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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족 | 수메르인 · 아카드인 · 아시리아인 · 아모리인 · 카시트인 · 칼데아인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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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어 | 수메르어 · 아카드어 · 아람어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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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빌로니아 𒆍𒀭𒊏𒆠 𐤁𐤁𐤋 Bābili / Bāḇel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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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빌론 제10왕조(신바빌로니아)의 최대 판도 | |||||
BC 1894 ~ BC 539 | |||||
위치 | 서아시아 | ||||
수도 | 바빌론 | ||||
정치 체제 | 전제군주제 | ||||
국가원수 | 왕 | ||||
민족 |
아모리인 카시트인 칼데아인 |
||||
언어 |
수메르어 아카드어 아람어 |
||||
종교 | 메소포타미아 종교, 마르두크 신앙 | ||||
주요 사건 |
BC 1894년
고바빌로니아 성립 BC 1595년 카시트 왕조 성립 BC 626년 신바빌로니아 성립 BC 539년 멸망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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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립 이전 | 이신-라르사 시대 | ||||
멸망 이후 | 아케메네스 왕조 | ||||
현재 국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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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바빌로니아는 바빌론 일대를 중심으로 번영한 왕조이다. 단일 왕조가 아니라 바빌론을 중심으로 한 모든 왕조들을 일컫는 국명이기에 학계에서는 서수를 붙여서 바빌론 제1왕조, 제2왕조, 제3왕조 등 이런 식으로 부른다. 예를 들어 함무라비 대왕의 고바빌로니아는 '바빌론 제1왕조', 이슈타르의 문으로 유명한 신바빌로니아는 '바빌론 제10왕조'로 부른다.2. 역사
2.1. 고바빌로니아
자세한 내용은 고바빌로니아 문서 참고하십시오.사실 바빌론은 메소포타미아 문명 초기부터 두각을 드러내는 도시는 아니었다. 문명 초기에는 오히려 우루크나 라가시, 우르나 다른 도시들이 압도적으로 강력했고 바빌론은 아무도 신경쓰지 않는 촌동네에 불과했다. 우루크 시대에는 우루크가, 그 뒤를 이은 우르 제3왕조 시대에는 우르가 메소포타미아 전체에서 가장 번영하는 도시였고 바빌론은 아무도 모르는 중소형 마을이었다. 바빌론이 그나마 모습을 드러내기 시작한 건 기존의 패권국이었던 우르 제3왕조가 기원전 2004년에 멸망하고 난 이후부터였다. 우르 제3왕조가 무너지자 수많은 민족들이 권력의 공백을 노리고 메소포타미아 일대로 유입되었는데, 이중에는 셈족 계통의 아모리인이 포함되어 있었다.
기원전 1894년에는 아모리인 족장 수무아붐이 이웃 도시국가인 카잘루에게서 바빌론이라는 이름의 작은 마을을 넘겨받아 터를 잡았다. 이 수무아붐이 세운 왕조가 그 유명한 고바빌로니아, 즉 바빌론 제1왕조이다. 하지만 수무아붐은 스스로를 '바빌론의 왕'이라는 칭호로 높여 부르지도 못했다. 칭왕하지도 못할 정도로 바빌론이 워낙 작은 마을에 불과했기 때문이다. 수무아붐 이후에도 수무라엘, 사비움, 아필신 등이 즉위했지만 이들 역시 기록이 모호하고 왕이라고 불리지도 못했다. 그나마 아필신의 뒤를 이은 신무발리트 시절에 처음으로 '왕'이라는 표현을 사용할 수 있을 만큼은 성장했다고 한다. 물론 이때까지도 바빌론은 인근 우르나 우루크의 강대국에 가려진 소왕국이었고, 반쯤은 엘람에 예속된 상태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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함무라비 대왕의 궁정 |
함무라비의 업적은 단순히 정복 사업에 그치지 않았다. 유명한 《 함무라비 법전》처럼 법과 제도를 일원화하며 나라의 기틀을 잡았다. 또한 기존의 종교 중심지였던 니푸르의 신성성을 박탈하고, 그 대신 바빌론을 새로운 종교 중심지로 만들었다. 마르두크가 바빌론 만신전의 주신으로 자리잡은 것도 바로 이 시기였다. 함무라비 재위 말년 즈음에 바빌론은 작은 성읍에서 거대한 대도시로 발전했으며, 메소포타미아의 왕이라면 당연히 가져야 하는 핵심 도시로 여겨지게 되었다. 그만큼 함무라비의 40년이 넘는 재위 기간 동안 바빌론은 상상을 초월하는 속도로 발전했던 것이다.
하지만 함무라비가 승하하자 고바빌로니아는 빠르게 무너졌다. 메소포타미아 남부는 거대한 대평원 지대라 공격에 대단히 취약했다. 메소포타미아 최남단에는 '시랜드 왕조'[1]가 들어서서 독립을 선포했지만 삼수일루나 왕은 이를 막을 능력이 없었다. 한때 함무라비 대왕이 억눌러놨던 고아시리아는 바로 반란을 일으켜 독립했고, 고바빌로니아의 영향권은 수도 바빌론과 그 주변 일대로 쪼그라들었다. 고아시리아는 메소포타미아 중부까지 쳐들어와 고바빌로니아의 영토를 갉아먹었다. 삼수일루나의 후계자였던 아비에슈흐 왕은 시랜드 왕조를 다시 무릎 꿇리려고 시도했지만 역시나 실패했다. 그의 뒤를 이은 왕들은 몰락한 바빌론에 만족한 채로 건물이나 개보수하는 것밖에 업적이 없었다. 결국 최후의 왕 삼수디타나가 저 멀리 히타이트의 무르실리 1세에게 대패하고 바빌론이 함락되면서 고바빌로니아는 함무라비 사후 150여 년 만에 허무하게 몰락하고 말았다.
