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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수정 시각 : 2024-02-26 23:10:25

윤선거

1. 개요2. 생애

1. 개요

尹宣擧
1610년( 광해군 2년) ~ 1669년 4월 21일( 현종 10년)(향년 59세)

조선 후기의 유학자. 자는 길보(吉甫), 호는 노서(魯西), 산천재(山泉齋), 미촌(美村)이다. 본관은 파평이다. 부친을 통해 성혼의 학맥을 계승하였고, 김장생의 문인이기도 하다. 척화론자였던 부친과 달리 호란 이후 자신의 경험을 바탕으로 주화론의 입장에도 공감을 표하고 개혁의 필요성을 주장하였다. 그와 송시열의 대립은 아들인 윤증 대까지 이어지며 서인 노론 소론으로 분열된다.

2. 생애 [1]

아버지는 윤황[2], 어머니는 서인의 거두 성혼의 딸 창녕 성씨다.[3]

1633년 24세에 생원시, 진사시에 모두 합격하여 성균관에 입학하였고, 1634년 인조의 부친 추숭 및 종묘 입묘를 반대하는 상소를 주도했다. 1636년 후금이 황제를 칭하며 자신들을 섬기라는 요구를 하는 사신이 오자 참하라는 주장을 하며 주화론자들을 비판하였다. 이 당시만 해도 윤선거는 부친 윤황처럼 주화론의 반대 입장에 서있었다. 1637년 1월 병자호란이 발발한다. 당시 윤선거는 강화도에 피난하였고, 함락된다면 순절하기로 권순장, 김익겸과 맹세하였다. 그러나 강화도 함락 후 이들과 달리 순절하지 않았다. 아내 이씨와 작은아버지 윤전(尹烇)도 당시 자결하였다. 우선 남한산성에 있는 부친 윤황을 보아야 하고 모친을 모셔야겠다는 생각으로 신분을 숨기고[4] 강화도에서 빠져나왔다. 당시 급박한 상황으로 아들 윤증과 딸도 두고 나왔고, 딸은 노비로 팔려가기도 했으나 윤증이 족보를 쓴 수첩을 주고 외우게 한 덕분에 간신히 구제되었다고 한다. 윤선거는 자신이 척화론을 강하게 주장하였음에도 자신도 가문도 국가도 지키지 못한 것을 매우 부끄럽게 여기고 이후 출사하지 않고, 재혼도 하지 않았다. 당시 윤선거가 '강도(江都) 사건'에 대해 어떤 생각을 갖고 있었는지는 훗날 회니시비의 단초가 되어 노론계에서는 '유교적 관점에서 비난의 대상이 되기에 족하였다', '평생의 멍에가 되어 벼슬길에 나아가지 않았다'고 바라보았으며, 소론계에서는 스스로의 개인적 수치가 아닌 조선 유자의 한 사람으로서 국가가 오랑캐에게 짓밟히는 것을 막지 못한 것을 반성한다는 생각이었다고 주장했다.[5]

윤선거는 호란 이후 이이, 성혼의 학맥을 잇는 김장생 문하에 나아가 학문에만 전심하게 된다. 당시 만난 송준길, 송시열, 이유태(李惟泰, 1607~1684), 유계(兪棨, 1607 ~ 1664)와 친한 친구가 된다.[6][7] 이들 호서 서인 산림들은 반청 척화를 기치로 삼아 주자학적 명분론, 의리론의 수호자로 자처하며 인조 후반기 출사를 거부하였다. 그리고 척화의 상징인 김상헌을 ‘대로(大老)'로 숭상하며 자신들의 상징으로 받들게 된다. 그 결과 서인 산림과 김상헌의 손자인 김수흥, 김수항 형제가 정치적 동맹 관계를 맺는 계기가 된다. 이들은 학문, 출처, 예학은 물론 신변잡기 등 세세한 부분까지도 토론하며 정치적 보조를 함께 맞추려 노력하며 거대 세력으로 성장하게 된다.

