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티르피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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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일:나치 독일 국기.svg 제2차 세계 대전의 독일 해군 함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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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ismarck 비스마르크 Tirpitz 티르피츠
파일:external/www.maritimequest.com/23_kaafjord_mar_1943.jpg
Die Tirpitz

1. 개요2. 제원3. 약력4. 함생
4.1. 건조4.2. 호송 선단의 주적
4.2.1. PQ-17 공격
4.3. 영국군의 티르피츠 공격 작전
4.3.1. 소스 작전(Operation Source)4.3.2. 텅스텐 작전(Operation Tungsten)4.3.3. 플래닛 작전(Operations Planet), 브라운 작전(Operations Brawn), 타이거 클로 작전(Operations Tiger Claw)4.3.4. 마스코트 작전(Operation Mascot), 굿우드 작전(Operation Goodwood)4.3.5. 파라베인 작전(Operation Paravane)4.3.6. 오비에이트 작전(Operation Obviate)4.3.7. 캐테시즘 작전(Operation Catechism)
5. 평가6. 기타7. 모형화8. 매체에서의 등장9. 관련 링크

1. 개요

티르피츠 진수식 뉴스릴 (c.1939) / British Pathé

제2차 세계대전 당시 독일 해군이 운용했던 비스마르크급 전함의 2번함이다. 함명인 티르피츠는 20세기 초 독일 제국 빌헬름 2세 재위기에 독일의 해군력 증강을 주도했던 알프레트 폰 티르피츠 제독의 이름에서 따왔다.

2. 제원

기준배수량 42,900미터톤
만재배수량 52,600미터톤
전체길이 251 m
전체 폭 36.0 m
흘수선 8.7 m
출력 138,000마력
과부하시 출력 160,795마력
속력 29노트
과부하시 속력 30.8노트
항속거리 16노트로 9,280해리
승조원 2,608명
주 엔진 Brown-Boveri식 기어드 터빈 3기, 3축 추진(연료는 중유 8,000톤)
무장 52구경장 38cm 연장포탑 4기(주포)
55구경장 15cm 연장포탑 6기(부포)
65구경장 10.5cm 연장포탑 8기(대구경 대공포)
83구경장 37mm 연장대공포탑 8기
53.3cm 4연장 어뢰발사관 2기[1]
Ar 196 수상정찰기 4대[2]

3. 약력

파일:external/www.maritimequest.com/17_tirpitz_bogen-1942.jpg

4. 함생

4.1. 건조

티르피츠는 비스마르크급 전함 2번함으로, 1번함 비스마르크와 동일하게 15인치 포 8문을 탑재하고 있었지만 조금 더 무거워지면서 유럽 최대의 전함으로 태어났다. 이후 나타난 야마토급 전함에게 세계 최대라는 타이틀을 넘겨주긴 했지만, 영국의 입장에서는 영 좋지 않은 사태였기에 티르피츠가 건조되던 항구를 공습했지만 건조를 막는 데에는 실패했다.

티르피츠는 유럽 최대의 전함이긴 했지만, 2차 대전 당시 독일 대형함들의 문제점이었던 구식 설계사상으로 인해 많은 문제점을 가지고 있었다. 그러나 아무리 화력이 나쁘다고 하더라도 비스마르크급은 상당한 명중률, 속도, 장갑을 보유했고, 이에 맞서려면 동급 내지 이상의 전함이나 다수의 항공기가 필요하니 그 존재만으로도 위협이 되었다. 그리고 비스마르크급 전함이 아무리 성능이 나쁘다는 소문이 있어도, 비스마르크는 같은 시기 건조된 함선보다 포의 명중률이나 최고 속도 등은 상당히 좋은편이여서, 동세대의 전함 중 화력이 동등 또는 그 이하인 전함에 대해서는 충분히 우위를 차지할 수 있었다.

문제는 당시 영국이 가진 전함 대부분은 비스마르크급과 화력이 동등하거나 그 이하였다는 점이다. 16인치 포를 탑재한 영국 전함은 넬슨급 전함밖에 없는데, 느려터져서 넬솔, 로드놀 같은 굴욕적인 별명으로 불릴 지경이었다. 29노트로 질주하는 티르피츠를 상대하기에는 버거울 수밖에 없었다. 전함이 전략무기로 여겨졌던 제 2차 세계대전 당시의 현실을 돌아보면, 영국은 티르피츠를 매우 싫어할 수밖에 없었다. 게다가 영국은 이미 티르피츠의 동급 전함이자 앞서 전력화된 비스마르크한테 영국의 간판이자 마이티 후드라고도 불렸던 순양전함 후드를 격침당한 상태였다. 비스마르크는 결국 영국 해군의 집중공격을 받고 격침되었지만, 이 과정에서도 영국은 고작 비스마르크 1척 때문에 자국의 구축함은 물론이고 전함과 항공모함을 포함 예비전력까지 끌어다 배치하는 등 사실상 영국의 해군력 전체를 동원했음에도 비스마르크가 자침하는 그 순간까지 격침하는 데에 실패했다. 유럽 최강이라는 자국 함대가 엔진 손상을 입은 전함 한척을 꺼꾸러뜨리지 못했다는 사실은 독일 전함의 공포를 자아내기에는 충분했고 그렇기에 비스마르크 함의 자매함이었던 티르피츠에 대한 영국의 반응은 당연히 히스테리 그 자체일 수 밖에 없었다.