2.2. 중바빌로니아
2.2.1. 카시트 왕조
자세한 내용은 카시트 왕조 문서 참고하십시오.바빌론을 기반으로 한 첫 번째 왕조였던 고바빌로니아, 즉 바빌론 제1왕조가 몰락하자 그 자리는 잠시 시랜드 왕조가 메웠다. 이때문에 시랜드 왕조를 바빌론 제2왕조라고 부르기도 한다. 하지만 시랜드 왕조는 태생이 강하지 못해 얼마 못 가 동쪽의 자그로스 산맥에서 발원한 민족이었던 카시트인들에게 밀려났다. 바빌론을 장악한 카시트인들이 세운 왕조를 카시트 왕조, 곧 바빌론 제3왕조라고 부른다. '중바빌로니아'라고도 불리는 카시트 왕조는 이전의 셈계 아모리인이 세운 고바빌로니아나 훗날 들어설 셈계 칼데아인의 신바빌로니아에 비하면 인지도는 훨씬 덜하지만 사실 바빌론을 가장 오랫동안 지배한 왕조였다. 무려 576년 동안이나 존속하면서 바빌론과 인근에 패권을 행사했기 때문이다.
기원전 1450년경에는 남쪽으로 밀려갔던 시랜드 왕조의 목숨을 완전히 끝장내고 우르, 우루크, 라르사를 통합해 메소포타미아 남부를 재통일하는 업적을 이루었다. 심지어 아굼 3세 시절에는 저 멀리 바레인 지방까지 정복하기도 했다. 카시트 왕조는 기원전 14세기경 쿠리갈주 1세 시절에 전성기를 맞았다. 쿠리갈주 1세는 자신의 이름을 딴 신도시 두르-쿠리갈주를 세우는 한편 고대 이집트, 아시리아 등과 활발한 외교 관계를 맺는가 한편 동쪽의 엘람을 정복해 그 수도인 수사를 함락시키고, 약탈하는 쾌거를 이룩하기까지 했다. 비록 엘람이 하도 넓어서 완전히 통치하는 데는 실패했지만 이후에도 엘람에 꼭두각시 왕을 세우는 등 지속적으로 영향력을 행사했다.
한편 고아시리아는 고바빌로니아 멸망 이후 힘을 키우며 잠깐 반짝 뜨는가 싶었으나, 신흥 강대국인 미탄니가 등장하면서 박살났고, 미탄니의 속국이 되어버리면서 장기간 암흑기를 맞았다. 하지만 미탄니가 시리아를 두고 벌인 전쟁에서 히타이트에게 대패하고 내분이 일어나자 아시리아는 바로 독립을 선포했고, 이때부터의 아시리아를 '중아시리아'로 따로 구분한다. 명군 아슈르우발리트 1세가 등장하면서 중아시리아는 군사력을 급격히 키워나갔고, 얼마 가지 않아 카시트 왕조의 중바빌로니아와 경쟁할 정도의 국력을 자랑할 정도로 성장하게 되었다.
중아시리아가 아슈르우발리트 1세의 지도하에 급격하게 성장했지만 카시트 왕조의 대아시리아 인식은 그저 그런 속국에 불과했다. 바빌론의 부르나 부리아스 2세는 아시리아를 경쟁자로 인정하고 싶지 않아했으나 결국 굴복하고 아슈르우발리트 1세의 딸을 왕비로 맞아들였으며, 이 사이에서 태어난 아들인 카라하르다쉬가 새 바빌론의 왕으로 즉위했다. 그러나 카라하르다쉬가 즉위 직후 살해당하자 격노한 아슈르우발리트 1세가 바빌론으로 쳐들어와 자신의 또다른 외손자이자 카시트 왕족이었던 쿠리갈주 2세를 새로운 왕으로 옹립했다. 쿠리갈주 2세는 외조부인 아슈르우발리트 1세가 살아 있을 때까지는 아시리아에 대한 충성을 유지했으나 아슈르우발리트 1세가 승하하자마자 바로 충성 맹세를 철회하고 독립을 선포했다.
