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ir.pe (일반/어두운 화면)
최근 수정 시각 : 2024-11-12 04:25:22

번트 캔들마스


백년전쟁의 전투
{{{#!folding [ 펼치기 · 접기 ] 제2차 스코틀랜드 독립 전쟁
킹혼 전투 더플린 무어 전투 아난 전투 할리돈 힐 전투 컬블린 전투
1335~1336년 에드워드 3세의 스코틀랜드 침공 던바 공방전 네빌스 크로스 전투 네스빗 무어 전투 베릭 공방전
번트 캔들마스
제1기
카잔트 전투 아르네뮤이덴 해전 영국 해협 전역 캉브레 공방전 슬로이스 해전
생오메르 전투 투르네 공방전 베르주라크 전투 오베르슈 전투 에기용 공방전
1차 캉 공방전 블랑슈타크 전투 크레시 전투 랭커스터 공작의 슈보시 1차 칼레 공방전
루나롱주 전투 칼레 전투 윈첼시 해전 생장당젤리 공방전 아르드르 전투
긴 공방전 흑태자의 슈보시 브레퇴유 공방전 푸아티에 전투 자크리의 난
샤르트르 공방전
브르타뉴 공작위 계승 전쟁
샹토소 전투 엔봉 공방전 반 공방전 브레스트 해전 모를레 전투
생폴드레옹 전투 라 로슈데리앙 전투 30인의 결투 모롱 전투 렌 공방전
오레 전투
제2기
브리네 전투 코르슈렐 전투 나헤라 전투 몬티엘 전투 리모주 공방전
퐁발랭 전투 라 로셸 해전 시세 전투 곤트의 존의 슈보시 와트 타일러의 난
루즈베케 전투 이프르 공방전 브레스트 공방전 마게이트 해전 오터번 전투
포르투갈 공위기
아톨레이로스 전투 리스본 공방전 알주바호타 전투 발베르데 전투
글린두르의 난
마이니드 헤드겐 전투 브린 글라스 전투 슈루즈버리 전투 스톨링 다운 전투 푸울 멜린 전투
제3기
아르플뢰르 공방전 아쟁쿠르 전투 발몽 전투 셰프드코 해전 2차 캉 공방전
루앙 공방전 보제 전투 모 공방전 크라방 전투 라 브로시니에르 전투
베르뇌유 전투 생잠 요새 공방전 몽타르지 공방전 오를레앙 공방전 루브레 전투
루아르 원정 파테 전투 랭스 행진 1차 파리 공방전 생피에르르무티에 공방전
콩피에뉴 공방전 안통 전투
제4기
푸앙세 공방전 라니쉬르마른 공방전 제르베로이 전투 생드니 공방전 2차 파리 공방전
2차 칼레 공방전 타르타 공방전 퐁투아즈 공방전 디에프 공방전 포미니 전투
잭 케이드의 난 블랑크포르 전투 카스티용 전투 }}}


1. 개요2. 상세

[clearfix]

1. 개요

1356년 1~2월, 에드워드 3세의 마지막 스코틀랜드 공세.

2. 상세

1355년 9월, 잉글랜드 국왕 에드워드 3세는 스코틀랜드와 9개월간 휴전 협약을 맺은 뒤 군대를 프랑스 전선으로 보낸 후 피카르디에서 약탈 행진을 단행했다. 그러나 그 사이에 프랑스로부터 40,000 에쿠스에 달하는 현금을 수령한 스코틀랜드군은 프랑스 인사들의 설득을 받아들여 휴전을 깨고 잉글랜드 북부의 노섬벌랜드를 침공해 약탈을 자행했으며, 1355년 11월부터 1356년 1월 6일까지 베릭 공방전을 벌였다. 나중에 이 사실을 알게 된 에드워드 3세는 잉글랜드로 급히 돌아간 뒤 12월 24일 뉴캐슬에 도착한 후 대규모 군대를 집결했다.

