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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카모토 료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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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06년 일본의 방송국 닛폰 테레비가 일본인을 대상으로 투표한 '가장 위대한 일본인' 명단이다.
<rowcolor=#ffffff> 1위 2위 3위 4위 5위
오다 노부나가 사카모토 료마 도요토미 히데요시 마쓰시타 고노스케 도쿠가와 이에야스
<rowcolor=#ffffff> 6위 7위 8위 9위 10위
노구치 히데요 히지카타 토시조 사이고 다카모리 미소라 히바리 후쿠자와 유키치
같이 보기: 위대한 인물 시리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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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카모토 료마
坂本龍馬
파일:さかもと りょうま.jpg
<colbgcolor=#000> 출생 1836년 1월 3일
도사국 도사군 카미마치혼초
(現 고치현 고치시 카미마치)
사망 1867년 12월 10일[1] (향년 31세)
야마시로국 가도노군 교토 카와라마치 오미야
(現 교토부 교토시 나카교구 카와라마치)
묘소 교토료젠호국신사 ( 교토부 교토시)
야스쿠니 신사 ( 도쿄도 치요다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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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lbgcolor=#000><colcolor=#FFFFFF> 본명 나오나리(直柔)
통칭 료마(龍馬)
사이타니 우메타로(才谷梅太郎)
부모 아버지 사카모토 하치헤이
친모 고
계모 이요
형제자매 형 사카모토 곤페이
형수 치노
누나 치즈
누나 에이
누나 오토메
배우자 나라사키 료
자녀 양자 사카모토 나오[2]
위계 정4위(正四位)[3] }}}}}}}}}
파일:사카모토 료마.jpg
▲ 나카사키에서 찍은 착색 사진[4]

1. 개요2. 생애3. 해원대와 가메야마 사츄(가메야마 조합)4. 평가
4.1. 일본 근대사 인물 중 가장 사랑받는 인물4.2. 과대평가 논란과 반박
5. 기타6. 문헌
6.1. 선중팔책(船中八策)6.2. 신정부강령팔책(新政府綱領八策)
7. 창작물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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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右申所の姦吏を一事に軍いたし打殺, 日本を今一度、洗濯いたし申し候.
저 간사한 관리들을 한 판 싸움으로 쳐 죽이고, 일본을 다시 한번 세탁해야겠소이다.
누나 오토메에게 보낸 분큐 3년(1863년) 6월 29일자 편지 중에서 #

일본 에도 막부 말기의 검객, 낭인, 군인, 정치가, 기업인이다.

2. 생애

파일:601px-Kikyō_mon.svg.png
사카모토 가문
일본 에도 막부 막말 시기에 활약한 인물로, 일본 근대사에 큰 영향을 끼친 인물 중 한 명으로 평가받는다. 특히 대정봉환 관련 활약상이 많이 언급되는 편이다.

뒤에 나오듯이 현재 일본에서도 인기가 매우 많은 편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수수께끼 인물의 생애가 당시 일본을 지배하던 에도 막부의 공식 문서에는 기록된 적이 한번도 없다.

료마는 도사 번에서 3대 호상에 드는 나름 유복한 상인 집안 늦둥이 막내로 태어나 하급 무사(武士)로 탈번한 낭인 출신으로 이곳저곳을 떠돌아 다녔다. 본격적으로 일본 정치에 관여한 시절은 료마를 직접 만난 사람들이 남긴 기록과 료마가 가족에게 보낸 편지에서 추측하는 자료가 전부이다 보니 그의 행적에는 군데군데 어디서 뭘 했는지 알 수 없는 공백이 있다. 지금의 료마의 모습은 훗날 소설 드라마에서 작가들이 상상력으로 창작한 부분이 많은 것. 그래서 일각에선 뒤에 나오듯이 과대평가되었다는 의견과 이에 반박하는 의견이 동시에 나오기도 한다.

위로는 형과 세 명의 누나가 있었다. 형과의 나이 차이는 스무 살로 형의 아들이 5살 때 요절하자, 료마를 양자로 삼으려고 한 적이 있다. 귀여움을 잔뜩 받고 자란 탓에 어릴 때는 울보, 겁쟁이에 12살 때까지 야뇨증이 있었다고 한다. 셋째 누나 오토메가 오줌싸개 버릇을 고쳤다는 기록이 있다.

사카모토 집안은 대대로 사이다니야(才谷屋)라는 전당포, 주조업, 포목상을 하던 상인 집안이었다. 그러다가 증조할아버지대에 번에 사카모토라는 성씨를 쓰는 것을 허락받고 따로 분가해서 하급무사 자격을 얻었다.(아버지가 3대 당주) 사실상 돈을 주고 무사 계급을 산 셈이다.

특히 사카모토 가문은 금융업, 술, 옷감 장사를 하던 상인 가문이었다가 돈으로 무사 신분을 산지라 하급 무사한테도 쌍놈 소리 듣던 가문이었다.[5] 아버지와 형의 신분은 하급무사여서 성의 경비와 보수 직을 맡았는데, 사무라이 공무원으로 일하고 받는 봉록은 낮았지만, 분가할 때 본가로부터 많은 재산을 나눠받았고, 농지도 고쿠다카 100석 이상 가진 땅주인이어서 웬만한 상급무사들보다 훨씬 잘 살았다고 한다. 료마가 태어난 생가도 상급무사들이 살던 지역의 경계선에서 70미터에 있었고 21 X 75미터의 500평 크기의 큰 저택이었다.

다만 가문이 본디 상인가문이다 보니 기존 무사가문들의 무시와 경멸은 필연적으로 따라왔고 이는 어린 료마에게도 예외가 아니라 료마는 같은 동네에 살던 상급무사의 자제들한테 이지메를 당하며 자랐다고 한다. 그래서 료마는 무사로서의 삶보다는 상인으로서의 삶에 더 관심이 많았던 것으로 보이며 실제로도 주식 회사 개념의 사설 함대인 해원대를 창설하고 사쓰마 조슈 등에 군수물자를 팔기도 했다. 삿초동맹에서 중개인 자격으로 입회한 것도 장사를 하면서 사쓰마와 조슈 양쪽 모두에게 인맥이 있었기 때문에 가능했다.

그래도 무사 가문이라 그런지 어릴 적에는 학문보다는 검도에 빠져 검도의 사범을 꿈꾸었다고도 한다. 12살 때 병약했던 어머니가 죽자 이 경험이 검술에 열중하게 했다는 분석이 있다. 1853년 19살 때, 검술 수행을 위해 약 1년 동안 에도에서 집안의 재정적 지원을 받아 유학해서 북진일도류의 검술과 나기나타 면허개전을 받았다고 알려졌는데 북진일도류를 배웠는가 대해서는 훗날 역사학자 가운데 그 진위에 대해 의문을 품는 사람도 있다.

에도에서 유학 중에 흑선내항 사건(1853)이 일어났고 에도에 파견나온 도사 번의 경비대 소속이었던 (졸병) 료마는 미국의 증기선을 목격했다. 이 경험을 전달하기 위해 집에 보낸 편지에는 현대어로 번안하면 '서양 오랑캐 놈들이 쳐들어 오면 칼로 목을 따고 귀국하겠습니다.' 라는 치기심 가득한 허세를 떨었다. 같은 해 12월 난학자이자 사상가 사쿠마 쇼잔(佐久間象山)의 사숙(개인학원)에 입학해서 포술, 한학, 난학 등을 배웠으며 다음해인 1854년 7월에 고향으로 돌아와 연로했던 아버지의 임종을 지켰다.