이후 중아시리아와 카시트 왕조는 피 튀기는 싸움을 계속하며 대립을 지속했다. 메소포타미아 북부의 패권국이었던 중아시리아, 남부의 패권국이었던 카시트 왕조가 천하를 서로 양분하는 상황이었던 것이다. 쿠리갈주 2세는 중아시리아에 쳐들어가기까지 했으나 결국 실패해 영토를 잃었지만 바빌론의 왕들은 쿠리갈주 2세 이후에도 끝없이 아시리아를 공략하려고 시도했다. 이미 반쯤 몰락한 미탄니와도 손을 잡았고, 저 멀리 히타이트와도 교류를 지속했으며 아시리아의 팽창을 막기 위해서 온갖 시도를 다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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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원전 13세기경 고대 중동 지방의 세력도[2] |
하지만 중아시리아와 카시트 왕조 사이의 경쟁에서 대부분의 시기 동안 카시트 왕조가 아시리아에 비해 훨씬 열세였다. 대부분의 공략 시도는 무위로 돌아갔으며, 심지어 카스틸리아쉬 4세의 치세때는 바빌론을 함락당하고 아시리아 왕 투쿨티-니누르타 1세에게 포로로 끌려갔다. 바빌론을 정복한 투쿨티-니누르타 1세는 바빌론에 허수아비 왕들을 옹립하려고 시도했으나 카시트 왕조가 엘람의 지원을 받아 아시리아를 물고 늘어지면서 큰 성공을 거두지는 못했다. 투쿨티-니누르타 1세가 기원전 1208년에 암살당하자 바빌론은 얼마 가지 않아 자유를 되찾게 되었다. 중아시리아에 빼앗겼던 기존의 북부 강역을 되찾지도 못했고, 헤게모니를 획득하지도 못했지만 중아시리아가 왕위계승전쟁으로 혼란스러운 틈을 타 평화를 누릴 수 있었다. 뿐만 아니라 당시 바다 민족이 쳐들어와 기존의 지중해권 문명 세계를 작살낸 청동기 시대의 붕괴가 일어났기에, 중아시리아나 중바빌로니아나 둘 다 전쟁을 벌일 만한 여력이 안되었다.
하지만 바빌론의 왕 마르두크-아플라-이디나 1세의 치세부터 다시 전쟁이 시작되었다. 그는 아시리아의 왕위계승전쟁에 참여해 니누르타-아필-에쿠르가 아시리아의 왕으로 즉위하도록 도와주었지만 니누르타-아필-에쿠르가 왕에 즉위한 후 뒤통수를 치고 다시 바빌론과 전쟁을 벌였다. 하지만 전반적으로 봐도 카시트 왕조의 완벽한 열세였는데, 니누르타-아필-에쿠르의 아들이었던 아슈르단 1세는 오히려 바빌로니아의 북부 지방을 죄다 집어삼키면서 카시트 왕조를 더더욱 압박했다. 게다가 카시트 왕조의 왕들 모두가 혼란기 도중 왕위 쟁탈 과정에서 핏줄과 가문이 어지럽게 꼬이는 바람에 왕위에 대한 정통성도 점점 약해졌다.
이때 바빌론의 왕위에 군침을 흘리고 있었던 세력이 현재 이란 지방의 엘람이었다. 엘람의 왕 슈트룩나흐훈테는 결혼 동맹 덕에 엘람 왕가에도 바빌로니아 왕가의 피가 흐르고 있다는 핑계로 망해가는 바빌로니아를 침공했다.[3] 결국 기원전 1160년경에 슈트룩나흐훈테가 바빌론을 침략해 인근 지방을 초토화시키고 수많은 재화를 약탈해갔다. 참고로 이때 상당히 많은 유물들이 메소포타미아에서 엘람 지방으로 반출되었는데, 가장 대표적인 것이 아카드 제국의 정복군주였던 나람신 대왕의 석비와 바빌론 제1왕조때의《 함무라비 법전》이었다. 참패한 카시트 왕조의 왕들은 도망쳐서 끈질기게 엘람에 대한 저항을 이어나갔다. 하지만 엘람의 쿠티르나흐훈테 3세가 카시트의 저항운동마저 끝장냈고, 기원전 1155년경에는 카시트의 잔존 세력이 완벽하게 몰락하여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지게 되었다. 이때 바빌론의 지구라트가 무너지고, 마르두크 신상이 엘람으로 끌려갔다고 한다. 이후 카시트인들은 디얄라 강 유역에 모여 살았으나, 기원전 702년 아시리아에 의해 정복된 후 강제 이주되어 뿔뿔이 흩어졌다.
2.2.2. 암흑기
576년 동안이나 존속한 '바빌론 제3왕조'인 카시트 왕조가 멸망하고 난 이후, 신바빌로니아가 들어서기 전까지 무려 6개에 달하는 왕조들이 바빌론에 들어섰다. 이 역시 모두 '바빌로니아'라고 부른다. 하지만 대부분이 단명한 왕조인 데다가 알려진 기록도 거의 없는 탓에 별다른 주목은 받지 못한다.카시트 왕조가 멸망한 직후 들어선 바빌론 제4왕조는 '이신 제2왕조'라고도 부르며 기원전 1155년부터 기원전 1026년까지 100년 넘게 지속되었다. 원래 카시트 왕조를 멸망시킨 엘람이 직접 바빌론을 통치하려고 시도했으나, 아시리아와의 전쟁에서 패배하면서 바빌로니아를 완전히 정복하는 데 실패했고, 결정적으로 지나치게 멀리 떨어져 있어서 바빌론을 차지하지 못했다. 이때 등장한 인물이 이신을 기반으로 했던 마르두크-카비트-아헤슈였다. 마르두크-카비트-아헤슈는 이신에서 세력을 모아 바빌론을 차지하고, 엘람을 몰아냈으며 카시트 왕조의 잔존 세력을 끝장냈다. 재위 후반부에는 중아시리아와도 전쟁을 벌였는데, 초반에는 좀 잘나가는 듯 싶었지만 나중에는 아슈르단 1세와의 전쟁에서 패배하고 뒤로 물러나야만 했다.
