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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수정 시각 : 2024-09-07 15:44:51

신빈 김씨


조선의 후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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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lbgcolor=#89236A><colcolor=#ffd400>
조선 세종의 후궁
신빈 김씨 | 愼嬪 金氏
파일:신빈김씨묘역.jpg
신빈 김씨묘 전경
출생 1406년
사망 1464년 10월 13일( 음력 9월 4일)
(향년 59세)
묘소 경기도 화성시 남양읍 남양리 산 131-7[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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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lbgcolor=#89236A><colcolor=#ffd400> 본관 청주 김씨(淸州 金氏)
부모 부친 - 김원(金元)
모친 - 삭녕 고씨
배우자 세종
자녀
슬하 6남 2녀 [ 펼치기 · 접기 ]
장녀 - 옹주 (? ~ 1426)
장남 - 계양군(桂陽君, 1427 ~ 1464)
차남 - 의창군(義昌君, 1428 ~ 1460)
차녀 - 옹주 (? ~ 1429)
3남 - 밀성군(密城君, 1430 ~ 1479)
4남 - 익현군(翼峴君, 1431 ~ 1463)
5남 - 영해군(寧海君, 1435 ~ 1477)
6남 - 담양군(潭陽君, 1439 ~ 1450)
봉작 소의(昭儀) → 귀인(貴人) → 신빈(愼嬪)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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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2. 생애
2.1. 후궁의 삶2.2. 불교에 대한 믿음2.3. 세조의 배려
3. 대중 매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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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조선 세종 후궁. 아버지는 김원(金元)이며, 어머니는 삭녕 고씨이다. 본래 내자시(內資寺)[2]의 공노비였는데, 나이 13세에 원경왕후의 눈에 띄어 소헌왕후를 모시는 궁녀가 되었다가 세종의 후궁이 되었다.

슬하에 계양군 이증, 의창군 이공, 밀성군 이침, 익현군 이연, 영해군 이당, 담양군 이거, 그리고 두 옹주를 낳아 6남 2녀를 두어 세종의 여러 후궁 중 압도적인 다산을 자랑[3]했기 때문에 현재 경기도 화성시 남양읍 화성시청 인근에 조성된 그녀의 묘역은 깔끔하게 단장되어 관리되고 있다.

2. 생애

2.1. 후궁의 삶

1427년(세종 9)에 계양군을 낳았다.[4][5] 이때 '궁인 김씨'가 낳았다고 썼으나 1439년(세종 21) 담양군을 낳았을 때는 '소의 김씨'라고 썼으므로 여러 아들들을 낳는 동안에 후궁으로 봉작되었을 것으로 추측된다.

그리고 막내 아들 담양군을 낳은 그 해에 종1품 귀인으로 품계가 올랐고 이어서 신빈(愼嬪)으로 봉작되었다.[6]
"소의(昭儀)는 본래 내자시(內資寺) 여종[婢]이었으나, 무술년에 내가 처음으로 즉위하였을 때에 모후(母后)께서 뽑아 중궁으로 보내었고, 그때의 나이는 13세였었다. 천성이 부드럽고 아름다워 양궁(兩宮)을 섬기는 데 오직 근신함으로, 중궁이 매사를 위임하고 막내아들을 기르게 하였으니, 성품이 근신하지 않았다면 중궁이 하필 소생 아들을 기르게 하였겠느냐."
세종실록》 세종 21년 1월 27일

신빈 김씨는 타고난 성품이 부드럽고 근신하여 윗사람을 잘 모셨던 데다가, 소헌왕후의 신임을 받아 소헌왕후 소생의 수양대군을 돌보았고, 어린 영응대군의 유모 역할도 맡았다.[7]

덕분에 훗날 세조와의 인연으로 자식들이 계유정난의 공신이 되어 살 수 있었고, 자손이 더욱 번창할 수 있었다. 같은 후궁이었던 혜빈 양씨 단종을 지지해서 아들들과 친정이 다같이 몰살당한 것과 비교된다.

