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루아르 원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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루아르 원정
영어: Loire Campaign
프랑스어: BCampagne de la Loire
파일:루아르 원정.png
시기
1429년 5월 8일 ~ 1429년 6월 18일
장소
프랑스 루아르 강 계곡
원인
오를레앙 공방전 이후 프랑스군의 반격
교전국
파일:800px-France_moderne.svg.png 프랑스 왕국 파일:800px-Royal_Arms_of_England_(1399-1603).svg.png 잉글랜드 왕국
지휘관
파일:800px-Armoiries_des_compagnons_de_Jeanne_d'Arc_-_La_Hire.svg.png 라 이르
파일:800px-Armes_alençon_moderne.png 장 2세 달랑송
파일:800px-Armoiries_des_compagnons_de_Jeanne_d'Arc_-_Jean_Poton_de_Xaintrailles.svg.png 장 포통 드 생트라유
파일:Armoiries_des_compagnons_de_Jeanne_d'Arc_-_Jean_d'Orléans_(argent).png 장 드 뒤누아
파일:800px-Armoiries_des_compagnons_de_Jeanne_d'Arc_-_Gilles_de_Rais_(augmentées).svg.png 질 드 레
파일:Armoiries_des_compagnons_de_Jeanne_d'Arc_-_Arthur_de_Richemontt.png 아르튀르 드 리슈몽
파일:잔 다르크 문장.svg 잔 다르크
파일:800px-Blason_Riom-ès-Montagnes_15.svg.png 앙투안 드 샤반
파일:1200px-Blason_John_Fastolf.svg.png 존 파스톨프
파일:800px-Talbot_arms.svg.png 존 탈보트
파일:800px-Blason_Thomas_de_Scales.svg.png 토머스 스케일스
파일:Arms_of_De_La_Pole.svg 윌리엄 드 라 폴
병력
초기: 6,000명
후기:12,000명
총원: 5,000명
피해 규모
미상 수천명
결과
프랑스의 승리.
영향
프랑스군의 루아르 강 계곡 확보, 랭스 행진 추진
1. 개요2. 상세3. 둘러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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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백년전쟁 시기인 1429년 5월 8일 ~ 6월 18일, 오를레앙 공방전에서 승리한 프랑스군이 루아르 강 계곡의 잉글랜드군을 몰아낸 전역.

2. 상세

1429년 5월 8일, 반년 이상 질질 끌던 오를레앙 공방전 잔 다르크의 활약으로 인해 프랑스군의 승리로 종결되었다. 잉글랜드 사령관인 서퍽 백작 윌리엄 드 라 폴은 오를레앙에서 철수하면서 오를레앙 주변의 요새들에 군대를 배치시켜 프랑스군의 예상되는 공세를 저지하면서 잉글랜드 겸 프랑스 국왕 헨리 6세의 섭정인 베드퍼드 공작 존의 지원을 기다리기로 했다. 서퍽 백작 본인은 700명의 병력을 이끌고 오를레앙에서 9마일 떨어진 루아르 강 남쪽 기슭의 쟈흐고(Jargeau)로 이동했고, 존 탈보트 토머스 스케일스 역시 비슷한 숫자의 병력을 이끌고 각각 멍(Meung), 보장시(Beaugency)에 자리를 잡았다. 이 세 도시는 루아르 강을 가로지르는 요새를 갖고 있었기 때문에 전략적으로 중요했다.

한편, 오를레앙 공방전을 승리로 이끈 잔 다르크, 장 2세 달랑송, 장 드 뒤누아는 오를레앙 주변의 루아르 강 계곡에 주둔한 잉글랜드군을 신속히 몰아내기로 했다. 하지만 현재 가지고 있는 병력 만으로는 부족했기에, 투르에 있는 도팽 샤를에게 가서 증원군을 보내달라고 요청했다. 샤를은 이에 따라 각지에 소집령을 내렸고, 성녀의 활약으로 오를레앙이 구원받았다는 소문에 흥분한 장정들이 대거 응하면서 한 달 만에 병력 규모가 6,000명으로 늘어났다.

