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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수정 시각 : 2021-06-19 14:42:13

사카모토 료마


{{{#!wiki style="margin: -15px -10px" <tablealign=center><tablewidth=190><tablebordercolor=#000>
파일:ryoma.png
[ruby(坂本龍馬, ruby=さかもと りょうま)]
사카모토 료마
}}}
<colbgcolor=#000> 출생 1836년 1월 3일
도사국 도사군 카미마치혼초
(現 고치현 고치시 카미마치)
사망 1867년 12월 10일[2] (31세)
야마시로국 교토 카와라마치 오미야
(現 교토부 교토시 교토카와라마치역 근처)
역임 해원대 대장[3]
1865년 ~ 1867년 12월 10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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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lbgcolor=#000> 나오나리(直柔)
통칭 료마(龍馬)
사이타니 우메타로(才谷梅太郎)
부모 부 사카모토 하치헤이(坂本八平)
친모 사카모토 고(坂本幸)
계모 사카모토 이요(坂本伊與)
가족 아내 나라사키 료(楢崎龍)
양자 사카모토 나오(坂本直)[4]
칭호 정4위(正四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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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2. 생애3. 평가
3.1. 일본 근대사 인물 중 가장 사랑받는 남자3.2. 과대평가 논란과 반박
3.2.1. 역사 교과서 퇴출 검토?
4. 기타5. 문헌
5.1. 선중팔책(船中八策)5.2. 신정부강령팔책(新政府綱領八策)
6. 창작물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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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일본 도쿠가와 막부 말기의 검객, 낭인, 정치가, 기업인이다.

2. 생애

위키피디아 커먼 라이센스
사카모토 가문[5]
일본 에도 막말 시기에 활약한 인물로, 일본 근대사에 가장 큰 영향을 끼친 인물 중 한명으로 평가받는다. 특히 대정봉환 관련 활약상이 많이 언급되는 편이다. 덕분에 일본사 전체로 따져도 오다 노부나가와 함께 일본에서 가장 인기 있는 역사 속 인물 1, 2위를 다투고 있다. 2019년에는 일본인 12,000명[6]이 뽑은 가장 좋아하는 역사적인 인물 순위에서 2위를 기록했다. 1위는 오다 노부나가.[7] # 소설가 시바 료타로의 소설 '료마가 간다'(竜馬がゆく)가 베스트셀러가 되면서 인기를 얻고 재조명되었다. 이보다 앞서 사카자키 시란이라는 도사 번 출신 저널리스트 겸 자유민권운동가가 메이지 16년( 1883년) 도요 신문(土陽新聞)[8]에 한혈천리마( 汗血千里駒)라는 전기소설(傳記小説)을 연재해서, 메이지 시대에 들어서 잊힌 사카모토 료마를 발굴 소개한 적이 있다.

다만 이 수수께끼 남자의 생애는 당시 일본 정부( 에도 막부)의 공식 문서에 기록된 적이 아예 없다. 출신이 도사 번 하급 무사로 탈번한 낭인으로 이곳저곳 떠돌아 다녔고, 본격적으로 일본 정치에 관여한 시절은 료마를 직접 만난 사람들이 남긴 기록과 료마가 가족에게 보낸 편지에서 추측하는 자료가 전부이다 보니 그의 행적에는 군데군데 어디서 뭘 했는지 알 수 없는 공백이 있다. 지금의 료마의 모습은 훗날 소설 드라마에서 작가들이 상상력으로 창작한 부분이 많은 것. 그래서 일각에선 후술되어있듯 과대평가되었다는 의견과 이에 반박하는 의견이 동시에 나오기도 한다.

도사 번 출신으로 번에서 3대 호상에 드는 유복한 상인 집안에서 늦둥이 막내로 태어났다. 위로는 형과 세 명의 누나가 있었다.[9], 귀여움을 잔뜩 받고 자란 탓에 어릴 때는 울보, 겁쟁이에 12살 때까지 야뇨증이 있었다고 한다. 셋째 누나 오토메가 오줌싸개 버릇을 고쳤다는 기록이 있다. 사진만 봐선 잘 모를 수도 있는데, 신장이 그 당시 일본인치고는 상당히 큰 편이었다.[10]

사카모토 집안은 대대로 사이다니야(才谷屋)라는 전당포, 주조업, 포목상을 하던 상인 집안이었으나 증조할아버지대에 번에 사카모토라는 성씨를 쓰는 것을 허락받고 따로 분가해서 하급무사 자격을 얻었다.(아버지가 3대 당주) 사실상 돈을 주고 무사 계급을 산 셈이다. 도사 번은 번의 성립 배경으로 상급 무사와 하급무사의 신분적 차별이 심했고, 우리나라로 치면 사카모토 집안처럼 돈 빌려주고 이자 놀이하고, 술과 옷감을 만들어 팔아서 돈 번 상인이 돈으로 양반 계급을 산 무사는 하급 무사한테도 쌍놈 소리 듣던 최하급 무사였다.[11]

그래서 무사로서의 삶보다는 상인으로서의 삶에 더 관심이 많았던 듯. 실제로도 에도로 상경하고 이후 각지를 전전하다가 주식 회사 개념의 사설 함대인 해원대를 창설하고 사쓰마 조슈 등에 군수물자를 팔기도 했는데 삿초동맹에서 중개인 자격으로 입회한 것은 그렇게 사쓰마와 조슈 양쪽 모두에게 인맥이 있었기 때문이다.

