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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수정 시각 : 2024-11-18 17:23:37

로만 폰 운게른슈테른베르크

<colbgcolor=#666633> 파일:러시아 국기.svg 제1차 세계 대전 당시 러시아 제국군의 장성급 장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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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lbgcolor=#666633> 로만 폰 운게른슈테른베르크[1]
Роман фон Унгерн-Штернберг
Roman von Ungern-Sternberg
파일:external/upload.wikimedia.org/Baron_ungern.ruem.jpg
[2]
<colcolor=#fff,#ffffff> 이름 Баро́н Рома́н Фёдорович фон У́нгерн-Ште́рнберг ( 러시아어)
로만 표도로비치 폰 운게른시테른베르크
본명 Robert Nikolaus Maximilian Freiherr von Ungern-Sternberg ( 독일어)
로베르트 니콜라우스 막시밀리안 폰 웅게른슈테른베르크
출생 1886년 1월 22일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 괴르츠
(現 이탈리아 프리울리베네치아줄리아 고리치아)
사망 1921년 9월 15일 (향년 35세)
러시아 SFSR 노보니콜라옙스크
(現 러시아 연방 노보시비르스크)
종교 루터회, 티베트 불교
작위 남작
재위 기간 1921년 2월 22일 ~ 1921년 8월

1. 개요2. 성씨와 가계3. 생애
3.1. 유년기3.2. 청년기3.3. 1차대전3.4. 러시아 내전3.5. 몽골의 지배자3.6. 몰락
4. 운게른 도시전설의 허와 실5. 운게른 군대에 의한 사망자 수
5.1. 학계 견해5.2. 운게른 왜곡과 티베트 비하·몽골 비하 성향의 관련성
6. 창작물에서 묘사되는 미친 남작

[clearfix]

1. 개요

1919년~ 1920년, 중국인들은 불법으로 몽골을 점령하고 복드 칸을 퇴위시키고 체포했다. 1921년 러시아의 군주주의자 R.F. 운게른슈테른베르크 남작이 그의 부대와 함께 몽골을 중국으로부터 해방시키고 복드 칸의 법적 권력을 되찾아줬다. 후자[복드 칸]는 티베트인, 몽골인, 부랴트인으로 구성된 운게른의 반혁명세력들에 의해 중국인들의 체포에서 해방되었다. 티베트인들은 Saji 라마가 이끌었다. 중국인에 대한 투쟁이 티베트에서 활발해졌다. 운게른과 복드 칸 정부는 달라이 라마와 소통했다. 운게른은 달라이 라마 13세로부터 편지와 몇가지 종교적인 물건을 받은 사절단을 받았다. 볼셰비키에게 패배한 운게른은 티베트로 이주하고 싶었으나 너무 늦었다. 그는 체포되어 reds[볼셰비키]에게 총살됐다.
Sergius L. Kuzmin, 『The Tibeto-Mongolian Civilization』, The Tibeto-Mongolian Civilization. The Tibet Journal, 37(3), 43쪽 요약
로만 표도로비치 폰 운게른슈테른베르크는 독일계 러시아인 장군으로서 20세기 초 러시아, 만주, 몽골의 내전에 참가했다. 혁명을 진압하고 군주제를 러시아와 다른 유럽 아시아 나라로 돌려주려 했던 이 사람은 정말 비범했다. 그는 이 목표에 도달하지 못했지만 몽골의 독립 국가는 그의 활동 없이는 불가능했다.
Kuzmin, S. L. (2013). How Bloody was the White Baron? Critical Comments on James Palmer’s The Bloody White Baron: The Extraordinary Story of the Russian Nobleman who Became the Last Khan of Mongolia (Faber & Faber 2008. 274pp. ISBN 0-571-23023-7). Inner Asia, 15(1), 177~178 요약

20세기 외몽골을 통치했던, 몽골 역사를 통틀어 유일한 러시아인 통치자이다. 미친 남작(Mad baron)이란 별명으로도 잘 알려져 있다. 한족 중심 중국( 청나라의 중국과 성격이 다른)의 몽골흡수 저지에 결정적인 역할을 한 인물 중 하나이다.

2. 성씨와 가계

성씨 독일어로 폰 웅게른슈테른베르크(von Ungern-Sternberg), 러시아어로는 폰 운게른시테른베르크(фон У́нгерн-Ште́рнберг / fon Ungern-Shternberg)로 표기한다.

