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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수정 시각 : 2024-04-02 17:48:52

제르베로이 전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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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2. 상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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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백년전쟁 시기인 1435년 5월 9일, 라 이르 장 포통 드 생트라유가 이끄는 프랑스군이 아룬델 백작 존 피츠앨런이 이끄는 잉글랜드군을 격파한 전투.

2. 상세

1431년 잔 다르크 화형에 처한 이래, 잉글랜드군의 프랑스 점령지에 대한 통치는 갈수록 불안정해졌다. 샤를 7세의 지지자들이 곳곳에 할거했고, 잉글랜드인들의 프랑스에 대한 무자비한 착취와 차별 대우에 반발한 주민들의 봉기가 끊임없이 일어났다. 1432년 루앙 시민들이 도시를 프랑스군에 넘기기 위해 반란을 일으켜 잉글랜드 수비대를 쫓아냈다가 베드퍼드 공작에게 진압되었고, 1434년에는 노르망디 전역에서 세금 인상에 반발한 농민들이 대규모 민란을 일으켰다가 잉글랜드군이 큰 희생을 치른 끝에 가까스로 진압되기도 했다.

이렇듯 잉글랜드 측이 점령지를 제대로 통제하지 못해 골머리를 앓고 있는 동안, 샤를 7세를 프랑스 국왕으로 받드는 아르마냑파는 일드프랑스에 대한 영향력 강화에 골몰했다. 그 결과 1434년 수아송, 콩피에뉴, 상리스, 보베를 포함한 파리 북부 도시들이 샤를 7세를 국왕으로 받들었고, 파리 주민들 사이에서도 샤를을 따라야 한다는 여론이 점차 확산되었다. 아르마냑파는 여기서 한 걸음 더 나아가 노르망디로 진출할 교두보인 제르베로이를 점령하고 요새화하기로 했다. 사실 프랑스군은 1432년에 제르베로이를 장악했지만, 이를 유지하기에는 여건이 좋지 않았기 때문에 잉글랜드군이 사용할 수 없도록 요새를 파괴한 뒤 도시를 떠났다. 하지만 이제 잉글랜드군의 일드프랑스 지배력이 현저히 약해지고 반란 진압에 힘쓰느라 신경 쓸 겨를이 없자, 샤를 7세는 1435년 봄 제르베로이를 다시 점령하고 요새를 재건하기로 했다.

1435년 5월 초, 라 이르 장 포통 드 생트라유가 이끄는 프랑스군 1,000여 명이 제르베로이에 도착한 뒤 요새 재건에 착수했다. 한편 아룬델 백작 존 피츠앨런이 이끄는 잉글랜드군 3,000명은 제르베로이에서 12km 떨어진 노르망디 국경 도시인 구르네앙브레이에 집결한 뒤 솜 강 인근의 도시이며 샤를 7세에 충성을 맹세한 루 시를 공략할 준비를 하고 있었다. 그러던 중 프랑스군의 움직임이 전해지자, 아룬델 백작은 제르베로이부터 처리하기로 했다.

5월 8일 밤 구르네에서 출발한 아룬델 백작은 5월 9일 아침에 선봉대와 함께 제르베로이 외곽에 있는 발 다롱델 평원에서 적의 동태를 살폈다. 고원에 자리잡은 제르베로이 시에서 적 선봉대가 온 것을 확인한 라 이르와 생트라유는 저들이 선봉대이고 대규모 적군이 이곳으로 이동중이라는 사실을 간파했다. 요새를 막 재건하고 있는 상황에서 적의 포위 공격을 당해낼 수 없었기에, 행군 중인 적을 급습하기로 결의했다.

라 이르가 이끄는 기병대는 제르베로이 시를 떠나 적 선봉대가 자리잡은 위치를 우회해 적의 감시를 회피한 뒤 라우덴쿠르 마을 인근 도로에서 행진 중이던 적 본대를 기습 공격했다. 이와 동시에, 생트라유가 이끄는 보병대는 아룬델 백작과 함께하는 잉글랜드 선봉대를 공격했다. 잉글랜드 궁수병들은 말뚝을 박아 스스로 보호하려 했지만, 프랑스 병사들이 컬버린(Couleuvrine: 핸드 캐논의 일종)으로 공격을 퍼붓자 점차 움츠러들었다. 이때 아룬델 백작은 컬버린에서 발사된 총탄이 한쪽 다리에 맞아 심각한 부상을 입었다.

얼마 후 라 이르가 적 본대를 모조리 쫓아낸 후 제르베로이로 돌아오면서 완전히 고립된 잉글랜드 선봉대는 항복했다. 아룬델 백작은 생포된 후 다리를 절단하는 수술을 받았지만 며칠 후 감염으로 인해 상처가 악화되면서 사망했다. 잉글랜드군의 손실은 수백명이었을 것으로 추정되며, 프랑스군은 20명 내지 30명만 전사했다고 전해진다.

제르베로이 시는 몇년간 프랑스의 전초기지가 되었다가 1437년 10월 잉글랜드군에 함락된 뒤 프랑스군이 1449년에 재탈환했다. 전투 자체는 그리 큰 규모가 아니었지만, 프랑스군이 파리 등 일드 프랑스 일대를 본격적으로 공략하기 시작하는 계기가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