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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북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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방패 원방패, 장방패, 등패, 장태
군장 띠돈, 동개, 활집, 광다회, 전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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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선(戰船) 판옥선, 방패선, 거북선, 해골선, 맹선, 과선, 협선, 사후선, 누전선 }}}}}}}}}
<colbgcolor=#000,#000><colcolor=#fff,#fff> 거북선
귀선 | 龜船
파일:전라좌수영 거북선.jpg
이충무공전서에 수록된 전라좌수영 거북선의 삽화
제작시기 조선 태종 이방원 재위기
16세기 전라좌수사 이순신 (개량)
참고 모델 고려 과선, 검선
판옥선, 거북
사용 국가 조선
주요 사용자 이순신
나대용
원균 등 그 외 조선 수군
주요 참전 임진왜란
활동 시기 조선 중기 ~ 후기
종류 갤리선[1]
층수 2~3층 (추정)
1. 개요2. 역사
2.1. 이순신 거북선의 기원2.2. 거북선의 건조2.3. 거북선의 운용2.4. 임진왜란 후 거북선의 발전2.5. 해골선과 창선 개발2.6. 이후 운용
3. 구조와 운용
3.1. 구조 및 재질3.2. 무장3.3. 편제3.4. 복원
4. 인식
4.1. 한국4.2. 일본4.3. 중국4.4. 기타 외국
5. 문화 및 대중매체6. 경상남도 짝퉁 거북선 논란7. 여담8. 같이보기

[clearfix]

1. 개요

거북선 또는 귀선()[2] 임진왜란 당시 활약했던 조선 수군 군함이다.

기존 조선 수군의 주력함이었던 판옥선을 개량한 것으로, 지붕을 덧씌워 방어력을 높이고 포문을 많이 설치하여 사격 공격을 용이하게 하도록 구조를 변경, 앞에는 용머리 형태의 충각 겸 포문을 달아 돌격전에도 용이하게 설계되었다. 세계 최초의 완전밀폐전투를 상정한 화약 시대 함선이다.

당시 수군의 전술은 배에서 직접 사격 공격을 가하는 것이 아니라 기동성이 빠른 소형 배를 타고 적함에 난입하여 근접전으로 배를 뺏거나 횃불을 던져 태우는 것이었기 때문에 옻칠한 나무 지붕에 쇠못을 빼곡하게 박은 거북선에는 상륙 자체가 불가능하여 통하지 않았고, 거기다가 근접을 허용하지 않을 정도의 화력[3]으로 적함을 격침시켰기 때문에 임진왜란 당시에는 말 그대로 해상 요새 수준의 위용을 자랑했다.

임진왜란 당시 조선 수군에는 전라 좌수군 방답진에 소속된 방답 귀선, 전라 좌수영 본영에 소속된 영귀선, 통제영 창설 이후 건조된 통제영 귀선의 3척이 있었다. 하지만 이들은 원균 칠천량 해전 당시 모두 침몰했다.

2. 역사

2.1. 이순신 거북선의 기원

세간에는 이순신이 직접 철갑선[4] 거북선을 개발했고 직접 탑승했을 거라는 통념이 있으나, 사실 조선 수군의 주력은 판옥선이고 이순신도 거북선을 처음 개발한 인물이 아니다. 물론 현대에 일반적으로 알려진 거북선으로 개량한 건 이순신이 맞다.

고려말 조선초에는 한반도의 혼란을 틈타 왜구의 침략이 극심했으며 태조 이성계도 지리산까지 올라온 왜구와 싸워 대승을 거둔 적 있다. 세계 최초의 화포 무장 함대인 최무선의 누전선-맹선-판옥선 테크트리에서 보여지듯 조선 수군의 전선의 발전은 왜구의 계속해서 발전하는 해적선에 대항하기 위해 시대적으로 불가피했다.[5] 이순신의 거북선 177년 전인 태종 13년에 언급된 거북선 또한 당시 만들어진 실험적인 전선이었으며, 이후 이어지지 않은 걸 보면 효용성이 떨어지는 불완전한 함선이었을 것이다. 따라서 최초로 실용적인 거북선을 개발하도록 지시하고 해전에서도 거북선을 운용한 건 이순신이다.