마르두크-카비트-아헤슈가 승하한 후에도 바빌론 제4왕조는 여러 차례 영토 확장을 시도했다. 엘람의 공격을 되치기하는 데는 성공했으나 중아시리아에게는 또 패배하고 굴욕적인 조약을 맺었다. 이런 바빌론 제4왕조의 가장 대표적인 왕이 네부카드네자르 1세였다. 기원전 1104년에 즉위해 엘람의 수도인 슈쉬를 침공해 떨어뜨렸으며, 카시트 왕조의 몰락과 함께 빼앗겼던 마르두크 신상을 되찾아왔다. 예전에 히타이트가 지배하던 아람 지방을 되찾으려고 중아시리아와 전쟁을 벌이기도 했지만, 히타이트를 집어삼키면서 한창 전성기를 달리던 중아시리아를 도저히 이길 수가 없었던지 여러 차례 패배하고야 말았다. 네부카드네자르 1세는 재위 말년에는 국경 안에만 머물면서 건물들을 짓는 데 헌신하여 평화기를 구가했다.
네부카드네자르 1세가 승하한 후에도 바빌론 제4왕조는 끝없이 중아시리아 전용 샌드백으로 남았다. 아시리아의 왕 티글라트-빌레세르 1세에게 막대한 영토를 뜯기는가 하면 가뭄이 들어서 수많은 사람들이 죽어나갔다. 기원전 1056년에 즉위한 카다스만-부리아스 왕이 아시리아에 적대적인 스탠스를 취하자 중아시리아가 아예 바빌론을 함락한 뒤 자국의 신하를 허수아비로 왕위에 앉힐 정도였다. 그나마 기원전 1050년대 이후로 중아시리아에서 왕위계승전쟁과 내분이 터지면서 확연히 약해지자 바빌론은 다시 독립을 쟁취할 수 있었으나, 그 국력은 예전만 못했고 바빌론 제4왕조는 인근 민족들에게 시달리기만 했다. 특히 청동기 시대의 붕괴 이후 등장한 서셈계 민족들, 대표적으로 아람인들이 국경 내부로 쏟아져 들어왔지만 바빌론 제4왕조는 이들을 차단할 힘이 없었다.
국경 내부로 밀려온 아람인들은 세력을 모아 결국 바빌론 제4왕조를 멸망시켰다. 이후 바빌론은 약 100년 정도 동안 혼란기를 맞게 되었는데, 그 어떠한 왕도 20년 이상을 제대로 재위하지 못했고 그래서 이 시대는 남은 것도 별로 없다. 옛 시랜드 지방에서 바빌론 제5왕조가 등장했으나 사실 바빌론과는 별 인연이 없었다. 이 시대의 메소포타미아 일대는 사실상 무정부 상태나 다름없었고, 이 기회를 노린 중아시리아는 막대한 땅을 또 뜯어갔다. 기원전 1003년에는 옛 카시트 왕조 계열의 바빌론 제6왕조가 등장해 제5왕조를 멸망시켰다. 바빌론을 제대로 다스리지도 못한 제5왕조와는 달리 제6왕조는 바빌론을 일시적으로나마 점유한 것으로 추정된다. 그러나 엘람이 다시 쳐들어와 제6왕조를 무너뜨리면서 카시트 왕조 부흥의 꿈은 20년도 안되어서 무위로 돌아가게 되었다.
엘람인들은 제6왕조를 멸망시키고, 새롭게 바빌론 제7왕조를 세웠지만 얼마 못 가 7년 만에 아람 민족에게 다시 망했다. 그나마 나부-무킨-아필리가 기원전 977년 바빌론 일대를 안정화시키고, 겨우겨우 바빌론 제8왕조를 세웠으나 비실비실한 건 마찬가지였다. 제8왕조는 몇십여 년밖에 지속되지 못했으나 그 기간 내내 아시리아와 엘람에게 공물을 바치는 등 속국이나 다름없었다. 이때의 기록은 제대로 남은 것도 없고, 이 시기의 왕들 역시 남은 것이 왕명표 목록 정도를 제외하면 딱히 없다.
