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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수정 시각 : 2023-06-30 20:17:25

율리아 돔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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Julia Domna | 율리아 돔나
파일:율리아 돔나.jpg
<colbgcolor=#8B0000><colcolor=#FECD21> 로마 제국의 아우구스타
왕조 세베루스 왕조
(Severan dynasty)
전임 디디아 클라라
후임 풀비아 플라우틸라
신상 정보
Julia Domna
율리아 돔나
출생 160년
로마 제국 시리아 에메사(오늘날의 시리아 홈스)
사망 217년
로마 제국 시리아 안티오키아 (향년 57세)
배우자 셉티미우스 세베루스 (AD 187년–AD 211년)
자녀 카라칼라, 게타
아버지 율리우스 바시아누스
가문 시리아 에메사 왕가
형제자매 율리아 마이사

1. 소개2. 생애
2.1. 출신 가문과 결혼 전의 삶2.2. 황후2.3. 황태후2.4. 사망
3. 평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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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소개

로마 제국 세베루스 왕조 시대의 아우구스타, 로마 황제 셉티미우스 세베루스의 황후이며 철학자이자 종교가이다.

남편 셉티미우스 세베루스와 두 아들 카라칼라 게타 시대동안 가공할만한 권력과 지위를 행사한 아우구스타였다. 황후로서 끼친 영향은 정치적, 사회적, 철학적으로 상당히 유명했고, 그 영향력은 세베루스 왕조가 존속되는 내내 계속되었다. 따라서 혹자들은 그녀를 로마 제국 초대 아우구스타 리비아 드루실라에 비견할 권력과 지위를 누렸다고 하며, 그녀를 단순한 아우구스타를 넘어 시리아의 여왕으로 불렀다.

'시리아의 여왕', '시리아의 여제'라는 별명처럼, 시리아의 태양신 엘라가발루스를 숭배하는 오래된 시리아 향토 아랍계 지방왕가 에메사 가문 출신이다. 187년 북아프리카 출신의 이탈리아계 로마인 루키우스 셉티미우스 세베루스와 결혼했으며, 이 결혼에서 두 아들 카라칼라와 게타를 낳았다. 아들 카라칼라가 사돈 가이우스 풀비우스 플라우티아누스를 제거할 당시, 며느리 풀비아 플라우틸라 거취 문제를 이유로 한때 위기를 겪기도 했으나, 전반적으로 로마 내에서의 지위는 꾸준히 강력했다. 따라서 그녀는 로마 역사상 최초로 황태후라는 지위를 받은 아우구스타가 되었다.

2. 생애

2.1. 출신 가문과 결혼 전의 삶

서기 160년, 시리아 속주의 오래된 도시 에메사(오늘날의 시리아 홈스)에서 태양신 엘라가발루스를 숭배하는 사제 율리우스 바시아누스의 장녀로 태어났다. 율리아 돔나라는 이름 중 돔나라는 뜻은 엘라가발루스 신을 상징하는 검은 돌의 검은색을 뜻하는 고대 아랍어 Domna에서 가져온 이름이며, 엘라가발루스 신의 본질을 뜻하는 명칭이기도 하다. 즉, 이름 자체부터 세베루스 왕조와 연관있던 시리아 토착 태양신 엘라가발루스와 매우 밀접한 이름인 셈.

출신 집안 자체가 매우 오래된 고대 아랍 토착왕가였다. 따라서 가문의 재산은 율리아 돔나가 태어나기 전부터 엄청났으며, 집안은 원로원 의석을 소유한 원로원 귀족 반열에 오른 상태였다. 여기에 더해 율리아 돔나 역시 결혼하기 전인 처녀 적에 먼친척인 전직 백인대장 출신의 시리아 토착왕족 율리우스 아그리파로부터 막대한 재산을 상속받아 엄청난 부자였다.

남편 셉티미우스 세베루스와의 결혼 이야기는 로마와 그녀의 고향 에데사에서 아주 유명했다. 186년 셉티미우스 세베루스는 첫 아내를 잃은 뒤, 여러 점쟁이들에게 점을 봤는데 모든 예언들에서는 그에게 "시리아 여인과 결혼할 것이다"고 했다. 따라서 세베루스는 시리아에서 아내를 찾았는데, 이때 그는 율리아 돔나를 만났고 예언처럼 율리우스 바시아누스의 큰딸과 결혼했다고 한다. 그리고 예언처럼 자신보다 오래 생존한 두 아들도 얻었는데 그들이 바로 카라칼라와 게타 형제였다.