거북선은 고려 시대에 개발되었던 군함 과선(戈船, 배에 창칼을 박아 적의 침입을 막음)과 여말선초의 검선(劍船)을 참고한 듯하다. 그 후, 묻혀 있던 것을 새로운 형태로 부활시킨 것이다. 태종실록에도 '거북선'에 대한 언급이 두 차례 있으나, 임진왜란 당시의 것과는 이름은 같지만 세부 구조도 같을지에 대해서는 설계가 전해지지 않아 전혀 알 길이 없다.[6]
임금이 임진도(臨津渡)를 지나다가 거북선[龜船]과 왜선(倭船)이 서로 싸우는 상황을 구경하였다.
- 통제원 남교에서 머무르다. 임진도를 지나다가 거북선과 왜선이 싸우는 것을 구경하다 (태종실록 25권, 태종 13년( 1413년) 2월 5일 갑인 1번째 기사)
여섯째는, 거북선[龜船]의 법은 많은 적과 충돌하여도 적이 능히 해하지 못하니 가위 결승(決勝)의 좋은 계책이라고 하겠습니다. 다시 견고하고 교묘하게 만들게 하여 전승(戰勝)의 도구를 갖추게 하소서."
- 좌대언 탁신이 병비에 대해 올린 사의 조목 (태종실록 30권, 태종 15년( 1415년) 7월 16일 신해 2번째기사)

태종실록 30권(태종 15년) 좌대언 탁신이 올린 상소에 "거북선(龜船)의 법은 많은 적과 충돌하여도 적이 능히 해하지 못하니 가위 결승(決勝)의 좋은 계책이라고 하겠습니다. 다시 견고하고 교묘하게 만들게 하여 전승(戰勝)의 도구를 갖추게 하소서."라는 구절이 있어 적을 방어해내기 위한 방호 장비는 갖춘 것 같다.

일설에 나대용이 거북선의 제작자라 하지만 공식 기록에는 등장하지 않고 야사에만 등장한다. 거북선이 워낙 유명하다보니 누군가가 거북선 제작에 관여했다는 야사는 매우 많다. 배한성의 고전열전에선 나대용 설을 채택했는지 이 사람이랑 동생이 어느날 이순신 앞에 설계도를 가져와서 브리핑한다. 다른 야사에는 조선 중기의 유학자이자 도인이었던 송구봉이 임란을 예견하고 거북선의 설계도를 만들어두었다가 이순신에게 주었다는 설이 있다.

2.2. 거북선의 건조

2월 8일. 이날 거북선에 쓸 돛베 29필을 받았다.
3월 27일. 거북선에서 대포 쏘는 것도 시험하였다.
4월 12일. 식후에 배를 타고 거북선에서 지자포, 현자포를 쏘아 보았다.
난중일기

이순신 거북선은 임진왜란 발발 직전 처음으로 건조완료 되었으나 첫 출정에 바로 투입시키지 않고 2차 출정부터 투입하여 사천 해전을 시작으로 혁혁한 공을 세웠다.

초기에는 적어도 3척이 건조되었고 전쟁 중반에는 5척까지 확인되었다. 이후 칠천량 해전 직전까지 7~8척까지 보유한 것으로 보이나 원균이 조선 수군을 통째로 말아먹은 다음에는 더 이상 만들 여력이 없었다.

임진왜란 후에도 효용성을 인정받은 거북선은 전후 20여년부터 다시 건조되기 시작하여 200년 후인 정조 대에는 40척까지 운용했다. 정조 대에는 대포가 36문인 전라좌수영 거북선, 72문인 통제영 거북선 등 종류도 다양해지고 형태도 이순신 대와 비교하여 많이 달라졌다. 정조 이후에는 점차 줄어들다가 1895년 삼도수군통제영 혁파를 계기로 완전히 사라졌다.

2.3. 거북선의 운용

당시 조선 수군의 전술은 원거리에서 화포로 적선을 부순 뒤 근접하여 화공 등으로 가라앉히는 것이었다. 반면 왜구는 근접하여 조총을 쏘거나 승선하여 백병전을 벌였다. 이순신 거북선은 조총 공격에 상대적으로 취약한 판옥선에 개판(뚜껑)을 달아 장갑화하고 적진 깊숙히 돌진 및 화포 위주의 전술로 적의 진형을 뒤흔드는 역할을 맡았다.
(1) 적 대장선과 적장을 목표로 돌진하여 격파, 이 과정에서 적진 깊숙히 침투[7]한 거북선이 화포를 요란하게 터뜨리며, 결과적으로 적 부하의 사기를 떨어뜨린다
(2) 당파전술 : 적 진형, 특히 대장선을 포함한 정예함선에 돌격하여 진형을 박살내는 한편, 사방에 장착한 화포로 적선을 박살낸다. 당파라는 말을 보고 충각 전술로 여기는 경우가 많으나, 판옥선 구조인 거북선이 충각을 시도한 건 대장선 정도 뿐이었으며, 그보다는 적 진형에 깊숙히 파고들어 뒤흔드는 역할 때문에 당파로 이름붙인 것이다.

해당 전술들은 원거리에서 화포[8]를 쏘는 조선 수군의 전술과 상반됨을 알 수 있다. 이를 통해서 거북선이 특수목적 함선이지 주력함선이 아니라는 것을 알 수 있다.

