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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수정 시각 : 2024-03-02 02:27:27

의빈 권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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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의 후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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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lbgcolor=#89236A><colcolor=#ffd400>
조선 태종의 후궁
의빈 권씨 | 懿嬪 權氏
의빈 권씨묘 위치
출생 1384년
사망 1457년 이후
조선 한성부 영수궁(寧壽宮)
(現 서울특별시 종로구 일대 추정)
능묘 경기도 연천군 장남면 반정리 741
재위기간 조선 정의궁주
1402년 5월 19일 ~ 1422년 3월 12일
조선 의빈
1422년 3월 12일 ~ 1457년 이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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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lbgcolor=#89236A><colcolor=#ffd400> 본관 안동 권씨
부모 부친 - 권홍(權弘, 1360 ~ 1446)
모친 - 경주 이씨 이학림(李學林)[1]의 딸
배우자 태종
자녀 슬하 1녀
장녀 - 정혜옹주(貞惠翁主, ? ~ 1424)
봉작 정의궁주(貞懿宮主) → 의빈(懿嬪)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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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2. 생애
2.1. 첫 번째 간택 후궁2.2. 태종의 총애와 권위2.3. 말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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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조선 태종 간택 후궁. 아버지는 성균악정 권홍(權弘)으로 이후 영가군에 봉해진 후 판경승부사에 이르렀다. 어머니는 고려 문하시중 이제현의 손자로 소부윤을 지낸 이학림(李學林)의 딸이다.

처음에 정의궁주(貞懿宮主)로 봉작되었다가 의빈(懿嬪)이 되었다. 슬하에 정혜옹주를 두었으며, 세종의 여섯째 아들 금성대군을 양육하였다.

2. 생애

2.1. 첫 번째 간택 후궁

1401년(태종 1) 태종은 원경왕후의 시녀·환관 등 20여 인을 내쫓았다. 원경왕후가 태종이 가까이 한 궁인을 힐문하고 투기한 까닭이었다. 이듬해 태종은 후궁을 맞이하고자 계획하게 되었다.
이 때에는 임금이 즉위한 지 얼마 되지 못하여 빈첩(嬪妾)이 미비(未備)되어, 다만 평시의 시녀만이 있을 뿐이었다. 정비(靜妃)는 천성이 투기가 심해 사랑이 아래로 이르지 못하여, 임금이 빈첩을 갖추고자 하였다.
《태종실록》 2년 1월 8일

1402년(태종 2) 1월 21일 태종은 권홍의 딸을 후궁으로 맞이하고자 비단, 쌀 등을 주어 혼수를 마련하게 하였고, 왕비 세자빈처럼 예를 갖추어 가례를 치르려고 하였다.[2] 그러나 원경왕후로 인하여 뜻을 이루지 못하였다. 이때 오죽하면 상왕으로 있었던 정종이 나서서 "왕은 어찌하여 다시 장가들려고 하시오? 내 비록 아들이 없어도, 소시(少時)의 정(情)으로 인하여 차마 다시 장가들지 못하는데, 하물며 왕은 아들이 많으니 말해 무엇하겠소?" 라고 말하였다.[3][4]
임금이 권씨(權氏)가 현행(賢行)이 있다 하여 예(禮)를 갖추어 맞아들이려고 하니, 임금의 옷을 붙잡고 말하기를, "상감께서는 어찌하여 예전의 뜻을 잊으셨습니까? 제가 상감과 더불어 함께 어려움을 지키고 같이 화란(禍亂)을 겪어 국가를 차지하였사온데, 이제 나를 잊음이 어찌 여기에 이르셨습니까?" 하며, 울기를 그치지 아니하고 음식도 들지 아니하므로 임금이 가례색(嘉禮色)을 파하도록 명하고, 환관(宦官)과 시녀(侍女) 각각 몇 사람만으로 권씨를 별궁에 맞아들였다. 정비는 마음에 병을 얻었고, 임금은 수일 동안 정사를 듣지 아니하였다.
《태종실록》 태종 2년 3월 7일

이로부터 한 달 뒤인 4월 18일 권씨는 정의궁주(貞懿宮主)로 봉작되었다.[5] 또한, 아버지 권홍은 가정대부(嘉靖大夫) 영가군(永嘉君)이 되어 사실상 국구(國舅: 왕의 장인)와 유사한 대접을 받았다.[6]

2.2. 태종의 총애와 권위

공녀로 가서 영락제의 후궁이 된 현인비는 그녀에게 백은(白銀) 1백 냥(兩)을 주었고, 조선에 온 의 사신은 태종의 많은 후궁 중에 '권 궁주' 한 사람을 지목해서 선물을 건넸다.
임금이 사신을 청하여 광연루(廣延樓)[7]에서 잔치 하였다. 사신이 권파파(權婆婆)가 준 금(錦) 2필(匹), 단(段) 2필, 침(針)·분(粉)·주머니[囊]를 친히 권 궁주(權宮主)에게 주고자 하니, 임금이 편전(便殿)으로 맞아들이었다.
태종실록》 태종 17년 7월 25일

한편 권씨는 슬하에 딸 하나를 두었는데, 정혜옹주로 1419년(세종 1) 박신(朴信)의 아들 박종우(朴從愚)를 부마로 맞이하였다.[8][9]

1422년(세종 4) 상왕으로 물러난 태종이 병석에 눕자 권씨는 신빈 신씨와 함께 간병에 힘썼다. 태종이 그 공을 생각하여 권씨를 정1품 의빈(懿嬪)으로 봉작하였다.

