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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수정 시각 : 2024-02-27 02:27:18

프레스턴 전투



파일:cattermole.jpg

1. 개요2. 배경3. 양측의 전력
3.1. 국왕군3.2. 의회군
4. 전투 경과
4.1. 8월 17일4.2. 8월 18일4.3. 8월 19일
5. 결과

1. 개요

잉글랜드 내전 시기인 1648년 8월 17~19일 랭켜서주의 프레스턴에서 국왕군과 의회군이 맞붙은 전투. 의회군이 이 전투에서 승리를 거뒀고, 패배 후 생포된 찰스 1세는 처형된다.

2. 배경

1645년 6월 14일 네이즈비 전투에서 참패한 찰스 1세는 자신을 따르는 병사들을 끌어모아서 다시 의회군과 맞서려 했지만 대세는 이미 기울어지자 1646년 4월 스코틀랜드 반란군에게 투항했다. 그러나 1640년 찰스 1세가 성공회를 강요하고 장로교를 박해한 것에 반발하여 반란을 일으켰던 스코틀랜드 언약파는 찰스 1세를 매우 싫어했고, 마침 의회에서 40만 파운드를 지불해줄 테니 찰스 1세를 넘기라고 제의하자 기꺼이 응했다. 이렇게 1647년에 런던으로 끌려간 찰스 1세는 왕으로서 대우받기는 했지만 실권을 완전히 잃고 의회의 결정에 무조건 서명해줘야 하는 신세로 전락했다. 그러나 찰스 1세는 언젠가 왕권을 되찾고 반역자들의 목을 칠 기회를 노리며 외부의 왕당파들과 은밀히 교류했다.

한편, 전쟁에서 이긴 의회파 내부에서 갈등이 빛어졌다. 올리버 크롬웰은 신모범군의 지도자로서 청교도 정신에 입각한 정책을 추진하려 했다. 그러자 의회는 크롬웰과 신모범군을 두려워해 그 힘을 제한하려 했다. 이에 신모범군 수뇌부와 의회는 심각한 갈등을 빛었고, 급기야 조지 조이스 대위가 노스햄턴에 있던 왕을 납치해 뉴마켓으로 옮긴다. 찰스 1세는 이 사건으로 신모범군과 의회 사이에 틈이 벌어졌다는 걸 알게 되자 이를 이용해 그의 적들을 사분오열시키려 했다.

1647년 12월, 와이트섬으로 옮겨져서 그곳의 지사인 로버트 해몬드에게 감시받고 있던 찰스 1세는 스코틀랜드 언약파와 비밀 협약을 맺었다. 스코틀랜드가 잉글랜드를 침공해 찰스 1세를 왕위에 복위시켜준다면, 자신은 장로교를 공인해주기로 하는 내용이었다. 이에 스코틀랜드 언약파는 반란을 일으킬 준비에 들어갔다. 그러다가 1648년 2월 펨브로크 성 의회 주지사 존 포이어 대령이 반란을 일으켜 남 웨일스 일대를 순식간에 휩쓸면서 2차 잉글랜드 내전이 발발했다. 뒤이어 켄트, 콘월, 링컨셔 등 각지에 잔존해 있던 왕당파들이 들고 일어났고, 그해 5월엔 스코틀랜드 언약파가 대규모 봉기를 일으켜 이들을 후원했다.

상황이 이렇게 되자, 의회와 신모범군은 서로간의 갈등을 멈추고 힘을 합쳐 사방에서 일어난 반란을 제압하기로 했다. 1648년 5월, 올리버 크롬웰은 신모범군을 이끌고 잉글랜드 북부 지역으로 북상했다. 그후 그는 5월에서 8월까지 메이드스톤, 펨브로크, 콜체스터 등 여러 전투에서 왕당파의 군대를 격파했다. 잉글랜드 북부 일대의 왕당파를 이끌고 있던 제임스 해밀턴 경은 이에 맞서 스코틀랜드 군과 연합해 랭커셔를 향해 남하했다. 이렇듯 서로를 향해 진군하던 양측은 1648년 8월 중순 프레스턴 근교에서 마주쳤다. 이리하여 2차 잉글랜드 내전의 향방을 가릴 대규모 전투의 막이 올랐다.

