라니쉬르마른 공방전 영어: Siege of Lagny-sur-Marne 프랑스어: Siège de Lagny-sur-Marne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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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기 | 1432년 5월 ~ 8월 20일 | |
장소 | 프랑스 왕국 일드프랑스 라니쉬르마른 | |
원인 | 파리로의 식량 공급을 방해하는 라니쉬르마른을 공략하려는 베드퍼드 공작 존의 공세 | |
교전국 |
잉글랜드 왕국 부르고뉴 공국 |
[[프랑스 왕국| ]][[틀:국기| ]][[틀:국기| ]] |
지휘관 |
베드퍼드 공작 존 장 빌리에 드 릴라당 장 2세 드 뤽상부르리니 |
[[틀:깃발| [[틀:깃발| ]][[틀:깃발| ]][[틀:깃발| ]] 앙브루아즈 드 로레 [[틀:깃발| ]][[틀:깃발| ]][[틀:깃발| ]] 장 드 브로세 [[틀:깃발| ]][[틀:깃발| ]][[틀:깃발| ]] 장 드 뒤누아 [[틀:깃발| ]][[틀:깃발| ]][[틀:깃발| ]] 라울 6세 드 고쿠르 [[틀:깃발| ]][[틀:깃발| ]][[틀:깃발| ]] 로드리고 데 빌란드란도 [[틀:깃발| ]][[틀:깃발| ]][[틀:깃발| ]] 장 포통 드 생트라유 [[틀:깃발| ]][[틀:깃발| ]][[틀:깃발| ]] 질 드 레 [[틀:깃발| ]][[틀:깃발| ]][[틀:깃발| ]] 라 이르 |
]][[틀:깃발| ]][[틀:깃발| ]] 장 푸코
병력 | 6,000명 |
수비대 600~800명 증원군 5,000명 |
피해 | 미상 | 미상 |
결과 | 프랑스군의 승리. | |
영향 | 잉글랜드 왕국의 일드 프랑스 지배력 약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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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백년전쟁 시기인 1432년 5월 ~ 8월 20일, 베드퍼드 공작 존이 이끄는 잉글랜드-부르고뉴 연합군이 일드프랑스 지방의 라니쉬르마른 요새를 포위 공격했으나 함락에 실패한 공방전.2. 상세
1432년경, 프랑스의 수도 파리를 장악하고 있던 잉글랜드 왕국과 부르고뉴 공국 연합은 파리 주변 지역인 일드프랑스에 대한 통제력이 갈수록 쇠약해지는 상황에 직면했다. 특히 마른 강과 센강의 교차점에 세워진 라니쉬르마른 요새에 자리잡은 프랑스군은 파리로 들어오는 수송선들을 지속적으로 습격해, 파리 시민들이 식량난에 시달리게 만들었다. 이에 잉글랜드군 총사령관 베드퍼드 공작 존은 부르고뉴군 사령관 장 빌리에 드 릴라당, 장 2세 드 뤽상부르리니와 함께 6,000 가량의 군대를 일으켜, 1432년 5월 중순에 라니쉬르마른을 포위했다. 당시 라니쉬르마른 요새에서는 생제르맹 영주 장 푸코와 기사 앙브루아즈 드 로레가 600~800명 가량의 수비대를 이끌고 있었다.베드퍼드 공작은 마을 주민들을 겁주기 위해 공성 첫날에 마을을 포격하라고 명령했다. 그 결과 일부 성문과 성벽 일부가 파괴되었다. 그는 포격을 잠시 중단한 뒤 사절을 보내 항복을 요구했지만, 수비대와 주민들은 전의를 잃지 않았다. 이에 베드퍼드 공작은 장병들에게 성벽을 공략하라고 명했지만, 며칠간의 치열한 전투 끝에 큰 피해만 입고 물러났다. 이에 베드퍼드 공작은 요새를 가만히 포위해 수비대와 주민들은 굶주려 죽을 때까지 기다리기로 했다. 이로 인해 식량이 부족해지자, 수비대는 프랑스 국왕 샤를 7세에게 구원을 요청했다.
샤를 7세는 장 드 브로세, 장 드 뒤누아, 라울 6세 드 고쿠르, 로드리고 데 빌란드란도, 장 포통 드 생트라유, 질 드 레, 라 이르 등에게 800~1,000명의 병력을 줘서 도시를 구원하게 했다. 이들은 오를레앙에서 멜룬 방향으로 진군한 뒤 센 강을 건너 브리를 지나 라니쉬르마른으로 향했다. 도중에 샤를 7세를 지지하는 민병대가 끊임없이 가담하면서, 8월 초에 이들이 현장에 도착했을 때는 5,000명으로 불어났다. 베드퍼드 공작은 프랑스 지원군부터 격파하기로 마음먹고, 프랑스군 사령부에 사절을 보내 야전을 벌이고 싶으니 원하는 전투 날짜와 시각을 알려달라고 요청했다. 이에 프랑스 진영은 "우리는 필요할 때마다 우리에게 유리하게 싸울 것이다"라고 답하고 돌려보냈다.
