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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1337년 11월, 플란데런 백국 카잔트(현재 네덜란드 자를란트 지방 카잔트) 섬[1]에서 잉글랜드군과 프랑스군이 맞붙은 전투. 백년전쟁의 첫번째 전투이다.
2. 배경
1336년 8월 12일, 잉글랜드 국왕 에드워드 3세는 자국과 전쟁을 치르고 있는 스코틀랜드에 병력과 물자를 지원하는 프랑스 왕국에 보복하기 위해 프랑스 본토와 프랑스의 속국들에 양모와 가죽을 수출하는 것을 금지하는 법령을 반포했다. 이 조치로 인해 심대한 타격을 입은 지역이 있었으니, 바로 플란데런 백국였다. 이 지역은 플란데런 백작의 통치를 받았지만 각 도시들에 코뮌을 결성한 길드들이 자치를 누리는 것을 인정받았다. 프랑스 왕국은 13세기 말부터 플란데런을 복속시키기 위해 원정을 지속적으로 단행했다. 플란데런 주민들은 이에 맞서 거세게 항전해 프랑스군에게 몇 차례 참패를 안겼지만, 14세기 초에 더 이상 버티지 못하고 프랑스의 속국이 되었다.당시 모직업이 번창했던 플란데런 도시들은 막대한 양모를 생산하는 잉글랜드와의 무역에 사활을 걸었다. 그런 상황에서 잉글랜드가 더 이상 양모를 팔지 않는다면 그들은 심각한 경제 위기를 겪을 게 자명했다. 더욱이 당시 플란데런 백작 루이 1세 드 플란데런은 파리에서 호화로운 생활을 하며 프랑스 국왕에 충성을 바치는 반면에 플란데런을 거의 들리지 않으면서 플란데런에 무거운 세금을 부과하고 조금이라도 반항하는 기미가 보이면 가차없이 숙청했다. 이에 플란데런 주민들은 깊은 반감을 품었고, 프랑스의 지배에서 벗어나 잉글랜드 편을 들어야 한다는 의견이 갈수록 강해졌다.
플란데런 내 친 잉글랜드 파벌의 지도자는 헨트의 부유한 방직업자인 야코프 반 아르테벨데(Jacob Van Artevelde, 1290 ~ 1345)였다. 그는 탁월한 웅변술을 발휘해 동료들이 부재중인 압제자에 반기를 들고 잉글랜드의 친구가 되겠다고 맹세하게 했다. 사람들은 그를 진정한 지도자로 떠받들었고, 그는 헨트의 '섭정'으로 선출되었다. 자신을 반역자로 선고하고 가스코뉴를 공격한 필리프 6세에 대항하기 위한 원정을 준비하고 있던 에드워드 3세는 플란데런에서 반 프랑스 반란이 일어났다는 소식을 듣고 고무되었다. 당시 잉글랜드 정부는 스코틀랜드와 전쟁을 치르면서 국고가 텅 비어버렸고, 왕은 전쟁에 필요한 병력과 무기, 물자 수급에 들어가는 자금을 마련하기 위해 해외의 여러 대급업자들로부터 막대한 돈을 빌려야 했다. 이 막대한 빚을 감당하려면 새로운 재원 마련이 절실하게 필요했는데, 부유하기로 유명한 플란데런을 자기 편으로 확고히 끌어들일 수 있다면 이 문제를 어느정도 해결할 수 있을 것이었다.
