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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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별칭이나 그 외 나라의 용어는 황실/왕실 용어 및 별칭 표를 참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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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2. 중국의 경우3. 한국의 경우4. 일본의 경우5. 서양6. 역대 태손/세손
6.1. 한국6.2. 중국
7. 현재 재위중인 군주의 태손/세손 일람

1. 개요

太孫

황제의 손자이자 황태자의 아들로서 제위를 계승할 사람에 대한 칭호로, 줄여서 태손(太孫)이라고도 한다. 황태자가 제위를 계승하지 못하고 사망하거나, 황제의 자질이 부족하면 황제가 황태자의 아들 중에서 차기 제위 계승자를 지명하기도 한다. 간혹 황태자가 생존한 상태에서 황태손을 책봉하기도 한다. 황제로부터 책봉을 받아야만 가질 수 있는 칭호이기 때문에 실질적인 황태손이나 마찬가지인, 즉 차차기 황제가 될 것이 확실한 황태자의 적장자인데도 황태손으로 책봉하지 않고 군왕(郡王)으로만 두는 경우도 있었다. 경칭은 전하.

당헌종 이순이 바로 이 경우인데, 그가 어렸을 때 할아버지 당덕종과 놀다가 "너는 도대체 누구의 아들이기에 나의 품 안에 있는가?"라는 할아버지의 장난섞인 질문을 받자 "제삼천자입니다."[1]라고 대답해 덕종이 크게 놀랐다는 일화가 있는데, 정원 4년(788년) 당덕종은 이순을 광릉군왕에 책봉했다. 황태손으로 책봉되지 않은 상태에서 당덕종 사후 아버지 당순종이 즉위하면서 황태자가 되었고, 부황이 곧 퇴위하자 이순은 황제로 즉위했다.

독립국의 의 경우에는 왕태손(王太孫), 제후의 경우에는 왕세손(王世孫), 세손(世孫)이라 부른다. 비록 왕세자의 장남이라고 해도 왕세손이라 책봉되기 전까지는 원손(元孫)이라고 불렀다. 조선에서는 동궁으로 정립된 왕세손은 왕세자처럼 저하의 경칭을 사용하기도 했으나, 원래 왕세손에게는 각하가 공식적인 경칭이었다. 인조 27년 2월 19일

세자가 공석일 때에는 세손이 동궁, 저궁(儲宮), 춘궁 등의 세자를 일컫는 별칭으로 불렸다. 영조실록 125권, 영조 51년 11월 30일 계묘 4번째기사. 세손(정조)을 저궁이라 한다. 영조실록 126권, 영조 51년 12월 22일 을축 5번째기사

2. 중국의 경우

중국에서는 서진 혜제의 아들이자, 가남풍의 흉계에 피살당한 민형태자 사마휼의 장남인 사마장이 사마륜에 의해 황태손으로 책봉된 것이 시작이었다. 황태손이 등장하는 경우는 두 가지로, 황태자가 사망해 황태손으로 책봉되거나, 황태자가 살아 있는 상태에서 황태자의 아들이 황태손으로 책봉한 사례가 있다. '적자는 있으되 적손은 없다'는 예기의 내용에 따라, 황태자가 없을 때 황태손을 봉하는 것이 원칙이었다. 그러나 당고종은 황태자 시절의 중종이 낳은 이중윤을 황태손으로 세웠고, 신하들이 전술한 예기의 내용을 근거로 삼아 옛 제도에 없는 일이라고 반대하자 '나로부터 옛 것을 세우면 어떠한가?'라며 책봉을 강행해 원칙이 깨졌다.

3. 한국의 경우

한국사 최초의 왕태손은 신라 조분 이사금이다. 벌휴 이사금이 죽자 석골정의 아들인 '태손(太孫)'이 나이가 어리므로 내해 이사금을 왕위에 세웠다고 하는데 왕태손에 대한 최초의 기록이다.[2]

고구려에서 왕태손으로 책봉된 인물은 문자명왕이다. 장수왕의 태자 조다가 일찍 죽자 손자 나운을 '태손(太孫)'으로 삼은 기록이 있다.[3]

왕의 후계자로 정해진 손자이지만 태'자'로 봉한 사례론 신라 소성왕이 있다. 원성왕의 손자로 태자 인겸이 일찍 죽자 둘째 아들 의영을 태자로 삼았지만 의영도 일찍 죽는다... 결국 인겸의 장자 준옹을 '태자(太子)'로 삼는다.[4]

