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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시아주의

흥아론에서 넘어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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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2. 역사
2.1. 시초2.2. 탈아론2.3. 흥아론의 등장과 변질2.4. 변질의 이유2.5. 대한제국의 아시아주의2.6. 쑨원의 아시아주의2.7. 조선 개화파와의 관계2.8. 일본 좌익의 아시아주의2.9. 현대의 아시아주의
3. 관련 문서

1. 개요

아시아주의(亞細亞主義, Asianism)는 아시아 국가들 간의 연대를 주장하는 사상이다. 범아시아주의, 대아시아주의, 흥아론, 혹은 당시 표기 기준에 따라 아세아주의라고도 한다.

일반적으로 근대의 아시아주의는 메이지 유신 이후 일본 제국에서 제기된 흥아론이 그 원류로 꼽히지만, 근대 이전에도 유사한 개념은 여러 나라에서 존재해왔다. 20세기 일본 제국 시절엔 대동아공영권처럼 제국주의의 변질판으로 오용되기도 했지만, 일단 기본적인 개념 자체는 배타적 사고보단 개방적인 사고에 기초를 두고 있다.

실제 아시아주의는 후술되어 있듯 각양각색의 형태로 변주되어 왔다. 쑨원의 범아시아주의 등이 대표적이다. 때문에 그 범위 또한 다양하여 좁게는 동아시아 한중일 삼국에서 넓게는 인도를 비롯한 남아시아, 동남아시아, 서아시아까지 포함할 수도 있다. 이는 '아시아'라는 개념이 상당히 포괄적이기 때문이다. 여담으로 유럽판 유럽주의가 만들어낸게 EU이며, 더 넓게 가면 범세계시민 사상과도 연관이 될 수 있다.

2. 역사

2.1. 시초

아시아주의는 19세기 말 ~ 20세기 초까지는 그럭저럭 한중일 3국에서 인기가 있던 사상이었다. 19세기 중엽, 서구 열강의 동양 침략이 본격화하자 한중일 3국은 위기감을 느껴갔다. 청나라는 실제로 위협에 시달렸고, 일본 매튜 페리 제독이 흑선을 끌고 나타난 뒤 불평등조약을 체결하면서 본격적으로 시대의 변화에 눈을 뜬다.

조선은 외부에서 들려오는 소식을 접하면서 "뭔가 일이 벌어지고 있다"는 것을 깨닫지만, 상대적으로 일본과 청나라에 비해서 좀 늦게 반응했다. 물론 이필제의 난 같은 경우를 보더라도 일부 극소수의 인물들은 알음알음 국제 정세에 민감했음을 알 수 있다.

아시아주의는 동아시아 인종주의였기 때문에 많은 부분에서 서구 문명과의 충돌이 계속되면서 꾸준히 거론 되었다. 북쪽에서 내려온 러시아, 태평양 건너 넘어온 미국, 인도를 정복한 영국 등 주변에서 점차 서구열강들이 아시아를 죄어 오는 상황에서 위기감을 느낀 동아시아인으로 하여금 가만히 있어서는 안된다는 의식을 갖게 했다.

아시아주의는 결국 서구의 침략에 대항하는 단결된 아시아를 주장했기 때문에 1945년 일본 제국이 패망하는 시점까지도 일본의 일부 이상주의자들은 이것을 진지하게 믿었다. 대표적인 예가 신해혁명에도 참여했고 2.26 사건에도 참여한 기타 잇키, 만주사변의 주모자이자 만주국의 흑막 중 하나였던 이시와라 간지이다.[1]

사상적 배경은 존황양이론과 일맥상통한다. 그 연장선상으로도 볼 수 있다. 서양의 일본 침략 위험에 무력한 에도 막부를 대신해 천황을 중심으로 한 존황양이파가 정권을 잡아서 메이지 유신과 메이지 정부를 수립했다. 이후 적극적으로 서양의 기술과 학문을 받아들였지만, 그렇다고 양이(攘夷)를 버린 것은 아니었다. 존황양이 사상을 아시아 전역으로 확대해서 '일본이 아시아 맹주가 되어 유색인종 국가가 대동화합하여 서양 오랑캐 열강의 아시아 침략을 물리치자'는 사상이었다.

