인의 주관적 가치를 바탕으로 한 주장이기 때문에 구체성이 결여된 철학적•윤리적 개념이라고 지적했다. 또한 뜬구름을 잡는 주장이라고 말한 이유는 히틀러의 위대성에 동의하든 동의하지 않든 제3제국이 저질렀던 반인륜적인 범죄들을 역사적 인물의 위대성으로는 설명할 수 없다는 한계점이 있기 때문이며, 변명조의 주장이라는 이유는 히틀러에게 위대성을 찾으려는 질문을 던지는 것만으로도 히틀러의 악행이 흐려지고 그의 위대성만을 부각시키는 효과를 가져오기 때문이며, 히틀러의 통치를 지지하고 그의 지시에 복종했던 독일인들을 사실상 위인의 들러리 역할로 축소시켜 역사를 극단적으로 개인화시키고 독일인들의 책임을 희석시키는 문제가 있기 때문이라고 주장했다.
한편 커쇼는 히틀러는 나폴레옹처럼 몰락한 후 업적이 평가절하된 역사적 위인으로 볼 수 없다고 말한다. 나폴레옹은 히틀러와 달리 프랑스를 파괴하지는 않았으며 행정적인 분야에서의 업적이 상당하다고 평가받기 때문이다. 실제로 프랑스를 아우르는 행정망과 교육제도, 법전이라는 나폴레옹의 3대 유산은 현재까지도 건재하다. 그것만으로도 나폴레옹은 역사상 가장 위대한 지도자의 하나라는 평을 받는다. 최소한 오늘날 나폴레옹을 히틀러와 동급으로 도덕적으로 비난하는 사람은 오늘에 와서는 찾아보기 어렵고 현재 프랑스 사람들은 나폴레옹을 자랑스러워하고 우러러본다.[32]
그러나 히틀러는 나폴레옹과 같은 업적이나 유산을 도저히 찾아볼 수가 없다. 히틀러와 나치의 유산은 하나같이 파괴의 유산으로 도덕성은 말할 것도 없고 하다못해 건축물이나 예술품, 정치 구조나 경제 모델에서도 내세울 만한 업적이 도저히 없다. 히틀러의 유산은 대중을 통제하고 동원하기 위한 유례를 찾아볼 수 없는 언론 조작, 지독한 극우 민족주의, 인종 우월주의의 가공할 파괴력, 엉뚱한 목적에 동원된 현대 과학기술과 사회 공학, 특정 민족 전체를 절멸시키려 했던 홀로코스트 등등 인류역사에 하나같이 부정적인 영향만을 미친 것들 밖에 없다. 물론 자동차 산업과 비행기를 비롯한 항공기술의 발전 등이 있던 것은 사실이나 그 발전들이 히틀러 때문에 발전한 것이라고는 볼 수 없다. 당시의 산업 발전은 전쟁으로 인한 특수를 무시할 수 없고 독일만 발전한 것이 아니라 미국을 비롯한 모든 자본주의 국가가 발전했기 때문에 히틀러가 없었어도 독일은 발전했을 것이다. 심지어 그렇게 발전했다고 한들 전쟁기간 동안 무고한 사람들의 희생으로 이루어진 발전이라는 점에서 이 또한 부정적으로 보아야 한다는 시각도 있을 정도다.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나폴레옹과는 달리 히틀러는 인류 문명에 엄청난 도덕적 상처를 남겼다는 것이다. 이 때문에 히틀러가 죽은 지 몇십년이 지났어도 일부 광신도를 제외하고는 히틀러와 나치는 지탄과 경멸의 대상이지 우러러보고 자랑스러워하는 사람은 찾기 어렵다. 이오시프 스탈린, 마오쩌둥, 베니토 무솔리니, 프란시스코 프랑코도 히틀러만큼 비난받지는 않았다.[33][34] 히틀러가 이토록 비난받는 이유는 침략전쟁을 일으켜 수많은 사람들이 목숨을 잃은 것도 있지만, 그 과정에서 우생학과 인종주의에 지나치게 몰두한 나머지 비인간적인 학살을 일으킨 점이 가장 크다. 물론 20세기 초 우생학과 인종주의는 세계적으로 유행했으며, 연합국 내에서도 공공연하게 동양인과 흑인 등 기타 인종보다 백인이 우월하다는 생각이 만연했던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히틀러는 아예 대놓고 한 인종 자체를 유전적으로 열등하다는 이유만으로 태생적인 '존재 가치' 자체를 부정했다는 점에서 그 성격이 전무후무하며 모든 국가기관을 총동원하여 수백만 명을 조직적으로 학살한다는 사실은 전세계에 큰 충격을 주기에 충분했다.[35][36][37]
결국 이언 커쇼는 히틀러를 평가할 때 가장 중요한 것은 "대체 한 국가의 지도자로서는 도저히 어울리지 않는 인물이 어떻게 독일의 절대 권력자가 되었고, 역사에 엄청난 충격을 주었으며, 온 세계를 전율케 했는지를 이해하는 것이 가장 중요하다."고 말하며, 히틀러를 단순히 말만 많은 미치광이 또는 무식한 인물이라 볼 수 없다고 주장했다. 왜냐하면 만약 히틀러가 그런 인물이였다면 복잡하고 현대화된 독일 시민들이 치료를 받아야 할 미치광이에게 홀려 그를 믿고 따르다가 나락으로 떨어졌다는 기괴한 결론에 이르기 때문이며, 히틀러의 정적들이나 각국의 정치인, 외교관들이 히틀러를 과소평가했다가 오히려 거꾸로 당하고 말았던 실책을 반복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렇기 때문에 커쇼는 히틀러가 위인이 아니며 학식이 부족하고 성격과 인격이 특이한 사람이라는 것은 맞다고 평가하면서도 상당한 매력과 카리스마를 가진 정치인으로 평가했다. 즉, 히틀러는 독일을 구해야 한다는 역사적 사명감을 가지고 독일 민족의 부활과 재생을 중심에 둔 세계관을 처음부터 끝까지 밀어붙인 일관성 있는 지도자이며, 비상한 기억력과 정치적 수완, 연설가로서 능력을 갖춘 당시 최고의 엘리트 지식인들을 사로잡을 매력이 있던 정치인이였다는 것이다.
