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게르트 폰 룬트슈테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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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일:나치 독일 국장.svg
독일 국방군 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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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lbgcolor=#666><colcolor=#fff> 초대 독일 남부집단군 사령관
게르트 폰 룬트슈테트
FM Gerd von Rundstedt
파일:Bundesarchiv_Bild_183-S37772,_Gerd_v._Rundstedt.jpg
이름 Karl Rudolf Gerd von Rundstedt
카를 루돌프 게르트 폰 룬트슈테트[1]
출생 1875년 12월 12일
프로이센 왕국 작센주 아셔슬레벤
사망 1953년 2월 24일 (향년 77세)
독일연방공화국 하노버
복무 독일 제국군 (1892년 ~ 1918년)
독일 국가방위군 (1918년 ~ 1933년)
독일 국방군 (1933년 ~ 1945년)
최종 계급 원수(Generalfeldmarschall)
신장 170cm
주요 참전 폴란드 침공
프랑스 침공
바르바로사 작전
키예프 공방전
아르덴 대공세
주요 서훈 백엽 검 기사 철십자 훈장

1. 개요2. 생애3. 평가4. 인종 학살 범죄에 대한 동조5. 기타6. 대중매체7. 주요 보직 내역8. 진급 내역9. 주요 서훈 내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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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파일:게르트 폰 룬트슈테트.jpg
제1차 세계 대전, 제2차 세계 대전에서 활약한 독일 국방군 장군이다. 최종 계급은 육군 원수. 제2차 세계 대전에서 활약한 독일군 지휘관 중 최고참급 인물이었다.[2]

어느 나라를 막론하고 대체로 고참 군인들은 새로운 패러다임에 대해 적대적이어서 고정관념에 사로잡혀 전쟁을 망치는 경우가 많았지만,[3] 룬트슈테트는 혁신적인 후배들의 개념을 적극 받아들여 2차 대전 초반기의 독일군 무적 신화를 이루는 데 큰 공헌을 하였다.

2. 생애

2.1. 초기 이력

파일:attachment/Gerdv.jpg
▲ 1차 대전 당시의 모습

프로이센 왕국 융커( 지주 계급) 군인 집안에서 태어났다. 프리드리히 대왕 이래 룬트슈테트 가문의 모든 남자는 육군으로 복무했다고 한다. 어머니 프랑스계로서 위그노(신교도) 출신이라고 한다. 그래서 어릴 때부터 육군 유년 사관학교에 다녔으며, 베를린의 사관학교를 나왔다. 원래 기병이 되고 싶어했으나 기병은 돈이 많이 들었기 때문에 보병으로 임관하여 83연대의 장교후보생으로 입대하였다. 이후 여러 가지로 지도력으로나 능력으로 두각을 나타내어 독일 육군의 엘리트 코스라고 할 수 있는 하노버의 참모학교에 입학하였다. 3년의 과정을 마친 후 여러 부대에서 참모장교로 종군했다.

제1차 세계 대전이 발발하자 육군 제22 사단 참모장으로서 서부전선으로 파병되어 벨기에 침공에 참가하였다. 이때 소령으로 진급했으며 다시 펠릭스 그라프 폰 보트머가 지휘하는 제19군 밑의 제86사단의 참모장으로 전임되어 동부전선에 참가하였다. 이후 예비 군단의 참모장으로 승진하였다가 러시아 제국과의 휴전으로 다시 서부전선에 돌아왔다. 이후 15군단으로 참모장으로서 알사스 전선에서 싸웠으며 이때의 분투로 철십자 훈장을 받았다. 그는 대전 기간 동안 가장 유능했던 참모장교의 하나였다.

2.2. 전간기

2.2.1. 바이마르 공화국 시절

1차 대전은 독일의 패배로 막을 내리고 베르사유 조약에 의해 독일군은 많은 제약을 받게 되었다. 게다가 독일의 왕정은 폐지되고 공화정으로 바뀌었다. 룬트슈테트는 많은 프로이센 출신 장교들처럼 왕당파로서 공화정을 지지하지 않았지만, 그렇다고 해서 극우 극좌 세력의 쿠데타는 반대했다. 어쨌든 당시 육군총사령관 한스 폰 젝트 상급대장이 지휘하는 독일군은 국가 안의 국가처럼 행동했고, 그들의 이념은 대체로 우파였으나 겉으로는 정치적 중립을 지키고 있었다.

룬트슈테트는 기병사단 참모장을 거쳐 1926년에 소장으로 진급했다. 그리고 여러 참모 자리를 거쳐 마침내 지휘관으로 영전, 브레슬라우 주둔 제2기병사단장이 되었다. 이후 중장이 되었고, 이는 당시 독일군에서 가장 높은 계급이었다. 1932년 독일 총리였던 프란츠 폰 파펜 프로이센 자유주 정부를 지배하던 독일 사회민주당 전복하기 위해 계엄령을 선포하려고 했고, 룬트슈테트는 이에 항의했으나 어쩔 수 없이 계엄군을 지휘하게 되었다.

