먼나라 이웃나라의 문제점 | |||
네덜란드 | 프랑스 | 독일 | 영국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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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 | 중국 | 에스파냐 | |
발칸반도 / 동남아시아 / 중동 / 캐나다, 호주, 뉴질랜드1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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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정성 | 구성 | ||
윗첨자1: 舊 가로세로 세계사 1~4권.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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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세기판 - (03)
전면개정판 - (12)
업그레이드판 - (18)
1. 그림체
그림체가 앞에 있는 잉글랜드와 스코틀랜드, 아일랜드, 웨일스의 차이를 설명하는 파트를 제외하고 전부 옛날 그림체를 그대로 썼다. 앞에 있는 파트를 제외하고 그림체가 바뀐 게 없다.2. 역사
2.1. 고대
-
옛날 유럽 사람들이 영국 너머 서쪽 바다로 진출할 생각을 못했던 것은 지구가 평평하다고 생각해서였다.
- 완벽한 오류다. 플랫 에러 참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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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이사르가 브리튼 원정 때
브리튼인들의 기강이 해이하고 군율이 엉망인 부족 연합군이라서 쉽게 이겼다?
- 카시벨라우누스는 강력한 전차병과 뛰어난 용병술로 로마 정예군을 몇 번 격퇴하는 모습까지 보여줬다. 단지 카시벨라우누스에게 원한을 가진 부족장을 포섭하여 그의 약점을 간파하여 카시벨라우누스가 연속으로 패하자 어쩔 수 없이 카이사르에게 항복하였다. 또한 먼나라 이웃나라에서는 여기서 브리튼족이 완전히 정복당한 걸로 나오지만 실제로는 카이사르 때는 항복만 받고 물러갔으며 완전히 정복한 것은 한 세기 뒤였다. 만화 아스테릭스에서 브리튼인들이 티타임을 즐기며 쉬다가 카이사르가 브리튼을 1개 마을 빼고 완전히 정복한 모습에서 영향을 받은 듯.
2.2. 중세
- 43페이지에서 문무왕이 한 일을 무열왕이 한걸로 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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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르망디 공
윌리엄 1세은
헤이스팅스 전투에서 허약한 잉글랜드 육군을 쉽게 격파했다.
- 그렇게 쉽게 이기지는 않았다. 당시 잉글랜드 왕 해롤드의 주력 군대는 예전 알프레드 대왕이 육성한, 당대 유럽 최강의 중장보병이라 불렸던 허스칼이었다. 또 이들은 언덕과 같은 유리한 위치에서 상당수의 노르만 기사들을 쓰러뜨렸다. 그러나 해롤드가 노르만 군대의 상륙 지점을 예상했는데도 상륙을 못 막고 애인에게 깃발 바치느라 시간을 낭비하는 등 전술, 전략적으로 엉망진창이었고, 북쪽에서 맹장 하랄 3세 하르드라다가 이끄는 바이킹을 격퇴하고 다시 급히 남부 잉글랜드까지 내려와 바로 싸우는 체력적 부담에다 노르만군의 사실상 마지막 공세에서 왕이 눈먼 화살에 맞는 등 운도 안 따라 주면서 아깝게 진 것. 노르만군도 약탈에 눈이 멀어 전략이 꼬인 상황이 많았으니 손쉽게 이겼다고 볼 수 없다. (버나드 로 몽고메리 저, 《전쟁의 역사》 등 출처)
-
윌리엄 1세의 다음 왕은 로푸스?
- 로푸스는 얼굴이 붉어서 붙은 별명일 뿐 실제 이름은 윌리엄이며 아버지가 윌리엄 1세였기에 윌리엄 2세라고 불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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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생에게 왕 자리를 주다니... 아버지도 너무해!"
- 사실 원래 왕위 계승권 1위는 로버트였다. 그럼에도 차남인 윌리엄이 이은 이유는 순전히 본인이 아버지에게 반역했다가 상속권을 잃었기 때문이다.[1] 즉 저 말을 들은 윌리엄 1세가 "아비에게 칼 들고 반란 일으킨 놈이 노르망디 공국이라도 물려받은 걸 감지덕지로 여겨야지 뭐가 어쩌고 저째?" 라고 화내도 할 말이 없다.[2] 여담으로 로버트는 저 물려받은 땅도 제대로 건사 못해서 동생이랑 쌈박질하다 땅 일부를 잃기까지 했다. 윌리엄 2세 사후엔 잉글랜드의 대부분의 대귀족들이 자기 편에 섰는데도 이기지 못했고 통치도 영 못해서 노르망디의 귀족들은 헨리 1세에게 로버트 몰아내 달라고 요청했을 정도, 물론 저 소리 들은 헨리 1세는 당연히 노르망디로 와서 로버트를 개박살내고 노르망디까지 접수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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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3년 내내 쌈박질만 했다?
- 윌리엄 2세는 치세 초기의 불안정한 정세를 안정시키고 자기 위치를 공고하게 만들었다. 게다가 13년 내내 싸우기만 한건 아니고 초기에야 노르망디 두고 쌈박질 했지만 나중엔 대충 화해하여 윌리엄 2세가 십자군 원정을 떠나자 로버트 대신에 노르망디의 섭정이 되어 통치하기도 했다. 다만 죽을 때까지 돌려주지 않았는데 로버트가 노르망디에 돌아왔을 때 그보다 한달 전에 윌리엄 2세가 죽었기 때문이다.
-
앙주 백작과 결혼하라는
헨리 1세의 말에 좋아하는
마틸다?
- 그렇게 많이 알려져 있긴 한데 사실은 그 반대다. 마틸다는 재혼에 소극적이었고 부왕의 강요에 못 이겨 재혼하고 아들을 낳은 것에 가깝다. 재혼 상대는 풀크 5세의 장남 앙주 백작 조프루아(제프리) 5세로 미남백작이라는 별명이 있을 정도로 당대 최고의 미남으로 유명했다. 헨리 1세가 재혼을 거부하는 마틸다를 남편 후보자가 엄청난 미남이라는 식으로 설득하는 전개가 나았을 것이다. 그리고 스티븐 왕이 마틸다의 왕위를 찬탈해 무정부시대라고 불리는 내전이 일어난 시기는 왠지 빠졌다. 꽤 커다란 사건인데 언급도 없는 것은 의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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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처드의 행위는 패륜행위?
- 책에서는 마치 리처드 1세의 행위가 패륜처럼 묘사되고 보통 같으면 그렇겠지만 리처드에게도 사정은 있었다.
책에서도 나오지만 헨리 2세는 조상대부터 결혼, 정복 등으로 인해 노르망디+앙주+잉글랜드+아키텐 등의 넓은 영지를 가지고 있었다. 그런데 노르망디는 윌리엄 1세 이전부터 가지고 있던 땅이고 잉글랜드는 윌리엄 1세가 정복한 땅이며 앙주는 헨리 2세의 부계조상의 땅이라 헨리 2세에게 온전한 소유권이 있었지만 아키텐은 사정이 달랐다. 그건 엘레오노르의 소유이며 엘레오노르가 루이 7세와 이혼하고 헨리 2세와 결혼함으로서 그 땅의 주인도 바뀌었다는데서 보듯 엘레오노르는 아키텐에 대한 권리가 충분히 있었다.[3] 문제는 책에서 나오지 않았지만 엘레오노르는 헨리 2세의 의중과는 달리 리처드가 이 땅을 물려받길 원했다는 것이다. 그러니까 존이 아키텐을 리처드가 나머지 땅을 물려받을 것을 희망한 헨리 2세의 바람은 엘레오노르나 리처드 입장에서는 받아들일 수 없었다. 자기네랑 상의를 한 것도 아니고 그냥 존을 편애하므로 존에게 주기로 한 것이기 때문이다. 그렇다고 헨리 2세가 이 문제를 두고 상의를 해보려던 것도 아니다. 재위기간 중 반 이상을 프랑스에서 보내고 가정에도 무심해서 아들들은 아버지가 아니라 어머니를 더 따르는 실정이었으며 엘레오노르 역시도 여기저기 바람피우고 다니는 헨리 2세에게 불만이 많아서 굳이 막판에 리처드 1세가 일으킨 반란이 아니더라도 진작부터 헨리 2세의 아들들은 아버지에게 반란을 일으키고 다녔다.[4]
즉 헨리 2세는 집안 관리가 너무 개판이었고[5] 그런 와중에 유산 분배마저도 제멋대로 하니 리처드 1세 입장에서는 꼭지가 돌 수밖에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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존이 자신의 조카 아서를 죽인 것에 대해 필리프에게 고발당하고 영토를 빼앗겼다?