또한 히틀러는 절대 다수 시민들의 지지 속에 집권한 인물은 아니었으며, 히틀러의 집권을 가능케 한 데에는 제1차 세계 대전 패배 이후의 굴욕감, 대공황으로 인한 경제적 파탄, 민주주의를 파괴하고자 한 세력들의 지지 등등의 여러가지 요인들이 있었다. 그러나 히틀러는 합법적인 선거를 통해 당세를 넓히고 상당한 독일 국민들의 지지를 받으며 독일 총리자리에 오른 인물이며, 비록 권력층의 내분으로 인해 총리 자리에 오른 후 폭력적인 방법으로 권력을 굳혔지만 집권 이후 경제적 문제를 해결하고 외교적 성과들을 연이어 성취했으며, 제2차 세계 대전을 일으킨 이후 전 유럽을 정복하는 성과들을 얻으면서 독일 국민들에게 압도적인 지지를 받는 정치인이 되었다. 이처럼 히틀러 집권 이후 굵직굵직한 성과들이 잇다르자[38] 독일 국민들은 히틀러를 비스마르크에 버금가는 정치인이자 민족 지도자로 추앙하면서 히틀러의 권력은 절대권력으로 굳었다. 이러한 이유로 히틀러 체제에서 이루어지는 엄격한 권위주의 체제, 인권 퇴보, 좌파에 대한 가혹한 탄압, 민족 공동체의 일원으로 받아들여지지 않았던 유대인 같은 소수 집단에 대한 차별은 민족이 되살아나기 위해서는[39] 치를 만한 가치 있는 희생으로 보는 사람이 많았고 그것을 오히려 바람직하게 여기는 사람도 적지 않았다.
그러나 히틀러의 독재는 경제 회복, 질서 확립, 강대국이 될 수 있다는 기대감과 자신감을 끌어 올리는 데 기여한 것처럼 보였지만 이런 호시절은 무한정 이어질 수가 없었다. 제3제국은 전쟁으로 치달을 수 밖에 없었고 정상적으로 굴러갈 수 없는 원래부터 지속 불가능한 체제였다. 왜냐하면 빈약한 자원을 가지고 재무장을 추진하면서 국민들에게 경제적 풍요를 안겨주는 것이 불가능했기 때문에 결국 전쟁으로 다른 나라의 부를 약탈하는 것만이 경제적 위기를 해결할 수 있었던 점과 히틀러의 기질이 전쟁으로 가는 것을 부채질했기 때문이다. 일반적으로 독재자는 누구도 넘볼 수 없는 절대 권력을 손에 넣으면 그것만으로 충분하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히틀러에게는 권력을 잡는 것 그 자체가 목표는 아니었다. 히틀러에게는 두 가지 이념적 목표가 있었다. 하나는 독일의 철천지 원수인 유대인을 일망타진하는 것이었고, 또 하나는 유대인을 제거한 여세를 몰아 유럽 대륙을 집어 삼키고 그것을 발판으로 삼아 세계를 정복하는 것이었다.
