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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의의 곤팔로니에레
로렌초 디 피에로 데 메디치 Lorenzo di Piero de' Medici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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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lbgcolor=#E40000> 출생 | 1449년 1월 1일 |
피렌체 공화국 피렌체 | |
사망 | 1492년 4월 8일 (향년 43세) |
피렌체 공화국 카레기 | |
재임 | 정의의 곤팔로니에레 |
1469년 12월 2일 ~ 1492년 4월 8일 | |
배우자 | 클라리체 오르시니 (1469년 결혼 / 1488년 사망) |
자녀 | 루크레치아, 피에로, 마달레나, 콘테시나 베아트리체, 조반니, 루이사, 콘테시나, 줄리아노 |
부모 |
아버지 :
피에로 데 메디치 어머니 : 루크레치아 토르나부오니 |
형제 | 마리아, 비앙카, 루크레치아, 줄리아노 |
서명 |
[clearfix]
1. 개요
피렌체 공화국의 지배자이자 메디치 가문의 수장으로 피에로 디 코시모 데 메디치의 뒤를 계승했으며, 일 마니피코(Il Magnifico)라고 불린 인물이다. 흔히 이를 '위대한 자'로 번역하지만 당시 의미로 따져본다면 오역이다. 귀족의 칭호나 작위를 쓸 수 없었던 인물이기에 나름의 칭호를 생각해낸 것으로, 굳이 번역하자면 대인(大人)이라고 할 수 있다.
2. 외모와 성격
그의 외모는 가운데 가르마를 타서 넘긴 굵고 짙은 머리카락은 어깨까지 내려왔으며, 냄새를 맡을 수 있나 싶을 정도로 납작한 큰 코는 코뼈가 부러진 것처럼 보였다고 한다. 또한 주걱턱 때문에 아랫 입술이 거의 윗 입술을 덮는 것처럼 보였으며, 남을 꿰뚫어보는 듯한 검고 큰 눈 위의 눈썹은 선이 불규칙하면서 울퉁불퉁했다.흠칫 놀랄 정도로 못생기면서 목소리 조차 갈라지는 높은 비음이었지만 창백하면서 변화무쌍한 표정은 사람들을 강하게 사로잡았으며, 한껏 생기를 띠면서 아주 매력적인 태도로 가늘고 긴 손가락을 사용해 말을 잘해서 결점이 거의 눈에 띄지 않았다. 태도가 우아하지 못했지만 키가 크고 강인하면서도 영리해 활기가 넘쳤으며, 일상사에도 굉장히 열정적이라 주위 사람들까지 전염될 정도로 천성적으로 쾌활한 성격을 타고 났다.
이런 열정으로 칼치오와 팔로니를 하거나 사냥을 즐겼다고 하며, 곡조가 잘 맞지 않았지만 식사 때나 말 위에서 늘 노래를 불렀다고 한다. 한번은 30마일을 가는 동안 줄곧 노래를 부르고 농담을 해서 다른 사람들까지 사기가 충천했다고 하며, 노래를 직접 작곡해 어떤 것은 아주 외설스러워 성적인 암시나 음탕한 이야기를 좋아해 후대 사람들에게는 잔인해 보일 정도로 짓궂은 장난을 즐겼다고 한다. 그 장난의 예로 술을 좋아하는 한 의사가 평소보다 더 취하자 친구들을 시켜 외딴 시골로 보낸 후 마을에 그가 죽었다는 소식을 퍼뜨렸고 사람들이 소문을 믿어서 의사가 지친 몸으로 집에 돌아왔을 때 그의 아내는 그를 보고 유령인 줄 알고 집으로 들여보내려고 하지 않았다고 한다.
이런 면과 달리 친절하고 사려깊은 면도 있었다고 한다. 감수성이 예민하면서도 다정하거나 우정이 깊고 동물을 사랑해 동물 중에서도 특히 말을 좋아해서 자기 말인 몰레로에게 먹이를 직접 줬다고 하며, 그 말은 주인이 직접 주지 않으면 주인에게 울음소리를 내면서 신경질을 부리면서 병이 났다고 한다.