이후 룬트슈테트는 대장으로 승진하여 독일 동부 지역을 총괄하는 제1사령부의 사령관이 되었다.

2.2.2. 나치당 집권 초기

파일:external/www.lexikon-der-wehrmacht.de/RundstedtGv-R.jpg
▲ 1938년. 상급대장 시절 사진.

1933년 1월 아돌프 히틀러는 독일 내에서 권력을 잡게 되자 베르사유 조약 폐기를 외치며 재군비를 선언했다. 룬트슈테트는 그 전까지는 정치에 무관심했고 촌스러운 나치당을 싫어했지만, 이런 히틀러의 정책은 매우 지지했다. 하지만 장교들끼리 모임에서는 히틀러를 보헤미아 상병이라는 멸칭으로 불렀다.
그러나 룬트슈테트는 군에서 가장 노골적인 나치빠였던 발터 폰 라이헤나우 총참모장에 오르는 것은 군의 최고 원로로서 저지시켰다. 이는 라이헤나우가 독일군 전체를 나치의 하부 조직으로 만들 수도 있다는 우려 때문이었다.

히틀러는 룬트슈테트가 나치에 비협조적이라는 것을 알고 있었기 때문에 그를 달래려고 노력했다. 룬트슈테트는 군에서 히틀러 제거 음모가 벌어지고 있다는 것을 알고 있었고, 여러 번 그를 포섭하려는 시도도 있었다. 그러나 그는 음모에 참가하지도 않았지만, 이를 고발하지 않고 방관만 하고 있었다. 사실 룬트슈테트는 히틀러의 도박에 영국, 프랑스가 개입하여 아직 전쟁 준비가 안 된 독일이 망할지도 모른다는 우려를 하고 있었으나, 이런 도박이 모두 대박으로 끝나자 히틀러의 모험을 방관하는 한 사람이 되고 만다.

룬트슈테트는 이미 60세가 넘는 고령이었고 건강도 안 좋았기 때문에 1938년 독일의 주테덴란트 병합 이후 예편했다. 그러나 개인적으로 히틀러와의 사이는 양호했고, 히틀러에게 "전쟁이 벌어진다면 본관은 현역에 복귀하겠습니다"라고 약속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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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 폴란드 전역

1939년, 체코 분할을 마무리한 이후, 히틀러는 폴란드 단치히 회랑을 내놓으라 협박했고 폴란드가 이에 강하게 반발하며 결사항전을 외쳐 전운이 고조되었다. 히틀러는 폴란드군이 독일 국경 도시의 방송국을 기습, 점거했다는 사건을 조작해서 1939년 폴란드 침공을 시작했다. 영국 프랑스는 더이상 독일을 가만 둘 수 없었고, 결국 선전포고를 하여 제2차 세계 대전 헬게이트가 열린다.

룬트슈테트는 전쟁이 임박하자 현역으로 복귀해서 남부집단군을 맡았다. 그의 부대는 슐레지엔 슬로바키아에서 출발해서 폴란드 남부를 휩쓰는 역할을 맡았다. 참모장은 육군 중장 에리히 폰 만슈타인 장군이었고 작전 주임은 귄터 블루멘트리트 육군 대령이었다. 룬트슈테트는 부하들에게 많은 재량권을 부여했고, 본인 스스로는 그저 이런 부하들을 교통 정리하는 역할만을 맡았다. 그래서 작전의 세부 사항에 대해서는 전혀 간섭하지 않았다. 임무형지휘를 잘 실천했던 군인 중 하나.

룬트슈테트는 부하들에게 잔혹 행위를 지시하지는 않았다고는 주장하나, 그의 지휘권 아래로 전입해 온 슈츠슈타펠이 벌이는 여러 전쟁 범죄( 포로 민간인 사살)에 대해서 잘 알고 있었지만 적극적으로 저지하지는 않았다. 그는 학살 부대로 이름 높은 SS 아인자츠그루펜이 자기 부대의 관할에서 학살극을 벌이는 것을 막기는 했지만, 그의 부대가 계속 전진한 후 이는 흐지부지 된다. 이는 후에 그가 전범으로 기소되는 원인이 된다. 그는 사령관이었기 때문에 휘하 부대의 전쟁 범죄에 책임이 있기 때문이다.

룬트슈테트의 부대는 전쟁이 벌어진 지 11일 만에 목표인 르부프에 도달했고, 여기서 9월 17일부터 폴란드를 동쪽에서 침공해 온 소련군 육군 부대와 만났다. 10월 6일 폴란드군의 저항은 끝났고, 룬트슈테트는 바로 그 직후인 10월 25일에 서부 전역을 위한 A집단군 사령관에 임명되었다.