효종 대 들어와 김육, 조익 등의 변통론자들은 제도 개혁을 시도하여 양반제, 지주제의 모순을 해결, 억제하려 했고, 산림의 의리론자들은 수신 위주의 도학적 경세론에 입각하여 결과적으로 양반과 지주의 이익을 대변했다. 그럼에도 산림 내부에서도 현실을 바라보는 자들이 있었으니 바로 유계와 윤선거이다. 송시열의 주장은 결국 '군주의 수신'으로 귀결되는 원칙론이었으며, 당시 현실의 폐단에 대한 문제 인식은 찾기 어렵다. 유계는 공납과 군정의 폐단 해소를 위해 대동법과 사족수포법(士族收布論)을 적극적으로 주장하였다. 윤선거도 유계를 지지하며 지주제의 모순에 주목하여 사족수포법에서 한걸음 더 나아간 '용포론(傭布論)'을 제안하였다. 그에 입각하여 송시열이 당시 형세를 헤아리지 않고 청에 대한 '복수설치(復讐雪恥)[8]', '의리'를 자신만의 주장으로 내세우는 정치 행태의 허구와 위험성을 지적했다.[9] 이들의 의견 차이는 윤휴에 대한 태도에서 드러나게 된다.

윤휴가 "사물의 진리를 주자만 알고 다른 사람들은 모를 수 있느냐"는 발언을 하자 윤선거는 1653년 송시열, 이유태, 권시, 유계 등과 함께 황산서원에 모여 논의를 하게 되는데, 이 때 송시열이 윤휴를 비난하자 그는 윤휴를 옹호했고 이후에도 역시 입장의 변화가 없었다. 송시열은 윤휴를 '사문난적(斯文亂賊)[10]'으로 몰아가며 남인을 배제하려 하였고, 윤선거는 북벌 대의 실현을 진정으로 원한다면 작은 차이는 문제 삼지 않고 협력하며 당색을 떠나 능력있는 인재는 등용해야한다고 했다.[11] 결국 윤선거는 호란 이후 현실을 목도하고 주화론자들과 일치하는 사상적 지향을 갖게된 셈이다. 현종 시기 예송논쟁을 거치며 송시열은 윤휴를 이단을 넘어 '죽여야 하는 적' 수준으로 간주하였고, 남인에 대한 공세도 강화한다. 윤선거는 예송 자체를 '예조의 한 직무'에 불과한 하찮은 일인데, 상대를 말살하려는 송시열 측의 행동이 효종이 바랐던 북벌 정책과 어긋난다고도 비판했다. 이런 관점에서 예송을 확대하는 윤휴 및 남인에 대해서도 비판을 가했다. 결국 황산서원의 모임 12년 후[12] 송시열이 다시 윤선거에게 입장을 분명히 하라고 요구하자, 윤선거는 "굳이 따지자면 윤휴가 틀렸다고 생각한다."라고 했다. 그러자 송시열은 "그렇다면 윤휴와 절교하라."고 했고, 윤선거가 마지못해 "알았다"고 답해 윤선거가 사망할때까지는 송시열과의 교분이 끊어지지 않았다.

1669년 세상을 떠났다. 송준길의 청으로 이조참의에 추증되었다가, 훗날 윤증의 명성으로 영의정으로 추증되었다.[13]

별세 전에 윤선거는 송시열에게 편지를 남겼다. 이 편지는 '기유의서(己酉擬書)'로 알려져 있다.[14] 기유의서에서 윤선거는 자신의 소신을 유지하며 주자학만 맹신하는 송시열의 학문 태도와 독선적인 정국 운영을 비판하고, 허목과 윤휴에게도 화해의 손길을 내밀고 윤휴 등 남인을 인정하고 등용하라고 다시 요구하였다. 윤증은 박세채에게 윤선거의 행장을 부탁하여 받았고, 스승이자 부친의 벗인 송시열에게 묘갈명을 부탁했다. 짓기 위한 자료로 박세채의 행장과 자신이 지은 윤선거의 연보, 윤선거가 남긴 '기유의서'를 모두 송시열에게 보냈다. 송시열은 기유의서를 보고 자신과 윤선거의 입장 차이를 재확인함과 동시에, 박세채가 지은 윤선거의 행장에서 그 일생을 극찬한 것을 보고 위기의식을 갖는다. 윤선거가 주장하는 북벌론이 확산될 것을 우려한 것이다. 또한 윤증이 윤선거의 빈소에 윤휴 등 남인의 조문을 받은 것을 알게되어 불쾌감도 있었다.[15] 그래서 송시열은 묘갈명에서 윤선거에 대한 평가를 박세채가 지은 행장으로 대신한다며 대충 지어주었다. 어찌보면 소극적인 불만 표출이었다. 윤증은 부친과 스승의 40년 친우 관계가 서로에게 매우 중요한 의미가 있다고 보았으며, 이것을 송시열이 박세채의 평가로 대신한다며 조롱하는 듯한 태도를 보이는 것은 부친이나 스승 모두 후대에 비판 받을 수밖에 없다 생각했다. 그래서 송시열에게 칭찬해달라는 평가가 아니라 어떤 점에서 생각이 달랐는지 분명히 밝혀달라고 하였고, 중재하던 입장의 박세채도 송시열에게 이를 요청했다. 그러나 송시열은 윤휴에 대한 부자의 태도를 계속 이야기하며 사실상 윤증의 요구를 거부한다. 실망한 윤증은 결국 스승과 등을 돌렸다. 이때까지도 아직 윤선거의 강도 사건에 대한 논란은 없었다. 묘갈명을 둘러싼 시비는 이렇게 종결되었다.

