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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수정 시각 : 2024-05-29 19:57:43

루이 1세 드 플란데런

파일:루이 1세 드 플란데런.jpg
성명 루이 1세 드 플란데런
Louis Ier de Flandre
생몰년도 1304년 ~ 1346년 8월 26일
출생지 프랑스 왕국 파리
사망지 프랑스 왕국 크레시
아버지 루이 1세 드 느베르
어머니 잔 드 레텔
형제자매 잔 드 플란데런
배우자 마르그리트 드 발루아
자녀 루이 2세 드 플란데런
직위 플란데런 백작
1. 개요2. 생애3. 가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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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플란데런 백국의 백작. 백년전쟁 시기 프랑스 왕국을 지지했으나 크레시 전투에서 전사했다.

2. 생애

1304년경 프랑스 파리에서 느베르 백작 루이 1세 드 느베르와 레텔 백작 위그 4세의 딸인 잔의 외아들로 출생했다. 누이로 잔 드 플란데런이 있었다. 할아버지 로베르 3세는 플란데런 백작이었다. 1322년 7월 아버지가 사망한 후 느베르 백작 작위를 계승했으며, 2달 후 할아버지 로베르 3세가 사망하면서 플란데런 백작이 되었다. 이때 그는 삼촌인 로베르 드 카셀이 자기 작위를 가로챌 것을 우려해, 프랑스 국왕의 승인을 기다리지 않고 플란데런으로 달려가 플란데런 의회를 소집한 뒤 자신을 받들게 했다. 이에 프랑스 국왕 샤를 4세는 그를 괘씸하게 여겨 일시적으로 감옥에 가뒀지만 곧 석방했고, 파리 삼부회는 1323년 1월 그를 플란데런 백작으로 승인했다.

그러나 그는 플란데런 백국에 별다른 이해 관계가 없었다. 그의 아버지 루이 1세 드 느베르는 단 한번도 플란데런 백국을 다스린 적이 없었으며, 그는 파리의 루브르 궁전에서 성장했고 플란데런에 단 한 번도 발을 들인 적이 없었다. 플란데런 백작이 된 뒤에도 그곳이 사정을 이해하기 위해 노력하기보다는 아버지의 영지인 느베르에서 거주하는 것을 선호했다. 게다가 그는 사치에 몰두하면서 이에 필요한 자금을 마련하기 위해 직물 상인과 농민들을 가혹하게 수탈했다.

브뤼헤 시민들은 이런 그에게 강한 반감을 품고 1323년 반란을 일으켰고, 이프르, 푸르네스, 딕스무이데, 포페린게 시가 브뤼헤와 동맹을 맺었다. 반란군은 5년간 시골 지역을 공격해 약탈과 파괴를 자행했고, 세금 징수원과 플란데런 백작의 측근들은 모조리 살해되거나 도망쳤으며, 귀족들의 집은 파괴되었다. 결국 자력으로는 반란을 진압할 여력이 없다고 판단한 루이 1세는 1328년 막 프랑스 국왕에 등극한 필리프 6세에게 경의를 표하며 도움을 요청했다.

필리프 6세는 주군으로서 곤경에 처한 봉신을 돕는다면 프랑스 국왕으로서의 정당성을 강화할 수 있다고 판단하고, 대관식에 참석하기 위해 랭스에 모였던 귀족들에게 플란데런 반란을 진압하기 위해 군대를 이끌고 와달라고 요청해 모두의 동의를 얻어냈다. 그 후 아라스에서 병력을 집결한 필리프 6세는 1328년 7월 플란데런으로 출진했다. 1328년 8월 23일, 필리프 6세는 카셀 전투에서 반란군 지도자 니콜라스 잔네킨을 비롯한 플란데런 반란군을 결정적으로 섬멸했다. 이후 프랑스군은 카셀 시를 공략하고 불태웠고, 이에 겁에 질린 이프르, 브뤼헤 등 반란에 가담한 도시들이 대거 항복하면서 반란이 종결되었다. 필리프 6세는 바이을 출신의 장을 이프르 시의 총독으로 세우고 도시를 철저히 통제하게 했으며, 플란데런 백작 루이 1세는 반란 주모자들을 모조리 처형해 플란데런의 통제력을 회복했다.

1334년 10월, 아미앵의 국왕 보안관인 장 드 포켐베르그는 루이 1세와 로베르 드 카셀의 플란데런 영지 분쟁에 대한 왕의 결정을 통보하기 위해 그와 로베르 드 카셀을 불러들였다. 필리프 6세는 로베르 드 카셀이 플란데런 백국을 포기하는 대가로 북해 연안의 '해상 플란데런(Flandre maritime)'을 소유하도록 했다. 그 후 루이 1세는 지난날 반란을 초래했던 걸 반성하지 않고 파리에서 호화로운 생활을 하며 프랑스 국왕에 충성을 바치는 반면에 플란데런을 거의 들리지 않으면서 플란데런에 무거운 세금을 부과했으며, 조금이라도 반항하는 기미가 보이면 가차없이 숙청했다.