게다가 히틀러는 원래부터 잠시도 가만히 있지 못하는 성미를 가지고 있었으며, 주도권을 잡기 위해서는 어떤 위험도 감수하는 승부사 기질이 강했는데 이런 성격은 계속된 승리를 통해 자신감이 붙으며 더욱 힘을 받았다. 날이 갈수록 커지던 히틀러의 메시아주의는 대중의 아첨과 주변인의 아부라는 마약을 먹고 자랐다. 거기에 히틀러는 자신이 오래 살지 못할 것 같다고 생각하면서 자꾸만 행동에 나서야 한다는 조바심에 쫓겼으며, 본인이 생각하는 천년왕국은 반드시 오고야 만다는 히틀러의 굳은 믿음은 날이 갈수록 더욱 강해졌다. 히틀러의 성격이 원래 그랬던 데다가 외부 상황까지 유리하게 작용하자 나치 체제의 이념적 활력은 시들어가기는커녕 더울 타올랐고 급진화에도 날이 갈수록 속도가 붙었다. 사실 웬만한 독재자라면 연이은 승리에 만족하면서 적당한 선에서 멈추었을 것이지만 히틀러에게 외교적 승리는 유럽의 패권으로 이어지는 중요한 디딤돌에 불과했다. 이러한 이유로 독일의 급진화는 1937년 말부터 두드러졌고 그로부터 2년 뒤에는 독일과 유럽을 제2차 세계 대전의 참화로 몰아넣었다. 이러한 체제의 문제점에도 제2차 세계 대전 초기에는 정복한 나라들에게 경제적 이권을 뜯어내는 것으로 체제는 유지되는 듯 보였고, 유럽의 패권을 거머쥐고 경제적 풍요를 안겨준 히틀러와 나치 체제에 열광한 독일 국민들은 이 침략 전쟁을 더욱 지지하게 되었으며, 이러한 지지를 바탕으로 히틀러는 오직 전쟁만이 모든 문제들을 해결할 수 있다고 생각하게 되었다. 이러한 이유로 나치 체제는 침략 전쟁을 통해서만 유지되는 체제가 되었고, 히틀러는 계속 침략 전쟁을 벌였으며, 국민들도 히틀러의 침략 전쟁을 지지하면서 나치는 끝없는 전쟁을 치르게 되었다. 그러나 이러한 끝없는 전쟁은 필연적으로 수많은 적들을 만들어 낼 수 밖에 없었고, 독일은 끝없는 전쟁을 벌인 끝에 결국 모든 힘을 잃고 몰락하게 된 것이다.
한편 절대권력을 가진 아돌프 히틀러는 자신의 사상을 집요하게 추구하면서도 구체성이 떨어지고 지속성이 결여된 인물이었으며 행정에 무관심한 지도자였기 때문에 독일에서 나치즘의 가장 큰 특징인 ‘누적적 급진화’가 이루어질 수 있었다. 한마디로 히틀러는 추상적으로는 장애인과 유대주의, 볼셰비즘에 강한 반감을 드러냈지만 그런 적개심을 막연하게만 드러냈다. 하지만 강력한 카리스마와 절대 권력이 있었기에 아래 사람들이 지도자의 뜻을 헤아리고 거기에 부응하게 되었고, 히틀러가 분명한 지침을 내리지 않으니까 아래 사람들은 절대권력을 쥔 히틀러의 눈에 들기 위해 더더욱 경쟁적으로 과격한 정책을 밀어붙인 결과 나치 독일은 극단적인 야만으로 치닫게 되어 T4 프로그램과 독소전쟁 당시의 학살, 홀로코스트와 같은 범죄들이 일어나게 된 것이다.
결국 히틀러가 일으킨 제2차 세계 대전과 나치가 저지른 반인륜 범죄들은 히틀러를 믿고 따르면서 침략 전쟁을 지지하고, 정권의 악행을 집행하고 묵인한 히틀러의 측근들뿐만이 아니라 히틀러를 지지한 독일 국민들 또한 이 끔찍한 일에 대한 책임에서 자유로울 수 없다는 것이다. 그러나 히틀러가 죽고 난 이후 히틀러 다음으로 이 끔찍한 전쟁에 대한 책임을 져야 할 사람 중 상당수는 제대로 된 처벌을 받지 않았다. 반인륜 범죄에 가담한 사람들 중 다수는 가벼운 처벌을 받았고 전후에 출세한 사람도 있었다. 히틀러 밑에서 자신이 한 일을 해명해야 할 사람들 중 죄책감을 느끼기는커녕 후회하거나 뉘우치는 사람은 많지 않았다. 물론 예외도 있었지만 대다수는 나치 독일이 극단적인 야만으로 치달았고 나치가 저질렀던 반인륜 범죄들이 자신이 거들었기 때문이었다는 사실을 인정하지 못했다. 그것은 거짓말과 왜곡, 변명이라기보다는 자신이 저지른 행동에 책임지는 것을 꺼리는 심리적 장벽 때문이었다. 그 장벽은 자신들의 가치가 완전히 무너져 내렸다는 사실이었다.