그래서 티르피츠가 처음 나왔을 때 영국의 반응은 저놈 잡아라였다. 티르피츠는 태어났을 때부터 존재 자체가 연합군에게 어그로를 끌 수 밖에 없는 운명이었고, 이는 독일도 잘 알고 있었다.

4.2. 호송 선단의 주적

파일:Screenshot_2019-08-07-23-16-13-1.png

티르피츠는 비스마르크가 침몰한 다음에 완성된 관계로 주요 작전에 거의 참가하지 못했고 사실상 연합군 함선을 향해 제대로 포격 한번 해본 적이 없지만 노르웨이 근방의 여러 항구들을 전전하는 것만으로 연합국 해군의 신경을 박박 긁어댔고, 만약에 티르피츠가 공세적으로 나올 경우 이를 감당하기 위해 대규모 선단과 항공기들이 필요했음은 말할 필요가 없었다.

특히 되니츠 제독과의 일화도 나름 유명한데, 비스마르크의 허무한 손실과 수상함대의 바렌츠 해 해전에서의 졸전에 실망한 히틀러는 전함들을 골칫덩이로 여기다가 결국 갈아버릴 것을 결심했고 이를 위해 해군 총사령관를 에리히 레더 제독에서 잠수함 전문가인 카를 되니츠 제독으로 교체했다. 그러나 되니츠는 티르피츠를 갈기는커녕 티르피츠의 억지력을 눈여겨보고 "이거 갈아버릴 돈이 더 많이 든다. 얘들이 살아있기만 해도 가치가 있다."라며 히틀러의 예상과 반대로 히틀러와 다퉜고 결국 담판을 지어서 해군에 대한 추가지원을 약속받고 티르피츠를 지켜냈다.

취역 직후 바르바로사 작전에 참여하였으나, 순양함과 구축함, 기뢰부설함으로 편성된 함대의 기함 임무만 수행하였고 소련 해군과의 교전이나 포격지원은[3] 하지 않았다. 이후 독일군이 레닌그라드를 포위하자 할 일이 없어진 티르피츠는 훈련 및 포격 시험을 진행하며 시간을 보냈다.

1942년부터는 북해 렌드리스 선단을 압박하기 위하여 노르웨이로 이동하고 1942년 3월 초, 티르피츠는 연합군의 수송선단인 PQ-12와 QP-8을 차단하기 위한 목적으로 3척의 구축함의 호위를 받으면서 출항했다.[4]

하지만 티르피츠가 출항할지도 모른다는 우려 때문에 수송선단에는 리나운급 순양전함 리나운 킹 조지 5세급 전함 듀크 오브 요크가 붙은 상태였고, 그 뒤에 독일군 몰래 전함 킹 조지 5세와 일러스트리어스급 항공모함 빅토리어스, 그리고 중순양함 1척과 6척의 구축함을 추가로 매복시켜둔 상태였다.

독일군은 선단을 발견하는데 실패했으며, 운 나쁜 한척의 수송선이 구축함에게 딱 걸려 침몰당했다. 결국 3월 9일 영국 항공모함 빅토리어스 호의 정찰기에 티르피츠의 출항 여부와 위치가 탄로난다. 독일 제독은 영국 해군항공대의 추격 및 공격을 우려하여, 티르피츠의 임무를 중단시키고 노르웨이로 귀환하도록 명령한다. 그러나 모항이었던 트론하임으로 돌아가는 길에 빅토리어스의 함재기로부터 어뢰와 폭탄 세례를 받는다. 하지만 티르피츠는 피해를 입지 않았고, 빅토리어스의 함재기중 폭격기 2대를 격추한다.

4.2.1. PQ-17 공격

같은해 1942년 여름 동안 티르피츠는 연합군의 북해 수송선단을 차단하기 위한 목적으로 중순양함 아트미랄 히퍼 아트미랄 쉐어, 뤼초우 및 구축함 6척과 함께 다시 뢰셀스프룽 작전(Operation Rosselsprung)에 참가하여, 7월경 수송선단 PQ-17을 거의 괴멸시키는데에 성공했다.

출항 직후 북쪽 해역에서 소련 해군 북해함대 소속의 니콜라이 루닌 소령이 지휘하는 카츄샤급 잠수함 K-21의 공격을 받았다. 루닌 소령은 당시 명중했는지 제대로 확인을 하지는 못했지만 폭음을 확인했다고 했으며, 소련 측은 2~4발을 쏘았으며 2발이 명중했다고 주장하였다.[5] 1960년대까지 영국/독일측 전사가들은 소련측의 주장을 부정하였으나 나중에 1942년 7월 6일 티르피츠가 노르웨이 방면으로 12노트의 느린 속도로 항해하고 있었다는 항공 정찰기록이 발견되고 7월 8일부터 9월 6일까지 나르빅 항에 머문 이유가 소련 잠수함 어뢰공격으로 인해 피해를 입어 수리를 했을지도 모른다는 사실이 밝혀졌다. 실제 소련 입장에서도 유보트와 더불어 소련의 공급을 쥐략펴락하는 전함인지라 무리를 해서라도 공격을 시도할 필요는 있었다. 하지만 결론만 말하자면, 실제로 K-21이 발사한 어뢰는 실제로 쏘았더라도 티르피츠에게는 명중하지 못하고 빗나갔다. 당시 티르피츠는 피해를 입지 않았다.