- 존이 실제로 아서를 죽였는지에 대해서는 밝혀지지 않았으나, 최소한 그 사건으로 고발당하지는 않았다.[6] 실제로 존이 필리프 2세에게 법정출두를 거부한 사건은 위그 드 뤼지냥의 약혼녀인 이자벨 당굴렘을 가로챈 것과 과도한 로리콘질로 고발된 것이다. 당시 이자벨은 12살이었으며, 존은 이 왕비에게 하루 종일 매달려 살았다 한다. 그리고 주변 인물들은 존을 "이 로리콘 자식!"이라는 눈빛으로 보았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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왕좌에 앉은 존 왕에게 칼을 들고 협박해서 대헌장을 서명받았다?
- 대헌장에 대해 설명할 때 왕좌에 앉은 존 왕을 귀족들이 칼을 들고 협박하는 장면이 있는데, 실제로는 런던 교외로 존 왕이 행차해 대헌장에 서명했다. 그리고 대헌장으로 잉글랜드 왕의 권력이 크게 줄어들었다고 서술되어 있지만 당시 사상 최강의 교황권을 행사하던 인노첸시오 3세가 대헌장을 무효로 판결했고 이윽고 일어난 내전에서 헨리 3세의 보호자 윌리엄 마셜이 이끄는 국왕군이 반란군을 박살내면서 귀족들은 왕에게 감히 대헌장을 지키라고 요구할 형편이 되지 않았다. 잉글랜드 왕의 권한이 실질적으로 줄어들었다고 말하기는 어려웠다. 심지어 대헌장도 존 이후에도 한동안 사문화된 수준으로 남아있다가 17세기, 왕과 의회가 충돌하자 재발굴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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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드워드 1세가
헨리 3세의 조카이다?
- 에드워드 1세는 명백하게 헨리 3세의 장남이지, 절대로 조카가 아니다. 아들이 없을 경우가 아닌 이상 잉글랜드는 조카가 왕위를 물려받는 경우가 드문 데다가, 애초에 헨리 3세는 에드워드 1세 말고도 랭카스터 가의 에드먼드 크라우치백 같은 유명한 아들도 있었다. 원래 뜻은 크로스드백(crossed-back)으로 이 별명은 그가 제 9차 십자군 원정에 참여할 당시 등에 십자가가 그려진 갑옷을 입었기 때문에 생긴 별명이다. 명백한 오류이다.
-
프랑스 왕과 잉글랜드 왕의 관계 묘사
잉글랜드 왕이 프랑스 왕의 봉신이기도 하다는 점 때문에 프랑스 왕이 일방적으로 잉글랜드 왕을 하대하는 식으로 그려놨는데 사실 그때그때 다르다. 정확히 말하면 잉글랜드 왕은 잉글랜드의 왕임과 동시에 프랑스 내 영지들의 주인으로서 더 알기 쉽게 말하면 잉글랜드의 국왕, 노르망디 공작,앙주 백작 등등등의 여러 작위를 가지고 있었다. 이는 잉글랜드뿐 아닌 중근세의 많은 유럽의 군주들의 특징으로 극단적으로는 카를 5세가 이베리아 반도+독일+북이탈리아+베네룩스에 걸친 광대한 영토를 가지기도 했다. 문제는 영지들은 자신의 상위 주군에게서 벗어날 수 없어서 앞서 말했듯 잉글랜드의 왕이더라도 프랑스 왕의 영향력에서 자유로울 수 없었다. 그러나 반대로 프랑스 왕은 어디까지나 프랑스에 속한 지역의 영주들에게 영향력을 행사할 수 있었으므로 노르망디 공작, 앙주 백작에게는 큰소리칠 수 있어도 잉글랜드의 왕에게는 그럴 수 없었다. 이 때문에 아무리 내가 프랑스 왕이고 잉글랜드의 왕이 노르망디, 앙주 등을 가지고 있어서 뭐라 할 수 있어도 거기에는 명확한 한계가 있었다.예를 들어 '노르망디 공작'이 어디 이웃 영주와 시비가 붙으면 이를 중재하거나 하는 일은 할 수 있지만 잉글랜드 국왕이 잉글랜드 내의 귀족과 권력다툼을 한다면 여기에는 끼어들 수 없다. 차라리 잉글랜드 왕이 스코틀랜드 왕이랑 전쟁한다면 이 때는 스코틀랜드든 잉글랜드든 한쪽이랑 동맹을 맺어 참전할 수는 있지만 이 때도 결국 같은 왕들끼리의 동맹이므로 잉글랜드 왕에게 이래라저래라 할 순 없다. 물론 잉글랜드의 왕은 잉글랜드 왕으로서는 아니라도 프랑스 내에 영지를 가지고 있는 이상 프랑스 왕에게 그만큼의 의무는 다해야 했다. 잉글랜드 왕이 프랑스 내에 가진 땅은 어디까지나 잉글랜드 왕 개인에게 귀속된 것이지 잉글랜드라는 나라 자체가 가진 것이 아니었고 명목상 이 땅들의 주인은 프랑스이기에 프랑스 왕을 무시할 수 없었고 만일 프랑스 왕이 잉글랜드 왕이 프랑스 내에 영지를 가졌으면서도 의무를 다하지 않는다 여기면 프랑스 내 잉글랜드 왕의 영지를 몰수할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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플랑드르 상인들이 잉글랜드의 프랑스내 영지를 핑계삼아 잉글랜드를 부추겼다?
- 그건 아니다.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왕이 되려면 혈연이 중요했다. 잉글랜드 왕이 프랑스 왕위까지 주장할 수 있던 것은 단순히 프랑스 내 영지가 있다는 이유가 아니라 잉글랜드에도 프랑스의 카페 왕조의 혈통이 흘렀기 때문이다. 무엇보다도 플랑드르 상인들이 전쟁을 부추겼다는 것도 현재는 부정되고 있다. 그러기에는 백년전쟁의 원인은 너무 복합적으로 얽혀있고 이들이 부추기든 말든 어차피 일어날만한 전쟁이기도 했다.
-
잉글랜드는
석궁수를 집중 육성하여
백년전쟁 초기에 승리를 거듭했다.
-오류계의 전설로 꼽히는 먼나라 이웃나라의 대표적인 오류. 임진왜란으로 비유하자면 일본이 국궁을 앞세워 쳐들어왔으나 조선이 조총으로 반격해서 물리쳤다, 혹은 일본이 거북선을 몰고 쳐들어왔으나 이순신 장군이 안택선을 타고 물리쳤다고 쓴 격이다. 잉글랜드군은 장궁을 썼다. 오히려 프랑스군이 제노바 쇠뇌병을 고용했으나, 크레시 전투와 아쟁쿠르 전투에서 대패했다. 그 원인도 잉글랜드군이 장궁을 사용했기 때문이 아니었다. 크레시 전투의 경우, 갑옷을 거의 뚫지 못하는 장궁에 안심한 프랑스의 기사들이 수적 우세를 믿고 공명심에 빠졌다. 이들은 태생적으로 서로 라이벌인 귀족이었기 때문에 팀워크를 갖추기 힘들었다. 때문에 전공을 위해 돌격하다 진창으로 인해 발이 묶여 기동력을 상실하고 살아있는 과녁이 되어버렸고, 잉글랜드군은 아주 쉽게 그들을 화살꽂이로 만들어 버렸다.[7] 그리고 이 오류는 최근 나온 수정판까지 석궁으로 표시되고 있다.