어릴 적에는 학문보다는 검도에 빠져 검도의 사범이 되고자 했다. 12살 때 병약했던 어머니가 죽자 이 경험이 검술에 열중하게 했다는 분석이 있다. 1853년 19살 때, 검술 수행을 위해 약 1년 동안 에도에서 집안의 재정적 지원을 받아 유학해서 북진일도류의 검술과 나기나타 면허개전을 받았다. 기존에는 치바 사다키치[12]에게서 받은 북진일도류 나기나타 병법의 목록[13]만 문서가 남아있었으며, 남은 목록 역시 북진일도류 중에서 가장 낮은 단수인 초목록[14]이어서 검술에 대해서는 확증이 없었으나 2015년에 료마의 유족들이 료마기념관에 기증한 문서들에서 료마가 북진일도류 검술의 면허개전과 나기나타 면허 개전을 받았다는 기록이 발견되었다.[15][16]

에도에서 유학 중에 흑선내항 사건(1853)이 일어났고 에도에 파견나온 도사 번의 경비대 소속이었던 (졸병) 료마는 미국의 증기선을 목격했다. 이 경험을 전달하기 위해 집에 보낸 편지에는 현대어로 번안하면 '서양 오랑캐 놈들이 쳐들어 오면 칼로 목을 따고 귀국하겠습니다.' 라는 치기심 가득한 허세를 떨었다. 같은 해 12월 난학자이자 사상가 사쿠마 쇼잔(佐久間象山)의 사숙(개인학원)에 입학해서 포술, 한학, 난학 등을 배웠다. 다음해 1854년 7월 고향으로 돌아왔다.

이 시기 연로했던 아버지도 죽음을 맞이했다. 고향에 돌아와서는 서양에 대한 호기심으로 가와다 쇼료[17]를 찾아가 서양에 대한 지식을 배웠다. 미국의 국력과 민주주의 공화정 제도를 알고 충격을 먹고 "무사를 떠받드는 신분제 토대를 바꿔 일본이 거듭나지 않는 한, 미국과 싸워서 이길 턱이 없다."라는 글을 남긴다. 1856년 10월부터 약 2년 간 다시 에도에서 검도 유학을 했다.

1860년, 사쿠라다 문 밖의 변을 시작으로 이 시기는 존황양이 운동이 절정기였다. 도사 번에서도 하급 무사 출신인 다케치 한페이타(가케치 즈이잔)가 200명의 하급무사들을 규합해서 도사근왕당이라는 막부 타도를 목표로 한 결사 모임을 조직했고(1861) 료마도 가맹한다. 이들은 친(親)도쿠가와 막부 성향의 공무합체파 도사 번의 참정 요시다 도요와 대립했고, 도요는 암살되었다. 1863년 교토에서 존황양이파가 쫓겨나는 정변이 발생하여 도사 번에서 존황양이파가 탄압당하고 요시다 도요를 암살한 배후로 지목된 다케치 한페이타는 할복하였으며 오카다 이조는 도주하다 체포된 후 고문 끝에 자백하고 참수형. 료마는 그전에(1862) 달아나 낭인이 되었다.

1862년 3월, 시모노세키로 찾아가 시라이시 쇼타로를 방문하고, 에도 막부의 정사총재직 마쓰다이라 슌사쿠( 후쿠이 번주이자 도쿠가와 요시노부의 보좌역)로부터 소개장을 받아서 그해 12월 막부군함 부교직 가쓰 가이슈를 만나 제자가 되어 증기선의 항해술을 배운다. 이때 막부 개화파인 가이슈를 암살하려고 그의 집으로 찾아갔다가 오히려 그의 사상에 감화를 받아 제자가 되었다는 일화가 널리 알려져 있다. 그러나 연구에 따르면 이렇게 말을 둘러댄 사람은 가쓰 가이슈가 남긴 기록뿐이다.[18]

그 내막에는 가쓰 가이슈의 상소를 받아들인 에도 막부가 고베에 해군양성소의 설립하고자 그 설립자금 문제로 고민할 때, 사카모토 료마를 백업하는 도사 번의 금융 네트워크( 사채업자)의 자금 지원을 받기 위해서 소개장을 들고 찾아 온 그를 만났다는 설이 유력하다.