2.2. 탈아론

파일:상세 내용 아이콘.svg   자세한 내용은 탈아론 문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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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의 사상가 후쿠자와 유키치는 원래 조선, 청나라와의 연대에 적극적인 인물이었다. 후쿠자와는 갑신정변 3년 전인 1881년에 김옥균과 만났는데, 김옥균에게 인간적인 매력을 느낀 후쿠자와는 그를 물심양면으로 지원하고 '한성순보'에는 고문까지 파견해 준다. 또한 조선인을 교육시키는 데는 한글이 효과적이라고 파악하여 당시로서는 파격적인 주장인 국한문 혼용을 강력하게 주장하고 사재를 털어서 한글 활자 주자비용도 지원했다.

그러나 갑신정변이 아시아 국가인 청나라의 개입으로 허무하게 실패하고 소수의 망명자를 제외한 주동자들이 멸족을 당하자 후쿠자와는 완전히 변해버렸다. 갑신정변 실패 후의 참변을 "인간 사바세계의 지옥이 조선의 한성부에 출현했다"고 비난한 후쿠자와는 1885년 2월 '시사신보'에 '탈아론'이란 제목의 사설을 기고했다.

2.3. 흥아론의 등장과 변질

후쿠자와의 이 주장에 대해서 안티테제로 등장한 것이 흥아론(아시아주의)이다. 도야마 미쓰루(頭山 満), 가쓰 가이슈 등이 흥아론자였는데, 이들은 일본 단독으로 서구에 대항하는 것은 무리이므로, 조선 및 청나라와 연대하는 것이 중요하다고 주장했다. 특히 가쓰는 "조선은 비록 지금은 약소국이나 과거에는 일본에 문명의 종자를 전파한 스승이었다"고 주장하였다.

한편 망명한 김옥균은 변해버린 후쿠자와 유키치와는 관계가 소원해지고, 대신 일본 내의 흥아론자들과 가까워지게 된다. 이들은 한중일의 연대를 강조하는 삼화주의(三和主義)를 제창했다. 한편 일본 정부는 김옥균을 '짐'으로 보았고, 오가사와라 제도 같은 외지로 유배 '요양'보내기에 급급했다. 더군다나 조선 측에서도 끊임없이 김옥균의 암살을 시도한다. 이 상황에서 김옥균은 자신의 정치적 입지를 높이기 위해서 이홍장과 담판을 하러 홍종우의 안내를 받아 상하이로 향하게 되는데, 사실 홍종우야말로 조선 정부가 준비한 함정카드였다. 홍종우는 상하이에 도착하자마자 암살자로 변해서 김옥균을 살해하고, 김옥균의 사망은 일본 내의 흥아론자들을 충격과 공포에 빠트려 버렸다.

일본 언론들은 이 사건을 "전근대적인 야만"이라고 비판하였고 청나라도 한통속이라고 디스하였으며, 후쿠자와의 탈아론이 힘을 얻게 된다. 심지어 흥아론자인 도야마 미쓰루마저도 김옥균의 복수를 하자는 소리를 외치게 되었다. 그리고 벌어진 사건이 을미사변. 이후로 아시아주의는 변질되고 정반대 주장인 탈아론과 연합하여 동아신질서, 아시아 먼로주의 등을 거처 대동아 공영권이라는 불쏘시개 같은 주장을 낳게 된다.

2.4. 변질의 이유

일본 정부는 아시아주의를 조선 식민지배의 명분으로 써먹었으며, 훗날 탈아론과 섞어서 대동아 공영권으로 변질되고 말았다. 이것 때문에 현대에는 한국에서는 물론이고 일본에서도 금기시된다.