2.2. 황후

율리아 돔나는 역대 로마 아우구스타 중 이전 세대의 리비아 드루실라, 소 아그리피나, 폼페이아 플로티나, 대 파우스티나 소 파우스티나에 비견될 만한 아우구스타였다. 특히 그녀는 로마 역대 황후 중 황실 안팎에서 정치, 사회, 문화적으로 남편 못지 않은 지위를 누리면서 영향력을 행사한, 아우구스투스의 아내이자 티베리우스 대 드루수스의 어머니 리비아 드루실라와 비슷한 황후였다.

돔나는 리비아와 많이 비슷했는데, 먼저 그녀는 생전 리비아처럼 남편의 많은 권한을 대신 행사했고 황제 업무 중 일부를 분담하기도 했다. 하지만 그녀는 아우구스투스의 아내 리비아 드루실라와 달리 남편 세베루스의 모든 군사적 행동에 항상 동행해 막사에 지냈다. 따라서 바르바라 레빅은 율리아 돔나가 어떤 면에서는 리비아 드루실라보다 더 영향력이 컸을 수도 있다고 주장하고 있다. 그런데 레빅의 주장처럼 실제 율리아 돔나는 역대 로마 아우구스타 중 가장 개인 지위와 공식 영예가 많았고, 남긴 초상화와 각종 비문들이 여타 황제들과 비교해도 엄청 많다. 또 그녀는 리비아 드루실라도 가져가지 못한 개인 초상화로 된 로마 주화까지 여러 번 발행되는 영예까지 누렸다.

2.3. 황태후

남편 세베루스 사후, 두 아들이 공동황제가 되었는데 이때 그녀는 피아 펠릭스 아우구스타(Pia Felix Augusta)라는 거창한 칭호를 선사받았다. 이는 티베리우스 즉위로 살아생전 황태후가 된 리비아조차 부여받지 못한 새로운 칭호였고, 로마 최초의 황태후 존함을 받게 된 조치가 되었다. 하지만 이런 조치와 별개로 제 아무리 강력한 그녀라고해도 두 아들의 권력투쟁을 막아내지 못했다. 특히 그녀의 아들들은 우애가 너무 없고 서로를 원수로 생각할 정도로 사이가 나빠 돔나의 속을 크게 썩였다. 단지 그녀는 제국을 두동강 내려는 아들들에게 가족끼리 싸우지 말라는것과 "제국을 나누면 이 애미는 어떻게 나눠 가져가겠느냐"며 말리는 것 밖에 할 수 없었다.[1]

결국 아들들의 불화와 대립은 폭발하여 카라칼라가 게타를 죽이게 된다. 그것도 어머니인 돔나가 보는 앞에서 하고 만것이다. 돔나는 카라칼라가 게타를 죽일 당시, 자신의 방에서 둘째 아들이 첫째아들 손에 죽으면서 자신의 옷을 피로 물들이는 비극을 직접 경험하는 불행도 겪었고 이 사건에 큰 충격을 받는다. 다행인 건, 이런 비극에도 침착함과 냉정함 속에 큰아들을 지지해주고 카라칼라가 어머니에게 동생을 죽인것에 대해 사과하여 화해하고 카라칼라의 모든 원정길에 동행했다는 것이다. 하지만 그럼에도 돔나는 아들 카라칼라의 분노조절 장애와 잔혹한 행동을 완전히 제어하지 못했다.

2.4. 사망

217년, 아들 카라칼라와 함께 로마를 떠나 시리아 속주의 안티오키아로 함께 여행을 떠났다. 그런데 이때 돔나는 유방암을 앓고 있던 탓에 건강이 급속도로 나빠진 상태였다. 카라칼라도 이를 알기에 여행을 중단하려고 했지만 그녀가 내색하지 않고, 아들을 따라 나섰다고 한다. 그렇지만 카라칼라는 원정길 도중 그를 증오하는 부하 병사들의 손에 암살당했다. 이에 돔나는 큰 충격을 받았고 결국 자신의 완전치 않은 건강과 마지막 남은 아들의 암살로 인한 슬픔, 마크리누스 즉위 결정 이후 과거처럼 자신의 권력이 유지되지 못한다는 사실, 막대한 재산을 지키지 못하는 현실 등에 절망해, 217년 자살했다.

사후 율리아 돔나의 시신은 정중히 로마로 운구되었고, 여동생 율리아 마이사 엘라가발루스를 제위에 올려 세베루스 왕조를 존속시킨 이후 하드리아누스 영묘에 안장되었다. 이때 율리아 돔나의 유해는 아들 게타의 뼈와 함께 매장되었다고 한다.