그들의 이러한 태도는 자신들이 매달렸고 일을 벌일 때 힘이 되었고 명분이 되어주었던 히틀러의 우상화된 이미지가 깨져버렸다는 사실을 역설적으로 드러내는 자기 기만이었다. 그들은 자신들의 권력과 경력, 야심, 열망이 오직 히틀러에 의해 좌지우지되는 현실에 만족해왔기에 이제 자신들이 겪는 어려움이 오직 히틀러의 광기와 범죄성 때문이라며 책임을 회피했다. 집권 초기에는 히틀러를 우러러보면서 히틀러가 그리는 유토피아를 열심히 따르던 그들이었지만 전쟁에서 패배한 이후에는 히틀러가 자신들의 믿음을 저버리고 화려한 언변으로 자신들을 속여 야만적 계획의 무력한 공범으로 만들었다고 말하며 스스로를 희생양이라고 주장했다. 실제로 패전 이후 평범한 독일인들은 왜 자기가 히틀러한테 속아서 그런 행동을 했는지, 혹은 마땅히 했어야 할 행동을 안 했는지를 설명하거나 항변하고 싶어했다. 그것은 구원을 약속한 지도자가 알고 보니 재앙을 가져왔다는 논리였다. 아니면 히틀러를 지지하지 않았지만 반항을 허용하지 않았던 히틀러의 공포 정치 때문에 어쩔 수 없이 히틀러를 따랐다는 논리를 내세우기도 했다.
그러나 나치 독일은 히틀러가 집권한 12년의 대부분 기간 동안 지지 기반이 취약하면서도 정권에 등을 돌린 국민 대다수를 탄압하고 억압하며 히틀러의 의지를 집행한 정권이 아니었다. 비록 전쟁 막판에는 무자비한 광기를 보여주었지만 나치의 공포 정치는 적어도 독일안에서는 임의적이고 자의적으로 이루어진 것이 아니라 명확하게 정의된 인종적, 정치적인 적들만을 겨냥했으며 사회의 모든 부문에서 적어도 부분적으로라도 상당한 수준의 합의가 이루어져 있었다.[40] 비록 독일 시민들은 대단히 선진적이고 세련되며 다원화된 사회에서 살던 사람들이였지만 제1차 세계 대전 패전 이후 민족적 수모와 경제적 파산, 극심한 사회적, 정치적, 이념적 양극화를 겪으면서 권력자들도 그렇고 대다수의 독일 국민들 또한 정치 제도를 불신하는 분위기에서 실제로는 아주 위험했지만 "내가 여러분을 구해주겠다"고 큰소리치는 정치인에게 점점 의지하고 싶은 마음이 생겨났다는 것은 사실이다. 그래서 히틀러 집권 이후 경제적 성장과 각종 외교적 승리가 이어지면서 더욱 많은 사람들이 의심을 버리고 위대한 지도자가 제시하는 운명을 믿게 되었다.
나라의 위신이 나락으로 떨어졌다가 다시 상승하자 워낙 요란하게 선전을 한 것도 있으나 많은 사람들에게는 기적으로 다가왔고 지도자의 능력이 가져온 명예 회복으로 받아들여졌다. 그래서 히틀러는 독일 국민들에게 독일 민족의 구원과 중흥이라는 역사적 사명을 띈 인물로 선전되었고, 당시만 하더라도 대체로 신앙심이 깊었던 독일인들은 히틀러를 속세의 구세주로 떠받드는 열기에 자연스럽게 동화되었다. 이러한 마치 종교적이고 신화적인 요소는 히틀러의 권력 기반이 되었고, 이런 종교적 요소가 있었기에 나치 독일의 통치에서 일상 생활에 여러모로 불편한 점이 있었을지라도 사람들은 참고 견딜 수 있었다. 심지어 폴란드와 소련에서 자행된 만행을 히틀러는 몰랐고 오로지 하인리히 힘러의 잘못이라고 전쟁 막판까지 믿었던 지식인들도 상당히 많았다.
이러한 지도자 숭배는 수백만 명의 시민들 마음 속에 파고든 것은 물론이고 고위직에 있고 힘깨나 쓴다는 사람들까지도 속으로는 비판하고 우습게 볼지언정 지도자 숭배를 자기 입맛에 맞게 이용하다 보니 히틀러의 권력은 어떤 견제도 받지 않는 절대 권력으로 굳었다. 번영으로 간다던 길이 멸망으로 가는 길이라는 것을 깨달았을 무렵에는 히틀러의 개인화된 통치가 이미 수습 불가능한 상황에 처해 있었다. 나치 체제는 통치자 개인에 대한 충성과 볼셰비즘에 대한 공포를 통해서만 느슨하게 묶였지 점점 파편처럼 쪼개졌고 자연스럽게 히틀러는 어느 누구한테도 견제를 받지 않았다. 파멸로 가는 길은 활짝 열렸고, 용기 있는 집단과 개인이 나섰을 때 계획이 부실했다기보다 운이 안 좋아서 히틀러 제거 시도가 실패로 돌아간 다음에는 이제 그 파멸의 길을 따라가는 것 말고는 다른 대안이 없었다. 그래서 치러야 하는 대가, 특히 독일 국민을 비롯하여 독일 안팎에서 나치 정권에게 당한 수많은 희생자의 수는 숫자로는 따질 수가 없으며 물질적 피해는 어마어마했다.
