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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수정 시각 : 2023-06-15 00:56:05

숙의 이씨(연산군)

조선의 후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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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lbgcolor=#89236A><colcolor=#ffd400>
조선 연산군의 후궁
숙의 이씨 | 淑儀 李氏
정이(貞伊)
출생 1480년대 초반
사망 1507년 이후 ~ 1520년 이전
재위기간 조선 숙원
미상
조선 숙의
미상 ~ 1507년 이후 ~ 1520년 이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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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lbgcolor=#89236A><colcolor=#ffd400> 본관 양성 이씨[1]
부모 부친 - 이공(李拱)
적모 - 봉화 금씨 금이간(琴以間)의 장녀
생모 - 미상
형제자매
5남 3녀 중 서장녀 [ 펼치기 · 접기 ]
이복 오빠 - 이원수(李元守, 1456 ~ 1521)
이복 오빠 - 이인수(李仁守)
이복 오빠 - 이흠수(李欽守)
이복 자매 - 남의원(南義元)의 처
친오빠 - 이형수(李亨壽)
친오빠 - 이칭수(李稱壽 또는 李稱守)
친여동생 - 고안정(高安正)의 측실
배우자 연산군
자녀 슬하 1남
아들 - 양평군(陽平君, 1498 ~ 1506)
봉작 숙원(淑媛) → 숙의(淑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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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2. 생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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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조선 연산군 후궁. 아버지는 동지중추부사를 지낸 이공(李拱)이고, 적모는 봉화 금씨 금이간(琴以間)의 딸이나 생모는 누구인지 알 수 없다. 《 중종실록》에서 이공의 정실 부인인 금씨가 숙의 이씨를 가리켜 '가옹(家翁)의 첩 딸'이라고 말하고 있고, 《 연산군일기》에서 숙의 이씨의 동복오빠들을 '첩자(妾子)'라고 썼기 때문에 숙의 이씨는 서녀로 추측된다. 참고로 그녀의 조부는 세종 대에 천문학자로 활동한 이순지(李純之)이다.

이름은 정이(貞伊)로 나이 11세에 인수대비를 모시는 궁녀가 되었다가 당시 왕세자였던 연산군의 눈에 띄어 후궁이 되었다.[2] 슬하에 연산군의 서장자 양평군을 낳았으나 중종반정으로 연산군과 함께 몰락하였다.[3]

2. 생애

1498년(연산군 4) 양평군을 낳았다. 비록 서자이지만, 중종반정때 까지 연산군의 자식들 중 영아 때 사망하지 않은 4남 3녀[4]중 한 명으로 상당히 총애 받은 것으로 추측된다.

1506년(연산군 12) 숙원으로 봉작되었고 나중에 숙의가 되었는데, 언제 숙의로 품계가 올랐는지 알 수 없다. 다만, 《 중종실록》에서 숙의(淑儀)로 표기하고 있다.

그녀는 후궁이 되면서 많은 혜택을 누렸다. 고관대작과 종친의 집을 하사받고, 이씨의 동복오빠 칭수(稱壽)는 첩의 자식인데도 의과 시험을 보게 해달라고 청하여 허락 받았고, 종친인 고안정 이정(李精)[5]은 숙의 이씨의 아우가 용모가 추한데도 첩으로 삼아 그 세력을 믿고 횡포를 부리기도 하였다.[6]

중종반정 직후 연산군의 후궁들을 두고 논죄할 때, "숙의는 사제(私第)로 돌아가게 하고, 숙용·숙원은 죄를 다스려야 한다"고 하였다. 이에 따라 숙의 이씨 또한 친정으로 돌아갔을 것으로 추측된다.[7]


[1] 일시중파 11세 [2] 중종실록 16권, 중종 7년 8월 7일 무신 1번째기사. # [3] 1506년(중종 1) 9월 24일 양평군은 폐세자 이황과 함께 사사되었다. [4] 폐세자 이황, 폐창녕대군, 폐양평군, 이돈수와 폐휘신공주, 이영수, 이함금 [5] 《만가보》에 따르면, 효령대군 이보→(효령대군의 3남) 보성군 이합(寶城君 李㝓)→(보성군의 5남) 물거군 이철(勿巨君 李徹)→(물거군의 1남) 고안정 이정(高安正 李精)이다. [6] 중종실록 18권, 중종 8년 4월 13일 신해 1번째기사. # [7] 중종실록 1권, 중종 1년 9월 5일 신사 12번째기사.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