고려의 유명한 왕태손은 충렬왕이다. 고종의 태자 원종의 아들인 왕심은 '왕태손(王太孫)'으로 봉해져 이후 태손 → 태자(세자)[5] → 국왕으로 즉위하는 정석적인 테크를 탄다. 고려사절요 기록으론 충렬왕 이전엔 의종의 손자 역시 태손으로 봉해졌다고 한다.[6]

조선왕조는 태종 양녕대군을 폐세자하면서 양녕대군의 두 아들이 각각 5세, 3세이니 이들 중에 후사를 세우고자 한다며:
난 양녕대군 제의 아들로 (세자를) 대체하려 한다. 첫째가 사고가 난다면 즉 그 동생으로 후사를 있게 할 것이니, 왕세손(王世孫)이라 해야 하는가? 왕태손(王太孫)이라 해야 하는가? 옛일을 살펴 보고하라.
我欲以褆子代之. 長有故則立其弟以爲後, 稱爲王世孫乎? 王太孫乎? 稽古議聞.
조선왕조실록 태종실록 35권, 태종 18년 6월 3일 임오 1번째기사

신하들에게 하명한 것에서 처음으로 왕세손의 칭호가 등장한다. 해당 기사 참고로 이 기사에서는 칭호에 대한 논의가 어떻게 되었는지 결론이 적히지 않았다.[7]

조선도 중국처럼 두 가지 경우로 나누어, 헌종의 경우처럼 왕세자가 사망해 왕세손으로 책봉되거나, 단종, 현종 등 왕세자가 살아 있는 상태에서 원손이 자라 왕세손으로 책봉한 사례가 있다. 하지만 한국사에서 '세손'이라는 이미지가 가장 강한 인물은 역시 정조일 것이다. 정조는 사도세자가 살아 있는 상태에서 세손이 되었다가 임오화변 이후 동궁으로써의 세손으로 바뀌었는데, 이 과정에서 죄인의 아들이라는 트집을 잡히지 말라고 할아버지 얼굴도 모르는 큰아버지의 양자로서 대통을 잇게끔 족보를 세탁해버리는 바람에 즉위 후에도 아버지의 묘역을 능이라 칭하지 못하고 친어머니를 대비로 모시지도 못하는 아픔을 겪었다.

왕이나 왕세자의 경칭이 "전하(殿下)"나 "저하(邸下)"였던 것과 같이 왕세손의 경칭은 "각하(閣下)"로 정한다는 대목이 조선왕조실록[8]에 두 차례 등장한다. 다만, 일반적인 경우 보통 "각하"라는 호칭은 조선시대에서 정승이나 판서, 참판같은 고위 정승계층에 사용하는 경칭으로 대개 사용했다.

이에 예외가 생기는 것이 영조 38년 이후인데, 영조 38년 이후로 세손은 세자가 아님에도 "저하(邸下)"로 불린다. 세자 없는 세손이 되었기 때문으로, 영조는 직접 하교를 내려 세손을 동궁(東宮)이라 칭하고 강서원(講書院)을 춘방(春坊) 이라 하며, 위종사(衛從司)를 계방(桂坊) 으로 삼을 것을 명령한다. 또한 같은 달 왕가의 족보를 고쳐 정리하는 과정에서 세손을 왕세손 저하(邸下)라고 쓰도록 명령한다.[9] 영조는 진작 하교하려다 알맞은 고사를 몰라서 지체했다는 설명과 함께, 자신이 명나라 고사에 의거하여 세손의 이름을 바로잡는 것이라고 밝혔다. 따라서 사도세자 사망 전 세손은 각하이며 사도세자 사망 후 세손은 저하이다.

의경세자의 아들 월산대군이나 소현세자의 아들 석철 같은 경우는 원손임에도 왕세손이 되지 못하고 세자의 동생 해양대군 봉림대군이 세자가 되었다. 전자는 정희왕후 등의 왕실 어른들이 아직 어린 어린 원손의 나이를 감안하여 원손이 아닌 의경세자의 아우를 보위에 올렸고 그나마도 아우마저 요절한 후엔 적손은 아니지만 적손의 아우인 자을산군을 보위에 올린 것이기에 '그나마' 정통성 시비가 덜했으나,[10] 후자는 효종 사후 예송논쟁이라는 핵폭탄으로 발전하여 훗날 이인좌의 난에 이르기까지 조선 왕실을 뒤흔들었다.

