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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수정 시각 : 2024-02-25 09:48:12

로케 마스폴리

로케 마스폴리의 감독직 및 기타 직책
{{{#!folding ▼ 둘러보기 틀 모음
대표팀
파일:에콰도르 축구 국가대표팀 로고.svg

18대
파일:우루과이 축구 국가대표팀 로고.svg

41대, 49대
}}} ||
로케 마스폴리의 수상 이력
{{{#!folding ▼ FIFA 월드컵 우승 멤버
}}} ||
우루과이의 전 축구 감독
파일:baIHS.jpg
이름 로케 마스폴리
Roque Máspoli
본명 로케 가스톤 마스폴리 아르벨비데
Roque Gastón Máspoli Arbelvide
출생 1917년 10월 12일
우루과이 몬테비데오
사망 2004년 2월 22일 (향년 86세)
국적 우루과이 파일:우루과이 국기.svg
신체 189cm | 체중 85kg
직업 축구선수 ( 골키퍼 / 은퇴)
축구감독 은퇴
소속 <colbgcolor=#eeeeee,#191919> 선수 클루브 나시오날 데 푸트볼 (1933~1939)
리버풀 FC (1939~1940)
CA 페냐롤 (1940~1955)
감독 CA 페냐롤 (1955)
다누비오 FC (1956)
CA 페냐롤 (1963~1967)
엘체 CF (1968~1970)
CA 페냐롤 (1970~1971)
데펜소르 리마 (1972~1973)
CD 엘 나시오날 (1975)
에콰도르 대표팀 (1975~1977)
CA 페냐롤 (1976)
클루브 스포르팅 크리스탈 (1977~1978)
우루과이 대표팀 (1979~1982)
CA 페냐롤 (1985~1986)
바르셀로나 SC (1987)
CA 페냐롤 (1988)
CA 페냐롤 (1992)
우루과이 대표팀 (1997)
국가대표 파일:우루과이 축구 국가대표팀 로고.svg 40경기 1골 ( 우루과이 / 1945~1955)
정보 더 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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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번호 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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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2. 생애
2.1. 선수 생활
2.1.1. 초기 선수 생활2.1.2. 1950년 월드컵2.1.3. 이후
2.2. 감독 생활
3. 플레이 스타일 & 평가4. 수상
4.1. 선수
4.1.1. 클럽4.1.2. 국가대표
4.2. 감독
4.2.1. 클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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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우루과이 축구 선수 출신 감독. 현역 시절 골키퍼로 활약하며 1950년 월드컵 우승에 기여했고, 1997년부터 1998년까지 우루과이 축구 국가대표팀 감독을 맡았다.

2. 생애

2.1. 선수 생활

2.1.1. 초기 선수 생활

우루과이 대표팀 FIFA 월드컵 역사에 이름을 남긴 마스폴리였지만 시작부터 그리 빛을 보지는 못했다. 처음 입단한 클럽인 나시오날에서 6시즌을 보냈지만 마스폴리는 6년 동안 단 한번도 주전 자리를 잡지 못했고 오히려 1938년에 나시오날은 CA 베야 비스타에서 아니발 파스를 영입했다. 마스폴리는 결국 1939년에 리버풀[2]로 이적하게 된다.

리버풀에서 드디어 마스폴리는 주전으로 도약했고 리버풀은 5위로 시즌을 마감하게 된다. 이런 그의 활약에 자극을 받은 팀이 있었으니 그 팀이 바로 전 소속팀 나시오날의 영원한 라이벌 CA 페냐롤이었다. 페냐롤은 그 이전부터 라이벌 나시오날에 비해 총 실점이 조금씩 더 많았다. 페냐롤이 마스폴리를 영입하던 1940년 시즌 당시, 페냐롤은 4위로 그 전시즌을 마감했고 그 위의 상위 3팀이 22실점 정도를 기록할 때 페냐롤은 중위권 팀과 비슷한 38실점을 기록, 거의 2배에 가까운 실점을 기록해 상황이 더욱 나빠졌다. 따라서 페냐롤은 전력, 특히 수비 보강을 위해 새로운 선수를 찾아다녔고, 팀의 레이더망에 걸린 선수가 바로 마스폴리였다.

마스폴리의 이적 후 1941년 시즌부터 실점을 줄여나가기 시작한 페냐롤은 1942년에는 라이벌 나시오날과 비슷한 수준까지 실점을 끌어내렸고 결국 1944년에는 6년 만에 우루과이 프리메라 디비시온 타이틀을 되찾아오는데 성공하였다. 특히 결승전에서 페냐롤은 마스폴리의 활약에 힘입어 2차전 총 전적 3:2로 나시오날을 꺾었고 이 활약으로 마스폴리는 국가대표팀에도 발탁되었다.

