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흑태자의 슈보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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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2. 배경3. 경과4. 영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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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백년전쟁 시기인 1355년 10월 5일 ~ 12월 2일, 흑태자 에드워드가 남프랑스 일대에서 벌인 슈보시(Chevauchée: 약탈 행진).

2. 배경

1353년, 지난해에 전쟁을 재개했다가 긴 공방전 모롱 전투에서 연전연패하는 등 전세가 불리해진 프랑스 국왕 장 2세는 교황 클레멘스 6세가 사망하고 인노첸시오 6세가 즉위한 뒤 양국의 화해를 촉구하자 이를 명분으로 삼아 잉글랜드 국왕 에드워드 3세에게 종전 협상을 위한 휴전을 제안했다. 에드워드는 아직 전면전을 벌일 준비가 덜 됐으니 시간을 벌 요량으로 승낙했다.

장 2세는 아버지 필리프 6세가 에드워드 3세에게 선고한 반역죄를 사면하고 아키텐 공작위 몰수를 취소하며, 백년전쟁 이전에 프랑스가 몰수했던 영토를 돌려주겠다고 제안했다. 그러나 에드워드는 프랑스 왕위 주장을 그만두는 대가로 가스코뉴 지방의 주권을 달라고 요구했고, 장 2세는 이를 지나친 요구라고 여기고 협상을 중단했다. 이후 양국은 노르망디-칼레-가스코뉴 국경지대의 요새들을 습격하거나 상대편에 붙은 마을을 약탈하는 등 소모전을 벌였지만, 이렇다할 승패를 가리지 못했다.

그러던 1354년 1월 18일, 나바라 국왕이자 샹파뉴 백작인 카를로스 2세가 장 2세의 심복인 샤를 드 라 세르다를 살해했다. 이보다 앞서, 필리프 6세는 프랑스 국왕으로 즉위했을 때 카를로스 2세의 어머니인 호아나 2세가 프랑스 왕위 계승을 포기하는 대가로 앙굴렘을 넘기겠다고 약속했지만 죽을 때까지 넘기지 않았다. 카를로스는 이에 불만을 품고 있었고, 장 2세가 앙굴렘을 자신에게 넘기길 바랐다.

그런데 장 2세가 자신의 심복이자 카스티야 출신의 남작인 샤를 드 라 세르다에게 넘기자, 그는 이에 분노해 동생인 롱그빌 백작 필리프에게 샤를을 체포하라고 명령했다. 필리프가 이끄는 무리는 레글르(L'Aigle)의 한 여관에 투숙하고 있던 샤를 드 라 세르다를 습격했다. 그 과정에서 샤를의 수행원들이 대거 척살되었고, 샤를은 도주하다가 체포된 뒤 목숨을 구걸하다가 살육에 흥분한 필리프의 부하들에게 참수되었다. 카를로스는 동생 필리프가 샤를 드 라 세르다를 체포하지 않고 암살해버렸다는 소식을 듣고 일순간 당황했지만, 이내 자신이 살인을 주도했으며 샤를 드 라 세르다가 자신을 해치기 위해 음모를 꾸몄기에 정당방위로 행한 것이라고 주장했다.

그 후 카를로스 2세는 에드워드 3세, 흑태자 에드워드, 에드워드 3세의 왕비인 에노의 필리파, 랭커스터 공작 그로스몬트의 헨리에게 서신을 보내 자신을 도와달라고 요청했다. 이와 동시에, 프랑스의 주요 자치도시들, 파리 대학, 그리고 교황에게도 서신을 보내 자신이 '프랑스 왕국 공동체의 공익'을 위해 잉글랜드와의 종전 협상을 방해하는 간신 샤를 드 세르다를 살해했다고 밝혔다. 에드워드는 카를로스를 잘만 이용한다면 프랑스를 분열시킬 수 있겠다고 판단하고 그와의 협상을 진행했고, 교황 인노첸시오 6세는 프랑스와 잉글랜드를 중재해서 전쟁을 종식했다는 업적을 세우길 원했기에 장 2세에게 나바라 왕을 용서하라고 설득했다.