고향에 돌아와서도 서양에 대한 호기심은 여전해서 가와다 쇼료[6]를 찾아가 서양에 대한 지식을 배운다. 료마는 미국의 국력과 민주주의 공화정 제도를 알고 충격을 먹고 "무사를 떠받드는 신분제 토대를 바꿔 일본이 거듭나지 않는 한, 미국과 싸워서 이길 턱이 없다."라는 글을 남긴다. 이후 1856년 10월부터 약 2년 간 다시 에도로 가서 검도 유학을 했다.

1860년, 사쿠라다 문 밖의 변을 시작으로 이 시기는 존황양이 운동이 절정기였다. 도사 번에서도 하급 무사 출신인 다케치 한페이타가 200명의 하급무사들을 규합해서 도사근왕당(土佐勤王黨)이라는 막부 타도를 목표로 한 결사 모임을 조직했고(1861) 료마도 가맹한다. 이들은 친(親)도쿠가와 막부 성향의 공무합체파 도사 번의 참정 요시다 도요와 대립했고, 도요는 암살되었다. 그러나 료마는 사와무라 소노조와 함께 1862년 탈번하여 낭인이 되었다.

한편 1863년 교토에서 존황양이파가 쫓겨나는 정변이 발생하여 도사 번에서 존황양이파가 탄압당하고 다나카 신베에는 자살, 요시다 도요를 암살한 배후로 지목된 다케치 한페이타는 할복하였으며, 오카다 이조는 도주하다 체포된 후 고문 끝에 자백하고 참수형당해 근왕당은 무너진다.

1862년 3월, 시모노세키로 찾아가 시라이시 쇼타로를 방문하고, 에도 막부의 정사총재직 마츠다이라 슌가쿠(松平春嶽, 후쿠이 번주이자 도쿠가와 요시노부의 보좌역)로부터 소개장을 받아서[7][8] 그해 12월[9][10] 막부군함 부교직 가쓰 가이슈를 만나 제자가 되어 증기선의 항해술을 배운다.

이때 막부 개화파인 가이슈를 암살하려고 그의 집으로 찾아갔다가 오히려 그의 사상에 감화를 받아 제자가 되었다는 일화가 널리 알려져 있다. 그러나 연구에 따르면 이렇게 말을 둘러댄 사람은 가쓰 가이슈가 남긴 기록뿐이다. 료마가 가이슈를 암살할 동기나 이유가 전혀 없다. 하여간 누나에게 보낸 편지에서 일본 제일의 인물로 평가한 사람이 가쓰 가이슈로 그의 제자가 된 것을 자랑하며 기뻐해 달라고 했다는것을 보면 료마가 가이슈에게 감화된것은 사실로 보인다.

그 내막에는 가쓰 가이슈의 상소를 받아들인 에도 막부가 고베에 해군양성소의 설립하고자 그 설립자금 문제로 고민할 때, 사카모토 료마를 백업하는 도사 번의 금융 네트워크( 사채업자)의 자금 지원을 받기 위해서 소개장을 들고 찾아 온 그를 만났다는 설이 유력하다.

가쓰 가이슈의 제자가 되고 가이슈가 미국 방문 체험으로 깨달은 '일본도 통일된 국가를 만들기 위해서는 미국처럼 합중국· 연방 체제를 도입해야 한다'고 주장한 공의정체론(公議政体論)(덤으로 민주주의, 자유민권) 사상을 배웠을 거라고 추정하고 있다.

1862년 분큐의 개혁[11] 이후 격동의 시기로, 다음해 8월 18일의 정변, 시모노세키 전쟁, 금문의 변을 거쳐, 1864년 조슈번과 조율하기 위해 가이슈는 나가사키로 출장을 가게 되고 료마도 동행한다. 이윽고 가이슈는 정계에서 실각하고 고베의 해군양성소는 폐쇄. 료마는 사쓰마로 망명한다. 이즈음 나라사키 료와 결혼한다.

사쓰마 번의 실력자 사이고 다카모리를 만나 돈과 선박을 지원해주면 이제까지 중계 무역을 독점하는 에도 막부를 배제하고 사쓰마 번에게도 짭짤한 돈벌이가 되는 장사(밀무역)를 하겠다고 설득, 소수의 동지들과 함께 나가사키에 해원대의 전신이 되는 무역회사 카메야마 사중(社中)을 설립한다.(1865) 에조 지방( 홋카이도)의 특산물 말린 다시마를 선박을 이용한 중계상을 시도하기도 했다.

1866년 서로 원수지간이나 사쓰에이 전쟁 시모노세키 전쟁으로 같은 처지에 서게 된 사쓰마와 조슈를 중재하여 사쓰마-조슈 동맹( 삿초 동맹)을 성립시켰다.

삿초 동맹을 성사시킨 사카모토 료마는 호위인 미요시 신조와 함께 야마시로 국 기이 군 후시미(현재의 교토시 후시미구 )의 테라다야 여관에 숙박 중 이었다. 이 두사람을 노리고 후시미 부교소의 포졸들이 습격한 사건이 테라다야 사건 또는 사카모토 료마 습격사건으로 불리는 사건이다. 나라사키 료의 도움으로 포졸들로부터 간신히 도주한 두사람은 근처 운하 창고에 숨었고, 거기서 미요시 신조가 사쓰마번 저택으로 달려가게 된다. 저택에 도착한 미요시에게 연락을 받은 사쓰마 번이 사카모토 료마를 보호해 사건은 종결된다. 이 사건으로 부상을 입은 사카모토 료마는 사이고 타카모리의 권유에 따라 자신의 아내 오료와 함께 사쓰마 번의 배를 타고 교토를 탈출해 사쓰마의 온천에 요양하러 간다.

고토 쇼지로와 대정봉환을 목표로 한 협력관계를 맺고 도사 번의 지원을 받아 1867년 일본 최초의 해운상사인 해원대를 창설한다. 그리고 암살 위협을 우려하여 사이다니 우메타로(才谷梅太郎)라는 가명으로 활동했다. 게이오 원년에 누나 오토메에게 보낸 편지에는 사이고 이사부로(西郷伊三郎)라는 또다른 가명을 쓴 기록도 있다.

대정봉환 한 달 후 료마는 은신처이던 오미야라는 간장 가게에서 암살당했다. 신센구미는 평생 료마를 죽이려고 쫓아다녔는데 대정봉환 후 막부의 중요 인물이 되어 정작 신센구미에서는 건드리지도 못했다. 누가 암살했는지는 아직도 의문이다. 가장 유력한 설은 대정봉환으로 도쿠가와 가문이 권력을 잃게 되자 에노모토 미치아키의(막부 가신, 쓰시마노카미라는 관직을 칭하였기에 에노모토 쓰시마라고도 불림)의 지령을 받아 도쿠가와 집안을 충직하게 떠받들던 세력이었던 미마와리구미의 수장, 사사키 다다사부로가 제비뽑기로 암살자를 결정하여 이마이 노부오에게 암살지령을 내렸다는 것이다.[12]

반면 시바 료타로 가쓰 가이슈의 일기를 부정확하게 인용하여 생긴 오해라는 반론도 있다.

사카모토 료마는 정치적으로도 당시 기준 소위 깨어있는 성향을 띄었는데, 특히 서양 문물에 대해 굉장히 진보적이었던 것으로 유명하다. 일본 문화에서 서양문물이라 하면 료마 님 정도(?)라 하는 말이 있을 정도.

일본 최초로 해운회사(해원대, 海援隊)를 설립했다. 이 회사에 있던 이와사키 야타로(岩崎弥太郎)가 해원대가 해산된 뒤 받은 지분으로 만든 회사가 다름 아닌 미쓰비시이다. 최초의 근대적 손해배상소송(일본 최초의 증기선 사고)을 걸기도 했다.