전쟁은, 특히 화약 무기 이전의 전쟁은 무조건 무기 성능에 좌우될 만큼 단순하지 않다. 그리고 해당 페이지의 다음 페이지에는 크레시 전투를 그린 그림이 실려 있는데, 설명과 달리 그림에서는 프랑스군(제노바인 용병이 석궁을 썼는데 그 뒤로 프랑스 기사들이 돌격해 개발살)이 석궁을 쓰고 있고, 잉글랜드군은 장궁을 쓰고 있다. 그림과 설명이 앞뒤가 안 맞는다. 개정판에는 '초기엔 잉글랜드군만 석궁을 주로 사용했으나 차츰 프랑스군도 사용함.'이라는 말이 나왔다. 정작 잉글랜드군은 장궁을 들고 있지만 정말로 석궁 이야기를 하겠다면 "프랑스군으로부터 일부 노획한 석궁을 잘 활용하였음" 이런 식으로 서술하는 게 나을 뻔했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그렇게나 석궁이 강하면 도대체 잔 다르크는 어떻게 이긴 걸까? 잔 다르크도 인간인 이상 다른 사람들처럼 화살이 꽂히면 죽고 칼에 베이면 죽을 사람인데, 그렇게나 석궁이 강하다면 잔 다르크가 석궁에 맞아 전사해야 했지 않았을까? 실제로 작중에선 잔 다르크가 등장해 이겼다는 말만 나올 뿐 도대체 어떻게 이겼는지에 대해선 전혀 알려주지 않는다. 다만 특이하게도, 작가는 30년전 계몽사의 학습 만화세계사의 감수를 맡기도 했는데, 여기에서는 잉글랜드군이 사용한 것이 장궁이라는 것을 확실하게 글과 그림으로 담아놨으나, 먼나라 이웃나라만 수없이 개정판이 나오는데도 끝끝내 수정되지 않는다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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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미 전쟁 관련
장미 전쟁이 왕위를 차지하고 있던 '랭커스터 가문'에게서 대귀족인 '요크 가문'이 왕위를 빼앗으려던 전쟁이라고 설명하면서 요크 가의 에드워드가[8] 왕위를 내놓으라는 말에 왕이 "저런 염치없는 반역자 같으니! 왕관이 무슨 공동 변소 손잡이인 줄 아냐? 이놈 저놈 아무나 만지게 저 놈을 당장 처치하렷다!" 라고 말하는데 물론 왕위를 떡하니 차지하고 있는 가문보고 왕위를 내놓으라는건 차지한 쪽 입장에서는 반역으로 비춰지겠지만 요크 가에서도 왕위를 주장할 근거는 있었다. 랭커스터나 요크나 공통점이 있다면 조상이 헨리 2세다.[9] 즉 둘 다 플랜태저넷 왕조의 후예로서 충분히 혈통상 왕위계승을 주장할 수 있었고 애초 랭커스터도 플랜태저넷 왕가의 마지막 왕인 리처드 2세를 몰아내고 왕조를 열었다. 즉 요크 가문 입장에서 저 말을 들으면 "우리 둘 다 플랜태저넷 왕가 혈통이고 너네 할아버지도[10] 플랜태저넷 왕가 몰아내고 왕이 되었는데 나는 왜 안되는데?" 라고 반문하면 랭커스터 가에선 반문할 수가 없다. 그럼에도 신하가 왕에게 도전장을 내밀었다는데서 반역으로 비춰질 수도 있겠지만 그냥 그 때 시대가 그럴 환경이 조성되어 있었다.[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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헨리 7세와
요크의 엘리자베스의 결혼
헨리 7세가 요크 가문과의 화해의 제스처로 한 것으로 나왔지만 실제로는 정치적 거래의 산물이다. 요크 가문의 에드워드 4세 아들 에드워드 5세에게 왕위를 물려주고 동생인 리처드 3세에게 섭정을 맡기고 죽었는데 리처드 3세는 진작부터 왕위에 욕심을 내고 있었던지라 에드워드 4세가 성생활이 난잡했던 것을 활용해 에드워드 5세를 비롯해 에드워드 4세의 자식들을 사생아라고 주장해 에드워드 4세를 폐위하고 남동생 리처드와 함께 런던 탑에 가둔 뒤 자신이 왕이 되었다. 문제는 당시 왕비였던 엘리자베스 우드빌이 살아있었다는건데 한순간에 내쫓긴 신세 때문인지 엘리자베스 우드빌은 결국 요크 가문과 적대적인 튜더 가문과 손잡았는데 그 조건이 자신의 딸, 요크의 엘리자베스와 헨리 7세의 결혼이었다.
2.3. 근세
-
스페인 국왕이
캐서린 왕후를 자신의 딸이라고 표현한다.
- 헨리 8세가 이혼을 신청했을 때, 당시 스페인 왕이 '뭐야? 내 딸을 몰아내려고 해? 고~얀지고! 로마 교황에게 압력을 넣어서 이 이혼을 절대로 인정하지 못하게 하라!'라고 말한다. 당시 스페인이 클레멘스 7세에게 압력을 넣은 것은 사실이다. 당시 클레멘스 7세는 사코 디 로마를 겪은 후인지라 스페인의 눈치를 엄청나게 봐야 했다. 그러나 캐서린 왕후의 부친인 페르난도 2세는 이미 그 시점으로부터 10년도 더 전인 1516년에 사망했으며, 당시 스페인 왕은 캐서린 왕후의 언니 후아나 1세 여왕의 장남이자, 스페인의 가톨릭 부부왕의 장외손인 카를로스 1세였다. 고로 더 정확하게 말하자면 '뭐야? 내 이모님을 몰아내려고 해? 고~얀지고!' 라고 해야 맞다. 그리고 헨리 8세가 캐서린과 결혼하는 것을 마뜩잖아 하는 듯 그려놓았는데 오히려 먼저 청혼한 쪽은 바로 헨리 8세 쪽이다. 처음엔 본인이 반해서 청혼했으나 결혼 생활을 하다보니 앤 불린과 눈이 맞아 이혼해버린 것.[12] 자세한 것은 아라곤의 캐서린 문서를 보자. 이후 먼나라 이웃나라 에스파냐편에서 캐서린은 후아나의 딸로 나와 있다.
- 헨리 8세가 성공회를 창설할 때 가톨릭에 루터회 양념을 치는 걸로 묘사했으나, 실제로 성공회는 칼뱅주의의 영향을 훨씬 더 많이 받았다. 뿐만 아니라 실제 역사에서 헨리 8세와 마르틴 루터는 상당히 험악한 관계였을 뿐만 아니라, 헨리 8세나 성공회 문서를 보면 알겠지만 헨리 8세는 로마 교황의 수위권만 부정한 가톨릭 교도라고 봐도 좋을 정도로 신학적으로는 개신교와는 거리가 멀었고, 로마 교회로부터 잉글랜드의 교회를 '분리'시키는 역할 정도를 했다고 보는 게 적절할 것이다.[13] 즉, 후에 칼뱅주의의 영향을 받아 성공회가 개신교적인 성격을 띄게 되는 것도 엄밀히 말하면 헨리 8세의 의도라고 보기는 힘들다.
- 클레베의 앤과 이혼한 이유로 그녀가 못생기고 무뚝뚝해서 헨리가 실망했기 때문이라고 나오는데, 실제로는 더 복잡한 정치적 이유가 있다. 앤과의 결혼은 먼나라 이웃나라에서도 잠시 언급한 독일 개신교 계열 제후들과의 문제로 인한 정략결혼이었기 때문이다. 이 부분이 결혼 후 어긋나면서[14] 더 이상의 결혼 생활을 포기하게 된 것. 게다가 앤의 외모는 실제로는 그다지 못생기지 않았고 무난한 수준이라는 평가가 많다. 성품도 무작정 무뚝뚝해서가 아니라 예술이나 학문과 같은 지식이 부족하고 정숙하고 얌전하기만 한 편이어서 헨리 8세가 따분하게 여기고 실망한 것에 가깝다. 자세한 내용은 해당 문서를 참조.
- 캐서린 파는 헨리 8세보다 오래 살았고 사별한 후 세 번이나 더 재혼했다고 되어 있으나, 실제 캐서린 파는 헨리 8세가 죽은 지 2년을 채 못 넘기고 사망하였고, 헨리 8세가 죽은 후 재혼한 것은 맞으나 한 번 뿐이었다. 이 부분 역시 새로 만든 개정판에서도 수정이 되지 않았고 오히려 남편의 이름들이 줄줄이 나와 더 믿을만한 정보로 만들어버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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블러디 메리 부분 관련
- 메리 1세가 신교도에게 호의적이지 않았던 건 사실이지만 신교도들을 무자비하게 학살하고 초법적인 수단들을 남용한 것은 아니라고 한다. 즉, 논란의 여지가 있다. 자세한 것은 메리 1세 문서 참고. 그 외에 말년에 정신병 같은 상태였다고 했는데 그건 아니었다. 다만 외정에서의 실패와 펠리페 2세의 외면 등으로 인해서 말년의 고통이 심했고 특히 2번에 걸친 상상임신으로 안 그래도 메리 1세에 대한 관심이 별로 없었던 펠리페 2세는 더더욱 외면하였다고.
- 114페이지에서 펠리페 2세를 펠레페라고 썼고 118페이지에서 엘리자베스1세를 엘리자베드 1세라고 썼다.117페이지에서는 메리 1세가 구교 복구 정책을 편 것을 1547년이라고 잘못 썼다.