물리적 차원에서건 도덕적 차원에서건 한 국가의 파멸이 오직 한 사람의 이름하고만 결부되는 사례는 역사적으로 볼 수 없었다. 히틀러의 이름은 현대에는 문명의 가장 심각한 몰락을 불러온 장본인으로 늘 거론된다. 제대로 못 배운 술집 선동가에 고집불통의 인종주의자이자 자기도취와 과대망상에 젖었으며 민족의 구세주를 자처했던 사람이 철학자와 시인의 나라로 알려졌고 발달된 경제를 가진 현대 문명국에서 휘두를 수 있었던 극단적 형태의 개인화된 통치는 그 운명의 12년 동안 끔찍한 사건들이 펼쳐질 수 있었던 토대가 되었다. 히틀러는 5천만 명이 넘는 사망자를 낳고 그보다 더 많은 사람에게 이별의 아픔을 딛고 갈가리 찢긴 삶을 봉합할 수밖에 없게 만든 전쟁의 줄거리를 쓴 대표 작가였고, 이 세상에 유례가 없었고 20세기를 정의하는 사건으로 두고두고 회자될 대량 학살극을 만들어낸 주모자였다. 히틀러가 영광을 되찾아주려고 했던 제국은 결국은 무너져 내렸고 그 찌꺼기는 전승국들과 점령국들에 의해 분할되었다. 본인이 불구대천의 원수라 여겼던 볼셰비즘은 유럽의 절반을 차지하고 미국과 대립하는 초강대국이 되어 세계를 호령했다. 히틀러는 나의 투쟁에서 밝혔듯 자신이 정치를 시작한 이유가 민족의 생존을 위해서라고 내내 말했지만 독일 민족에게 히틀러는 차라리 없으니만 못했던 존재였다.
히틀러의 통치는 20세기 초반부터 반세기 동안 독일을 지배하면서 유럽과 세계를 두번이나 끔찍한 전쟁으로 몰아넣은 극단적인 민족주의와 인종주의에 입각한 세계 패권의 야심이 얼마나 파괴적인 결과를 낳는가를 유감없이 보여주었다. 아돌프 히틀러를 낳았고 히틀러의 비전에서 미래를 보았고 히틀러를 흔쾌히 섬겼고 히틀러의 오만을 공유했던 독일은 결국 히틀러가 받았어야 할 복수도 받게 되었다. 히틀러 사후 독일은 히틀러 시대라는 역사를 반성하며 폐허 속에서 새로운 가치를 바탕으로 한 사회를 건설했다. 비록 히틀러 시대가 남긴 거대한 도덕적 상처가 없어진 것은 아니지만 현재 독일 정치, 교육 시스템은 두번다시 히틀러와 당시의 독일이 저질렀던 비인간적인 행위와 참극이 벌어지지 않도록 하기 위해서, 히틀러와 나치의 과오를 반성하며 다시는 그런 일이 벌어져서는 안된다는 것을 기본으로 하고 있다.
7. 참고 문헌
- 요하임 c 페스트 히틀러 평전 1권 2권
- 이언 커쇼 아돌프 히틀러 평전 1,2권
- 마르틴 브로샤트 아돌프 히틀러 국가
- 트라우들 융에 ' 히틀러 여비서와 함께 한 마지막 3년'
- 알베르트 슈페어 회고록 ' 알베르트 슈페어의 기억'
- 존 톨랜드 아돌프 히틀러 결정판 1,2권
[1]
출처- Robert Dallek, The Lost Peace: Leadership in a Time of Horror and Hope, 1945-1953, Harper Perennial; Reprint edition (December 5, 2011), p.9
[2]
6.5%에서 3%로
[3]
이렇게 정권을 빼앗긴 교훈으로 프랑스와 스페인에서 범중도파~좌파를 아우르는
인민전선이 결성되는 계기가 되었다.
[4]
물론 그 배경에는 독일의 군사력이 있었기 때문에 가능했다
[5]
히틀러가 만약 (수정의 밤 이전인) 1938년에
암살당해 사망했더라면 그는 독일 역사상 가장 위대한 정치가로 남았을 것이다. 이건 <히틀러 평전>을 쓴 요아힘 페스트가 하는 말이다. 결국 전쟁과 전쟁 범죄가 문제. 요아힘 페스트는 히틀러를 옹호하지 않는 사람이니 어느 정도는 일리가 있다고 봐야 할 것이다.
[6]
2차 대전 이전에는 제3제국에서 굵직한 업적을 남겼다. 그 예로, 난립하던 중소기업들을 하나로 통합해 Reichswerke Hermann Göring(헤르만 괴링 국가공업)을 설립하였는데, 이는 나치 독일의 국가조합주의 체제의 밑거름이 되었다. 또한, 독일 공군 루프트바페를 효율적으로 편제한 장본인도 괴링이다.
[7]
재정적자가 경제에 순영향을 주었다는 평도 존재한다.
[8]
국가노동단(Reichsarbeitsdienst)이라는 조직을 만들어서 정규직이 아닌 노동자들을 반강제 가입시켜서 투입하였다.