6월 10일, 프랑스군은 장 2세 달랑송의 지휘하에 쟈흐고로 진격했다. 다음날 프랑스 장군들은 전쟁 회의를 열었다. 그들은 오를레앙 공방전 말기에 존 파스톨프가 이끄는 잉글랜드군 수천 명이 파리에서 출발해 오를레앙으로 향하고 있다는 소문을 접한 바 있었다. 그들이 오기 전에 오를레앙이 해방되기는 했지만, 이제 그 군대가 루아르 강 계곡에 버티고 있는 아군을 구원하러 올 것이라는 이야기가 나돌자, 섣불리 쟈흐고에 주둔한 적군을 공격했다가 파스톨프의 증원군에게 요격당할까 우려했다. 쟈흐고의 방비 상태가 강건하다는 것 역시 우려되는 점이었다. 이 도시에는 5개의 탑, 3개의 요새화된 문, 그리고 북쪽 제방으로 이어지는 요새화된 다리가 있었으며, 오를레앙에서 철수한 잉글랜드군 다수가 여기에 머물고 있을 지도 몰랐다. 장군들이 이런저런 우려를 표하며 쟈흐고를 공격하길 망설이자, 잔 다르크가 나섰다.
"잉글랜드인이 아무리 많더라도 공격하는 것을 두려워하거나 주저하지 마십시오. 우리를 인도하시는 분은 하느님이십니다. 진실로, 우리를 인도하신 분이 하느님인지 확신할 수 없다면, 나는 아버지의 양을 그렇게 큰 위험에 빠뜨리는 것보다 내 자신을 돌보고 싶습니다. 오를레앙을 구하는 것이 얼마나 어려울 것이라고 생각했는지 기억하십니까? 그러나 여러분은 성공했습니다. 하느님을 믿는다면 승리할 겁니다!"

이에 장군들은 용기를 내어 쟈흐고로 접근하기로 했다. 그날 밤 쟈흐고 인근에 이르렀을 때, 일부 잉글랜드군이 숙영지를 세우고 있던 프랑스군을 급습했다. 이에 놀란 병사들이 후퇴하자, 잔 다르크가 직접 달려가서 그들을 진정시키고 잉글랜드군을 도시 안으로 쫓아내게 했다. 장 2세는 훗날 잔 다르크의 복권 재판에 출석해 이 때의 일을 다음과 같이 증언했다.
잔은 병사들이 흩어지는 것을 보고 자신의 깃발을 들고 달려가서 병사들에게 용기를 가지라고 권고했고, 병사들은 그날 밤 쟈흐고 교외를 장악했습니다. 나는 하느님께서 이 일을 주도했다고 믿었습니다. 왜냐하면 그날 우리 주변에 경비병들이 별로 없었기 때문에 더 많은 잉글랜드군이 우리 진영을 공격했다면 재앙을 초래했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다음날, 잔은 성벽 앞으로 다가가서 "이곳을 천국의 왕과 온화한 샤를 왕에게 넘겨준다면 평안을 얻을 것이나, 그렇지 않으면 학살당할 것"이라고 외쳤지만, 잉글랜드군은 침묵으로 일관했다. 6월 12일, 프랑스군은 공성포를 동원해 성벽을 공격했다. 프랑스군의 포탄 세례로 인해 성벽이 점차 허물어지자, 서퍽 백작은 더 이상 버티지 못하겠다고 판단하고 프랑스 장군 라 이르에게 항복 조건을 협상하고 싶다는 의사를 전했다. 이 이야기를 전해들은 장 2세는 자신이 아니라 일개 부관에게 협상을 요청한 것에 모욕을 느꼈다. 잔은 잉글랜드군과 협상해서 희생을 줄이자고 제안했지만, 장 2세는 협상에 응하지 않기로 결정했다.