당시 연합군은 티르피츠가 아드미랄 히퍼급 중순양함 히퍼와 구축함 6척을 동반하고 트론하임을 출항했다는 정보를 받았고, 그와 동시에 경순양함 2척과 6척의 구축함이 나르빅에서 출항한 것도 확인하였다. 연합군은 이를 수송 라인 차단을 위한 것으로 판단하여 수송선단의 산개를 명령했다. 선단이 흩어졌다는 정보를 입수한 독일 해군은 티르피츠가 노출된 것을 깨닫고 작전 종료를 명했고 뒷처리를 유보트에게 맡겼다. 산개해버린 탓에 호위받지 못한 수송선단은 유보트의 좋은 먹이가 되어, 랜드리스를 실은 34척의 배 중에서 21척의 수송선을 상실하는 심각한 피해를 입는다.

당시 호송선단의 호위는 노스캐롤라이나급 전함 워싱턴과 킹 조지 5세급 전함 듀크 오브 요크, 일러스트리어스급 항공모함 빅토리어스가 포함된 막강한 전력이었기 때문에, 호위함대 지휘관이 KGV의 일방적인 집중 포화에도 가라앉지 않았던 비스마르크를 떠올리면서 내렸던 산개 조치는 오늘날의 관점에서는 오판으로 평가받는다. 그리고 당대에도, 이 호송선단의 실패는 연합군 내부에서 상당한 이슈가 되었다. 미국은 매우 실망하여 워싱턴을 본토로 소환해 태평양으로 보내버린다.[6] 워싱턴은 티르피츠 전담 마크로 대서양에 붙박아 놓은 것이긴 했으나, 로열 네이비가 제대로 일하지 못한다면 미국 동부 해역에서 전함 한척으로 다른 전함 한척을 찾아내 교전하는 것은 불가능했기 때문이다.

1943년 9월에 스피츠베르겐 공격을 목적으로 출항하여 독일군의 상륙작전을 지원할 목적으로 티르피츠는 샤른호르스트급 전함과 9척의 구축함과 함께 육상 포격을 실시했다. 이 작전은 실전에서 티르피츠가 발포한 유일한 작전이다.

어쨌든 사정이 이렇다 보니, 영국의 어려운 자원 사정 그리고 사방에서 애타게 찾는 주력함인 전함과 항공모함을 (티르피츠가 나타나면 무조건 격침시키기 위해) 훨씬 더 많은 머릿수로 호송 선단에 전담마크로 붙이는 와중에, 티르피츠가 안나오면 연료 낭비와 주력함 실업으로 화나고, 정작 티르피츠가 나오면 패닉상태가 돼버리니 이러든 저러든 답없는 상황에 빡쳐버린 영국과 미국은 결국 티르피츠를 처리하기로 결심한다.

또한, 영국 입장에서는 미국 앞에서 심하게 망신 당한 것을 만회할 필요가 있었다. 어느 나라든, 동맹국이 한심하게 굴면, 도움을 주면서도 발을 뺄 생각으로 적정선을 그어버리게 되는데, 실제로 수송선단 호위 실패를 들어 미국이 워싱턴을 빼 버리면서 선을 긋기 시작하자 영국의 국가 수뇌부도 미국의 신뢰를 되찾을 필요가 있었다.

4.3. 영국군의 티르피츠 공격 작전

티르피츠는 1942년부터 노르웨이의 피오르드 해안에서 숨어서 1942년에 2번, 1943년에 1번 제한적인 공세에 동원되는 것외에는 크게 한 일이 없었다, 티르피츠를 구해낸 칼 되니츠도 유보트 작전을 우선시해서 딱히 티르피츠에게는 관심을 많이 쏟지 않았다. 하지만 카를 되니츠의 말처럼 티르피츠의 존재만으로도 연합군의 속을 벅벅 긁어놓고 소련의 보급줄인 랜드리스 작전에 무지막지하게 차질을 주고 있었다. 결국 미국, 영국은 티르피츠와 유보트 때문에 대부분의 물자를 지구 반바퀴를 돌아서 교통망이 빈약한 이란에 하적하여 다시 소련으로 보내거나 상당히 신경쓰이는 일본 함대를 지나서[7] 블라디보스토크에 하적후 다시 동유럽으로 보내야 했다. 때문에 영국 해군은 각종 티르피츠 레이드격침 작전들을 실행한다.

4.3.1. 소스 작전(Operation Source)

티르피츠에 대한 영국 해군의 첫 작전은 잠수정을 통한 작전이었다. 1943년 9월 20~22일에 걸처서 이루어진 이 작전을 위해 영국 해군 X급 잠수정 6척과 일반 잠수함 6척이 투입되었다. X급 잠수정은 3명의 승무원이 탑승하는 초소형 잠수정으로 장거리 항해가 불가능했으므로, 노르웨이 해안까지 일반 잠수함에 의해 예인되었다. 이 중 3척은 티르피츠에, 2척은 샤른호르스트에, 남은 1척은 뤼초에 근접하여 선저에 폭약을 설치하고 기폭시키는 작전이었다.