- 메리 1세가 펠리페 2세를 부군으로 맞이하려 할 때 잉글랜드인이 여왕 남편이 외국 사람이냐느니 잉글랜드 총각은 다 죽었냐느니 등 시위를 벌이는데 실제로는 유럽 왕가들은 거의 다 외국의 왕족들과 결혼을 했고 당장에 메리 1세의 어머니는 에스파냐 공주였다. 후에 나오는 찰스 1세의 아내도 프랑스 공주였고 때문에 "에스파냐인 반대!" 라고 외쳤다면 모를까 외국인과 결혼하지 말라는 말은 시대적인 사정상 나오기 어려운 말이다. 그래도 일단 잉글랜드에서는 잉글랜드 내에서 결혼하는 일도 많았고 실제로도 메리 1세의 결혼 상대로 레지널드 추기경, 데본셔 백작이 거론되긴 했는데 레지널드 추기경은 50대에 샌님 스타일이라 메리 1세의 마음에 들지 않았고 데본셔 백작은 신하들이 반대해서 무산되었다.
-
프랜시스 드레이크가 이끄는 잉글랜드 함대는
무적함대를 우세한 사거리를 이용한 함포전으로 물리쳤다.
- 당시 잉글랜드 연합해군의 지휘자는 노팅엄 백작 찰스 하워드였고, 드레이크는 부사령관이었을 뿐이다. 더욱이 드레이크는 약탈에 눈이 먼 나머지 잉글랜드 함대 전체를 위험에 빠뜨리거나 명령에 불복종하는 등의 이유로 전투 중에 해임당한다.[15] 또한 당시 양측이 사용한 화약 무기의 질은 별다른 차이가 없었다. 당시 대포는 독일이나 이탈리아 지방 외에는 신뢰할 만한 수준의 무기를 만들 기술이 없었기 때문이다.
이 부분은 부존 자원의 문제도 있다. 당시 가장 신뢰성이 높은 포는 청동제였는데, 독일이나 이탈리아는 구리 자원이 풍부하거나 수입처가 많고 종(교회 종도 청동으로 만듦)만드는 장인이 많아서, 이들 국가는 종 만드는 장인들을 금방 대포 장인으로 전환할 수 있었다. 그러나 그 외의 국가들은 상대적으로 질이 떨어지는 연철제 포를 주로 운용했다.
그런데 잉글랜드, 스웨덴, 네덜란드 등이 주조제 대포를 양산하면서 선박의 대포 보유 수가 점점 늘어나게 되었다. 문제는 스페인은 자체적으로 청동 대포를 만드는 기술도 부족하고, 구리나 철강 자원도 많지 않았다는 점이었다. 게다가 원래 스페인의 주철 대포 수입처는 당면한 적국인 잉글랜드와 한참 독립 전쟁으로 싸우고 있던 네덜란드였다! 이러니 스페인이 잉글랜드에 비해 화력이 열세일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절대적인 열세는 아니었기 때문에 위와 같은 서술은 문제가 있다. 실제로 가장 중요한 문제는 대포의 운용 방식이었다. 스페인은 화력 중시, 잉글랜드는 사거리 중시 경향을 보였다. 게다가 스페인은 여전히 지중해식 근접전을 선호해서 병사 수는 상대적으로 더 많고 대포 수는 더 적었다. 결정적으로 당시 기록을 검토하면 양측에서 포격전으로 완파되거나 반파된 함정은 6척을 넘지 못한다. 그것도 모두 낡은 선박들이었다. 왜냐하면, 파열탄이 개발되기 전까지 상태 양호한 목선을 단순히 돌 or 쇳덩이를 발사하는 대포로 격침시키는 건 힘든 일이었기 때문이다. '스페인은 적선에 올라타서 근접전을 벌이는 구식 전술을 활용했다'라는 묘사도 책에 있는데 이게 일부만 맞는 내용인 것도 이 때문이다. 함상 백병전은 화포의 기술이 한참 더 발달한 19세기 초 나폴레옹 전쟁 때도 빈번하게 벌어졌다.
특히 스페인은 잉글랜드 함대와의 결전을 최대한 회피하면서 네덜란드로 가서 거기 육군을 실어 오는 게 목적이었고, 잉글랜드 측도 스페인 아르마다와 제대로 붙을 엄두를 내지 못하는 실정이었다. 또 아르마다가 괴멸적 타격을 입은 직접적인 이유는 잉글랜드군의 화공이 아니다. 칼레 전투에서 화공으로 스페인군의 공격이 실패하자, 해류와 바람의 방향 때문에 어쩔 수 없이 스코틀랜드를 돌아 귀환하다가 함대의 대부분이 폭풍우로 박살났다. 이 점이 신판에서 언급되어 있기는 하다. 이 부분은 영국사에서 매우 중요한 부분이며 도서에서도 상당히 크게 강조된 부분임에도 이 역시 새로 만든 개정판에서도 조금도 수정이 되지 않았고 계속 프랜시스 드레이크를 강조하고 잉글랜드가 대포 사거리로 에스파냐를 무찔렀다고 하는 등 문제들을 유지하고 있다.
그리고 사실 이게 아니더라도 스페인은 처음부터 상태가 좋지 못했다. 어느 정도냐면 펠리페 2세가 작전계획을 아예 출판하여 뿌렸을 정도다. 미드웨이 해전을 앞둔 일본군조차 군 수뇌부에서 작전계획을 떠벌리지는 않았던걸 감안하면 굉장히 안이한 처사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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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대륙에서 온 세 가지(
담배,
감자,
매독)를 설명하는 도중에 감자에 대해서 평민이 감자를 들면서 "이것도 먹는 건가"라고 하는 장면이 있다.
- 진실은 당시 감자가 수입되고 난 직후에는 일반 채소처럼 이파리만 먹는 줄 알아서 저렇게 감자 들고 의문을 품는 평민은 없었다. 게다가 왕과 귀족들이 감자 구이 파티를 열며 극찬했다고 써있는데, 애초 감자는 널리 퍼지지도 않았다가 월터 롤리라는 귀족이 처음 먹기 시작하며 귀족들 사이에서 퍼진 것이며, 그마저도 먹는 사람은 드물었다. 그리고 도중에 감자 파티에서 "달콤한 게 입에 착착 붙네!" 라는 장면이 나오는데 이 당시 감자는 그냥 직수입한 생감자라서 당분은 없고 크기도 작아서 저런 말이 나올래야 나올 수가 없다. 오히려 엘리자베스 1세는 감자를 먹어 보란 말에 어떻게 그런 걸 먹냐며 질색했다.[16] 명백한 오류. 다만, 감자 도입 당시 평민들이 감자에 대해 큰 거부감을 가진 것은 사실이고, 감자의 식용이 지식인이나 귀족의 주도로 보급된 것은 사실이니[17] 이 부분은 그냥 농담이나 드립 정도로 해석해도 상관없는 부분이지, 딱 잘라 틀렸다고 말하기는 좀 모자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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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리 경 묘사
모습은 좀 뚱한 이미지의 아재에 특별한 잘못 없이 메리 여왕의 바람기 때문에 리치오에게 아내 뻇겨 눈 뒤집어진 것으로만 나오지만 사실 관계에 오류가 있다. 일단 단리 경은 그림에서의 이미지와 다르게 굉장히 어렸고 엄청난 꽃미남이었다. 사망 당시 나이가 겨우 20세 수준으로 메리 여왕보다 연하였다. 그러니까 메리 여왕보다 어린 이미지로 나와야 정상이다. 그리고 단리 경은 여러모로 여왕의 남편으로서 실격이었다. 모레이 백작이 단리 경을 두고 너무 어리고 어리석다고 평한 것이 과장이 아니듯 죽을 때 당시에도 겨우 성인 문턱에 불과한 나이면서도 주정뱅이에 방탕하여 매독까지 걸렸을 정도로 행실이 나빴으며 아무리 고귀한 신분이라고 해도[18] 여왕에게 공동 왕을 제안하는 모습을 보였고[19] 리치오를 죽이는 과정에서도 문제가 심했다. 메리 여왕도 여러모로 막장이었지만 부창부수라고 단리 경도 마찬가지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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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임스 1세는 어머니
메리 여왕의 사형에 찬성했다?
- 태어나자마자 자기를 버리다시피한 어머니였기 때문에[20] 사실상 모자 간에 애정도 없었던지라 속내는 그랬을 것이라 여겨지기는 하지만, 어쨌든 공식적으로는 반대 입장을 내었다. 잉글랜드가 유교 국가는 아닐지라도 왕이라는 자가 어머니의 처형을 찬성하면 안 좋은 분위기가 형성될 확률이 높았을 것이다. 애초에 기독교에서도 십계명에 부모를 공경하라[21]고 되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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철기대에 대한 묘사
기병대인 철기대를 보병으로 묘사했다. 그나마 업그레이드판에서는 기병대로 표현한 삽화가 들어가기는 했다. (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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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임스 1세가 돈쓰기를 좋아했고 의회에 예산을 구걸한
암군이였다?