2.4. 프랑스 전역

그가 맡은 A집단군은 프랑스 침공에서 중앙에 해당했고, 그의 북쪽의 B집단군은 페도어 폰 보크가 맡아서 벨기에- 네덜란드 국경에 포진되어 있었고 남부의 C집단군은 빌헬름 리터 폰 레프가 맡아서 프랑스-독일 국경인 마지노 선을 바라보고 있었다. 룬트슈테트의 부하들은 폴란드 전역의 남부집단군에서 그대로 옮겨왔으나 참모장인 만슈타인은 군단장으로 승진했기 때문에 그 자리는 게오르크 폰 조덴슈테른 중장이 맡았다.

당시 서부에서는 가짜 전쟁이 벌어지고 있었다. 즉 영프가 선전포고는 했으나 적극적인 교전 행위는 벌어지지 않고 있었다. 히틀러는 영프의 준비가 안된 11월에 1차 대전의 슐리펜 계획과 비슷한 공세를 시작하기로 했으나, 독일군 지휘관들은 폴란드 정복 후 부대의 재편성을 위해서 시간을 요구했고, 마침내 공세는 미뤄졌다. 독일군은 발트 해에 갇힌 크릭스마리네의 통로를 확보하기 위해 1940년 1월에 베저위붕 작전을 개시하여 덴마크 노르웨이를 순식간에 점령했다. 이 동안 독일군 수뇌부는 서부 공세에 대해 격론을 벌였는데, 천재적인 전략가인 에리히 폰 만슈타인은 슐리펜 계획을 따라하다가는 1차 대전과 같은 운명에 처할 것이라고 판단해, 기갑 부대가 아르덴 숲을 가로질러 프랑스 북부를 침공하는 작전안, 일명 낫질 작전을 내놓았고, 룬트슈테트는 이를 적극 지지하여 실행되게 되었다.

1940년 5월, 룬트슈테트가 지휘하는 A집단군은 만슈타인의 작전안을 따라 영프군의 의표를 찔러 대성공을 거두었고, 허를 찔린 영프군은 독일군에 비해 전력이 뒤지지 않았으나 순식간에 무너져 버려 패닉 상태에 이르렀다. 한편 룬트슈테트는 부하들이 세운 작전의 세부 사항에 거의 간섭하지 않았으나, 부하들의 의견 조정에는 큰 힘을 발휘하였다. 클라이스트 기갑집단을 지휘하던 에발트 폰 클라이스트는 자기 지휘 하의 하인츠 구데리안의 지나친 전진을 우려하여 정지 명령을 내렸으나, 구데리안이 이를 무시하고 계속 전진하자 클라이스트는 구데리안의 지휘권을 박탈하려고 했다. 그러나 룬트슈테트는 빌헬름 리스트를 통해 이들을 중재하여 구데리안의 지휘권을 유지시켰고 결국 이들은 20만의 영프군을 영불 해협에 가둬놓아 독일군의 승리에 결정적인 역할을 하였다. 만슈타인 회고록에서 또한 자신의 작전안이 채택되도록 한 것은 룬트슈테트의 공으로 돌리고 있었다.

이 공적으로 룬트슈테트는 원수에 이르렀고, 그는 다시 예편하려고 했으나 히틀러는 그가 현역에 있기를 고집했다.

하지만 룬트슈테트가 원수에 임명된 것은 히틀러와의 관계 때문이 크다. [ 전격전의 전설 ] 에 의하면 룬트슈테트 지휘하의 A집단군에는 클루게, 리스트, 부슈의 3개 야전군 외에 새로 만들어진 22 "클라이스트" 기갑군이 배속되어 있었다. 그 밑에는 41 "라인하르트" 기갑군단과 19 "구데리안" 기갑군단, 14 "비터스하임" 차량화군단이 배속되어 있었다. 이들은 룬트슈테트의 '지휘하'에 프랑스를 초고속으로 침공하여 영국군, 벨기에군, 프랑스군을 벨기에와 네덜란드 위에 인접한 됭케르크까지 몰아넣게 되었는데, 이때 A집단군 수뇌부와 휘하 기갑부대, 그리고 육군 총사령부와 독일 국방군 총사령부 간의 의견 충돌이 생겼다. 위에 언급된 폰 클루게의 제4군의 밑에 호트의 15 기갑군 밑에는 에르빈 롬멜이 지휘하던 제7기갑사단이 있었다. 제7기갑사단은 마스 강 도하를 포함하여 급속의 전진을 했던 가장 기동적이던 기갑부대 중 하나였다. 이런 기갑사단과 구데리안과 라인하르트로 대표되던 기갑군단장들은 빠른 진격을 원했다. 그래서 됭케르크에서 ( 다이나모 작전으로 알려진) 퇴각 작전을 처음부터 무효화하여 포위 공세를 유지하여 섬멸하고자 했다. 이때 영국군, 프랑스군, 벨기에군은 지속된 와해로 전투력이 상실된 상태였다. 하지만 클루게와 룬트슈테트(야전군, 집단군 사령관들)은 히틀러와 그 주위의 독일 국방군 총사령부의 '간격 좁히기' 계획에 찬성하는 상태였으며 육군 총사령관인 브라우히치 원수는 빠른 진격에 찬성했다. 즉 사단장+군단장+육군 총사령관 vs 야전군/집단군사령관+히틀러 의 구도로 됭케르크를 두고 대치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런데 당연히 히틀러는 부하들에게 자신의 고집을 관철 시켰고, 결국 총사령관인 브라우히치가 지휘권을 박탈당해 자신의 부하인 룬트슈테트 상장에게 진격을 '부탁'하는 처지까지 이르렀다. 하지만 룬트슈테트는 히틀러의 말에 동의하면서 진격을 허용하지 않았고 따라서 다이나모 작전의 성공을 프랑스군과 영국군에게 '바쳤다'는 것이다.

