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의 후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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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lbgcolor=#89236A><colcolor=#ffd400> 조선 정종의 후궁
숙의 기씨 | 淑儀 奇氏 |
|
사망 | 1457년 7월 13일( 음력 6월 13일) |
본관 | 행주(幸州) |
휘 | 자재(自在) |
부모 |
부친 - 기면(奇勉) 모친 - 청풍 김씨 |
배우자 | 정종 |
자녀 | |
봉작 | 숙의(淑儀) |
[clearfix]
1. 개요
조선 정종의 후궁이다. 본관은 행주이며 공조전서(工曹典書)를 지낸 기면(奇勉)의 딸이다. 정무공(貞武公) 기건(奇虔)의 누이로, 이름은 기자재(奇自在)이다. 슬하에 순평군 이군생, 금평군 이의생, 정석군 이융생, 무림군 이선생을 비롯해 숙신옹주와 상원옹주를 낳아 4남 2녀를 두었다.[1]본래 공안부(恭安府)[2] 궁인 출신으로 상왕이 된 정종의 부탁으로 태종이 영구히 양인(良人)으로 삼았다는 기록이 있다.[3]
상왕(上王)의 궁인(宮人) 가운데 이름이 자재(自在)라는 자가 있는데, 공안부(恭安府) 여종이었다. 상왕이 불쌍히 여겨 임금에게 부탁하여 왕패(王牌)를 주어 영구히 양인(良人)으로 방면(放免)하도록 하였다. 대개 상왕에게 총애를 받아 자녀 여덟을 낳았는데, 이군생(李群生)이 그 맏이다.
《 태종실록》 태종 9년 4월 7일
《 태종실록》 태종 9년 4월 7일
숙의 기씨(淑儀 奇氏)의 부친(父親)인 기면(奇勉)은 고려조(高麗朝) 권문세족인 기중평(奇仲平)의 아들이며 공조전서(工曹典書)를 지냈다. 기면(奇勉)의 외조모(外祖母)는 고려조(高麗朝) 태자태사(太子太師)를 지낸 진위 이씨(振威 李氏) 이중육(李仲育)의 딸이다.
2. 생애
정종의 총애를 가장 많이 받았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우선 정종이 특별히 태종에게 부탁한 덕분에 면천된 데다가 《선원록》에 실린 정종의 15남 8녀 중 4남 2녀를 낳아 가장 많은 자식을 낳았다.1457년(세조 3)에 죽었는데, 당시 세조는 쌀과 콩 20석과 종이 70권(卷)과 관곽(棺槨)을 부조하였다.[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