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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백년전쟁 시기인 1416년 3월 9일과 3월 11일, 잉글랜드군이 노르망디의 발몽과 아르플뢰르 부근에서 프랑스군을 격퇴한 전투.2. 상세
1415년 9월 22일 아르플뢰르 공방전에서 승리한 헨리 5세는 아르플뢰르를 잉글랜드군의 노르망디 상륙 거점으로 삼고 1,200명의 수비대를 그곳에 배치했다. 1416년 1월 잉글랜드에서 900명의 맨앳암즈와 궁수병 1,500명이 아르플뢰르에 추가로 파견되었다. 아르플뢰르 수비대 지휘관인 도싯 백작 토머스 보퍼트는 이중 1,000명 가량의 정예병을 선발한 뒤 식량과 물자를 확보하기 위한 원정을 벌이기로 했다.1416년 3월 9일부터 작전을 개시한 잉글랜드군은 아르플뢰르 인근의 여러 마을을 약탈하고 불태우다가 카니바빌에서 방향을 돌려 아르플뢰르로의 귀환길에 올랐다. 이때 아르마냑 백작이자 프랑스 무관장인 베르나르 7세 다르마냐크가 파견한 프랑스 분견대가 잉글랜드군을 공격했다. 잉글랜드군이 모든 말과 짐을 후방에 배치하고 전투 대형을 결성하자, 프랑스 기병대가 돌격하여 적의 전선을 돌파했지만 적군의 후방을 요격하는 대신 짐을 약탈하고 말을 훔치는 데 열중했다. 그 사이에 잉글랜드군은 전열을 가다듬어 인근의 작은 울타리 정원으로 후퇴한 후 해질녘까지 방어했다. 그러다 프랑스군이 철수하자, 보퍼트는 야간 행군을 감행해 현장을 빠져나갔다.
3월 11일 아르플뢰르 인근 해변에 이른 잉글랜드군은 절벽 위에 프랑스군이 기다리고 있는 광경을 목격했다. 그들은 전투 대형을 결성한 뒤 자신들을 향해 달려드는 프랑스군을 격파하고 시신을 약탈했다. 그 사이에 맨앳암즈 2,000명과 1,000명의 궁수병, 민병대 1,000명이 접근했다. 이들은 잉글랜드군에 접근하지 않고 고지대에 전투 대형을 결성했다. 그들을 뚫지 못하면 아르플뢰르에 돌아갈 수 없었기에, 보퍼트는 강행 돌파를 명령했다.
잉글랜드군이 명령에 따라 고지대로 올라가기 시작하자, 아쟁쿠르 전투의 충격에서 헤어나오지 못했던 프랑스군은 제대로 싸우지도 않고 후퇴했다. 이때 아르플뢰르에 남아있던 잉글랜드 수비대가 적의 측면을 요격하자, 간신히 전열을 유지한 채 물러나던 프랑스군은 아예 무기를 집어던지고 사방으로 뿔뿔이 흩어졌다. 당대 연대기에 따르면, 이 전투에서 잉글랜드군은 160명이 전사한 데 비해 프랑스군은 200명이 전사하고 800명이 생포되었다고 한다. 이후 아르마냑 백작은 전투에서 도망쳤다는 이유로 50명을 추가로 교수형에 처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