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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해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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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lbgcolor=#00145a><colcolor=#ffffff> 대한축구협회 전력강화​위원장
Korea Football Association
파일:정해성 위원장.jpg
이름 정해성
鄭海成 | Chung Hae-soung
출생 1958년 3월 4일 ([age(1958-03-04)]세)
부산광역시
국적
[[대한민국|]][[틀:국기|]][[틀:국기|]]
학력 서울교육대학교 부설초등학교 (졸업)
한영중학교 (졸업)
계성고등학교 (전학)
중앙고등학교 (졸업)
고려대학교 사범대학 (체육교육학 / 학사)
직업 축구 선수 ( 미드필더 / 은퇴)
축구 감독
축구 행정가
소속 <colbgcolor=#00145a><colcolor=#ffffff> 선수 제일은행 축구단 (1982~1983)
럭키금성 황소 (1984~1989)
코치 LG 치타스 (1991~1994)
포항제철 아톰즈 (1995)
전남 드래곤즈 (1996~1998)
대한민국 대표팀 (1998~2002)
전남 드래곤즈 (2003)
대한민국 대표팀 (2007~2010 / 수석 코치)
대한민국 대표팀 (2017 / 수석 코치)
감독 부천 SK/ 제주 유나이티드 FC (2004~2007)
전남 드래곤즈 (2011~2012)
중앙고등학교 축구부 (2017)
호앙 아인 잘라이 FC (2017~2018 / 총감독)
호찌민 시티 FC (2019~2020)
기타 럭키금성 황소 (1990 / 트레이너)
LG 치타스 (1994 / 스카우트)
대한축구협회 (2013 / 경기위원장)
대한축구협회 (2013~2016 / 심판위원장)
중앙고등학교 축구부 (2017 / 기술 고문)
대한축구협회 (2023~2024 / 대회분과위원장)[1]
대한축구협회 (2024~ / 전력강화위원장)

1. 개요2. 선수 경력
2.1. 프로 입단 전2.2. 럭키금성 황소
3. 지도자 경력4. 행정가 경력
4.1. 대한축구협회 전력강화위원장
5. 논란 및 사건 사고6. 기타

[clearfix]

1. 개요

대한민국 축구인. 現 대한축구협회 전력강화위원장.

2019년부터 2020년까지 호찌민 시티 FC 감독을 맡았다.

그 전에는 대한민국 축구 국가대표팀 수석 코치를 맡았다. 2002년 한일 월드컵에서 당시 대표팀의 코치로 지내면서 거스 히딩크 감독을 보좌했던 지도자로 잘 알려져 있다.

2. 선수 경력

2.1. 프로 입단 전

초등학교 시절 고향인 부산을 떠나 서울교육대학교부설초등학교로 전학을 오면서부터 핸드볼 선수로 지냈다. 서울시 대회에서 MVP를 수상했을 정도로 기량을 인정받았으나 핸드볼부가 없는 한영중학교에 입학하게 되면서부터 축구를 새롭게 접하면서 축구로 진로를 변경했다.

당시 키고 작고 몸이 약했던 탓에 아버지의 반대가 심해서 축구를 몰래 해야만 했다. 대신 아버지는 야구를 권유했기에 야구부에 가입해 1년 정도 활동했으나 야구에는 별로 흥미가 생기지 않아 결국 중학교 2학년 말에 아버지 몰래 축구부에 가입했다.

하지만 중학교 3학년 말 경에 수학여행 경비로 축구화를 산 것이 덜미가 잡혔다. 그래도 어렵게 허락을 받아 축구를 계속했으나 키도 작았고 축구를 시작한 것 자체도 늦었던 탓에 중학교를 1년 더 다녔다. 다만 당시에는 유급하는 경우가 오늘날에 비하면 흔한 일이었다.

한영중 시절 한영고 감독의 권유로 충북 옥천의 죽향초로 내려가 축구를 하기도 했다. 선수가 부족했던 죽향초의 감독이 선배였던 한영고 감독에게 도움을 요청했던 것이다. 당시는 나이를 속인 부정 선수가 득실거리던 시절이고 당시 체구가 작았던 정해성은 영문도 모른 채 죽향초에서 축구를 해야만 했다. 약 9개월 동안 그곳에서 보내야 했고 소년체전에서 우승을 이끌기도 했다.

중학교 졸업 후 대구에 있는 계성고에 입학했다. 그런데 계성고 축구부에서 구타가 만연했던 탓에 서울 중앙고로 도망치듯 전학을 갔다.

중앙고에서 축구에 점점 두각을 드러내기 시작했다. 1학년부터 주전으로 뛰었고 3학년에는 주장을 맡아 맹활약하던 중 1977년 고교 선수권에서는 중앙고 유일의 전국 대회 우승을 이끌기도 했다. 이렇게 어느덧 고교 최고의 선수 중 하나로 인정을 받으며 여러 대학 축구부의 치열한 스카우트 공세에 시달릴 정도가 됐다.