승마도 즐겨 시골에서 여러 일들을 하거나 피렌체에서 독서, 토론, 저술, 플라톤 연구, 수금 연주, 건축 설계, 애정 행각 등 다양한 방면에서 즐겼으며, 유능하면서 과시욕이 강할 뿐만 아니라 경쟁심도 강해서 운동 경기에서 지거나 학문적인 일에 지면 몹시 화를 냈다. 사업 감각이나 그 재능은 없어서 지점 경영자에게 너무 많은 권한을 줬으며, 결국 메디치 은행은 쇠퇴해서 결국 그가 죽은 지 2년 후에 1494년에 파산했다.
3. 가족 관계
로렌초는 아내인 클라리체를 사랑했으며, 금슬이 좋았지만 클라리체가 예술, 문학, 정치, 철학에 대해 알지 못해 관심사를 공유할 수 없어 남편에게 편지를 보내는 주내용은 성당에서 들은 강론 내용과 아이들에 대한 이야기 뿐이었지만 서로 나름 애정을 표현했다고 한다. 루크레치아 도나티, 바르톨로메아 데이 나시와 바람을 피웠지만 아내는 루크레치아와 친했으며, 바르톨로메아는 클라리체가 몰랐거나 그녀가 죽은 후의 일로 여겨지기 때문에 로렌초의 여자 관계에 대해서는 그리 신경쓰지 않았다고 한다.클라리체와의 사이에서는 3남 7녀를 낳았다. 셋은 아기 때 죽었으며, 딸인 루이자는 11살 때 죽었다고 한다. 아들은 첫째는 멍청하고 둘째는 영리하면서 셋째는 착하다고 하면서도 세 아들과 딸들 모두를 똑같이 사랑했다고 하며, 시정으로 분주하거나 아이들이 공부하느라 바빠도 이야기할 틈을 냈다고 한다. 자식들과 떨어져 있을 때면 아이들을 보고 싶어했으며, 파치 가문의 음모 이후에 아이들의 교육 문제로 아내인 클라리체 오르시니와 친구 안젤로 폴리자아노와 다투자 하는 수 없이 폴리지아노를 해고하면서도 폴리지아노를 두둔하자 부인과의 사이가 나빠져 부인이 책망하자 아내를 비난하는 편지를 썼다.[1]
아내 클라리체가 결핵을 앓고 있을 때 원기를 좀 회복하자 병들었기 때문에 로렌초는 필레타에 온천 치료를 받으러 떠났다가 9일 후에 클라리체가 죽은 것을 듣고 슬퍼했다고 한다.
4. 계승과 파치 가문, 교황청과의 대립
일찍부터 재능을 발휘해 1463년부터 일을 담당해 나폴리 페란테 왕의 차남인 페데리고를 만나기 위해 피사로 가거나 페데리고와 프란체스코 스포르차의 딸 이폴리타의 결혼식에 참석하기 위해 파리에 들렀다. 1466년에는 로마에서 교황 바오로 2세의 즉위를 축하하면서 톨파의 명반 광산 계약에 대해 토의했다. 인문학 교육을 받느라 경영 수업을 소홀히 해 로마 은행의 지점장인 삼촌 조반니 토르나부오니와 은행 업무에 대해 토론했으며, 아버지 피에로와 다양한 경험을 쌓은 외교관에게 보내는 수준의 편지를 주고 받았다.1466년 8월에 아버지 피에로가 병에 걸려 카레지에 간 틈을 이용해 메디치 가문에 반대하는 언덕당이 베네치아와 페라라에 원조를 요청해 쿠데타를 일으키려는 시도를 벌였다. 아버지 피에로의 지시에 따라 피렌체로 가서 도착 준비를 했는데, 언덕당의 일원 디오티살비 네로니의 형인 대주교의 별장 근처에서 언덕당의 무장하는 사람들과 마주쳤지만 이들이 로렌초를 알아차리지 못해 무사히 지나가 아버지 피에로에게 외딴 길로 오라는 전언을 보냈다.