여기에는 히틀러의 꼬인 성격 탓이 있다고 저자인 하인츠 프리저는 분석하고 있다. 원래 만슈타인이 기획하(고 히틀러의 동의를 얻은)였던 지헬슈니트(낫질)작전은 원래는 아무도 성공하지 못했다고 여겼으나 사실은 수뇌부들조차 그 성과를 의심하는 엄청난 승리를 거뒀다. 그러자 히틀러는 이 공이 본인의 것이라고 착각하기에 이르렀고 이제 본인만이 옳다는 독선에 빠졌던 것이다. 그래서 브라우히치와 할더(육군 총사령부의 중심인물들)를 신임하지 못하게 되었고 결국 본인의 뜻에 동의하는 룬트슈테트와 마음이 맞았다는 것이다. 할더는 본인의 일기장에 ' 자신의 상관이 완전히 기가 죽었다'고 서술했다.

즉 룬트슈테트가 원수에 이르렀다는 것은 어쩌면 히틀러가 본인의 실수(다이나모 작전을 방관한 것)를 합리화하고, A 집단군의 마지막 실책을 인정하기 싫어서 미방책을 만든 결과에 지나지 못할 수도 있다는 것이다.

2.5. 독소전쟁

파일:external/upload.wikimedia.org/Bundesarchiv_Bild_146-1987-121-09A%2C_Russland%2C_Hitler%2C_Mussolin%2C_von_Rundstedt.jpg 파일:external/upload.wikimedia.org/360px-Bundesarchiv_Bild_146-1987-047-20%2C_Gerd_v._Rundstedt.jpg
▲(좌) 1941년 베니토 무솔리니(中), 아돌프 히틀러(右)와 함께. ▲(우) 1942년의 모습.

히틀러는 프랑스를 정복한 후, 소련을 정복하기 위한 계획을 착수했다. 잘 알려져 있지 않지만, 히틀러는 영국 본토 항공전이 벌어지기도 전에 이미 독소 불가침조약을 무시하고 소련에 대한 공격안을 준비하고 있었다.

독일 군부는 바이마르 공화국 이래 친소적인 태도를 보이고 있었고, 룬트슈테트는 히틀러의 소련 침략안이 영국과의 전쟁이 끝나지 않은 상황에서 양면전쟁을 불러올 것이라고 해서 회의적으로 봤다. 그러나 히틀러의 결심은 물론이고 당시 독일군 고위 장성들을 비롯해 전체가 낙관론에 젖어있어 이일은 되돌릴 수 없었고, 결국 독일군은 10~12주안에 소련군을 우랄산맥으로 몰아낼수 있다는 가정하에 바르바로사 작전을 기획한다. 당시 독일군은 쉽게 소련을 정복할 수밖에 없다고 결론 내렸고 모스크바 공방전 당시 독일군의 동계대비가 거의 없었다는 사실이 이를 증명한다..

룬트슈테트는 남부집단군을 맡기로 되어 있었고 사령부를 폴란드의 남동부로 옮겼다. 남부집단군은 폴란드 남동부에서 출발하여 루마니아군과 함께 우크라이나를 가로질러 키예프를 점령하고, 코카서스 유전 지대를 점령하기로 되어 있었다. 이로써 1941년 6월 22일 바르바로사 작전은 개시되었다.

남부집단군에 맞서는 소련군은 전해에 사령관으로 재임했던 게오르기 주코프(당시는 총참모장)가 엄격한 훈련으로 단련시킨 키예프 군관구 소속 부대들로 방어태세가 잘 갖춰져 있었다. 그리하여 남방집단군은 중앙집단군이나 북방집단군에 비해 진격이 매우 느렸고, 7월에는 우만 전투에서 미하일 키르포노스 상장이 지휘하는 소련군을 이기기는 했지만 크게 피해를 입었다. 어쨌든 남방집단군은 8월에는 목표인 키예프까지 도달하기는 했으나, 소련군은 60만이라는 대병력으로 키예프를 수비하고 있었다. 히틀러는 키예프를 점령하기 위해 모스크바를 향한 중부집단군의 진격을 멈추고 구데리안의 제2기갑군을 남방집단군에 원조하도록 했으며, 결국 9월에 소련군은 세묜 부됸니 원수의 졸렬한 지휘 때문에 대패했고, 키예프는 독일군의 수중에 떨어진다.