1356년 1월 6일, 에드워드 3세는 뉴캐슬에서 출진한 뒤 1월 13일에 베릭 구원에 성공했다. 1356년 1월 20일, 그동안 에드워드 3세에 의해 스코틀랜드 국왕으로 내세워진 후 20여년간 스코틀랜드 왕위를 쟁취하기 위해 투쟁했던 에드워드 발리올은 잉글랜드 왕실로부터 연금을 받는 대가로 스코틀랜드 국왕 칭호를 에드워드 3세에게 넘겨줬다. 1월 26일, 에드워드 3세는 대규모 병력을 이끌고 에딘버러로 출진했다. 병력 규모는 연대기에서는 알려지지 않았지만 "큰 호스트"로 묘사되었는데, 일부 학자들은 13,000명에 달했을 것으로 추정한다. 잉글랜드군은 3개의 부대로 나뉘어 행진하면서, 80~100km에 달하는 인근 지역을 파괴했다. 특히 그들은 휴전을 무시하고 베릭을 침공한 스코틀랜드 지도자 중 한 명인 마치 백작 패트릭 5세의 영지를 철저히 짓밟았다.

스코틀랜드인들은 잉글랜드군과의 대결을 거부하고, 주민들을 잉글랜드군이 오기 전에 대피시키고 영토를 파괴하는 청야전술을 구사했다. 이로 인해 스코틀랜드에 진입한 잉글랜드군은 식수 외에는 아무것도 얻지 못했다. 2월 초 에든버러에 도착한 에드워드 3세는 에든버러 대부분을 불태우고 동쪽 해딩턴에 숙영지를 세운 뒤, 잉글랜드 함대로부터 재보급을 받았다. 뒤이어 스털링을 거쳐 스코틀랜드의 수도 퍼스로 진군한 뒤, 스코틀랜드 군주들의 전통적인 대관식 장소인 스콘에서 스코틀랜드 국왕으로 즉위하려 했다.

스코틀랜드인들이 청야 전술을 구사했기에 현지에서 식량을 구할 길이 막막했기에, 에드워드 3세는 함대가 계속 따라오면서 보급하기를 희망했다. 북풍이 부는 바람에 함대가 움직일 수 없었고, 에드워드 3세는 해딩턴에서 열흘간 바람이 바뀌기를 기다렸다. 그동안 잉글랜드군이 주둔한 로디언 일대가 너무나 황폐해졌다. 이에 스코틀랜드인들은 잉글랜드인들의 침략을 "Burnt Candlemas"라고 불렀다. 이는 캔들마스로 알려진 의식에서 매년 2월 2일에 양초를 지역 교회로 가져가는 관습을 빗댄 것으로, 잉글랜드인들이 로디언 전역을 불태운 것을 풍자했다.

1356년 2월 중순에 바람이 바뀌었지만, 심한 강풍으로 인해 함대가 완전히 흩어졌고 배 여러 척이 침몰되었다. 이에 에드워드 3세는 계획을 포기하고 철수했다. 이때 잉글랜드군은 진군했던 길 대신 남서쪽으로 철수하면서 멜로즈까지 이어지는 주변 지역을 계속해서 불태우고 황폐화했다. 이에 윌리엄 더글러스가 군대를 이끌고 추격해 잉글랜드 약탈자 및 낙오자들을 습격해 큰 타격을 입혔고, 그 외에도 강추위와 식량 부족으로 인해 많은 잉글랜드인들이 목숨을 잃었다. 급기야 멜로즈 외곽에서 스코틀랜드군이 기습 공격을 감행했고, 에드워드 3세는 윌리엄의 부하들에게 거의 잡힐 뻔했다가 호위병들의 분전으로 가까스로 빠져나간 뒤 잉글랜드로 철수했다. 2월 말 칼라일에 도착한 에드워드 3세는 군대를 해산했다. 이후 스코틀랜드군은 공세를 재개했고, 캐러버록, 달스윈턴 성을 공략한 뒤 에드워드 발리올을 추종했던 갤로웨이를 복종시켰다.

1356년 4월 18일, 윌리엄 더글러스와 잉글랜드 장성 윌리엄 드 보훈의 합의하에 새로운 휴전 협정이 체결되었고, 1357년 10월 3일 베릭에서 최종 협정이 체결되었다. 이에 따르면, 1346년 네빌스 크로스 전투 이래 잉글랜드의 포로가 되었던 스코틀랜드 국왕 데이비드 2세는 스코틀랜드로 귀환했고, 잉글랜드 측은 몸값으로 67,000 파운드를 10년에 걸쳐 매년 6월 24일에 분할 납부하기로 했다. 또한 이 10년 동안 스코틀랜드 시민이 에드워드 3세나 그의 부하들에 대해 무기를 드는 것이 금지되었다. 이리하여 제2차 스코틀랜드 독립 전쟁은 종식되었다.

분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