가쓰 가이슈의 제자가 되고 가이슈가 미국 방문 체험으로 깨달은 '일본도 통일된 국가를 만들기 위해서는 미국처럼 합중국· 연방 체제를 도입해야 한다'고 주장한 공의정체론(公議政体論)(덤으로 민주주의, 자유민권) 사상을 배웠을 거라고 추정하고 있다.

1862년 분큐의 개혁 이후 격동의 시기로, 다음해 8월 18일의 정변, 시모노세키 전쟁, 금문의 변을 거쳐, 1864년 조슈번과 조율하기 위해 가이슈는 나가사키로 출장을 가게 되고 료마도 동행한다. 이윽고 가이슈는 정계에서 실각하고 고베의 해군양성소는 폐쇄. 료마는 사쓰마로 망명한다. 이즈음 오료와 결혼한다.

사쓰마 번의 실력자 사이고 다카모리를 만나 돈과 선박을 지원해주면 이제까지 중계 무역을 독점하는 에도 막부를 배제하고 사쓰마 번에게도 짭짤한 돈벌이가 되는 장사(밀무역)를 하겠다고 설득, 소수의 동지들과 함께 나가사키에 해원대의 전신이 되는 무역회사 카메야마 사중(社中)을 설립한다.(1865) 에조 지방( 홋카이도)의 특산물 말린 다시마를 선박을 이용한 중계상을 시도하기도 했다.

이후 고토 쇼지로와 대정봉환을 목표로 한 협력관계를 맺고 도사 번의 지원을 받아 1867년 일본 최초의 해운상사인 해원대를 창설한다.(같은 도사 번 출신인 이와사키 야타로가 훗날 미쓰비시 그룹으로 발전시킨다) 그리고 암살 위협을 우려하여 사이다니 우메타로(才谷梅太郎)라는 가명으로 활동했다. 게이오 원년에 누나 오토메에게 보낸 편지에는 사이고 이사부로(西郷伊三郎)라는 또다른 가명을 쓴 기록도 있다.

서로 원수지간이나 사쓰에이 전쟁 시모노세키 전쟁으로 같은 처지에 서게 된 사쓰마와 조슈를 중재하여 사쓰마-조슈 동맹을( 삿초 동맹)을 성립시켰으며, 대정봉환을 기안하고,[19] 메이지 유신 달성에 결정적 기여를 하였다. 료마가 없었으면 메이지 유신도 없었다는 얘기까지 있을 정도였다.(또 다른 관측으로는 그 이전에 이케다야 사건( 신센구미가 조슈·도사 번의 존왕양이(존황양이)파를 격퇴하였던 사건)이 없었으면 메이지 유신도 없었다는 일화가 드러났기 때문)

대정봉환 한 달 후에 료마의 은신처인 오미야라는 간장 가게에서 암살당했다.( 오미야 사건) 신센구미는 평생 료마를 죽이려고 쫓아다녔는데 대정봉환 후 막부의 중요 인물이 되어 정작 신센구미에서는 건드리지도 못했다. 누가 암살했는지는 아직도 의문이다. 가장 유력한 것은 대정봉환으로 도쿠가와 집안이 권력을 잃게 되자 가쓰 가이슈나 에노모토 쓰시마의 지령을 받아 도쿠가와 집안을 충직하게 떠받들던 세력이었던 미마와리구미의 수장, 사사키 다다사부로가 제비뽑기로 암살자를 결정하여 이마이 소큐에게 암살지시를 가하였다는 설.

정치적으로도 당시 기준 소위 깨어있는 성향을 띄었지만 특히 서양 문물에 있어 굉장히 진보적이었던 것으로 유명하다. 일본 문화에서 서양문물이라 하면 료마 님 정도(?)라 하는 말이 있을 정도. 일본 최초로 해운회사(해원대, 海援隊)[20]를 설립했고, 최초의 근대적 손해배상소송(일본 최초의 증기선 사고였다)을 걸었고, 또 일본인 최초로 신혼여행을 갔던 인물이기도 하다.[21]

3. 평가

3.1. 일본 근대사 인물 중 가장 사랑받는 남자

일본인들이 가장 좋아하는 근대 역사인물로 시바 료타로<료마가 간다>가 그의 일대기를 다룬 소설이다.[22] 다만 소설임을 나타내기 위해 당시에 쓰였던 구자체 龍馬가 아닌 신자체인 竜馬를 쓴다. 전반적으로 조직 내 의견을 조율하면서 비전을 제시하는 2인자 혹은 모사 캐릭터를 무척 좋아하는 일본인들의 성격에 걸맞은 인물이기도 하다. 일본에서 삼국지연의 제갈공명이 인기가 좋은 것도 비슷한 이유이다.[23] 근대가 아니라 일본 역사 전체로 따져도 오다 노부나가 등과 함께 최상위권이다.[24]

다른 관점에서 비교하자면 유신삼걸이라 불리는 기도 다카요시, 사이고 다카모리, 오쿠보 도시미치도 일본인들 기준에서 보자면 업적이 나쁘지 않지만 이들은 '존경을 받는' 위인이지만 대중들에게 '사랑을 받는' 타입은 아니다. 한편, 한국인 입장에서 보자면, 일본의 주요 유신 관련 경력자들 상당수는 한국 병탄 등과 관한 만행에서 자유롭지 않은 경우가 많은데[25] 사카모토 료마는 거기서 자유로운 몇 안 되는 사람이다. 물론 보신전쟁 이전에 사망한 점 역시 크겠지만, 그 이전 행보도 딱히 정한론을 주제로 이야기를 한 건 없었다.