하지만 1945년 이후 페냐롤은 1948년 파업 때까지 내내 나시오날에 밀려 우승에 실패했고, 마스폴리 역시 플라비오 나테로와의 주전 경쟁에서 밀려 힘든 시간을 보냈다. 하지만 나테로가 1949년 시즌에 부상으로 전력에서 이탈하자 마스폴리는 다시 페냐롤의 골문을 지켰고 생애 첫 월드컵에도 나가게 되었다.

2.1.2. 1950년 월드컵

마스폴리는 1950년 월드컵에서 우루과이의 4경기 중 3경기를 치르면서 대단한 선방들을 보여주었다. 특히 브라질과의 결선 리그 최종전에서 브라질은 전반에만 17개의 슈팅을 날리며 우루과이의 골문을 맹폭격했지만 마스폴리를 축으로 우루과이의 수비수들이 효과적으로 브라질의 공세를 막아냈다. 특히, 아데미르의 헤딩 슈팅을 막아낸 슈퍼 세이브가 백미였다.

후반 2분, 마스폴리는 결국 계속되는 브라질의 공격을 막아내지 못하고 프리아사에게 선제골을 허용하고 말았지만 우루과이는 전열을 가다듬고 스키아피노 기지아의 연속골로 역전을 이끌어냈다.

훌륭한 선방을 보여주며 팀의 우승을 이끌어낸 마스폴리에겐 골든 글러브가 수여되었다.

2.1.3. 이후

마스폴리는 이후 우루과이 프리메라 디비시온에서도 3차례 더 소속팀을 우승시키면서 우루과이 최고의 골키퍼로 명성을 드높였다. 특히 수비형 미드필더이자 대표팀 주장 옵둘리오 바렐라와 함께 튼튼한 수비진을 구축했고 이를 바탕으로 한 페냐롤의 기세는 대단했다. 하지만 1952년에는 아쉽게 우승을 놓치고 말았는데 결승전에서 나시오날에게 1차전에서 4:2로 패한 것이 화근이었다. 이 경기에서 마스폴리는 출전하지 못했고 2차전에서야 뒤늦게 나왔지만 승부를 뒤집는데에는 실패했다.

1954년 스위스 월드컵에도 마스폴리는 우루과이 대표팀으로 출전했고, 나이가 들기는 했지만 좋은 활약을 펼치며 팀을 준결승까지 이끌었다. 준결승의 상대는 당대 최강의 팀 매직 마자르. 우루과이는 결국 연장에서 코치시 샨도르에게 2골을 허용하며 2대4로 패배하고 말았다.

마스폴리는 1955년 남아메리카 챔피언십을 마지막으로 장갑을 벗었다.

2.2. 감독 생활

마스폴리는 감독 생활을 여러 팀에서 많이 했지만 가장 그의 지도력이 돋보였던 시기는 1960년대 중반이었다. 그는 CA 페냐롤을 이끌면서 리그 우승 3회와 함께 1966년에는 2번째 코파 리베르타도레스 우승을 이끌어냈다.[3] 특히 인터컨티넨탈컵에서는 유럽 챔피언 레알 마드리드를 상대로 2차전 합계 4대0의 완승을 거뒀다. 그리고 1967년에 페냐롤은 다시 리그 우승을 차지했지만 마스폴리는 감독 자리에서 물러났고, 그 이후 마스폴리는 이 시기의 영광을 재현하지 못했다.

1982년에 마스폴리는 우루과이 대표팀을 맡아 1982년 월드컵 본선 진출을 노렸지만 우루과이는 페루에게 덜미를 잡히면서 탈락했다. 마스폴리는 불명예스럽게 퇴진하고 말았고 후에 페냐롤에서 두 차례 우승을 이끈 것으로 만족해야 했다.

1997년, 80세의 마스폴리는 다시 우루과이 대표팀의 지휘봉을 잡고 월드컵 본선 진출을 꿈꿨지만 이번에도 진출에는 실패했다. 이것을 마지막으로 감독에서 은퇴한 마스폴리는 2004년 12월 10일, 심장 문제로 인해 병원에 입원하게 되었고, 12일 후인 22일에 숨을 거두었다.

3. 플레이 스타일 & 평가

민첩성과 반사신경이 좋은 골키퍼였다. 하지만 1950 브라질 월드컵에서는 캐칭 미스를 몇 차례 범했고 그로 인해 실점하기도 하는 다소 불안한 모습을 보이기도 했다.

4. 수상

4.1. 선수

4.1.1. 클럽

4.1.2. 국가대표

4.2. 감독

4.2.1. 클럽



[1] 1950년 브라질 월드컵 당시에는 등번호가 포지션에 의해 정해졌다. 마스폴리는 1954년 스위스 월드컵에서도 1번을 달았다. [2] 몬테비데오를 연고로 하는 리버풀로 잉글랜드의 리버풀 FC와는 다른 팀이다. [3] 페냐롤 최초의 코파 리베르타도레스 우승은 1961년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