2.2.3. 아시리아 통치기
바빌로니아는 기원전 10세기경까지 이전의 영광은 온데간데없이 주변에게 얻어터지면서 무기력하게 존속했다. 이 시기에 대부분의 영토는 이미 아람인들과 셈족 계열 민족들이 차지하고 있었는데, 기원전 9세기경에는 서북부 셈족 계열의 민족이었던 칼데아인들이 새롭게 유입되었다. 새로 들어온 칼데아인들은 아람인들의 텃세를 피해 기원전 850년경 저 멀리 바빌로니아 남동단에 자리잡았다.바빌론이 시름시름하던 반면 중아시리아는 그 전성기를 향해 치솟고 있었다. 기원전 911년 아다드 니라리 2세의 즉위와 함께 국력이 만장에 뻗치기 시작했는데, 이때부터의 아시리아를 따로 구분해서 신아시리아 제국이라고 부른다. 아다드 니라리 2세는 바빌론 제8왕조를 공격해 대부분의 땅을 합병했다. 투쿨티-니누르타 2세와 아슈르나시르팔 2세는 바빌론을 협박해 봉신국으로 삼았고, 샬마네세르 3세는 아예 바빌론을 함락해 약탈한 뒤 제8왕조의 왕 나부-아플라-이디나의 목을 잘라버렸다. 샬마네세르 3세는 이후에도 꼭두각시 왕들을 바빌론에 세워 부렸는데, 이 과정에서 원주민들의 동질성을 희석시키기 위해 바빌론 지방에 아람인, 수투인, 칼데아인 등 여러 민족들을 이주시키기도 했다. 이때부터 칼데아인들이 바빌론에 터를 잡고 세력을 넓히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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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아시리아의 최대 강역.[4] |
결국 마르두크-아플라-우수르가 세운 왕조는 기원전 748년 나보나사르에 의해 무너졌다. 당시 신아시리아 제국의 왕이었던 아슈르-니라리 5세는 나보나사르의 왕위 찬탈을 묵인했다. 그 덕에 나보나사르는 바빌론의 혼란스러운 정국을 성공적으로 안정시킬 수 있었다. 그러나 이후 확장 정책을 고수하던 티글라트-필레세르 3세는 나보나사르를 봐줄 생각이 없었다. 그는 나보나사르를 공격한 뒤 그를 봉신으로 종속시켰는데, 사실상 반쯤은 노예였다. 처음에는 나보나사르의 후계자에게 계승권을 허락했지만 나중에는 그마저도 거부하고, 아예 아시리아 왕이 직접 바빌론을 통치하는 수법으로 선회했다. 결국 기원전 729년부터 아시리아의 왕이 바빌론의 왕과 동일어가 되었는데, 이 시기를 아시리아의 바빌론 통치기, 즉 바빌론 제9왕조라고 부른다.
바빌론이 아시리아 왕의 직할령으로 떨어졌다지만 워낙에 역사가 깊고 오랜 세월 동안 메소포타미아 일대의 패권국이었던 터라 그 정통성을 무시하는 건 불가능했다. 그래서 바빌론 지방에서는 유난히 반아시리아 반란이 많이 일어났는데, 기원전 721년에는 마르두크-아플라-이디나 2세가 엘람의 지원을 받아 반란을 선동하여, 잠시 바빌론을 점령했다. 당시 아시리아의 왕이었던 사르곤 2세는 바로 메디아 원정을 끝내고 돌아와 마르두크-아플라-이디나 2세의 반란을 진압하고 그를 저 멀리 엘람으로 추방했다. 사르곤 2세의 뒤를 이은 센나케립은 선왕 만큼 인내심이 없었다. 센나케립이 바빌론의 왕으로 세운 그의 아들 아슈르-나딘-슈미가 반란자들에 의해 살해당하자 격분한 센나케립은 바빌론을 아예 끝장내버렸다. 바빌론을 약탈하는 수준에서 그치지 않고, 아예 바빌론을 사람이 살 수 없는 땅으로 만들려고 했다. 그는 고도 바빌론을 파괴한 후 무려 200,000명에 달하는 인구를 추방했다. 하도 바빌론에서 반란이 많이 일어나자 내린 극약 처방이었다. 이때 파괴된 바빌론을 재건하기 위해 무려 88년이라는 긴 시간이 필요했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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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빌론을 공격하는 아시리아군을 지켜보는 센나케립 왕의 모습. |
이렇게 바빌론을 끝장내려고 시도했던 센나케립 왕은 기원전 681년 수도 니네베에서 기도하던 도중 아들들에게 살해당해 목숨을 잃었다. 그의 뒤를 이은 에사르하돈 왕은 마르두크-자키르-슈미 2세를 새 바빌론 왕으로 세웠다. 그러나 사르곤 2세 시절 반란을 일으켰다가 엘람으로 도망간 마르두크-아플라-이디나 2세가 돌아와 바빌론을 다시 차지했고, 에사르하돈은 다시 바빌론을 공격해 함락해야 했다. 마르두크-아플라-이디나 2세는 바빌론을 빼앗긴채 다시 엘람으로 도망쳤고, 이번에는 다시 돌아오지 못한채 그 곳에서 사망했다.
에사르하돈 왕은 상대적으로 꽤나 평화로운 왕이었다. 그는 아버지 센나케립이 작살낸 바빌론을 다시 재건했고, 그의 장남이었던 샤마쉬-슘-우킨을 바빌론의 속왕으로 임명하기도 했다. 그러나 에사르하돈 왕이 승하하자 또다시 내전이 터졌다. 아시리아의 왕위는 장남이 아니라 막내인 아슈르바니팔이 물려받았는데, 이에 불만을 품은 샤마쉬-슘-우킨이 바빌론을 중심으로 군대를 모아 반란을 일으킨 것이다. 샤마쉬-슘-우킨은 정통성을 이용해 엘람, 메디아, 페르시아, 칼데아, 아람 등 수많은 민족들로 이루어진 연합군을 구성했다. 그러나 아슈르바니팔의 격렬한 공격 끝에 결국 샤마쉬-슘-우킨은 몰락했고, 바빌론은 또다시 약탈당했다. 아슈르바니팔은 칸달라누를 새 바빌론 총독으로 세웠고, 아슈르바니팔이 승하하자 그의 아들인 아슈르에틸일라니가 새로운 아시리아와 바빌론의 왕으로 즉위했다.