3.2. 과대평가 논란과 반박

료마는 안티들에겐 과대평가를 받고 있다고 비판받기도 한다. 그 이유로는,

3.2.1. 역사 교과서 퇴출 검토?

파일:요시다 쇼인 사카모토 료마 교과서에서 퇴출.jpg
파일:요시다 쇼인 사카모토 료마 교과서에서 퇴출2.jpg

2017년경부터 타케다 신겐, 우에스기 켄신, 요시다 쇼인과 함께 '실제 역사상 역할과 의미가 크지 않다'는 이유로[32] 고등학교 역사 교과서에서 이름을 지워야 한다는 움직임이 있고, 퇴출이 검토되고 있다고 한다. 다만 이후 잠잠한걸 봐선 퇴출되진 않은듯..?

4. 기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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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W 모델 1 22구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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료마의 검, 무츠노카미 요시유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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료마의 부츠
료마가 부츠를 애용한 데에는 그럴만한 사연이 있다. 토사 번은 1600년 세키가하라 전투 이후 이봉해 온 야마우치 카즈토요의 친 도쿠가와 세력과 기존의 토착 세력 향사(鄕士)의 200년 이상 이어진 대립으로 상급무사와 하급무사 사이에는 신분 차별이 당시 일본 어느 곳보다 심해서, 하급무사는 비가 와도 우산을 쓸 수 없고, 높은 게다도 신을 수 없었다. 토사 번에서 하급무사 계급이 결사 조직을 만들어서 에도 막부를 타도하려는(도막파) 존황양이 운동이 일어난 것도 이러한 역사적 배경이 있었다. 료마는 카츠 카이슈가 보여 준 사진에서 미국 장군과 병사가 같은 군화를 신은 사진을 보고 '민주주의란 이런 것이구나'라는 것을 깨닫고 감동을 받고 눈물을 흘렸다고 한다. 이후 짚신을 벗어던지고 부츠 애용자가 되었다. 그리고 실용성에서도 서양 해군은 이미 가죽 부츠(군화)가 필수 군수품이었다. 물기가 많은 갑판 위를 뛰어다니거나 밧줄을 밟고 돛대로 올라가야 할 때, 미끄러지고 벗겨지기 쉬운 짚신은 거추장스러운 물건이었다.

또한 전통 하카마의 경우 칼같이 각이 잡힌 주름을 생명으로 여기는데[36] 주름을 잡기도, 풀어지지 않게 세탁하고 그것을 관리하기도 쉽지 않아 굉장히 불편하다. 그리하여 이에 개의치 않고 아랫단 주름이 다 풀어진 하카마를 아무렇지 않게 입고 다닌 인물. 각이 풀린 하카마가 펄럭펄럭하며 부츠를 신은 발목 라인과 조화를 이뤄 굉장히 멋있었다고 한다. 그야말로 패셔니스타.

이런저런 개인의 파격적인 행보와 삶으로 일본 근대사에서 자유인의 상징처럼 받아들여지는 인물. 아래에 보면 과대평가되었다는 평이 쓰여져 있는데, 실제로 정치적으로 대단한 행보는 삿쵸동맹 대정봉환뿐이지만[37], 현대에 료마의 인기는 정치적 업적이 아닌, 이러한 고정관념을 벗어던진 자유로운 인간 사카모토 료마가 주는 매력에서 오는 바가 크다.

5. 문헌

5.1. 선중팔책(船中八策)

일본 역사상 최초의 증기선 충돌 사건인 이로하마루 사건에서 키이 번으로부터 배상금을 두둑히 받아내며 사건을 해결한 후, 1867년 6월, 교토에서 열린 회의에 참석한 토사 번주였던 야마우치 요도에게 대정봉환의 생각을 진언하기 위해, 교토를 향해 배를 타고 가던 중에 함께 동행한 토사 번 참정 고토 쇼지로에게 료마가 말로 설명한 것을 나중에 해원대 대원이 문서화 한 것으로 추정.

일본 최초, 그리고 동양 최초의 민주정이 고안된 방법론이다. 대정봉환과 의정국 설치, 법전 설치 등의 내용을 담고 있다.
一、天下ノ政権ヲ朝廷ニ奉還セシメ、政令宜シク朝廷ヨリ出ヅベキ事。
천하의 정권을 조정에 봉환하고, 새 정령을 조정에서 세워야 한다.