사실 1437년(세종 19) 장남 계양군이 한확의 딸과 혼인하면서 세조와 더욱 밀접한 관계가 된 영향도 있다.[8] 한확은 조선 초기 조선과 명나라를 오가면서 세도가 가장 드높았으며, 둘째 딸은 계양군의 정실부인, 막내 딸은 훗날의 인수대비가 되었으므로 혜빈 양씨와 비교할 때 신빈 김씨의 승리는 예정된 일이었다.

2.2. 불교에 대한 믿음

당대의 여성들이 그렇듯이 신빈 김씨도 불교에 대한 믿음이 깊었다. 특히, 아예 머리를 깎고 비구니가 되어 살았는데, 세종의 상중에 막내 아들 담양군이 12세의 나이로 요절하는 바람에 충격이 컸던 것으로 보인다.[9] 신빈 김씨가 요절한 아들을 위하여 불경을 인쇄하려고 하자, 문종은 쌀 500석과 함께 필요한 물건을 내주어 국고를 비웠다는 비판을 들었다.[10]

오죽하면 신빈 김씨의 차남 의창군이 어머니가 머리를 기르게 해달라고 청하자, 단종이 의정부와 논의하여 머리를 기르라고 명했으나 신빈 김씨는 따르지 않았다고 한다.[11]

이 밖에도 김수온이 쓴 〈묘적사중창기(妙寂寺重創記)〉에 따르면, 밀성군이 어머니를 오래 모시지 못한 것을 슬퍼하여 현 경기도 남양주시에 자리한 '묘적사'에 후하게 시주하고 신빈 김씨의 원찰로 삼았다고 한다.

2.3. 세조의 배려

신빈 김씨는 말년에 건강이 좋지 않아서 자주 온천으로 목욕을 갔다. 신빈 김씨의 온천행은 《 단종실록》부터 언급되는데, 한번 온천으로 갈 때마다 아들들이 뒤를 따랐으므로 많은 물자가 소비되어 비판 받았다.[12] 그러나 세조는 관찰사에 명하여 신빈 김씨를 대접하는 데에 소홀히 하지 말라고 하였다.[13]

이후 그녀는 1464년(세조 10) 9월 4일에 세상을 떠났으며, 세조가 쌀, 콩 등 70석을 부조하였다.

3. 대중 매체


[1] 화성시청 옆에 자리해있다. [2] 조선 시대 왕실에서 소용되는 각종 물자를 관장하던 호조 소속의 관청. [3] 세종의 모든 부인들 중에서는 정비인 소헌왕후8남 2녀로 가장 많은 자녀를 낳았으며, 세종과 신빈 김씨 슬하의 두 옹주는 장성하지 못하고 요절하였다. [4] 세종실록 37권, 세종 9년 8월 12일 정묘 5번째 기사. # [5] 적서를 가리지 않는다면 계양군은 세종의 여덟째 아들이 된다. [6] 세종실록 84권, 세종 21년 1월 27일 병오 2번째 기사. # [7] 이로 인해 세종 사후에 신빈의 거처를 영응대군 저로 할 것인지에 대한 논의가 생기기도 한다. # [8] 세종실록 79권, 세종 19년 12월 9일 병인 1번째 기사. # [9] 당시에는 후궁이 머리를 깎고 비구니가 되는 일이 종종 있었다. 태종의 후궁 의빈 권씨 신빈 신씨도 머리를 깎고 비구니가 되었는데, 이때 세종의 허락 없이 머리를 깎은 바람에 논란이 일었다. [10] 문종은 비록 이복동생이지만, 정혼까지 한 상황에서 갑작스럽게 죽은 담양군을 애틋하게 여겼기 때문이다. 또한, 문종은 담양군의 정혼자에게 상복을 입혀 담양군의 정실 부인으로 확정지으려다가 신하들의 반대로 이루지 못한 적도 있다. [11] 단종실록 3권, 단종 즉위년 9월 12일 신축 1번째 기사. # [12] 1454년(단종 2) 3월 11일, 신빈 김씨가 지난 번에 온천으로 떠날 때에 아들 계양군, 의창군, 밀성군이 뒤따랐다는 말이 나온다. [13] 세조실록 13권, 세조 4년 7월 12일 정유 3번째 기사.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