흥아론이 이상하게 변질된 이유는 근본적으로 일본이라는 나라가 이를 실행할 역량이 부족했기 때문이다. 기세좋게 아시아 최고의 근대국가를 자처했지만, 한일병합 당시만 해도 일본은 재정적으로 상당히 취약한 상태였다. 일본은 19세기 말부터 연속적인 전쟁을 치르면서 어떻게든 재정을 채워야 하는 다급한 상황에 직면했다. 이를 위해 식민지를 착취했고 이에 조선인들이 전국적으로 들고 일어날 지경이 되었다. 그리고 일본을 이끌던 지도자들은 메이지 유신 이후부터 2차대전에서 패전하는 그날까지 아시아주의를 진지하게 받아들이지 않고 그저 아시아 지배의 수단으로만 써먹었다.

2.5. 대한제국의 아시아주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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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양평화론
안중근 의사가 뤼순 감옥에서 형을 기다리며 집필한 저서. 집필이 완료되기 전에 사형을 집행 받아 끝내 전문을 보지는 못한다.

동양평화론의 가장 큰 핵심내용은 바로 아시아 국가간의 국가 연합이였다. 정확히는 한청일 3국의 주권과 권리를 3국 서로가 보장하며 안전과 안보를 지키고 경제 및 화폐를 통합하고, 한청일 연합군을 창설해 서구 제국주의에 저항하자는 것이 주 내용이였다. 예시로 아래는 동양평화론의 동양 평화를 위한 5대 구상이다.
1. 뤼순을 중립지대로 하여 대한제국, 일본제국, 청 3국의 협력을 위한 기구를 설치할 것.
1. 대한제국, 일본제국, 청 3국의 공동 은행을 설립하고, 공용 화폐를 사용할 것.
1. 대한제국, 일본제국, 청 3국이 연합군을 창설하여 서양 열강의 침입에 공동으로 맞설 것.
1. 대한제국과 청은 일본제국의 지도 아래 경제 개발에 힘쓸 것.
1. 대한제국, 일본제국, 청 3국의 황제가 로마 교황(안중근은 천주교도였다)의 중재 아래, 상호 주권을 존중하고 평화적 관계를 맺을 것.
이처럼 일본 주도의 연합이나 질서가 아닌 서로 동등한 위치에서의 연합을 구성하자 주장하는 것이 눈에 보인다. 다만 연합군 창설이나 경제 화폐 통합의 경우 그 당시 아시아의 유일무이한 패권자였던 일본 제국 청나라 대한제국를 짓누르고 연합의 주도권을 가져갈 가능성이 있는 주장이였다.

2.6. 쑨원의 아시아주의

우리 아시아는 가장 오래된 문화의 발상지입니다. 수천 년 전부터 우리 아시아는 매우 높은 문화를 가지고 있었고 유럽 최고의 국가, 그리스, 로마 등과 같은 나라의 문화는 모두 우리 아시아로부터 전해진 것입니다. 현재 세계의 가장 새로운 문화는 모두 우리의 옛 문화에서 발생한 것입니다.
그런데 근래 수백 년 동안 아시아의 민족은 점차 위축되고 국가는 점차 쇠퇴해왔습니다. 한편 유럽의 민족은 점차 발전하고 국가는 점차 강대해져온 것입니다. 유럽의 민족이 발전하고 국가가 강대해짐에 따라 그들의 세력은 동양을 침입하여, 우리 아시아의 민족과 국가는 점차 멸망하거나 압제하에 신음하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러일전쟁이 일어났습니다. 그 결과는 일본이 러시아를 이겼습니다. 이것은 최근 수백 년 동안 아시아 민족이 유럽 민족을 이긴 최초의 승리였습니다. 이 일본의 승리는 전 아시아에 영향을 미쳤고 아시아 전 민족은 매우 고무되어 큰 희망을 품기에 이르렀습니다.
'우리 유색인종은 모두 서방민족의 압박을 받아왔는데 일본이 러시아를 이겼다는 것은 동방민족이 서방민족을 타파한 것이다. 일본인이 전쟁에 이겼듯이 우리들 역시 이겨야 한다. 이 얼마나 기뻐해야 할 일인가'라는 것이었습니다.
지금 내가 대아세아주의 강연함에 있어서 언급한 것을 간단히 말하면 문화의 문제입니다. 동양 문화와 서양 문화와의 비교와 충돌의 문제입니다. 동방 문화는 왕도이며, 서방의 문화는 패도입니다. 왕도는 인의 도덕을 주장하고 패도는 공리지, 강권强權을 주장합니다.
패도를 행하는 국가는 다른 민족을 압박할 뿐 아니라 자국 내 민족 역시 압박합니다. 대아세아주의가 왕도를 기초로 하지 않으면 안 된다는 것은 이들의 불평등을 철폐하기 때문입니다. 미국의 학자들은 민족해방에 대한 일체의 운동을 문화에 반발하는 것이라 하지만 우리들이 주장한 불평등 배제의 문화는 패도에 거역하는 문화이며 민중의 평등과 해방을 원하는 문화입니다.
일본 민족은 이미 온통 서양 문화의 패도를 택함과 동시에 아세아의 왕도문화의 본질을 가지고 있습니다. 향후 일본이 세계문화에 대해 서양 패도의 개가 될지, 동양 왕도의 간성이 될지는 일본 국민이 신중하게 고려해야 할 것입니다.
1924년 11월 28일 일본 고베상업회의소 주최 강연회 연설
20세기 초반 당시 일본이 서양을 물리치고 가장 발전된 아시아 국가였던 것은 맞지만, 그렇다고 해서 일본 역시 서양 제국을 모방해 주변국을 착취하는 패도를 걸을 것인지 아니면 동양이 더불어 함께 나아가는 왕도를 걸을지 쑨원은 질문을 제시했다.