3. 양측의 전력

3.1. 국왕군

3.2. 의회군

4. 전투 경과

4.1. 8월 17일

1648년 8월 중순 랭커셔로 남하하는 해밀턴 경은 보급품이 부족하고 타지의 왕당파들로부터 지원을 거의 받지 못하면서 탈영병이 속출하는 상황에 골치를 앓고 있었다. 그는 크롬웰이 북상하고 있다는 정보는 받았지만 막상 그가 근처까지 도달했으리라고는 전혀 예상하지 못했다. 한편 크롬웰은 요크셔에서 페닌느 강을 건너 랭커셔로 빠르게 들어갔다. 크롬웰은 영국군의 남진을 저지하려 하지 않고 리블강 북쪽 둑을 따라 행진해 그들이 스코틀랜드로 피신할 길을 사전에 차단했다.

8월 16일, 여전히 크롬웰의 접근을 알지 못한 해밀턴 경은 본대가 다웬 강을 건너는 동안 랭데일 남작에게 2천 병사들을 줘서 북동쪽에서 프레스턴으로 들어가는 길을 지키게 했다. 랭데일 남작은 임무를 받들어 해당 위치로 이동하던 중 아군 전위대가 크롬웰이 파견한 경기병대와 충돌했다는 소식을 듣자 비로소 의회군이 근처까지 왔다는 걸 깨달았다. 이에 랭데일 남작은 급히 해밀턴 경에게 이 사실을 알렸지만, 해밑턴 경은 위건에서 아군과 합세하기로 한 미들턴 경의 기병대와 합류하고자 보병을 계속 강을 가로질러 행진했다. 그러면서 랭데일 남작에게는 의회군이 자신들을 추격하는 걸 저지하라고 지시했다.

8월 17일 아침, 랭데일은 리블턴 무어에서 강력한 방어 태세를 취했다. 프레스턴으로 이어지는 도로 양쪽에 사수병을 배치핬고, 도로에는 스코틀랜드 랜서들을 배치했다. 당시 폭우가 몇 주 동안 내려서 땅이 진흙투성이가 되었기 때문에, 크롬웰은 의회군 기병대의 우월한 힘을 완전히 이용할 수 없었다. 크롬웰은 일단 군대를 몇 시간 동안 배치했다. 해리슨 대령과 크롬웰의 독립 기병 연대는 스코틀랜드 랜서들을 격파하는 임무를 맡았고, 보병대는 사수병을 격파하는 임무를 맡았다. 이후 크롬웰은 오후 4시에 공격을 개시했고, 랭데일의 군대는 완강히 저항했으나 얼마 안가 수적인 열세를 이기지 못하고 프레스턴으로 후퇴했다.

해밀턴 경은 뒤늦게 사태의 심각성을 깨닫고 랭데일 남작을 지원하기 위해 다시 강을 건너 보병대를 보내려 했다. 그러자 그의 참모를 맡고 있던 칼렌더 백작이 결사 반대했다. 그는 기병대가 없는 마당에 보병대를 되돌려 보냈다가는 적 기병대에게 몰살당할 게 뻔하다면서 리블 남쪽에서 방어 태세를 취하면서 위건에서 올 미들턴 기병대의 귀환을 기다려야 한다고 주장했다. 해밀턴 경은 그 말에 따르기로 하고, 자신은 랭데일 남작을 맞이하기 위해 소규모 일행과 함께 강 북쪽에 남았다. 얼마 후, 그는 랭데일 남작과 재회했지만 곧바로 크롬웰의 기병대의 습격을 받았고, 해밀턴 경은 랭데일과 함께 허겁지겁 다리를 건너 본군과 합류했다. 그러나 그 과정에서 수많은 병사들이 다리를 건너려다 압사당했고 일부는 강에 뛰어들었다가 익사하거나 동사했다.