一、上下議政局ヲ設ケ、議員ヲ置キテ万機ヲ参賛セシメ、万機宜シク公議ニ決スベキ事。
상하의정국을 설치하고 의원을 두어 만기를 시기에 맞게 공의로 결정해야 한다.

一、有材ノ公卿諸侯及ビ天下ノ人材ヲ顧問ニ備ヘ官爵ヲ賜ヒ、宜シク従来有名無実ノ官ヲ除クベキ事。
유능한 공경제후와 천하의 인재를 고문으로 삼아 관직을 내리고 종래 유명무실한 관직을 폐지해야 한다.

一、外国ノ交際広ク公議ヲ採リ、新ニ至当ノ規約ヲ立ツベキ事。
외국과의 교류를 확대하는 공의를 모으고 새롭고 지당한 규약을 세워야 한다.

一、古来ノ律令ヲ折衷シ、新ニ無窮ノ大典ヲ撰定スベキ事。
옛 율령을 폐지하고, 새롭고 무궁한 대전을 제정해야 한다.

一、海軍宜シク拡張スベキ事。
해군을 확장해야 한다.

一、御親兵ヲ置キ、帝都ヲ守衛セシムベキ事。
어친병을 설치하여 제도를 수비해야 한다.

一、金銀物貨宜シク外国ト平均ノ法ヲ設クベキ事。
금은의 시세를 외국과 균형을 맞추는 법을 제정해야 한다.

以上八策ハ方今天下ノ形勢ヲ察シ、之ヲ宇内万国ニ徴スルニ、之ヲ捨テ他ニ済時ノ急務アルナシ。苟モ此数策ヲ断行セバ、皇運ヲ挽回シ、国勢ヲ拡張シ、万国ト並行スルモ、亦敢テ難シトセズ。伏テ願クハ公明正大ノ道理ニ基キ、一大英断ヲ以テ天下ト更始一新セン。
이상 팔책은 현재 천하의 형세를 살피고 정한 것으로 이를 천하 만국에 공포한다. 이 조항을 새롭게 바꿀 때에는 만사를 제쳐두고 해야 한다. 이를 단행하면 황운을 회복하고 국세를 확장하여 만국과 병립할 수 있다. 엎드려 바라건대 공명정대의 도리를 기반으로 일대 영단으로 천하를 새롭게 하자.
료마는 이론가이기보다는 행동가였기 때문에, 그가 처음부터 모두 이러한 생각을 고안한 것은 아니다.

카츠 카이슈, 오쿠보 도시미치 등의 개화파 인사들의 핵심 개념을 정리한 것에 가깝다. 그러나 당시 많이 떠돌던 뜬구름 잡기식 혹은 무조건 토벌하자식의 극단적인 내용보다는 깔끔한 개조식이며 간단했다는 점이 크게 먹혔다. 고토 쇼지로 등의 토사 번 인사들은 이를 보고 감명받아, 대정봉환을 막부 측에 건의하였다.

5.2. 신정부강령팔책(新政府綱領八策)

신정부강령팔책은 대정봉환 이후, 1867년 11월 당시 은신처였던 오미야(近江屋)에서 작성한 것으로 추정되는 신정부 수립을 위한 정치강령이다. 각 웅번의 실력자들에게 보내기 위해 쓴 것으로 추정된다. 선중팔책에서 일부의 변경사항이 있었다.
第一義 天下有名ノ人材を招致シ顧問ニ供フ
제1항 천하의 유명한 인재를 모셔와 고문으로 삼는다.

第二義 有材ノ諸侯ヲ撰用シ朝廷ノ官爵ヲ賜イ現今有名無実ノ官ヲ除ク
제2항 유능한 제후를 등용하여 조정의 관직을 하사하고 현재 유명무실한 관직을 폐지한다.

第三義 外国ノ交際ヲ議ス
제3항 외국과의 교류를 의논한다.

第四義 律令ヲ撰シ新タニ無窮ノ大典ヲ定ム律令既ニ定レバ諸侯伯皆此ヲ奉ジテ部下ヲ率ユ
제4항 율령을 편찬하여 새롭게 영원한 대전을 정하고 율령을 정하였다면 제후 모두가 이를 받들며 부하를 통솔한다.

第五義 上下議政所
제5항 상하의정소.

第六義 海陸軍局
제6항 해육군국.

第七義 親兵
제7항 친병.

第八義 皇国今日ノ金銀物価ヲ外国ト平均ス
제8항 황국의 현재 금은의 물가를 외국과의 평균에 맞춘다.

右預メ二三ノ明眼士ト議定シ諸侯会盟ノ日ヲ待ツテ云云
우측의 내용을 사전에 두어명의 안목 있는 자들과 의논하여 정하고 제후회맹의 날을 기다리고…
OOO自ラ盟主ト為リ此ヲ以テ朝廷ニ奉リ始テ天下萬民ニ公布云云
OOO 스스로 맹주로 나서서 이 안을 조정에 올려 천하 만민에게 공포하며…
強抗非礼公議ニ違フ者ハ断然征討ス権門貴族モ貸借スル事ナシ
강하게 저항하여 무례하게 공의를 어기는 자는 단연히 정토하며 권문귀족이라도 예외가 없다.

