셰프드코 해전 프랑스어: Bataille de Chef-de-Caux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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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기 | 1416년 8월 15일 | |
장소 | 프랑스 왕국 셰프드코 해안[1] | |
원인 | 프랑스 해군에 봉쇄된 아르플뢰르 항구를 구원하기 위한 잉글랜드 함대의 원정 | |
교전국 | 잉글랜드 왕국 |
[[프랑스 왕국| ]][[틀:국기| ]][[틀:국기| ]] |
지휘관 | 베드퍼드 공작 존 | [[틀:깃발| 기욤 2세 드 나르본 | ]][[틀:깃발| ]][[틀:깃발| ]]
병력 | 선박 300척, 병력 15,000명 | 선박 38척 |
피해 | 100명 이하 | 1,500명 사망, 400명 생포 |
결과 | 잉글랜드군의 승리. | |
영향 | 잉글랜드군의 아르플뢰르 구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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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백년전쟁 시기인 1416년 8월 15일, 베드퍼드 공작 존이 이끄는 잉글랜드 해군이 잉글랜드 왕국의 유일한 노르망디 거점이었던 아르플뢰르를 봉쇄한 프랑스 해군을 격파한 해전.2. 상세
1416년 초, 잉글랜드 국왕 헨리 5세가 지난해에 아르플뢰르 공방전을 통해 확보한 아르플뢰르는 노르망디에서 유일한 잉글랜드 거점이었다. 1415년 10월 25일 아쟁쿠르 전투에서 대승을 거두고 칼레를 통해 잉글랜드로 돌아간 헨리 5세는 장차 군대를 새로 일으켜서 아르플뢰르에 상륙한 뒤 노르망디를 공략하려 했다. 하지만 헨리 5세의 계획을 눈치챈 프랑스 무관장이자 당시 파리를 지배하고 있던 아르마냑파의 수장인 베르나르 7세 다르마냐크는 그 전에 아르플뢰르를 탈환하기로 마음먹고 공세를 벌였다.프랑스와 제노바 함대는 항구를 봉쇄했고. 프랑스 지상군도 아르플뢰르에 주둔한 잉글랜드 수비대를 육상에서 압박했다. 아르플뢰르 수비를 맡고 있던 도싯 백작 토머스 보퍼트는 이에 맞서 1,000명 가량의 정예병을 선발한 뒤 식량과 물자를 확보하기 위한 원정을 벌이기로 했다. 1416년 3월 9일부터 작전을 개시한 잉글랜드군은 아르플뢰르 인근의 여러 마을을 약탈하고 불태우다가 카니바빌에서 방향을 돌려 아르플뢰르로의 귀환길에 올랐다. 프랑스군은 이들을 요격하려 했지만, 토머스 보퍼트는 3월 11일 발몽 전투에서 프랑스군을 격파하고 아르플뢰르로 철수했다.
프랑스 육군은 발몽 전투 이후 아르플뢰르 근처에 얼씬하지 못했지만, 해상 봉쇄는 여전히 이어졌다. 이에 헨리 5세는 7월 22일 함대를 모집해 이스트 서식스의 비치 헤드 곶에 집결시킨 뒤, 친동생인 베드퍼드 공작 존에게 지휘를 맡겼다. 존은 선박 300척과 병사 15,000명을 이끌고 순풍을 타고 이동해 8월 14일 저녁 센 강 어귀에 도착했다. 프랑스 함대 사령관 기욤 2세 드 나르본은 선박 38척을 보유하고 있었는데, 이 정도로는 정면 대결에서 상대가 안되리라 판단하고, 기습 공격하기로 마음먹었다.
1416년 8월 15일 새벽, 기욤 2세 드 나르본은 잉글랜드 해군이 정박하고 있던 셰프드코 해안을 기습했다. 잉글랜드 측은 처음에는 이 기습 공격에 깜짝 놀랐지만, 이내 모든 함선을 출격시켜 프랑스 해군을 포위했다. 기욤 2세는 부하들에게 끝까지 항전하라고 명령했고, 프랑스 석궁병들은 배를 넘어오려는 잉글랜드 장병들을 향해 석궁을 미친듯이 쐈다. 잉글랜드 측은 이에 맞서 장궁을 퍼부었다. 그렇게 7시간이나 이어진 전투 끝에 석궁이 떨어지자, 기욤 2세는 철수 명령을 내렸다. 하지만 미처 탈출하지 못한 제노바 선박들은 잉글랜드군에 붙들렸고, 그곳에 있던 장병과 선원들은 학살당했다.
온종일 이어진 해전에서, 프랑스 선박 3척이 나포되었고 대형 선박 한 척이 침몰되었다. 당대 기록에 따르면, 프랑스군의 손실은 1,500명에 달했지만 잉글랜드군은 100명도 채 되지 않았다고 한다. 물론 이 기록은 베드퍼드 공작의 공적을 치켜세우려는 잉글랜드인들에 의해 과장되었을 가능성이 높다. 베드퍼드 공작은 아르플뢰르 시에 재보급한 뒤 며칠 후 사우샘프턴으로 돌아갔다. 전투로 인해 약해진 프랑스군은 헨리 5세와 휴전 협상을 해야 했고, 헨리 5세는 몇달간 휴전을 맺기로 합의했다. 그 후 헨리 5세는 1417년 3월 대규모 병력을 사우샘프턴에 소집한 뒤 아르플뢰르에 상륙한 후 본격적으로 노르망디 정복 작업에 착수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