2.3. 말년

태종의 사후, 신빈 신씨와 함께 머리를 깎고 비구니가 되었으며, 밤낮으로 불경을 외우며 태종의 명복을 빌었다. 이는 세종의 허락도 없이 벌어진 일이라서 조정 대신들의 비판을 받았다.[10] 아예 정인지는 상소를 올려 의빈 권씨가 다시 머리를 기르게 하여 옛 모습으로 돌아오게 해야 한다고 하였다.[11]

그 후 1424년(세종 6) 하나뿐인 딸 정혜옹주가 세상을 떠나고, 의빈 권씨는 세종의 여섯째 아들 금성대군을 맡아 길렀다.[12]
금성 대군(錦城大君) 이유(李瑜)가 아뢰기를,
"신이 의빈(懿嬪) 에게서 자라나서 그 은혜가 심히 무거운데, 나이가 지금 70이므로 궁중에 기거하는 것은 적당하지 못합니다. 신은 부마(駙馬)의 예가 아니니, 원컨대 신의 집으로 나가도록 명하시어 평안하게 봉양할 수 있게 하여 주소서."
단종실록》 단종 1년 6월 26일

다만, 세종 대에 이미 궁인이 나가서 거처하는 것을 금지하였기에 금성대군이 직접 의빈 권씨를 모실 수는 없었다. 이 때문인지 혜빈 양씨가 거처하는 혜빈궁(惠嬪宮)에서 지냈다.[13]

이러한 사실을 보면 단종 세력과 가까운 것처럼 보이지만, 의빈 권씨의 사위인 운성군 박종우는 정혜옹주와 혼인한 지 5년 만인 사별해서 재혼한 후[14], 계유정난에 참여해서 운성부원군(雲城府院君)이 된 공신이었다. 또한 세조는 권씨가 지내는 궁을 특별히 영수궁(寧壽宮)이라고 부르게 하면서 예우하였으므로 단종 세력은 아니었던 것으로 보인다.[15]

나중에 금성대군이 죽자 그의 명복을 빌기 위해 불상 조성에 나섰는데 이와 관련된 유물이 국보 제282호 영주 흑석사 목조아미타여래좌상 및 복장유물이다.

[1] 중현대부(中顯大夫, 종3품 하계) 소부윤(少府尹)을 지냈다. 고려 문하시중(門下侍中) 이제현(李齊賢)의 3남 전리총랑(典理摠郎) 이달존(李達尊)의 3남이다. 권홍은 이학림의 셋째사위이다. [2] 태종실록 3권, 태종 2년 1월 21일 갑진 2번째기사. # [3] 태종실록 3권, 태종 2년 2월 11일 갑자 3번째기사. # [4] 정종이 후궁에게서 본 서자는 많지만, 왕비인 정안왕후에게서는 자식을 보지 못했다. 그래도 부부끼리 금슬은 좋았다. [5] 태종실록 3권, 태종 2년 4월 18일 경오 1번째기사. # [6] 1412년(태종 12) 태조 이성계의 후손이 아니면서 외척을 군(君)으로 봉한 경우를 파하는 조치가 있었다. 이때 권홍도 영가군에서 판경승부사로 고쳐 봉해졌다. [7] 태종이 창덕궁에 머무르면서 동북쪽에는 해온정(解慍亭), 동남쪽에는 광연루를 지었는데, 주로 종친과 신하를 불러 연회를 열었다. [8] 세종실록 3권, 세종 1년 1월 22일 정묘 4번째기사. # [9] 혼인을 먼저 치르고, 1월 24일에 박종우를 자헌대부(資憲大夫) 운성군(雲城君)으로, 옹주를 정혜옹주로 봉작하였다. [10] 당시 고려의 옛 후비들이나 경순공주처럼 출가한 전례가 있긴 하였으나 어디 의지할 곳도 없이 내몰려 출가한 사람들이라 의빈 권씨와는 경우가 다르다. [11] 마찬가지로 세종이 승하한 뒤에 신빈 김씨가 머리를 깎고 다시 비구니가 되었다. 한양 도성 안에 정업원이라는 사찰이 떡하니 있었고, 나중에 정업원이 폐쇄되어도 왕실 여성들의 불교 신봉은 조선 말까지 지속되었다. [12] 1412년(태종 12) 원경왕후가 왕자를 낳았을 때, 성비 원씨가 이 왕자를 양육한 바 있다. 다만, 너무 어릴 때 요절하여 대군으로서 봉작을 받지 못하였다. # 이 밖에도 신빈 김씨 영응대군을 양육하는 등 후궁이 자기 자식이 아닌 어린 왕자, 왕녀의 보모 역할을 맡는 일은 보통이었다. [13] 1455년(세조 1) 금성대군을 논죄할 때, '혜빈(惠嬪)·상궁(尙宮) 등과 서로 결탁하여 그의 양모(養母) 의빈(懿嬪)으로 하여금 혜빈궁(惠嬪宮)에 들어가 거처하게 하였다'는 말이 나온다. # 즉, 금성대군이 일부러 의빈 권씨를 혜빈궁에 거처하게 한 것이며 의도가 있었다는 소리. [14] 부마의 재혼 금지법은 효종 때였다. 문종의 유일한 서녀 경숙옹주의 남편 강자순도 옹주가 죽자 곧바로 을 들였고, 그것을 비난 받았으나 성종은 그를 벌하지 않았다. [15] 세조실록 7권, 세조 3년 5월 22일 갑신 3번째기사.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