1680년 경신환국으로 서인은 다시 정권을 잡았고, 송시열의 적 윤휴는 사사되었다. 1681년 윤증은 송시열에게 보내는 '신유의서(辛酉擬書)'[16]를 작성한다. 윤선거가 지적한 송시열의 문제에서 한발 더 나아가 학문의 본원에 대한 문제를 제기했다. '의리쌍행(義利雙行), 왕패병용(王覇幷用)'[17]으로 대표되는 신유의서는 송시열이 주자학과 북벌 대의를 외치지만 자신과 견해가 다른 사람을 배척하고, 실질적으로는 자신의 수신에는 힘쓰지 않고 남을 공격하고 이기려는 말만 반복한다고 지적하며, 학문과 행동의 불일치를 비판하였고, 또한 주자의 권위를 빌려 자신의 입장을 합리화하나 실제로는 명목과 의의가 일치되지 않으며, 자신의 주장을 먼저 앞세우고 주자의 말을 끌어다 합리화하는 경우도 있고, 자신의 주장을 무조건 주자의 말이라고 내세우며 복종을 강요한다고 했다. 말로는 북벌대의를 외치나 실제 효과는 없이 지위만 높아지고 명성만 퍼져 명예와 이익을 구하는 수단에 불과하다고 했다. 그러나 신유의서는 박세채의 만류로 부쳐지지 않았다. 몇년 후 1684년 송시열의 문인 최신이 신유의서의 내용을 가지고 윤증을 비난하며 회니시비가 불 붙으며 결국 서인은 노론과 소론으로 분열하게 된다. 당시 훈척과 고관들은 송시열을 지지하였으나, 다수의 관인과 유자들은 소론으로 결집하였으며 윤증의 비판이 유자들의 공감을 받았음을 알 수 있다.


