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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백년전쟁 시기인 1338년 3월 ~ 1339년 9월, 프랑스와 잉글랜드 함대가 상대국의 해안지대를 습격하여 약탈을 벌이거나 영국해협에서 해전을 치르는 등 유격전을 벌인 전역.2. 상세
1336년 6월 잉글랜드 국왕 에드워드 3세가 스코틀랜드를 침공했다. 이에 스코틀랜드와 동맹을 맺고 있던 프랑스 국왕 필리프 6세는 그해 8월 20일 노르망디에 집결한 프랑스 함대를 이끌고 잉글랜드를 공격해 잉글랜드의 압제를 받고 있는 스코틀랜드인들을 해방시키겠다고 선언하고, 자신을 프랑스 왕으로 인정하지 않고 파리에 와서 경의를 표하지도 않는 에드워드 3세를 반역자로 선포하고 그가 영지로 가지고 있는 가스코뉴와 아키텐을 몰수하겠다고 선포했다. 에드워드는 이에 대응해 1337년 2월 가스코뉴를 방어하기 위한 함대를 모으기 시작했고, 프랑스와 프랑스의 속국들에 대한 양모 수출을 엄금했다.방직사업에 사활을 걸었던 플란데런 백국 주민들은 잉글랜드가 앞으로는 프랑스의 속국인 자신들에게 양모를 팔지 않을 거라는 이야기를 전해듣고 큰 충격에 빠졌고, 프랑스와의 관계를 끊고 잉글랜드와 손잡아야 한다는 목소리가 거세졌다. 에드워드 3세는 부유하기로 이름난 플란데런을 동맹으로 끌어들이면 국고가 바닥나서 병력 모집에 어려움을 겪는 상황을 해소하고 프랑스로의 안전한 진군로를 확보할 수 있으리라 여기고 1337년 11월 월터 매니 경에게 3500명의 병력을 맡겨 플란데런의 카잔트 섬에 파견했다. 이들은 카잔트 전투에서 현지 민병대를 격파했지만, 플란데런의 핵심 항구도시이며 프랑스군이 주둔하고 있는 슬라이스로 공격하지는 못하고 본국으로 귀환했다.
1338년 2월, 필리프 6세는 카잔트 전투에 보복하기 위해 전임 재무부 관료이자 해군 장성인 니콜라 바후셰를 프랑스 제독으로 선임하고 잉글랜드를 공격하라는 명령을 내렸다. 1338년 3월 24일, 바후셰는 소형 갤리선으로 구성된 함대를 이끌고 칼레에서 영국해협을 건너 포츠머스에 접근했다. 그들은 잉글랜드 국기를 걸어서 잉글랜드인들을 속여 포츠머스에 상륙한 뒤 배에서 내려서 눈에 띄는 사람을 모조리 죽이고 교회와 구호소를 제외한 모든 건물을 약탈하고 불태웠다. 이후 채널 제도에 상륙하여 건지 마을에서도 약탈을 자행했다. 미처 프랑스와의 전쟁 준비가 되어 있지 않았던 잉글랜드군은 이에 대해 별다른 대응을 하지 못했다.
잉글랜드 당국과 국민들은 포츠머스 습격 사건에 심대한 충격을 받았고, 잉글랜드 남부 해안선을 따라 방어 요새를 설치하고 군대 및 함대를 배치하는 조치가 잇따라 내려졌다. 이로 인해 프랑스에 상륙할 병력 모집은 차질을 빛었다. 심지어 영국 남부 해안에서 멀리 떨어진 데본과 콘월 영주들도 프랑스군이 여기까지 들이닥칠 수 있으니 수비에 만전을 기해야 한다면서 프랑스로 원정갈 병사들을 지원할 물자와 자금을 달라는 왕의 요구를 거부했다. 이후 노르망디, 피카르디, 브류타뉴의 영주 및 상인들이 각자 전함을 사들여서 잉글랜드 해안을 종종 습격해 약탈을 자행하고 포로들을 돌려주는 대가로 몸값을 뜯어내는 일이 종종 벌어졌다.
프랑스군의 공세는 여기서 그치지 않았다. 1338년 5월, 필리프 6세가 제노바와 카스티야에서 고용한 갤리선 80척이 칼레에 이르렀다. 바후셰는 이들을 이끌고 영국해협을 수시로 들락거리면서 잉글랜드 상선들을 탈취했다. 그 해 9월, 프랑스 원수 로베르 8세 베르트랑 드 브릭퀘벡이 이끄는 프랑스-제노바 연합 함대는 먼저 채널 제도를 공격했다. 사크 섬은 전투 없이 함락되었고, 건지 섬은 제노바 선박 2척이 침몰한 짧은 전투 끝에 함락된 뒤 수비대 전원이 처형되었다.