또 일본인 최초로 신혼여행을 갔다고 알려진 인물이기도 하다.[13] 배후 사정은 그리 낭만적인 것은 아니고, 1866년 1월 23일 테라다야에서 암살 시도로 부상을 입고 치료를 위해 기리시마의 온천에서 3개월간 요양생활을 했다. 이 때 타카치호노미네 산에 올라 정상에 꽂혀있는 전설의 창인 아메노사카호코(天逆鉾)[14]를 뽑아보았다는 에피소드가 유명하다.

3. 해원대와 가메야마 사츄(가메야마 조합)

파일:카이엔타이 깃발.svg
니비키(二曳)
오스트리아 국기하고 매우 비슷하지만 색깔은 약간더 진하다. 보신 전쟁 당시 도사번의 군기(軍旗)로 활용되었다.
파일:800px-Kameyama-company01.jpg
가메야마 조합 기념관

1865년 9월, 막부기관인 고베 해군훈련소가 해산되면서, 사쓰마 번의 원조를 받아 나가사키의 가메야마 (현 나가사키시 이라바야시(伊良林) 지구)에 전신인 가메야마 조합이 결성되었고, 영국의 무기상 토머스 블레이크 글로버의 '글로버 상회'와 총기 거래를 개시하여 번에 총기 등을 도매하였다. 물자의 수송이나 항해 훈련 등도 했으며, 1866년 제2차 막부 조슈 정벌에서 조슈 번의 군함에 동승, 6월 시모노세키 해전에서 종군했다.

사카모토는 에조치(홋카이도) 개발사업에 착수할 계획을 가지고 있었다고 하며, 후에 친족인 사카모토 나오히로가 유지를 이어, 메이지 시대 홋카이도 소라치 지청 우라우스정으로 이주하였다.

후에 료마와 같은 도사 번 출신인 이와사키 야타로가 해원대를 이어 받아 미쓰비시 그룹으로 발전시켰다.

4. 평가

4.1. 일본 근대사 인물 중 가장 사랑받는 인물

일본인들이 가장 좋아하는 근대 역사인물로, 근대가 아니라 일본사 전체로 따져도 오다 노부나가 등과 함께 1~2위를 다투는 최상위권이다.

2019년에는 일본 10~60대 남녀 12,000명이 뽑은 가장 좋아하는 역사적인 인물 순위에서 12표 차로 2위를 기록했다. 1위 오다 노부나가(1,059표), 2위 사카모토 료마(1,047표), 3위 스기하라 지우네(603표), 4위 쇼토쿠 태자(582표), 5위 사나다 노부시게(561표), 6위 다테 마사무네(508표), 7위 우에스기 겐신(458표), 8위 도쿠가와 이에야스(440표), 9위 히지카타 토시조(426표), 10위 구로다 요시타카(380표). # 물론 조사마다 차이는 좀 있겠지만, 료마와 노부나가는 으레 최상위권에 랭크되는 편이다.

약간 다른 관점에서 비교하자면, '유신삼걸(維新の三傑)'이라 불리기도 하는 기도 다카요시, 사이고 다카모리, 오쿠보 도시미치도 일본인들 기준에서 보자면 업적이 나쁘지 않은 편이지만, 이들은 기억되는 위인이지 대중들에게 '사랑을 받는' 타입은 아니다.

시바 료타로의 베스트셀러 <료마가 간다>가 그의 일대기를 다룬 소설이다. (소설임을 나타내기 위해 당시에 쓰였던 구자체 龍馬가 아닌 신자체인 竜馬를 쓴다.) 물론 이 소설의 흥행 덕분에 료마가 지금의 인기를 누리고 있는 측면도 있다. 이보다 앞서 사카자키 시란이라는 도사 번(오늘날 고치현) 출신 저널리스트 겸 자유민권운동가가 메이지 16년( 1883년) 도사 번 지방지인 도요 신문(土陽新聞)에 한혈천리마( 汗血千里駒)라는 전기소설(傳記小説)을 연재해서, 메이지 시대 들어 잊혀지던 사카모토 료마를 발굴, 소개한 적도 있었다.

전반적으로 조직 내 의견을 조율하면서 비전을 제시하는 2인자 혹은 모사 캐릭터를 무척 좋아하는 일본인들의 성격에 걸맞은 인물이기도 하다. 일본에서 제갈공명이 인기가 좋은 것도 비슷한 맥락. 어떻게 보면 정도전과도 유사한 측면이 있다. 과거엔 지금만큼 주목받진 않았으나, 현대 매체를 통해 자신이 이끈 정국의 실질적 설계자 비슷하게 묘사되고 이것이 확대 재생산되며 대중들의 평가를 이끌어냈다는 점에서 비슷한 점이 있다. 최후가 비극적이란 점도 그렇다.

한편, 한국인 입장에서 보자면, 일본의 주요 유신 관련 경력자들 중 상당수는 한국 병탄 등과 관한 만행에서 자유롭지 않은 경우가 많은데 거기서 자유로운 몇 안되는 인물이다. 물론 막부 타도가 제일 기치이던 보신 전쟁 이전에 사망한 점 역시 있겠지만, 요시다 쇼인같이 유신 이전 사망한 부류 중에서도 버젓이 정한론 떠들던 사람들이 있던걸 고려해보면, 료마가 생전에 딱히 정한론을 주장하거나 거론한 건 없었다.

4.2. 과대평가 논란과 반박

(료마가 선중팔책으로 정권봉환을 건의했다)는 사실이 사료를 통해 논증된 적은 단 한번도 없다.
(龍馬が「船中八策」で政権奉還の建白をしたとされる)事実が史料に基づいて論証されたことは一度もない
아오야마 타다마사 (青山忠政, 2006)
사카모토 료마가 대정봉환을 고토 소지로에게 건의했다”는 카더라 뉴스(という物語)가, 몇번에 걸쳐 인용되던 도중에 <선중팔책>이라는 문헌으로 결실을 맺고, 역사적 사실인 것처럼 되어버렸다.
坂本龍馬が大政奉還を後藤象二郎に建言した、という物語が、数度の引用を繰り返すうちに『船中八策』という文書として結実し史実となってしまうのである
치노 후미야(知野文哉, 2013)[15] p.17
또한 료마가 키도와 사이고의 사이를 알선해서 <삿쵸동맹>을 완료했다라는 1차 사료는 존재하지 않으며, 전부 메이지 이후의 창작에 불과하다.
また、龍馬が木戸と西郷の間を周旋して「薩長同盟」を成し遂げたとする一次史料は存在せず、全て明治以降の創作に過ぎない

료마의 역할은 <삿쵸동맹>보다도, 삿토맹약의 성립에 무게가 있었다고 생각된다.[16]
龍馬の役割は、「小松・木戸覚書」よりも薩土盟約の成立に重みがあったと考える
마치다 아키히로(町田明広)[17] (2019), p.173-174 & p.236

료마는 그 업적이 과대평가 받고 있다고 비판받기도 한다.
파일:요시다 쇼인 사카모토 료마 교과서에서 퇴출.jpg
파일:요시다 쇼인 사카모토 료마 교과서에서 퇴출2.jpg

2017년에는 다케다 신겐, 우에스기 겐신, 요시다 쇼인과 함께 '실제 역사상 역할과 의미가 크지 않다'는 이유로 일본의 고등학교 역사 교과서에서 이름을 지워야 한다는 움직임이 있다는 보도가 나오기도 했다. 삼국지가 한중일 삼국에서 인기를 끌고 대중들의 인식에도 많은 영향을 미쳤지만, 정작 교과서에서 중국사를 배울땐 그 시절은 큰 비중을 차지하지 못하고 넘어가는 것과 비슷한 맥락이라고 봐도 될 듯.