조총과 화살에 끄덕없는 거북선 몇 척이 적 진형 깊숙히 파고들어 적진을 와해시키는 동안 화포로 무장한 대량의 판옥선이 대형을 형성하여 화력으로 적을 안팎에서 섬멸하는 것이 이순신이 대승을 거둔 해전의 기본 법칙이다. 당시 화포는 명중률이 시원찮았기에 근거리까지 접근[9]해야 했고, 적진 깊숙히 돌진하는 장갑 거북선과 학익진으로 십자포화를 퍼붓는 판옥선은 당시의 사정거리가 짧은 대포를 운용하는 최고의 전술이었다.

2.4. 임진왜란 후 거북선의 발전

이순신 거북선은 14문의 대포를 장착하고 용머리에서도 화포를 발사했다. 현대 알려진 용머리와 상당히 다른 형태로 추정되는데, 당시 화포 특성상 재장전을 위해 상당한 공간이 필요해서다. 그런데 현대에 알려진 것 처럼 위로 솟아오른 용머리는 단발이라 실용성이 없다.

200년 후 정조대에 만들어진 전라좌수영 거북선은 36문의 대포를 탑재했고 실제 거북처럼 높이가 낮은 거북머리에서 연기를 토해내는 것으로 바뀌었다. 또한 등껍질에 해당하는 개문의 칼 송곳도 사라졌다. 통제영 거북선은 무려 72문의 대포를 실을 정도로 거대해졌다.

이순신 종가에 남겨진 거북선도는 조선 후기 거북선으로 추정되는데, 장갑화된 거북선의 등 중앙에 좌막 (작은 갑판)이 올려져 추가로 병사를 배치할 수 있었다. 2004년 뉴욕에서 처음으로 소개된 거북선 채색도에 나온 좌수영 거북선 2척과 통제영 거북선 2척 또한 이순신 종가의 거북선도와 유사한 모양이다.

2.5. 해골선과 창선 개발

파일:attachment/turtleship_next.jpg
이후 거북선의 후계함으로 매의 형태를 한 해골선(海鶻船)[10]이란 배가 개발된 기록이 있으나, 해골선의 모양에 대한 자료는 많지 않다. 2007년 해골선의 그림으로 추정되는 자료가 발굴되어 귀여운 외모로 많은 관심을 끌었다. 이후, 이 그림이 진본이라는 것이 밝혀지자 학계의 연구가 이쪽으로 쏠리는 일도 있었다.

다른 후계선인 창선은 1606년 나대용이 만든 것으로, 판옥선이나 거북선하고는 다른 배로 배에 창검을 빽빽하게 꽂아놓은 쾌속선이라는 것이 실록에 나오나, 여타의 자료는 없다.

2.6. 이후 운용

누선을 거북선으로 고칠 것을 경상좌도 수군 절도사 최동악이 치계하다

경상좌도 수군 절도사 최동악(崔東岳)이 치계(馳啓)하기를,

"누선(樓船)은 거북선처럼 민첩하지 못한데, 본영에는 누선만 많고 거북선은 적습니다. 누선 6척을 거북선으로 고치소서."

하였는데, 비변사가 아뢰기를,

"누선 10척 가운데 3척을 거북선으로 만들면 적절할 듯합니다."

하니, 따랐다.
정조실록 33권, 정조 15년 11월 21일 임진 2번째 기사  1791년 청 건륭(乾隆) 1791년 청 건륭(乾隆) 56년
정확히 언제까지 운용했는지는 기록의 부재로 알 수가 없다. 다만, 1791년 정조실록의 기록에 따르면 그때까지 거북선을 운용했다는게 보이고, 4년 후인 1795년 정조의 명으로 편찬된 이충무공전서에는 거북선의 그림이 남아있어 조선후기 거북선이 어떻게 생겼는지는 대략적으로 짐작이 가능하다.

이충무공전서의 귀선도설(龜船圖說)에는 두 가지 거북선 그림과 함께 각 부재의 치수가 상세히 나와 있어, 우리는 비로소 거북선의 구조에 좀 더 구체적으로 다가설 수 있다.

다만, 이것이 이순신 사후 200여년이 지난 후 그려진 것이라는 점에서 당대에도 이런 모습으로 운영했는지는 알 수가 없는 자료다.
의정부(議政府)에서 아뢰기를,