제임스 1세가 왕권신수설을 주장하여 의회와 갈등한 건 사실이지만 돈쓰기를 좋아하여 재정을 파탄시킨 건 낭설이다.
실제로는 제임스 1세 시기의 난감했던 재정상태는 먼나라 이웃나라에서 나온 것과는 달리 엘리자베스 1세의 탓이 컸다. 책에서는 엘리자베스 1세가 검소한 군주로 묘사되나 반만 맞는 얘기로 엘리자베스 1세는 분명 많은 부분에서 검소하기는 했지만 보석이나 드레스 등에는 엄청난 돈을 쏟아부었다(...) 그렇게 해서 모은 보석들로 컬렉션까지 만들었는데 교황이 탐냈을 정도. 이 때문에 책에서 제임스 1세를 두고 보석을 좋아하는 군주라고 말했지만 실은 엘리자베스 1세에게 해야 맞는 말이다. 이 오해는 영국에서부터 퍼져 있다.물론 엘리자베스 1세 이전이라고 재정상태가 좋은건 아니었는데 헨리 8세가 이것저것 일 벌인다고 돈을 왕창 썼기 때문이다. 전임 엘리자베스 1세보다 못해도 통치는 무난했으며 그래서 백성들에게도 인기가 많았다. 제임스 1세가 의회에게 돈 달라며 애걸복걸한 것도 일부만 맞다. 예산 문제로 제임스 1세가 의회에게 요청을 한 건 사실이지만, 의회는 오히려 재정 상태가 그토록 심각한지를 제대로 알지 못했고, 이 때문에 '재정 핑계로 요청을 받아들였다가 국왕의 힘만 더 키우게 되는 거 아닌가?'란 오해를 하게 되었다. 그래서 협조를 거부한 것.
무엇보다 제임스 1세가 스코틀랜드 동군연합 군주라는 사실을 잊어서는 안된다. 때문에 전임 군주인 엘리자베스 1세보다 통치 난이도가 높았다. 왜냐면 잉글랜드보다 스코틀랜드의 정치가 더 개판이었고 두 나라 사이도 개판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적어도 제임스 1세는 이로 인한 문제는 일으키지 않았는데 예시로 스코틀랜드에 비교적 자주자주 찾아갔고 자신이 어릴 적 자신을 놓고 싸움을 벌이던 귀족들과도 잘 지냈다. 반면 아들인 찰스 1세는 왕이 된지 9년 뒤에야 스코틀랜드를 방문했고 그것도 모자라 스코틀랜드를 폄하했다. 게다가 나중에는 스코틀랜드에 잉글랜드 국교회를 강요했다가 잉글랜드 내전발발을 맞았고 여기서 패배하고 스코틀랜드로 망명했다가 스코틀랜드에 의해서 잉글랜드로 팔아넘겨진다(...)
제임스 1세는 외교로 스페인과 관계를 회복시키고 프랑스와의 정략결혼으로 동맹을 맺어 잉글랜드의 국제적 정세를 안정시켰고 전쟁이 안 일어나게 하였다. 그래서 명군은 아니지만[22] 자신들에게 평화를 가져다 준 제임스 1세가 죽을 때 백성들은 그의 죽음을 슬퍼하였다고 한다. 오히려 찰스 1세가 암군이면 암군이지. 더욱이 제임스 1세는 킹 제임스 성경을 편찬하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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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임스 1세는 가톨릭 국가인 스코틀랜드 출신 왕이었음에도 가톨릭을 탄압했다.
이 시점의 스코틀랜드는 이미 개신교로 전향한 나라였으며, 제임스 1세 역시 이미 개신교도였다. 따라서 잉글랜드의 가톨릭 교도들이 제임스 1세에게 기대를 품었다가 배신당했다는 서술은 명백히 틀렸다. 다만 제임스 1세의 어머니인 메리 여왕은 가톨릭과 연이 깊기는 했다.[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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찰스 2세는 왕이 된 직후에는 의회와 협력했으나 이후 본색을 드러내
올리버 크롬웰과 그 추종자들을 부관참시하고 독재정치를 했다.
- 실제로는 왕이 되자마자 크롬웰을 부관참시하고 그를 지지하며 부왕 찰스 1세의 처형에 데 앞장선 크롬웰의 추종자 26명을 사형시켰다. 그러나 의회파 인사들과 크롬웰 치하에서 권력이 약했던 크롬웰 정권 시대의 인사들은 대부분 살아남았거나 사형이 아닌 징역형과 귀족 작위 박탈과 같은 가벼운 처벌을 받았다. 사실 이 대목도 찰스 2세가 크롬웰을 부관참시했고, 크롬웰의 열렬한 추종자들을 처형했다는 것을 크롬웰과 추종자들을 부관참시했다고 뭉뚱그려 표현한 것에 가까워서 딱 잘라 틀렸다고 하기에는 좀 애매하다.[24] 또 크롬웰 처형 이후에도 찰스 2세는 의회와 협력해 정치를 한 편이었다. 또한 성품도 의외로 유쾌하고 선량해서 국민들에게 인기가 많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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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임스 2세는 심한 전제정치를 편 암군이어서
명예 혁명으로 쫓겨났다.
앞선 제임스 1세처럼 전통적인 역사관을 그대로 반영한 먼나라 이웃나라의 한계점으로, 오늘날의 사관에 따르면 제임스 2세는 폭군이 아니라 매우 유능하고 근면한 군인이요 행정가였으나 정치가로서는 한계가 있었던 인물 정도로 평가받고 있다. 분명 좋은 의도를 가지고 합리적으로 나라를 운영하였지만 이를 위해 반대파를 설득할 정치적 능력은 모자랐기 때문에 의회와의 대립이 심해져 몰락했다는 것. 가톨릭을 부활시키려는 시도도 본인이 가톨릭 교도였기 때문이라기보다는 가톨릭을 합법화하여 성공회와의 공존을 꾀했기 때문이었다. 만약 가톨릭만 고집했다면 토리당의 지지도 못받고 왕위도 못 물려 받았을 것이다.하지만 독자들은 미숫가루랑 잉글랜드를 떠나쇼 정도만 기억하지[25]
- 윌리엄 3세가 단순히 여왕의 남편이라서 잉글랜드 왕이 된 것처럼 되어 있는데, 사실 윌리엄 본인도 잉글랜드 왕위 계승권을 갖고 있었다. 윌리엄 본인이 찰스 1세의 외손자로, 어머니인 프린세스 로열 메리가 찰스 1세의 장녀이다.[26] 참고로 프린세스 로열 메리는 찰스 2세의 여동생이자, 제임스 2세에게는 누나로, 제임스 2세는 자신의 외조카를 사위로 맞이한 셈. 더욱이 윌리엄이 제임스 2세는 나의 장인이자 내 아내의 아버지라고 하는데, 거기에 나의 외삼촌이라는 말이 추가가 되어야 하는 것. 제임스 2세 역시 감히 조카가 삼촌을, 사위가 장인을 노리고 침임해?라는 식으로 말했어야 한다. 애초에 유럽에서는 단순히 왕의 사위이거나 남편이라고 왕이 될 수 있지도 않았다. 유럽에서는 대체적으로 여계계승도 가능했지만[27] 반면에 동아시아의 '서양자 제도' 같은건 없었기 때문. 정확히 말하면 아들 제임스가 태어나지 않은 채로 제임스 2세가 죽는다고 하면 왕위 계승 순위는 메리 공주가 1위. 앤 공주가 2위. 윌리엄이 3위였다. 메리 공주가 죽은 뒤, 윌리엄이 재혼해 자식을 본다면 그 자식에게도 영국 왕위 계승권이 있었다. 실제로 일어나지는 않았지만 윌리엄이 자식을 볼 경우에는 앤 공주의 자식이 앞선 왕위 계승권을 가지기로 합의를 봤다고 한다. 앤 공주의 자식이 전부 윌리엄 3세가 죽기 전 요절해서 별 의미는 없었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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왕 꾸어가기 챔피언?