2022년 닛케이 비즈니스에서 " 사카모토 료마의 전설은 거짓 투성이 「막말에 맹활약」은 틀렸다"라는 기사를 내서, 료마의 과대평가 논란을 요약했다.
막부 말미에 맹활약했다는 이미지가 세상에 널리 퍼져 있는 사카모토 료마. 시바 료타로의 '료마가 간다' 등의 소설을 읽고 ' 삿쵸 동맹'을 체결할 수 있었던 것은 료마가 있었기 때문이다', ' 대정봉환의 일등공신이었다'고 믿는 분도 많을지도 모릅니다.
하지만 역사학의 관점에 서면 실체는 전혀 다릅니다. 위와 같은 그의 업적으로 여겨지는 것은 저것도 거짓말이다, 이것도 거짓말이라는 느낌으로 '거의 진실이 없다'고 해도 지나친 말은 아닐 것입니다.
실제로 사카모토 료마(龍本龍馬)는 일본사에 거의 영향을 주지 않았던 인물이었습니다. 물론 시바 씨도 소설의 주인공(竜馬)과 역사상의 인물(龍馬)을 구별해서 생각하고 있었습니다.[18]
카쿠 코조(加来耕三, 2022)[19]

료마를 둘러싼 과대평가와 그 반박을 논하기에 들어가기 앞서, 료마를 일종의 신화적인 인물로 만든 시바사관(司馬史觀) 자체가 2차대전 패배 후 왜 일본이 몰락하게 되었는가를 설명하는 과정에서 나온 반작용이라는 점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시바 사관이란 소위 옛 일본은 좋은 나라였지만 쇼와 시대로 넘어오면서 망가졌다는 식으로 쇼와 이전과 대비한 과거 일본, 특히 에도 막부 말기 일본을 찬미하는 세계관을 의미한다.[20]

이 주장은 메이지 시대 다이쇼 시대 등 소위 위대했던 일본에 본래 그 멸망의 씨앗이 내재되어 있음을 부정하고 메이지 시대 등 그 영광이 극에 달했던 시대를 찬양하는 것이 시바 사관의 핵심이다. 여기서 사카모토 료마는 이 사관에서 선택받은 일종의 '메이지 시대 건국신화'의 영웅이라고 할 수 있다. 료마 본인은 제국주의나 군국주의와 큰 관련이 없으니 아낌없이 좋은 말을 덧붙일 수 있고, 소설의 팬도 많다보니 필연적으로 발생하는 대중적 이미지와 실제 사카모토 료마 사이의 괴리감을 현대 사학자들이 지적할 때마다 소설의 팬들이 나서 비판하는 경우가 많다. 이런 '료마 팬덤'은 비단 일반인들 뿐만이 아닌 진지한 일본 사학자들도 포함되어 있는데, 결국 역사학자들 또한 인간이기 때문에 국뽕이나 애국심 문제에서 자유로울 수는 없다.

한국인 사이에서도 '일본 제국주의와 비교적 관련이 적은' 영웅이라서 좋아하는 게 아니라, 찬란했던 메이지 시대 운운하는 시바 사관에 동조하여 료마라고 하면 일단 덮어놓고 비호하는 팬들이 많다. 물론 사카모토 료마가 제대로 한 일은 하나도 없는 일개 탈번 낭인 무사 주제에 소설 이미지로 먹고사는 한량이라고 하면 문제가 있겠지만, 반대로 '역사적인' 사카모토 료마를 논하기 위해 소설 등으로 만들어진 이미지를 걷어내고자 하는 것조차 료마에 대한 '공격'이라며 가시를 세우는 태도는 지양해야 할 것이다.

료마가 과대평가 받고 있다는 이유와 반론에 대해서 살펴보자면,

5. 기타

사진만 봐선 잘 모를 수도 있는데, 신장이 그 당시 일본인치고는 상당히 큰 편이었다. 182cm라는 수치가 언급되기도 하는데 정확한 수치는 아니고, 당시 사람들 평균 키보다는 키가 컸을 것이라 추측할 뿐이다. 바로 윗누님인 오토메가 170cm(어떤 자료는 174)에 체중이 110kg이 넘는 당시 일본 여성의 평균 키를 훨씬 뛰어넘는 장신이라고 전해져서, 바로 밑 남동생 료마도 그 이상은 넘어서 적어도 173cm 이상은 될 거라고 대충 짐작한 키다.

그리고 182이라는 장신의 수치도 주변인의 증언들이 각각 달라서 173 ~ 179cm 정도였을 거라고 추측한다. 그리고 료마가 실제로 180이 넘은 장신이었다면 당시 일본에서는 거인에 가까운 키라서 료마를 실제로 만난 사람들이 그 키를 언급했을 법도 한데 그런 기록은 찾을 수가 없는 것을 보면 그 정도로 키가 큰 장신은 아니었을거라고 본다. 일본의 NHK 다큐멘터리 역사 방송에서는 171 ~ 173cm 정도였을 것이라고 추측하고 있다.
료마의 권총은 처음에는 타카스기 신사쿠 상하이에서 구매해서, 호신용으로 쓰라고 선물한 S&W M2 33구경이었다. 테라다야 사건 때 그걸 잃어버리고 자비로 S&W M1 22구경을 구입했다고 한다. 그러나 암살당할 때는 이 권총을 사용하지 못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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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W M1 22구경
* 그 때문인지 검호 3에서는 남들은 검을 집에 넣으면 발도술을 쓰는 반면, 료마는 갑자기 권총을 꺼내들고 쏜다. 친구들과 대전할 때 쓰면 친구들을 벙찌게 만들고 리얼철권을 일으킬 수도 있다. 총 6발을 쏘는데 어지간한 검호들은 이 6발 이내로 제압이 된다. 그렇다고 좌우 이동으로 회피하려다가 넉백당하면 그 다음은 바로 달려가서 내려찍기로 끔살. 그러나 이보다 더 사기적인 올스텟 다 풀로 찍은 이쿠마츠 아줌씨에게는 씨알도 안 먹힌다.(오히려 다 쏘고 나면 연속기 한 셋트에 바로 역관광)
료마는 평생에 3개의 검을 찼다. 부유한 집안의 막내 아들답게 성인식(15살 때)에 아버지가 선물한 짧은 칼( 와키자시)부터 비싼 명검이었고, 그가 죽을 때 사용한 무츠노카미 요시유키(陸奥守吉行)는 원래 사카모토가의 가보였는데 형이 그에게 주었다. 1866년 료마가 형에게 보낸 편지에 '무사가 큰일을 할 때 반드시 선조 전래의 갑옷이나 보도(寶刀)를 물려받는다고 하니 사카모토가의 가보를 보내달라' 부탁했다. 시바 료타로의 소설에서는 이 역할이 누이의 것이었기 때문에 그렇게 알고 있는 사람도 많다. 료마가 암살당할 때 암살범의 칼을 막아낸 것도 이 칼이었다는 것이 근래의 연구로 밝혀졌다. 관련 영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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료마의 검, 무츠노카미 요시유키
1853년 19살 때, 검술 수행을 위해 약 1년 동안 에도에서 집안의 재정적 지원을 받아 유학해서 북진일도류의 검술과 나기나타 면허개전을 받았다고 알려졌는데 북진일도류를 배웠는가 대해서는 훗날 역사학자 가운데 그 진위에 대해 의문을 품는 사람도 있다.
기존에는 치바 사다키치에게서 받은 북진일도류 나기나타 병법의 목록(일본검술의 단수를 세는 단위 중의 하나)만 문서가 남아있었다. 사다키치는 북진일도류 개조 치바 슈사쿠의 동생. 사다키치의 딸이 치바 사나코인데 당대의 여성 검객이었다고 한다. 도장집 딸이라 어릴 적부터 문하생들과 어울렸다고. 료마와도 러브스토리가 있는데 평생 료마를 그리워했다고 한다. 남은 목록 역시 북진일도류 중에서 가장 낮은 단수인 초목록(初目録)이었다. 북진일도류는 초목록, 중목록면허, 대목록개전의 3단 구도이며 소위 면허개전은 대목록개전에 해당한다.

