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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수정 시각 : 2024-03-18 15:07:04

사가의 난

佐賀の乱
메이지 7년 1874년 2월 1일~3월 1일

1. 개요2. 배경3. 관련 문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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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1874년 메이지 신정부에 불만을 가진 옛 사가 번(지금의 사가현 나가사키 주변 지역 포함. 고쿠다카 37만 석 이상의 유력 번이었다.)의 사족(士族)들이 정한당의 에토 신페이, 아사쿠라 나오타케, 우국당의 시마 요시타케를 지도자로 모시고 일으킨 반란이다. 결국 난은 진압되고 에토와 시마, 아사쿠라는 참수되었다.

2. 배경

사가 번은 나가사키와 가까운 지리적인 위치에서 서양기술을 먼저 받아들여 에도막부 말기( 막말)에는 가장 근대화된 군사력을 가지고 있었다. 에도 막부 명군인, 10대 번주 나베시마 나오마사의 통치 하에, 서양의 문명을 적극적으로 받아들여 제철소를 가지고 있어서 일본에서는 처음으로 근대식 화포를 만들었고, 당시 최신식 무기 암스트롱포도 제작하고 있었다.

이런 사실이 막부에 새어나가면 탄압받을 우려가 있어서, 사쓰마 번과 비슷하게 다른 번의 사람을 받아들이지도 않고, 번의 무사들이 다른 번들과 교류하는 것도 불가, 탈번하면 사형 등의 쇄국주의, 불간섭주의 방침이라 막부 타도 운동에는 적극적으로 참가하지 않았다. 하지만, 사쓰마 번과 조슈 번의 권유와 시대의 흐름으로 보신 전쟁의 우에노 전쟁에서부터 도막파로 참가했다. 그 근대적 무기는 위력을 발휘해 많은 전공을 세웠다. 그러나 결과적으로는 메이지 유신에 뒤늦게 참여한 걸로 되어[1], 신정부에서는 사쓰마, 조슈, 도사, 히젠(사가) 순으로 4번째 위치에 놓여서, 고관의 지위를 얻은 사람이 적었다. 이로 인해 번 내에서는 불만을 가진 사람들도 많았다.

그 가운데 평민 출신에서 참의(參議) 및 사법경(司法卿)[2]직에 오른 에토 신페이(江藤新平)는 이른바 메이지 6년 정변(정한론 정변)에서 오쿠보 도시미치와 대립하다 정치투쟁에서 지고 고향으로 낙향한다.

사가의 불만 세력은 두 부류로 갈렸다. 에토와 뜻을 함께하며 정변 이후 사가로 낙향한 아사쿠라 등은 정한론 정변에서 낙향하였으므로 정한론을 내세운 정한당을 형성했다. 반면 시마 등 우국당은 옛 봉건질서로의 회귀를 주장했다. 이들의 정치적 입장은 많은 부분에서 어긋났기 때문에 반란이 시작된 이후에도 서로 협조가 제대로 이루어지지 않았고, 반란이 빠르게 진압되는 큰 이유가 되었다.

3. 관련 문서


[1] 사쓰마, 조슈는 일찌감치 막부 타도 운동의 선봉장이었고 도사는 전쟁 발발 직전에 합류했다. [2] 우리나라로 치면 법무부장관 직. 1885년 내각제 수립 이후 사법대신(司法大臣)으로 개칭되었고, 현재 일본에서는 법무대신과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