‘제2의 차범근이라 불렸던 남강고의 이형노에 이어 고교 랭킹 2위로 평가받았고 고려대학교 공군사관학교의 치열한 스카우트 경쟁에 휘말렸다. 아버지는 “군인이면 먹고 산다”며 공군사관학교를, 어머니는 고려대를 원했고 우여곡절 끝에 1978년 고려대에 입학했다. 이는 신의 한 수였는데 얼마 후 3사의 스카우트 경쟁이 과열됐다는 판단에 사관학교의 스카우트 금지령이 내려졌던 것이다. 만약에 공사로 갔다면 입학이 취소되어 1년을 허송세월로 보낼 뻔했던 것이다.

김정남 감독이 부임한 2학년 시절부터 풀백으로 보직을 변경했고 대표팀 합류 이야기까지 나올 정도로 맹활약을 펼쳤다. 그러나 동료들과 창경궁으로 벚꽃 놀이를 하러 가다가 불량배들과 시비가 붙었던 과정에서 옆구리를 찔리는 중상을 당하고 말았다. 결국 이 사건으로 축구부에서 제명됐다. 재활을 거치고 나서 축구부 복귀를 희망했지만 학교 측에서는 허락하지 않았다. 다시 축구부에 들어가기 위해 체육위원회 사무실에서 허락을 거듭 요청한 끝에 복귀한 후 다시 주전으로 활약했다.

2.2. 럭키금성 황소

파일:external/www.kfa.or.kr/2012112193949.jpg
대학 졸업 후인 1982년에 실업 구단이던 제일은행 축구단에 입단해 약 2년을 보내고 1984년 럭키금성 황소의 창단 멤버로 합류하며 프로 선수 생활을 시작했다.

럭키금성에서의 출발은 좋지 못했는데 당시에는 한 시즌이 끝나면 8~10명 정도가 방출되는 시절이었다. 현대와의 경기에서 정해성의 수비쪽에서 수비가 뚫리면서 결국 수적 우위를 회복하지 못하고 2-3 역전패를 당하면서 주전으로 나서지 못하게 된 것. 당시 경기에서 현대 소속의 최강희가 퇴장을 당한 상태였다. 그래서 진주에서의 여름 합숙 훈련 때 당시 박세학 감독에게 어필하기 위해 삭발을 하면서 의지를 보이기도 했다.

이런 과정을 통해 현대전에서 다시 기회를 잡았는데 역할은 현대의 키 플레이어 허정무를 철저하게 봉쇄하는 것이었다. 그 이후에도 상대 팀의 키 플레이어를 봉쇄하는 역할이었고 대우 조광래, 정해원, 현대 허정무, 포항제철 조긍연 등을 거머리처럼 마크하면서 인정받기 시작한다. 비록 경기는 패했지만 그의 노력은 배신하지 않아 이후부터 럭키금성의 듬직한 주전 선수로 확고히 자리잡게 된다.

1985년에 럭키금성의 창단 첫 우승을 이끈 후 1986년 후반기부터는 주장[2]을 맡아 준우승을 차지하기도 했다. 팀의 살림꾼 역할을 묵묵히 해내고 리더십까지 갖췄기에 대한 평가는 높았고 K리그에서는 이미 톱 클래스의 선수로 인정받기도 하였지만 대표팀으로서의 인연은 없었다는 것이 아쉬운 점. 다만 대표팀 멤버에 대한 욕심은 크게 없었다고 한다. 1986년 멕시코 월드컵 출전에 대한 꿈이 있기도 했으나 그런 욕심보다는 K리그를 통해 자신의 이미지를 바꾸는 것에 더 신경을 썼다고 한다.

줄곧 럭키금성에서 헌신하다가 1989 시즌을 끝으로 현역에서 은퇴했다. 마지막 시즌에도 28경기나 뛰면서 팀의 구심점 역할을 했기에 갑작스런 은퇴라 할 수 있다. 프로에서 6년을 뛰면 재계약금을 줘야 하는 제도가 오히려 그의 선수 생활 연장에 발목을 잡았던 것.