慶応丁卯十一月 坂本直柔
게이오 정묘(1867년) 11월 사카모토 나오나리(사카모토 료마의 본명)
여기서 사카모토 료마가 생각하던 OOO는 도쿠가와 요시노부였다. 정치력있는 리더, 요시노부를 중심으로 사츠마, 조슈, 토사 같은 웅번들이 받쳐주면서 새로운 국가를 이끌어 가길 바랐던 것이었다.

사카모토 료마는 희망을 가득 품은 채 신정부강령팔책을 작성하였으나 보름도 채 지나지 않아 정체불명의 괴한들의 칼에 맞아 절명하고 만다. 그리고 그가 꿈꾸던 새로운 세상은 불과 1달만에 그 환상이 깨져버렸고,[39] 2달만에 전쟁이 발발하면서, 점점 순탄치 않은 방향으로 흘러가기 시작한다.

6. 창작물에서

파일:상세 내용 아이콘.svg   자세한 내용은 사카모토 료마/기타 창작물 문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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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고하십시오.
[1] 30살 때 일본( 나가사키)에서 처음으로 창업한 사진관에서 찍은 사진. 당시 최첨단 기술이자 한 장 찍는 데 돈이 많이 드는(현재 가치로 1장에 3만 엔 정도) 사진을 7장 남겼다. 이 시기에 에도 막부 마지막 쇼군 도쿠가와 요시노부 다음으로 많은 사진을 남긴 사람이다. 사진을 확대해서 자세히 보면, 오른쪽 허리춤에 호루라기를 차고 있는 것을 확인할 수 있다. 항해 중에 선박 위에서 사고가 났을 때 부는 용도였다. 신고 있는 신발을 보면 첼시 부츠인 것을 확인 할 수 있다. [2] 음력 11월 15일( 오미야 사건). 음력으로 계산하면 태어난 날과 죽는 날이 일치한다. 일본 드라마 JIN-진-에서는 중요한 힌트로 작용한다. [3] 가메야마 사츄까지 포함 [4] 사카모토 료마의 조카로 사후 입양되었다. 막말때는 '다카마츠 타로'라고 불리었다. [5] 사카모토 집안은 혼노지의 변으로 가문이 멸족한 아케치 미츠히데의 후손(손자)이 도사 번으로 도망쳐 온 집안이라는 설이 있다. 가운데 도라지꽃은 아케치 집안의 가몬이고 둘러싼 네모는 쌀을 측량하는 됫박이다. '사카모토 성(坂本城)'는 미츠히데가 건축해서 거주하던 성의 이름이고, 료마가 설립한 회사 '가메야마' 사중(亀山社中)은 미츠히데가 혼노지의 변을 일으키기 하루 전날 머물렀던 성의 이름이 가메야마 성(亀山城)이다. 료마가 암살당한 '오우미'야는 미츠히데가 다스리던 지역 이름이다. 우연의 일치라고 보기에는 설득력이 있는 설이다. [6] 조사 대상은 10대~60대 남성, 여성. [7] 1위 오다 노부나가(1,059표), 2위 사카모토 료마(1,047표), 3위 스기하라 지우네(603표), 4위 쇼토쿠 태자(582표), 5위 사나다 노부시게(561표), 6위 다테 마사무네(508표), 7위 우에스기 겐신(458표), 8위 도쿠가와 이에야스(440표), 9위 히지카타 토시조(426표), 10위 구로다 요시타카(380표). [8] 도사 번(오늘날 고치현)의 지방지 [9] 형과의 나이 차이는 스무 살로 형의 아들이 5살 때 요절하자, 료마를 양자로 삼으려고 한 적이 있다. [10] 182cm라는 수치가 언급되기도 하는데 정확한 수치는 아니고, 당시 사람들 평균 키보다는 키가 컸을 것이라 추측할 뿐이다. 바로 윗누님인 오토메가 170cm(어떤 자료는 174)에 체중이 110kg이 넘는 당시 일본 여성의 평균 키를 훨씬 뛰어넘는 장신이라고 전해져서, 바로 밑 남동생 료마도 그 이상은 넘어서 적어도 173cm 이상은 될 거라고 대충 짐작한 키다. 그리고 182이라는 수치도 주변인의 증언들이 각각 달라서 173~179cm 정도였을 거라고 추측한다. 