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olbgcolor=#fff><colcolor=#0039A6> 북서군 총사령관 니콜라이 니콜라예비치 유데니치 Николай Николаевич Юденич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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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생 | 1862년 7월 30일 |
러시아 제국 모스크바 | |
사망 | 1933년 10월 5일 (향년 71세) |
프랑스 칸 | |
국적 | |
학력 | 알렉산드르 3세 군사학교 |
직업 | 군인 |
최종 계급 | 보병대장 |
참전 |
러일전쟁 제1차 세계 대전 러시아 내전 |
서명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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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러시아 제국의 군인. 러시아 내전에서 수도 페트로그라드를 직접 공격하며 소비에트 러시아의 위협이 되었다.2. 1차 세계대전 이전까지
니콜라이 유데니치는 1862년 모스크바에서 하급 문관의 아들로 태어났고 1879년 알렉산드르 3세 군사학교에 진학하는 것으로 군 생활을 시작했다.주 근무지는 그레이트 게임의 무대였던 중앙아시아였지만 러일전쟁으로 만주의 전장에 투입된다. 산데푸 전투에서 팔을, 봉천 전투에서 목을 부상당하기도 했다. 1905년 러일전쟁 중 소장으로, 1912년에 중장으로 진급했다
.
3. 캅카스 전선
제1차 세계대전이 발발하고 오스만 제국이 동맹국에 합류하며 러시아 제국 입장에서는 주 전장인 동부전선(러시아의 입장에서는 서부) 외에도 캅카스 지역에 전선이 하나 더 생기게 되었다.캅카스 군관구가 캅카스 군으로 개편되었고 캅카스 부왕 일라리온 보론초프다시코프(Илларио́н Воронцов-Дашков)가 명목상 지휘관으로, 알렉산드르 미실라옙스키(Александр Мышлаевский)가 실질적 지휘관이 되었다. 유데니치는 참모장으로 미실라옙스키를 보좌했다.
캅카스 전선은 예정에 없던 전선인데다 산악지대 특성상 공격은 불리하고 수비는 용이하다보니 러시아 제국 입장에서는 부차적인 전선으로 간주되었고 많은 병력과 물자가 동부전선 방향으로 재배치되었다. 오스만 입장에서도 마찬가지여서 서로 선공을 회피했고 흑해 해상에서 적국의 함대가 항구를 포격하는 것을 제외하면 드라마틱한 전투는 없었다.
그런데 1914년 12월 엔베르 파샤가 갑자기 11만명이라는 엄청난 양의 병력을 캅카스 전선에 투입시켜 사리카미스 전투가 발생했다. 미실라옙스키는 캅카스의 험한 산세와 추운 겨울 날씨만 믿고 공격이 들어올리 없다 생각해 방심하고 있다가 대군이 들이친다는 소식을 듣자 정신이 나갔는지 전군 후퇴 명령을 내렸고 본인은 가장 먼저 티플리스로 도망갔다. 그러나 유데니치가 그나마 남아있는 병력들을 추스려 성공적으로 방어를 해냈고 사리카미슈 전투 동안 오스만 군은 얼어죽고 굶어죽으며 1달 만에 11만명이 1만명이 되는 마법을 보여준다.[1]
1915년 미실라옙스키는 추태에 대한 책임을 물어 해임당했고 유데니치는 보병대장으로 진급함과 동시에 캅카스 군의 실질적인 지휘관이 되었다. 5월에는 아르메니아 대학살이 가장 극심하게 이루어졌던 반에 입성하며 학살을 중지시켰다. 일단은 러시아가 우세한 상황이었나 아르메니아인들을 구한다는 목적때문에 너무 깊숙히 진군했기 때문에 다시 일진일퇴했고 오스만은 캅카스 방면은 안전하다 생각하고 갈리폴리 방면으로 병력을 차출했다.
1916년 1월 유데니치는 오스만 군의 기대를 배반했고 공세를 시작했다. 사리카미슈 전투와 같이 적의 의표를 찌르겠다는 의도로 기획된 겨울 공세였지만 결과는 정반대로 성공했다. 안 그래도 잇다른 패배로 병력을 죄다 날려먹었는데 여기서 갈리폴리로 추가적으로 병력이 빠진 오스만 군은 무너졌다. 공세는 7월까지 계속되었고 트라브존, 에르주룸, 무슈, 비틀리스 등 아나톨리아 동부까지 완전히 러시아의 손아귀에 들어가며 이제는 캅카스조차 아니게 되었다. 이 시점에서 러시아는 공세종말점에 들어갔고 동부전선에서 브루실로프 공세가 시작되었으며 오스만에서는 무스타파 케말 파샤가 아나톨리아 동부 방면으로 재배치되며 다시 전선이 고착되었다. 그러나 이는 러시아의 마지막 불꽃이었고 결국 1917년 2월 혁명이 터지며 러시아 제국은 멸망하고 만다.