다른 지역의 독일군과 마찬가지로 남부집단군은 개전 이래 연속적으로 격전을 치러 보충과 재편이 절실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히틀러는 남부집단군에게 북코카서스와 무려 스탈린그라드까지(!) 진격하도록 명령을 내렸다. 하지만 이미 러시아에는 겨울이 왔고, 소련 원정을 하는 독일군 전체가 추위와 굶주림에 떨게 되었다. 룬트슈테트 또한 이런 어려움 때문에 지나치게 스트레스를 받아 폴타바에서 심장마비를 일으켜 혼수 상태에 빠지기도 했다.[4] 이때 룬트슈테트 휘하이자 남부집단군의 선봉인 에발트 폰 클라이스트가 이끄는 제 1기갑군이 돈 강 하구의 요충지인 로스토프로 진격하며 제1차 로스토프 전투가 발발한다. 로스토프는 코카서스를 향한 남부 러시아의 관문이자 코카서스에서 산출되는 석유 운송 통로가 지나는 곳 이기도 했다.

11월 20일 1기갑군은 로스토프 시내에 진입했다. 하지만 얼마지나지 않아서 소련군은 사방에서 격렬한 반격을 가했고 시내에 진입한 독일군은 후방과 보급로마저도 위태로워지는 상황에 처했다. 히틀러는 요충지인 로스토프 점령 소식에 고무되어 수송기를 통한 보급을 약속하며 사수 명령을 내렸으나 당연히(...) 항공 보급은 턱도 없이 부족했다. 이거 어디서 많이 보던 장면 같다 결국 명령을 지키다가는 로스토프가 제1기갑군의 무덤이 될 판이 되자 클라이스트는 철수를 명령했다. 룬트슈테트는 히틀러의 금지 명령에도 불구하고 이를 재가했고 아예 1기갑군이 안전지대까지 완전히 후퇴하도록 조치했다. 그러나 히틀러는 이에 격분하여 재차 현지 사수를 엄명했다. 지나친 간섭에 지친 룬트슈테트는 사임의사를 표명하는 한편 제1 기갑군의 후퇴를 완료시켰다. 결국 룬트슈테트는 12월 1일 파면되었다.[5] 1차 로스토프 전투에서 소련군은 독일군을 궤멸시키지는 못했지만 야전군 제대의 독일군의 진격을 격퇴함으로써 최초의 전략적 승리를 거둔 것으로 평가받았고 따라서 그 충격과 영향이 컸다. 특히 승리만을 거두던 독일군이 후퇴했다는 사실에 격분한 히틀러는 순간적인 상황 변화를 받아들이지 못하고 룬트슈테트를 해임한 직후인 12월 3일, 1기갑군 사령부가 위치한 마리우풀로 날아 왔다.

하지만 현지 상황은 히틀러의 예상 이상으로 심각했다. 거기다 현장의 라이헤나우나 요제프 디트리히 같은 친나치 장교들마저도 후퇴가 어쩔 수 없었다는 점을 설명했고, 히틀러도 고집을 꺾어 룬트슈테트와 클라이스트가 어려운 상황에서도 적절하게 행동했음을 인정할 수 밖에 없었다. 결국 히틀러는 남부집단군이 부대재편에 들어가는 것을 동의하는 한편, 룬트슈테트에게 사과를 하여 명예를 회복시키고 '해임' 아닌 병가로 인한 사임으로 국방군에 공표되었다. 9일 후, 룬트슈테트는 생일 선물로 총통에게서 무려 25만 라이히스마르크를 받았는데 당시 국방군 장성들[6]이 히틀러에게 받은 이러한 거액의 현금과 미술품 등은 전혀 세금이 책정되지 않은 사적인 국가 재산 운용으로서 전후에 큰 비판을 받게 된다. 참고로 독일군 상급대장의 월급은 2000라이히스마르크, 원수는 4000라이히스마르크였고 여기에 각종 혜택이 주어졌다.[7]

2.6. 서부전선

파일:external/img.timeinc.net/1101420831_400.jpg 파일:external/2.bp.blogspot.com/Bundesarchiv_Bild_101I-718-0149-18A%252C_Paris%252C_Gerd_v._Rundstedt%252C_Erwin_Rommel.jpg
▲(좌) 1942년 8월 31일 타임지 표지로 선정된 룬트슈테트. (우) 에르빈 롬멜와 함께.

룬트슈테트는 달리 히틀러로부터 다시 부름을 받아 서부전선 총사령관(OB WEST)을 맡아 프랑스에 부임하게 되었다. 그는 이 자리에서 좋은 부대를 많이 양성하였으나, 만드는 족족 동부전선에 빼앗겼다. 결국 그는 껍데기만 남은 부대로 대서양을 수비하게 되었다.

