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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백년전쟁 시기인 1351년 2~8월, 프랑스군이 생장당젤리에 주둔한 잉글랜드군을 포위 공격한 공방전.2. 상세
1350년 8월 22일, 슬로이스 해전, 크레시 전투, 1차 칼레 공방전 등 일련의 참패로 인해 왕권이 실추되고 잉글랜드군이 국내에 활개치는 데다 중세 흑사병이 들이닥치면서 수많은 이들이 절명하는 상황에 절망하던 필리프 6세가 숨을 거두었다. 노르망디 공작이자 후계자인 장이 한달 뒤인 9월 26일에 랭스에서 대관식을 거행하고 프랑스 국왕 장 2세로 등극했다.장 2세는 즉시 화폐 가치를 조작하기 위해 1/3이 구리인 새로운 에퀴 금화를 주조하게 했다. 그리고 얼마 뒤에는 아비뇽으로 가서 교황에게 성직자 보조세와 다른 특권들을 허가해 달라고 요청해 승인을 받아냈다. 이후 몽펠리에와 나르본을 거쳐 카르카손에 도착해 한동안 머물렀고, 가스코뉴와 리무쟁과 푸아투를 거쳐 다시 파리로 돌아갔다. 그러나 이 여정에서 그가 지나온 모든 지역이 불타거나 폐허가 되어 있었고, 한때 그의 왕국에 속했던 도시와 성들은 잉글랜드인들이 점거한 채 굳건히 지키고 있었다. 그는 이에 반감을 품고 잉글랜드인들을 기필코 프랑스에서 축출하겠다고 다짐했다.
랭스에서 대관식을 마치고 파리로 돌아온 지 한달 뒤인 11월 19일, 장 2세는 외 백작 라울 2세 드 브리엔을 즉결 처형했다. 라울 2세는 1346년 1차 캉 공방전에서 잉글랜드군에 사로잡힌 뒤 런던으로 끌려가 4년간 억류되었다가 1350년 몸값 5만 리브르를 구하기 위해 가석방되었다. 몸값을 마련할 수 없었던 그는 자신이 소유한 긴느 성을 에드워드 3세에게 양도하기로 했다. 그러자 장 2세는 이를 모든 프랑스 영토의 주권자인 자신에 대한 반역으로 간주하고 참수형에 처하고 라울 2세의 재산을 압류했다. 상당한 거물이었던 라울 2세가 순식간에 처형된 사건은 프랑스 귀족들에게 엄청난 충격을 안겼고, 발루아 왕조에 대한 불신이 깊어지는 계기가 되었다.
이후 장 2세와 군사 고문들은 잉글랜드 왕국이 그동안 쌓인 막대한 적자를 해소하기 위해 내치에 전념하고 있는 틈을 타 가스코뉴 국경지대의 요새들을 공략하기로 했다. 1351년 2월, 멜로 영주 기 2세 드 네슬과 부관 아르눌 도드랭이 이끄는 수천 명이 프랑스군이 잉글랜드 수비대 600명이 주둔하고 있는 생장당젤리 요새를 포위하고 요새로 이어지는 모든 보급로를 차단했다. 수비대는 몇 달간 결연히 버텼지만, 식량이 바닥을 드러내면서 굶주림에 시달렸다.
아군이 포위되었다는 소식을 접한 가스코뉴의 세네샬 존 드 체버스턴과 친 잉글랜드파 가스코뉴 영주인 아르노 아마니외 달브레는 생장당젤리를 구원하기 위해 수백 명의 부대를 이끌고 출진했다. 이들은 수적으로 열세했기 때문에 적 포위망을 뚫을 생각은 없었지만 수비대에 물자를 보급하고자 노력했다. 적이 접근하고 있다는 소식을 접한 기 2세 드 네슬은 일부 병력를 남겨서 계속 포위하게 한 뒤 대다수 병력을 이끌고 이들을 요격하러 출진했다.
1351년 4월 1일, 기 2세 드 네슬이 이끄는 프랑스군은 생트 마을에서 약 3마일 떨어진 도로에서 잉글랜드군을 요격했다. 잉글랜드군 기사들은 즉시 말에서 내려 고지로 올라가서 전투 대열을 형성하고 말을 후방으로 이끌었다. 네슬은 양 측면의 소규모 기병대를 제외한 대부분의 기사들에게 말에서 내리게 한 뒤 고지를 에워싸서 공세를 펼쳤다. 그리하여 전투가 한창 벌어지고 있을 때, 인근의 타이르부르와 토네-샤랑트의 잉글랜드 수비대에서 분리된 수백 명의 잉글랜드군이 프랑스군 후방을 공격했다. 이에 전의를 급격히 상실한 프랑스군은 패주했고, 600명 가량의 프랑스 기사가 죽거나 사로잡혔다. 기 2세 드 네슬과 아르눌 도드랭 역시 사로잡혔다가 몸값을 지불하고 풀려났다.
존 드 체버스턴은 생트 전투에서 승리한 뒤 생장당젤리 요새로 접근했지만 포위망을 뚫지는 못하고 보급품을 수비대에 전달해 준 후 철수했다. 한편 장 2세는 지휘관들이 사로잡혔다는 소식을 접하자 친히 추가 병력을 이끌고 포위군과 합세했다. 이후 잉글랜드군의 구원이 더이상 오지 않자, 생당장젤리 수비대와 주민들은 1351년 8월 장 2세에게 항복했다. 잉글랜드군은 이에 맞서 프랑스 북부에 기마 약탈을 벌였지만 모조리 격퇴되었다. 아직 프랑스를 대대적으로 공격할 준비가 안 되었던 에드워드 3세는 휴전을 맺자고 제의했고, 장 2세는 생장당젤리의 지배를 정식으로 인정받는 등 유리한 조건으로 휴전에 동의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