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의 후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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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lbgcolor=#89236A><colcolor=#ffd400> 조선 연산군의 후궁
숙의 민씨 | 淑儀 閔氏 |
|
출생 | 미상 |
사망 | 1519년 이전 |
본관 | 여흥 민씨 |
부모 |
부친 - 민효손(閔孝孫) 모친 - 파평 윤씨 윤지강(尹之崗)의 딸[1] |
형제자매 |
|
부군 | 연산군 |
자녀 | 없음 |
[clearfix]
1. 개요
조선 연산군의 후궁. 증조부는 한성참군(漢城參軍)[2]을 지낸 민징원(閔澄源), 조부는 이조판서를 지낸 민형(閔亨), 아버지는 형조 참의를 지낸 민효손(閔孝孫)이며, 어머니는 윤지강(尹之崗)의 딸 파평 윤씨이다.2. 생애
언제 어떻게 연산군의 후궁이 되었는지 알 수 없다. 그러나 1503년(연산군 9) 숙의 민씨의 외숙이었던 윤금손(尹金孫)이 가선(嘉善)으로 승진한 일을 두고 사간원이 부당함을 호소하였다는 기록이 있다.[3] 그렇다면 적어도 1503년(연산군 9) 이전에 후궁으로 봉작되었을 것으로 추측된다.한편, 아버지 민효손은 후궁이 된 딸 덕분에 관직이 올라 당상관이 되었다.[4] 또한, 연산군은 숙의 민씨의 집값으로 면포 2,900필을 주게 하고[5], 숙의 민씨의 집을 철거한 대가로 봉안군의 집을 하사하는 등 매우 총애한 것으로 보인다.[6] 이때문에 중종반정이 일어난 뒤에 탄핵의 대상이 되었으나 민효손은 서용되어 관직에 나아갔다.
중종반정에도 집안이 큰 타격을 입지 않았는지 선조 재위 초기에 우의정을 지낸 민기(閔箕)는 그녀의 조카이다.[7] 다만 기록에서는 더이상 보이지 않아 생몰년은 알 수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