쑨원 제국주의 안티테제로서의 아시아주의를 정의한 인물이라고 할 수 있다. 그는 대아시아주의로 서구식 제국주의를 패도, 그것에 저항하는 아시아주의를 왕도라고 구분했으며 일본의 아시아주의와 많은 영향을 주고받아 일본에도 아시아주의자이자 쑨원주의자가 많았다. 즉 일본의 대아시아주의가 일본의 팽창을 정당화하는 것이 되어갔다면 쑨원의 대아시아주의는 기본적으로 '열강에 대한 저항'에 의미를 두고 있었다.

쑨원도 조선의 개화파들처럼 혁명을 준비하면서 아시아 국가로서 최초로 근대화를 이룬 일본을 많이 본받고 혁명에도 도움을 받았으나, 일본의 대아시아주의의 변질과 제국주의 행보를 보고 일본에서의 연설에서 "일본은 이미 유럽 패도의 문화를 이룩했고 또 아시아 왕도의 본질도 갖고 있다. 이제부터 서구 패도의 주구(일본 번역은 번견)가 될 것인지, 아니면 동방 왕도의 간성이 될 것인지 일본인 스스로 잘 선택하기를 바란다", "일본은 열강을 본떠 중국 등 약소한 아시아 여러 나라를 침략의 대상으로 삼을 것인가, 아니면 같은 편에 설 것인가. 왕도를 취할 것인가. 아니면 패도를 취할 것인가"라는 은근한 경고와 물음을 던졌다.[2]

그러나 쑨원의 아시아주의 또한 비판 의견이 있다. 대만에서 발간한 쑨원의 말을 모아둔 국부전집에 따르면, 쑨원은 '주변국은 중국에 조공할 수 있는 것을 영광으로, 그렇지 못한 것을 치욕으로 안다.', '태국은 중국의 한 성이 되고 싶어 한다.' 등의 발언을 하였다고 한다.[3] 그 외 '한국과 베트남도 중국에 가입하게 해야 한다.'는 발언을 한 적도 있다고 한다. 이를 근거로 쑨원은 한국이나 베트남, 몽골 등 과거 중국과 가까웠던 나라를 중국의 속국 또는 속령으로 인식하고 있었을지 모른다는 주장도 있다. 물론 쑨원의 반제국주의 사상을 고려하면 원할 시 가입시켜 줄 수 있다 정도 뉘앙스일지도 모르지만[4] 실제 이런 발언을 한 적이 있다면 좀 더 전문가들의 연구가 필요한 부분이긴 하다.