그러나 신아시리아 제국의 마지막 전성기를 이끌었던 아슈르바니팔이 승하하자 제국은 내분과 피정복민들의 반란으로 빠르게 무너지기 시작했다. 지나치게 가혹한 지배정책과 탄압으로 이러나 저러나 죽는 상황이 되어버리자 다른 민족들이 목숨을 걸고 반란을 일으킨 것이었다. 그 와중에 왕위를 물려받은 아슈르에틸일라니는 휘하 장군에게 살해당했다. 첨예한 내전 끝에 신샤리쉬쿤이 새 왕이 되어 기원전 622년 바빌론을 다시 편입시켰다. 하지만 신샤리쉬쿤이 바빌론을 점령했다고는 해도 이미 신아시리아 제국의 영향력은 비교하기도 민망한 수준으로 축소된 상황이었다. 신아시리아의 심장부에서부터 내분이 가득해 전국으로 반란이 들불처럼 번지던 시점이었기에, 신샤리쉬쿤이 무슨 짓을 하던 간에 바빌론의 재독립은 피할 수 없었던 것이다. 결국 신샤리쉬쿤이 바빌론을 점령한지 2년 만인 기원전 620년, 칼데아인 출신의 장군 나보폴라사르가 반란을 일으켜 신바빌로니아를 세우면서 아시리아 제국의 바빌론 지배기는 완전히 종결되었다.
2.3. 신바빌로니아
자세한 내용은 신바빌로니아 문서 참고하십시오.칼데아 장군 나보폴라사르가 기원전 620년 바빌론에서 궐기하자 안 그래도 신아시리아 제국의 폭정에 지긋지긋해하던 바빌론인들은 바로 나보폴라사르의 편을 들었다. 어찌나 신아시리아에게서 민심이 떠나갔는지 그 넓은 바빌로니아 땅에서 아시리아에게 충성을 유지한 건 도시 니푸르와 아시리아와 가까운 북부 지방 일부뿐이었다. 하지만 나보폴라사르의 상황도 썩 좋지만은 않았다. 아시리아가 곳곳에서 터지는 반란으로 정신이 없다고는 하나 몇백 년 동안 쌓아온 군사력은 여전히 굳건했고, 나보폴라사르는 바빌론과 인근 일대를 완전히 장악하는 데만 무려 4년이라는 시간을 소모해야만 했다. 하지만 전반적인 추세는 나보폴라사르에게 유리했다. 신샤리쉬쿤 왕이 여러 차례 바빌론 원정을 떠나려고 시도했지만 수도 니네베에서 연속적으로 반란이 터지는 등 워낙에 입지가 불안했기 때문이다.
나보폴라사르와 신샤리쉬쿤 왕의 백중세는 메디아의 왕이자 아시리아의 또다른 봉신이었던 키악세레스가 반란을 일으켜 나보폴라사르와 동맹을 맺으면서 끝났다. 키악세레스가 수많은 이란인들을 이끌고 나보폴라사르의 편에 가담하자 저울의 균형추는 바로 나보폴라사르 쪽으로 넘어왔다. 특히 키악세레스는 그동안 신아시리아 제국이 초토화시켜 버려 기존 지배층이 싹 갈려나간 엘람 지방을 교묘히 이용해 자신만의 세력을 구축하여 꽤나 강한 세력을 유지하고 있었다. 뿐만 아니라 저 북쪽 코카서스 지방의 스키타이인, 흑해 인근의 민족들도 하나같이 공통의 적인 아시리아를 쫓아내기 위해서 동맹군에 가담했다. 아시리아가 제아무리 강하다 할지라도 내부 반란을 통제하면서 이들까지 한꺼번에 맞서 싸우기란 불가능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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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아시리아 제국의 수도 니네베의 함락.[5] |
기원전 615년경, 신샤리쉬쿤 왕은 내부의 반란 진압 및 바빌론 군대와 맞서 싸우는 데도 벅찬 상태였다. 이를 노린 키악세레스가 이란 군대를 이끌고 아시리아의 본진으로 진격했고, 님루드와 아라크파 등 아시리아의 대표적인 대도시들을 빈집털이했다. 한 번 본진이 털려나가자 큰 금이 쩍 가버린 아시리아는 이때부터 그냥 속절없이 무너지게 되었다. 1년 밖에 안되는 짧은 시간이 흐른 기원전 614년에 종교 중심지이자 최대의 성지였던 아수르를 비롯하여 두르-샤루킨, 임구르-엔릴, 가수르, 카네쉬 등의 대도시들이 전부 함락되었다. 신샤리쉬쿤은 제국의 마지막 여력을 모아 최후의 발악을 시도하여, 한 번 바빌로니아-메디아 동맹군을 밀어내는 데 성공했으나, 동맹군이 1년 만에 전열을 재정비해서 아시리아에 총공세를 퍼붓자 결국 무너지고 말았다. 기원전 612년에는 수도 니네베가 끝내 함락당했고, 이때 신샤리쉬쿤 왕이 전사하면서 결국 5년 동안의 전쟁 끝에 신아시리아 제국은 완전히 멸망하고 말았다.[6]
나보폴라사르가 신아시리아 제국을 무너뜨리고, 바빌론을 중심으로 한 제국을 재창건하면서 함무라비 대왕 이래 1,000년 만에 메소포타미아계 제국의 중심이 바빌론으로 돌아오게 되었다. 하지만 나보폴라사르는 아시리아를 멸망시키고 얼마 지나지 않은 기원전 605년에 승하했고, 그의 뒤를 이어 아들인 네부카드네자르 2세가 신바빌로니아, 즉 바빌론 제10왕조의 제2대 국왕으로 즉위하면서 신바빌로니아는 최고의 전성기를 맞게 되었다.