하지만 당시 샤른호르스트는 항해중이어서 잠수정으로 접근이 불가능했으며 배정된 잠수정들도 모두 사고로 침몰했다. 뤼초에 배정된 잠수정 역시 기능고장으로 모함에서 출발하기도 전에 침몰해버렸고, 결국 제대로 작전이 수행된 것은 티르피츠에 대한 공격뿐이었다.

티르피츠에 배정된 3척의 잠수정은 독일 국방군이 설치한 기뢰지대를 돌파하고 그물과 해안포대, 수중청음 시설을 피해 잠입했으나, 티르피츠에게 발각되어 3척 모두 격침되었다. 3척의 잠수정 승무원 9명 중 3명은 사망(실종)하고, 6명은 간신히 잠수정에서 탈출해 포로로 잡혔다. 하지만 이 와중에 이 중 한 척이 티르피츠의 선저에 4톤의 폭약을 설치하는데에 성공했고, 이 폭약은 한시간 뒤에 폭발했다. 티르피츠는 침몰은 면했으나 상당한 데미지를 입혀 몇 개월간 전열에서 제외하는데는 성공했다. 하지만 이 작전에 참여한 잠수정 승무원 18명 중 9명이 사망하고 6명이 포로로 잡힌, 위험성이 매우 높은 작전이었다. 이후 영국군은 잠수함 작전을 포기하고 폭격을 통한 공격으로 방법을 바꾸기로 한다.

4.3.2. 텅스텐 작전(Operation Tungsten)

파일:external/www.kbismarck.com/tirp44.gif
1944년의 티르피츠[8]

영국은 티르피츠를 주저앉힌 이후, 통신 감청과 항공촬영, 노르웨이 스파이를 통한 관찰로 끊임없이 티르피츠를 감시하고 있었다. 티르피츠가 복귀한 경우 호송선단이 공격받는 것을 우려했기 때문에 1943년 말에는 티르피츠를 완전히 끝장내는 기획을 논의하게 된다.

그러나 1944년 4월경 수리를 마친 티르피츠는 다시 작전 가능한 상태가 된다. 정확히 말하자면, 3월부터 이미 영국군은 조짐을 눈치채고 있기는 했다.

어쨌든. 영국은 독일 전함이 전부 무력화된줄 알고 자국 전함을 노르망디 상륙 작전 준비와 태평양 전쟁 참전을 위해 내보내면서, 북해가 텅 빈 상태였다. 텅텅빈 북대서양으로 주력전함이 튀어나와서 호송선단을 초토화시키고, 그걸 막기 위해 상륙작전을 준비하고 훈련중인 전함을 도로 빼서 티르피츠와 숨바꼭질을 하는 사태는 달갑지 않았기에, 부랴부랴 티르피츠 격침 작전을 입안한다.

이를 위해 항공모함 퓨리어스와 4척의 호위항공모함이 준비되었으며, 일러스트리어스급 항공모함 빅토리어스를 동양 함대에서 복귀시킨다. 이 조치로 동양함대가 주력 항공모함이 부재중인 초유의 사태가 벌어지는데, 노르망디 상륙 작전에 공을 들이던 미 해군 역시 티르피츠의 출현을 경계하여 협조해주었고, 그 결과 새러토가가 영국 동양함대에 일시적으로 배속되어 인도양과 동남아에서 작전하게 된다.

거기에 더해 4월 1일에 수리된 티르피츠가 고속 항해를 테스트하는 모습이 노출되자, 다급해진 영국군은 킹 조지 5세급 전함 듀크 오브 요크와 앤슨을 텅스텐 작전을 위해 도로 불러온다.

앤슨을 기함으로 해서, 총 2척의 킹 조지 5세급 전함과 항공모함 빅토리어스, 1척의 경순양함과 5척의 구축함이 1그룹을 구성해 호송선단을 지키러 출발했고, 뒤이어 항공모함 퓨리어스와 4척의 호위항공모함이 5척의 구축함과 2척의 유조선을 데리고 2그룹이 되어 노르웨이로 향했다. 그리고 호송선단과 헤어진 1그룹이 2그룹과 랑데뷰한 뒤, 듀크 오브 요크가 티르피츠 레이드의 총기함이 되었다.

4월 3일 시험을 위해서 티르피츠는 경비가 삼엄한 모항에서 잠시 나와있었는데, 이틈을 노려 함재기들을 새벽에 출격시켰다. 영국 해군 항공대 소속 바라쿠다 뇌격기들과 호위기들로 구성된 비행대를 2차례에 걸쳐 순차적으로 투입했으며 뇌격기들은 대잠탄, 갑판을 뚫기 위한 철갑 폭탄, 상부 구조물들에게 피해를 입히기 위한 소규모 폭탄과 일반 범용 폭탄 등 다양한 폭탄들을 적재해서 티르피츠에 쏟아부었다.