[9]
제프리 메가기의 <히틀러의 최고사령부>에선 라인란트 재점령 및 오스트리아와 체코슬로바키아 병합에는 군부가 반대했지만 이후엔 히틀러에 동조했다고 한다. 단 여기서 반대했다는 것은 시기상조란 것이지 절대 인도적인 이유가 아니다. 오히려 20년대부터 독일 군부에선 체코슬로바키아와 폴란드 침공을 대놓고 얘기했고 그에 대해 인도적, 윤리적 이유로 반대하는 목소리는 없었다. 히틀러만큼 막 나가지 않았다뿐이지 군부 역시 베르사유 체제를 증오했다. 군부에게 있어 체코나 폴란드처럼 베르사유 조약의 결과로 탄생한 신생국들 역시도 언젠가 한번 손 봐줘야 할 타도 대상일 뿐이었다.
[10]
SS의 힘러, 공군의 괴링, 나치당의
보어만, 해군의
되니츠, 그리고 육군 수뇌부…등등
[11]
컴퓨터와 인쇄술이 발달하지 않았던 시절에는 그림엽서, 광고판 등을 그려주고 다니는 것이 그림쟁이들의 주 수입원이었는데, 현대에 비유하자면
커미션이나
상업지로 먹고사는 픽시브 일러스트레이터와 비슷한 위치였던 셈이다.
[12]
그림에 따라 다르지만 몇몇 작품을 보면 소실점을 도저히 찾을 수 없을 정도로 구도가 삐뚤어져 있다. 다만 히틀러가 그림에 대한 전문 교육을 받지 않고 독학했다는 점을 고려하면, 지망생 수준에선 충분히 있을 법한 정도의 실수다. 사실 꼭 지망생의 경우가 아니더라도, 그림으로 밥 벌어먹고 사는 현대의 프로 화가/만화가/일러스트레이터들도 수익과는 별개로 그림에서 실수가 발견되는 경우는 상당히 많다.
[13]
다만 위 작품을 포함해 현재 전해지는 히틀러의 그림들은 대부분 입시생 시절이 아니라 그림 엽서 화가 시절이나 그 이후에 취미로 그린 작품들이다.
[14]
다만 이쪽은
(당시 기준으로) 미니국가를 통치했기 때문에 악행에 비하면 신기할 정도로 대중적인 인지도가 낮다.
[15]
마시아스 응게마, 폴 포트 같은 일부 독재자들이 질적인 측면에서 히틀러를 넘는다고 평가되기도 하나, 살해한 인명 수와 인지도 면에서 히틀러는 이들과 비교를 불허하는 수준이다. 인명 수 면에서는 스탈린과 마오쩌둥이 더 많은 인명 손실을 야기했으나 히틀러는 집권 방식과 사상, 그리고 그로 인해 초래된 2차 세계 대전으로 인하여 그 부정적 인지도가 가장 높다.
[16]
나치 상징물을 법으로 금지시키는 것은 기본에 과거에
구글과
유튜브에서는 아예 나치, 히틀러라고 검색하면 연관검색어가 뜨지 않을 정도였다.
[17]
참고로 적도기니의 응게마도 국민들의 직선제를 통해 당선된 독재자다.
[18]
학벌 자체는 조지 워싱턴도 중등학교 수준인 등, 국가수뇌로서 평가하기에는 애매한 척도인 것이기는 한데, 문제는 히틀러의 그나마 있는 학벌은 예술가로서의 학벌이라는 것이다.
[19]
다만 그의 대중선동능력이나 예술가로써의 면모를 보자면 아주 바보도 아니었고 실제로 그의 IQ는 141로 전해지며 이는 상당히 높은 수치이다. 물론 지능이 순수하게 학술적인 능력을 측정하는 것이 아니고 어떤 부분에서 발현되는 지 다르므로 지도자로써 적합하다고 확신할 수는 없으며, 그의 내치를 보면 오히려 학살 등 다른 악행을 베재하고 순수히 능력적인 면만으로도 부적절했다고 보는 것이 정설이다.
[20]
제3제국의 장관으로 히틀러와 가장 가까이 있었던
알베르트 슈페어는
제2차 세계 대전이 끝난 직후 히틀러를 "마성을 지닌 사람", "개인이 민족의 운명을 결정하는 인류사에서 어쩌다가 나타나는 설명하기 어려운 역사적 현상의 하나"로 묘사했다. 출처: 이언 커쇼 히틀러 1권 프롤로그 25페이지
[21]
이언 커쇼는 히틀러가 아니었어도 당시 독일에는
반유대주의가 만연해서 유대인 차별정책은 실시되었을 것이라 예상하지만 히틀러처럼 아예 유대인들을 전부 다 죽여버려야 한다고 주장한 사람은 거의 없었다며 홀로코스트와 같은 대량 학살 정책은 히틀러라서 가능했던 것으로 보고 있다.
[22]
아무리
타 민족에 대한 극단적인 혐오를 가지고 있는 사람이라고 하더라도 특정 지역에만
격리시켜야 한다거나 원래 나라로
추방시켜버려야 한다거나 더 이상
이민을 받아들이면 안 된다고 주장하는 정도지, 아예 타 민족을 전부 다 죽여버려야 한다고 주장한다면 같은 극단주의자한테도 미친놈 취급을 받을 정도로 그것에 대해서 만큼은 동의를 해주지 않는다.