그리고 료마가 실제로 180이 넘은 장신이었다면 당시 일본에서는 거인에 가까운 키라서 료마를 실제로 만난 사람들이 그 키를 언급했을 법도 한데 그런 기록은 찾을 수가 없는 것을 보면 그 정도로 키가 큰 장신은 아니었을거라고 본다. [11] 료마가 태어났을 때는 본가는 상급무사들을 상대로 대출 사업(돈 빌려주고 이자놀이)을 주로 했다. 아버지와 형은 신분은 하급무사여서 성의 경비와 보수 직을 맡았는데, 사무라이 공무원으로 일하고 받는 봉록은 낮았지만, 분가할 때 본가로부터 많은 재산을 나눠받았고, 농지도 고쿠다카 100석 이상 가진 땅주인이어서 웬만한 상급무사들보다 훨씬 잘 살았다. [12] 북진일도류 개조 치바 슈사쿠의 동생. 사다키치의 딸이 치바 사나코인데 당대의 여성 검객이었다고 한다. 도장집 딸이라 어릴 적부터 문하생들과 어울렸다고. 료마와도 러브스토리가 있는데 평생 료마를 그리워했다는 모양. 검색하면 일화가 많이 나온다. [13] 일본검술의 단수를 세는 단위 중에 하나. [14] 初目録. 북진일도류는 초목록, 중목록면허, 대목록개전의 3단 구도이며 소위 면허개전은 대목록개전에 해당한다. [15] 다만, 당시 일본 검술에서는 주변의 인간관계 때문에 승급을 거부하거나 실제로는 실력이 안 되어도 이런저런 사정 때문에 승급해주는 일이 잦았기 때문에 단수가 높고 낮은 것이 실제의 검술실력과 직결되지는 않는다. 따라서 사카모토 료마가 검객으로서 어느 정도의 기량을 가졌는지에 대해서 객관적으로 증명할 만한 자료는 없다. 사실 행적을 보면 검객보다는 ' 논객'에 더 가까운 인물. 하지만 이는 북진일도류의 특수성을 간과한 추측으로, 치바 슈사쿠는 검술 실력 외의 조건으로 면허를 주던 당대의 관행에 반대하여 승단 체계를 따로 만들 정도로 실력을 우선시하던 검술가였다. 물론 암살과 검투가 횡행했던 막말 분위기 속에서 검으로 살생하지 않은 료마는 매우 특이한 경우다. [16] 시바 료타로의 소설에서는 거의 무념무상으로 승부에 달관한 태도이지만 칼을 뽑으면 무적이라는 식으로 고수를 넘어서 달인에 가까운 검객으로 묘사한다. [17] 존 만지로의 취조에 참석해서 주워들은 정보를 바탕으로 서양 정보책을 쓴 화가 [18] 료마가 가이슈를 암살할 동기나 이유가 전혀 없고 누나에게 보낸 편지에서 일본 제일의 인물로 평가한 사람이 가쓰 가이슈로 그의 제자가 된 것을 자랑하며 기뻐해 달라고 했다. [19] 정확히는 다른 이들의 주장에 살을 붙이고 실질적인 비전을 제시했다. [20] 이 회사에 있던 이와사키 야타로(岩崎 弥太郎)가 해원대가 해산된 뒤 받은 지분으로 만든 회사가 다름 아닌 미쓰비시다. [21] 배후 사정은 그리 낭만적인 것은 아니고, 1866년 1월 23일 데라다야에서 암살 시도로 부상을 입고 치료를 위해 기리시마의 온천에서 3개월간 요양생활을 했다. 더구나 최초의 신혼여행 기록은 다른 사람이 있었으니.. [22] 역으로 이 소설의 흥행 덕분에 료마가 지금의 인기를 누리고 있는 측면도 있다. 어떻게 보면 정도전과도 유사한 측면이 있다. 과거엔 지금만큼 주목받진 않았으나, 현대 매체를 통해 자신이 이끈 정국의 실질적 설계자 비슷하게 묘사되고 이것이 확대 재생산되며 대중들의 평가를 이끌어냈다는 점에서 비슷한 점이 있다. 최후가 비극적이란 점도 그렇고.. [23] 사실 정사보단 소설에 의해 인물상이 정립되고, 덕분에 업적도 실제보다 미화된 부분이 꽤 있다는 점에서 보자면 둘은 상당한 공통점을 가지고 있다. [24] 주로 둘이 1,2위를 다툰다. [25] 이토 히로부미같은 오래 산 이들 말고도 심지어 요시다 쇼인같이 유신 이전 사망한 부류까지 포함. [26] 영주가 다스리는 행정구역인 번(藩)에서 나온 것. 당시 계급사회였던 일본, 특히나 사무라이가 섬겨야할 주군을 버리고 나오는 것으로 중죄에 속하였다. 다만 막부 말에는 뜻을 이루고자 탈번하는 자들이 속출했다. 원래 무사계급은 군사계급이므로 허가없이 주거지를 변경할 자유가 없었기에 당시에는 중죄였다. [27] 이 점에 대해서는 다수의 이견이 있다. 료마가 대정봉환을 기안할 때, 도쿠가와 요시노부로 대표되는 다수의 막부측 인사가 포함되도록 숙안을 내밀었다. 