한국에서는 그의 이름이 '운게른 폰 슈테른베르크'라고 잘못 알려져 있는 경우가 많다. 다만 몽골어 위키백과에는 공식적으로 '웅게른 폰 슈테른베르크 남작(Барон Унгерн фон Штернберг)'이라는 표제어로 등재되어 있기는 하다. 러시아어 표기법을 따른 성씨는 '폰 운게른시테른베르크'이고, 이름이 '로만 (표도로비치)'이다. 족보가 매우 복잡한 편인데, 출생지는 오스트리아 그라츠, 국적은 러시아 제국, 가계는 독일계 러시아인이다.[3] 더 정확하게는 지금의 발트 3국 지역에 거주하고 있던 발트 독일인이다. 헝가리인 혈통도 섞여 있었다고 한다. '웅게른(러시아어 표기법상으로는 운게른)'이라는 단어 자체가 스웨덴어 헝가리를 뜻한다. 이를 근거로 본인 스스로 칭기즈 칸의 손자인 바투 칸의 후손이라 주장한 적이 있다.[4]

본래 웅게른슈테른베르크 가문은 독일, 러시아뿐 아니라 스웨덴 핀란드, 에스토니아 발트해 주변을 무대로 삼던 귀족 가문인데, 가문 자체는 지금도 존재한다. 독일어 위키백과 문서에 해당 가문에 대한 자세한 설명이 있으니 이쪽을 참조하면 좋다. 그의 가계에서 나온 또 다른 유명인으로는 7년 전쟁 스웨덴군 장군인 마티아스 알렉산다르 폰 운게른슈테른베르크가 있다.

3. 생애

3.1. 유년기

파일:운게른슈테른베르크 유년기.jpg
유년기의 로만 폰 운게른슈테른베르크
상술했듯 로만 폰 운게른슈테른베르크는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 괴르츠(현 이탈리아 고리치아)에서 태어났다. 운게른슈테른베르크가는 발트 독일인 귀족 가문이었고, 1888년 로만 가족은 가문의 본거지인 에스토니아 레발로 이주했다. 당시 에스토니아는 러시아 제국 땅이었고, 운게른슈테른베르크 일가도 자신들을 러시아 제국 신민으로 여겼다.

1891년 부모가 이혼했고 로만은 모친을 따라갔다. 모친은 호이닝겐호이네 남작가의 귀족과 재혼했고 로만은 레발 시내에서 40여 마일 떨어진 숲속의 호이닝겐호이네 저택에서 자라며 여름에는 발트해 히우마 섬의 별장에서 지냈다. 히우마섬은 200년 넘게 호이닝겐호이네가의 영지였다. 운게른슈테른베르크는 자신의 귀족 혈통에 엄청난 자부심을 갖고 있었다.

로만은 흉악한 불량소년이었다. 다른 불량배들도 그를 두려워해 건드리지 않았고, 부모들은 자기 자식이 그들과 어울리지 못하게 했다. 그는 열두 살 때부터 동물을 고문하기를 즐겼고, 사촌의 애완 올빼미를 아무 이유없이 교살하기도 했다. 로만은 1900년 김나지움에 입학했으나 거기서도 비행을 저질렀다. 결국 교장이 계부와 모친에게 제발 학교를 그만둬 달라고 사정을 해서 권고자퇴를 한다. 그래서 학교를 때려친 로만은 군에 입대해서 러일전쟁에 종군하려 했다. 하지만 그를 태운 수송열차가 극동에 도착하기도 전에 전쟁이 끝나서 제대로 종군하지는 않았다.

1905년 에스토니아인 농민들도 독일계 귀족 상전들에게 민란을 일으켰다. 가혹한 통치로 원한이 많이 쌓였던 농민들은 귀족들을 린치하고 그들의 대저택에 불을 질렀다. 운게른슈테른베르크의 어린 시절 추억이 깃든 호이닝겐호이네 저택도 잿더미가 되었다. 이것은 운게른슈테른베르크에게 심각한 정신적 충격을 주었다. 그는 어째서 감히 무지렁이 농민들이 이 따위 짓을 할 수 있는지 진심으로 이해하지 못했고, 평민들이란 그저 모든 것을 파괴하려는 증오에 사로잡힌 존재들이라 상종할 수 없다는 선민사상에 지배된 사고방식을 굳혔다. 그리고 이 가치관은 평생 그를 지배했다.

3.2. 청년기

1906년 운게른슈테른베르크는 육군사관생도로 입학했다. 장교로 임관한 운게른슈테른베르크는 동시베리아에 배치되었고 여기서 몽골인, 부랴트인 등 유목민들과 어울리며 그들의 생활방식에 심취했다. 운게른슈테른베르크는 기승 실력이 뛰어난 기병으로서 유목민들 사이에 좋은 평판을 얻었다.

그것과 별개로 어린 시절부터 비롯된 고약한 성질머리는 여전했고, 결투를 일삼다 얼굴에 큰 흉터가 생겼다. 이때 뇌손상이 생겼다는 속설이 있는데 연구 결과 그런 증거는 없다고 한다.

1913년, 운게른슈테른베르크는 몽골인들이 중국으로부터 독립하는 것을 돕겠답시고 자원해서 예비역으로 전역했다. 하지만 러시아 관리들은 이런 미친 소리를 용납하지 않았고, 대신 운게른슈테른베르크는 몽골의 러시아 영사관에 주재무관으로 배치되었다.

3.3. 1차대전

1914년 7월, 운게른슈테른베르크는 오스트리아 국경의 제34카자크연대에 배치되며 현역에 복귀했다. 그는 제1차 세계 대전 동부전선의 시작이었던 동프로이센 침공작전에 종군했다. 동부전선에서 운게른슈테른베르크는 매우 용맹한, 하지만 지나치게 용맹해서 무모한 장교라는 평판을 얻었다. 그는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았으며, 기병대 돌격 같은 목숨을 내놓는 행위를 할 때 희열을 느꼈다. 그래서 성 게오르기 4등장, 성 블라디미르 4등장, 성 안나 3-4등장, 성 스타니슬라프 3등장 등 많은 훈장을 받았다. 그러나 이렇게 공을 세우고도 개떡 같은 성질머리를 못 버려 1916년 만취한 채 다른 장교를 두들겨 패서 영창 2개월에 처해졌다.