1338년 9월 23일, 니콜라 바후셰와 위그 키에레 제독이 전함 48척을 이끌고 양모를 팔기 위해 플란데런의 아르네뮤이덴 항구에 접근하던 잉글랜드 상선 5척을 위그 카이레와 함께 습격했다. 잉글랜드인들이 대포를 처음으로 해전에서 사용하는 등 결사적으로 항전했지만 끝내 버티지 못하고 항복하자, 이 해전에서 900명 이상 잃은 것에 화가 단단히 난 두 제독은 존 킹스턴 선장을 비롯한 잉글랜드 선원 전원을 몰살하고 상선 5척과 대포 및 화물을 포획했다.( 아르네뮤이덴 해전)
1338년 10월 5일, 프랑스 함대는 수천 명의 프랑스, 노르만, 제노바, 카스티야 수병들을 사우스햄튼 항구 인근에 상륙시킨 뒤 육지와 해상에서 동시에 사우샘프턴을 공격했다. 대부분의 마을 민병대와 시민들은 공포에 질려 시골로 도망쳤고, 일부 수비대는 끝까지 싸우다가 모두 전사했다. 사우샘프턴 전역이 파괴되고 수천 파운드 상당의 물품과 선박, 포로들이 프랑스로 끌려갔다. 다음날 뒤늦게 조직된 민병대가 마을 외곽에서 프랑스군을 상대로 유격전을 벌이자, 프랑스군은 함대에 몸을 싣고 프랑스로 귀환했다. 이 공격으로 인해 사우샘프턴의 상업은 1년간 마비되었다.
게다가 프랑스 함대가 영국해협을 수시로 들락거리면서 영국과 보르도 사이의 해상 보급을 수행하고자 식량을 수송하던 영국 선박들을 나포하는 일이 빈번하게 벌어지면서, 보르도를 중심으로 한 가스코뉴 주민들의 프랑스에 대한 저항 의지는 갈수록 약해졌다. 이들은 1337년 프랑스군의 침공을 잘 막아냈고 1338년 여름 프랑스군이 침공을 가했을 때 역시 막아냈지만, 그해 11월 필리프가 북부 프랑스에서 모집한 주력군을 가스코뉴로 파견하자 속절없이 밀려났고, 1339년 7월에는 보르도를 제외한 대다수 지역이 프랑스군에 넘어가고 보르도는 프랑스군에 포위되었다. 프랑스군은 미리 매수한 시민들이 성문을 열어주자 즉시 성내로 진입했지만, 수비대와 민병대가 결사적으로 반격하면서 공략에 실패하자 장기적인 포위 공격을 위한 공성 장비나 보급 계획을 준비하지 않았기 때문에 즉시 철수했다. 하지만 이대로 가다가는 보르도마저 프랑스에게 넘어갈 게 자명했다.
에드워드 3세는 잉글랜드 남부 해안 지대를 다스리는 백작들에게 민병대를 대폭 강화해 프랑스 함대가 또다시 쳐들어오는 것을 막게 하고, 이를 제대로 하지 못하면 처벌하겠다고 위협했다. 이에 백작들은 최선을 다해 수비에 임했고, 프랑스 함대의 사우샘프턴과 플리머스, 저지 섬에 대한 재침은 격퇴되었다. 다만 헤이스팅스가 급습당해 파괴되고 그곳에 살던 어선 몇 척이 나포되고 살해당한 어민들의 시신이 칼레 거리에서 전시되었다.
1339년 여름, 몰리 남작 로버트가 이끄는 잉글랜드와 플란데런 함대가 반격에 착수했다. 그들은 프랑스 해안에 상륙한 뒤 올트와 르 트레포르 마을을 파괴하고 내륙으로 좀더 들어가면서 여러 마을을 황폐화했다. 뒤이어 볼로뉴 항구에 있는 프랑스 함대를 기습해 파괴했다. 한편 필리프 6세에게 반기를 든 플란데런 함대도 독자적으로 움직였다. 그들은 그 해 9월에 디에프 시를 파괴하고 약탈을 자행했다. 하지만 에드워드 3세는 이런 식의 소모전으로는 강대한 프랑스를 꺾을 수 없고, 자금난이 극심해서 지금 당장 결정적인 승리를 거두지 못한다면 잉글랜드군을 유지할 수 없다는 것을 잘 알았다. 이에 따라 그동안 플랑드르의 안트베르펜에서 전황을 살피던 그는 캉브레를 향한 공세에 착수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