그가 반막부 세력으로의 유신지사이긴 하였으나 타 지사들처럼 막부의 완전한 해체 혹은 타도보다는 신 정부(공무합체 정부) 수립에 더 중점을 두었다. 실상 이러한 성격 때문에, 그는 근황파 사이에서도 약간 겉도는 입장이었다. 또한, 사카모토 료마는 암살이라는 수단을 굉장히 혐오하였다. [28] 여기서 말하는 상인이라는 것은 일본의 사농공상에서의 상인이 아닌 외세, 서양의 무기상이다. 무기를 파는 그들 입장에서는 비지니스가 잘된다면 손해볼 일도 없었다. [29] 일본에서 최초의 사진을 찍은 사람이라는 타이틀도 보유하고 있다. [30] 하지만 당시 삿쵸의 밀약의 주요 협상자였던 쵸슈번의 카츠라 코고로가 쓴 밀약배서에 료마가 보증인으로서 적필문을 적은 것이 남아 있는 것이 이 설과 사실관계에 있어 충돌한다. [31] 다만 재산이 없다고 보기엔 애매한것이 사카모토 료마의 집안은 전당포를 하다 무사 직위를 돈 주고 산 부자였기에 돈은 얼마든지 있는거나 다름이 없었다. 그래서인지 사극에선 누이가 돈을 부쳐주거나... 폐인이 되어서도 어떻게 밥은 굶지는 않는걸로 나온다. [32] 삼국지가 한중일 삼국에서 인기를 끌고 대중들의 인식에도 많은 영향을 미쳤지만, 정작 교과서에서 중국사를 배울땐 그 시절은 큰 비중을 차지하지 못하고 넘어가는 것과 비슷한 맥락이라고 봐도 될듯. [33] 그 때문인지 검호 3에서는 남들은 검을 집에 넣으면 발도술을 쓰는 반면, 이 녀석은 갑자기 총을 꺼내들고 쏜다. 친구들과 대전할 때 쓰면 친구들을 벙찌게 만들고 리얼철권을 일으킬 수도 있다. 어느 정도냐면 총 6발을 쏘는데 어지간한 검호들은 이 6발 이내로 제압이 된다... 그렇다고 좌우 이동으로 회피하려다가 넉백당하면 그 다음은 바로 달려가서 내려찍기로 끔살. 그러나 이보다 더 사기적인 올스텟 다 풀로 찍은 이쿠마츠 아줌씨에게는 씨알도 안 먹힌다.(오히려 다 쏘고 나면 연속기 한 셋트에 바로 역관광) [34] 최근에도 졸업식 등에서 자주 보이는 스타일이다. [35] 이 옷을 볼 수 있는 대표적인 예시로는 절망선생이 있다. [36] 남성 하카마는 전면에 다섯 갈래로 주름을 잡는데 각각 유교의 인 의 예 지 신을 상징한다고 하여 주름이 풀린 하카마는 굉장히 예의없는 것으로 받아들인다. [37] 하지만 이 두 가지가 당대 개화파 세력의 개혁 방침에 크나큰 영향을 주었고, 이로 인해 일본 사회에 일대 변혁이 일어난 메이지 유신으로 이어졌으니, 료마의 역할은 매우 막중했다. 애초에 료마는 당대의 재야 인사들 중에서는 막대한 영향력을 행사한 사람이기도 하여, 그가 사망한 후에도 료마의 후예를 자처한 정치인이 적지 않았을 정도고, 삿쵸동맹도 그의 이러한 영향력 하에서 성립되었다. 그래서 현대의 주류 역사학계에서는 아래에서 보듯이 그다지 과대평가되지 않았다고 보는 게 중론이다. [38] 다른 가족들에게 보낸 편지들은 료마하면 떠오르는 자유로움과 달리 딱딱하고 예의 바르게 작성되어 있는데 오토메에게 보낸 편지들은 농담도 많고 자유로운 분위기(자신의 정치적 생각, 사담 등)의 편지를 남겼다. 특히 1864년 카츠 카이슈의 제자가 되었다며 자랑하는 편지에는 의성어로 '엣헴 엣헴(エヘン エヘン)'이라는 표현을 쓰며, 다른 사람에게는 절대 내색하지 않지만 고명한 선생님께 인정받았다는 기쁨을 누나에게 자랑하고 싶어하는 동생으로써의 귀여운 일면을 볼 수 있다. 이 편지는 통칭 '료마의 엣헴 편지'라고 불린다. 원문 번안: "지금은 일본 제1의 인물 카츠 린타로라는 사람의 제자가 돼서 일본을 위해 온힘을 다하고 있다. 기뻐해 주길 바래. [39] 료마의 의도대로 요시노부가 내대신 자격으로 신정부를 이끌어갈 계획이었다. 그러나 12월 신정부 출범일에 사쓰마가 어소를 무력으로 점거하며 요시노부 세력의 출입을 일체 금하였고, 그 사이에 날치기로 왕정복고의 대호령을 진행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