한편 스코틀랜드 보병 사령관인 바일리 소령은 리블 다리를 방어하기 위해 사수병들을 배치하고 다웬 강 남쪽의 높은 지대에 배치되었던 스코틀랜드 보병들을 소환했다. 이후 그는 리블 다리를 지키고 있는 부대를 지원하기 위해 총사병 6백명을 보냈다. 그러나 그 병사들은 도중에 적 기병대의 습격을 받고 패주해 버렸다. 그 후 프레스턴을 확보한 크롬웰의 부대는 리블 강의 다리와 다르웬 강의 다리를 놓고 스코틀랜드군과 격전을 벌였다. 그러다가 전투력에서 열세를 드러낸 스코틀랜드군이 패주했고, 의회군은 마침내 두 다리를 확보했다.

어둠이 내리기 시작한 가운데 크롬웰의 전진 부대는 스코틀랜드의 주요 진지를 향해 진격했다. 해밀턴 경은 진형을 짜서 맞서 싸우려 했지만 칼렉더 백작의 설득을 받아들여 어둠을 틈타 보병을 철수시켰다. 그는 위건에서 올라오던 미들턴의 기병대를 만난 다음 전군을 재편성하려 했다. 스코틀랜드 보병대는 어둠과 폭우를 틈타 북 없는 행군을 준비하라는 명령이 내려졌고, 이 움직임이 감지되기 전에 먼저 출발했다. 그러나 그의 군대는 미들턴 장군이 이끌고 있는 기병대가 가고 있는 길과는 다른 길을 택했고, 그 바람에 두 군대는 도중에 서로를 놓치고 말았다.

4.2. 8월 18일

8월 18일 아침, 미들턴 장군은 적과 마주친 뒤에야 일이 잘못되었다는 걸 깨달았다. 그는 보병대와 합류하기 위해 남쪽으로 방향을 틀었지만 크롬웰은 이를 놓치지 않기 위해 3개 기병 연대를 급파했다. 이후 미들턴의 기병대는 추격해오는 적과 한편에는 싸우고 한편으로는 후퇴했다. 한편, 해밀턴의 부대는 기진맥진했고 사기가 크게 꺾였다. 그들의 보급 마차는 다웬 다리에서 분실되었고, 그들이 가지고 있던 화약은 끊임없는 폭우로 대부분 쓸모 없어졌다. 굶주린 스코틀랜드인들은 위건에 이르자 왕당파 인사들의 만류를 뿌리치고 위건을 심하게 약탈했다. 이에 보다 못한 해밀턴은 위건에서도 후퇴하기로 결정했다.

8월 18일 밤, 미들턴 장군은 적의 추격을 간신히 뿌리치고 위건에 당도했다. 그러나 그의 눈앞에 보이는 건 스코틀랜드인들의 약탈로 파괴된 위건 시가지 뿐이었다. 그는 본대가 위건을 떠났다는 소식을 듣고 어쩔 수 없이 그들을 따라가면서 계속 자신을 추격하는 적과 맞서야 했다. 혼란과 거의 패닉에 가까운 상황에서 기병 장교 제임스 터너 대령은 자신의 군대를 의회군으로 착각한 스코틀랜드인 동료들에 의해 위건 시장에서 공격을 받아 부상을 입었다. 터너는 기병대에 승마를 명령하고 자신들을 공격하는 스코틀랜드인들에게 반격해 맹렬히 보복했다.

해밀턴과 캘린더 백작은 여전히 체셔와 북웨일스에서 왕당파 세력을 키우고 있다고 믿어지는 바이런 경과 함께 하기를 바랐다. 그들은 스코틀랜드군이 재조직되고 바이런과 접촉이 성립되는 동안 머세이 강 위의 다리를 방어하여 워링턴에 입성할 계획을 세웠다. 한편, 의회군은 스코틀랜드군의 행진을 계속 괴롭혔다. 이에 해밀턴 경은 바일리 소장의 보병 대부분이 워링턴에서 북쪽으로 3마일 떨어진 윈윅 마을 근처에 서서 적의 추격을 지연시키기로 결정했다. 바일리는 총사병들이 측면의 높은 지대를 점령하기 위해 배치되는 동안 도로 자체를 잡기 위해 자신의 동료들을 진지 중앙에 집결시켰다. 그는 해질 때까지 적을 최대한 저지한 후 어둠을 틈타 워링턴으로 철수하기로 했다.

