건국훈장 대통령장 수훈자 |
|||||
{{{#!wiki style="margin: -5px -10px; padding: 5px 10px; background-image: linear-gradient(to right, #4D4D4D, #696969 20%, #696969 80%, #4D4D4D); color: #fede58" {{{#!wiki style="margin:0 -10px -5px; min-height:calc(1.5em + 5px)" {{{#!folding [ 펼치기 · 접기 ] {{{#!wiki style="margin:-5px -1px -11px" |
|||||
강기동 | 구춘선 | 권동진 | 권병덕 | 김경천 | |
김동삼 | 김병조 | 김붕준 | 김상옥 |
|
|
김완규 | 김익상 | 김지섭 | 김하락 | 나석주 | |
나용환 | 나인협 | 남상덕 | 남자현 | 노백린 | |
린썬 | 문창범 | 문태수 | 민긍호 | 민종식 | |
박열 | 박승환 | 박용만 | 박은식 | 박준승 | |
백용성 | 신규식 | 신돌석 | 신석구 | 신채호 | |
신홍식 | 쑨커 | 안재홍 | 양기탁 | ||
양전백 | 양한묵 | 여운형 | |||
여지이 | 연기우 | 오세창 | 오화영 | 유동열 | |
유여대 | 유인석 | 윤기섭 | 우빈 | 이갑성 | |
이동녕 | 이동휘 | 이명룡 | 이범석 | 이범윤 | |
이봉창 | 이상설 | 이상재 | 이승희 | 이위종 | |
이은찬 | 이인영 | 이재명 | 이종일 | 이종훈 | |
이필주 | 임예환 | 장건상 | 장인환 | 전명운 | |
전해산 | 정환직 | 조성환 | 조완구 | 주시경 | |
주자화 | 지청천 | 채상덕 | 천청 | 최석순 | |
최성모 | 편강렬 | 홍기조 | 홍범도 | ||
홍병기 | 황싱 | 후한민 | |||
[A] 친일 행적으로 인한 서훈 취소 | }}}}}}}}}}}} |
<colbgcolor=#0047a0><colcolor=#fff> | |
|
|
출생 | 1882년 4월 5일 |
청나라
후난성 타오위안현 (現 후난성 창더시) |
|
사망 | 1913년 3월 22일 (향년 30세) |
중화민국 상하이시 상하이역 | |
학력 |
호세이대학 (중퇴) 와세다대학 |
서훈 | 건국훈장 대통령장 추서 |
[clearfix]
1. 개요
중화민국의 정치가, 혁명가.2. 생애
호남성 출신으로 그는 보통학교에 다니던 중 반청(反淸)운동을 벌이다 퇴학당해 일본 호세이대학으로 유학을 떠났지만, 곧 중퇴한다. 1904년 귀국해 창사에서 황싱 등과 화흥회를 조직해 청나라 타도를 시도하지만 실패하여 다시 일본으로 망명을 떠나 일본 와세다대학에서 수학했다. 1905년, 쑨원의 흥중회와 결합해 중국동맹회를 세우고 기관지 <민보> 편집을 맡았으며 1910년 상하이에서 일간지 <민립보>를 발행했다. 1911년 신해혁명으로 수립된 난징 임시정부에서 법제국 국장을 맡았다.쑨원과 함께 중국동맹회를 세워 혁명운동을 이끌었으며 신해혁명의 주역. 중화민국 수립 이후 1912년, 비밀결사에서 공개정당으로 전환한 동맹회를 기반으로 여러 민주정당을 합병하여 국민당[2]을 창설하고 황싱, 왕충후이, 우징롄, 쑨원과 함께 이사로 선출되었다.
임시정부 초대 대총통 쑨원이 위안스카이에게 총통직을 넘겨주었을 때 중화민국 사상 첫 내각인 탕사오이 내각에서 농림총장을 맡았지만, 위안스카이의 반동적 정치에 혐오감을 느껴 탕사오이가 퇴임하자 7월 14일 교육총장 차이위안페이, 사법총장 왕충후이, 공상총장 대리 왕정팅과 함께 동반 사임하고 국민당을 창설했다. 1912년 쑨원-위안스카이 회담에서 쑨원에 의해 총리로 추천되었지만 쑹자오런 본인도 고사하고 위안스카이도 거부했다.