4. 일본의 경우

일본에서는 현행 황실전범 제8조가 ' 황사가 되는 황자를 황태자라 한다. 황태자가 없는 때는 황사가 되는 황손을 황태손이라 한다.(皇嗣たる皇子を皇太子という。皇太子のないときは、皇嗣たる皇孫を皇太孫という。)'고 규정하고 있다. 황태손이 존재하기 위한 조건이 황태자가 없는 때라고 명시되었기 때문에 쇼와 덴노 재위 중인 1960년 2월 23일에 태어난 나루히토는 아버지 아키히토 황태자가 생존한 상태여서 황태손이 아니었다. 물론 히로히토 입장에서 나루히토는 적장손이자 황실 계승 서열 2순위였기에 실질적으로는 황태손 대접을 받았다고 할 수있다.

5. 서양

서양에서도 왕세자가 사망하면 제1왕위계승자는 맏손자(녀)가 된다. 1순위 왕위계승자는 장자건, 장손이건 따지지 않고 Crown Prince(여성은 Crown Princess)[11]라 불린다. 다만, Crown Prince는 관행적, 일반적으로 부르는 말이고, 많은 유럽국가들에서 1순위 왕위계승자에게 특별한 작위가 주어지며 이것이 공식 명칭이 되는데( 영국 프린스 오브 웨일스 스페인 프린시페 데 아스투리아스 등등) 왕세손은 1순위 왕위계승자가 되어도 이 작위가 주어지지 않는 경우가 많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1순위 계승자는 일상적으로 Crown Prince라 불린다. 동양에서는 황태자가 살아있어도 황태손 칭호가 붙는 경우도 있지만, 서양에서는 왕세자가 사망하지 않은 경우는 특별한 호칭이 없으며 그냥 2순위 왕위 계승자다. 현 스웨덴 국왕인 칼 16세 구스타프가 왕세손에서 국왕으로 즉위한 경우다. 한국에서는 찰스 3세가 왕세자일 때 태어난 장남 웨일스 공 윌리엄 엘리자베스 2세가 살아있을 때까지 '윌리엄 왕세손'으로 많이 불렀다.

6. 역대 태손/세손

6.1. 한국

한국
국가 시호 이름 조부 재위기간 비고
세손 책봉 세자 책봉/즉위/사망 기간
고구려 - 고나운
(高羅雲)
장수왕 고조다 ? 491.12. ? 문자명왕으로 즉위
신라 - 석조분
(昔助賁)
벌휴 이사금 석골정 ? 230.03.[12] ? 조분 이사금으로 즉위
- 김준옹
(金俊邕)
원성왕 김인겸 ? 799.01. ? 소성왕으로 즉위
고려 - 왕심
(王諶)[13]
고종 원종 ? 1259.
? 충렬왕으로 즉위
조선 - 이홍위
(李弘暐)
세종 문종 1448.05.05.
(세종30.04.03.)
1450.08.28.
(문종즉위.07.20.)
2년 116일 단종으로 즉위
- 이연
(李棩)
인조 효종 1649.03.30.
(인조27.02.18.)
1659.07.02.
(효종즉위.05.13.)
10년 97일 현종으로 즉위
의소세손
(懿昭世孫)
이정
(李琔)
영조 장조 1751.06.06.
(영조27.05.13.)
1752.04.17.
(영조28.03.04.)
10개월 12일 미즉위, 사망
- 이성
(李祘)
영조 장조 1759.03.10.
(영조35.02.12.)
1776.04.27.
(정조즉위.03.10.)
17년 54일 정조로 즉위
- 이환
(李烉)
순조 문조 1830.10.31.
(순조30.09.15.)
1834.12.18
(헌종즉위.11.18.)
4년 50일 헌종으로 즉위
회은황세손
(懷隱皇世孫)[14]
이구
(李玖)
고종태황제 의민황태자 영왕 - - - 사시(私諡) 추증