아버지 피에로가 피렌체로 와 반대파인 언덕당을 추방시킨 이후 1468년에 피렌체 가문간에 결혼을 한다는 전통을 깨 로마 출신으로 오르시니 가문의 상속녀인 클라리체와의 결혼을 성사했다. 동생인 줄리아노 디 피에로 데 메디치와 함께 플라톤 아카데미의 학자들과 지적인 취향을 가진 상인들과 함께 인간의 최고 소명, 아에네이드의 철학적 교의에 대해 토론했다.
아버지인 피에로 사후 1469년에 계승해 2월에 로렌초는 결혼에 대한 피렌체인들의 반감들을 달래기 위해 1만 두캇이나 들여 마상 대회를 열었다가 6월에 클라리체가 도착하자 결혼했으며, 유산을 상속받은 몇 년 간은 경기, 행진, 음악, 축제 등 다양한 행사를 벌였다. 1471년에 교황 식스토 4세가 선출되자 피렌체인들의 축하 인사들을 보냈으며, 교황이 볼로냐와 포를리 사이의 작은 마을인 이몰라를 구입하기 위해 4만 두캇을 조달하라는 요청을 받자 로렌초도 전략적인 요충지인 이몰라를 갖고 싶었기 때문에 여러 핑계를 대면서 거절했다.
결국 파치 가에서 교황의 요구에 응했으며, 교황이 피렌체의 전초 기지인 시타 디 카스텔로에서 니콜로 비텔리를 퇴거시키려고 하자 6천 명을 모집하여 원조했지만 결국 비텔리는 항복했다. 1472년에 자치 도시 볼테라에서 인근 동굴의 명반 광산 계약에 대한 분쟁이 일어나 볼테라인들이 중재를 요청하자 광산 통제권은 조합에게 돌아가야 한다고 결정했다.그러나 폭동이 일어나자 무력으로 진압하려고 시도했다.
볼테라에서 이에 메디치 가문에 반대하는 선동자들을 추방했지만 불온한 움직임을 내지 못하도록 용병대를 볼테라에 보내어 1달 만에 볼테라를 함락시켰다. 용병대가 볼테라를 마구 약탈하자 볼테라로 직접 가서 병사 몇 명을 교수형에 처하면서 위로하고 구호금을 베풀었다.
1473년 6월 22일에 나폴리 국왕의 딸인 엘레오노라가 페라라의 에콜 공작과 결혼하기 위해 행렬을 이끌고 피렌체를 지나자 이들을 환영해 하객으로 참석했다. 1474년에 대주교 피에로 리아리오가 사망하면서 처남인 리날도 오르시니를 피렌체의 대주교로 임명했다. 교황이 피렌체 공화국 내의 성직 임명에는 시뇨리아의 동의가 필요하다는 약속을 어겨 프란체스코 살비아티를 피사 대주교로 삼자 토스카나로 들어오지 못하도록 막았으며, 밀라노와 베네치아와 동맹을 제안했다가 나폴리에서 그 연합이 자신의 동의를 구하지 않았다는 것에 의구심을 느끼게 해 나폴리와 교황의 사이만 공고해졌다.
1478년 4월 26일에 교황과 공모한 파치 가문의 음모로 암살당할 뻔 하지만 무사히 살아남았다. 그러나 동생인 줄리아노 디 피에로 데 메디치가 죽었기 때문에 줄리아노의 정부 피오레타 고리니가 얼마 안 가 사망하자 줄리아노의 아들인 줄리오( 클레멘스 7세)를 입양했으며, 피렌체인들이 공모자들에게 심하게 보복한 것으로 교황청과 대립해 파문과 성무 정지령을 받았다. 교황이 나폴리의 원조를 받아 전쟁을 하게 되자 피렌체에 역병이 창궐하거나 전쟁으로 인한 과다한 세금으로 불만을 터뜨리기 시작했으며, 또한 영국인들이 옷을 자급자족해 모직 수입이 중단되어 피렌체의 경제가 쇠퇴하자 나폴리에 가서 나폴리 법정에 서기로 한다.