전투를 피할 수 없게 되자, 잔은 전면적인 공격으로 빨리 끝내자고 제안해 모두의 동의를 얻어냈다. 잔과 장 2세는 나란히 성채를 향해 전진했다. 성채에서 30피트도 채 떨어지지 않은 지점에서, 잔이 멈춰서서 상황을 살폈다. 그는 마을 성벽에 대포가 설치되어 있고, 그 대포가 발사한 포탄이 장 2세가 서 있는 곳에 도달할 것임을 직감했다.
"선량한 공작님, 피하십시오! 그렇지 않으면 대포가 당신을 죽일 겁니다!"

장 2세는 그녀의 말을 듣고 급히 몸을 피했고, 몇 초 후 대포가 그가 서 있었던 곳으로 떨어져 여러 사람이 죽거나 다쳤다. 장 2세는 훗날 잔의 복권 재판에서 이 일을 증언하면서, 자신이 다가올 사건을 정확하게 예측하는 잔의 능력에 경외심을 느끼고 떨리는 손으로 십자가의 성호를 그었다고 밝혔다.

그 후 그녀는 오를레앙 때 그랬던 것처럼 몸소 최전선으로 달려가서 군기를 든 채 장병들을 독려했고, 병사들은 이에 용기를 얻어 성벽에 사다리를 걸고 올라가기 시작했다. 하지만 성벽 위의 잉글랜드군이 사다리를 밀어내고 돌을 마구 떨어뜨리는 바람에 사상자가 늘어날 뿐 성이 공략될 기미가 없자, 잔은 몸소 사다리를 타고 올라갔다. 그 때 한 잉글랜드 병사가 내던진 돌이 그녀의 투구를 정통으로 가격했고, 그녀는 성벽 아래로 떨어져 한동안 정신이 몽롱했다. 하지만 심각한 부상을 입지 않았던 그녀는 금세 회복되어 또다시 사디리를 성벽에 걸고 올라갔다.

잔이 이와 같은 모습을 보이자 용기를 얻은 병사들은 사력을 다해 성벽을 기어올랐고, 기어이 성벽을 넘어 쟈흐고 시내로 진입했다. 잉글랜드군은 필사적으로 저항했으나 끝내 압도되어 몸값을 받을 수 있는 소수의 인사를 제외하고는 전원 사살되었다. 서퍽 백작은 생포되었고, 서퍽 백작의 또 다른 형제 알렉산더는 전사했다. 일설에 따르면, 서퍽 백작은 기욤 르노( Guillaume Renault)라는 젊은 종자에게 생포된 뒤 자신이 종자에게 붙잡혔다는 것을 알게 되자 명예를 지키기 위해 기욤에게 기사 작위를 수여했다고 한다.

프랑스군이 쟈흐고를 함락한 후 휴식을 취하고 있을 때, 존 파스톨프가 이끄는 잉글랜드군이 오를레앙에서 북쪽으로 12마일 떨어진 잔빌에 도착했다. 이들은 루아르 강 계곡에 남아있는 잉글랜드의 두 요새 멍과 보장시에 하루 만에 행군할 수 있었다. 하지만 일전의 승리에 고무된 프랑스 수뇌부는 멍 요새를 공격하기로 결의했다. 당시 멍 수비대는 요새를 강력하게 방어하는 동시에 멍 다리의 방비를 강화하기 위해 다리 건너편에 작고 요새화된 교두보를 구축했다. 6월 15일 현장에 도착한 프랑스군은 이 교두보를 즉시 공격하여 반나절 만에 공략했다. 이때 잔은 앞장서서 전투를 이끌다가 다리에 부상을 입고 잉글랜드 바리케이드 앞 도랑에 누워 있다가 프랑스군 병사들이 해질녘에 발견한 덕분에 숙영지로 이송되어 치료받았다.