"방금 공충 전 수사(公忠前水使) 임상준(任商準)의 보고를 보니, ‘본 영에서 전선(戰船)·귀선(龜船)·방선(防船)·병선(兵船) 등 배 6척을 모두 개조하였으며, 전선 2척은 배 위에서 가장물을 설치하여 조운선(漕運船) 모양으로 만들어 통용할 수 있게 하였습니다.’라고 하였습니다.
- 고종실록 3권, 고종 3년 12월 28일 계축 1번째기사 ( 1866년)
나주(羅州)의 두 귀선장(龜船將)의 부대는 군오(軍伍)가 정제되어 있고 조련(操鍊)에 나가기에도 모두 편리하니, 전선(戰船) 1척(隻), 병선(兵船) 1척, 사후선(伺候船) 2척을 아무 모양으로 배치하되 전선 1척에는 원래의 방수군(防水軍) 800명과 사부(射夫) 90명을 부근의 각읍(各邑)에 있는 군병 가운데에서 편리에 따라 떼 주어 급할 때 달려가서 모이도록 하소서.
- 고종실록 23권, 고종 23년 4월 20일 계미 3번째기사 ( 1886년)
또한, 조선왕조실록의 기록을 보면 고종대인 조선 말기에도 거북선은 운용되었던 것으로 보인다.
우리나라는 삼면이 바다여서 수군이 반드시 필요합니다. 고(故) 통제사(統制使) 이순신은 수군의 명장이었습니다. 거북선을 만들었는데 그 모습이 매우 기이했고 병사를 부리는 데 법도가 있었습니다. 그러나 후세의 사람들은 그 법을 끝내 익혀서 새롭게 만들지 못했고, 배를 손질하여 더욱 정밀하게 만들지 못했습니다. 이 때문에 지금에 이르러 그 병법과 함선이 함께 없어졌으니 애석한 일입니다.
박영효. 1888년에 올린 상소문 중.
그외 박영효 갑신정변에 실패한 이후인 1888년 고종에게 보낸 상소문인 '건백서'에서 “삼면이 바다인 조선엔 반드시 해군이 필요하다.”라는 글을 남기며 거북선과 관련된 글을 기록했는데, “예전엔 거북선 같은 함선이 있었으나 애석하게도 지금은 그 모습을 알지 못한다.”고 기록한 것을 볼 수 있다.

그러나 이 상소문이 올라오기 불과 16년 전에 흥선대원군에 의하여 제작된 1872년 지방지도에서는 거북선이 보이는 것으로 보아서 거북선이 완전히 사라졌다기보다는 그 운용 수량이 크게 줄어든 것으로 보인다.

3. 구조와 운용

3.1. 구조 및 재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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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2. 무장

파일:external/upload.wikimedia.org/320px-Chongtongs-Jinju_Castle.jpg

진주성에 전시되어 있는 조선 시대 총통과 대장군전 모형. # 거북선도 이런 총통들을 사용하였다.

조선의 주력 화포였던 총통을 주로 장비하고 있던걸로 보이나, 사실상 총통의 대표 아이콘격인 천자총통은 임진왜란을 거치면서 조선 수군 전반에서 별로 사용되지 않았던걸로 추측된다.

난중일기에도 초기에는 천자포에 관한 기록이 보이다, 뒤로 갈수록 전쟁으로 인한 물자 부족과 왜선이 워낙 약해서(...) 현자총통, 지자총통, 황자총통만으로도 충분했기에 점차 사라졌다.[11]

드라마 < 임진왜란 1592>의 거북선 황자총통 발사 장면(gif).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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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일:Guiseon_gif1.gif


아직까지 전해져 내려오는 완전한 형태가 남아있지 않아서 앞에 달려있는 거북이 머리(용머리)에 관해서는 다른 의견들이 많다.

입에 총포가 달려있는 총포문이었다는 설이 있고, 대포문이었다는 설도 있으며, 불을 뿜게 만들었다는 설도 있다.[12] 미국 히스토리 채널에서는 독가스를 뿜는 화학전 분사기라고 방영하기까지 했다.

독가스 분사구까지는 아니지만, 적의 공포심을 유발하기 위하여 용머리 안에서 유황 등을 태워 마치 용이 입에서 연기를 뿜는 것처럼 보이도록 한 것이라는 설도 있다.

널리 알려진 또 다른 설로 다른 배를 부딪쳐서 파괴하는 충각설도 있지만 학술적 근거는 없으며, 고 김재근 선생의 저서 <한국의 배>에 기초해 보면 전라 좌수영 귀선의 용머리 외에 선체 하부에 설치한 귀면의 용도에 관한 설과 헷갈린 것으로 보인다.

일단은 총포문이나 대포문이었다는 설이 가장 유력하다. 현존하는 거북선은 1980년대에 복원되어 다시 만들어진 복제품들이다.

