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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수정 시각 : 2024-07-01 17:26:17

아톨레이로스 전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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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톨레이로스 전투
포르투갈어: Batalha dos Atoleiros
스페인어: Batalla de Atoleiros
파일:아톨레이로스 전투.jpg [1]
시기 1384년 4월 6일
장소 포르투갈 왕국 프론테이라 지방 아톨레이로스
원인 포르투갈 왕국을 손아귀에 넣으려는 후안 1세의 공세.
교전국 파일:포르투갈 왕국 국기.svg 포르투갈 왕국 파일:800px-Royal_Coat_of_Arms_of_the_Crown_of_Castile_(1284-1390).svg.png 카스티야 연합 왕국
지휘관 파일:포르투갈 왕국 국기.svg 누누 알바레스 페헤이라 파일:800px-Royal_Coat_of_Arms_of_the_Crown_of_Castile_(1284-1390).svg.png 페르난도 산체스 데 토바르
파일:800px-Royal_Coat_of_Arms_of_the_Crown_of_Castile_(1284-1390).svg.png 페드루 알바레스 페헤이라
병력 보병 1,000명, 기사 300명, 석궁수 100명 보병 3,000명, 기병 2,000명
피해 미미함. 다수
결과 포르투갈 왕국의 승리.
영향 포르투갈 내 반 카스티야 세력의 사기 증진.

1. 개요2. 배경

[clearfix]

1. 개요

1384년 4월 6일, 포르투갈 장군 누누 알바레스 페헤이라가 수적으로 훨씬 카스티야 연합 왕국 군대를 격파한 전투. 포르투갈 공위기(1383 ~ 1385) 최초의 전투이다.

2. 배경

1382년, 포르투갈 국왕 페르난두 1세 랭글리의 에드먼드가 이끄는 잉글랜드군과 연합해 카스티야 연합 왕국과 벌인 전쟁이 별다른 성과를 거두지 못하자 카스티야 국왕 후안 1세와 접촉해 평화 협약을 맺었다. 그는 양국의 화해를 위해 자신의 외동딸 베아트리스를 후안 1세와 결혼시키기로 했다. 이때 맺은 결혼 조약에 따르면, 페르난두 1세가 남자 아이를 두지 못한 채 사망하면 포르투갈 왕위는 베아트리스에게 넘어가고 그녀의 남편은 포르투갈의 왕을 칭할 수 있지만 실제로 통치를 하지는 않고 베아트리스의 어머니 레오노르가 섭정을 맡기로 했다. 또한 베아트리스가 낳은 자식은 포르투갈 왕국을 물려받지만, 자식이 태어나지 않는다면 왕위는 후안 1세에게 돌아가며, 그 다음엔 후안 1세가 전처와의 사이에서 낳은 엔리케 왕자에게 넘어갈 것이었다. 1383년 5월 17일 바다호스 대성당에서 결혼식이 거행되었고, 5월 21일 카스티야 기사와 고위 성직자들은 카스티야 왕이 조약에서 동의한 약속을 어긴다면 왕과 싸우겠다고 맹세했고, 포르투갈인들 역시 조약을 준수하겠다고 맹세했다.

1383년 포르투갈 국왕 페르난두 1세가 사망한 뒤, 페르난두 1세의 외동딸인 베아트리스가 포르투갈 여왕이 되었고, 베아트리스의 어머니 레오노르 텔레스 섭정을 맡았다. 카스티야 연합 왕국 국왕이자 베아트리스의 남편인 후안 1세는 베아트리스와 자신을 포르투갈의 통치자로 선포하는 내용의 선언서를 포르투갈 전역에 보내고 알폰소 로페스 데 테하다를 포르투갈 총독으로 선임해 리스본으로 파견했다. 그러나 자신들의 기득권이 훼손될까 두려웠던 포르투갈 상인 계급은 자국이 카스티야 왕국에 병합되는 것을 원하지 않는 백성들을 선동해 11월 말부터 반란을 일으켰다.