1917년 1월 석방된 운게른슈테른베르크는 오스만 제국과의 전선인 캅카스로 이동했다. 그런데 2월 혁명이 일어나 로마노프 왕조가 몰락했다. 이것은 정신적 중세인이자 골수 왕권신수론자인 운게른슈테른베르크에게 종말론적 사건이었다. 그는 혁명을 러시아의 천명이 다했다는 징조로 받아들였다.

한편 캅카스에서 운게른슈테른베르크는 평생의 단짝 그리고리 세묘노프를 처음 만났다. 세묘노프는 부친으로부터 부랴트인 혈통을 물려받은 소수민족 출신으로, 이 때문에 운게른슈테른베르크 처럼 장교들 사이에서 겉돌던 인물이었다. 당시 오스만 제국은 소수민족들을 인종청소해서 수천 명의 소수민족들이 러시아로 도망치고 있었는데, 운게른슈테른베르크와 세묘노프는 상부에 이 난민들을 부대로 조직하겠다는 제안을 했다. 혁명 때문에 사기가 떨어진 러시아군에 모범으로 삼기 위함이었다. 운게른슈테른베르크의 지휘하에 아시리아인 부대는 소소한 승리를 거두었지만 전체 전황에 보탬은 되지 못했다. 세묘노프는 아시리아인들로 했던 경험을 시베리아의 부랴트인을 대상으로 시도해 보자는 발상을 떠올렸고, 알렉산드르 케렌스키 정부는 그 계획을 승인했다. 운게른슈테른베르크와 세묘노프는 부랴트인 연대를 모집하러 동쪽으로 떠났다.

3.4. 러시아 내전

10월 혁명이 일어나자 세묘노프와 운게른슈테른베르크는 로마노프가 복위를 위한 봉기를 일으켰다. 그들은 1917년 말 중러국경의 동청철도를 거점으로 삼았다.

그리고리 세묘노프와 운게른슈테른베르크는 열렬한 반공주의자였고, 백군에 참여한 다른 군벌들도 마찬가지였다. 하지만 이 둘은 백군 내부에서도 기괴한 이질분자였다. 상술했듯 이미 시대가 시대이기에 귀족들 역시 시대적 변화에 적응하려 노력하고 있었다. 예컨대 러시아국의 수장인 알렉산드르 콜차크는 백군이 승리하면 볼셰비키의 쿠데타로 해산당한 두마(의회)를 다시 열고 두마에서 제정복고 여부를 결정하자고 주장했다. 하지만 뼛속 깊이 왕권신수론자인 운게른슈테른베르크는 이런 주장을 받아들일 수 없었다. 한편 세묘노프는 유목민들을 규합해 칭기즈 칸의 제국을 부활시키겠다는 또라이였다. 세묘노프는 그 목적을 이루기 위해 일본 제국과 결탁했는데, 콜차크와 안톤 데니킨은 이것을 외환죄라고 규정했다.

아무튼 운게른슈테른베르크는 1905년 이전으로 러시아를 되돌려야 한다는 확신에 차 있었다. 볼셰비키가 쿠데타를 일으킨 1918년이 아니라, 입헌군주제가 도입되었던 1905년이다. 이참에 입헌 따위 개소리 집어치우고 전제군주정을 다시 세워야 한다는 것이 아직 중세시대에 머물던 운게른슈테른베르크의 사고방식이었다.

다우리아 일대에서 운게른슈테른베르크가 군사적 성공을 거두자 세묘노프는 지멋대로 운게른슈테른베르크에게 소장 계급을 주었다. 운게른슈테른베르크는 다우리아에서 "아시아 기마사단"이라는 의용사단을 편성했다. 이 부대는 러시아인, 부랴트인, 타타르인, 바시키르인, 몽골인, 중국인, 만주인, 폴란드인 등까지 포함된 잡탕 부대였다. 러시아어로 아시아(Азиатская)라는 말에 "야만"이라는 뜻도 있기 때문에 영어권 문헌에서는 이 사단명을 "야만사단"이라고 오역하는 경우가 많다. 운게른슈테른베르크의 부대는 다른 백군 군벌들이 그렇듯 약탈로 보급을 충당했다. 다우리아와 만주를 지나는 모든 열차를 세워서 약탈했다. 하지만 콜차크에게 보내지는 보급품은 건드리지 못했다.

1919년, 러시아가 내전으로 난장판이 된 틈을 타 안휘군벌 쉬수정 외몽골을 강점했다. 이것은 외몽골의 자치를 보장하고 영사관 수비병력을 제외한 중국군의 외몽골 주둔을 금지한다는 1915년 캬흐타 협정의 정면 위반이었다. 그러다 1920년 안직전쟁으로 몽골에 주둔한 주력병력이 베이징으로 소환되었다가 소멸했으며 안휘파는 실각했고, 몽골에 잔류한 안휘파 병사들은 그냥 버려졌다.