장 2세는 멍 요새의 방비가 매우 강한 것을 보고 이곳을 바로 공격하는 대신 보장시를 먼저 치기로 했다. 일부 병력을 멍 다리에 남겨둬서 적을 견제하게 한 뒤, 프랑스군 주력은 보장시로 행진했다. 그러던 6월 15일, 프랑스 무관장 아르튀르 드 리슈몽이 이끄는 1,200명 가량의 프랑스군이 가세했다. 리슈몽은 브르타뉴 공작 장 4세의 셋째 아들이자 장 5세의 동생으로, 장 5세가 잉글랜드와 프랑스 사이에서 충성 대상을 이리저리 바꾸는 행보를 보였기 때문에 프랑스 정부의 불신을 샀다.

아르튀르는 1424년 잉글랜드를 저버리고 샤를에게 충성을 맹세한 뒤 무관장에 선임되었지만, 장 5세 때문에 신뢰를 얻지 못하는 상황을 만회하고자 잉글랜드군을 상대로 적극적인 공세를 벌여야 한다고 주장했다가 오히려 잉글랜드와 협상을 추진하려던 총리 대신인 조르주 1세 드라트레무아유와 갈등을 벌였다. 더구나 장 5세가 또다시 잉글랜드 편으로 돌아서면서, 그는 프랑스 궁정에서 배척당하는 처지로 전락했다. 샤를은 장 2세에게 무관장과 힘을 합치지 말라는 밀명을 내리기도 했다.

그래서 아르튀르가 합류하러 왔을 때, 장 2세는 그가 원정에 참여하는 것을 거절하려 했다. 하지만 잔이 잉글랜드군에 대한 향후 작전에 아르튀르의 군대가 절실히 필요하다며 아르튀르를 변호했고, 다른 프랑스 장군들도 그녀의 의견을 지지했다. 잔은 아르튀르에게 자신이 도팽을 절대적으로 충성한다는 서면 보증을 하도록 요청했고, 아르튀르는 기꺼이 따랐다. 이에 장 2세는 아르튀르가 원정에 가세하는 것을 받아들였다.

한편, 멍 요새를 지키고 있던 존 탈보트는 적이 보장시로 진군하는 것을 보고 잔빌로 달려가서 존 파스톨프를 만나 앞으로의 계획을 논의했다. 파스톨프는 프랑스군의 군세가 강력하니 일단 멍과 보장시에 남아있는 수비대를 철수해서 북쪽에 재집결하는 것이 현명하다고 여겼다. 하지만 탈보트는 방어를 강화하는 데 많은 공을 들였는데 전투 한 번 제대로 벌이지 않고 도주할 수 는 없다고 주장했다. 결국 탈보트의 강권에 밀린 파스톨프는 루아르 강으로 진군해 프랑스군의 압박을 받는 수비대를 지원하겠다고 약속했다.

6월 16일, 프랑스군은 보장시의 요새화된 다리를 공격했다. 당시 보장시를 지키고 있던 기사 리처드 구스틴(Richard Guestin)과 매튜 고프(Matthew Gough)는 성채에 주력군을 배치하고 다리 쪽 요새에 소규모 맨앳암즈와 장궁병을 배치했다. 프랑스군은 다리 쪽 요새에 맹공을 가한 끝에 공략에 성공했고, 포대가 남쪽 제방에 설치된 뒤 보장시 마을과 성채를 포격하기 시작했다. 하지만 프랑스 사령관들은 성채가 강력한 방비를 갖춘 것을 보고 직접적인 공격을 꺼리고 포격을 가함으로써 적이 알아서 항복하기를 희망했다. 6월 17일, 멍 요새에 도착한 파스톨프는 프랑스군이 다리를 장악하고 있고 다리 북쪽 끝에 강력한 요새를 설치한 것을 확인했다. 그는 이곳을 공격했다간 큰 손실을 볼 것을 우려해 탈보트 및 스케일스를 불러들인 후 보장시로 이동하기로 했다.