때문에 검술에 대해서는 확증이 없었다. 그러다가 2015년에 료마의 유족들이 료마기념관에 기증한 문서들에서 료마가 북진일도류 검술의 면허개전과 나기나타 면허 개전을 받았다는 기록이 발견되었다. 그런데 당시 일본 검술에서는 주변의 인간관계 때문에 승급을 거부하거나 실제로는 실력이 안 되어도 이런저런 사정 때문에 승급해주는 일이 잦았기 때문에 단수가 높고 낮은 것이 실제의 검술실력과 직결되지는 않는다.

따라서 사카모토 료마가 검객으로서 어느 정도의 기량을 가졌는지에 대해서 객관적으로 증명할 만한 자료는 없다. 행적을 보면 검객보다는 ' 논객'에 더 가까운 인물. 그런데 북진일도류의 치바 슈사쿠는 검술 실력 외의 조건으로 면허를 주던 당대의 관행에 반대하여 승단 체계를 따로 만들 정도로 실력을 우선시하던 검술가였다. 물론 암살과 검투가 횡행했던 막말 분위기 속에서 검으로 살생하지 않은 료마는 매우 특이한 경우다.

시바 료타로의 소설에서는 거의 무념무상으로 승부에 달관한 태도이지만 칼을 뽑으면 무적이라는 식으로 고수를 넘어서 달인에 가까운 검객으로 묘사한다.
앵클부츠도 즐겨 신었는데 그 바람에 당시에는 드문 질병인 무좀으로 고생했다고 한다. 이것도 일본 최초급. 료마는 하카마 부츠를 신는, 다이쇼 시대를 상징하는 이른바 '하이카라'라고 불리는 스타일의 창시자이다. 최근에도 일본의 졸업식 등에서 자주 보이는 스타일이다. 이 문서 가장 위의 사진도 잘 보면 부츠를 신고 있다. 남성의 하카마+부츠 차림을 현재도 보통 료마님 스타일이라고 부른다. 여담으로 좀 더 격식(?)을 갖춘 차림으로는 흰 차이나칼라 셔츠를 받쳐입고 기모노, 하카마와 부츠를 매치하는 복장으로 이 쪽은 다이쇼~ 메이지 초기에 학생복으로 많이 착용하여 흔히 서생복이라고 부르는 편이다. 이 옷을 볼 수 있는 대표적인 예시로는 절망선생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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료마의 부츠
료마가 부츠를 애용한 데에는 사연이 있다. 토사 번은 1600년 세키가하라 전투 이후 이봉해 온 야마우치 카즈토요의 친 도쿠가와 세력과 기존의 토착 세력 향사(鄕士)의 200년 이상 이어진 대립으로 상급무사와 하급무사 사이에는 신분 차별이 당시 일본 어느 곳보다 심해서, 하급무사는 비가 와도 우산을 쓸 수 없고, 높은 게다도 신을 수 없었다. 토사 번에서 하급무사 계급이 결사 조직을 만들어서 에도 막부를 타도하려는(도막파) 존황양이 운동이 일어난 것도 이러한 역사적 배경이 있었다. 료마는 카츠 카이슈가 보여 준 사진에서 미국 장군과 병사가 같은 군화를 신은 사진을 보고 '민주주의란 이런 것이구나'라는 것을 깨닫고 감동을 받고 눈물을 흘렸다고 한다. 이후 짚신을 벗어던지고 부츠 애용자가 되었다. 그리고 실용성에서도 서양 해군은 이미 가죽 부츠(군화)가 필수 군수품이었다. 물기가 많은 갑판 위를 뛰어다니거나 밧줄을 밟고 돛대로 올라가야 할 때, 미끄러지고 벗겨지기 쉬운 짚신은 거추장스러운 물건이었다.

* 하카마
전통 하카마의 경우 칼같이 각이 잡힌 주름을 생명으로 여긴다. 남성 하카마는 전면에 다섯 갈래로 주름을 잡는데 각각 유교의 인 의 예 지 신을 상징한다고 하여 주름이 풀린 하카마는 굉장히 예의없는 것으로 받아들인다. 주름을 잡기도, 풀어지지 않게 세탁하고 그것을 관리하기도 쉽지 않아 굉장히 불편하다. 그리하여 이에 개의치 않고 아랫단 주름이 다 풀어진 하카마를 아무렇지 않게 입고 다닌 인물. 각이 풀린 하카마가 펄럭펄럭하며 부츠를 신은 발목 라인과 조화를 이뤄 굉장히 멋있었다고 한다. 그야말로 패셔니스타.
이런저런 개인의 파격적인 행보와 삶으로 일본 근대사에서 자유인의 상징처럼 받아들여지는 인물. 정치적으로 대단한 행보는 삿초 동맹 대정봉환뿐이다 이 두 가지가 당대 개화파 세력의 개혁 방침에 크나큰 영향을 주었고, 이로 인해 일본 사회에 일대 변혁이 일어난 메이지 유신으로 이어졌으니, 료마의 역할은 컸다고 볼 수 있다. 애초에 료마는 당대의 재야 인사들 중에서는 막대한 영향력을 행사한 사람이기도 하여, 그가 사망한 후에도 료마의 후예를 자처한 정치인이 있었을 정도고, 삿쵸동맹도 그의 이러한 영향력 하에서 성립되었다. 현대의 료마의 인기는 그런 정치적 업적이 아닌, 이러한 고정관념을 벗어던진 자유로운 인간 사카모토 료마가 주는 매력에서 오는 바가 크다.
병약했던 어머니는 료마가 11살 때 돌아가시고, 셋째 누나인 오토메(坂本乙女)가 엄마처럼 키우다시피 했다. 어릴 적 울보였던 료마가 동네 아이들에게 괴롭힘을 당하고 울며 집에 돌아오면 '그러고도 사내대장부냐'며 혼쭐을 냈다고도 한다. 하지만 나이 차는 4살로 료마의 형제자매 중 료마와 가장 가까웠고 이 때문인지 료마의 가장 큰 이해자가 되주었다. 여담으로 오토메는 신장 174cm에 체중이 120kg인 현대 기준으로 보아도 굉장히 기골이 장대한 여장부였다.

료마는 생애 200여 통의 편지를 남겼는데, 그 중 누나 오토메에게 13통의 편지를 보냈고, 이 편지는 지금도 소중하게 보존되어 료마 연구의 중요한 사료가 되었다. 다른 가족들에게 보낸 편지들은 료마하면 떠오르는 자유로움과 달리 딱딱하고 예의 바르게 작성되어 있는데 오토메에게 보낸 편지들은 농담도 많고 자유로운 분위기(자신의 정치적 생각, 사담 등)의 편지를 남겼다. 특히 1864년 카츠 카이슈의 제자가 되었다며 자랑하는 편지에는 의성어로 '엣헴 엣헴(エヘン エヘン)'이라는 표현을 쓰며, 다른 사람에게는 절대 내색하지 않지만 고명한 선생님께 인정받았다는 기쁨을 누나에게 자랑하고 싶어하는 동생으로서의 귀여운 일면을 볼 수 있다. 이 편지는 통칭 '료마의 엣헴 편지'라고 불린다. 원문 번안: "지금은 일본 제1의 인물 카츠 린타로라는 사람의 제자가 돼서 일본을 위해 온힘을 다하고 있다. 기뻐해 주길 바래." 일본을 이제 한번 세탁하고 싶다"는 유명한 말도 1863년 6월 29일 누나에게 보낸 편지에 적힌 글귀였다.