갑작스러운 기습공격에 티르피츠는 효율적인 대공방어를 해내지 못했으며 티르피츠의 승조원들도 허둥대며 제대로 대응을 하지 못했다. 일부 영국 해군 전투기들은 갑판에 기관총을 마구잡이로 발사하기도 했다. 영국 해군은 3대의 항공기를 손실하고 티르피츠는 승조원 122명 사망에 300여명 가량의 부상자가 발생했으며 약간의 누수와 상부구조물에 손상을 입어 이걸 고치는데에 또다시 2개월이 들었다.

총지휘관이던 무어 제독은 다음날인 4월 4일에 다시 한번 공격하는 옵션을 검토하였으나, 공습 도중 촬영된 사진에서 티르피츠가 심한 손상을 입은 것으로 판단되었고, 삼엄한 작전 속에서 부하들이 심하게 지친 것을 고려하여 함대를 반전해 영국으로 돌아간다. 조지 6세는 공습의 성공을 치하하였으나, 윈스턴 처칠은 국왕 앞에서는 치하하였으면서도 개인적으로는 티르피츠가 끝장나지 않은걸 의식하고 있었고, 제 1 해군경이던 앤드류 커닝햄 제독도 4일에 재공습을 시행하지 않은 결정을 비판했다.

4.3.3. 플래닛 작전(Operations Planet), 브라운 작전(Operations Brawn), 타이거 클로 작전(Operations Tiger Claw)

또 다시 격침에 실패한 영국군이 계획한 3개의 작전이지만 북해 특유의 지독한 기상상황으로 인해 작전은 모두 취소되었다.

4.3.4. 마스코트 작전(Operation Mascot), 굿우드 작전(Operation Goodwood)[9]

1944년 7월 17일에 영국 해군은 항공모함을 동원하여 티르피츠를 공습했다.(마스코트 작전) 그러나 공격은 실패하고 영국은 3대의 항공기를 손실하였다. 8월 초에 티르피츠는 자잘한 수리를 마치고 다시 시험 항해에 들어가자 영국군은 8월 22일에서 27일에 걸쳐 다시 공격을 개시했다.(굿우드 작전) 8월 24일 전개된 작전에서 영국 바라쿠다 뇌격기들은 티르피츠의 포탑과 보탄대에 폭탄을 명중시켰으나 운도 없게 불발되고 말았다. 실제로 보탄대가 제대로 폭발했으면 티르피츠는 침몰했을지도 모르는 상황이었다.

이런 와중에 영국 호위항공모함 나봅이 U-354의 공격을 받아 상당한 손상을 입어서 귀환해야 했고 29일 영국 해군은 다시 티르피츠 격침 작전을 실행했으나 날씨가 발목을 잡아 실패했다. 이 작전 기간 동안결국 영국 해군은 17대의 항공기와 호위함 1척을 손실했고 호위항모 한척이 큰 피해를 입었던 반면 독일은 전투기 12대를 손실하고 다른 군함들이 경미한 손상을 입는 수준에서 그쳤다. 이후 영국 해군은 티르피츠를 격침시키는 임무에서 완전히 손을 떼고 격침 임무는 영국 공군에게 넘어갔다. 뒤이어 영국 공군과 미 육군항공대는 드 해빌랜드 모스키토 경폭격기나 쇼트 선덜랜드, B-17 폭격기를 동원하는 작전을 여러차례 구상했지만 대부분 실행에 옮기지는 못했다.

4.3.5. 파라베인 작전(Operation Paravane)

영국 공군은 파라베인 작전을 계획하게된다. 중장갑을 갖춘 전함을 상대로 피해를 주기는 어렵다는 판단에 이를 확실하게 날려버리기 위해여 톨보이라 불리는 5톤의 지진폭탄을 사용하기로 결정하게 된다. 톨보이를 적재한 랭카스터는 영국 본토에서 티르피츠의 정박지로 왕복할 수 없는 문제가 있었기에 소련의 야고드니크(Yagodnik)에서 이륙하게 된다. 1944년 9월 15일 소련에서 출발한 아브로 랭커스터 폭격기들을 동원하여 톨보이와 선체 하부를 노리는 5천 파운드의 조니워커 기뢰를 투하했다. 티르피츠의 연막 때문에 대부분은 빗나갓지만 한발이 함수부에 명중해서 함수부가 대파되었며 2000톤 가량의 침수가 발생했고, 지근탄으로 떨어진 폭탄들도 그 위력 덕분에 기관부에 손상을 입혔다. 독일측의 판단으로 수리가 이상적으로 진행된다고 하더라도 9개월 이상의 기간이 걸릴것으로 예상되었으며, 함장은 함의 퇴역을 건의하였다. 그러나 독일 해군은 티르피츠의 어그로 효과를 잘 알고 있었기 때문에 티르피츠가 재기할 수 없다는 사실을 어떻게든 숨기려고 했다.

4.3.6. 오비에이트 작전(Operation Obviate)

같은해 10월경 티르피츠는 노르웨이 지역의 연합군 침공을 방어하기 위한 해상 포대로 활용하고자 위치를 이동했다. 그러나 하필이면 이동한 위치가 영국의 스코틀랜드 지역에서 이륙하는 영국 공군 폭격기들의 사정권 안에 들어오고 말았다.

