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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수정 시각 : 2024-12-10 13:47:49

삼무 라마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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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카드어 삼무 라마트(Sammu-ramat)
그리스어 세미라미스(Semiramis)

1. 개요2. 행적
2.1. 금석문2.2. 고대 역사서2.3. 아르메니아의 전설
3. 음모론4. 대중 문화에서

1. 개요

아시리아의 전설적인 여왕으로, 그리스식 표기인 '세미라미스(Σεμίραμις)'로 흔히 알려져 있다.

2. 행적

2.1. 금석문

금석문 사료에 따르면, 삼무 라마트는 샴시아다드 5세의 아내이자 아다드니라리 3세의 어머니였다. 그녀는 남편이 죽은 뒤 아들의 재위 초기에 아들과 함께 나라를 공동으로 통치하였다.[1] 그녀의 통치 기간은 기원전 811년부터 기원전 806년까지로 추정되고 있으며, 그 이후 신전으로 은퇴했을 것이다.

2.2. 고대 역사서

디오도로스 시켈로스(Diodorus Siculus)의 저서 '역사 총서(Bibliotheca historica)'에서는 세미라미스가 주권 군주로서 42년간 재위했다고 기록되었다.

세미라미스는 아슈켈론의 여신인 데르케토(Derketo)와 시리아인 사이에서 태어났지만 갓난아기일 때 버림받았으며, 비둘기 양치기에게서 훔친 젖을 먹으면서 자라다가 양치기가 거둬들였다. 이후 아시리아의 재상인 온네스의 아내가 되어, 아시리아 왕 니노스의 동방 원정 중 박트리아와의 싸움에서 도시의 성채들을 공격할 계획을 입안, 두 명의 동행자와 함께 성벽에 올라가 요새를 점령하였다.

그러나 왕이 그녀의 용감함과 미모에 반했기 때문에 온네스를 협박하여 자살하게 만들었고 그에 따라 니노스의 왕비가 되었다. 이후 왕이 죽자 여왕이 되어 아시리아를 평화롭게 다스려 유프라테스 강변에 바빌론을 건설하면서 호사스러운 기념물을 세웠다. 이 기념물 중에서는 세미라미스의 공중 정원[2]이 있었으며, 세미라미스는 정복 전쟁에 나서 이집트, 메디아, 리비아, 페르시아, 아라비아, 아르메니아 등지를 점령하였지만 인더스 강가에서 이르렀다가 인도인들에게 패하였다.

42년간 재위를 하면서 아시리아를 강국으로 만들어 아들인 닌야스에게 왕위를 물려주고는 갈매기 모양으로 하늘로 날아가 사라졌다고 하며, 후대의 왕들은 여자를 멸시해서 여성이 자기들보다 통치를 잘했다는 사실을 감추기 위해 열폭해서 그 자취를 지웠다고 한다.

헤로도토스의 저서 '역사'에서도 세미라미스에 대한 기록이 보인다.[3] 유능했던 지도자의 이미지 말고도, 파울루스 오로시우스(Paulus Orosius)의 저서에서는 그녀가 잔인하고 음탕하여 아들과 근친상간을 했다고 기록되었다.

2.3. 아르메니아의 전설

아르메니아의 전설에 따르면, 세미라미스는 아르메니아의 왕인 에이라 왕에게 관심을 가져 결혼을 할 것을 청하였지만 이를 거절당하자 아르메니아를 침공했다. 아레이렐 협곡에서 전투를 벌이던 중 에이라 왕이 전사하였으며, 이후 아르메니아와의 전쟁이 계속되자 이를 피하기 위해 죽은 자들 중에 에이라 왕을 소생시켜 달라고 신에게 기도했다. 에이라 왕의 몸을 가져가서 소생시키려고 노력했으며, 아르메니아 인들이 복수하기 위해 진군하자 애인 중의 한 명을 변장시켜서 신들께서 에이라를 다시 소생하게 했다는 소문을 퍼뜨려 전쟁을 끝냈다고 한다.

3. 음모론

일부 보수 및 근본주의적인 개신교에서는 고대 메소포타미아의 세미라미스 여신 숭배가 그리스도교와 결합하여 마리아 숭배로 변했다고 주장한다. 그 증거로 드는 것이 바로 하늘의 여왕 칭호. 더 나아가 세미라미스를 구약성경 창세기의 인물인 니므롯(님로드)의 아내이자 수메르 신화의 주인공인 탐무즈(담무스, 두무지)의 모친으로 결부지어 모자관계에 있는 세미라미스와 탐무즈를 숭배하던 중동 이교도들의 풍습이 콘스탄티누스 1세의 그리스도교 승인과 동시에 초기 그리스도인들의 성모자 공경[4]과 같은 가톨릭의 신심행위로 둔갑하여 현재까지 이어지고 있다고 주장, 개신교 신앙만이 유일한 그리스도 신앙이라는 도그마를 내세우고 있다. 이 음모론은 스코틀랜드 자유교회의 목사였던 알렉산더 히슬롭(Alexander Hislop)이 19세기에 쓴 서적 '두 개의 바빌론'에서 처음 소개되었다. 영어 위키피디아 다만 이 책이 쓰일 당시는 중근동사에 대한 고고학적 연구 및 발굴이 비교적 초기 단계에 머무르고 있던 시기이며, 조각난 파편과도 같은 상태로 존재하던 고고학적 사료나 유물들을 통해 얻을 수 있었던 역사적 정보가 빈약했던 만큼 주장에 대한 출처와 근거, 확실성에 대한 의문에도 불구하고, 서로 그다지 관련 없는 중근동의 역사학적 정보들을 본인의 주 목적이었던 가톨릭에 대한 비판을 위해 무분별하게 엮어놓았다는 비판이 꾸준히 제기되었던 바 있다. 영어 주의