3. 지도자 경력

1 이운재 · 2 현영민 · 3 최성용 · 4 최진철 · 5 김남일 · 6 유상철
VC
· 7 김태영 · 8 최태욱
9 설기현 · 10 이영표 · 11 최용수 · 12 김병지 · 13 이을용 · 14 이천수 · 15 이민성 · 16 차두리
17 윤정환 · 18 황선홍 · 19 안정환 · 20 홍명보
C
· 21 박지성 · 22 송종국 · 23 최은성
파일:네덜란드 국기.svg 거스 히딩크
파일:대한민국 국기 (검은색 테두리).svg 박항서
스태프
파일:네덜란드 국기.svg 핌 베어벡 · 파일:대한민국 국기 (검은색 테두리).svg 정해성 · 파일:대한민국 국기 (검은색 테두리).svg 김현태 · 파일:미국 국기 (검은색 테두리).svg 압신 고트비

1989년 선수 생활을 마감하고서 독일 분데스리가 연수를 시작으로 지도자 생활을 이어갔다. LG 치타스 포항제철 아톰즈 코치를 거쳐 1996년부터 1998년까지 전남 드래곤즈, 그리고 2000 시드니 올림픽[3] 2000 아시안컵[4]을 함께했다. 당시 감독은 허정무였다. 이후 2002년에는 거스 히딩크 감독을 보좌하며 2002년 한일 월드컵에 나가 4강 신화에 일조했다.

코치로서 다양한 경험을 쌓은 다음에는 2003년부터 부천 SK(現 제주 유나이티드 FC) 감독을 맡으면서 감독으로 데뷔했으나 2007 시즌을 끝으로 자진해서 사퇴했다. 재차 유럽으로 연수를 떠났다가 얼마 지나지 않아 허정무 감독과 다시 한 번 호흡을 맞춰 2010년 남아공 월드컵 16강 진출(15위)을 일궈냈다. 곧바로 전남 드래곤즈의 감독으로 부임하였으나 2012년 성적 부진으로 그 해 8월 자진 사퇴하였다.[5]

전남 감독 사임 후 대한축구협회 심판위원장으로 활동하며 지도자와는 거리를 두다가 2017년 모교 중앙고등학교 감독으로 부임했으나 부임한 지 얼마 안 되어 2017년 대한민국 축구 국가대표팀의 수석 코치로 선임되어 울리 슈틸리케 감독을 보좌했다. 계약 기간은 2018년 러시아 월드컵 본선까지였으나 슈틸리케 감독 경질 후 신태용 감독이 부임하자 결국 분위기 쇄신을 위해 자진 사임을 택하고 중앙고등학교로 복귀했다. 다만 대한축구협회와의 비상근직 계약이 남아있는 관계로 보직은 기술 고문을 달고 실질적인 감독 역할을 수행하였다.

2017년부터 2018년까지 베트남 V.리그 1의 명문 클럽 호앙 아인 잘라이 FC의 총감독 겸 기술 위원장을 맡았다.

3.1. 호찌민 시티 FC 감독

2019년부터 2020년까지는 호찌민 시티 FC의 감독을 맡았다. 시즌 초반에는 선두로 독주하며 이 독주 덕택에 3월의 감독상도 수상했다.

5월 26일에는 11경기 8승 2무 1패로 여전히 선두 자리를 지켰다. 더욱이 하노이가 원정에서 성적이 좋지 않아 승점 차도 벌리는데 성공. 3월에 이어 5월 감독상도 받아냈다. 베트남 전쟁 이후 남베트남-북베트남 갈등이 깊고 축구에서도 북부 베트남이 패권을 쥐고 있어서 남베트남 축구계와 남베트남 지방 사람들은 열등감을 갖고 있었는데 이 기회에 다시 남베트남 지방의 우승을 기대했다.

막판에 스퍼트를 낸 하노이한테 역전 당하면서 리그 우승은 좌절되었지만 그동안 2년 연속 12위를 우승권으로 만들었고 하노이의 규정 위반으로 AFC 챔피언스 리그 진출권을 받아냈다. 그리고 11월 2일 2+1 재계약도 확정 지었다. #
2020년은 직전 시즌 2위라는 성적에 도취된 호찌민 시티 구단주가 이 기회에 우승 한 번 해 보자고 폭풍 영입을 지시했다. 덕분에 응우옌꽁프엉을 데려오는 데 성공하기도 했다.

11라운드까지 5위라는 예상외로 부진한 성적에 사퇴 압력[6]을 받고 격분해서 아예 호찌민 구단에 사표를 던졌다. 이에 선수단 내부에서도 큰 동요가 일어나 선수들이 훈련 거부 등의 태업을 저지르고 이적을 문의하는 등 콩가루가 되었고 팬, 축구계에서도 "호찌민이 너무 성급하다", "계약 해지 방식에 예의가 없다."는 식의 비난의 목소리가 커졌다.

그러자 화들짝 놀란 호찌민 프런트가 부랴부랴 수습하고 한국으로 돌아갈 준비를 하고 있던 정해성 감독을 찾아가 사과하고 다시 원래 자리로 돌아가자는 제의를 했고 선수들이 눈에 밟혔던 정 감독이 받아들여 감독 자리에 복귀했다. 다행히도 이 난리가 터진 기간은 코로나19 재유행 기간이라 리그가 중단되어서 성적에는 별 영향이 없다.