나폴리의 대사로 나폴리에 도착하기 전에 나폴리 법정과 비밀리에 교섭해 환영받을 수 있도록 조처를 취했다. 1479년에 크리스마스 직전에 나폴리에 도착해 나폴리의 페르디난도 1세와 평화 협정을 위한 교섭을 진행하지만 잘 되지 않아 10주 만에 떠나게 되는데, 페르디난도 1세가 서둘러 평화 협정서를 만들어 보내면서 전쟁을 끝내 나폴리와 동맹을 맺게 된다. 비록 극적으로 전쟁은 막았지만 칼라브리아 공작에게 전쟁 배상금을 지불하거나 교황 식스토 4세의 주장에 따라 투옥된 파치 가문의 사람들을 풀어주게 되는 등 손해를 보게 된다. 1480년 3월에 피렌체로 돌아와 한 달도 되지 않아 전쟁으로 인한 재정적인 문제를 해결한다는 핑계로 발리아를 소집해 5년 임기의 70인 위원회를 구성했다. 8월에 오스만의 군대가 오트란토에 상륙해 나폴리를 지나 로마를 향해 북으로 지나겠다고 협박하자 나폴리의 페르디난도 1세로부터 토스카나 지방 마을을 되돌려받았다.
오스만 군대의 위협으로 이탈리아가 위험해지자 교황 식스토 4세가 이탈리아 국가들끼리 싸울 여유가 없다는 것을 인정, 대표단을 보내 12월 3일에 로마에서 교황의 사과를 받았다. 1484년에 식스토 4세가 사망해 인노첸시오 8세가 교황이 되자 촉새와 교황이 좋아하는 포도주, 값비싼 피렌체 직물, 편지 등을 보내 교황의 신임을 얻었다. 1488년에 교황 인노첸시오 8세가 성직에 들어서기 전에 가진 아들 중 하나인 프란체스케토 치보와 로렌초의 딸인 마달레나가 혼인하자 지참금을 마련하면서도 치보에게 피렌체의 파치 궁과 몬투지의 파치 별장을 줬다.
5. 예술가 지원
매년 11월 7일에는 피에졸레나 카레지의 별장에서 플라톤의 생일을 축하하는 연회가 열리거나 피렌체의 북서쪽으로 20마일 정도 떨어진 포지오 아 카이아노나 카파지올리 별장 같은 곳에서도 이런 축제가 일어났는데, 로렌초는 이런 축제들에 학자, 작가, 예술가들이 자리에 몰리면 참여하기도 했다. 로렌초는 소년들에게 특정한 기능을 익힐 기회와 좀 더 넓은 교육의 기회를 제공하기 위해 학교를 설립했으며, 메디치 궁과 산 마르코 사이의 정원에 부지를 마련해 도나텔로의 제자 베르톨도 디 조반니를 선생으로 고용하면서 다양한 그림과 고대 흉상, 조각들을 학교의 화실과 야외에 세우도록 빌려줬다.학교를 세울 때 도메니코 기를란다요에게 입학할 유망한 학생들을 추천해달라고 해 미켈란젤로 부오나로티를 그 중에서 포함시켰으며, 로렌초는 미켈란젤로가 난생 처음으로 조각칼을 쥐고 대리석 작업을 하는 것을 보게 되었다. 미켈란젤로가 목신상을 모방하는 솜씨가 매우 뛰어나 로렌초는 크게 놀랐으며, 자신의 상상에 따라 목신의 입, 혀, 치아를 모두 조각하는 것을 보면서 늙은이들은 치아가 완전하지 못하다는 것을 지적했다.