이런 상황에서 운게른슈테른베르크가 만몽 지역으로 왔다. 그는 세묘노프와 연락을 유지하면서 장쭤린을 알현했고, 하얼빈에서 만주 귀족 지씨와 정교회식 결혼식을 올렸다. 운게른슈테른베르크가 스스로 부처의 환생임을 주장했다는 속설이 퍼져 있지만 전혀 사실이 아니다. 운게른슈테른베르크가 이때쯤 불교 신자가 된 것은 사실이나, 그럼에도 루터교 신앙을 완전히 버리지도 않았던 것으로 보인다.

3.5. 몽골의 지배자

콜차크가 패배하고, 시베리아의 일본군도 철수하기로 하면서 그리고리 세묘노프는 적군을 피해 만주로 후퇴하려 했다. 하지만 운게른슈테른베르크는 이것이 기회라고 생각하여 1920년 8월 7일 세묘노프와 결별했다.[5] 그리고 사단을 이끌고 외몽골의 수도 우르가(현 울란바토르)로 향했다. 운게른슈테른베르크는 도시를 점령한 중국군에게 무장해제를 요구했으나 거부되었다. 10월 26일에서 11월 4일간 운게른슈테른베르크는 우르가를 공격했지만 큰 피해를 입고 패퇴했다. 운게른슈테른베르크는 외몽골 동부 케룰렌 강 상류로 후퇴했다. 중국으로부터 독립하고 싶어한 몽골인들은 운게른슈테른베르크에게 협조했고, 특히 복드 칸은 밀서를 보내 직접적으로 도움을 청했다.

해가 바뀌어 1921년 1월 31일, 운게른슈테른베르크의 부대는 우르가를 향해 움직이기 시작했다. 운게른슈테른베르크의 아시아 기마사단 병력은 1,460명. 우르가에 주둔한 중국군은 7,000여 명이었다. 전투가 진행되는 와중 다민족 혼성부대가 유폐된 복드 칸을 구출했다. 2월 4일 마침내 운게른슈테른베르크는 우르가를 함락시켰다. 중국 측 장교들과 공무원들은 이미 2월 3일 부하들을 버리고 도망갔다. 한편 적군 지지 성향 러시아인들도 중국군을 따라 도망갔다. 이 전투에서 중국군은 1,500여 명, 운게른슈테른베르크군은 60여 명 사망했다.

전투 이후 운게른슈테른베르크 부대는 중국인 상점을 약탈하고 유대인들을 학살했다. 약탈이 끝난 뒤 레오니트 시파일로(Леонид Сипайло, Leonid Sipailo) 대령이 비밀경찰을 조직해 '빨갱이'들을 수색해 죽였다. 그 뒤 다른 지역의 중국군들은 운게른슈테른베르크가 공격해 오자 싸우지도 않고 도망가 버렸다.

1921년 2월 21일, 운게른슈테른베르크와 몽골 귀족들은 복드 칸을 우르가로 모셔왔다. 중국군을 몰아내준 보답으로 복드 칸은 운게른슈테른베르크에게 "다르칸 호쇼이 친왕" 작위를 수여했다. 한편 세묘노프는 우르가 점령의 공을 사 운게른슈테른베르크의 계급을 중장으로 높여 주었다.

1921년 2월 22일, 복드 칸과 운게른슈테른베르크는 외몽골이 독립 군주국임을 선언했다. 폴란드 모험가이자 작가인 페르디난트 안토니 오센도프스키에 따르면, 운게른은 우르가에서 질서를 확립하고 거리 청소와 위생과 수도에서의 종교적 생활과 관용을 장려하며 경제 개혁을 시도한 최초의 인물이었다. 이 신생 국가에서 모든 결정권은 기본적으로 복드 칸에게 있었기 때문에, 운게른슈테른베르크는 몽골의 내정에 거의 간섭하지 않았고 몽골인들에 관한 복드 칸의 주권을 존중하며 조력자로 남았다. 반면 러시아인들은 빨갱이를 색출한다며 가혹하게 대했다. 운게른슈테른베르크에게는 러시아인 빨갱이들보다 몽골인 왕공족들이 더 동족에 가깝게 느껴졌던 것이다. 러시아 내전기에 운게른슈테른베르크의 명령으로 인해 러시아와 몽골에서 살해된 사람은 총 846명이었다. 이 중 한국 독립운동가 이태준도 있다. 당시 이태준은 개신교 선교 활동과 의열단에 가입하고 상하이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자금 조달 등의 독립운동 중이었다.