그러나 결국 해당 시즌이 끝나고, 이태훈에 이어 이쪽도 베트남 리그 팀의 재계약을 거부하고 한국으로 돌아갔다. 이미 팀에 대해서는 마음 속에서 떠나 있었지만, 선수들이 눈에 밟혔기 때문에 시즌의 잔여 일정을 마저 진행하는 방향으로 결정한 것으로 보인다.

4. 행정가 경력

4.1. 대한축구협회 전력강화위원장

파일:한시적 넘겨주기 아이콘.svg   차기 국가대표팀 감독 선임 과정에 대한 내용은 대한민국 축구 국가대표팀/제75대 감독 체제/선임 과정 문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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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고하십시오.
2024년 2월 20일, 임원회의 결정에 따라 마이클 뮐러의 뒤를 잇는 전력강화위원회 위원장으로 선임되었다. 이를 지켜보고 있던 팬들의 반응은 시작부터 몹시 좋지 않다. 위르겐 클린스만의 경질로 가는 국면에서 이미 이석재 대한축구협회 부회장이 클린스만 선임을 뜬금없이 뮐러 위원장 탓으로 돌리면서 국내 축구인 출신 전력강화위원장을 선임해야 한다며 정해성 당시 대회위원장 이름을 아예 차기 전력강화위원장으로 공개적으로 언급한 적도 있는데, 이것이 그대로 이루어진지라 이대로면 후보군을 추려 선임하는 시늉을 왜 한 건지 의문인 상황.

여튼 새롭게 전력강화위원장으로 선임된 뒤 위원회도 새롭게 꾸렸는데, 2월 안에 정식 감독을 선임하겠다는 무리한 일정을 축구협회 고위 관계자가 밝히면서 사실상 전력강화위원회를 통한 선임 절차도 졸속으로 이루어질 것이라는 우려가 크다. 정상적인 선임 절차라면 여러 차례 회의를 열면서 지난 클린스만 선임 절차에서의 문제점을 분석한 뒤 제대로 된 1차 후보군을 추리는 것만 해도 3월은 족히 넘어갈 것이다.

그리고 2024년 2월 21일, 팬들의 우려대로 3월 전에 임시감독이 아닌 정식 감독을 국내파에 비중을 두겠다고 밝혀 그 밥에 그 나물임을 보여 줬다. 거기다 2월 24일 열릴 2차 회의부터는 비공개로 회의를 진행하기로 하고 별도의 브리핑 절차도 없앤 채로 기자들의 취재까지 막는 불통 행보를 보였다. #

2차례 비공개 회의를 통해 2월 27일, 현 황선홍 U-23 대표팀 감독에게 A대표팀 감독직을 임시로 겸임시킬 것이라고 발표했는데 이에 대해 반발 여론이 만만치 않다.

그러면서 파리 올림픽 진출에 실패하면 본인이 책임진다고 말해 더욱 더 빈축을 샀는데, 알다시피 대한민국은 세계 최다인 올림픽 9회 연속 진출을 기록해 한 국가로 파리 올림픽 진출에 실패한다면 대한민국 축구가 받을 타격이 큰데 아무런 생각 없이 말해 빈축을 사고 있다.

5. 논란 및 사건 사고

5.1. 승부조작 축구인 사면 묵인 논란

2023년 3월 28일, 클린스만호의 두 번째 평가전인 대한민국과 우루과이의 경기 시작 직전 대한축구협회 2022 카타르 월드컵 16강 진출과 축구 통합을 명분으로 승부조작범 48인 포함 징계 중이던 축구인 100명을 전격 사면한다는 결정을 내릴 때 회의에 이영표, 이동국, 조원희, 이임생, 박경훈 등과 함께 협회 임원으로 참여하였으나, 이에 대한 반대 의견을 내지 않고 안건 가결에 침묵으로 일관하면서 축구 팬들의 비판을 받고 있다. # 참고로 2011년 K리그 승부조작 사건 당시 전남 드래곤즈 감독이었으며, 전남에서도 조작범들이 있었다.

6. 기타



[1] 2023년 대한축구협회 승부조작 축구인 사면 사건으로 인해 이사회 전원이 사임하였으나, 새로 구성된 이사회에서 대회분과위원장에 재임명되었다. [2] 이전까지는 박항서가 럭키금성의 주장을 맡았다. [3] 16개국 본선 진출 대회 [4] 12개국 본선 진출 대회 [5] 감독 사퇴 당시 전남은 강등권까지 추락할 정도로 팀의 분위기가 상당히 암울하였다. [6] 호찌민에서 " 브라질에서 감독 데려오는 대신 총감독이나 호찌민 시티 구단 아카데미 단장으로 영전시켜 줄게요."라는 거였지만 정해성 감독에게는 이것도 굴욕이다. [7] 출처는 히딩크의 자서전인 '마이 웨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