파울 요제프 괴벨스는 " 대서양 방벽"을 신나게 선전했으나 실제로 대서양에서 증원은 아무 것도 없었고 동부전선의 무게추가 소련 쪽으로 기운 1943년 11월이 되어서야 에르빈 롬멜이 부임해 오면서 증원이 시작되었다. 그러나 롬멜과 룬트슈테트는 기갑 부대의 배치 지점에 대해 이견을 보였다. 즉 롬멜은 기갑부대를 노르망디 해안 가까이 배치해야 한다고 주장했는데 룬트슈테트는 노르망디 보다는 도버 해협을 주목했고 그렇기 때문에 더 서쪽(칼레 방면)에 배치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결과적으로 둘은 기갑 부대를 나눠 배치하는 것으로 타협했다.

룬트슈테트는 노르망디에 적이 상륙하더라도 기갑부대가 신속히 접근할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했으나, 제공권을 연합국이 장악하고 있었기 때문에 이는 불가능했다. 그래서 1944년 6월, 연합국이 상륙하자마자 노르망디에 분산 배치된 독일 기갑 부대는 순식간에 제압되었다.[8]

거기다가 룬트슈테트는 히틀러에게 영미 연합군과 정전을 할 것을 권유하기도 했는데,[9] 이는 히틀러를 격분시켜서 룬트슈테트는 파면되었다. 후임으로 귄터 폰 클루게가 서부전선 총사령관에 올랐다.[10] 그러나 8월 클루게는 히틀러 암살 미수 사건에 가담했다는 의심을 받아 베를린으로 소환 명령을 받았고, 클루게는 소환 중 음독 자살했다. 이뿐만 아니라 롬멜도 혐의를 받아 히틀러의 자살 명령을 받고 자살했다. 그래서 발터 모델이 클루게의 후임으로 서부전선 총사령관과 B집단군 사령관을 겸직하였고 프랑스 영토에 주둔 중인 독일군이 서부 방벽으로 차례차례 철수한 9월 4일 무렵에 룬트슈테트가 서부전선 총사령관에 재차 임명되었다.

독일군은 연합국의 공세 때문에 프랑스에서 후퇴하여, 1944년 12월의 전선은 1940년 봄의 프랑스 침공 때와 비슷한 그림을 그리고 있었다. 히틀러는 이에 영감을 받아 아르덴 대공세를 계획했다. 룬트슈테트는 제공권의 부재를 들어 이를 반대했으나, 역시 히틀러의 결심은 말릴 수 없었고, 결국 명령에 따라 실행할 수밖에 없었다. 1944년과 1940년의 다른 점은 독일군에는 제공권이 없었고, 또 하나는 4년간 버전업된 독일군의 티거 판터 탱크는 1940년 주력인 2호 전차보다 훨씬 무거웠기 때문에 아르덴 숲을 통과하기 힘들었다. 결국 공세는 철저히 실패했고 더구나 이 공세는 소련군에 맞서던 동부 병력을 빼돌려서 했기 때문에 소련군은 이제 독일 본토까지 유린하면서 베를린으로 다가왔다. 룬트슈테트는 빌헬름 카이텔에게 히틀러에게 정전을 수용하도록 설득해 달라는 부탁을 하지만,[11] 아첨꾼 카이텔은 이를 히틀러에게 일러바쳤고, 격분한 히틀러는 1945년 3월에 다시 룬트슈테트를 파면하였다.

2.7. 전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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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45년 뉘른베르크 국제군사재판 증인으로 출두한 룬트슈테트.

룬트슈테트는 1945년 5월에 포로로서 미군에 체포되었고, 심문 과정 중 다시 심장마비를 일으켰다. 이후 전범 혐의로 전범 재판에 넘겨져야 했으나 건강 악화와 정치적인 이유 등으로 실제로 법정에 서지는 않았다. 다만 뉘른베르크 국제군사재판 피고인이 아니라 증인으로 서기는 했다. 재판 과정을 담은 사진과 영상 자료에는 계급장과 약장, 휘장이 사라진 군복 차림으로 증언하는 그의 모습이 자주 등장한다.

그의 유일한 외아들 한스 게르트 폰 룬트슈테트 (1903~1948)은 집안의 전통대로 군에 들어가지 않고 교수로 일했고, 후에 소위로 징집되었으나 전쟁에서는 생존해서 포로가 되었다가 아버지보다 먼저 으로 사망했다.

3. 평가

제2차 세계 대전에 참전한 독일군 최고참 지휘관으로서 주목할 만한 리더십을 발휘해서 독일군의 초기 대승리에 큰 역할을 했다. 1990년대 이전의 냉전 시기만 해도 동부전선에 대한 연구가 매우 부족했기에, 20세기 중반의 영미 군사학계에서 동부전선에서 활약한 다른 독일 장성들이 그림자 속의 장군이라면 북아프리카 전역 에르빈 롬멜이나 룬트슈테트는 양지의 장군이라는 표현이 있을 정도이다.

다만 최근 프랑스 침공에서의 전격전을 새로이 연구한 서적에서 룬트슈테트는 클라이스트 기갑집단의 진격 대형을 엉망으로 만들어 작전 초반에 병목 현상이 일어나게 했을 뿐 아니라 연합군의 반격을 과대평가해 됭케르크의 기적을 초래한 결정적인 인물로 히틀러와 함께 비판받고 있다. 전사 학계는 기밀 군사 문서가 시간의 흐름에 따라 해제되어 외부에 공개되면서 평가가 뒤바뀌는 경우가 많으므로 룬트슈테트만이 특별한 예는 아니다.