이후 프랑스군은 도시 남쪽으로 질서정연하게 이동하다가 전장 인근에 작은 숲을 따라 진영을 세웠다. 프랑스 사령부는 논의 끝에 군대를 2개로 나누기로 했다. 첫번째 부대는 성을 포위한 적군에 대한 전면 공격을 수행하고, 두번째 부대는 장 포통 드 생트라유와 로드리고의 지도하에 적의 포위망이 가장 약한 지점을 돌파하며, 라울 6세 드 고쿠르가 요새에 보급품 및 증원군을 전달하기로 했다. 베드퍼드 공작은 이에 대응해 기병대를 최선두에 세워서 아군 포위망으로 접근하는 적을 분쇄하게 했고, 두 번째 부대는 장 드 빌리에의 인솔하에 요새로 들어가려는 적을 저지하게 했다. 또한 세번째 부대는 요새 공격을 계속 수행하게 했다.
8월 10일, 양군이 교전을 개시했다. 양측 선두에 선 기병대간의 교전은 초원에서 벌어졌는데, 어느 쪽도 승기를 잡지 못한 채 끝났다. 반면 생트라유와 로드리고가 이끄는 2번째 프랑스 부대는 적의 방어선을 돌파하고 앞을 가로막은 잉글랜드군과 격돌했다. 이때 잉글랜드군은 온종일 뙤양볕에서 전신 갑옷을 입은 채 있었기에 심각한 열사병에 시달리다가 300명 이상이 쓰러져 사망했다. 반면 프랑스군은 전투 전에 숲 속에서 푹 쉬웠기 때문에 상태가 좋았다. 결국 잉글랜드군은 더는 견디지 못하고 퇴각했다. 일부 잉글랜드군은 적이 요새로 진입하기 위해 반드시 진입해야 하는 보루에 올라가서 베드퍼드 공작의 깃발을 세우고 항전했지만, 프랑스군의 강력한 공세에 더 이상 버티지 못하고 요새화된 숙영지로 도주했다. 이후 프랑스군은 요새에 성공적으로 진입해 보급품과 병력을 지원한 뒤 유유히 철수했다.
잉글랜드군은 이후에도 성벽 기슭에 여전히 진을 치고 버텼지만, 상황은 갈수록 악화되었다. 며칠 후 폭풍이 강타하면서 마른 강의 수위가 1.50m 높이로 올라가 범람했고, 잉글랜드 숙영지가 물에 잠겼다. 그래도 잉글랜드군이 계속 버티자, 장 드 뒤누아와 라울 6세 드 고쿠르는 분견대를 이끌고 수로를 통해 파리로 거슬러 올라가서 적의 보급을 끊어버리기로 했다. 적이 파리로 향하는 걸 목격한 베드퍼드 공작은 이러다가 파리가 포위당할 것을 우려했다. 결국 8월 20일에 포위를 풀고 철수했고, 라니쉬르마른 민병대가 이들을 추격해 많은 잉글랜드 병사를 사로잡고 수많은 보급물자를 탈취했다. 베드퍼드 공작은 파리 인근에서 라울 6세 드 고쿠르의 분견대와 마주쳐서 전투를 벌이려 했지만, 라울 6세는 이를 회피하고 철수했다.
베드퍼드 공작은 라니쉬르마른 원정에 900만 프랑에 달하는 군자금을 쏟아부었지만 아무 성과도 거두지 못하고 큰 피해만 입은 채 대포와 식량을 전부 버리고 귀환해야 했다. 이후 일드프랑스의 시골 지역 다수가 프랑스군에 넘어갔고, 파리로 향하는 식량 운송은 더욱 방해받았다. 파리에서는 굶주림이 일상이 되었고, 전염병 마저 돌았다. 이에 파리 시민들은 점차 잉글랜드와 부르고뉴의 지배에 반감을 품었고, 그중 많은 이가 샤를 7세에게 파리를 넘기기 위한 음모를 꾸몄다. 베드퍼드 공작은 음모를 적발하는 대로 관련자들을 처형하는 등 강경책을 동원해 어떻게든 민심을 다잡으려 애썼지만, 전세가 갈수록 프랑스 쪽으로 기우는 걸 막기엔 역부족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