에드워드 3세의 지시를 받은 사절들은 플란데런 각지를 돌며 에드워드 3세와 동맹을 맺으라고 권유했다. 그 결과 헨트, 브뤼헤, 이프르 등 도시들은 에드워드 3세와 동맹을 맺고 잉글랜드와의 무역을 정상화하는 조약을 맺기로 했다. 특히 야코프는 헨트에서 사절단을 만나 잉글랜드군이 플랑드르에 상륙하면 어떠한 저항도 하지 않겠다고 약속했다. 다만 프랑스를 합동 공격하기에는 여력이 부족하니, 당분간은 잉글랜드에 자금과 물자를 지원하는 정도로 해주겠다고 밝혔다. 사절단은 잉글랜드로 곧장 돌아가서 야코프의 제안을 전달했다. 하지만 모든 플란데런 일대가 잉글랜드의 편에 선 것은 아니었다. 상당수의 프랑스군 수비대 및 해군이 주둔한 항구 도시 슬로이스와 스헬트 강 입구에 위치한 카잔트 섬은 야코프의 대의에 따르길 거부하고 필리프 6세를 변함없이 지지했다. 두 도시에 주둔한 수비대는 영국 해협을 가로질러 오가는 잉글랜드 상선을 종종 위협했다. 이들을 제거하지 않는다면, 에드워드 3세가 플란데런에 상륙한 뒤 프랑스로 진군할 때 보급로를 위협받을 수 있었다. 이에 에드워드 3세는 빠르고 쉬운 승리를 한시바삐 거둬서 프랑스와의 전쟁에 우려를 표하고 있는 군대의 사기를 높이기로 마음먹고, 플란데런에 소규모 군대를 파견해 아직 그곳에 남아있는 프랑스 수비대를 섬멸하기로 마음먹었다.
3. 경과
에드워드 3세는 에노에 주둔한 소규모 잉글랜드군의 지도자인 가터 기사단장 월터 매니 경과 여러 영주 및 기사들에게 귀환을 명령했다. 월터는 40척의 잉글랜드 선박에 군대와 종자, 무기 및 물자를 싣고 잉글랜드로 돌아가던 중 플란데런의 대형 전함 2척을 요격했다. 이 배에는 글래스고 주교와 150명의 스코틀랜드인, 많은 돈, 그리고 소수의 프랑스 군인들이 탑승했다. 2척의 배는 철저하게 약탈되었고, 글래스고 주교는 프랑스 병사들과 함께 처참하게 살해되어 바닷속으로 던져졌다.이후 런던에 도착한 월터는 카잔트 섬을 공략하라는 지시를 받들어 더비 백작 그로스몬트의 헨리와 함께 원정을 준비했다. 그들은 카잔트 섬을 빠른 시일에 장악한 뒤 슬로이스 시를 공략하기로 했다. 한편 솔즈베리 백작 윌리엄 몬테규는 해안 순찰 함대를 이끌고 잉글랜드 남부 해안을 경비하는 역할을 맡았고, 테오발트 러셀은 채널 제도와 와이트 섬의 방어를 맡았다. 여기에 서퍽 백작 로버트 우퍼드는 플란데런에서 가장 가까운 잉글랜드 동부 해안의 수비를 맡았다.
카잔트와 슬로이스에 대한 작전을 수행하기 위해 집결한 잉글랜드군은 1,000명의 기사 및 종자, 중장병 500명, 궁수 2,000명으로 구성되었다. 원정군은 런던에서 승선한 후 템즈 강을 따라 하류로 항해하여 그레이브젠드에 도착한 뒤 그곳에서 하룻밤을 보낸 후 다음날 항해를 재개해 마게이트에 도착했고, 이튿날 카잔트 섬으로 항해했다. 한편, 사전에 영국군이 쳐들어올 거라는 정보를 입수한 플란데런 백작 루이 1세 드 플란데런은 형이자 사생아인 기 드 리켄부르크에게 카잔트를 수비하라는 지시를 내렸다. 기는 지역 민병대 5,000명을 모집하고 16명의 남성을 기사로 선임해 다가오는 잉글랜드군의 침공에 대비했다.