실제 세미라미스, 즉 삼무 라마트는 상기한 금석문의 내용에 따라 알 수 있듯 남유다 왕국이 존속했던 시기였던 기원전 9~8세기경에 활동하던 고대 아시리아의 통치자였음이 고고학적으로 가장 신빙성 있게 여겨지는 정보이며, 여기에 따르면 이 인물은 니므롯의 활동 연대였던 창세기의 시대와는 아무런 접점이 없다. 또 음모론에서 세미라미스의 아들이라고 주장하는 탐무즈, 즉 두무지의 신화적 정체가 온전히 밝혀진 시기는 비교적 최근인 20세기다. 결정적으로 창세기를 비롯한 성경 어디에도 세미라미스, 삼무 라마트라는 존재가 직접적으로 언급되지 않는다. 현재 이러한 세미라미스-니므롯-탐무즈로 이어지는 음모론은 여지껏 제기된 많은 비성경적 오류, 고고학적 부정확성에 대한 의문들에도 불구하고 많은 보수주의 개신교 신도들 사이에서 반가톨릭주의에 대한 근거로써 줄기차게 활용되고 있다.[5][6]

물론 콘스탄티누스 1세가 그리스도교를 공인한 이후로 그리스도교 내부에 로마 제국뿐 아니라 중부-북부 유럽의 이교적 (교의가 아닌) 문화가 상당수 흡수된 것은 비교적 신빙성 있는 사실이나, 고대 아시리아 여왕을 수메르 신의 모친으로 떠받들어 숭배하던 이교도들의 영향을 초기 그리스도인들이 받았다는 이러한 주장은 대체로 크리스마스 미트라 및 솔 인빅투스와 연관되는 주장, 부활절을 뜻하는 단어 '이스터(Easter)'가 메소포타미아 신화의 신 ' 이슈타르(Ishtar)'와 기원을 공유한다는 주장과 마찬가지로 근거가 희박한 편이다.[7]

4. 대중 문화에서


[1] 역사서에서의 기록과 달리 그녀는 아들과 공동 통치자였던 것으로 보인다. [2] 바빌론의 공중정원 항목에도 나와 있지만 이름만 같고 다른 건축물이다. [3] 헤로도토스의 '역사'에서도 세미라미스는 여왕으로 기록되었다. [4] 아기예수를 안은 성모마리아의 형상을 주로 세미라미스 숭배사상의 결과라며 주장한다. 여기서 그치지 않고 이집트 신화 이시스, 힌두교 파르바티, 불교의 관음보살, 귀자모신, 심지어 일본의 그리스도인들이 박해를 피해 자신들의 신앙을 지키기 위하여 관음보살의 형태로 만들어 활용하던 마리아 관음상 등 동서양을 막론, 모자(母子)의 형태로 묘사될 수 있는 모든 상징물들은 하나같이 세미라미스-탐무즈 숭배사상에서 유래한 것으로 결론을 짓는다. [5] 이러한 세미라미스 음모론은 가톨릭에 대한 악마화와 중상을 위해 주로 활용되었으나, 이 음모론의 지지자들이 가톨릭이 이교도들인 세미라미스-탐무즈 모자 우상숭배자들의 잔재라는 근거라며 주장하는 대표적인 요소 중에는 가톨릭보다는 주로 정교회에서 사용되는 성모자상 이콘도 포함되곤 하며, 그리스도교를 공인한 제국의 황제 콘스탄티누스 1세를 '가톨릭 창시자'라고 여기며 초기 그리스도인들을 이교도 신앙에 감화된 이들로 여기기도 하므로, 이는 가톨릭과 함께 사도전승을 유지하며 초기 그리스도교의 정체성을 중시 여기는 정교회에 대한 공격으로 해석될 여지도 존재한다. [6] 현재는 반기독교 계열에서 이 주장을 받아들여 예수 신화설 등의 근거로 들기도 한다. [7] 단, 부활절의 영어 단어인 Easter는 앵글로 색슨의 새벽과 생명의 여신 Ostara 또는 Eostre에서 유래했다는 것이 가장 유력한 설이고, 이는 그리스의 새벽의 여신 에오스, 로마의 오로라와 같은 신으로 여겨지는 것은 사실이다. 그리고 해당 신들의 어원은 원시 인도유럽 신화의 새벽의 여신, 하우소스에서 유래됐다고 본다. 결국 Easter란 단어 자체만 보면 이교의 영향을 받았다는 것 자체는 타당한 말이긴 하다. [8] 세미라미데는 세미라미스의 이탈리아식 표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