6. 문헌

6.1. 선중팔책(船中八策)

본 문단에서 이야기되는 선중팔책은 역사적인 료마의 업적에 대한 이야기가 아닌, 사학계로부터 꾸준히 그 실체를 의심받았으며(아오야마, 2006) 최근 연구에 의해 허구임이 논증된(치노, 2013) 가공의 문서를 뜻한다. 때문에, 이하의 내용은 역사적으로 실존했던 문헌에 대한 묘사라기보다 소설 등으로 인해 부풀려진 사카모토 료마 관련 전설에서 등장하는 선중팔책에 대한 설명이다. 즉, 역사적인 기록이나 증거의 일종으로 제시하는 게 아니라는 점을 명심할 필요가 있다.

관련된 이야기에 의하면, 일본 역사상 최초의 증기선 충돌 사건인 이로하마루 사건에서 키이 번으로부터 배상금을 두둑히 받아내며 사건을 해결한 료마가 1867년 6월 교토에서 열린 회의에 참석한 토사 번주였던 야마우치 요도에게 대정봉환의 생각을 진언하기 위해 배를 타고 가던 중에 함께 동행한 토사 번 참정 고토 쇼지로에게 구술한 이야기를 나중에 해원대 대원이 문서화한 것이 선중팔책이라고 한다.
一、天下ノ政権ヲ朝廷ニ奉還セシメ、政令宜シク朝廷ヨリ出ヅベキ事。
천하의 정권을 조정에 봉환하고, 새 정령을 조정에서 세워야 한다.( 기도 다카요시)

一、上下議政局ヲ設ケ、議員ヲ置キテ万機ヲ参賛セシメ、万機宜シク公議ニ決スベキ事。
상하의정국을 설치하고 의원을 두어 만기를 시기에 맞게 공의로 결정해야 한다.( 요코이 쇼난)

一、有材ノ公卿諸侯及ビ天下ノ人材ヲ顧問ニ備ヘ官爵ヲ賜ヒ、宜シク従来有名無実ノ官ヲ除クベキ事。
유능한 공경제후와 천하의 인재를 고문으로 삼아 관직을 내리고 종래 유명무실한 관직을 폐지해야 한다.( 요시다 도요)

一、外国ノ交際広ク公議ヲ採リ、新ニ至当ノ規約ヲ立ツベキ事。
외국과의 교류를 확대하는 공의를 모으고 새롭고 지당한 규약을 세워야 한다.( 타카스기 신사쿠)

一、古来ノ律令ヲ折衷シ、新ニ無窮ノ大典ヲ撰定スベキ事。
옛 율령을 폐지하고, 새롭고 무궁한 대전을 제정해야 한다.( 카와다 쇼료)

一、海軍宜シク拡張スベキ事。
해군을 확장해야 한다.( 가쓰 가이슈)

一、御親兵ヲ置キ、帝都ヲ守衛セシムベキ事。
어친병을 설치하여 제도를 수비해야 한다.( 다케치 한페이타)

一、金銀物貨宜シク外国ト平均ノ法ヲ設クベキ事。
금은의 시세를 외국과 균형을 맞추는 법을 제정해야 한다.( 쿠사카 겐즈이)

以上八策ハ方今天下ノ形勢ヲ察シ、之ヲ宇内万国ニ徴スルニ、之ヲ捨テ他ニ済時ノ急務アルナシ。苟モ此数策ヲ断行セバ、皇運ヲ挽回シ、国勢ヲ拡張シ、万国ト並行スルモ、亦敢テ難シトセズ。伏テ願クハ公明正大ノ道理ニ基キ、一大英断ヲ以テ天下ト更始一新セン。
이상 팔책은 현재 천하의 형세를 살피고 정한 것으로 이를 천하 만국에 공포한다. 이 조항을 새롭게 바꿀 때에는 만사를 제쳐두고 해야 한다. 이를 단행하면 황운을 회복하고 국세를 확장하여 만국과 병립할 수 있다. 엎드려 바라건대 공명정대의 도리를 기반으로 일대 영단으로 천하를 새롭게 하자.

역사적인 사료라고는 할 수 없지만, 정말로 실존했다면 일본 최초 및 동양 최초의 민주정이 고안된 방법론이다. 대정봉환과 의정국 설치, 법전 설치 등의 내용을 담고 있다. 물론 이런 이야기 속에서도 료마는 이론가이기 이전에 행동가였기 때문에, 그가 처음부터 모두 이런 생각을 고안한 것으로 등장하지는 않는다. 오히려 당시 개화파 인사, 다시 말해 가쓰 가이슈 오쿠보 도시미치 등이 제안한 핵심 개념을 정리한 것에 가깝다. 그러나 당시 많이 떠돌던 뜬구름 잡기식 혹은 무조건 토벌하자식의 극단적인 내용보다는 깔끔한 개조식이며 간단했다는 점이 크게 먹혀 지금까지 사카모토 료마와 관련된 대표적인 활약으로 전해져 내려오고 있다.

마찬가지로 관련된 전승에 의하면, 고토 쇼지로 등의 토사 번 인사들은 이를 보고 감명받아 대정봉환을 막부 측에 건의하였다는 모양. 물론 실제로는 일본 위키피디아 선중팔책 문서 등에서도 언급되듯 선중팔책의 원본은 실재하지 않으며(마츠우라 레이, 2008, p.187), 더 나아가 치노 후미야(知野文哉)는 "료마가 대정봉환을 고토 소지로(後藤象二郎)에게 건의했다"라는 전승이 구체적으로 어떤 과정을 거쳐 마치 선중팔책이 실제로 존재했던 문건이라는 듯 둔갑되었던 것인지 밝히고 그 허구성을 논증했다(치노, 2013, p.253). 해당 연구에서 치노는(2013, p.48-p.55) 추가적으로 무츠 무네미츠(陸奥宗光)[35]의 회상록, 고토 쇼지로(後藤象二郞)[36]의 회상록 및 나카오카 켄키치(長岡謙吉)[37]의 당시 일기장 등 그 어디에서도 선중팔책 내지 그 원본에 해당하는 문서에 대한 증언은 언급조차 없다는 점을 지적하고 있다.

6.2. 신정부강령팔책(新政府綱領八策)

신정부강령팔책은 대정봉환 이후, 1867년 11월 당시 은신처였던 오미야(近江屋)에서 작성한 것으로 추정되는 신정부 수립을 위한 정치강령이다. 앞서 언급되는 선중팔책과 달리 실물이 존재하며, 국립국회도서관 소장본과 시모노세키 시립역사박물관 소장본이 남아 내려오고 있다. 각 웅번의 실력자들에게 보내기 위해 쓴 것으로 추정된다.[38]
第一義 天下有名ノ人材を招致シ顧問ニ供フ
제1항 천하의 유명한 인재를 모셔와 고문으로 삼는다.

第二義 有材ノ諸侯ヲ撰用シ朝廷ノ官爵ヲ賜イ現今有名無実ノ官ヲ除ク
제2항 유능한 제후를 등용하여 조정의 관직을 하사하고 현재 유명무실한 관직을 폐지한다.

第三義 外国ノ交際ヲ議ス
제3항 외국과의 교류를 의논한다.

第四義 律令ヲ撰シ新タニ無窮ノ大典ヲ定ム律令既ニ定レバ諸侯伯皆此ヲ奉ジテ部下ヲ率ユ
제4항 율령을 편찬하여 새롭게 영원한 대전을 정하고 율령을 정하였다면 제후 모두가 이를 받들며 부하를 통솔한다.

第五義 上下議政所
제5항 상하의정소.

第六義 海陸軍局
제6항 해육군국.

第七義 親兵
제7항 친병.

第八義 皇国今日ノ金銀物価ヲ外国ト平均ス
제8항 황국의 현재 금은의 물가를 외국과의 평균에 맞춘다.