《전격전의 전설》의 저자 카를 하인츠 프리저 대령 뿐 아니라, 《독일군 신화와 진실》의 저자 게르하르트 P. 그로스 대령 또한 프랑스 점령 당시 기갑부대의 진군을 멈추게 해서 됭케르크의 기적을 일으키게 만든 장본인으로 룬트슈테트를 지목하고 있다. 즉, 그는 기존에 알려졌던 것만큼 기갑부대를 전적으로 신뢰하고 작전을 맡기지는 않았던 셈이다[12].

4. 인종 학살 범죄에 대한 동조

파일:상세 내용 아이콘.svg   자세한 내용은 독일 국방군의 전쟁 범죄 문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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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후 슈츠슈타펠의 점령지 주민 학살에 대해서는 서방 세계에서 지속적인 비판을 받았지만 독일 국방군이 이에 동참한 것은 냉전 시대의 서독 연방군의 필요성에 의해 긴 시간 가려져 있었다. 그러나 최근의 연구에서 독소전쟁 당시 남부집단군 점령지에서의 독일 국방군의 학살 혐의가 밝혀지고 룬트슈테트의 명령이 공개되면서 크나큰 반향을 일으키고 있다.

당시 6군 사령관 발터 폰 라이헤나우 강조 명령을 통해 " 동부 전선에서는 장병들이 통상적인 전쟁 방식이 아니라 유대인-볼셰비즘을 절멸시키는 전사로서 싸워야 한다."고 문서화하여 휘하 부대에 공람시키며 명시적인 명령을 통해 키예프 유대인 학살로 대표되는 SS의 아인자츠그루펜 같은 학살 부대들의 만행에 구체적인 도움을 주었다는 사실은 이미 잘 알려져 있다. 더욱 큰 문제는 키예프 유대인 학살 이후 남부집단군 사령관 룬트슈테트가 이러한 강조 명령에 대하여 "적극 지지한다."고 성명을 발표했다는 점이다. 군의 명령이라고 쉴드 칠 구석도 없는 것이, 라이헤나우는 룬트슈테트에게 까마득한 후배였고 선배의 군사 작전을 망칠수도 있으며 군사적으로도 아무 쓸모없던 본 명령은 하극상으로 취급해도 무관하였다. 페도어 폰 보크 빌헬름 리터 폰 레프가 이 논리로 라이헤나우 명령을 씹었고[13] 그에 대해서 어떠한 군말도 나오지 않았던 점에서 룬트슈테트 본인이 이에 적극적으로 동조하였다는 것을 부인할 수 없다.

전범 재판 당시 룬트슈테트는 '나는 이러한 사실을 잘 몰랐다.'고 부인하였고 실제로 그는 전범 재판에서 이에 대한 혐의를 받지 않았지만, 최근 독일 전사학계에서 독일 국방군에 대한 인종 학살 범죄에 대하여 연구 결과를 발표하고 전시회를 개최할 때에는 1941년, 라이헤나우가 주도한 남부집단군의 대규모 학살이 가장 중점적으로 다뤄지고 있으며 남부집단군 예하의 4기갑군의 헤르만 호트의 “볼셰비즘과 그 살인 조직을 지지하는 유대인, 파르티잔을 섬멸하는 것은 자기 방어 조치이다.", 11군의 지휘권을 인계받은 에리히 폰 만슈타인의 11월 20일, "유대인-볼셰비키 체제는 완전히 근절되어야 한다."며 "유대인에 대한 가혹한 조치의 필요성"을 정당화하는 명령 또한 널리 알려지게 된다. 물론 호트도, 만슈타인도 전후 집필한 회고록에는 이를 언급하지 않았다.[14]

룬트슈테트는 끝까지 몰랐다고 부정했다지만 오랜 시간이 지나 기밀이 해제되어 공개된 군사 문서들은 그가 라이헤나우를 두둔한 성명이 휘하의 헤르만 호트, 만슈타인에 이르기까지 남부집단군 지휘관들과 장병들에게 어떠한 영향을 끼쳤는지 분명히 증명하고 있다. 사실상 남부집단군의 어두운 역사인 인종 학살에 그 역시 중대한 책임이 있다.