3.3. 편제

거북선(龜船)은 전쟁에 쓰기는 좋지만 사수(射手)와 격군(格軍)의 숫자가 판옥선(板屋船)의 1백 25명보다 적게 수용되지 않고 활을 쏘기에도 불편하기 때문에 각 영(營)에 한 척씩만을 배치하고 더 이상 만들지 않고 있다.
- 선조실록 206권, 선조 39년 12월 24일 무오 3번째기사 전 현령 나대용의 상소 가운데 창선을 건조하여 쓸 만한지를 시험하게 하다
"수군의 제도는 《대전(大典)》을 상고하여 보니, 대맹선(大猛船) 1척에 수군 80명, 중맹선에는 60명, 소맹선에는 30명이라 하였는데, 대맹선은 지금의 전선(戰船)이요, 중맹선은 지금의 귀선(龜船)이고, 소맹선의 지금의 방패선(防牌船)이니, 병선(兵船)의 종류입니다. 그런데, 선제(船制)가 차츰 커져서 큰 것은 좌우 노로(櫓櫨)[13] 사이가 혹은 24간에 이르고 노젓는 군사가 1백 20명이 필요하니, 고제(古制)의 80명의 노군(櫓軍)으로는 결코 운용할 수가 없고 귀선과 방패선의 노군 역시 그 수로 기준을 삼기가 어려운데, 토졸(土卒)로서 구차하게 수를 채워 실제로 허술하게 되었으니, 한번 변통하는 것은 사세상 그만두어서는 안됩니다.

(중략..)

각 선군(船軍)의 제정(制定)한 액수에는 전선(戰船) 1척에 선직(船直)·무상(舞上)·타공(舵工)·요수(繚手)·정수(碇手)·사수(射手)·화포장(火炮匠)·포수(砲手)·포도장(捕盜將)·노군(櫓軍)이 도합 1백 64인이요, 귀선(龜船)은 1백 48인이며, 정탐선(偵探船)은 79인이요, 병선(兵船)이 17인이며, 사후선(司候船)은 5인입니다. 각영과 진의 방군(防軍)에서 군포(軍布)를 마련한 수효에는 통영(統營) 8전선(戰船)의 원방군(元防軍)은 방군을 세우지 않고 사부(射夫)와 첨사부(添射夫)가 모두 7천 6백 36인으로 매인당 면포(綿布) 2필씩을 받는데 풍고(風高)와 풍화(風和)의 각 6개월에 대한 급대(給代)의 수량 및 각선(各船)의 육물가(陸物價)와 우후(虞候)에 속한 급대(給代)와 삭포(朔布)의 수량을 공제하면 여포(餘布)가 6천 5백필 남짓합니다. 좌수영·부산(釜山) 등의 진과 전라(全羅) 좌·우수영 및 방답(防踏) 등 진의 여포도 이에 준하여 다과(多寡)는 다르나 각기 정수(定數)가 있습니다. 각선의 육물가(陸物價)를 또한 마련하였고, 전선·병선·사후선·정탐선·귀선(龜船) 1척에 대해 1년에 드는 물건과 초둔(草芚) 진석(眞席) 같은 종류에까지도 모두 차등을 두어 값이 메겨져 있고, 심지어는 사후선(司候船)에 쓰는 표주박 2개의 값까지도 면포 3척 6촌으로 정해져 있습니다."
- 숙종실록 40권, 숙종 30년 12월 28일 갑오 3번째기사 이정청에서 오군문의 군제를 고치고 수군을 변통하는 절목을 올리다

임진왜란 당시 거북선 1척에는 판옥선의 약 125명 보다는 더 많이 승선한 것으로 보이는데, 이는 전시 병력 부족으로 인해 최소한으로 승선했던 숫자로 보인다. 전후 숙종 대의 기록에 따르면 정상적인 편제라면 약 150여명이 승선했던 것으로 보인다. 여기에 부선장만 추가하면 오늘날의 중령급 함장이 지휘하는 함과 편제가 거의 일치한다.
8/18/128

영관
선장(귀선 돌격장) 1명 ✳✳

위관
좌·우 포도장 각 1명 ◊◊◊
장령 6명 ◊

부사관
선직 2명 《
무상 2명 《
타공 2명 《《《
요수 2명[14] 《《
정수 2명[15] 《《
화포장 8명 《《


화포수 24명
사부 14명
노군 90여명

이순신 하면 거북선이지만 이순신 함대에서 거북선은 주력함이 아니었으며 현재 알려진 만큼 함대 내에서의 전략적 중요도도 그리 높지 않았던 것으로 보인다. 거북선의 건조는 극소수만 이루어졌고, 이를 칠천량에서 다 잃고 난 다음 명량 해전 이후 건조할 여유가 있는 상황에서도 이순신은 단 1척도 거북선을 건조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다만, 이순신 입장에서는 칠천량 해전에서 큰 손상을 입은 수군을 시급히 재건해야 하는 입장에서 건조비와 시간이 많이 드는 거북선을 후순위로 미루었다고 해도 이상할 건 없다. 그리고 왜란 후반기에는 거북선의 위에서는 공격할 수 없다는 약점을 파악한 일본군이 그걸 역이용해 박살내기도 해서 왜란 초기만큼 거북선이 위협적이지 못한 탓도 있다.

3.4. 복원

현재까지 실물로 복원된 거북선은 역사 속에 남아있는 거북선 그림과 닮은 것이 하나도 없다.