1337년 11월 9일, 잉글랜드 선박이 카잔트 섬에 접근했다. 기가 이끄는 수비대는 즉시 제방과 모래 해변에 전투 대형을 결성하고 적이 상륙하기를 기다렸다. 월터 매니는 배를 섬에 최대한 가까이 접근시키게 한 뒤 장궁병들에게 해안에 자리를 잡고 있는 적을 향해 일제 사격을 가하라고 명령했다. 마침 바람이 잉글랜드군에 유리하게 불고 조류 역시 안정적으로 흘렀기 때문에, 잉글랜드 장궁병들은 적군을 향해 화살을 효과적으로 쏠 수 있었다. 이로 인해 많은 사상자가 발생하자, 기는 병사들에게 화살이 미치지 않는 지점으로 후퇴하라고 지시했다.
이후 보병과 기사 1,500명이 보트를 타고 상륙했고, 궁수들은 엄호 사격을 위해 전함에 그대로 남았다. 잉글랜드군이 해안에 상륙한 뒤 자신들을 향해 달려들자, 기는 병사들에게 반격하라고 명령했다. 이후 카잔트 해안에서 격전이 벌어졌다. 그러던 중 더비 백작 그로스몬트의 헨리가 너무 멀리 전진했다가 적병들에게 포위되었고, 그 중 한 명으로부터 강한 타격을 입고 땅바닥에 쓰러졌다. 월터 매니는 그걸 보고 돌격해 적병들을 흩어지게 한 뒤 동료를 구출했다. 이렇듯 플란데런 민병대는 나름대로 잘 싸웠지만, 오랜 전쟁을 치르면서 숙련된 잉글랜드 병사들의 전투력에 밀린데다 장궁병들의 정확한 사격으로 인해 사상자가 갈수록 늘어나자, 결국 카잔트 마을로 퇴각했다. 잉글랜드 장병들은 그들을 추격해 마을로 들어가 살육과 약탈을 자행했다.
이날 전투에서 플랑드르 민병대 5,000명 중 3,000명이 사망하고 나머지는 포로로 잡혔다. 지휘관 기와 그날 기사로 임명된 이들 다수가 생포되었고, 포로로 잡힌 일반 병사들은 모두 처형되었다. 잉글랜드군의 손실은 알려진 바 없으나 수백 명 정도였을 것으로 추정된다. 이제 카잔트를 장악했으니 예정대로라면 슬로이스 시를 공격해야 했지만, 월터 매니는 카잔트와 며칠 거리에 있는 볼로뉴 쉬르 메르에 프랑스군이 집결하고 있다는 소식을 듣고 잘 요새화된 슬로이스를 섣불리 공격했다가 거기에 묶여있는 사이에 프랑스군의 요격으로 섬멸될 위험이 있다고 판단하고 포로와 약탈품을 싣고 잉글랜드로 돌아갔다.
4. 결과
카잔트 전투는 소규모 전투였지만 에드워드 3세가 원했던 결과를 가져왔다. 잉글랜드와 동맹을 맺은 이들은 잉글랜드가 프랑스에 맞서 스스로를 지킬 수 있다는 확신을 품기 시작했고, 플란데런의 친 프랑스 인사들은 잉글랜드군의 압도적인 전투력에 겁먹었다. 이에 고무된 플란데런의 친 잉글랜드 세력은 필리프 6세에 더욱 적극적으로 저항했다. 하지만 아직 원정 준비가 덜 되었던 에드워드 3세는 이후 수년간 플란데런에 군대를 파견하지 않았다. 그 대신, 프랑스 해안에 소규모 병력과 함대를 종종 파견하여 치고 빠지는 유격전을 구사했다.한편, 카잔트에서 잉글랜드군에 맞서 싸우다 사로잡힌 기 드 리켄부르크는 에드워드 3세로부터 가치 있는 상대로서 대우받은 뒤 월트 매니의 포로로서 2년간 채류했다. 1340년 1월 26일, 에드워드 3세는 8천 파운드를 매니에게 지불하고 기를 자신의 포로로 삼았다. 플란데런인들은 그를 돌려받기 위해 11,000파운드에 달하는 몸값을 지불하겠다고 약속했지만, 그들이 몸값을 지불하기 전에 기가 에드워드 3세에게 감화되어 그에게 충성을 맹세하면서 무산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