잉글랜드군이 접근하고 있다는 소식이 전해지자, 프랑스군은 보장시에서 2마일 떨어진 언덕에 전투 대형을 형성하고 이들을 기다렸다. 그러면서 보장시 수비대가 출격하는 것을 막기 위해 리슈몽의 보병과 공성포를 남겨뒀다. 적군이 미리 유리한 지점에 전투 대형을 편성했으며 숫자도 자기들보다 많은 것을 확인한 파스톨프는 멍으로 돌아갔다. 6월 18일 아침, 잉글랜드군은 멍 다리에서 프랑스군을 몰아내려 시도했으나 격퇴되었다. 이에 멍 요새를 지킬 희망이 없다고 여긴 파스톨프는 탈보트를 강력히 설득한 끝에 멍 요새를 포기하는 데 동의하게 했다. 한편, 보장시 수비대는 구원군이 올 기미가 없자 프랑스군에 항복 의사를 전했다. 프랑스 측은 그들이 10일 동안 프랑스군과 교전하지 않는다는 조건으로 무기와 짐을 가지고 노르망디로 돌아가는 것을 허용했다.

파스톨프와 탈보트는 보장시가 이렇게 빨리 항복했다는 것을 인지하지 못한 채 잔빌을 향해 철수하기 시작했다. 하지만 가장 느리게 움직이는 수송 마차와 포병대를 보호햐기 위해 선두에 세웠기 때문에, 5,000 가량의 잉글랜드군의 행군 속도는 매우 느렸다. 파스톨프는 선두에서 수송 부대, 포병 부대, 숙영지 경비병, 소규모 기마병들과 함께 했고, 탈보트, 스케일스는 노르망디와 프랑스 점령지에서 모집한 프랑스 민병대와 함께 중군에 있었다. 후위대에는 잉글랜드 맨앳암즈 및 장궁병들이 배치되었다.

이 사실을 첩보를 통해 접한 장 2세를 비롯한 프랑스 장군들은 섣불리 추격했다가 크레시 전투, 푸아티에 전투, 아쟁쿠르 전투, 베르뇌유 전투 같은 참혹한 패배를 겪을 것을 우려해 추격하기를 주저했다. 이때 잔이 그들을 독려했다.
"저들이 그대로 돌아가게 내버려둔다면 랭스로 행차하실 샤를 왕자님의 대관식을 지연시키거나 방해할 것입니다. 하느님의 이름으로, 그들과 싸우러 갑시다! 그들이 구름에 걸려 있더라도 우리가 잡을 겁니다. 하느님이 그들을 벌하려고 우리를 보내셨기 때문입니다! 당신들은 박차를 가하고 있습니다. 이제 그것을 쓸 때입니다!"

프랑스 수뇌부는 그녀의 뜻에 따르기로 하고, 북쪽으로 후퇴하는 잉글랜드군을 추격했다. 라 이르가 이끄는 1,500명의 기마병이 선두에서 질주하는 동안, 장 2세, 잔, 리슈몽 등이 이끄는 프랑스 본대가 뒤따라갔다. 하지만 정오경에 프랑스 선봉대가 파테에서 잉글랜드군을 따라잡아서 한 시간 만에 궤멸시키고 존 탈보트, 토머스 스케일스 등을 사로잡았을 때, 프랑스 본대는 여전히 멀찍이 떨어져 있었기에 전투에 참여하지 못했다. 프랑스 기마병이 잉글랜드군에게 큰 피해를 입힌 과정에 대해서는 파테 전투 참조.

쟈흐고, 멍, 보장시를 공략하고 잉글랜드군에게 큰 타격을 입혀 파리로 축출하는 데 성공하면서, 프랑스는 루아르 강 계곡을 확고히 장악하는 데 성공했다. 그 후 잔은 샤를의 대관식을 거행하기 위해 랭스로 진군할 것을 강력히 요청했고, 샤를은 고심 끝에 이를 따르기로 했다. 이리하여 프랑스군은 랭스 행진을 감행해 성공했고, 샤를은 7월 17일 랭스에서 프랑스 국왕으로서 대관식을 거행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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