4.3. 8월 19일

8월 19일 정오 무렵, 크롬웰의 선발대가 고개 쪽으로 다가갔으나 금세 밀려났다. 크롬웰은 적이 점령한 고지를 빼앗기로 결심하고 모든 보병들이 도착하기를 기다리지 않고 공격을 재개했다. 브라이트 대령의 연대는 스코틀랜드 중심부에 대한 공격을 주도했고 총사들과 드래건들은 측면에 높은 지대를 잡고 있는 스코틀랜드군을 몰아내려 했다. 그러나 스코틀랜드인들은 자신들의 위치를 단호히 지켜내 의회군을 밀어냈다. 몇 시간의 치열한 전투 끝에 크롬웰은 공격을 중지하고 나머지 병력이 올라오기를 기다렸다.

이때 몇몇 주민들이 크롬웰을 찾아가 그의 기병대가 적의 동쪽 고지로 향하는 길을 안내해주겠다고 제안했다. 이에 크롬웰은 그들을 안내인으로 삼아 적의 동쪽 진지를 빙 돌아가는 길로 기병대를 투입시켰으며, 동시에 보병대에게 다시 한 번 정면 돌파 명령을 내렸다. 이번에는 스코틀랜드인들이 기병대의 습격과 적 보병대의 맹공을 견디지 못하고 워링턴을 향해 도주했다. 그들 중 일부는 윈윅 교회 근처의 평지로 몰려서 마지막 저항을 펼치다가 많은 사상자를 낸 후 항복했다.

8월 19일 저녁, 바일리는 약 2,700명의 보병대와 함께 워링턴에 도착했으나 해밀턴 경, 캘린더 백작, 랭데일 남작이 이미 소수의 측근들과 함께 남쪽으로 도주해버렸다는 충격적인 소식을 접했다. 그는 워링턴에서 최후의 전투를 벌이기로 하고 워링턴 다리를 가로지르는 바리케이드를 설치한 후 적이 오기를 기다렸다. 그러나 이때쯤 되면 병사들은 더이상 싸울 마음이 없었고 반란을 모의하는 이들도 많았다. 이러한 분위기를 감지한 바일리는 절망에 빠져 동료 장교들에게 외쳤다.
내게 총을 다오! 부탁하건대 이 치욕을 끝낼 수 있게 해다오!

그러나 어느 누구도 그 요청에 응하지 않았고, 결국 바일리는 워링턴 다리에서 크롬웰과 접견한 후 부하들과 함께 항복했다. 한편 해밀턴 경은 스태포드셔로 도망쳤고, 미들턴 장군은 그의 말이 지쳐 나가떨어지는 바람에 적에게 체포되었다. 랑데일 남작은 노팅엄으로 도망쳤으나 얼마안가 추격병에게 사로잡혔다. 그후 8월 25일, 해밀턴 공작은 적에게 완전히 포위되고 병사들이 반란을 일으키기 직전의 상태까지 이르자 결국 항복했다. 이리하여 잉글랜드 북부를 휘젓던 국왕군은 소멸되었다.

5. 결과

프레스턴 전투는 국왕군에겐 사형판결이나 다름없는 결과를 안겼다. 국왕군은 이 전투에서 2천 명이 전사했고 6천 명이 포로 신세로 전락해 전군이 사실상 와해되었다. 반면 크롬웰이 이끄는 신모범군의 피해는 대략 100명이었다. 콜체스터는 8월 28일 페어팩스 경이 이끄는 의회군에게 항복했고, 뒤이어 웨일스 및 잉글랜드 남부 지역의 왕당파 세력들도 모두 항복했다. 오직 폰테프랙트 성만이 1649년 3월까지 찰스 1세를 위해 버텼다가 결국 함락되었다. 그 후 왕당파 지도자들은 모조리 처형되었고 찰스 1세도 1649년 1월 20일부터 일주일간 진행된 재판에서 사형 판결을 받고 1월 30일에 화이트홀 궁전에서 참수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