5. 기타

6. 대중매체

7. 주요 보직 내역

8. 진급 내역

9. 주요 서훈 내역


[1] 국립국어원의 외래어 표기 용례대로는 '폰룬트슈테트'로 표기한다. 게르만어권 인명의 전치사 및 관사는 뒤 요소와 붙여 적도록 하고 있다. [2] 에르빈 롬멜이나 에리히 폰 만슈타인, 발터 모델 같은 군사령관급 지휘관보다 나이도많고 짬밥이 높았던 사단장, 여단장들이 많았는데 룬트슈테트는 이런 이들을 모두 포함하여 가장 고참이었다. [3] 가장 유명한 예는 제2차 세계 대전에서도 전통적인 참호전을 고집하던 프랑스군 총사령관 모리스 가믈랭을 들 수 있겠다. 그리고 그 결과는.. [4] 그는 골초에다가 술고래였는데 상황이 나빠지자 스트레스를 이기기 위해 이 둘을 너무 많이 했다고 한다. [5] 후임자는 발터 폰 라이헤나우였는데, 그도 역시 심장마비를 일으켰고, 독일에 후송되었다가 비행기 사고로 추락사했다. 결국 룬트슈테트와 함께 해임되었던 중부집단군 사령관 페도어 폰 보크가 여기에 부임했다. [6] 에르하르트 밀히, 룬트슈테트, 빌헬름 리터 폰 레프, 에발트 폰 클라이스트, 에리히 레더, 후고 슈페를레, 빌헬름 카이텔 등이 이러한 선물을 받았다. [7] 참고로 이러한 히틀러의 뇌물을 받지 않은 국방군 장성이 있었는데 바로 에르빈 롬멜이었다. 히틀러의 이름을 들먹이며 거들먹거렸다고 욕 처먹는 롬멜이 어떻게 뇌물을 안받았냐고 할 수 있는데 롬멜은 다른 장성들처럼 영지나 돈을 받지 않은 대신 프랑스 침공 당시 7기갑사단장으로 부임시켜달라고 부탁해 관철시키는 등 자신의 보직 관련해서 히틀러에게 호의를 받았다. [8] 그러나 이는 룬트슈테트와 롬멜이 서로 다른 관점에서 바라본 탓이 컸을 뿐이다. 롬멜은 디에프 때와 같이 교두보가 형성되기 전에 신속하게 제압하는 것을 중시한 반면, 룬트슈테트는 영미 연합군의 공수부대 전력의 후방 교란과 해/공군 전력의 화력(실제로, 살레르노 만 상륙 작전 등에서 연합군의 상륙 작전을 저지하려다 함포 지원에 의해 좌절당한 사례가 있다)을 두려워한 것으로, 연합군의 화력에 귀중한 기갑 전력이 헛되이 소진되는 것을 막고 아울러 후방 교란을 막아야 반격을 효과적으로 꾀할 수 있다고 본 것이다. 어느 쪽 의견이든 일장일단이 있었다. 히틀러는 어느 한쪽의 의견을 확실하게 손들어 주지 못해 귀중한 기갑 전력을 어정쩡하게 갈라서 주기로 한 타협책을 제시했다. 하지만 히틀러의 우유부단한 결정으로 인해 결과적으로 두 견해의 단점만 극대화되어 버렸다. [9] 좀 더 정확하게 말하면 롬멜과 노르망디 전역에서의 방어선 유지 불가 및 연합군과 정전을 합의보고 들어갔는데 연공서열에 따라 룬트슈테트가 먼저 보고를 했다. [10] 서부전선의 사령관 2명을 한꺼번에 날릴 수 없었던 히틀러는 같이 휴전 및 전선 포기를 주장한 롬멜을 관리, 감독하라고 클루게에게 지시했지만 클루게도 연합군 폭격을 피해 도로변에서 대피도 해보고 전선 보고서를 받아보고 난 이후 롬멜, 룬트슈테트의 의견에 동조하게 된다. [11] 그런데 당시 통화 내용을 볼 때, 룬트슈테트의 발언은 '부탁' 수준이 아니라 ' 갈굼'이었다. 당시 독일 장군들 시각에 카이텔은 '무능한 간신배'였으므로, '최고참' 입장의 룬트슈테트가 시원하게 갈궈 버린 것. 물론 이에 대한 간신배의 대응은 당연히 '고자질'. 1951년작 전쟁 영화 <사막의 여우 롬멜(The Desert Fox : The Story of Rommel)>에서는 롬멜이 보는 앞에서 룬트슈테트가 전화로 카이텔을 갈구는 장면으로 묘사된다. [12] 애초에 군대내에서 영유아나 다름 없었던 기갑집단이었던 만큼 윗선에다가 보수적이었던 룬트슈테트를 앉힘으로서 기갑집단의 폭주를 억제하겠다는 의도가 있었던 만큼, 어찌보면 의도대로 행동했다고 할 수도 있겠다. 물론 그 결과는 본문대로다.... [13] 그래도 함부로 대할 수가 없었다. 까마득한 선배한테 반항했다가는 그나마 안 좋던 평판마저 사라질 게 뻔하니... 당연하지만 파울 하우서 앞에서도 어쩔 도리가 없었다. [14] 안토니 베버 <스탈린그라드 전투>, 볼프람 베테 <독일국방군 : 2차 대전과 깨끗한 독일군의 신화> [15] 이렇게 특이하게 튜닝된 군복을 즐겨입던 장군들이 몇 명 더 있었는데, 바로 빌헬름 리터 폰 레프 원수와 막시밀리안 폰 에델샤임 기갑대장 등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