1336년 8월 12일 잉글랜드 국왕 에드워드 3세가 스코틀랜드를 지원하는 프랑스 왕국에 보복하기 위해 프랑스 본토와 프랑스의 속국들에 양모와 가죽을 수출하는 것을 금지하는 법령을 반포하면서 플란데런의 경제 위기가 가시화되었지만, 그는 아랑곳하지 않고 프랑스 왕실에 계속 충성했다. 이에 플란데런 주민들은 깊은 반감을 품었고, 프랑스의 지배에서 벗어나 잉글랜드 편을 들어야 한다는 의견이 갈수록 강해졌다. 급기야 1337년 겐트의 유지인 시제르 르 쿠르트레지앙이 백작의 친 프랑스 정책에 반발했다는 이유로 체포된 것에 반감을 품은 겐트 주민들이 야코프 반 아르테벨데를 지도자로 삼고 반란을 일으켰다.

1337년 8월, 에드워드 3세는 월터 매니, 그로스몬트의 헨리에게 1,000명의 기사 및 종자, 중장병 500명, 궁수 2,000명을 맡겨 플란데런 백국의 주요 항구 도시인 슬로이스 시를 공략하라는 지시를 내렸다. 잉글랜드군은 런던에서 승선한 후 템즈 강을 따라 하류로 항해하여 그레이브젠드에 도착한 뒤 그곳에서 하룻밤을 보낸 후 다음날 항해를 재개해 마게이트에 도착했고, 이튿날 카잔트 섬으로 항해했다. 한편, 사전에 잉글랜드군이 쳐들어올 거라는 정보를 입수한 루이 1세는 형이자 사생아인 기 드 리켄부르크에게 카잔트를 수비하라는 지시를 내렸다. 기는 지역 민병대 5,000명을 모집하고 16명의 남성을 기사로 선임해 다가오는 잉글랜드군의 침공에 대비했다. 그러나 1337년 11월 9일, 플란데런군은 카잔트 전투에서 참패했고, 기 드 리켄부르크는 생포되었다.

이후 월터 매니 등은 카잔트와 며칠 거리에 있는 볼로뉴 쉬르 메르에 프랑스군이 집결하고 있다는 소식을 듣고 잘 요새화된 슬로이스를 섣불리 공격했다가 거기에 묶여있는 사이에 프랑스군의 요격으로 섬멸될 위험이 있다고 판단하고, 포로와 약탈품을 싣고 잉글랜드로 돌아갔다. 카잔트 전투는 소규모 전투였지만 에드워드 3세가 원했던 결과를 가져왔다. 잉글랜드와 동맹을 맺은 이들은 잉글랜드가 프랑스에 맞서 스스로를 지킬 수 있다는 확신을 품기 시작했고, 플란데런의 친 프랑스 인사들은 잉글랜드군의 압도적인 전투력에 겁먹었다. 이에 고무된 플란데런의 친 잉글랜드 세력은 필리프 6세에 더욱 적극적으로 저항했다.

1338년 4월 11일, 야코프 반 아르테벨데는 잉글랜드군의 지원에 힘입어 프랑스군 선봉대를 격파했다. 그리고 4월 23일, 아르테벨데는 테르노이젠의 비에블릿 성 앞에서 루이 1세의 군대를 결정적으로 격파했다. 이후 야코프 반 아르테벨데는 플란데런 백국의 진정한 주인이 되어 잉글랜드 왕국에 충성을 맹세하는 대가로 양모 무역을 재개했고, 루이 1세는 1338년 여름 겐트를 떠나 필리프 6세의 궁정으로 피신했다. 그 후 수년간 잠자코 있던 루이 1세는 1345년 7월 야코프 반 아르테벨데가 암살되었다는 소식을 접하자 다시 군대를 이끌고 덴데르몽드로 진군했지만 겐트인들에게 격파되었다.

이후 필리프 6세의 원정에 기사로서 함께하다가 1346년 8월 26일 크레시 전투에서 전사했다. 사후 에드워드 3세에 의해 생리퀴에 수도원에 안장되었다가 나중에 브뤼헤로 옮겨졌다. 그의 아들이자 후계자인 루이 2세 드 플란데런은 그를 위해 생도나트 교회에 영묘를 지었다.

3. 가족