혐오발언을 하면서 내쫓아 버리는 거하고, 직접 사람을 죽여버리는 건 그 죄악감이 완전히 다르기 때문이다. 즉 히틀러는 극단주의자 중에서도 극소수에 속할 정도로 유대인을 아예 같은 사람으로 보지 않았다.
[23]
제2차 세계대전 탐욕의 끝, 사상 최악의 전쟁 배경
[24]
1917년에 영국이
밸푸어 선언을 하기는 했지만
영국이 약속을 안 지킨 게 한 두 번이 아니라서(...) 안 지켰어도 그만이었다. 심지어 당시
영국은
밸푸어 선언 전인 1915년에 이미
맥마흔 선언으로 이중계약까지 한 상태였으니 말이다.
[25]
히틀러는 이렇게 해야 상대방을 휘어잡을 수 있었다고 생각했다.
[26]
히틀러 1권 13장 지도자 숭배(736~737쪽)
[27]
독일 군부는 정치에 깊숙이 관여한 점, 문민통제를 거부한 점, 의견이 다르면 최고 지휘관의 명령도 무시했던 점, 전략적 안목이 전무했던 점에서 일본 군부와 크게 다르지 않았다.
제1차 세계 대전만 해도 사방에 적을 만들었던
빌헬름 2세의 책임이 크긴 하지만
슐리펜 계획을 중지하라는 빌헬름 2세의 명령에
독일 제국군이 복종했다면 전쟁이 그렇게 확대되지는 않았을 것이다. 이런 의미에서 프로이센 군부의 안하무인적 엘리트주의를 뼈저리게 체감하고 이를 조지려고 했던 히틀러의 행보는 당시 나치당과 나치 독일이 정상 국가였더라면 오히려 칭찬해줄 만한, 정치적으로 의미 있는 행보였다. 다만 군부의 독립성을 조지면서 나치 당의 통제라는 더 정신나간 독약으로 대체했기 때문에 크게 보면 긍정적인 면이 결코 부각 될 수 없는 것이나, 확실한 건 루즈벨트 정권이 보여주었던 민간 지도자들과 군부가 서로의 영역을 존중하고 조율하며 합리적으로 전쟁을 끌어가는 분위기는 히틀러가 아니라
비스마르크가 2차대전 당시 지도자였어도 독일 실정에는 불가능했다.
[28]
그러나 이러한 문제들이 히틀러의 정신 능력에까지 영향을 미쳤다는 확증은 없다. 자세한 내용은
테오도어 모렐 항목 참고.
[29]
특히 히틀러는 도박적인 행동과 자신의 고집으로 일을 밀어붙여 성공한 인물이였다. 실제로 무명의 정당이였던
나치당에 들어가 나치당을 제1당으로 만든 뒤, 불가능해보였던 집권에 성공하여 독일 총통 자리에 올랐다. 이후 자신의
정적들을 제거하며 독일의 절대권력을 거머쥐었고, 독일의 실업•경제 문제를 해결하고 외교적으로는
라인란트 재무장,
오스트리아 병합,
뮌헨 협정, 체코 슬로바키아 병합이라는 어마어마한 성공을 연속해서 이뤘다.
제2차 세계 대전 발발 이후에는
폴란드 침공에서의 성공,
프랑스 침공에서의 승리
독소전쟁 초기
바르바로사 작전,
키예프 전투 등에서 엄청난 전과를 올리는 등 아무리 평범하고 겸손한 인물이어도 대단히 오만해질 수 있는 엄청난 성과를 올렸다. 게다가 장군들과 측근들이 대단히 위험하다고 끊임없이 만류했던 것에도 불구하고 끝까지 밀어붙여 이루어냈기에 이러한 도박수의 연속된 대성공 이후에는 히틀러의 반대파들조차 점점 히틀러의 결정을 말리기보다는 그냥 갈 때까지 가보자라는 분위기가 더욱 강해지는 결과로 이어져 히틀러가 전쟁도 평화도 결정하는 절대권력을 가지게 되었다.
[30]
실제로 1942년
발두어 폰 시라흐가 히틀러에게 "아무래도 전쟁을 끝내야 하지 않겠습니까?"라고 물어보자 히틀러는 펄쩍 뛰면서 "어떻게 그것이 가능하다고 생각하는가? 내 손으로 내 머리에 총을 쏘지 않는 한 그것은 있을 수 없다는 것을 그는 너무나 잘 알 텐데."라 대답한 적이 있었다. 출처: 히틀러 2권 16장 몰락 의지 919페이지
[31]
출처 : 히틀러 2권 5장 세계대전 속으로 302page
[32]
나폴레옹도 프랑스 혁명 시절 폐지된 노예제를 부활시킨 것과 그가 아이티로 보낸 프랑스군이 아이티인들을 학살했고 스페인, 이집트에서도 학살을 자행한 것 때문에 지금까지도 비난 받는 부분도 있지만 히틀러같이 민족 전체를 몰살시키려 한 적은 없다.