1944년 10월 28일 영국 공군은 다시 아브로 랭커스터 폭격기에 톨보이 폭탄을 적재하고 공습을 개시하였다. 티르피츠의 방어 준비는 덜되어 있었고 날씨도 무난한 상태라 폭격은 순조로울것 같았으나... 랭카스터가 도착하기 30초 전에 구름이 티르피츠를 가려주는 바람에 폭탄은 전부 빗나갔다. 그나마 근거리에서 떨어진 폭탄이 티르피츠의 스크류 프로펠러 축과 좌현 방향타를 파손시키는데 성공하여 티르피츠는 자력 이동능력을 사실상 상실하였다.

4.3.7. 캐테시즘 작전(Operation Catechis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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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침내 1944년 11월 12일 아브로 랭커스터 폭격기들이 다시 폭격에 나섰고 지난번처럼 기상의 방해도 없어서 주포와 대공포를 쏘며 저항하였으나 3발[10] 톨보이 폭탄이 내려 꽂혔다. 결국 주포탑 근처 갑판에 톨보이가 명중하면서 티르피츠는 결국 수 분만에 전복하여 함생을 끝마쳤다. 1,900여 명의 승조원 중 함장 베버 대령을 포함한 971명이 전사하거나 실종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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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복된 티르피츠

원래 티르피츠도 침몰당하기 직전에는 최악의 경우 침몰하더라도 마라의 선례처럼 똑바로 가라앉아서 착저하도록 하면 나중에 재수리하거나 고정 포대로 활용할 수 있도록 여러 가지 노력을 기울였다. 그래서 일부러 피오르드 지형을 선택하고 어뢰 방지용 그물을 깔았으며, 해저지형도 평탄하고 두꺼운 모래톱을 골랐다. 하지만 지반을 갈아엎는 것을 목표로 탄생한 지진 폭탄 앞에, 저 모든 대비는 의미가 없는 것에 불과했다. 명중한 톨보이 3발을 제외한 나머지 지진 폭탄이 모래톱과 주변의 바닥에 명중하는 바람에 모래톱과 해저 바닥에 큰 구멍을 뚫어놓았으며, 모래톱 전체로 봐도 큰 경사가 일어나도록 만들었다. 결국 티르피츠는 가라앉으면서 경사면이 된 모래톱과 충돌하여 옆으로 전복되는 바람에 수리 불가 상태가 되었으며, 이로 인하여 다수의 생존한 승조원들은 탈출조차 하지 못했다. 나중에 독일 측이 이들을 구하려고 용접기까지 동원해서 배 밑바닥을 뚫었지만 너무 두꺼워서 마침내 구멍을 뚫었을 때에는 내부의 승조원들은 대부분 산소 부족으로 사망하였고 비교적 빠르게 구출된 87명만이 살아남을 수 있었다.

한 가지 흥미로운 점은 격침당하는 당일에 루프트바페는 사실상 손을 놓고 있었다는 것이다. 작전 도중 랭커스터 폭격기 1대가 격추당했지만 이는 대공포에 의한 것이었다. 당시 톨보이 폭탄을 탑재하고 티르피츠를 끝장냈던 랭커스터 폭격기들은 무게를 줄이기 위해서 방어 무장을 내리고 장갑 일부를 제거한 상태라 전투기의 공격에 매우 취약했다. 다만 영국도 이를 모르는 건 아니라 폭격기들의 고도를 450m 아래로 비행한 다음 목적지에 가까이 온 다음 폭격 고도로 상승하게 하였다. 비록 독일 측이 우연한 목격으로 폭격기들의 존재는 알아차렸으나 폭격기들의 목적지는 전혀 파악하지 못한 상태로 우왕좌왕하고 있었다. 이후 폭격기들의 목표가 티르피츠라는 사실이 점점 확실해지자, 폭격기들이 도착하기 30분 전에 티르피츠는 다시 지원을 요청하였고 이번에는 JG 5 소속 전투기들이 출격하였으나 티르피츠의 위치를 파악하지 못해서 예전 정박지로 날아가는 등 삽질을 하고 있어서 도움은 전혀 되지 않았다.

그런데 그 이유가 어처구니가 없는 게 해군이 티르피츠를 이동시키면서 그 위치가 기밀이라는 이유로 아군인 독일 공군에게 알려주지도 않았던 것이다. 이런 중요한 정보를 기밀이라는 구실로 서로 공유하지 않는 모습은 어디서 많이 본 양상 아닌가? 결국 루프트바페는 티르피츠의 침몰을 방관한 셈이 되었고, 이후 JG 5의 지휘관이자 격추수 208기의 에이스이자 루프트바페 통산 격추수 10위였던 하인리히 에를러는 모든 책임을 뒤집어쓰고 처형당할 위기에 몰렸으나, [11] 결과적으로는 3년형을 선고받고 복역했고 그마저도 불과 한 달만에 1계급 강등당하는 조건으로 출소하였다. 애초에 독일 공군 입장에서는 아무리 티르피츠 격침에 관한 실책이 크다 해도 당장 본토 폭격을 막을 조종사 1명이 모자란 마당에 격추수 208기의 에이스를 처형시켜 없애거나 계속 가둬두는 것은 정말 아무런 이득이 없었기 때문이었다. [12]

5. 평가

티르피츠에게 노르웨이 사람들이 붙여준 별명으로 북해의 고독한 여왕이 있다. 1번함 비스마르크 전함이 격침당하고 혼자 여러 항구 전전하는 것 밖에는 할 일이 없었지만, 그것만으로도 영국 해군에게 잔뜩 부담을 안겨주기에는 충분했다. 당시 독일 해군 최강, 최대의 전함이었다는 것을 생각해보면 맞는 별명이다.