조지 1세의 즉위 부분에서 사람 두 명이 "저 나라는 왕 꾸어 가는데 챔피언이야!", " 네덜란드 사람에 이어 이번엔 도이치 사람... 쯧쯧쯧" 하는 장면이 있는데 이는 유럽의 왕위계승에 대해서 잘 모르고 나오는 얘기다. 동아시아에서는 자국의 왕위가 타국에게 상속으로 넘어가는 일은 없지만 서양에서는 그런 일이 흔했다. 결혼을 타국의 왕족끼리 하고 대체로 왕비에게서 나온 자식에게만 왕위계승권을 주다보니 왕위계승권을 쥔 사람의 상당수는 타국 혈통이 섞인 경우가 많았다. 당장에 스페인 왕위계승전쟁만 해도 합스부르크 왕가, 부르봉 왕가가 스페인의 왕위를 놓고 충돌한 전쟁이며 비록 이 전쟁 터지기 전에 죽었지만 바이에른 왕가 출신의 계승자도 있었다. 때문에 자국의 왕위가 남에게 넘어가는건 흔한 일이었다. 단 예외적으로 프랑스 같은 경우에는 살리카법으로 부계계승만 인정되고 또 그게 안정적으로 이어져서 왕조의 혈통이 끊기면 그 왕조의 방계가문이 잇는게 보편적이었다. 플랜태저넷 왕조의 라이벌격인 프랑스의 카페 왕조는 이 사례의 끝판왕격으로 카페 가문의 시조인 위그 카페는 수많은 왕들의 조상이다. 다만 윌리엄 1세 이후 얼마 안 되어 또 외국인 왕이 나왔으니 재미로 보면 그럴듯하다.
- 앤 여왕 사후 다음 왕위 계승자 조지 1세를 소개하는 대목에서 "돌아가신 앤 여왕 할아버지신 제임스 1세 딸의 손자, 즉 외증손 되시는..."이라고 설명하는데, "돌아가신 앤 여왕 증조할아버지신 제임스 1세[28]의 외손녀( 팔츠의 조피)의 아들 되시는..."이 맞다. 뒷부분은 그렇다고 쳐도 제임스 1세가 앤 여왕의 '할아버지'라는 말이 틀렸으며 '증조할아버지'가 옳다. 앤 여왕의 할아버지는 제임스 1세의 아들 찰스 1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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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지 1세가 독일어만 하고 영어를 못해서 영국의 국정을 내팽겨쳤다
당시 유럽의 공용어가 프랑스어임을 부연 설명하지 않고 농담으로 넘어간 것으로, 신하들과 의사 소통에는 아무 지장이 없었다. 또 신하들과는 라틴어로 겨우 소통했다고 하는데, 라틴어보단 앞서 말했다시피 프랑스어로 소통이 가능했기 때문에[29] 의사소통에는 전혀 지장이 없었다. 오히려 조지 1세는 반백 평생을 하노버 선제후로 살아왔기 때문에 신하들이 궁전에 들어와서 알현하는 독일식 궁정 통치에 익숙해서 '감히 무엄하게' 왕이 신하들 만나러 출근하러 가는 영국의 의회 시스템을 받아들이지 못한 것이다. 그래서 왕의 대리인 겸 연락책 신하를 보낸 것. 태생부터가 독일 출신이었기 때문에 영국보다는 독일 내 하노버 영토에 관심을 더 많이 기울였다.[30] 조지 1세는 하노버 선제후령의 군주로서는 여러 전쟁에 직접 참전하여 공을 세우는 등 하노버의 국력을 신장시킨 명군이었다. 다만 명예 혁명 이후 국왕의 권력이 제한되었던 영국에 비해 하노버에서는 좀 더 군주의 직접적인 권한이 강했고, 직접적인 통치권이 강했던 하노버에서의 통치에 더 큰 흥미를 느낀 것으로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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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국이 생겼을 때
잉글랜드와
스코틀랜드는 의회는 합쳤지만 서로의 정치에 간섭하지 않기로 했다.
- 말도 안 되는 소리. 잉글랜드와 스코틀랜드, 웨일스는 이때부터 모두 영국 단일 정부와 의회의 통치를 받게 되었다. 스코틀랜드와 웨일스, 북아일랜드에 독자적인 자치정부와 의회의 설립은 먼나라 이웃나라가 처음 출판될 땐 생기지도 않았으며 설립이 허용된 시기는 영국이 만들어진 후 292년 뒤인 1999년이다. 이마저도 영국 중앙정부가 마음만 먹으면 언제든지 취소할 수 있다. 정치 자체가 이미 통합되어 있기 때문에 간섭을 안 한다는 말은 성립 자체가 불가능하다. 이는 미국의 연방제와 확연하게 다른 점이다. 개정판에선 다리엔 사건[31]으로 두 나라가 통합하게 됐다고 앞에서 설명하고 이 부분은 앞에서 얘기했지? 라고 삭제됐다.(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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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머니처럼 인자한
빅토리아 여왕?
- 실제로는 인자한 성격은 아니었다. 오히려 (사정이 있긴 했지만) 완고하고 고집이 세고 독단적인 성격이었으며 당시의 대영제국이 세계 최대의 판도를 자랑했던만큼 제국주의 국가로써 여러 포악하고 잔인한 행태들을 자행했는데 그런 나라의 왕으로써 그에 부합하는 면모도 적지 않았다. 이런 성격은 오히려 남편 앨버트 공 쪽이 더 가까웠다.[32]
3. 기타
- 구판에선 잉글랜드 왕국을 영국이라고 했지만, 개정판에선 영국은 네 지방이 통합하여 생긴 나라라는 내용이 들어간 이후 잉글랜드 왕국으로 바뀌었다.
- 개정판에선 영국이라는 명칭은 잉글랜드에서 따왔기에 영국인에게 영국인이라고 하면 잉글랜드 사람으로 알아듣고 브리튼 섬 사람은 맞지만 영국인은 아니라며 화를 낸다고 썼다. 사실 영국은 한국어로 United Kingdom을 의미하기에 영국인이라는 단어는 브리튼 섬 사람이라는 뜻이다. 영국인을 잉글랜드인이러고 했어야 자연스럽다. 그러면서 위에 서술했듯 영국이라고 쓰던 잉글랜드 왕국은 잉글랜드 왕국으로 바뀌었다.
- 개정판에서는 영국 사람에게 잉글랜드라고 하면 안 된다고 해놓고선[33] 정작 책 표지 등에는 잉글랜드(England)라고 적혀 있다. 업그레이드판에는 United Kingdom으로 수정.(18)
- 2003년 편 까지 있었던 북아일랜드 파트에서 북아일랜드 200만명중 "중립"은 500만명 밖에 안 된다고 써놨다. 21세기판은 500명으로 수정됐고 신판에선 삭제.(03,12)
-
25페이지에 대영제국에 대해 설명하는 파트에서 영국 국기랍시고 파란색도 없는 괴상한 걸 그려놨다. 대충
유니언 잭 항목의 맨 마지막에 있는 이렇게 생긴 유니언 잭이 정사각형 모양으로 된 것이다.
[34]
문제점을 인식했는지 업그레이드판에는 잉글랜드 깃발로 나왔지만 대영제국과는 영 안어울린다. 덤으로 여기 나오는 프랜시스 드레이크는 실제 모습으로 나온 역사 파트와 모습이 다르다.
- 영연방을 설명할 때 영국과 영연방이 사용하는 '영어'는 미국에서만 쓰는 '미국어'보다 영향력이 크다고 나왔다. '영국식 영어'와 '미국식 영어'로 해야 자연스럽다.(12)[35][36]
- 영국은 축구경기와 럭비경기 땐 네지방이 따로 나간다는 장면에서 영국의 정식 국명을 'The United Kingdom of the Great Britain and Northen Ireland'가 아니라 북아일랜드를 뜻하는 and Northen Ireland를 빼먹었다. G를 소문자 g로 쓴건 덤.(12)
- 게르만족의 침략 당시 프랑스의 켈트족은 브르타뉴지방으로 갔다는데, 사실 갈리아인이 사용하는 갈리아어가 속한 대륙켈트어군은 사멸했고 영국 제도에서 쓰는 도서켈트어군만 살아남았는데 브르타뉴 지방은 도서켈트어군에 속하는 브르타뉴어를 쓰는 영국 브리튼인들이 앵글로색슨 침략 때 정착한 곳으로 브르타뉴라는 이름도 브리튼에서 따온 것이다. 작가가 좋아하는 만화인 아스테릭스에 등장하는 프랑스의 갈리아인(극중에선 골족)은 현재 사멸한 대륙켈트인이고, 특이한 말투를 쓰는 영국의 브리타니아인(극중에선 브르통족)은 현재도 남아있는 도서켈트인이다.(12) 또 스코틀랜드인들은 브리튼인이 아니라 아일랜드에서 넘어온 게일인이다. 그러나 먼나라 이웃나라에서는 게일인과 브리튼인의 차이를 설명하지 않고 켈트족으로 뭉뚱그렸다.