로렌초가 자리를 뜨자마자 미켈란젤로는 목신의 치아 중 하나를 부수면서 잇몸을 파내 마치 이가 빠진 것처럼 보이게 만들어 로렌초가 다시 오기만을 기다렸다고 하며, 로렌초가 미켈란젤로의 순진함과 기술에 여러 번 웃으면서 그 이야기를 친구들에게 얘기했다. 미켈란젤로의 아버지인 로도비코에게 부탁해 미켈란젤로를 양자로 삼았으며, 로렌초는 미켈란젤로를 메디치 가문의 사람으로 돌보면서 고귀한 손님들과 항상 식사하도록 했고 미켈란젤로로 하여금 자신의 일의 결과에 대해 보고하도록 하면서 메디치 궁에 4년 동안 머물게 했다고 한다.
조부 코시모 디 조반니 데 메디치와 달리 그림, 조각에 전념하기 보다 청동상, 메달, 주화, 고대 도자기, 보석, 로마, 비잔틴, 페르시아, 베네치아의 항아리를 수집했으며, 그가 수집한 것의 대다수는 준보석으로 조각되어 그의 이름이 LAUR MED라는 대문자로 새겨졌다고 한다. 작가와 학자들에게 후원하면서 서적, 원고를 수집해 메디치 가문의 장서를 확장시켰으며, 대리인들을 동방에 2번이나 파견해 손실된 위험이 있는 원고들을 찾아 오게 했고 특히 2번째에 가져온 200권이 넘는 그리스 작품들에서는 그 절반이 그 존재 여부조차 알려지지 않은 것들이었다고 한다.
필경사, 삽화가, 서기들을 고용하면서 원고의 사본을 만들어 토스카나 국경 안팎의 여러 도서관이나 공공 시설, 피사 도서관에 복사본을 제공했으며, 피사와 피렌체의 관계를 개선하기 위해 피사 항을 발전시키면서 도시 외곽의 땅과 성내의 강변 주택을 매입해 가족들과 자주 머물렀다고 한다. 1472년에는 피사 대학을 토스카나의 주요 대학으로 정립하면서 매년 12,000플로린의 돈을 기부했으며, 그리스 철학자와 라틴 시인들에 대한 학자들의 열정에 공감했다고 한다.
수집에 전념했지만 조부 코시모와 아버지인 피에로보다 돈이 없는 편이라 조각이나 그림을 많이 위탁하기보다는 예술가들을 도와주는 편이 더 많았으며, 산드로 보티첼리에게 직접 위탁하지 못했지만 피렌체의 후원자들에게 주문을 많이 받도록 도와주면서 로마의 시스틴 성당에 일하도록 배려해줬다고 한다. 필리피노 피리를 로마, 안토니오 폴라이우올로는 밀라노에 보내면서 줄리아노 다 마이아노를 칼라브리아 공작에게 추천했으며, 안드레아 델 베로키오를 위해 토스카나 전역에서 일거리를 구해줬다.
베로키오의 제자 레오나르도 다 빈치의 재능에도 관심을 가져 밀라노 공작 루도비코 스포르차에게 다 빈치를 추천했으며, 중요한 작업이 있을 때마다 사람들이 자문을 구해 산토 스피리토의 외관 도안에 대한 논쟁이 벌어질 때 조언을 요청받거나 필리포 스트로치가 스트로치 궁의 조화에 대해 자문을 구하기도 했다고 한다. 피스토이아의 산 자코포에 있는 포르테구에리의 묘소를 위해 베로키오와 피에로 델 폴라이우올로가 도안한 두 개의 모델 중 하나를 선택해달라는 부탁을 받았으며, 1491년에는 대성당의 외관을 위한 도안을 직접 제출하면서도 많은 예술가들이 참가하여 대성당의 도안을 위한 그림을 선택해달라고 부탁받았지만 모두의 도안을 칭송하면서 그 결정을 유보했다.[2]
로렌초는 수집과 예술가를 지원하거나 조언하는 것 이외에도 열정적이고 다양한 시를 저술해 그리스도교적인 정서, 육체의 육망에 따라 슬픔, 희망, 환멸 등이 담기거나 헌신적이거나 신성 모독적인 풍자시, 사냥을 칭송하는 시와 연시, 성적인 정욕, 육체적인 사랑의 즐거움을 노래하는 시 등 다양한 시를 썼다.