'항구에 있을 때 가장 강한 전함'이라는 평가도 있는데, 항구에 눌러앉아서 아직 독일에 전함 남아있다!는 위협을 하는 것이 전부였던 티르피츠의 행보를 비꼰 것이다. 물론 그래도 대전 당시엔 15인치라는 전함 자체의 강력한 화력이 어디 가지는 않아서 영국에게는 요주의 대상일 수밖에 없었고, 때문에 영국 해군과 호송선단은 티르피츠에 사소한 움직임에도 엄청나게 신경써야 했다.

이게 너무 신경을 쓴 나머지 영국은 일시적으로 티르피츠의 소재를 파악 할 수 없게되자 패닉에 빠져 오판을 내리기도 해서 PQ-17의 비극을 불러오기도 했다. 그런 점에서 본래 의도와는 다르게 사용되었지만 그럭저럭 쓸모가 있기는 했다. 말하자면 현존함대전략의 대표적 사례인 셈.

물론 이런 평가도 상세한 내용을 파악하고 있는 오늘날의 시점에서 내릴 수 있는 평가이고, 당대의 비스마르크급 전함은 설계도나 스펙은 일절 노출되지 않았으므로 실전에서 보여준 모습만 보고 성능을 추정할 수밖에 없었다. 문제는 비스마르크 추격전 당시에 영국의 최신예 전함이자 14인치 포 10문을 탑재한 킹 조지 5세급 전함의 네임쉽 킹 조지 5세와 16인치 포 9문을 탑재하여 영국 최강의 펀치력을 가진 넬슨급 전함 로드니가 초근접 거리에서 주포 일제 사격을 수차례 퍼부었는데도, 비스마르크는 영국 전함들이 연료 부족으로 철수해야 하는 시점이 되어도 가라앉지 않았다는 점이다.[13][14] 결국 비스마르크는 함포가 아니라 영국 순양함 도솃셔의 어뢰까지 맞고서야 가라앉았고, 이걸 본 영국은 독일 놈들의 전함은 16인치 포를 근거리에서 여러 발 맞아도 가라앉지 않을 정도로 단단하다고 판단할 수밖에 없었다. 당연히 같은급 전함인 티르피츠도 이런 방어력을 가졌을 것이란 유추가 나왔을 것이니 영국에게는 대단히 위협적으로 보일 수밖에 없었다. 거기에다가 비스마르크의 입장에선 우연히 명중시킨 위치가 딱 후드의 취약부분이었던 럭키샷이지만, 영국 해군의 입장에서는 영국의 자존심이 한방의 명중으로 곧바로 터져나간 엄청난 충격이었으니 같은급인 티르피츠 또한 파괴력과 정교함이 엄청날 것이라고 판단할 수밖에 없었다. 그렇기에 티르피츠와 부딪힌다고 가정하면 '주포를 때려부어도 터지지 않을 정도로 엄청나게 튼튼한 티르피츠를 잡기 위해서는 얼마나 큰 화력을 동원해야 할 지 감이 안오는데, 티르피츠가 이 상황에서 가만히 두들겨 맞고 있지 않고 맞대응을 할 것인데다가 비스마르크 때와는 다르게 티르피츠에는 다른 호위함선들과 유보트도 붙어 있을 것이므로, 당연히 우리 영국 해군 측에서 터져나갈 함선이 발생할 것이다. 그러면 이를 만회하면서까지 동원해야 하는 함선과 화력은 얼마나 되어야 하는가?' 라는 희생까지 강요해야 하는 골치아픈 계산을 해야하는 존재였고, 해군으로 밀어보다 결국 실패하면서 티르피츠의 격침임무는 공군으로 옮겨갔다.

미국 역시 노스캐롤라이나급 전함 2번함 워싱턴을 티르피츠가 북대서양으로 튀어나올때를 대비해서 상시 대기시켜두었고, 러시아로 가는 호송선단을 호위하던 워싱턴과 티르피츠가 교전할 뻔한 적도 있었다. 위의 K-21이 어뢰를 발사한 그 호송선단 습격건이다.