- 용인발음을 "상류층이 사용하는 옥스퍼드 영어"라 서술했다. 물론 옥스퍼드 영어라 불리기도 한다. 그러나 용인발음(Received Pronunciation; 줄여서 RP)이라 지칭하는 것이 보통이며, 아니면 "Standard British", "BBC English", "Upper-class British", "Queen's English"혹은 속어로 "posh accent"라 하는 정도가 올바른 명칭이다. 그리고 귀족이나 왕족같은 상류층뿐 아니라 평민 출신 정치인들과 BBC 방송국의 앵커들도 RP를 사용하며 (물론 그들간에도 차이가 은근히 있다), 굳이 옥스퍼드같은 퍼블릭 스쿨이 아니더라도 각종 서적이나 오디오북 등등으로 RP 억양을 배울 수 있는 방법은 대중화되어 있다.
- 럭비를 두고 도이칠란트 등 북쪽 촌사람들은 럭비가 뭔지도 모르고 럭비는 문화인이나 하는 경기 라고 하는데 틀린 말이다. 일단 독일도 유럽 내에서 약체일 뿐이지 1927년부터 생긴 럭비 유니언 대표팀이 엄연히 존재한다. 사실 그 이전에 럭비를 한다고 문화인이라는 것부터 지나친 비약이고 애초에 독일 또한 국력이나 문화 측면에서는 영국과 비교해도 밀리지 않는 유럽을 대표하는 최대 강대국 중 하나라는 걸 생각해 보면 독일인을 두고 촌사람이라 하기도 뭣하다. 럭비는 이런저런 요소로 인해서 타국으로 퍼져나가기 어려웠을 뿐이다. 자세한 건 럭비 문서 참조. 다만 해당 대사가 나온 장면의 앞뒤 맥락을 보면 진지한 주장이라기보다는 해당 영국인의 허세가 섞인 농담이라 보는 것이 옳을 것으로 보인다. 개정판에선 삭제.(12)
- TV에서 나오는 럭비 대회에서 잉글랜드, 스코틀랜드, 웨일스, 북아일랜드 대표팀 4팀이 나오는데, 축구와는 달리 럭비 국가대표팀에서 아일랜드 자유국과 북아일랜드가 아일랜드 섬 전체를 대표하는 통합된 대표팀을 꾸려서 출전하기에 고증 오류다.[37][38] 정황상 작가가 축구만 보고 착각했다.
- 영국의 밀크티 문화를 소개하면서 만약 중국인들이 밀크티를 본다면 기겁을 할 것이라는 투로 써놨는데 오히려 밀크티는 중국에서 여러 개의 밀크티 체인이 생겨날 정도로 큰 인기를 끌고 있다. 게다가 이걸 단순히 이 책이 나온 1980년대엔 중국인들에게 밀크티 문화가 익숙하지 않아서 그렇게 썼다고 하기에도 뭐한 것이 이미 1980년대 이전부터 중화권인 홍콩이나 대만, 싱가포르 등에서는 밀크티 문화가 자리잡혀 있었고, 버블 밀크티 같은 것들도 1990년대부터 이미 중국에서 인기를 끌었다. 고대 중국인이면 그럴 수도 있겠으나 문제는 문화대혁명 시기이던 1960년대 말과 1970년대 초에 중국 국민과 홍위병들이 입었던 인민복을 입혀놨다.
- 개정판인 새로 만든 먼나라 이웃나라임에도 유럽에서 러시아를 제외한 인구 순위가 2012년 기준으로 프랑스가 2위, 영국이 3위라고 되어있는데 해당 부분에서 설명하는 오래 전 고대나 중세 시기라면 모를까 현 시점 뿐만 아니라 오래 전부터 현대 시점에서 영국 인구는 6,000만명대, 프랑스 인구는 5,000만명대로 영국이 꽤 큰 차이로 프랑스를 앞서 있었다. 정작 21세기판에서는 영국 인구가 2위로 프랑스보다 많다고 해놓았는데 새로 만든 개정판에서는 틀린 정보가 기록된 것이다.
- 화장실을 뜻하는 LOO 발음은 로가 아니라 루다.LAVATORY도 레이버토리가 아니라 래버토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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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국인들은 왕실에 대해 매우 우호적이며 왕실의 폐지를 원하는 여론은 미약하다?
반은 맞고 반은 틀리다. 여론조사를 할때마다 대부분 왕실 존치론이 압도적이거나, 아무리 낮아도 과반으로 나오는 것은 사실이나, 왕실 일원들이 구설수에 오를만한 일을 저질렀을 때는 지지도가 확 꺼지고는 한다. 왕실 폐지운동이 미약한 것도 국왕이 연합왕국과 영연방의 구심점이라는 점과 군주제로 인한 외교적·문화적 이익 등의 실리를 포기하기 어렵기 때문이지 영국인들이 무조건 왕실을 지지하기 때문이 아니다. 특히 20대 초반의 젋은 연령대에서는 군주제 반대론이 지지론보다 약간 강한 상황이기 때문에, 세대가 교체된 이후에도 군주제가 유지될지 어떨지는 알 수 없는 일이다. 군주국의 공화주의 항목을 참고.
- 영국 왕을 국가원수로 모시는 13개국 중에는 공화국도 있다고 되어 있는데, 이는 1937년 신헌법 제정과 함께 출범한 아일랜드 공화국(정식 국명은 그냥 '아일랜드')을 지칭하는 듯하다. 찰스 3세를 국가원수로 모시지만 공화국 체제를 표방하는 나라는 현재 존재하지 않는다.
[1]
그나마 노르망디라도 물려받을 수 있던건 윌리엄 1세가 죽기 직전에 노르망디를 물려주겠다고 유언으로 남겼기 때문이다. 즉 저 유언 없었으면 정말 백수 신세였다.
[2]
그리고 노르망디가 딱히 나쁜 땅만은 아니었다. 일단 윌리엄이 잉글랜드의 왕 자리를 가지긴 했지만 당시 관점에서 잉글랜드보다는 프랑스가 더 가치가 있었다. 윌리엄도 잉글랜드는 정복 후 안정시킨 뒤 프랑스 내에서 영토를 넓힐려고 했다. 애초에 잉글랜드의 왕이라지만 그의 무덤은 프랑스에 있기도 하고.
[3]
이런 식으로 결혼하더라도 자기쪽 영지에 대한 권리가 소멸하지 않는건 계속 이어져서 후일 15세기 말의 이사벨 1세와 페르난도 2세의 경우에도 페르난도 2세가 남편임에도 불구하고 이사벨 1세의 나라인 카스티야가 더 대국이었으며 카스티야에 대한 어떤 권리도 주장할 수 없었기에 페르난도 2세는 눌려 살 수밖에 없었다. 사실 이는 너무 단순한 논리로 납득할 수 있는 것이 당시에는 국가같은 것도 결혼에 따라 얼마든지 넘어갈 수 있었고 영지 또한 결국 일종의 지참금이었다. 대게 지참금의 권리는 각자 나눠져 있음을 감안하면 결국 남편이 아내 영지에 이래라 저래라 못하고 그 반대도 못하는건 당연하다.
[4]
이중 청년왕 헨리의 경우에는 권력문제도 있었다. 헨리 2세는 자신의 아들 헨리를 공동왕으로 앉혔지만 모든 권력을 자기가 독점을 해서 아들의 분노를 유발했다. 그나마 제맘대로 할 수 있던게 마상창시합인데 여기에 드는 돈이 많다보니 문제가 생겼고 여기에 이런저런 불만이 생겨 아버지를 상대로 반란-진압당함-어찌저찌 용서받음-다시 반란이라는 코스를 밟아버린다. 청년왕 헨리는 두 번째 반란 도중에 사망해버리지만 이런 식으로 아들들의 반란에 시달리던 헨리 2세는 유일하게 반란에 가담 안 한 존을 총애하게 되었지만 참고로 그래도 헨리 2세가 죽을 때 혼자는 아니었는데 사생아인 제프리와
윌리엄 마셜이라는 부하가 있었다.
[5]
자식들을 너무 찾아보지 않았다. 오죽하면 켄터베리 대주교는 그런 헨리 2세에게 "아무리 비정한 부모라도 폐하보단 나을 것입니다"라고 말하며 자식들을 자주 챙겨볼 것을 권했다.
[6]
다만 이 과정에서 자행한 악행이 그에게 큰 타격을 주긴 했다.
[7]
거기다가 이 인간들은 대를 이어 그 짓을 해서 아쟁쿠르 전투 등 이후의 전투에서도 같은 삽질만 반복했다.
[8]
정황상 에드워드 4세로 보인다.
