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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수정 시각 : 2024-10-10 01:24:42

카르카므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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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르케미쉬 유적과 1911-13년에 세워진 철교

1. 개요2. 역사
2.1. 신히타이트 (카르케미쉬)2.2. 카르케미쉬 전투 (기원전 605년)2.3. 근현대
3. 갤러리
3.1. 히타이트 석조 유물

1. 개요

튀르키예어 Karkamış

튀르키예 남동 아나돌루 주, 가지안테프 도에 속한 군이자 동명의 읍소재지. 가지안테프에서 동남쪽으로 50km, 킬리스에서 동쪽으로 70km, 수루츠에서 서남쪽으로 35km 떨어진 유프라테스 강 서안에 위치한다. 시가지는 바그다드 철도를 따라 그어진 터키-시리아 국경 바로 북쪽에 형성되어 있고, 본래 성밖 구역으로 같은 도시였으나 분단된 국경 너머의 자라불루스와 마주하고 있다. 현재는 인구 9천의 국경 도시에 불과하지만 고대에는 메소포타미아 문명의 주요 도시들 중 하나인 카르케미쉬였다. 구약 성경에서는 갈그미스라 불리며, 총 3차례[1] 언급된다. 시가지 동남쪽의 언덕에서는 히타이트, 아시리아, 페르시아, 로마 시기 유적이 층층이 쌓여 있어 수십년째 발굴이 진행 중이다. 현재 주민의 대부분은 튀르크멘인이며, 시리아 내전과 함께 긴장감이 흐른다.[2]

2. 역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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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집트 신왕국기 상형문자로 쓴 카르케미쉬

유프라테스의 도강 지점에 입지한 덕에 그 언덕에는 신석기 시대부터 마을이 있었고, 기원전 2500년경 에블라 문서와 기원전 1800년경 마리 문서에서 언급되었다. 당시 카르케미쉬는 도시 국가로 자체적인 왕이 있었고, 우가리트 미탄니와 외교 관계를 맺었다. 기원전 1500년 경 이집트 신왕국 투트모세 1세가 시리아 일대를 정복하고 유프라테스 당도를 기념하며 카르케미쉬에 비석을 세웠다. 기원전 1350년 경에는 히타이트 제국의 수필루리우마 1세가 일대를 정복하고 카르케미쉬를 자신의 아들 피야실리가 다스리는 번왕국으로 개편하였다. 따라서 80여년 후 카데시 전투 당시 카르케미쉬 왕국은 히타이트의 동맹국으로써 참전하였다. 기원전 13세기 카르케미쉬는 히타이트 제국의 주요 도시들 중 하나로 번영하였다.

2.1. 신히타이트 (카르케미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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야리리 국왕의 석판. 좌측에는 루위 문자가 새겨져 있다

기원전 1178년 바다 민족에 의해 하투샤가 함락되며 히타이트는 멸망하였다. 다만 카르케미쉬에선 여전히 히타이트 왕계가 이어지고 있었고 피야실리의 증손자 쿠지 테슈브가 바다 민족을 격퇴하고[3] 대왕을 칭하니, 이를 신히타이트라 부른다. 비록 그 영토는 킬리키아 ~ 북부 시리아에 국한되었지만 신히타이트는 중개 무역을 통해 경제적으로 번영하였다. 하지만 군사력이 약했기에 점차 영토를 잃어갔고, 기원전 975년 히타이트 왕가가 단절되고 주신인 쿠바바를 모시던 제사장 가문 출신의 수히 왕가로 대체될 무렵에는 카르케미쉬 일대만을 유지하고 있었다. 수히 왕가의 마지막 군주 상가라 때부터 카르케미쉬는 아시리아에 복속하여 조공하였고, 기원전 850년경 수히 왕가를 대체한 아스티루와 왕가 역시 마찬가지였다.

기원전 790년경 아스티루와 왕은 어린 아들 카마니를 남기고 죽으며 친척 야리리를 섭정으로 삼았는데, 사실상 후자가 왕이 되었다. 야리리는 12개 국어와 4개의 문자에 능통한 학자였고, 아시리아와 좋은 관계를 유지하여 카르케미쉬의 안정을 회복하였다. 기원전 760년경 야리리가 사망하자 장성한 카마니가 즉위하였고, 그 역시 안정적으로 통치하였다. 카마니의 사후에는 그의 재상이던 친척 사스투라가 계승하였다. 후자의 손자 피시리의 대에 이르러 아시리아의 위세가 더욱 강해지자 그는 프리기아 국왕 '황금 손' 미다스와 동맹을 모색하였다. 봉신이 적과의 내통을 알게된 아시리아 국왕 사르곤 2세는 카르케미쉬를 침공해 도시를 함락, 약탈하고 피시리를 위시로 한 지배층을 니네베로 압송하였다.