이후 국민당 이사장 대리로 국민당을 영도, 1913년 2월에 치러진 총선거에서 압승을 거둔다. 당시 31살의 젊은 나이로 차기 총리가 될 것이 유력시 되는 상황에서 위안스카이의 강력한 정적으로 떠오르자, 위안스카이는 국무총리 자오빙쥔과 내무비서 홍술조에게 암살을 사주해 1913년 3월 20일, 무사영이라는 자객을 시켜 상하이 역에서 베이징 역으로 가기 위해 천치메이, 랴오중카이 등 동지들의 배웅을 받던 쑹자오런을 저격하게 했다. 이틀 후 3월 22일 쑹자오런은 끝내 숨을 거두었다. 향년 31세.
자세한 내용은 쑹자오런 암살 사건 문서 참고하십시오.
1913년 3월 22일, 장례식 당시 사진[3] |
3. 사후
그의 죽음은 중화민국史에 있어서 커다란 비극 가운데 하나였다. 그의 죽음으로 위안스카이는 매국적, 독재정치를 펼치며 독주를 달리게 되었고, 중국은 더욱 혼란스럽게 돌아가버렸다. 쑹자오런의 암살 사건에 관련된 증거가 발표된 4월 26일, 위안스카이는 선후대차관 사건을 일으켜 더욱 어그로를 끌었고 쑹자오런 암살 3개월 후, 쑨원을 비롯한 국민당 세력들이 토원운동을 벌여 계축전쟁이라 불리는 제2차 혁명을 일으켰다. 그러나 이 봉기는 전국적으로 크게 호응을 얻지 못했고 불과 2개월 만에 위안스카이의 막강한 군사력에 의해 진압당했다. 그리고 쑨원은 7월에 일본으로 망명... 위안스카이의 강력한 정적으로 급부상한 쑹자오런이 사망한 이후, 위안스카이는 가혹한 독재체제로 나아갔고 1915년 12월 12일 홍헌제제를 선포하면서 급기야 황제의 자리에 올랐다가 호국전쟁을 맞이하게 된다.4. 가족
쑹자오런 사후 1년만에 아내와 모친이 사망했다.13세에 고아가 된 외아들 쑹전뤼는 일본유학후 중화민국 감찰원에서 근무했는데 심장마비로 36세에 사망했다. 9세에 아버지를 잃은 쑹전뤼의 외동딸은 이후 2남 3녀를 낳았다.
5. 여담
중국에서 쑹자오런의 암살배후가 누구인지를 두고 논란도 상당히 뜨겁다. # # 주로 위안스카이냐? 쑨원이냐? 놓고 논쟁인데, 당시 여러 정황을 봤을때, 위안스카이에 의한 암살설이 상당히 유력하다.한국에서는 그가 한중 협력단체인 신아동제사에서 활동하며 한국의 독립운동에 기여한 점을 인정해서 1968년 건국훈장을 추서했다.
너무 시대를 앞서 가다 '실패한 정치인'으로 분류되기도 한다. 그의 정치노선은 쑨원과 많이 대비되는 면이 많은데, 쑨원은 강력한 대통령제, 중앙정부제를 주장해왔으나 쑹자오런은 의원내각제, 즉 의회민주주의를 주장해왔었다. 사실, 민국 초기 쑨원의 입지는 커다란 영향을 얻지 못했다. 쑨원이 영향력을 얻기 시작한건 1917년~1922년 사이 전개한 호법운동 활동이었다. 따라서 민국 초기(1912년~1916년) 때는 쑨원보다는 쑹자오런의 정치적 영향이 상당히 컸다고 볼 수 있다.
오늘날 중국에서는 그를 '애국자'로 높이 평가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