4. 러시아 내전
2월 혁명 이후 등장한 러시아 공화국의 케렌스키는 보수적인 군인인 유데니치를 신뢰하지 않았고 그를 해임했다. 유데니치는 코르닐로프의 반란에 동참하는 것으로 이를 되갚아줬다. 코르닐로프의 쿠데타는 진압되었지만 혼란스러웠던 러시아 공화국은 결국 10월 혁명으로 완전히 무너지고 러시아 소비에트 연방 사회주의 공화국이 세워졌다. 유데니치는 페트로그라드에 숨어 살다가 1918년 말, 핀란드로 망명했고 러시아의 적법한 정부를 주장하는 러시아국의 지도자 알렉산드르 콜차크에게 충성을 맹세했다.유데니치는 핀란드의 섭정 만네르헤임을 설득해 페트로그라드를 공격하고자 했다. 충실한 러시아 근황주의자였던 만네르헤임은 동조했지만 일단은 유데니치의 상관이었던 콜차크는 핀란드의 독립이라는 것 자체를 인정하지 않았고 스톨베리등 핀란드 정치인들이 이 계획을 뜯어 말리면서 결국 무산되었다. 만네르헤임은 이후로도 지속적으로 유데니치에 심정적인 동조를 표했다.
유데니치는 핀란드를 끌어들이려던 계획이 실패하자 참전을 원하는 러시아인들을 이끌고 에스토니아로 건너갔다. 독일 제국은 브레스트-리토프스크 조약으로 얻은 발트 지역에 발트 연합 공국을 세웠지만 곧 독일이 패전하며 에스토니아와 라트비아가 독립했다. 에스토니아는 독립을 원하는 에스토니아인, 볼셰비키를 부수고 러시아 제국을 다시 세우고자하는 러시아계 백군, 옛 영토를 탈환하고 사회주의를 전파하려는 적군, 독일계 국가를 세우고 싶어하는 발트 독일인 등등 수많은 세력이 얽힌 전장이 되었다. 일단 가장 큰 적이 적군이었기 때문에 영국의 지원 하에 공동전선이 구축되었고 유데니치는 그중 러시아계 병력을 전부 그러모아 북서군의 지휘관이 되었다.
1919년 10월 북서군은 소비에트 러시아의 페트로그라드를 공략하기 시작했다. 수는 매우 적었으나 발트 방면의 제해권을 영국이 잡고 있었기 때문에 보급은 러시아 내전의 모든 세력을 통틀어 제일 빵빵하게 받아서[2] 병력의 질의 차이로 빠르게 진군했다. 레닌은 페트로그라드를 포기하는 것까지 고려했지만 트로츠키, 스탈린 등은 페트로그라드를 사수해야한다고 주장했고 결국 사수가 결정되었다. 유데니치는 페트로그라드 남쪽 25km지점의 차르스코예 셀로까지 도달했으나 모스크바와 페트로그라드를 잇는 철도를 끊는데에 실패했고 결국 페트로그라드로 지원군이 들어오며 양에서 압살당했다. 그나마 북서군 자체도 서로 손발이 안맞고[3] 지원해 주기로 한 영국이나 에스토니아도 미적지근한 태도를 보이다 보니 대패했다.
11월 북서군은 에스토니아로 귀환했고 에스토니아군이 북서군과 반대로 적군을 상대로 방어하는데 성공하며 체면을 구겼다. 이듬해 1월 러시아 소비에트와 에스토니아는 에스토니아의 독립 인정을 골자로 휴전 협정을 체결했다. 이제 유데니치는 명목상이라고는 하지만 에스토니아의 독립을 인정하지 않은 콜차크의 부하였고 역시 명목상이지만 에스토니아의 독립을 위협하는 파벨 베르몬트아발로프의 상관이었기 때문에 에스토니아의 위협요소가 되었다. 결국 북서군은 해체되었고 유데니치는 에스토니아 경찰 및 스타니슬라우 불라크발라호비치에 체포되었다가 영국, 프랑스의 중재로 석방되어 프랑스로 망명했다.
망명 후에는 조용히 은둔하면서 살았다. 1933년 10월 5일 망명지인 프랑스 칸에서 결핵으로 사망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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