6.2. 중국

중국
국가 시호 이름 조부 재위기간 비고
태손 책봉 태자 책봉/즉위/사망 기간
서진 복양애왕
(濮陽哀王)
사마장
(司馬臧)
혜제 민회태자 300.06.12.
(영강01.05.09.)
301.02.05.
(영녕01.01.10.)
7개월 25일 미즉위, 피살
회충태손
(懷沖太孫)
사마상
(司馬尙)
301.06/07.
(영녕01.05.)
302.05.08.
(태안01.03.24.)
10~11개월 미즉위, 병사
남제 - 소소업
(蕭昭業)
세조 세종 493.02.26.
(영명11.01.25.)
493.08.27.
(영명11.07.30.)
6개월 2일 전폐제로 즉위
의덕태자
(懿徳太子)
이중윤
(李重潤)
고종 중종 682.04.10.
(영순01.02.24.)
684.01.03.
(홍도01.12.11.)
1년 269일 미즉위, 피살
- 완안단
(完顏亶)
태종 휘종 1132.07.03.
(천회10.05.12.)
1135.02.10.
(천회13.01.26.)
2년 223일 희종으로 즉위
- 완안경
(完顏璟)
세종 현종 1187.01.05.
(대정26.11.17.)
1189.01.20.
(대정29.01.02.)
2년 16일 장종으로 즉위
충회태손
(冲懷太孫)
완안갱
(完顏鏗)
선종 장헌태자 1215.06.18.
(정우03.05.13.)
1216.01.19.
(정우03.12.29.)
7개월 2일 미즉위, 병사
- 철목이
(鐵穆耳)
세조 유종 1293.08.01.
(지원30.06.21.)
1294.05.10.
(지원31.04.14.)
9개월 10일 성종으로 즉위
- 주윤문
(朱允炆)
태조 흥종 1392.10.06.
(홍무25.09.12.)
1398.06.30.
(홍무31.윤05.16.)
5년 269일 혜종으로 즉위
- 주첨기
(朱瞻基)
성조 인종 1411.12.04.
(영락09.11.10.)
1424.11.10.
(영락22.10.11.)
12년 346일 선종으로 즉위

7. 현재 재위중인 군주의 태손/세손 일람


[1] 황제였던 할아버지, 당 덕종이 제 1천자, 황태자인 아버지 당 순종이 제 2천자, 그리고 황태자의 후계자인 자신이 제 3천자라는 것. [2] 삼국사기 내해 이사금 본기 출처. [3] 삼국사기 장수왕 본기, 문자명왕 본기 출처. [4] 삼국사기 원성왕 본기 출처. [5] 원종 대에 원 간섭기가 시작되어 충렬왕은 태자에서 세자로 격하된다. [6] 고려사엔 단지 왕손으로만 나옴. [7] 태종은 셋째 충녕대군을 세자로 세우고 싶어하면서도 끝까지 적장자 승계 원칙에 대한 집념을 버리지 못했다. 이러한 태종의 고민은, 해당 기사에 많은 사람들에게 후사를 어떻게 해야 하는지 물어보는 부분에서 역력히 드러난다. 한낱 왕태손이니 왕세손이니 하는 자질구레한 호칭 문제가 중요한 때가 아니었던 것. 하지만 한국인들이 모두 그 결론을 알듯이 이쪽은 무인정사의 명분 때문에 어쩔 수 없이 요식행위로 시도했을 가능성이 크다. 양녕대군의 아들들로 계승시켰다면 실제 역사상의 사도세자 임오화변 같은 사건이 350년 정도 일찍 진작에 발생했을 것이다. 실록을 보면 한상경 등의 신하들 상당수는 세손 책봉에 긍정적인 입장이었지만 유정현과 박은이 총대 메고 택현을 주장하자 점점 논의가 점복을 거쳐 택현으로 흐르더니 마침내 태종이 제경들이 모두 불가하다 하니 택현을 하겠다고 선언하기 때문이다. [8] 인조실록50권 - 인조 27년. 단, 1649년의 기록으로 여기서 등장하는 왕세손은 1645년에 승하한 소현세자의 아들이 아닌 봉림대군의 아들이자 훗날 현종을 이름이다. 영조실록77권 - 영조 28년. [9] 영조실록 100권 - 영조 38년 [10] 이쪽은 예종의 양자로 들이려면 오히려 적장자가 아니어야 한다는 조건상 오히려 할 말도 있었다. [11] 독일어 Kronprinz, 스페인어 Príncipe heredero, 프랑스어 Prince héritier 등등 영어의 Crown prince와 같은 뜻의 단어가 각 나라마다 있다. [12] 단 태손 재위는 196년 4월에 끝났다. [13] 즉위 후 왕거(昛)로 개명 [14] 이구는 대한제국 멸망 이후, 그것도 순종 사후에 태어났기 때문에 실제 공식적으로 대한제국의 황태손이 된 적이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