2.7. 조선 개화파와의 관계

당시 조선의 개화파 지식인들은 아시아주의에 동의하는 사람이 많았다. 안중근 동양평화론도 이러한 생각에 기초한다. 하지만 안중근은 일본이 아시아주의를 주창하면서 스스로를 "아시아의 맹주"라 칭하고 "일본을 중심으로 모여 아시아가 연합하여야 한다"고 주장한 것을 비판하며, 한중일 3국의 연합이 반드시 수평적 연대여야 한다고 강조했다. 결국 안중근은 일본이 조선을 강점하고 각종 만행을 저지르는 행태를 보자, 이토 히로부미 직접 처단하였다.

당시 일본의 자유당, 일부 우익단체, 자유 민권운동가들은 조선 개화파 지식인들을 도왔다. 그러나 아시아주의가 아직은 멀쩡한 주장으로 받아들여지던 이 시절에도 당시 일본의 관료계층과 자유당, 우익단체 같은 시민사회 계층은 아시아주의를 전혀 다르게 해석했다. 시민 사회와 일부 우익정당들은 아시아주의를 정말로 믿었지만, 관료계층은 그저 제국주의적 팽창을 위한 명분으로 써먹었다. 물론 이것도 궤변일 뿐이고, 알면서 아닌 척 입 닦은 거라고 보기도 한다. 실제 한일강제병합 이후 일부 단체들이 조선 독립시켜줘야 한다는 주장을 하기도 했지만 립서비스 수준에 그쳤을 뿐, 큰 사회적 효력을 보이진 않았기 때문.

실제 이들에 대한 의심의 여지가 몇가지 있다. 경술국치 이후 이전까진 일본에 동조하기도 했던 상당수 개화파 지식인들은 배신감을 느꼈는데, 그들은 상기한 이용구 등처럼 한일합병을 일종의 수평적인 연방 내지는 국가연합으로 생각했지 식민지가 되리라고는 전혀 생각하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이용구는 당시 우치다 료헤이의 도움으로 일진회를 만들고 한일합방 건의서를 순종 이완용에게 건의할 정도로 한일병합에 적극적이었는데, 막상 '합방'하니 1대1 합방이 아니라 일방적인 흡수합병이었다는 걸 깨달았고 이에 치를 떨다 일본이 주는 작위도 거절한 채 얼마 안 가 사망했다. 죽기 얼마 전 우치다 료헤이에게 "우리는 바보짓을 했어요. 처음부터 속았나 봅니다." 라고 이야기했다고 하니 이들의 아둔함을 짐작할 만하다.[5] 도야마 미쓰루와 겐요샤는 이용구에게 사과하고 동광회(同光會)를 결성하여 한국의 독립을 주장하기까지 했다지만 이미 다 먹힌 마당에 립서비스 수준을 벗어나지 못했다.

사실 이들이 이렇게 아둔한 짓을 한 것도 나름의 이유는 있었다. 당시 세계 정세와 조선의 수준, 더불어 바로 전 시기까지 남아 있었던 세도정치의 영향, 실패한 흥선대원군의 정책 등을 거쳐 깨달음을 얻은 개화파에게 있어서, 조선이 발전하기 위해서 아시아주의를 지지한다는 것은 이런 미래를 예상하지 못했던 당시로서는 그럴 듯하게 들렸을 수도 있었다. 그야말로 의도는 좋았던 것.

이러한 연유로 구한말 개화파 엘리트 지식인 중심으로 진행되던 계몽운동 진영 인사 중 상당수가 합방 이후 소극적/적극적으로 식민체제에 협력하는 친일파가 되고 만다. 아시아주의를 그저 침략에 대한 명분으로만 써먹던 일본 정부를 너무 순진하게 바라봤던 것.