현대 거북선의 조선공학적 복원의 시초는 김재근이다. 역사적 기록을 보면 이순신과 이후의 거북선은 판옥선을 기반으로 하고 있다. 하지만 거북선 실물을 본 것으로 추정되는 H. Hulbert 의 기록에 따르면 판옥선의 3층 구조가 아닌 2층 구조로 소개되어 있으며, 이것이 현재 지배적인 김재근 학설 (2층 거북선)의 근간이 된다. 그런데 김재근의 2층 구조로 복원하려니 이미 연구가 잘 되어 있는 판옥선의 3층 구조에 비해 공학적, 실용적으로 매우 불리한 구조라 계속 논란이 되고 있는 것이다.

거북선이 철갑선이었고 철로 뚜껑을 덮었다는 기록은 우리나라에는 전혀 남겨져 있지 않다. 오직 외국에서만 철갑선 주장이 발견되는데, 임진왜란 당시 일본 측의 고문서, 그리고 일본을 통해 내한했던 구한말 외국인의 저서에서만 언급된다. 따라서 거북등처럼 나무를 겹겹이 짠 장갑판에 철못이 박힌 형태가 아닌 현재의 철갑 지붕에 못이 박힌 거북선은 고증없이 성급하게 복원된 것이다.

4. 인식

4.1. 한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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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계 후손인 덕수 이씨 충무공파 종가에서 보관 중인 귀선도.

한국인들 사이에서는 자긍심의 상징물로도 쓰인다. 비유하자면 영국에서의 슈퍼마린 스핏파이어와 같은 이미지를 가지고 있다고 볼 수 있다.[16]

한때 경상남도에서는 임진왜란 때 침몰했을 거북선을 찾기 위해 수중 탐사 중이라고 했으나,[17] 현재 중단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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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은 안 쓰이는 지폐인 500원짜리 지폐와 현용 5원짜리 동전에도 거북선이 도안되었다.

대한민국 해군의 대부분 부대 마크에 필수 요소다. 각 해역 함대와 해군작전사령부, 해군교육사령부 등 주력 부대, 제7기동전단, 충무공이순신함 등 전단, 함정 마크에도 사용된다. 또 장교 정모[18]와 함정에 근무하는 승조원 뱃지에도 들어가며[19], 사관실 식기에도 전부다 거북선이 박혀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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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7기동전단 부대 마크 충무공이순신함 함정 로고 해군교육사령부 부대 마크

또한, 여천시 삼여 통합 전의 마지막 휘장에도 사용되었다.

4.2. 일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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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순신과 히데요시' 일본에선 과장 보태서 이런 이미지인 듯하다. 당시의 일본 수군 입장에서 거북선을 봤다면 총도 화살도 먹히지 않고 가까이 접근하는 자신들의 군함은 대포 몇 발로 모조리 격침시켜 버리는 모습에 괴수와도 같은 위압감을 느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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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일본인이 그린 또 다른 그림.

실제로 에도 막부 시대에 거북선을 복카이센沐海船(=목해선)이라고 부르면서 이것을 가토 기요마사가 퇴치한다는 내용의 연극[20] 또한 성행했다고 한다. 일본인들의 충격이 심했던 모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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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진왜란 당시 거북선의 뛰어난 활약을 본 일본군은 거북선과 비슷하게 상부 구조를 덮은 배를 만들었다는 기록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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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로 이것. 메쿠라부네도 참고.

일본내에서 종종 한국 반일의 상징이라하여 혐한성향 일본인들이 만든 프로파간다 영상의 희생양이 되기도 한다.

4.3. 중국

직접적으로 거북선의 영향을 받은 것인지는 분명치 않으나, 임진왜란 이후 만들어진 중국의 문헌에 응선(鷹船)이라는 배 역시 이 거북선을 닮았다. 이 배는 임란 이후 일본에서 만들어진 예술 작품인 <회본태합기>에 조선 거북선으로 등장한다.

사족으로 <회본태합기>에 등장하는 조선 수군의 배는 다 중국 병서에 실린 중국 배의 모습이다. 전쟁이 끝난 후, 에도 막부 시대에 나온 책인지라 일본인 삽화가가 조선 수군의 배를 실제로 보지 못해서 참고 자료로 본 책이 중국 병서였기 때문이다.

이충무공전서에서는 명나라 화옥이 쓴 해방의(海防議)에 "조선의 거북선은 돛대를 세우고 눕히기를 임의로 하고 역풍이 불건 퇴조 때이건 마음대로 간다"라는 구절을 인용하고 있다.

4.4. 기타 외국

세계 최고의 해군 명장 중 하나로 꼽히는 이순신 장군과 함께 상당한 지명도가 있는 함선으로, 조선 함대와 이순신 장군의 전공 및 전략전술을 상징하는 배라 해도 과언이 아니다.

미 해군연구소의 조사결과를 비롯해 각종 칼럼이나 분석 기사 등에서 거의 예외 없이 USS 엔터프라이즈 같은 전설적 수훈함들과 어깨를 나란히 하며 역사상 최고의 군함으로 이름을 올리고 있다.