6. 최후
몇 년 동안 통풍을 앓으면서 건강이 쇠약해졌다. 스페달레토와 포레타에서 매년 온천 치료를 받아 온천욕에서 돌아올 때마다 원기를 되찾았다가 몇 달 후에 이전 상태로 돌아가는 것을 반복했다. 들 것에 실려가 포지오 아 카이아노의 별장에 가서 독서나 안드레아 델 사르토에게 위탁한 벽화를 감상하거나 인근 지역의 농경을 감상하면서 동물원을 방문했다.말년인 1492년에는 통풍 때문에 화를 잘 내거나 퉁명스럽고 공격적인 성격이 되어갔다. 2월에는 사업에 관여할 수 없을 정도로 걷지도 못하거나 펜을 들지도 못한 상태가 되었다. 그의 친구인 폴리지아노는 이에 대해 열이 천천히 사람 전체를 잠식해 동맥, 정맥 뿐만 아니라 사지, 오장, 육부, 신경, 뼈, 골수까지 공격했다고 말했다. 이후 카레지의 별장으로 후송되었다가 4월 8일에 사망했다.
그의 시신은 산 마르코 수도원으로 안치되었다가 산 로렌초에 옮겨져 성구실에 동생 줄리아노와 함께 안장되었는데, 1559년 새로운 성구실에 동생과 함께 다시 옮겨져서 안장되어 오늘에 이르고 있다.[3]
7. 미디어 매체에서의 모습
- 보헤미안 랩소디에서 언급된다.
- 메디치(드라마)의 2부와 3부인 메디치: 더 매그니피센트의 주인공으로 등장했다.
- 이탈리아에서 살아남기에서는 주인공의 도움으로 파찌 음모단의 암살 모의를 사전 적발해 동생인 줄리아노의 목숨도 살리는데 성공하며 이후 주인공의 주요 협력자 중 하나가 된다. 그 과정에서 피렌체 공화국의 문을 닫고 그 공작이 되기도 했으며 그 과정에서 입은 충격도 있고 재건된 동로마 제국의 재상이 되면서 피렌체보다 트레비소에 머무는 시간이 늘어난 덕에 피렌체 공작보다는 제국의 재상으로서 자신을 정의했다고. 이 때문에 피렌체 공작 업무는 줄리아노가 대신 봐주고 있다.
7.1. 어쌔신 크리드 시리즈
역사와 똑같이 피렌체의 지도자로서 등장한다. 어쌔신 크리드 2와 어쌔신 크리드: 리니지에서 등장.
어쌔신 크리드: 리니지
피렌체의 지도자였지만 몇몇 가문들이 그와 메디치 가문에게 반발하자 그들을 몰락시켜야겠다고 다짐하고, 가까운 동맹군이자 암살자인 조반니 아우디토레에게 그들의 뒷조사를 시킨다. 로드리고 보르지아의 부하들이 밀라노의 공작인 갈레아초 마리아 스포르차를 암살하려 한다는 계획을 알게 되자 조반니에게 그 일을 맡기지만, 결국 실패한다(이에 대해선 조반니 아우디토레 항목 참고).
어쌔신 크리드 2
이후 1478년 4월 26일, 로렌초가 동생인 줄리아노 디 피에로 데 메디치와 함께 성당을 방문했다가 프란체스코 데 파찌를 비롯한 파찌의 공모단에게 습격받는다. 줄리아노는 프란체스코에게 무참히 살해당하고 로렌초 역시 2번의 상해를 입지만 곧바로 검을 꺼내 그들과 항전한다. 이 때 에치오 아우디토레가 난입하여 파치 일당을 쫓아낸다. 에치오는 로렌초가 저택까지 무사히 갈 수 있게 엄호하고, 그의 집에 도착하자 로렌초의 부탁을 받고 프란체스코를 암살한다.
