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ir.pe (일반/어두운 화면)
최근 수정 시각 : 2024-02-27 19:51:17

루나롱주 전투


백년전쟁의 전투
{{{#!folding [ 펼치기 · 접기 ] 제2차 스코틀랜드 독립 전쟁
킹혼 전투 더플린 무어 전투 아난 전투 할리돈 힐 전투 컬블린 전투
1335~1336년 에드워드 3세의 스코틀랜드 침공 던바 공방전 네빌스 크로스 전투 네스빗 무어 전투 베릭 공방전
번트 캔들마스
제1기
카잔트 전투 아르네뮤이덴 해전 영국 해협 전역 캉브레 공방전 슬로이스 해전
생오메르 전투 투르네 공방전 베르주라크 전투 오베르슈 전투 에기용 공방전
1차 캉 공방전 블랑슈타크 전투 크레시 전투 랭커스터 공작의 슈보시 1차 칼레 공방전
루나롱주 전투 칼레 전투 윈첼시 해전 생장당젤리 공방전 아르드르 전투
긴 공방전 흑태자의 슈보시 브레퇴유 공방전 푸아티에 전투 자크리의 난
샤르트르 공방전
브르타뉴 내전
샹토소 전투 엔봉 공방전 반 공방전 브레스트 해전 모를레 전투
생폴드레옹 전투 라 로슈데리앙 전투 30인의 결투 모롱 전투 렌 공방전
오레 전투
제2기
브리네 전투 코르슈렐 전투 나헤라 전투 몬티엘 전투 리모주 공방전
퐁발랭 전투 라 로셸 해전 시세 전투 곤트의 존의 슈보시 와트 타일러의 난
루즈베케 전투 이프르 공방전 브레스트 공방전 마게이트 해전 오터번 전투
포르투갈 공위기
아톨레이로스 전투 리스본 공방전 알주바호타 전투 발베르데 전투
글린두르의 난
마이니드 헤드겐 전투 브린 글라스 전투 슈루즈버리 전투 스톨링 다운 전투 푸울 멜린 전투
제3기
아르플뢰르 공방전 아쟁쿠르 전투 발몽 전투 셰프드코 해전 2차 캉 공방전
루앙 공방전 보제 전투 모 공방전 크라방 전투 라 브로시니에르 전투
베르뇌유 전투 생잠 요새 공방전 몽타르지 공방전 오를레앙 공방전 루브레 전투
루아르 원정 파테 전투 랭스 행진 1차 파리 공방전 생피에르르무티에 공방전
콩피에뉴 공방전 안통 전투
제4기
푸앙세 공방전 라니쉬르마른 공방전 제르베로이 전투 생드니 공방전 2차 파리 공방전
2차 칼레 공방전 타르타 공방전 퐁투아즈 공방전 디에프 공방전 포미니 전투
잭 케이드의 난 블랑크포르 전투 카스티용 전투 }}}

1. 개요2. 상세

[clearfix]

1. 개요

백년전쟁 시기인 1349년 5월 말 또는 6월 초, 루나롱주(Lunalonge, 현재 프랑스 되세브르 지방 리마롱주)에서 잉글랜드-가스코뉴 연합군과 프랑스군이 맞붙은 전투.

2. 상세

1347년 9월 28일, 프랑스 국왕 필리프 6세와 잉글랜드 국왕 에드워드 3세는 1348년 7월 7일까지 9개월간 휴전을 맺기로 한 '칼레 휴전'을 체결했다. 하지만 중세 흑사병 도래로 인해 전쟁을 벌일 여건이 되지 않았기에, 양국은 휴전 기간을 잇따라 갱신했다. 그러나 휴전은 그저 이름뿐이었고, 가스코뉴와 브르타뉴 방면에서는 소규모 전투와 습격이 끊이지 않았다. 그러던 1349년 여름, 푸아투의 세네샬인 장 드 릴이 이끄는 1,500명 가량의 기병대가 뤼지냥 시를 포위했다. 이 소식을 접한 가스코뉴의 세네샬인 토머스 코크는 500명의 잉글랜드-가스코뉴 연합 기병대를 이끌고 보르도에서 뤼지냥을 구하러 진격했다.

1349년 5월 말 또는 6월 초, 뤼지냥으로 진군하던 토머스 코크의 잉글랜드군은 루나롱주에서 장 드 릴이 이끄는 프랑스군의 급습을 받았다. 잉글랜드군이 급히 진지를 세우고 말을 수하물 마차 뒤편으로 보낸 뒤 방어 태세를 갖추자, 장 드 릴은 이들을 정면에서 공격하면 큰 손실을 볼 게 자명하다고 보고, 적 주위를 돌면서 수하물 마차를 탈취하고 말을 포획했다. 이후 3개 부대로 나뉜 프랑스 기병대가 2개 부대를 동원해 적을 공격했지만, 잉글랜드-가스코뉴 연합군이 원형 방진을 세우고 랜스를 즉석 파이크로 사용하며 버텨서 상당한 손실을 입었다. 3번째 프랑스 부대는 전투에 투입되지 않고 공격 기회를 기다리며 위치를 유지했다.

해질녘까지 잉글랜드군 전열을 뚫는 데 실패하고 지휘관 장 드 릴이 전투 도중 사로잡히자, 프랑스 병사들은 포획한 말들을 데리고 뤼지냥으로 후퇴했다. 이 전투에서 300명의 프랑스 병사가 전사했고 릴을 비롯한 많은 이들이 포로 신세로 전락했다. 잉글랜드-가스코뉴 연합군의 피해는 알려진 바 없으나, 말을 모두 잃었기에 걸어서 인근 요새로 철수했다는 이야기가 전해진다. 이후 그들은 보르도로 돌아가는 길에 샤랑트 강의 가장 중요한 교차점을 통제하는 타이르부르 요새를 급습해 함락시켰다. 한편 프랑스군은 뤼지냥 포위 공격을 포기하고 귀환했지만, 1350년 여름 새로운 프랑스군이 잉글랜드군이 버리고 떠난 뤼지냥을 점령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