2.2. 카르케미쉬 전투 (기원전 605년)

이로써 카르케미쉬는 천년 간의 왕정을 뒤로 하고 아시리아의 일개 주로 편입되었다. 그 군대 역시 아시리아 군에 편입되었다. 다만 카르케미쉬의 중요성은 여전했고, 아시리아계 주민들이 정착하였다. 기원전 612년 메디아, 칼데아 (바빌론), 엘람 연합군에 의해 니네베가 함락되고 3년 후 마지막 수도 하란까지 상실하며 아시리아는 멸망하였다. 한편 아시리아의 동맹인 이집트의 네코 2세는 구원을 위해 북상했으나 메기도에서 바빌론의 동맹인 유다 왕국과 맞서느라 하란 함락을 막지 못했다. 마침내 유다 국왕 요시야를 죽이고 진격한 네코 2세는 아시리아 잔당과 합세, 하란 수복을 시도했으나 실패하였다. 이후 이집트-아시리아 군은 카르케미쉬를 근거지로 삼아 메소포타미아를 노렸다.

기원전 608년 네코 2세는 4개월 간의 포위 끝에 바빌론 측 전진 기지인 쿠무크를 함락하며 기세를 올렸다. 바빌론의 나보폴라사르는 반격을 준비했지만 건강 악화로 인해 회군하였고, 기원전 606년 네코 2세는 시리아에 남은 칼데아 군을 격파하였다. 이듬해 나보폴라사르자 후계자 네부카드네자르 2세는 시리아 수복을 위해 대군을 모아 카르케미쉬로 향하였다. 칼데아 군은 유프라테스를 건너 기습하였고, 이집트-아시리아 군은 대패하였다. (카르케미쉬 전투, 기원전 605년) 이후 추격에 나선 네부카드네자르 2세는 하마에서 이집트 잔병을 격파하며 시리아를 평정하였다. 카르케미쉬 전투는 구약 예레미야 서에도 언급될 정도로 대규모 충돌이었고, 이로써 10여년간 지속되던 서아시아의 패권 경쟁은 칼데아 (신바빌로니아)의 승리로 돌아갔다.

2.3. 근현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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히타이트 유물의 발굴 현장과 T.E 로렌스 (일명 '아라비아의 로렌스')

칼데아 이후 아케메네스 제국 (페르시아) 기에도 카르케미쉬는 비록 중요성을 잃긴 했지만 군사 기지로 활용되었다. 이는 헬레니즘 ~ 로마 제국기에도 마찬가지였고, 그리스식 지명인 에우포로스로 명명되었다. 중세 시기에는 튀르크멘이 정착하였고, 에우로포스가 와전된 자라불루스로 불렸다. 한편 19세기 후반 성경의 갈그미스로 규명된 후 1878년부터 영국박물관의 주도 하에 발굴이 개시되었고, 1912년에는 토머스 에드워드 로렌스 역시 참여하였다. 발굴과 함께 언덕의 주거지는 아래쪽 외성 일대로로 이전되었다. 비슷한 시기 바그다드 철도 부설과 함께 세워진 철도역은 언덕의 서쪽에 있었고, 그곳에도 작게나마 시가지가 형성되었다. 그리고 1차 대전 로잔 조약으로 인해 철도를 따라 국경선이 그어지며 언덕 남쪽의 큰 시가지와 철도역 쪽의 작은 시가지는 각각 시리아와 터키령으로 분단되었다. 주민 중 아랍계는 전자, 튀르크멘계는 주로 후자에 정착하였다.

터키령 도시는 유적의 이름을 따 카르카므쉬로 명명되었다. 한편 40여년간 이어지던 발굴은 1920년 터키 독립 전쟁과 함께 카르케미쉬 유적 언덕이 터키측 군사 기지가 되며 중단되었고, 50년대 ~ 90년대에는 지뢰가 매설되었다. 2000년에는 상류 3km 지점에 남부 아나톨리아 개발에 따라 세워진 21개의 댐들 중 하나인 카르카므쉬 댐이 완공되며 일대를 지나는 유프라테스 강의 수위가 낮아졌다. 1998년 유적 언덕의 군사기지 이전과 함께 지뢰 해체 작업이 시작되었고, 2011년 마무리 된 후 더럼 대학교의 참여와 함께 발굴이 진행 중이다. 다만 시리아 내전과 함께 2013년 7월 다에시가 국경 건너편 자라불루스를 점령하며 위기가 고조되었고, 국경에는 방벽이 세워졌다. 그러던 2016년 8월에 로자바 쿠르드 세력의 견제를 위한 유프라테스 방패 작전으로 터키군이 아자즈와 함께 자라불루스를 점령한 후로는 시리아 쪽의 옛 외성 구역에 대한 조사도 이루어지고 있다.

3. 갤러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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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르케미쉬 유적 언덕과 국경 건너편 시리아령 자라불루스 (카라불루스)

3.1. 히타이트 석조 유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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쿠바바 신의 모습 쿠바바 제사장 출신 수히 왕가의 카투와스 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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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히 왕가 4대 국왕인 카투와스 히타이트식 사자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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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예레미야, 역대하, 이사야서 [2] 내전 중반기 주요 격전지 중 하나였던 만비즈와 겨우 30km 거리이다 [3] 다만 람세스 3세가 세운 메디네트 하부 신전에서 카르케미쉬가 바다 민족에 의해 파괴되었다고 하니 격렬한 전투가 있었던 것 같다. 다만 확실한 것은 결국 살아남았다는 것