3. 평가

여성의 사회적 지위가 낮았던 고대 로마 시대에 정국을 주도한 여걸로 평가받는 인물이다. 남편 세베루스 황제가 멀리 출정갔을 때 수도 로마에 남아서 행정을 대신 맡았고, 아들 카라칼라 황제가 대외 원정을 갈 때 역시 행정 업무를 주관했다. 또한 지성이 매우 우수하여 여러 철학자들과 두루 교류했으며, 집안의 막강한 영향력과 재력을 기반으로 남편과 아들을 잘 보필했다.

그러나 아들 카라칼라와 게타의 심각한 불화와 갈등을 제대로 중재하지 못해 결국 카라칼라가 동생을 살해하는 비극을 만들게 되었고 세베루스 왕조가 조기에 단절되는 계기가 된 점은 분명한 오점이다. 더욱이 재평가 이후, 율리아 돔나의 능력 역시 그 성과가 의도적 프로파간다 속에서 좋게 기술된 것이 교차검증되면서, 동생 율리아 마이사의 평이 올라가는 기류 속에서 율리아 돔나의 정치적 능력 역시 평균 정도에 불과했다는 평을 듣고 있다.

이런 재평가 이후의 평 그대로, 세베루스 황제는 처음엔 카라칼라만 카이사르(부황제)로 삼아 자신의 후계자는 오직 카라칼라 뿐임을 분명히 했다. 그러나 율리아 돔나는 남편을 간곡히 설득한 끝에 차남 게타가 몇년 후 카이사르에 선임되게 만들었고, 이 과정에서 장남과 차남의 갈등이 봉합되지 못하게 움직여 209년부터 황실 내 권력암투를 정적 간의 내전으로 확대시켰다.

사실 오나라의 이궁지쟁이 일어난 원인이 태자 손화와 노왕 손패를 똑같이 대우하고 격식을 같이 했기에 노왕 측이 태자에게 도전할 빌미를 제공한 데 있듯이, 게타를 카라칼라와 동등한 지위에 놓도록 조치한 건 세베루스와 율리아 부부의 치명적인 실책이었다. 그 결과 후계를 놓고 형제끼리 심각한 분란이 일어났고[2], 결국 그녀는 눈앞에서 사랑하는 차남이 장남에게 처참하게 살해되는 광경을 목도하고 말았다.

게다가 율리아 돔나는 아들의 폭정을 제지하지 못했고, 문예 후원과 토론회 개최에서 두각을 나타냈음에도 정작 아들 치세를 유지만 할 뿐 불만세력을 키운 결과를 낳았다. 이는 고대 기록상 좋게 기술된 내치에서도 비슷했다. 전문관료 활용과 원로원 중재 모두에서 불협화음을 만들고, 여러 편법, 월권 행위에서 왕조의 불안을 키웠다. 이는 아들이 많은 사람들의 증오를 받는 상황을 심화시키고, 213년 이후부터는 세베루스 왕조 아래의 초인플레이션을 심화시켰다. 더욱이 이 과정 속에서 율리아 돔나의 결정과 우유부단함은 수에트리우스, 마리우스 막시무스, 파울루스, 울피아누스 등이 등을 돌리거나, 카라칼라 몰락 직후 실각해 일시 추방되는 일련의 혼란을 야기했다. 따라서 아들 카라칼라가 병사들한테 암살된 뒤, 그녀가 벌인 반격은 원로원을 이끈 남편의 옛 친구들에게 큰 호응을 얻지 못했고, 이런 결과를 받아든 율리아 돔나는 비참함 속에서 스스로 목숨을 끊는 비극으로 이어지게 됐다.


[1] 율리아 돔나의 남편인 선황 셉티미우스 세베루스 역시 돔나처럼, 아들들로 인해 속을 썩였고 사춘기 이후 원수가 되어버린 두 아들의 대립을 겨우 중재하는 정도였지 막을 수 없던 상태였다. 따라서 셉티미우스 세베루스는 카라칼라와 게타를 공동집정관에 취임시킬 당시, 그들의 불화가 너무 심한 탓에 황제라는 지위를 이용해 겨우 명령으로 화해시켜야 했다. [2] 카라칼라 입장에서는 가뜩이나 사이가 나쁜 동생이 자신과 동등한 지위가 되었기에 계속해서 도전하게 되자 위협을 느끼게 되었고 동생을 더이상 가족이 아닌 적으로 보게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