5. 문화 및 대중매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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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 경상남도 짝퉁 거북선 논란

김태호 경상남도지사가 2007년 역사 및 문화자원 개발 사업인 '이순신 프로젝트'를 추진하면서 실제 1592년 당시 모습과 똑같은 거북선과 판옥선을 각각 제작하기로 했다.[21] 여기에 국비, 도비 합쳐 총 20여억원 가량의 사업비가 들어갔다.

그런데 2011년 7월 경상남도의회에서 원래 쓰기로 한 금강송 대신 미국산의 저가 소나무[22]가 사용되었다는 의혹이 제기되면서 논란에 불이 붙었고, 이후 경찰수사에서 실제로 수입산 목재를 80% 이상 사용한 것이 밝혀졌다. 결국 경상남도는 해당 제작업체를 상대로 손해배상 청구 소송을 제기했으나, 소송 진행에 실익이 없다고 판단해 법원의 화해 권고를 받아들였고, 경상남도는 제작업체에게 약 7억원의 계약 보증금을 돌려받는 조건으로 2척의 배를 인수했다. 이후 거북선은 거제시에, 판옥선은 통영시에 넘어갔다.[23][24]

문제는 거북선이 제대로 만들어지지 않았다는 것이다. 이 거북선을 바다에 띄우자 바닥에서는 물이 새고(..)[25], 균형이 맞지 않아 기우뚱했다고. 결국 2011년 6월 7일 거제 앞바다에 띄워졌던 거북선은 얼마 버티지 못하고 2012년 뭍으로 끌어올려 조선해양문화관 마당에 전시했다. 이후 관리비로 1억 5천여만원이 사용되었지만 소금기를 머금은 바닷바람과 비에 노출된 거북선은 빠른 속도로 부식되었다.

결국 감당이 되지 않아 민간에 매각을 결정하고 감정가액 1억 1750만원으로 경매 입찰 공고를 냈으나 무려 7차례나 유찰되면서 입찰가는 계속해서 떨어졌고 8차 입찰에서 154만 5380원에 낙찰되었다[26]. 평가금액의 1.31%라고(..).. 관련기사

하지만 거북선이 주인이 바뀌면서도 문제가 완전히 사라진건 아니었는데, 거북선을 옮기는 것이[27] 현실적으로 불가능에 가까웠기 때문이다. 낙찰자인 신씨는 칠천량해전공원 같은 이순신 장군 관련 시설에 거북선을 기부할 생각이었고, 처음에는 받아주겠다는 곳도 많았으나 이동과 관리에 대한 문제 때문에 결국은 대부분의 시설에서 기부 받기를 거절했다. 결국 거북선을 조선해양문화관에서 차로 10여분 거리에 있는 자신의 소유지로 옮겨 역사교육용 현장체험 시설로 활용할 계획이었으나 신씨의 땅이 한려해상국립공원 구역 안에 있어 공원계획 변경 허가 등 번거로운 절차가 남아있었기 때문에[28] 이마저도 요원했다. 게다가 선체가 워낙 낡아 옮기는 과정에서 선체가 손상되거나 사고가 날 위험성도 컸다고. 거제시와 신씨는 대금 완납 이후 30일 이내에 거북선을 이전하지 않으면 계약을 취소하고, 철거하기로 했는데 결국 이동을 포기하게 되면서 철거하게 되었다.[29]

2023년 7월 11일, 20억원이 들었고 154만원에 낙찰된 이 기구한 운명의 거북선은 결국 철거되었다. 부식이 워낙 심한 나무는 소각장에 불태우고, 철물은 고물상에 보내기로 했다.[30] 철거 자체에만 3000만원의 비용이 소모된다고 한다. # #