장 2세는 고심 끝에 내전을 피하기 위해 카를로스와 화해하기로 하고 1354년 2월 22일 카를로스와 망트 조약을 체결했다. 카를로스는 장 2세가 자신에게 주지 않았던 앙굴렘 등 여러 영토를 포기하는 대가로 보몽-르-로거 군, 브레퇴일 성, 콩체스 성, 퐁-오데메르 성, 체르부르 시, 코탕탱의 폐쇄, 노르망디의 카렌탕, 쿠탕스 및 발로그네 일대를 영지로 수여받았다. 또한 노르망디 공작의 모든 특권을 직함 없이 누릴 수 있었다. 이렇듯 많은 것을 얻어낸 대가로, 그는 왕에게 용서를 구하기 위해 파리로 가야만 했다. 장 2세의 둘째 아들인 앙주의 루이는 카를로스의 안전을 보장하기 위해 에브뢰에 인질로 보내졌고, 카를로스는 1354년 3월 4일 파리로 가서 삼부회 의원들이 지켜보는 가운데 왕에게 공개적으로 용서를 구해 허락을 얻어냈다. 이후 에드워드 3세가 보낸 동맹 제안을 거부하면서 그의 도움으로 폭력사태 없이 화해가 이루어져서 다행이라며 조롱하는 내용의 답신을 보냈다.

1354년 4월 6일, 장 2세와 에드워드 3세는 긴 비밀 협약을 맺었다. 이에 따르면, 에드워드는 프랑스 왕위 주장을 포기하고, 장 2세는 전쟁 이전의 가스코뉴 영토에 더해 푸아투, 리우쟁, 루아르 지방의 영토와 주권을 양도하기로 했다. 10월 1일 아비뇽에서 조약이 확정되는 동시에 교황이 그 내용을 발표하기로 했다. 그런데 그해 8월, 나바라 왕 카를로스의 심복이었던 아르쿠르 백작이 장 2세에게 용서를 구하면서 충격적인 고백을 했다. 그에 따르면 시종관이자 잉글랜드와의 종전 협상을 주도한 로베르 드 로리스를 포함해 장 왕의 측근 중 일부는 나바라 왕 카를로스의 첩자이며 추밀원 회의 내용을 그에게 비밀리에 누설했다고 한다.

장 2세는 이에 분노해 카를로스 형제를 죽이기로 작정하고 자신의 궁전에서 열린 저녁 식사에 초대했다. 하지만 카를로스 형제는 참석하러 가던 중 경고를 받지 급히 파리를 탈출해 암살 위기에서 벗어났다. 그 후 카를로스는 노르망디를 침공한 장 2세를 피해 교황청이 있는 아비뇽에 은거했고, 장 2세는 1355년 1월 아비뇽에 사절을 보내 긴 조약을 파기하겠다고 선언했다. 카를로스는 아비뇽에 잉글랜드 측 사절로 찾아왔던 랭커스터 공작 헨리에게 즉시 접근해 잉글랜드와 동맹을 맺겠다고 제안했고, 에드워드 3세는 이를 받아들였다.

1355년 7월, 에드워드 3세는 흑태자 에드워드에게 가스코뉴로 가서 그곳의 병력을 규합하라는 지시를 내렸다. 그러면서 본인은 노르망디로 가서 카를로스와 연합해 장 2세와 맞붙기로 했다. 그런데 막상 2,000명의 용병들을 이끌고 노르망디 세르부르에 상륙한 카를로스 2세는 장 2세에게 협상을 제안했고, 장 2세 역시 카를로스와 잉글랜드가 연합하는 사태를 피하고 싶었기에 받아들였다. 양자는 2개월간 협상한 끝에 9월 초 장 2세는 카를로스로부터 빼앗은 영지를 돌려주고 사면하고, 카를로스는 프랑스 왕국에 충성을 바치고 영국과의 관계를 끊는다는 합의가 맺어졌다.

카를로스에게 또다시 농락당했지만, 에드워드는 프랑스 침공을 진행하기로 했다. 노르망디 원정 계획을 취소하는 대신 카를로스가 고용했다가 해산한 용병들을 재고용해 브르타뉴 방면을 교란하게 하면서, 본인은 칼레에 상륙한 뒤 피카르디 일대에서 슈보시를 시도했다. 그러나 장 2세가 피카르디 일대의 모든 농민에게 사료, 음식, 잠재적인 전리품 등을 모조리 파괴하라는 명령을 내렸고, 이 때문에 아무것도 얻을 수 없자 잉글랜드군은 열흘 만에 칼레로 귀환했다. 하지만 장 2세와 프랑스군의 시선이 에드워드 3세에게 쏠린 사이, 가스코뉴로 간 흑태자 에드워드는 대대적인 슈보시에 착수했다.