[9]
랭커스터, 요크, 플랜테저넷의 마지막 공통 조상은 에드워드 3세.
[10]
당시 왕이었던 헨리 6세의 할아버지였던 헨리 4세가 리처드 2세를 몰아냈다.
[11]
동아시아와는 달리 유럽은 엄청나게 많은 가문들이 각각 오등작 혹은 왕이나 황제 가문을 차지하고 있었고 혈연으로 얽혀있거나 왕조의 방계혈통인지라 그들과 혈연관계가 있고 힘까지 있으면 "내가 XX 왕국의 OO 왕조의 후손인데 그 XX 왕국의 왕 자리 내가 가져야 겠어,
꼬우면 힘으로 해보든가" 라고 나서는게 얼마든지 가능했다. 즉 중세 유럽은 속된말로 반역 안 하는 신하가 바보 되는 시대. 단 신성 로마 제국 황제 자리는 예외, 이쪽은 선거군주제라서 힘이 아니라
선제후들의 선택이 중요했다.
[12]
이것도 있고 책에서 나온대로 아들 문제도 있었다.
[13]
다행히 이 부분에 대해서는 어느 정도 설명이 되어 성공회는 개신교와 달리 교황에게서 벗어나기 위해 만들어진 것에 가깝다고 표현하기는 했다.
[14]
전술했듯 헨리 8세는 신앙적으로는 개신교 신자가 아니었기 때문이다.
[15]
다만 해임당한 후 재빠르게 약탈한 보물을 엘리자베스 1세에게 바쳐 신임을 얻었다. 그도 그럴게 헨리 8세때 국고 지출이 많았던 바람에 잉글랜드의 재정상태가 영 좋지 못했는데 드레이크가 바친 보물 덕분에 재정이 좀 채워졌다.
[16]
뭐, 바로 다음 컷에 남성 귀족이 "떽! 짐더러 그런 저질 음식을 먹으란 말이냐?"라고 말하긴 한다만... 복장을 보면 현대의 양복이며 이원복의 대사도 "요즘 시대엔 보기 어려운 정말 옛날 얘기지...."이다. 오히려 현대의 왕족~귀족이라면 좋아할지도 모르는 일이다.
[17]
그럴 수밖에 없는게 평민들의 감자에 대한 인식이 너무 나빴다. 기독교적 세계관에서 해석하다보니 감자가 악마의 식물이라느니 그게 아니더라도 가축들이나 먹는 것이라느니 하며 질색했다. 오죽하면 프로이센의 경우 아예 왕인
프리드리히 대왕이 직접 감자를 하루에 한 번 이상 먹고 꼼수까지 부려가며 전파시켰다.
[18]
무려 메리 여왕과 마찬가지로 스튜어트 왕실 혈통에 메리 스튜어트와는 할머니가 같아서 메리 스튜어트처럼 잉글랜드+스코틀랜드의 왕위 계승권이 있었다. 단지 메리 여왕보다 순번상으로 밀렸을 뿐이다.
[19]
이후에 메리 2세와 윌리엄 3세가 공동 왕으로 즉위하는게 나와 뭐가 문제냐 싶을 수 있는데 후술하겠지만 윌리엄 3세는 제임스 2세의 조카로서 순번상 메리 2세보다 심하게 꿇리는 것도 아니었고 무엇보다 명예혁명의 주역이었다. 단리 경은 혈통은 좋지만 그것 뿐 순번이 가까운 것도 아니고 여왕을 왕으로 옹립하는데 기여한 것도 아닌 주제에 무리한 요구를 했으니 메리 여왕이 그를 멀리할만도 했다.
[20]
실제로 메리 여왕은 제임스 왕자를 낳은 지 한달도 되지 않아 갓난아기인 제임스 왕자를 버려두고 뱃놀이를 갈 정도로 아이에 대한 관심조차 없었다. 여기에는 남편인 단리 경 헨리 스튜어트와의 관계가 최악의 파탄관계였던 것이 제대로 한몫했다.
[21]
정확히는 '너희는 부모를 공경하여라. 그래야 너희는 너희 하느님 야훼께서 주신 땅에서 오래 살 것이다.'
[22]
사실 명군만 아니지 행적을 보면 스튜어트 왕조의 왕들 중 가장 유능하다. 제임스 1세 이전 스튜어트 왕조의 왕들은 대부분 왕이 즉위함 → 암살당함/전사함/쫓겨남 테크를 탔고 로버트 2세와 3세도 각각 말년에 뒷방 노인네 신세/허수아비였다. 즉 스튜어트 왕가가 스코틀랜드의 왕가가 된 이래 처음으로 끝이 좋은 왕이 제임스 1세였다(...) 그만큼 제임스 1세가 정치적으로 유능했다는 얘기다. 명군다운 치적이 안 보인다고 해도 그건 또 갑자기 잉글랜드+스코틀랜드 동군연합 군주가 된지라 사실 그 자리를 멀쩡히 보존하고 물려준 것도 대단하다. 즉 후대에 잉글랜드+스코틀랜드 동군연합을 멀쩡하게 물려준 것 그 자체부터가 제임스 1세의 업적이다. 이 책에서도 나오는 크누트 대왕의 동군연합은 결국 크누트 1대로 끝났지만 제임스 1세의 동군연합은 굴곡이 있긴 해도 결국 이어졌다.
[23]
메리가 스코틀랜드에서 갈등을 겪고 쫓겨난 이유 중 하나가 가톨릭 교도여서 스코틀랜드인들과 마찰이 많았기 때문이다.
[24]
또한 찰스 2세가 크롬웰 목 날리는걸 보고 자기 목도 날리지 않을까 두려워하는 의원들을 향해 복수는 이걸로 되었으니 그대들은 짐에게 충성이나 하라고 하자 안도하는 장면이 나온다.
[25]
윌리엄 3세가 침공했을 때 제임스 2세가 군대를 보내 콩가루로 만들라고 하자 신하가 "군대가 있어야 콩가루건 미숫가루건 만들죠..."라는 대사가 있고, 후자는 다급해진 제임스 2세가 앤 공주를 달래자 앤이 퉁명스럽게 한 대답이다
[26]
즉, 윌리엄과 메리는 내외종 사촌지간.
[27]
프랑스 등 살리카 법 채택 국가들은 예외
[28]
스코틀랜드 기준으로는 제임스 6세
[29]
왜 하필 프랑스어냐고 하겠지만 당시에는 유럽 상류층에서는 프랑스어가 공용어이다시피 했다.
[30]
반면 제임스 1세는 본디 스코틀랜드 군주였음에도 잉글랜드 왕이 된 후 잉글랜드로 옮겨 살았고 잉글랜드식 통치도 좀 받아들였다.[39] 대신 고향인 스코틀랜드에 자주 방문하기는 했다.
[31]
스코틀랜드가 7년동안 흉년을 맞는 등 경제가 위태위태하자 이를 타개하기 위해
다리엔 갭을 식민지화하려다가 쫄딱 망한 사건으로 당시 스코틀랜드는 불경기에도 불구하고 여기에 어마어마한 액수의 돈을 퍼부었음에도(현재 가치로 776억원이나 되는 돈을 퍼부었다.) 실패했는데 실패의 원인은 애초 다리엔 지역은 스페인 땅이었고 그것으로도 모자라 전염병까지 돌았다. 결국 이주민들이 떼몰살을 당해 실패. 애초 다리엔 지역은 지금도 오지로 남아있다는 것을 생각해 보면 성공할 리 없는 계획이었겠지만. 결국 잉글랜드가 스코틀랜드가 진 빛 등을 모두 감당해주는 대가로 잉글랜드와의 통합을 선택할 수밖에 없었다.
[32]
물론 이런 성품의 여왕이 없는 것은 아니었는데, 바로
포르투갈 왕국의
마리아 2세가 이러한 성품에 부합하는 여왕이었다.
[33]
영국은 네 지방이 통합하여 생겼기 때문이다.
[34]
스코틀랜드기가 빠진 버전이다.
[35]
미국편 11권에서 "아니, 미국어라고 해야 할까?"라는 대사가 나왔지만 이건 미국의 국제 영향력이 커서 그런듯하다.
[36]
실제로 미국인들도 자국어를 잉글리시라고 하지 아메리칸이라고 하지 않는다.
[37]
해당 대표팀은 남북 아일랜드의 국기가 아닌 협회기를 사용한다. 본 작품 내에서는 북아일랜드 대표팀이
성 파트리치오 십자가기를 달고 나오는데 이 또한 고증 오류.
[38]
참고로 필드하키와 크리켓 대표팀도 마찬가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