물론 계몽운동 진영 중에서도 당시 명분만 그럴듯한 아시아주의의 실체를 비판한 사람들은 있었다.[6] 안창호 이토 히로부미와 만났을 때, 이토가 '일본을 유신한 다음에는 조선을 유신하고 청나라를 유신하는 것이 나의 꿈'이라 한 말에 '조선을 유신하고 싶으면 조선 사람에게 맡기는 것이 당신의 그 꿈을 이루는 데 있어서 더 좋은 방법이다. 미국이 일본을 유신하겠다고 했으면 지금 일본의 유신이 있었겠는가. 당장 당신부터 앞장서서 반대했을 것이다'라고 꼬집었다.[7]

신채호도 문명화되는 것은 좋은데, 이것을 이루는 단위는 반드시 나라와 민족이어야 한다는 것, 즉, 문명화에는 반드시 독립이 전제되어야 한다고 비판했다. 일본이 아시아주의를 주창하는 건 조선을 강제병합하기 위한 얄팍한 속임수에 불과하다고 보았다.
혹자는 또 일컫되, 저 동양주의를 외치는 자도 진실로 동양을 위하는 것이 아니라 단지 이 주의를 이용하여 국가를 구하고자 함이라 하나, 우리가 보건대 한국인이 동양주의를 이용하여 국가를 구하는 자는 없고 외국인이 동양주의를 이용하여 국혼을 찬탈하는 자가 있으니 경계하며 삼갈 것이다.
'동양주의에 대한 비평',「대한매일신보」,1909년 8월 8,10일
이승만 또한 청년 시절 아시아주의를 믿었다가 반일로 전환하였던 인물이었다. 이승만은 1912년 집필한 '청년 이승만 자서전'에서 배재학당을 다니던 중 자신이 서재필의 영향을 받아 일본의 아시아주의에 경도되었고 자신을 비롯한 배재학당 출신이 박영효계 친일파와 손잡은 것을 '불행한 연결'이라고 표현하며 독립협회 활동의 과오를 인정하였다. 이승만은 출옥한 1904년을 기점으로 대일관이 지일에서 반일로 바뀌며 민영환의 대미 밀사로 활동한다. #

이들은 의병 항쟁과 결합하여 독립군으로 활동하거나 독립운동가로서 활동하게 된다.

2.8. 일본 좌익의 아시아주의

아시아주의는 말만 보면 분명 나쁠건 없는 사상이기에, 일본 우익도 아시아주의를 변질시켜 선전했지만 일본 좌익들 역시 아시아주의란 말에는 로망을 가졌다. 본래 아시아주의의 의의는 탈아론의 안티테제임과 동시에 제국주의의 안티테제이기도 했기 때문. 이건 고작 수십 년 통치하자고 주변국들에 100년 이상의 원한을 남겼다는 점에서도 알 수 있듯 "(근시안적 시각에서) 일본은 제국주의를 선택했지만 만일 달랐다면 일본은 과오를 저지르지 않고 진정한 아시아의 연대를 이룰 수 있지 않았을까" 하는 아쉬움에서 비롯되는 것도 있다.

2.9. 현대의 아시아주의

일본의 경우 1945년 태평양 전쟁 패전 이후로는 보수보다는 진보(혁신) 진영에서 더 많이 대두되는 사상이다. 일본 진보 진영의 아시아주의에 대한 이상은 상당했고, 전후 평화주의가 뿌리내리면서 더 심화되었다. 90년대까지는 그야말로 로망에 불과했으나 한국과 대만, 몽골 등의 민주화와 경제문화적인 성장, 그리고 중화인민공화국의 굴기와 맞물려서 다시 주요 아젠다로 거론되었다.

2009년 일본 민주당이 정권을 잡고 펼친 상대적 친한, 친중[8] 외교 기조도 이런 아시아주의 현실 인식에 기반한 측면이 있다. 2010년 나온 간 담화 역시 이런 연장선상에서 나온 담화였다. 하지만 중화인민공화국과의 센카쿠 열도 중국 어선 충돌 사건 2012년 이명박 대통령 천황 사과 요구 등으로 중일, 한일 관계가 어긋나자 일본 국민의 지지를 상당수 잃어버렸고[9], 동일본 대지진 등이 겹치며 국내외적으로 위기를 맞자 아베 신조 자민당으로 다시 정권교체가 되면서 빛이 바랜 기조가 되었다.