[1] 김용흠 교수 논문 다수 참고 [2] 尹煌(1571~1639, 향년 68세). 성혼의 제자이자 사위. 1597년 문과 급제 후 1616년 대북의 탄핵으로 이산에 물러나 있다가 1623년 인조반정 이후 다시 조정에 진출했다. 강경한 척화파로 정묘호란 당시 사간원 사간으로 이귀, 최명길 등 주화론자와 대립하였다. 1636년 병자호란 발발 후 남한산성에 들어갔으며, 훗날 김상헌이 척화신으로 심양에 끌려갈 때 자신이 대신 가겠다는 상소를 올렸다가 유배되었다. 일반적인 척화신들과는 조금 다른면이 있는데 병자호란 전에 제도개혁을 위한 변통론을 주장했다. 다만 이귀와 최명길이 인조 시기 전반 내내 제도 개혁을 위해 노력했던 사실을 무시하고 개혁되지 못한 책임을 그들에게 몰았고, 현실과 괴리된 사고로 호란 당시의 군사적 상황을 이해하지 못하고 단순히 임금의 투지로 방어할 수 있다는 관념적 사고라는 한계가 있는 변통론이었다. 그럼에도 제도 개혁의 필요성 자체는 인식하고 지배층에 대한 비판을 가했다는 점에서 보통의 척화신들과는 차이를 확인할 수 있다. 여담으로 그의 넷째아들이자 윤선거의 바로 윗형인 윤문거는 바로 대한민국 제20대 대통령 윤석열의 직계 조상이다. [3] 동시기에 활약한 윤선도와 이름이 비슷하여 간혹 그와 헷갈리거나 또는 친척으로 알고 있는 사람들이 있는데, 전혀 아니다. 애초에 본관이 다른데, 윤선도는 해남 윤씨, 윤선거는 파평 윤씨다. 윤선도는 남인이며, 윤선거는 서인이다. 게다가 윤선도의 '선'은 善이고, 윤선거의 '선'은 宣이다. 윤선거는 윤휴와 송시열간의 사이는 중재하려 하였지만 친구인 송시열과 함께 윤선도를 공격하거나 탄핵했다. [4] 청군이 남한산성에 항복을 권유하러 보낸 종실 진원군(珍原君) 이세완(李世完)[18]의 종자 선복(宣卜)이라고 했다. [5] 참고로 이 때의 일을 친구이자 인척[19]이었던 송시열이 상당히 경멸했다는 말이 있는데[20] 이후 송시열의 행적을 보면 그렇게 간단한 문제는 아니다. 조선시대 유학자는 인간적으로 '경멸'하는 사람과는 교분을 갖지 않는다. 그러나 송시열은 윤선거가 죽을때까지 절친하게 지냈으며, 윤선거가 죽었을때에도 진심으로 슬퍼하는 제문을 썼다. 또한 조선 후기 특히 인조반정 이후 효가 거의 절대적인 가치로 자리잡게 되면서[21] 부모가 살아있는데 자식이 죽음을 택하는 것은 유학자로서는 최악의 불효였다는 점을 고려할 때 윤선거가 강화에서 순절하는 대신 어머니를 우선 구한 것을 강하게 비난하기가 어려웠을 것이다. 병자호란 이후 윤휴와의 문제 때문에 소원해질 때까지 송시열과 윤선거는 동지 수준으로 가깝게 지냈다. 이는 병자호란의 경험을 두고 둘이 같은 한을 공유했다고 보아야 한다. 송시열 측에서 윤선거를 강도 사건으로 조롱하기 시작한 것은 윤선거 사후 윤선거의 아들 윤증과 송시열이 틀어지기 시작한 뒤의 일이다. [6] 남인이었던 권시, 윤휴와도 당색을 넘어 교류하였다. 윤선거의 아들 윤증은 권시의 사위가 된다. [7] 윤선거는 김장생에게 배웠고 김집에게는 직접 배우지는 않았다. 다만 김집을 스승처럼 섬겼다. 이는 유계와 동일하다. 링크 [8] 중화를 숭상하고 오랑캐를 물리친다는 춘추의리(春秋義理)에 따라 명(明)의 원수를 갚고 삼전도에서 당한 수치를 씻자는 의미가 담긴 정치구호 [9] 복수설치를 실현할 수 있는 실질적인 역량을 갖추기 위해 필수적인 부국강병(富國強兵)을 지향하는 제도 개혁에는 힘쓰지 않고, 복수설치 구호 자체를 자신만의 정치적 명분으로 독점하려한다고 했다. 또한 수신 위주의 도학적 경세론로 강하게 비판했다. [10] 기독교로 비유하면 이단이라고 하는 셈 [11] 윤휴는 대표적인 반청 북벌론자였으며, 그를 추진하기 위해 국가 제도에 대한 대경장을 주장하였다. 역시 지주제와 양반제의 모순을 해결해야한다고 본 것이다. [12] 1659년 기해예송은 종결된 상태. 1674년 갑인예송 전 [13] 노소 대립시 윤증과 함께 관직이 추탈되기도 하나 1722년 경종의 명에 의해 복관되었다. [14] 기유년에 작성됨. [15] 윤휴는 나중에 부친을 추도한다며 제문을 보냈는데, 송시열과의 관계를 고려하여 받지 않으려던 윤증은 결국 받게 된다. 그러나 그 내용은 윤선거를 우유부단하다며 조롱하는 내용이 있어 윤증은 탄식하고 윤휴와 절교한다. [16] 신유의서의 내용은 윤증 항목 참조. [17] '의리와 이익을 같이 행하고, 왕도와 패도를 병용하였다' 현대인의 시각에서 보면 명분과 실리를 동시에 취하는 것으로 보여서 상당히 합리적이고 실용적인 태도로 보일 수 있는데, 의리와 왕도를 중시한 조선시대 유교의 입장에서는 절대로 칭찬이 아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