右預メ二三ノ明眼士ト議定シ諸侯会盟ノ日ヲ待ツテ云云
우측의 내용을 사전에 두어명의 안목 있는 자들과 의논하여 정하고 제후회맹의 날을 기다리고…
OOO 自ラ盟主ト為リ此ヲ以テ朝廷ニ奉リ始テ天下萬民ニ公布云云
OOO 스스로 맹주로 나서서 이 안을 조정에 올려 천하 만민에게 공포하며…
強抗非礼公議ニ違フ者ハ断然征討ス権門貴族モ貸借スル事ナシ
강하게 저항하여 무례하게 공의를 어기는 자는 단연히 정토하며 권문귀족이라도 예외가 없다.

慶応丁卯十一月 坂本直柔
게이오 정묘(1867년) 11월 사카모토 나오나리(사카모토 료마의 본명)
여기서 사카모토 료마가 생각하던 OOO는 도쿠가와 요시노부라는 가설이 지배적이다.[39] 정치력있는 리더, 요시노부를 중심으로 사츠마, 조슈, 토사 같은 웅번들이 받쳐주면서 새로운 국가를 이끌어 가길 바랐던 것이었다.

사카모토 료마는 희망을 가득 품은 채 신정부강령팔책을 작성하였으나 보름도 채 지나지 않아 정체불명의 괴한들의 칼에 맞아 절명하고 만다. 그리고 그가 꿈꾸던 새로운 세상은 불과 1달만에 그 환상이 깨져버린다. 료마의 의도대로 요시노부가 내대신 자격으로 신정부를 이끌어갈 계획이었다. 그러나 12월 신정부 출범일에 사쓰마가 어소를 무력으로 점거하며 요시노부 세력의 출입을 일체 금하였고, 그 사이에 날치기로 왕정복고의 대호령을 진행하였다. 곧 2달만에 전쟁이 발발하면서, 점점 순탄치 않은 방향으로 흘러가기 시작한다.