7. 여담

8. 같이보기



[1] 흔히 최초의 철갑선이라고 알려져 있지만 이에 대해 논란이 많으며, 일부는 철갑선이 아니라고 주장하기도 한다. 전체적으로 보아 갤리선임은 확실하다. [2] 일본어 위키백과에는 귀갑선(亀甲船)이란 이름으로 등록되어 있다. [3] 이에 대해선 이설이 있는데, 당시 선박의 화포 가용수 등을 고려해 대포만으로 교전거리를 유지한다는 것이 힘들고, 따라서 근접전을 전술의 일부로 포함시켰을 것이라는 주장이 있다. 박시백의 조선왕조실록에선 초창기에는 '포로 헤집어 놓은 후 들이받는 전술'이 등장하기도 했으나 개정판에선 다른 학설을 수용하여 수정한 모양. [4] 단, 조선 측에선 거북선을 철갑선이라 기록한 것이 없고, 대부분 왜구 측의 보고에서 찾을 수 있었다 한다. # [5] 조선 조정과 수군은 건국 직후부터 왜구의 침입에 대항하여 투자와 신형함 개발들을 지속적으로 해왔다. 가령 을묘왜변 이후 조선은 수군력을 크게 강화하게 되면서 판옥선을 도입하게 되는데 그때 당시 발생했던 소함주의자와 대함주의자간의 토론 등이 바로 그런 수군력 강화의 고민들이 담긴 산물들이었다. [6] 임진왜란 이전의 조선 기록은 실록을 제외하면 대부분 전해지지 않는다. [7] 당연히 적이 화포를 가지고 있다면 즉시 십자화포 맞고 침몰할 것이 뻔한 무모한 전술이지만, 일본군은 노량 때까지도 제작 기술의 한계와 해상 전투 경험의 부족(조선은 고려 시대부터 대형 화포를 사용한 해상 전투 경험이 있었고, 명나라는 그보다 더 오래 된 경험을 가지고 있었다)으로 해전용 중화포를 가지지 못했다. 불랑기포가 있기는 했지만 주력은 아니었고 그 수도 적었다. 여기에 가시박힌 뚜껑까지 달아놓으니 백병전이 주력 전술이던 일본군 입장에서는 거북선을 어떻게 할 방법이 없던 것. [8] 정확히는 거리마다 화포를 바꿔서 사용했으며 모든 화포들의 최소 사거리 안으로 들어올시 불화살을 사용했다. [9] 천자총통은 200보 내일 때 발사했으며, 100보 이내로 왜선이 접근하면 승자총통, 조총, 국궁, 쇠뇌 등을 활용하여 공격했다. 200보는 고작해여 277m밖에 되지 않았다. 지상 운용시 이보다는 멀리 날릴 수 있지만 해상운용의 한계로 200보가 최선이었던 것. 물론 현대 기준으로 근거리지, 당시 기준으로는 장거리 공격 수단이 맞긴하다만 어쨌든 약 200m라는 절대적인 거리는 사람이 달리면 약 1분 이내에 도달할 수 있었기에 결코 방심할 수 없는 거리임이 분명했다. [10] 죽은 사람의 뼈를 의미하는 해골(骸骨)이 아니라, '바다매'를 뜻한다. [11] 구경도 크고 파괴력도 어마어마하지만 화약을 많이 잡아먹고 무엇보다 상술되었다시피 오버파워다. [12] KBS의 <역사스페셜>에서 거북선 머리가 출납식이었을 가능성을 제시하고 있다. [13] 노로(櫓櫨) : 배의 노와 돛대. [14] 돛 담당 [15] 닻 담당 [16] 영국 본토 항공전에서도 거북선 포지션의 스핏파이어는 소수였고, 숫자적으로 주력은 판옥선 포지션의 호커 허리케인이었다. [17] 하지만 목선은 신안 보물선처럼 아주 무거운 화물을 실은게 아니면 침수로 끝나지 침몰되지 않는다, 난중일기의 기록에도 침수되었다고 했지 침몰했다는 기록은 없다. [18] 앵카에 거북선. 부사관 정모는 앵카에 무궁화 [19] 장교는 금색 뱃지, 부사관은 은색 뱃지. 잠수함 승조원은 같은 색상에 돌고래 모양이다. [20] 물론, 역사 속에서는 가토 기요마사와 거북선은 서로 만난 적이 없다. 사실 가토 기요마사는 육군이었고 전라도에는 들어가지도 않았기 때문.(경상도를 통해 한양, 함경도까지 왔다가 퇴각했다.) 대신 가토 요시아키는 만난 적이 있다. [21] 때문에 각각 완성된 배의 이름도 1592년 거북선, 1592년 판옥선이었다. [22] 흔히 미송이라 불리는 목재. [23] 이후 김태호 전지사의 후임인 김두관 전지사가 2011년 9월, 짝퉁 거북선 논란에 대해 도민들에게 사과했다. [24] 이후 제작을 담당했던 조선소 대표는 징역 4년을 선고받았다고.. [25] 물이 많이 새서 24시간 동안 펌프로 물을 퍼내며 떠있었다고 한다. [26] 해당 거북선을 낙찰받은 신아무개씨는 그래도 거북선을 폐기할수 있다는 소식이 너무나 안타까워 입찰에 응했고, 이순신 장군의 탄생일인 1545년 3월 8일에 맞춰 154만 5380원을 적어냈다고 밝혔다. [27] 길이 25.6M, 폭 6.87M, 높이 6.0M에, 무게가 무려 122t이나 나갔다(..). [28] 순탄하게 처리되더라도 1년 넘게 걸리는 일이다. [29] 인수기한을 한달 정도 연장하는 방안 또한 검토했으나 태풍, 장마 전에 옮겨야 해서 시급했다고. [30] 고물로 처리하면 150만원 정도 받을 것이라고 한다. [31] 역사속 오버 테크놀러지를 탐구한다. 국내에서의 방영명은 문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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