3.6. 몰락

1921년, 러시아 사회주의 연방 소비에트 공화국 극동 공화국의 적군들이 유일하게 남아 있는 백군 군벌 운게른슈테른베르크를 토벌하기 위해 몽골 침공을 시작했다. 그 중 담딘 수흐바타르의 몽골인 적군도 있었다. 운게른슈테른베르크는 적군을 시베리아에서 영격하고 시베리아에서 반공 반란군을 일으키기 위해 원정대를 조직했다. 전쟁의 대세가 이미 기울어 적군이 병력수와 장비의 양면에서 운게른슈테른베르크를 압도하고 있었지만, 운게른슈테른베르크는 자신이 몽골의 해방자로서 현지인들에게 지지를 받고 있다고 믿고 딱히 대책을 세우지 않았다. 하지만 이미 볼셰비키 정부는 산발적인 봉기가 일어나는 우랄이나 중앙아시아 지역, 브레스트 조약으로 독립한 지역, 시베리아 동부 지역을 제외하면 1차 대전 이후 남겨진 제정러시아군의 대부분의 물적, 인적 자원을 흡수 및 통제하고 있었다.

6월 11일 운게른슈테른베르크는 트로이츠코삽스크(오늘날의 캬흐타)에서 장갑차, 비행기를 동원한 압도적인 수의 적군에게 패퇴했다. 적군은 1921년 7월 6일 운게른이 원정대를 이끌고 나가 버리는 바람에 텅 빈 우르가를 싱겁게 점령했다. 하지만 적군은 수도만 점령했을 뿐 아직 운게른슈테른베르크의 병력을 전멸시킨 것은 아니었다. 운게른슈테른베르크는 뒤늦게 심상찮은 분위기를 느끼고 세묘노프와 일본이 자신을 도우러 올 것이니 합류하라고 현지인들에게 거짓말을 하고 다녔다. 7월 18일, 운게른슈테른베르크군은 우르가 탈환을 시도하지 않고 무작정 북쪽으로 진군하여 몽러 국경을 넘었다. 파멸이 목전에 닥치자 무계획적 자살행위를 저지른 것이다.

운게른슈테른베르크는 탄누 투바를 거쳐 티베트 쪽으로 가 티베트를 재기의 발판으로 삼겠다고 했다. 하지만 병사들은 동쪽으로 후퇴해서 만주와 연해주의 백계 난민들과 합류하고 싶어했는데, 갑자기 서쪽으로 가자고 하니 분노가 폭발했다. 8월 16일, 반란이 일어나 운게른슈테른베르크군의 2인자 보리스 레주힌(Борис Резухин)이 살해당했다. 운게른슈테른베르크는 부상만 입고 홀몸으로 도망가다가 8월 20일 소비에트 적군 표트르 셰틴킨(Пётр Щетинкин)의 유격대에 포로로 잡혔다. 9월 15일, 노보니콜라옙스크에서 아무 의미도 없는 재판이 6시간 진행된 끝에 운게른슈테른베르크에게는 사형이 선고되었다. 형은 그날 밤 즉시 집행되었다. 운게른슈테른베르크가 죽었다는 소식을 들은 복드 칸은 몽골 전역의 사찰들에 추모제사를 지내라는 명을 내렸다.

4. 운게른 도시전설의 허와 실

“나의 이름은 지독한 증오와 공포에 둘러싸여 그중 무엇이 진실이고 무엇이 거짓인지, 무엇이 역사이고 무엇이 신화인지 그 누구도 분간하지 못하리라.”

"My name is surrounded with such hate and fear that no one can judge what is the truth and what is false, what is history and what myth."

로만 폰 운게른슈테른베르크 남작, 1921년 폴란드인 탐험가 페르디난트 안토니 오센도프스키에게[6]
운게른슈테른베르크가 폴란드인 탐험가에게 했다고 전해지는 이 말은 예언처럼 들어맞았다. 운게른이라는 이름은 온갖 도시전설에 휩싸여 있지만 그 중 어디까지가 진실인지는 불분명하다.

파일:1492255148924.png
그의 잔인함에 대한 도시전설들이 많이 퍼져 있는데, 공산주의 치하 몽골에서 이러한 도시전설들과 악명에 기반해 운게른을 상당히 부정적으로 표현하는 경우가 많았기 때문에 위와 같은 도시전설들의 대부분이 공산 정권의 산물이라 주장하는 몽골인들도 존재하며, 탈공산화 이후 적지만 그를 재평가하는 사람들도 나타나고 있다 #.

이는 그 인물이 괴팍할지언정 그가 몽골에서 중국계 세력을 몰아내고 몽골 불교와 그 지도자인 잡증담바 호특트를 깊이 따르는 등 일단 겉으로나마 몽골인들을 존중하는 모습을 보여주었으며, 그를 몰아내고 집권한 허를러깅 처이발상 등의 공산 정권이 오히려 그보다도 잔혹한 독재를 펼치며 종교를 탄압한 데다, 운게른의 경우 그 집권 기간이 고작 반 년 뿐인 탓도 있는 것으로 보인다.

5. 운게른 군대에 의한 사망자 수

5.1. 학계 견해

러시아 내전 기간이라는 시간러시아 지역이라는 공간까지 포함하면 운게른 집단에게 희생된 숫자는 846명. 이것도 증거가 명백한 것에만 한정한 축소 숫자가 아니라 정황상 운게른으로 추정되는 숫자까지 포함한 숫자이다.