약간의 휴식을 가질 겸 그들은 폰테 베키오 다리에서 재회하고, 거기서 로렌초는 과거의 추억[4]을 얘기하다가 에치오에게 파찌의 공모단의 이름들을 불러주고, 에치오가 그들을 죽이도록 도와준다.
1479년,에치오는 팔라초 메디치(메디치 가문의 저택)를 방문하지만 저택 대문에 붉은 십자가가 그려져 있었고, 게다가 안으로 들어가자 로렌초의 하인들이 죽어 있었다. 에치오는 파치 가문이 로렌초를 암살하려 한다는 걸 깨닫고 암살자들을 죽이며, 숨겨진 방에 숨어 있었던 로렌초를 구해낸다. 이후 로렌초는 에치오에게 보물실에 있었던 물건은 전부 가져갈 수 있게 하며[5] 에치오는 야코포 데 파찌를 죽이러 간다.
다음 해인 1480년에 에치오가 야코포를 죽여서 파치 가문의 음모를 분쇄하자, 로렌초는 에치오를 자신의 집으로 초대한 뒤 그에게 메디치 가문의 망토를 준다.[6] 이후에도 에치오는 로렌초가 1492년에 죽을 때까지 그의 개인적인 암살자로서 일하게 된다.[7]
후속작인 어쌔신 크리드: 브라더후드에서는 그의 역할이 니콜로 마키아벨리에게 넘어갔다.
7.2. 대항해시대 온라인
실제 역사와 같이 피렌체의 수장으로 나오며, 예술 공헌도와 관련된 NPC로 등장한다. 다만 게임 일러스트 특성상 미청년이라는 매우 미화된 모습으로 등장한다.7.3. 메디치
드라마 메디치의 시즌 2와 3의 주인공으로 등장한다. 배우는 다니엘 셔먼으로, 아역은 샘 테일러 벅. 일명 '위대한 로렌초'. 어릴 때부터 총명해 가문을 이끌 후계자로 기대받아 왔다.
아버지, 동생과 함께 마차를 타고 가다가 암살자들의 습격을 받게 된다. 이때 공격하는 암살자를 막다가 암살자를 찔러죽이게 된다. 이에 큰 충격을 받을 정도로 누군가를 해친 적 없는 선량한 인물이지만, 에피소드가 지날수록 점점 변하게 된다. 드라마의 시청 포인트 중 하나.
은행이 무너질 위기에 처하고 피렌체에서 전쟁이 날 조짐이 보이자 스스로 아버지의 자리를 차지한다. 이후 전쟁을 준비하는 밀라노 공작을 물러가게 만들고, 교황이 진 빚을 갚게 만들어 은행의 문제를 해결한다. 이 과정에서 피렌체의 대주교가 되는 오르시니의 딸 클라리체 오르시니[8]와 정략결혼하게 된다. 오랜 연인 루크레치아 도나티와 아내 사이에서 갈등하지만 의지가 되는 아내에게 충실하기 위해 루크레치아와의 관계를 끊는다.
아버지 사후 메디치 가문의 장이자 피렌체의 권력가로 여러 문제에 봉착한다. 대부분 알비치 가문에 의한 것으로, 추진하는 모든 일이 야코포 데 파치의 방해를 받는다. 그때마다 기지를 발휘해 문제를 해결하는데, 할머니 콘테시나의 말을 되새기며 선량함을 지킨다.
그러나 시즌 2 마지막 에피소드에서 파치 가문의 음모로 동생이 암살당하면서 인생이 송두리채 뒤바뀌게 된다. 처참하게 죽은 동생을 보며 적들과 싸울 준비를 해야 한다고 했던 동생 줄리아노의 말을 신경쓰지 않았던 자신과 적들에게 분노한다. 자신도 암살당할 뻔하지만 살아남고, 사람들을 부추겨 주동자들이 전부 교수형당하게 만든다. 이후 신과 선량함에서 눈을 돌리고 점차 냉정한 권력자가 되어간다.