네부카드네자르 2세는 즉위하자마자 옛 아시리아 제국의 잔재들을 철저하게 지우는 데 공을 들였다. 신아시리아의 마지막 왕 아슈르우발리트 2세가 재기하지 못하도록 끝장내는 한편,[7] 아시리아 북부의 잔군들을 처리했으며 이집트와도 전쟁을 벌여 이집트 세력을 메소포타미아에서 완전히 몰아냈다. 저 멀리 있었던 이집트가 굳이 메소포타미아 일대에 관여했던 이유는 당시 이집트 제26왕조(사이스 왕조)의 파라오가 신아시리아 제국의 봉신이었던 네카우(네코) 2세였기 때문이었다. 네카우 2세는 신아시리아 제국이 무너지고 들어선 신바빌로니아가 이집트에 관여할까봐 두려워했기에 신아시리아의 편을 들었던 것이다. 이집트는 기원전 605년까지 끈질기게 신바빌로니아 군대와 전투를 벌였지만 카르카므쉬 지방에서 신바빌로니아 군대에게 대패하면서 결국 이집트로 물러나게 되었다. 한편 네부카드네자르 2세는 한때 동맹이었지만 신아시리아 제국의 멸망 이후 잠재적인 적국이 되어버린 스키타이인과 흑해인들을 도로 북방으로 몰아내기도 했다.
네카우 2세는 메소포타미아 일대에 미련을 놓지 못했지만 오히려 역으로 신바빌로니아에게 패배하고 본국인 이집트까지 위협당하는 상황이 되었다. 네부카드네자르 2세는 이집트를 침공해 속국으로 삼길 바랬고, 실제로도 이집트 원정을 시도했지만, 유대 왕국과 옛 이스라엘 왕국의 유대인, 그리고 가나안 민족들과 페니키아인들이 하나같이 네부카드네자르 2세의 앞길을 막아섰기에 이집트까지 정복하는 데는 실패했다. 이집트 정복에는 실패했지만 중간에 걸리적거리던 유대 왕국은 철저하게 짓밟고, 유대인들을 포로로 잡아왔는데, 이때 일어난 사건이 그 유명한 ' 바빌론 유수'이다. 당시로서는 촌구석에 해당하던 이스라엘에 살던 유대인들이 바빌론에 잡혀와 에테멘앙키와 거대한 지구라트들을 보고 경악해 바벨탑의 이야기를 생각해냈다는 일화가 잘 알려져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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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전성기의 바빌론.[8] |
네부카드네자르 2세의 업적은 정복 사업에만 그치지 않았다. 그는 현 이란 지방의 메디아 왕국과 결혼 동맹을 맺어 메디아 공주 아미티스를 왕비로 맞았다. 이후 고향을 잊지 못하는 아미티스 왕비를 위하여 세계 7대 불가사의로 알려진 바빌론의 공중정원을 지어 위엄을 과시했으며, 에테멘앙키, 이슈타르의 문, 행진의 거리 등 수도 바빌론 전체를 전면 개보수했다. 왕은 바빌론에 가장 큰 신경을 많이 쏟았지만 바빌론뿐만 아니라 신바빌로니아 제국 내의 대다수 도시들에도 관심이 많았다. 네부카드네자르 2세의 재위기에 최소한 13개에 달하는 도시들이 완전한 리모델링을 걸쳐 아름다운 도시로 탈바꿈했다고 한다. 이처럼 네부카드네자르 2세가 건축과 문화, 영토 확장 등에 심혈을 기울이면서 당대의 바빌론은 '세계 최대의 메트로폴리스', 즉 세계의 수도라고 불려도 손색이 없을 만큼의 영광을 자랑할 수 있었다.
명군이었던 네부카드네자르 2세의 43년에 달하는 기나긴 치세가 끝나자 신바빌로니아는 조금씩 몰락하게 되었다. 아멜-마르두크가 왕위를 물려받았지만 겨우 2년밖에 통치하지 못했고, 그 후계자였던 네리글리사르 역시 페니키아 원정을 성공리에 끝내나 싶었지만 5년 만에 승하했다. 네리글리사르가 죽자 그의 어린 아들이었던 라바시-마르두크가 왕위를 이었으나 그 역시 즉위하자마자 암살당해 죽었다. 라바시-마르두크 이후 왕위를 이은 사람은 비칼데아인 계통의 장군이넜던 나보니두스였다. 장기 집권에 성공한 나보니두스가 즉위하면서 왕이 짧은 텀마다 갈아치워지는 일은 사라졌지만, 신바빌로니아는 멸망의 길을 향해 급행열차를 타고 추락하기 시작했다.