몽골 후레에서 운게른 군대에게 죽은 사람의 규모는 100~120 명이다. 이 숫자중 대부분은 유대인과 러시아인이다. 유대인과 러시아인이 아닌 사람 중 죽은 사람은 소수인데 이 소수에 들어가있는 게 중국인이다. 즉 살해된 100여명중 몽골인 비중은 극소수다.(Кузьмин С.Л. 2011. История барона Унгерна_ опыт реконструкции. М._КМК 406~418 #)

운게른에 대해 부정적인 한국측 논문도 이와 일치한다. 운게른에 대해 긍정적인 학계연구가 서구진영과 러시아에 있다. 예를 들면 JameS Boyd, 2010, 「‘A Very Quiet, Outspoken, Pleasant Gentleman ’:The United States Military Attaché’s Reports on Baron von Ungern- Sternberg, March 1921」, Inner Asia 12 (2010): 365–77; Willard Sunderland, 2014, 『The Baron's Cloak: A History of the Russian Empire in War and Revolution』, Cornell University Press. 그런데 오미영 박사는 해당 연구는 인용하지 않고 있는데―다시 말해 해당 연구에 영향받지 않았다.―그런데 사망자 숫자를 다음과 같이 설명하고 있다.
운게른에 의해 세워진 자치정부는 몽골에서 중국군을 완전히 몰아내고 개혁조치를 실시하여 1921년 인민정부 수립에 기초를 마련하였다는 점에서 긍정적 평가를 지닌다. 그러나 운게른의 활약들은 몽골인을 위하기보다는 운게른 자신의 정치적 입지를 강화하기 위한 것으로 이후 자치정부 내에서 자신의 영향력을 강화하기 위해 공포의 살육을 자행했다. 당시 운게른 백군에 의해 도륙된 사람이 약 100여 명에 이르렀다고 한다.운게른 백군은 상인, 사업가, 승려, 의사 등 내국인 외에도 후레에 거주한 외국인에게도 강도짓과 살육을 자행했다. (단국대학교 몽골학과 박사학위논문: 오미영, 『20세기 초 한·몽 교류 연구 : 몽골행(行) 한인들의 활동을 중심으로』, 97쪽)
운게른에 대한 긍정적인 학자와 부정적인 학자의 사망자 견해가 일치한다. 실제 운게른 군대에 의한 사망자는 약 100명이다.

그리고 운게른에 오직 부정적인 한국독립운동 분야 연구에서도 몽골인 살해 여부 언급이 전혀 없다. 반병률 교수의 이태준 관련 논문에선 운게른을 매우 부정적으로 평가하나 그 논문에선 운게른의 학살은 유대인 학살만 언급하며 몽골인 학살 언급이 전혀 없으며 오히려 중국 군인들이 러시아인과 몽골인을 학살한 사례를 언급한다.(반병률, 「이태준: 항일민족운동과 몽골」, 『여명기 민족운동의 순교자들』, 서울 : 신서원, 2013, 324~339). 중국인의 몽골인과 러시아인 학살 여부는 당시 언론에서도 언급된 것으로 이에 대해 다룬 영어권 논문이 존재한다. (JameS Boyd, 2010, 「‘A Very Quiet, Outspoken, Pleasant Gentleman’:The United States Military Attaché’s Reports on Baron von Ungern- Sternberg, March 1921」, Inner Asia 12 (2010): 365–77)

5.2. 운게른 왜곡과 티베트 비하·몽골 비하 성향의 관련성

사실 운게른 학살에 대한 과장된 내용의 실체를 보면 신뢰성이 떨어지는 내용이다. 운게른은 티베트 불교와 관련되어있어서 왜곡이 그것과 연결되어있다.
'티베트 불교의 역사는 부패하고 비잔틴적',
'종교예술은 때때로 노골적인 포르노'
'홀로코스트는 몽골 의식에 필수불가결한 것'
'(20세기 초에) 스와스티카(만자문)가 반유대주의의 상징으로 인식'
'운게른이 스와스티카(만자문)를 불교뿐 아니라 반유대주의 모티브로 사용'
운게른과 연관된 티베트 불교 소문 요약 (SERGIUS L. KUZMIN, 2013, 『How Bloody was the White Baron? Critical Comments on James Palmer’s The Bloody White Baron: The Extraordinary Story of the Russian Nobleman who Became the Last Khan of Mongolia (Faber & Faber 2008. 274pp. ISBN 0-571-23023-7)』, Inner Asia Volume 15: Issue 1, 183~184)
등등 운게른에 대한 과장된 내용은 티베트 불교에 대한 모함과 섞여있다.

한국에 퍼진 내용도 불교와 연관된 내용이다. 그 내용은
그는 버스노선에서 매일 '오늘의 환생역'이란것을 지정했는데, 누구든 그 정차역에서 내리는 사람들은 집중사격을 받아야 했다 #
처럼 불교와 연관된 내용인데 저 불교관련 내용의 출처를 알 수가 없다.

