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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수정 시각 : 2024-03-19 15:27:39

숙의 김씨(단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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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단종의 후궁
숙의 김씨 | 淑儀 金氏
출생 1440년
사망 1525년 음력 2월
(향년 85세)
조선 충청도 충주목
(現 충청북도 충주시)
본관 상산 김씨
부모 부친 - 김사우(金師禹, 1415 ~ 1464)
모친 - 광주 이씨 이인손(李仁孫)의 딸
배우자 단종
자녀 친자 없음
양자 - 이약빙(李若氷, 1489 ~ 1547)[1]
1. 개요2. 생애

[clearfix]

1. 개요

조선 단종의 후궁. 아버지는 중추원 동지사를 지낸 김사우(金師禹)이며, 어머니는 우의정을 지낸 이인손(李仁孫)의 딸이다.

2. 생애

1454년(단종 2) 1월 1일, 수양대군 양녕대군, 효령대군 및 좌의정 정인지, 우의정 한확 등과 함께 왕비를 맞이할 것을 청하였다. 당시 부왕 문종의 국상 중이었으므로 단종이 받아들이지 않았으나 조정의 중론이 한결 같아서 따를 수밖에 없었다. 또한, 왕비를 맞이하여야 한다는 수양대군의 주장은 틀린 말도 아니었다. 문종의 왕비인 현덕왕후 세자빈 시절에 단종을 낳고 산욕열로 세상을 떠났고, 1446년(세종 28) 세종의 왕비인 소헌왕후마저 떠나서 내전에 사람이 없었다. 비록 단종을 대신 키운 혜빈 양씨 등이 있었지만, 정실 왕비가 아닌 후궁에 불과한 사람이었다.

그해 1월 8일 창덕궁에서 열린 간택에서 세 사람의 처녀가 뽑혔다. 풍저창 부사 송현수의 딸, 예원군사 김사우의 딸, 사정 권완의 딸이었는데 송현수의 딸이 정순왕후가 되었다. 권완의 딸은 숙의 권씨가 되고, 김사우의 딸이 숙의 김씨가 되었는데, 1월 22일 숙의로 책봉한다는 교지를 받았다.

그러나 계유정난 이후의 시국으로 인하여 김씨는 사가로 폐출되었고, 어렵게 살았던 것으로 보인다. 그래도 권 숙의처럼 노비는 안됐다.[2]
충청도 관찰사가 진천(鎭川)에 사는 노산(魯山)의 후궁 권씨(權氏)를 혜양(惠養)하도록 청하자, 정원이 이를 가지고 아뢰기를, "듣건대 경성 안에도 노산 후궁 김씨가 있다고 합니다. 금년 80세가 지났으니 권씨의 예에 따라 혜양하도록 하소서."
중종실록》 중종 14년 1월 26일
이에 조정에서는 해마다 쌀과 소금 등의 물건을 내려주었다. 그리고 1525년(중종 20) 김씨가 충주에서 살다가 세상을 떠났는데, 중종은 "노산군은 이미 폐위된 사람이고, 그의 후궁은 부인과는 차이가 있다"고 하여 일체 부의를 내려주지 않았다.[3]
[1] 외가인 광주 이씨 일가의 사람을 양자로 삼았다. [2] 딸과 반대로 아버지 김사우는 세조 아래에서 출세가도를 달리는등 벼슬길에 막힘이 없었다 [3] 중종실록 53권, 중종 20년 2월 11일 경자 6번째기사.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