시즌 3에서는 교황과 전쟁을 치른다. 주요 정적들은 제거되었지만 여러 이해관계로 인해 전쟁에서의 문제를 유연하게 해결할 수 없자 시의 긴급상황 때 조직할 수 있는 10인 위원회를 조직한다. 그리고 전쟁을 승리로 이끈다. 이 과정에서 브루노 베르나르디라는 수수께끼의 인물을 책사로 들이게 된다. 이후 돈을 써서 자신의 인물을 교황의 자리에 앉히고 마지막 암살 주동자 지롤라모 리아리오를 죽음으로 몰아넣는다.
명실상부한 피렌체의 지배자가 되지만 종전 이후에도 10인 위원회를 해체시키지 않는 등 깨끗하지만은 않은 모습으로 가문을 지켜나간다. 그런 로렌초의 발목을 그간 의지해왔던 어머니 루크레치아가 잡게 된다. 결코 패배하지 않으려는 로렌초를 지원하기 위해 돈을 끌어오던 루크레치아가 피렌체의 돈을 횡령했다는 사실을 알게 되면서 이를 숨기기 위해 전전긍긍하게 된다. 이 과정에서 정직을 경시하고 오직 승리를 가치있게 여기는 베르나르디의 말에 현혹되고, 횡령 사실을 알게 된 위원회의 멤버 토마소를 죽인다. 그러나 타고난 언변으로 시민들의 마음을 사로잡은 지롤라모 사보나롤라 신부가 이 사실을 알게 된다. 결국 메디치 가문의 비리가 사람들의 입에서 오르내리게 되고, 로렌초는 민심을 잃게 된다. 완전히 타락한 로렌초는 자신을 공개적으로 비난하려는 사보나롤라를 암살하기로 한다. 그러나 암살자가 사보나롤라를 노리는 그 순간 사보나롤라를 구한다.
이후 병으로 앓아누우며 마지막으로 사보나롤라와 이야기를 나눈다. 그리고 가족들에게 둘러쌓여 숨을 거둔다.
[1]
아내인 클라리체는 아들 조반니가
시편 대신 고전을 교재로 삼아
라틴어로 공부했다는 사실 때문에 폴리지아노와 다투게 되었다가 로렌초가 폴리지아노를 해고하면서도 폴리지아노를 두둔하면서 유화적인 마르티노 다 코메디아를 아들의 가정교사로 삼아 그녀의 행동을 받아들일 수 없다고 했다.
[2]
이 대성당의 정면에는 완성되지 못해 1515년에
레오 10세가 입성을 축하할 때 일시적으로 세워졌으며, 대공 페르디난도 1세가 도안을 찾으려는 시도도 있어 많은 예술가들이 제출했지만 결국 성사되지 못한다. 캔버스 커튼으로 가렸다가 1680년대에 커튼이 찢어지자 코지모 3세가 갈색 돌벽을 프레스코화로 가릴 장인들을 볼로냐에 부탁했으며, 이후 프레스코화는 천천히 부식되어 19세기 말 대리석과 모자이크로 대체되면서 현재에 이르렀다.
[3]
공교롭게도 같은 방에 이름이 똑같은
로렌초 디 피에로 데 메디치와 자신의 셋째 아들로서 동생 줄리아노와 이름이 거의 같은
줄리아노 디 로렌초 데 메디치가 함께 안치되어 있는데, 선대보다 후대의 무덤이 더 화려해서 그 무덤의 주인공이 로렌초와 줄리아노 형제인 것으로 착각되는 경우가 많다.
[4]
6살일 때 익사할 뻔했던 걸 에치오의 친척들 중 한 명에게 구조되었다고 한다. -어쌔신 크리드 위키
[5]
추가 메모리 중
템플 기사단의 소굴이다. 버전에 따라 플레이 가능 여부가 다르다.
[6]
망토를 착용하고 있을 경우, 피렌체 내에서 지명도가 절대 오르지 않는다. 이는 베네치아에 가면 얻게 되는 베네치아 망토도 동일.
[7]
비둘기장에서 암살 사이드미션을 얻으면 수신자가 로렌초로 되어 있다.
[8]
영어 발음은 '클라리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