이 모함의 대표적인건 티베트를 나치와 엮는 서술이다. 운게른 군대의 중요세력 중 하나가 티베트인이다. 복드 칸은 티베트인, 몽골인, 부랴트인으로 구성된 운게른의 반혁명세력들에 의해 중국의 억압에서 해방되었다. 운게른과 복드 칸 측은 달라이 라마 13세와 소통했으며 운게른은 달라이 라마 13세에게 편지와 종교적인 물건을 사절단을 통해 받았다. 볼셰비키에게 체포되기 전에 운게른이 이주하려 했던 곳도 티베트이다.
1919년~1920년, 중국인들은 불법으로 몽골을 점령하고 복드 칸을 퇴위시키고 체포했다. 1921년 러시아 군주주의자 R.F. 운게른스테른베르그 남작이 그의 부대와 함께 몽골을 중국으로부터 해방시키고 복드 칸의 법적 권력을 되찾아줬다. 후자[복드 칸]는 티베트인, 몽골인, 부랴트인으로 구성된 운게른의 반혁명세력들에 의해 중국인들의 체포에서 해방되었다. 티베트인들은 Saji 라마가 이끌었다. 중국인에 대한 투쟁이 티베트에서 활성화되었다. 운게른과 복드 칸 정부는 달라이 라마와 소통했다. 운게른은 달라이 라마 13세로부터 편지와 몇가지 종교적인 물건을 받은 사절단을 받았다. 볼셰비키에게 패배한 운게른은 티베트로 이주하고 싶었으나 너무 늦었다. 그는 체포되어 reds[볼셰비키]에게 총살됐다. (Sergius L. Kuzmin, 『The Tibeto-Mongolian Civilization』, The Tibeto-Mongolian Civilization. The Tibet Journal, 37(3), 43쪽)
운게른의 군대는 티베트와 관련됐으며 그 때문인지 티베트와 나치를 엮으려는 모함적인 시도가 한국 밖에서 실존한 적이 있다. 티베트가 나치와 동맹을 맺은 것도 아닌데 말이다. 이런 모함은 운게른에 대한 왜곡 서적에서 같이 등장한다. (SERGIUS L. KUZMIN, 2013, 『How Bloody was the White Baron? Critical Comments on James Palmer’s The Bloody White Baron: The Extraordinary Story of the Russian Nobleman who Became the Last Khan of Mongolia (Faber & Faber 2008. 274pp. ISBN 0-571-23023-7)』, Inner Asia Volume 15: Issue 1, 185)

6. 창작물에서 묘사되는 미친 남작

이탈리아 만화 코르토 말테제 - 시베리아 횡단열차의 1920년대 주인공 코르토와 만난다. 공작 부인 마리나 세미노바와 코르토의 대화에 첫 등장. 시베리아 어딘가에서 샤먼에게 점을 보는데 샤먼이 2년 내에 죽을 것이고 많은 피 밖에 보이지 않는다고 말하자 쏴 죽인다. 제대로 미친 놈으로서 타타르의 도살자 세르게이 세묘노프도 완벽히 미쳤다고 평가한다. 나중에 코르토 말테제와 라스푸틴,상하이리를 포로로 잡는다. 여기서 라스푸틴은 실제 그리고리 라스푸틴이 아니라 코르토의 친구인 가상의 동명이인. 라스푸틴이 이름뿐만이 아니라 생김새까지 라스푸틴같다고 기분이 나빠진 데다가 코르토의 여순 드립에 처형을 유보한다. 그리고 코르토는 그의 부대 내에 보관 중이던 세메노프의 대형 대포 열차를 박살낸다. 코르토가 한 짓이라는 사실을 알지만 불러서 서로 랭보의 시를 읆고는 같이 샤먼에게 점을 본다. 이 샤먼도 운게른을 보고 얼마 못 산다고 예언한다. 그리고 코르토에게는 허리 꺾인 검은 용을 조심하라고 말하면서 운게른에게 코르토를 죽이지 말라고 말한다. 그 다음날 운게른은 코르토 일행을 석방하고 부하 마케이비치까지 붙여준다. 대인배? 나중에 운게른은 적군과의 마지막 싸움에서 승리하고 부하의 배신으로 적에게 넘겨져 처형되고 코르토가 운게른의 무덤에 갔다고 한다. 하지만 이건 어디까지나 허구다.

< 아이언 스톰>이라는 2002년작 대체역사 FPS 게임에서 운게른을 모티브로 한 니콜라이 알렉산드로비치 유젠베르크 남작이 나온다. 아이언 스톰 위키에서는 모티브만 따온 인물이라고 한다. 아이언 스톰의 세계는 1921년에 남작이 패배하지 않았다는 데에서 출발하여 "패배하지 않은 남작이 다른 백군 부대들을 규합하는 데 성공하여 러시아와 중국을 병합한 뒤, '러시아·몽골 제국'을 세우고 일본과 만주를 조건으로 동맹을 맺는다. 그 후 남작은 유럽을 침공하고, 1964년 유럽은 미국과 영국의 지원을 받아 '서유럽합중국(United States of Western Europe; USWE)'으로 재편성되어 남작의 러시아·몽골 제국과 제국의 핵무기 개발 계획에 맞선다."라는 정신 나간 내용이라고 한다. 이쪽 세계에서는 제2차 세계 대전 추축국 구도가 남작의 러시아·몽골 제국으로 대체되었다. 운게른을 모티브로 한 캐릭터답게 행적은 운게른과 거의 일치한다.