[33]
그나마 그의 라이벌이었던 스탈린이 히틀러와 종종 같이 엮이지만 인류의 도덕성이나 수단과 방법의 정당성을 논하지않고 오로지 결과만을 놓고 보더라도 스탈린은 독재와 탄압, 철권통치의 결과물이긴 하지만 소련을 초강대국의 반열로 올려놓았다. 이는 스탈린이 집권기간 동안 자행한 엄청난 과가 있음에도 분명히 변함이 없는 사실이다. 그러나 히틀러는 전간기 동안 이루었던 업적들을 전쟁을 일으키고 지는 바람에 모조리 말아먹은 걸 넘어서서 독일이 지금까지 이루었던 수많은 분야의 성과들도 많이 잃었다는 점에서 큰 차이가 있다. 어쩌면 히틀러도 전쟁에서 이기거나, 또는 전쟁이 일으키지 않았더라면 스탈린 정도의 과가 많지만 공도 분명히 있는 지도자로 기록됐을 것이다.
[34]
사실
히로히토도 히틀러만큼 비난받아 마땅한 놈이지만 미국이 히로히토에게 면죄부를 주는 바람에 그다지 비난받지 않았던 것이지 그렇지 않았다면 히로히토도 비난받았을 것이다.
[35]
연합군의 전쟁 중 벌인 범죄나 다른 독재자들의 학살을 빌미로 나치의 홀로코스트를 물타기 하려는 자들이 꽤나 많다. 하지만 그 학살들의 동기는 '반동분자' 척결이나, 민족 정체성 말살 및 강제 동화, 권력 투쟁의 연장선인 반면 나치의 홀로코스트의 경우는 학살 그 자체가 목적이었다.
강도살인과
묻지마 살인을 다르게 취급하는 것처럼 나치의 홀로코스트를, 다른 학살들과는 본질적으로 다르게 취급하는 이유는 바로 이 학살의 동기 때문이다. 그리고 나치의 홀로코스트는 타국을 침공하면서 이루어졌지만, 결정적으로 본국에 살던, 독일 국적을 가졌고 자신을 스스로 독일인으로 여기던 유대인들까지 학살한 사례는 나치가 유일하다.
[36]
홀로코스트 희생자 중에
1차 대전 때
독일군으로 참전해
훈장을 받은
참전용사도 있었다. 당시의 독일 국적의 유대인들은 "반유대주의가 아무리 심해졌다고 하지만, 우리가 독일을 위해서 전쟁에 참전해줬는데 설마 우리를 죽이겠어?"라는 생각에 독일을 떠나지 않은 유대인이 많았다. 그런데 나치는 정말 독일을 위해 싸워준 자국민을 유대인이라는 이유로 학살했다.
[37]
히틀러 외에도 폴 포트는 모두가 평등하고 풍요롭게 살 수 있는
유토피아를 건설한다는 아름다운 꿈(?)을 성취하기 위해 히틀러 못지않은 학살을 저지르고 잘못된 신념에 기반하여 고의적으로
캄보디아를 석기시대로 돌려놨다는 것에서 히틀러와 똑같이 인간의 존엄성의 근간을 흔든 존재로 여겨지며, 마시아스 응게마는 정신질환+마약중독자가 '감히 나에게 반대한다', '제국주의에서 벗어나 아프리카의 순수한 정기를 찾아야 한다', 이렇게 단 두 가지 이유만 들며 인구의 50~75%를 없애버리고 고의적으로
적도 기니를 석기시대로 돌려놨다는 것에서 비난받고 있다.
[38]
안슐루스와
뮌헨 협정을 말하는 것이다.
[39]
특히 나치의 유대인 박해에 대해서는 적극 찬동하지도, 적극 반대하지도 않는 사람들이 많았다. 이를 확인하기 위하여 나치가 일으킨 사건이 바로
수정의 밤이다. 이후 나치의 유대인 정책은 약탈 전시경제와 맞물려 절멸로 자리잡힌다.
[40]
물론 당시 히틀러와 나치 정권을 지지하는 극단적인 지지자들의 견해와 태도만을 골라낸 다음 그러한 의견들이 독일 사회 전체의 분위기였다고 말하는 것은 분명히 잘못된 주장이다. 즉, 히틀러가 독일의 절대 권력자가 된 모든 이유를 독일 사회 안에서 찾으려는 것도 현실을 왜곡하는 것이지만, 마치 히틀러가 갑자기 하늘에서 뚝 떨어져 독일을 통치하게 되었고 독일 시민들이 갑자기 통치자가 된 히틀러를 열렬히 지지했다고 말하는 것은 "
한 사람이
온 나라를 최면에 빠뜨려 건강하게 발전해 가고 있던 독일이 망가졌다"라는 진실을 호도하는 주장이 되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