7. 창작물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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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음력 11월 15일( 오미야 사건). 음력으로 계산하면 태어난 날과 죽는 날이 일치한다. 일본 드라마 JIN-진-에서는 중요한 힌트로 작용한다. [2] 사카모토 료마의 조카로 사후 입양되었다. 막말때는 '다카마츠 타로'라고 불리었다. [3] 사후 추서(1891년) [4] 30살 때 나가사키에서 처음으로 창업한 사진관에서 찍은 사진. 당시 최첨단 기술이자 한 장 찍는 데 돈이 많이 드는(현재 가치로 1장에 3만 엔 정도) 사진을 7장 남겼다. 이 시기에 에도 막부 마지막 쇼군 도쿠가와 요시노부 다음으로 많은 사진을 남긴 사람이다. 사진을 확대해서 자세히 보면, 오른쪽 허리춤에 호루라기를 차고 있는 것을 확인할 수 있다. 항해 중에 선박 위에서 사고가 났을 때 부는 용도였다. 신고 있는 신발을 보면 첼시 부츠인 것을 확인 할 수 있다. [5] 실제 료마가 태어났을 당시 사카모토 본가는 상급무사들을 상대로 하는 대출 사업(돈 빌려주고 이자놀이)을 주업으로 하고 있었다. [6] 존 만지로의 취조에 참석해서 주워들은 정보를 바탕으로 서양 정보책을 쓴 화가였다. [7] 1차 사료: 마츠다이라 슌가쿠의 메이지 시기 서간문, 수신인 츠치카타 히로모토(土方久元=楠左衛門), 메이지19년(1886년) 12월 11일 [8] 슌가쿠가 기억하는 시계열에 혼선이 있고, 에치젠번 사료집에도 소개장에 대한 언급이 없어 신빙성을 의심받고 있다고 한다. [9] 카이슈의 일기(海舟日記)를 1차 사료로, 12월 9일설(다른 이름으로 등장)과 12월 29일설(료마의 이름이 처음 언급)이 대립하는 중인데, 29일은 늦어도 너무 늦다는 점에서, 마치다(2019)의 연구 및 마츠우라 레이(松浦玲, 2001)의 선행연구는 9일 가설을 지지하고 있다. [10] 다만 카이슈의 일기장 자체가 비망록 성격을 띌 뿐더러, 사실관계가 틀린 기록도 많아서 취급에 주의를 요한다고 언급된다(마치다, 2019). 마츠우라 레이는 료마에 대한 다른 연구서(마츠우라, 2008)에서, "암만 정치적으로 천재였다고 손쳐도, 기록자로서의 카이슈는 개판(御粗末)이다."라고 불평하며, 지난 연구(마츠우라, 2001)에선 9일 가설을 밀었지만, 솔직히 사료적 한계가 크다고 언급했다고 한다. [11] 사츠마 국부 시마즈 히사미츠가 교토의 천황계 세력과 입을 맞춰 막부에 요구한 개혁안. 간단히 내용을 추리면 i) 사츠마번의 오랜 친구이자 공무합체의 화신이었던 히토츠바시 요시노부를 사면하고, 젊은 쇼군 후견인(섭정)으로 삼을 것; ii) 히토츠바시 파벌의 핵심 인사였던 마츠다이라 슌가쿠를 사면하고, 신설할 정사총재직에 임명할 것; iii) 지방의 예산을 갉아먹는 산킨코타이 제도를 전폭적으로 약화시킬 것. [12] 카타나 외에 호신용으로 리볼버 권총을 가지고 다니긴 했다. [13] 실제로는 기록 상으로는 사츠마 번사이자 삿쵸동맹의 실질적 공헌자로 알려진 코마츠 타테와키가 최초(료마보다 10년 정도 먼저)라고 한다. [14] 일본 신화의 창세신 부부인 이자나기 이자나미가 혼돈을 휘저어 대지를 창조할 때 사용한 창이다. 이후 니니기가 쓰다가 창이 필요 없기를 기원하며 타카치호노미네 산의 정상에 꽂았다는 전승이 있다. 나라 시대부터 있었다는 기록이 있지만, 아무튼 해당 시기의 창은 료마가 도달했을 때에는 화산 폭발로 부러져서 이미 복제품으로 교체되어 있었다. 복제품도 최소 전국시대 유래니 유물은 유물이다. 원래의 창은 칼날 부분만 시마즈 가문이 수습해 아라타케 신사(荒武神社)에 봉헌했으나 지금은 행방불명이라는 모양. [15] 선중팔책이 허구(p.253)임을 논증한 연구. 대정봉환론 자체도 료마의 오리지널이 아니고, 견문으로 들었지만, 고토 소지로에게 관련 내용을 건의했을 가능성은 높다 정도로 갈무리했다. 또한 마치다 아키히로 (2019)는 대정봉환의 베이스가 되는 대조리大条理)에 료마가 연관되었을 가능성은 높다고 보았다. [16] 기울인 글씨는 연구서 본문의 강조에서 따옴 [17] 칸다외국어대학 교수. 주 연구분야는 사츠마번을 중심으로 한 막부말기의 정치사, 메이지유신 및 당대의 대외인식론( 존황양이론)이다. 메이지유신사학회 회장 및 책임국장 [18] 허균의 소설 홍길동전의 홍길동과 실존인물 홍길동은 한자가 다른 것처럼 료마의 한자가 다르다. 카쿠 코조는 사카모토 료마나 신센구미처럼 역사적 기록이 불명확하고 모호한 인물이 소설가들이 창작을 가필할 수 있는 여지가 있기 때문에 사카모토 료마는 영웅화가 되었다고 평했다. [19] 닛케이 비즈니스의 내용과 유사한 내용으로 BS11의 한 코너에 출연해 사카모토 료마를 언급하고 있다(일본어 주의). 정리하자면, 시바의 소설이 료마라는 역사상의 인물상 자체를 뒤틀어버렸고, 그의 소설이 대중들로 하여금 료마가 실제로는 어떤 사람이었고, 무엇을 꿈꾸던 사람이었는지 그 본모습을 알지 못하게 막고 있다고 주장한다. 사카모토 료마가 위인이기는 하나, 대중이 가진 이미지와 실제 인물간 상당한 괴리가 생겨난 셈이다. [20] 시바사관은 역사적 고증 그 자체보다는 시바 료타로의 주장과 사상에 경도되는 면이 강하다. 시바 료타로는 고증 조사는 철저하지만 100% 완벽한 고증을 바탕으로 저술하는 역사학자가 아니다. 역사적 사실을 바탕으로 극적인 이야기를 써내려가는 소설가이다. 시바 료타로 또한 당시 일본의 저런 분위기에서 예외는 아니었으며, 오히려 거기에 한 몫을 더한 인물이라고 할 수 있다. [21] 물론 시바 료타로는 어디까지나 사학자가 아닌 소설가고, 사료 조사에 철저하기는 했으나 재미 등을 위해 의도적으로 고증을 무시하거나 재구성한 사건도 많으니 시바 료타로가 제대로 조사하고 썼으니까 사실이다! 하고 주장할 수는 없다. 실제로 치노 후미야(2013) 등의 연구에 따르면 시바 료타로를 포함한 후대의 문인들은 있지도 않았던 선중팔책 등을 창작해 정착시킨 인물이기도 하다. [22] 단, 료마가 요시노부에게 대정봉환을 제시하고 이를 요시노부가 채택했다는 건 메이지 이후의 창작이라는 게 학계의 중론이다. 소위 말하는 선중팔책 등은 실제로 존재하지 않았고, 대정봉환의 내용도 료마의 오리지널이 아니며, 대정봉환의 베이스가 되었다는 대조리(大条理)에 료마가 관여되었다는 점도 어디까지나 증거 없는 가설의 영역에 불과하다. [23] 해당 사료는 키도의 서간문에서 밖에 발견할 수 없었던 6개 조문의 내용 일부도 포함하고 있어 사료적 가치가 높다.(마치다, 2019) [24] 이 연구에 따르면, 료마가 코마츠 저택에 도착한 21일엔 이미 협상은 끝나있었기 때문에 료마가 쵸슈와 사츠마 사이를 주선할 건덕지나 시간적 여유도 없었다는 사실을 논증하고 있다. 당시 두 집단 사이에서의 협상은 이미 마무리 단계에 있어 사츠마 측 제안처럼 구두 협약으로 마무리하느냐, 쵸슈 측 제안처럼 증빙 서류를 작성하느냐 하는 점만 남았었기 때문. 실제로 당시 료마가 도착했을 당시 그에게 주어진 시간은 딱 반나절 정도에 불과했는데, 여기에 대해선 료마가 신들린 협상력으로 반나절만에 두 집단의 갈등을 봉합하고 조약을 맺게 했다는 쪽보다 이미 완료된 협상의 부수적인 부분에 이름을 남겼다는 쪽이 현실적이라는 논증이다. 소위 말하는 료마가 보증한 직필문 또한 그 과정 중 하나라는 이야기. 여기서 말하는 코마츠-키도 각서, 다시 말해 삿쵸동맹 6개조문의 형성 과정과 성격 및 의의, 료마의 역할에 대해서도 해당 연구서 참조. [25] 후쿠오카번의 도막파(근왕양이) 번사그룹이었던 치쿠젠근왕당의 리더. 훗날 후쿠오카 번내의 정란에 휘말려 번주였던 나가히로에게 팽당하고 숙청당한다 (을사의 옥, 乙丑の獄, 1865). 정변의 성격 및 당시 나가히로가 내재한 자기모순적 모습 등에 대해서는 니시오 요타로(西尾陽太郞, 1967, 쿠로다 나가히로와 치쿠젠근왕파)의 연구를 참조. [26] 상기 유튜브 영상의 주장에 따르면 이 치쿠젠근왕당 멤버 중 한 명이 사카모토 료마. 다만 료마는 막부 말기 근왕파 인물들 중에서도 약간 겉도는 온건파(막부에 덜 공격적)였고, 애초에 치쿠젠 출신도 아닌 떠돌이 심부름꾼이었기에 정변을 살아남았다고 한다. [27] 후쿠오카 번과의 교류가 깊었던 사츠마번 소장파 번사그룹 카고시마 세이츄구미(精忠組)의 유력인사. 사츠마번 내 반대파 수장이자 국주였던 히사미츠에게 밉보여서 아마미 군도 오오시마 깡촌에 유배당한 상태였는데, 후쿠오카 번주였던 나가히로가 타카모리 정계 복귀에 도움을 준 은혜가 있었다고 한다. [28] 히사미츠 파벌의 수장이자 당대 사츠마 국주. 시마즈 가문의 족보상 나가히로 아래 서열이었고, 나가히로(와 그 친구들)에게 외교전에서 참패한 경험( 오유라 소동)도 있을 뿐더러, 집권 후에는 나리아키라의 공무합체 노선을 계승한 측면도 있어 마찬가지로 공무합체파였던 나가히로를 무시하지 못하는 상태였다. [29] 나가히로를 언급하는 일본 위키피디아 문서들과 해당 시기를 다루는 연구서 등에서도 나가히로가 가지고 있던 겁쟁이로써의 모습과 우유부단한 성품은 반복적으로 언급되고 있다. [30] 나가히로는 정계에 이름난 인물들이 차례로 죽어나가는 걸 목격하기도 했다( 이이 나오스케, 시마즈 나리아키라, 사이고 타카모리, 오오쿠보 토시미치 등). 심지어 탈번 낭인 신분이었던 료마조차도 유명세를 얻은 이후는 정적들을 피해 도망다니다가 암살당했다. [31] 나가히로가 집권하던 시절 사츠마와 쵸슈는 적대관계였기 때문에 서로를 향한 직통 외교라인이 없었다. 따라서 삿쵸 양번은 후쿠오카 쿠로다(시마즈 방계) - 쵸슈 킷카와(모리 방계) 가문 사이의 파트너쉽을 통해 간접적인 방식으로 소통했다. 막부 말기 삿쵸 관계에서 <후쿠오카-킷카와 완충망>이 수행한 역할에 관해서는 카지와라 요시카즈(1992), 쵸슈 출병을 둘러싼 정치 정황 -후쿠오카 번의 쵸슈 중재 활동을 중심으로- 등을 참조. [32] 마치다(2019)의 연구에 의하면 료마가 사츠마번의 에이전트로 포섭되어 큐슈로 들어갈 때도 킷카와 가문의 알선서를 써서 들어갔고, 사츠마번의 심부름꾼으로 쵸슈에 입국할 때도 킷카와 가문을 거쳐서 들어간 기록이 남아있다고 한다. [33] 근대사 관련 인물 중에서는 히지카타 토시조와 함께 일본인들 사이에서 가장 인기가 많은 인물이다. 이 사람들과 관련한 전시회가 열렸다하면 항상 인산인해를 이룰 정도다. [34] 하다못해 일본 극우들조차도 개무시하는 무타구치 렌야조차 야스쿠니 신사에 위패가 모셔져있다. [35] 해원대 대원이자 료마의 동지. [36] 선중팔책 관련 전승 중 료마에게 건의를 받았다는 당사자. [37] 마찬가지로 선중팔책 관련 전승 중 이를 받아적었다고 전해지는 인물. [38] 선중팔책과 연관된 일화에선 사전에 제기한 여덟 방책을 보다 현실에 맞도록 다듬은 결과물이라고 주장하지만, 선중팔책은 허구고 신정부강령팔책은 실물이 존재하는 점으로 미루어 보아 오히려 이 쪽이 선중팔책 일화의 뿌리가 되었을 가능성이 높다. [39] 마츠다이라 슌가쿠, 산죠 사네토미 등도 거론되는데, 통설로서 여전히 요시노부가 유력시된다고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