Hearts of Iron 시리즈의 모드 카이저라이히: 대전의 유산에서는 1936년 시작 시점까지 몽골의 수장으로 남아 있다. 붉은 군대가 와서 엉덩이를 걷어차야 하지만 그 붉은 군대가 없고 러시아도 내부 상황이 개판이라 그냥 놔둔 듯. 설정 변경 이전에는 도시전설을 검증없이 받아들여 완전히 미쳐버린 싸이코로 나왔다. 같은 불교 국가인 티베트와 동맹을 맺고 서북삼마를 합병한다. 그냥 여기서 끝나는 경우도 있지만 동맹을 풀고 티베트까지 침공한 뒤 몽골 제국 재건을 선포하며 칭기즈 칸 2세를 참칭하는 미친 짓을 벌이며 몽골 고토 회복을 주장하기도 한다. 이후에는 상청천국이나 청나라를 공격하며 중국 본토를 유린하지만 플레이어가 맡지 않고 이 시기를 넘어가면 공기화되거나 러시아나 일본의 공격을 받아 멸망한다. 이렇게 멸망한 운게른은 대부분 효수당하는 결말을 맞는다.

카이저라이히의 중국에 대규모 설정 변경이 가해지며 운게른의 설정도 실제 고증에 맞게 조정되었다. 이전의 설정이 피에 굶주린 싸이코였다면 신 설정에서는 친러파 독재자로 러시아 내전에서 백군이 승리하면서 몽골에 그대로 눌러앉아 지배권을 행사하고 있다. 복드 칸 사후 10대 젭춘담바 후툭투를 몽골의 칸으로 선포하고 자신은 섭정 명목으로 계속 독재를 휘두르고 있다. 게임 시작 시점인 1936년까지 그 직위를 유지하고 있었으나 뒷배인 러시아가 혼란해지면서 몽골 인민당에서 그에 대한 혁명을 준비하고 몽골인 귀족들, 승려들 역시 딴마음을 먹기 시작하면서 그의 세력도 흔들리게 된다.

이후 원래 설정은 카이저리덕스에서 재현 가능한데, 머리에 부상을 입어 미쳤기에 저렇게 된다는 설정이 붙었다. 여기선 칭기즈 칸 2세를 참칭하면 이에 맞게 칭기즈 칸 복장을 입은 모습으로 초상화가 교체되는 장면이 압권.

문피아에서 연재되고 있는 대체역사 소설, 매국노의 원수 자식에서는 여러가지 나비효과로 인해 러일전쟁에 참전하게 된다. 남산 전투에서는 일본군의 시체로 경관을 쌓고[7], 뼈로 장신구를 만들고, 끝내는 뤼순 공방전 와중에 무능한 중장에게 결투를 신청해 쏴버리는 등, 여러모로 러시아 제국측의 미친 존재감을 책임지는 캐릭터라는 평이 많다.

마찬가지로 동방의 라스푸틴에서도 등장. 2차 대전에서 같은 아군인 패튼과 같이 진격전을 하는 광기를 보인다.

조선, 혁명의 시대에서는 달라이라마 주인공 비범한 인물인걸 어느 정도 눈치채고 전륜성왕의 환생이라고 말하는 바람에 자기 나름대로 해석하고는 폭주해서 주인공을 새로운 칭기즈칸으로 만들려고 몽골과 러시아등지에서 전쟁을 일으키고 다닌다. 스스로 바투칸의 환생이라고 부르며 러시아와 부랴티야, 내몽골과 외몽골, 탄누투바 티베트, 위구르를 연결하는 거대한 대제국을 건설하여 주인공에게 바치겠다는 포부를 가지고 싸우지만 주인공은 망상으로 치부하고 무시하기에 오히려 더 날뛰는 중이다.


[1] 국립국어원의 외래어 표기 용례상 붙임표로 이어진 인명 등의 경우, 여러 요소가 하나의 단어를 이루는 복합어로 보고, 한글로 표기할 때에는 붙여 적는 것이 규정 용례이다. [2] 몽골 장포를 입고 러시아 제국군 계급장 훈장을 패용한 것이 그의 정체성을 단적으로 드러내고 있다. 그러나 정작 그는 오스트리아 출생에 이름도 독일식이었다. [3] 그런데 러시아 제국의 귀족은 대개 해외에서 살았으므로 특이한 것은 아니다. [4] Romein, Jan (1962). The Asian Century: A History of Modern Nationalism in Asia. Translated by Clark, R. T. Allen & Unwin. p. 128. [5] 세묘노프는 일본을 거쳐 미국으로 망명한 뒤, 만주국에 정착했다가 소련군에게 붙잡혀 1946년에 처형당했다. [6] Os'sendowski, Ferdinand. “Chapter XXXVI. A son of Crusaders and Privateers”. Beasts, Men and Gods. 191쪽. [7] 여기서 경관은 景觀 즉 눈에 보이는 풍경이 아니라 京觀 즉 전쟁의 승군이 패군 전사자의 시신을 쌓아 만드는 일종의 제단 겸 기념물을 의미한다. 고대 시절부터 명나라 시절까지 이어져 온 중국의 유서 깊은 악습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