한국인들 입장에서는 평소 친한 발언을 하던 일본 정치인들이 어떤 때에는 한국 입장에서 상당히 듣기 거북한 발언을 하기도 해서 헷갈려하는 경우도 있는데 아시아주의의 영향(?)도 있다. 또 앞서 말한 안중근에 대한 일본에서의 재평가도 이 아시아주의의 영향이 있다. 아시아주의를 긍정적으로 평가하는 입장에서 안중근은 이토가 주창한 변질된 아시아주의와는 다른, 동양 평화를 위한 진정한 아시아주의자라는 고평가를 받게 되었기 때문이다.

여전히 일본 내 우익들 입에서도 아시아주의가 종종 나오기도 한다. 대동아공영권을 온건하게 변형한 것이라고 볼 수도 있는데, 어찌됐든 일본의 주도 하에 한국과 대만 등이 힘을 보태 중화인민공화국에 대항했으면 하는 바람을 내비치는 것이다. 허나 냉정하게 보면 미국이 주도하면 또 모를까 일본이 주도할 여력이나 주변국들이 호응할 가능성은 낮기에, 아시아주의라기보다는 일종의 신냉전 연대라고 할 수 있다.

반대로 중화인민공화국 일각에서도 이것과 유사하게 서방 국가에 대항해서 아시아가 단결해야 한다는 주장을 하기도 한다. 실제로 왕이 외교부장이 한국과 일본은 코를 세워도 서양인이 될 수 없다는 발언을 하기도 했다. 특히 그 중에서도 인종과 문화가 비슷한 한·중·일 삼국을 동아시아로 묶어서 우월 의식을 가지는 경우가 많다. 그러나 체제적 적대로 인해 한일에서는 보통 외면받는 추세다.

3. 관련 문서


[1] 다만 이들을 비롯해 도야마 미츠루와 겐요샤까지 일련종과 관련되어 있다. [2] 이 쑨원의 사상에 영향받은 일본 창작물 혹은 쑨원의 대아시아주의 그 자체라고 할 수 있는 일본의 만화로 왕도의 개가 있다. [3] 출처 링크 필요. [4] 실제 쑨원은 '우린 제국주의 안 하고 도덕적으로 범아시아주의로 한번 뭉쳐보자' 식의 일종의 중화뽕도 있었던 모양. 소련의 지원을 받았던 걸 고려하면 소비에트 연방처럼 일종의 여러 민족이 공존하는 중화연방을 꿈꿨던 건지도 모른다. 애초에 쑨원은 '중국의 위상이 회복되면 제국주의의 피해를 입고 있는 다른 약소국을 도와야 한다.'고 발언하는 등 반제국주의 스탠스는 꽤나 명확한 인물이었다. [5] 이'들'이 아닐 확률이 높은 게, 애초에 일진회 고문을 지낸 우치다 료헤이는 이토 히로부미의 참모였으며 일본의 대륙 진출을 음지에서 추진하던 대륙 낭인의 거두였다. 즉, 이용구 이용당한 것일 확률이 높다. [6] 물론 아시아주의가 처음부터 그런 의도가 담긴 사상은 아니었다. 안창호와 신채호 등이 비판한 아시아주의는 일제에 의해 변질된 것에 가깝다. [7] 사실 고작 30여 년 통치하자고 100년 이상의 원한을 남겼다는 걸 생각해보면, 일본 입장에서도 이 당시 한반도를 먹은 건 역사를 길게 보지 못한 근시안적인 명백한 실책이다. [8] 물론 이 친X이라는 걸 잘 구분할 필요가 있는데, 절대치론 일본 민주당 역시 친미용중 정도의 스탠스였지 반미나 친중독재 이런 게 전혀 아니었다. 잘못된 것에 대해선 사과할 건 사과하고 무역 루트를 넓혀 경제적 이득을 얻자는 것도 있었다. 한국의 경우엔 딱히 이념적으로도 걸리는 게 없으니 더 그랬다. [9] 결국 손뼉은 양쪽이 함께 쳐야 소리가 나는 것이란 것을 알 수가 있다. 이게 비교적 잘 되었던 게 한국을 예로 들면 국민의 정부 시절이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