결국 여러가지 행운은 있었지만, 티르피츠는 자기 몫을 충실히 했다. 항구에서 놀고만 있다가 막상 출격했더니 구축함한테 패배하고 줄행랑을 쳐서 작전을 말아먹은 야마토급 전함 1번함 야마토, 같이 놀다가 출격하자마자 자기 주포로 자기 대공포 사수들을 박살내고 공습으로 침몰한 2번함 무사시, 항공모함으로 개조되었지만 활약 한 번 못하고 잠수함 한 척에 격침된 3번함 시나노 따위와 달리, 티르피츠는 영국과 소련를 잇는 북극 보급로에 매우 큰 위협이 되었다. 아직 독일에 전함 남아있다!는 위협은 영국에게는 단순히 공갈빵이 아니었고, 티르피츠가 움직일 때마다 영국은 신경을 곤두세워야 했으며 수많은 영국 군함들을 묶어두고 호송선단을 긴장시켰고 실제로 살짝 보였다가 돌아갔을 뿐인데도 PQ-17을 와해시켜 그대로 지워버리기까지 했다. 게다가 실행에 옮기지 못한 작전이 몇 번은 있었지만 영국은 티르피츠를 제거하려고 작전을 계속 진행했고, 그러한 작전으로 티르피츠가 동력을 상실하면서 사실상 전장에 나설 수 없게 되었어도 영국 수상이었던 처칠이 끝장내지 못했다고 분노하기도 했다. 이렇듯 티르피츠가 끝내 침몰할 때까지 작전을 지속한 것을 보면 덩치는 야마토보다 작았어도, 밥값은 충실히 한 셈이다.

6. 기타

7. 모형화

매우 유명한 전함임에도 비스마르크의 금형을 유용하여 티르피츠의 특징을 살리지 못하는 경우가 많다. 대신 출시 자체는 매우 많이 이루어졌다. 별다른 설명이 없다면 비스마르크의 색놀이 수준의 제품이라고 라고 보면 된다.

8. 매체에서의 등장

파일:Naval Creed 티르피츠2.jpg

9. 관련 링크

영문 위키 티르피츠


[1] 1942년 이후 갑판 위에 탑재. [2] 독일에서 하늘을 날아다니는 건 모두, 심지어 새들도 자기 관할이라고 우긴 헤르만 괴링의 어거지로 인해 해군 항공대를 보유하지 못하여 공군에서 항공기와 조종사, 정비 인력 일체가 파견되어 운용되었다. [3] 포격지원은 중순양함들이 맡았다. [4] PQ는 영국에서 소련으로 향하는 호송선단에, QP는 소련에서 영국으로 돌아가는 호송선단에 붙여진 이름이다. [5] 당시 소련 잠수함들은 공격한 선박이 침몰하는 것을 제대로 확인하지 않는 채 격침으로 기록하는 경우가 많았고, 심지어 폭음만 들리면 격침으로 기록하는 경우도 있었다. 때문에 소련 측이 전쟁 당시 기록한 잠수함 전과는 실제로 올린 전과와 차이가 많이 난다. [6] 워싱턴은 9월에 과달카날에 도착했고, 11월에 과달카날 해전을 겪게 된다.그리고 티르피츠대신 키리시마를 때려잡는다. [7] 1945년 8월까지 소련과 일본은 불가침 조약을 맻고 있었고 소련배에 선적된 미국 물건은 일본도 함부로 건들 수 없었다. 물론 그렇다고 하더라도 진주만 공습을 겪었던 미국의 입장에서는 신경이 쓰이는 건 당연하다. [8] 중앙에 갑판 위에 놓인 어뢰 발사관과 2번 주포위에 대공포좌 등의 차이가 보인다. 비스마르크와 비교해 보면 차이가 크다. [9] 오버로드 작전 도중에 있던 작전인 굿 우드 작전과는 다르다. [10] 2발이라는 설도 있다. [11] 한때 한국에서는 이게 와전되어 그가 티르피츠 격침으로 인하여 처형당했다고 알려지기도 했었다. [12] 하인리히 에를러는 이후 JG 7로 재배치되어 Me 262 슈발베를 조종했고, 1945년 4월 4일, "테오, 여기는 하인리히다. 폭격기 두 대를 격추했는데 탄약이 바닥났다. 들이받겠다. 잘 지내라, 발할라에서 만나자!"라는 무전을 남긴 뒤 충각했고 전사하였다. [13] 사실 전형적인 1차대전식 설계가 적용되었던 비스마르크는 매우 강력한 현측 장갑과는 다르게 갑판 장갑이 약점이었기에 차라리 중장거리에서 공격해야 더 빨리 격침시킬수 있었으나, 오래전부터 근접 포격전을 선호하던 영국 해군의 전통적인 성향과 기왕이면 근접 공격해서 명중률을 높이겠다는 의도가 결합되어 이러한 일이 벌어졌다. [14] 사실 비스마르크의 장갑도 장갑이지만 영국 측 전함들의 주포가 약간씩 덜떨어졌던 것도 있었다. 킹 조지 5세는 문수는 많았지만 구경이 14인치라 위력이 떨어졌고 로드니는 16인치를 달긴 했지만 이 16인치가 포탄 성능이 영 별로여서 관통력이 구경 대비 약했다. [15] 다만 울펜슈타인의 나치 독일이 누구 덕분에 현실보다 기술력이 비약적으로 상승했음을 고려하면 처음부터 저런 용도로 건조됐을 가능성도 있긴 하다. [16] 대사를 들어보면 언니가 있었다는 사실을 잊기도 하는 모양. [17] SCP 재단이 평행우주 설정을 공식적으로 받아들이고 있으며 그렇지 않아도 053-DE가 원본이 아닌 부활한 티르피츠라는 점에서 보면 원본인 417-KO의 생존 사실을 몰랐던 복사 슈트롬이 장갑판의 영혼을 따로 이용해 053-DE를 만들었다는 관계로 보면 둘이 동시에 존재하는 것 또한 가능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