3. 경과

흑태자 에드워드는 본래 1355년 7월에 가스코뉴로 항해할 예정이었지만, 수송 함대 모집이 늦어지고 날씨가 좋지 않는 등 각종 악재가 터지는 바람에 9월 9일에야 출발했다. 9월 20일 가스코뉴의 수도인 보르도에 2,000명의 장병과 함께 상륙한 그는 가스코뉴 귀족들을 소집해 병력을 5,000~6,000명으로 늘리고 상당한 보급품 및 수송 마차를 제공받았다. 1355년 10월 5일, 보르도를 출발한 그의 군대는 남쪽으로 48km 떨어진 생마께흐에서 보급품을 추가로 확보하고 바자스를 통과해 10월 12일 아르마냐크 국경에 도달했다. 그 과정에서 수십일간의 항해에 이어 일주일간 강행군하느라 지칠대로 지친 잉글랜드 말들이 대거 죽거나 부상을 입자, 현지의 말들로 교체했다.

프랑스 왕국의 영역인 아르마냐크에 들어서자 잉글랜드-가스코뉴 연합군은 대대적인 약탈에 착수했다. 그들은 약탈과 파괴를 극대화하기 위해 서로 평행하게 진군하는 3개의 종대로 나뉘었고, 11일 동안 아르마냐크 전역을 서쪽에서 동쪽으로 횡단하며 지나가는 곳마다 약탈과 파괴를 자행했다. 대부분의 마을은 명목상으로만 요새화되었기에 쉽게 습격당하고 파괴되었다. 아르마냐크 백작 장 1세는 야전에서는 그들을 당해낼 수 없다고 판단하고 프랑스의 무관장인 자크 1세 드 부르봉과 프랑스 원수 장 드 클레르몽의 지원을 받으며 툴루즈에 웅크렸다. 그러면서 툴루즈로 접근할 때 건너야 하는 가론 강과 아리에주 강의 다리를 절단했다. 그러나 잉글랜드-가스코뉴 연합군은 여울목을 통해 강을 건넜고, 그 과정에 말 몇 마리와 적은 수의 병사만 잃었다.

흑태자 에드워드는 툴루즈에서 농성하는 프랑스군을 내버려둔 채 툴루즈 동쪽의 곡창지대로 향했다. 동시대 역사가는 툴루즈 동쪽 지역을 "세계에서 가장 기름진 땅"이라고 묘사했다. 잉글랜드-가스코뉴 연합군은 이 풍요로운 곳을 계속해서 약탈하고 불태웠다. 강력한 요새를 제외한 모든 곳이 습격되었으며, 수많은 이들이 피살당하거나 생포되었다. 일부 잉글랜드군은 본군에서 최소 39km 떨어진 범위 내에 흩어져서 수많은 작은 마을들을 약탈하고 불태웠다. 잉글랜드군이 툴루즈에서 동쪽으로 80km 떨어진 카르카손에 이르렀을 때, 주민들은 인근 요새에 틀어박혀 농성했다. 이에 공성을 개시해 한나절 만에 함락시키고 사흘간 심각한 약탈과 파괴를 자행했다.

11월 8일, 잉글랜드군은 지중해에서 16km 떨어진 나르본에 도착했다. 그들은 인근 요새를 무시하고 마을을 빠르게 점령하고 약탈했다. 요새에 있던 프랑스군은 그들에게 포격을 가했지만 별다른 소용이 없었다. 이후 잉글랜드-가스코뉴 연합군은 나르본에서 사방으로 흩어져서 약탈을 자행했다. 교황 인노첸시오 6세는 에드워드에게 사절을 보내 프랑스와 휴전을 맺자고 제안했지만, 에드워드는 "우리 왕에게 가서 얘기해라"라고 답하고 돌려보냈다. 이렇듯 잉글랜드-가스코뉴 연합군의 약탈 행렬이 갈수록 심각한 파괴를 일삼자, 장 1세 다르마냐크, 자크 드 부르봉, 장 드 클레르몽은 군대의 일부를 나르본에서 서쪽으로 24km 떨어진 홈프스로 이동시켰다. 이 곳은 오데 강을 건너는 지점에 위치한 곳으로, 잉글랜드군이 가스코뉴로 돌아갈 때 오데 강을 무리하게 건너 이들과 싸우다가 막심한 손실을 입도록 강요하려 했다.

11월 10일, 15,000마리의 말에게 먹일 사료와 곡물이 부족해지자, 에드워드는 가스코뉴로 돌아가기로 했다. 잉글랜드군의 후위대와 낙오병들은 마을 민병대의 연이은 습격을 받았다. 에드워드는 적군 정예병이 주둔하고 있는 홈프스를 회피하고자 북동쪽의 베지에로 향했지만, 정찰병들이 그곳이 강력하게 방어되고 있다고 보고하자 전쟁 회의를 열어서 장군들의 의견을 들은 뒤 홈프스를 무력으로 뚫기로 결의하고 서쪽으로 방향을 틀었다. 그 과정에서 물이 부족해지면서 다들 갈증에 시달렸다. 한 연대기에 따르면, 말에게 먹일 물이 없어서 포도주를 줘야 했다고 한다. 잉글랜드군이 이러한 역경을 무릅쓰고 홈프스에 접근하자, 프랑스군은 막상 적과 대결했다가 막대한 피해를 입는 게 싫었는지 툴루즈로 후퇴했다. 에드워드는 그들을 카르카손까지 추격한 뒤 자신이 파괴해서 황량해진 진군로에서 고군분투하며 남쪽으로 계속 이동했다.