포르투갈 전임 국왕 페드루 1세 사생아이자 아비스 기사단장인 주앙은 이러한 상황을 가만히 지켜보다가 1383년 12월 6일 누누 알바레스 페헤이라, 알바로 파이스 등을 포함한 공모자들과 함께 포르투갈의 섭정 레오노르의 애인인 주앙 페르난데스 안데이루를 암살했다. 리스본 시민들은 이 소식을 접하자마자 봉기를 일으켜 카스티야의 앞잡이로 간주된 리스본 주교 마르티뉴 아네스(Martinho Anes)를 살해한 뒤 아녜스의 아들인 주앙 왕자를 지도자로 옹립했으며, 카스티야의 앞잡이로 간주된 리스본 주교 마르티뉴 아네스(Martinho Anes)를 살해했다. 알바로 파리스는 레오노르에게 주앙 왕자와 재혼할 것을 제안했지만, 그녀는 이를 거부하고 산타렝으로 도주했다.

그 후 레오노르는 후안 1세에게 도움을 요청했고, 후안 1세는 친히 군대를 이끌고 포르투갈의 상황을 안정시키기로 마음먹고 아내 베아트리스와 함께 산타렝으로 진군했다. 1384년 1월 13일 산타렝에 도착한 후안 1세는 레오노르로부터 사임 각서를 받아내고 많은 기사와 성주들로부터 충성 서약을 얻어냈다. 한편, 주앙은 후안 1세의 공세로부터 국경을 사수하기 위해 누누 알바레스 페헤이라를 포르투갈과 카스티야의 국경 요새인 아르테호의 지휘관에 선임했다. 그는 석궁병 100명과 잉글랜드 창기병 300명을 포함한 1,400명을 모은 뒤 아르테호로 이동했다.

그러던 1384년 4월 6일, 프론테이아 일대를 평정하기 위해 진군하던 카스티야군 보병 3,000명, 기병 2,000명이 아톨레이로스에서 누누가 이끄는 포르투갈군과 마주쳤다. 카스티야군 사령관 페르난도 산체스 데 토바르 페드루 알바레스 페헤이라는 아군이 수적으로 압도하니 포르투갈군이 싸울 의욕이 없을 거라 여기고, 사절을 보내 항복을 요구했다. 그러나 누누는 거절했고, 페르난도와 페드루는 포르투갈군을 섬멸하기 위해 진군했다. 누누는 적이 접근하기 전에 방어에 유리한 고지를 선점한 뒤 베테랑 잉글랜드 창병이 선봉에 있는 직사각형 전투 대형을 결성했으며, 양익과 후위에는 기병대와 석궁병을 배치했다.

얼마 후, 전장에 도착한 카스티야군은 수적 우세를 믿고 적 진형을 향해 기병대를 대거 투입했다. 그러나 잉글랜드 창병들이 이들을 성공적으로 저지했고, 석궁병들이 적 기병들이 타고 다니는 군마를 향해 석궁을 날려 모조리 무력화했다. 기병들은 방어에 매우 유리한 고지를 선점하고 방어에 전념하는 적진을 무리하게 뚫으려 했다가 막심한 피해를 입고 후퇴했다. 적군이 기세를 잃고 퇴각하기 시작하자, 누누는 이들을 하루 종일 추격해 막대한 피해를 입혔다. 사료에 따르면, 포르투갈군은 단 한 명의 사상자도 나오지 않았지만 카스티야군은 막심한 피해를 입었다고 한다. 과장일 가능성이 높지만, 포르투갈군의 사상자가 가벼운 건 분명하다. 이 승리는 포르투갈 내 반 카스티야 세력의 사기를 증진해, 향후의 항전을 의욕적으로 치르는 계기가 되었다.
[1] 프론테이라 정의궁의 프레스코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