나보니두스는 아시리아 여사제의 아들로 태어났고, 칼데아인 출신도 아니었다. 당연히 신바빌로니아 사회에 대한 이해도가 현지인에 비해 부족할 수밖에 없었다. 그는 바빌론 한가운데에 있는 마르두크 신전에 온갖 잡다한 신들을 함께 집중시키기 시작했고, 당연히 신바빌로니아인들과 사제 계급은 자기들이 모욕당했다고 느끼게 되었다. 이렇게 신관들의 마음을 얻지 못했다면 차라리 군대의 마음이라도 얻었어야 했을 텐데 군부 역시 나보니두스 왕의 호화로운 생활과 고고학적인 취향 때문에 그를 경멸했다. 나보니두스는 바빌론에서 멀리 떨어져 여행하면서 아시리아의 도시 하란에 신전을 재건하고 옛 유적을 파헤치면서 언제 이 유적이 만들어졌는지를 탐구하는 등 쓸데없는 일에 시간을 허비했다. 당연히 바빌론인들은 자신들보다 과거 숙적이었던 아시리아를 더 중시하는 듯한 모습의 나보니두스를 경멸했고, 점차 반란의 기미가 강해졌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보니두스는 국방을 아들인 벨사자르에게 맡기고 별다른 신경을 쓰지 않았다. 벨사자르는 유능한 군인이었지만 유능한 외교관이나 정치가는 아니었다. 벨사자르는 정치 엘리트층을 국정에서 소외시켰고, 엘리트 계급의 불만은 더더욱 커지게 되었다.
한편 이 시점에 동쪽에선 위대한 영웅이 탄생하고 있었으니 바로 키루스 2세였다. 현 이란 남부 페르시아의 왕으로 태어난 키루스 2세는 기원전 549년에 기존의 패권국이었던 메디아를 멸망시켰고, 3년 만에 전 페르시아인들의 샤한샤(황제)로 등극하면서 이란 지방에 거대한 제국을 세웠다. 키루스 2세의 야심은 끝이 없었다. 그는 기원전 539년 신바빌로니아를 침공했다. 그해 6월 오피스 전투에서 신바빌로니아군이 페르시아군에 대패했다. 인근의 대도시였던 시파르가 바로 페르시아에 항복을 선언하자 겁에 질린 나보니두스는 바빌론으로 도주했다. 페르시아의 장군 고비아스가 그를 뒤쫓아 바빌론으로 추격했고, 결국 시파르가 항복한 지 2일 만에 페르시아 군대는 바빌론에 평화적으로 입성했다. 나보니두스 따위를 위해 싸우다가 죽을 생각이 전혀 없었던 바빌론 시민들이 그냥 문을 열어주었던 것이다. 이후 나보니두스는 고비아스 앞으로 끌려갔고, 키루스 2세가 도착할 동안 고비아스가 바빌론을 다스렸다.
고비아스가 바빌론 총독으로 임명되고 며칠 후, 신바빌로니아 잔군을 이끌던 벨사자르마저도 전사하면서[9] 신바빌로니아는 완벽하게 멸망했다. 그해 10월에 바빌론에 입성한 키루스 2세는 입성하자마자 바로 유대인들을 풀어줘 고향인 예루살렘으로 돌려보냈다. 관용을 모토로 삼았던 키루스 2세답게 바빌론을 약탈하는 행위는 거의 이루어지지 않았다. 키루스 2세는 바빌론의 왕을 자칭하면서 마르두크 신의 대리인을 자처하기까지 했다. 특히 나보니두스가 마르두크 사원에 이방의 신들을 모시는 등 욕먹을 짓을 많이 하고 다녔기에 키루스 2세는 자신의 공격이 곧 마르두크의 복수라고 포장할 수도 있었다. 신바빌로니아가 멸망하자 아케메네스 왕조가 몇백 년 동안 바빌론을 다스렸고, 이후 '바빌로니아'라는 이름으로 불리는 국가는 다시는 등장하지 못했다.
[1]
문헌에는 이 왕조가 발원한 지방을 문자 그대로 '바다의 땅', 즉 Sealand라고 표기해놨다. 그 지방의 이름을 따서 왕조의 이름을 붙인 것이다. 훗날의
바다 민족과는 전혀 상관없다.
[2]
초록색이 카시트 왕조다.
[3]
사실 엘람이 쳐들어오기 이전에도 바빌로니아는 아시리아에게 착실히 영토를 빼앗기면서 망해가고 있었다. 그래서 엘람이 아니었어도 아시리아에게 멸망했을 가능성이 크다.
[4]
바빌론 일대뿐만 아니라 저 멀리
고대 이집트마저도 모두 점령당한 것을 볼 수 있다.
[5]
니네베의 함락으로 신아시리아 제국은 멸망했다.
[6]
무너진 수도 니네베에서 왕족이자 장군이었던 아슈르우발리트 2세가 살아남아 북쪽으로 도망쳐 잔존 세력을 규합하려고 시도했다. 동맹군은 아슈르우발리트 2세에게 속국으로 들어오는 조건으로 화의를 제안했지만, 아슈르우발리트 2세는 이를 거부했다. 결국 기원전 607년경에 아슈르우발리트 2세의 부흥운동마저 동맹군에게 짓밟히면서 강대했던 아시리아 제국은 완전히 역사속으로 사라지게 되었다.
[7]
참고로 아슈르우발리트 2세는 북부에서 동맹군에게 패한 이후의 행적이 남아 있지 않다. 아마
하란 등 북부 대도시들을 회복하려고 시도하다가 허무하게 죽었을 가능성이 크다.
[8]
푸른색의 문은
이슈타르의 문이고, 높이 솟은 사원은
마르두크 신전인
에테멘앙키이다.
[9]
여담이지만 관용정책을 중시하던 키루스 2세는 벨사자르의 장례식을 후하게 치러줬다. 바빌론에서 6일이나 장례를 치러줬고 심지어 키루스 2세의 아들이었던
캄비세스 2세가 장례식에 참석하기까지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