11월 15일, 잉글랜드군은 에드워드를 비롯한 수뇌부가 프루유에 있는 도미니코 수도회에서 평신도 형제로 추대되는 동안 4개의 큰 마을들을 파괴하고 주변 지역을 황폐화시켰다. 그러고 나서 동쪽으로 방향을 틀어 푸아 백작령을 가로지르러 했다. 11월 17일 푸아 백작 가스통 3세 페부스가 찾아와서 잉글랜드인들의 자유 통행을 허용하고 식량을 제공하며, 부하들을 에드워드의 군대에 배속시키는 대가로 약탈을 면제받았다. 푸아 백작령을 통과하는 내내 비가 내려서 행군에 차질이 벌어지자, 병사들은 화풀이로 가스통에 속하지 않는 수많은 마을들을 약탈하고 불태웠다. 한편, 자크 드 부르봉과 장 드 아르마냐크는 에드워드를 쫓아가야 하는지를 놓고 논쟁했다. 장 드 아르마냐크는 툴루즈에서 계속 버티고 싶었지만, 자크 드 부르봉은 적을 추격해서 행군을 차단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결국 장은 자크의 주장을 받아들였고, 두 사람은 잉글랜드군을 아르마냐크 동부에 있는 세바 강에서 차단해 적지에서 오도가도 못하게 만들려 했다.

11월 20일, 자크와 장이 파견한 선봉대가 잉글랜드-가스코뉴 연합군과 맞붙었다가 패퇴했다. 에드워드는 적과 회전을 벌이기 위해 11월 22일에 프랑스군 가까이에 진을 쳤지만, 자크와 장은 수적으로 우세한 상황에서도 회전을 피하기로 하고 밤중에 철수했다. 에드워드는 가스코뉴로 계속 행군하여 11월 28일 가스코뉴에 도착했다. 많은 가스코뉴인들이 각자의 고향으로 떠났고, 나머지는 행군을 이어가서 12월 2일 겨울 숙영지가 있는 라 로셸에 도착했다. 에드워드와 수행원들은 12월 9일 보르도로 이동해 작전을 마무리했다.

4. 영향

흑태자 에드워드의 슈보시는 잉글랜드 왕국에 막대한 전리품을 안겼다. 한 기록에 따르면, 잉글랜드인들은 가능한 많은 금과 보석을 휴대하기 위해 약탈했던 은을 버렸고, 전리품을 운반하기 위해 1,000대의 수레를 동원했다고 한다. 500개의 마을이 파괴되었으며, 그중 다수는 민심을 수습하려는 장 2세에 의해 세금 면제를 받았다. 현재 학계에서는 총 40만 에퀴(약 6만 파운드)에 달하는 조세 부담 능력을 가진 거주지와 시설이 파괴되었다고 추정한다. 여기에 약탈을 모면한 프랑스 남부 전역의 도시들은 요새를 건설하거나 수리하는 데 수년에 걸쳐 많은 돈을 지출했다. 또한 에드워드의 슈보시에 소극적으로 대응한 프랑스 군부에 대한 민심은 극도로 악화되었고, 장 2세는 친정을 단행해 잉글랜드군과 한 판 붙어서 쫓아내라는 압력에 시달렸다.

1356년 봄, 에드워드는 그의 성공에 열광한 본국 의회가 보낸 군대와 말, 그리고 식량 및 물자를 수령했다. 그 후 8월 초에 6,000명의 잉글랜드-가스코뉴 군대와 함께 또다시 슈보시를 단행했다. 이들은 북쪽으로 이동하여 루아르 강까지 이르렀다가 보급난이 심해지자 가스코뉴로 돌아가던 중 장 2세 휘하의 11,000명 규모의 프랑스 주력군의 추격을 받았다. 에드워드는 승산이 없다고 판단해 휴전을 제안했지만, 장 2세가 전투를 강행하기 위해 무리한 조건을 내걸자 전투를 벌이기로 마음먹었다. 이리하여 1356년 9월 19일, 양군은 푸아티에에서 맞붙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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