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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정봉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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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도 막부 말기 주요 사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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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64년 8월 20일 금문의 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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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68년 1월 3일 왕정복고의 대호령
1868년 1월 27일 ~ 1869년 6월 27일 보신 전쟁 }}}}}}}}}

대정봉환
大政奉還
파일:대정봉환.jpg
니조 성에 모인 쇼군 도쿠가와 요시노부와 40의 대표
<colbgcolor=#000><colcolor=#fff> 발생일시 게이오 3년 10월 14일(1867년 11월 9일)
내용 요시노부의 국가 통치권 반납
천황의 칙허

1. 개요2. 전개
2.1. 공무합체(公武合体)와 대정봉환론의 대두2.2. 도사 번의 대정봉환 건의2.3. 대정봉환의 성립2.4. 토막파의 대응과 보신전쟁
3. 대정봉환의 내용4. 대정봉환의 국가 구상과 의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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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대정봉환(大政奉還)은 막말 게이오 3년 10월 14일(1867년 11월 9일)에 막부 제15대 쇼군 도쿠가와 요시노부가 국가 통치권을 메이지 천황에게 반납하고 이튿날 15일에 천황이 이를 칙허한 정치적 사건을 말한다.

도쿠가와 가문은 일본의 통치자로 군림했으나 막부 체제가 신하가 군주의 권한을 대신하여 집행하는 시스템이었기 때문에 명목상 쇼군은 천황의 신하였기에 막부가 정치의 대권을 천황으로부터 맡고 있다는 대정(大政) 위임론이 널리 인식되어 있었다.

에도 막부 말기가 되자 조정이 존황양이파의 등장으로 자립적인 정치 세력으로 급부상하고, 주로 대외 문제에서 일어난 막부와의 불일치로 인한 막부 권력의 정통성이 위협받는 가운데 막부는 조정에게 대정위임의 재확인을 요구, 1863년 3월, 1864년 4월에 각각 대정위임을 재확인받는다. 그러나 이는 개념으로만 있던 대정위임론이 실질화·제도화되는 것을 의미했고, 위임했을 뿐이라면 되돌려받을 수도 있는 것이라는 결론에 이르게 된다.

결국 게이오 3년(1867) 10월, 도막(倒幕)파의 강력한 압력으로 도쿠가와 요시노부는 대정봉환을 통하여 지금까지 협상으로 재확인된 '대정'을 조정에 반납하였다. 다만 실질적으로는 쇼군이 쇼군일 수 있게 만드는 장군직의 사임 문제가 더 중요했으므로, 번들이 재차 단결하여 압박하자 요시노부가 10월 24일 군사적 지위인 장군직 사퇴도 건의, 12월 9일 왕정복고가 최종적으로 선포되고 난 후 장군직 반납이 승인된 막부가 공식적으로 폐지되는 것으로 마무리된다.

대정봉환의 목적은 더이상 다이묘들을 일방적으로 지배할 수 없는 막부가 다이묘들에게 일정 정도 정치적 지분을 양보하는 대신 다이묘들까지 포괄하는 더 큰 정치체를 구성하여 안정성을 확보하고, 실질적으로는 단일 세력으로서는 가장 거대한 도쿠가와 종가가 그 정치체의 필두로서 통치력을 유지하는 것이었다.

한편, 대정봉환의 소식을 지구 건너편 파리에서 알게된 시부사와 에이이치 같은 막부측 인사들도 있었다.

2. 전개

2.1. 공무합체(公武合体)와 대정봉환론의 대두

공무합체(公武合体)란, 조정(公家 공가)과 막부로 대표되는 무가(武家)의 이원화된 정치구조를 하나로 합체하자는 이론이다. 미일수호통상조약에 따른 조정과 막부의 의견 차이를 좁히고, 극렬화 되는 충돌을 피하고자 제안되었다. 1850년에서부터 약 10년에 걸친 유신지사와 막부측의 광범위한 화두였다. 공무합체론(公武合体論), 공무합체운동(公武合体運動), 공무일화(公武一和) 등으로 불린다.

이 이론은 막부와 유신지사의 미묘한 관점 차이가 존재하였다. 막부로서는 사쓰마, 조슈로 대표되는 웅번들이 막부의 권위와 지금까지의 관례였던 대정위임론에 대해 공격하자, 이를 회피할 수 있는 길이 필요하였다. 특히 안세이 5년(1858), 조정의 밀칙이 막부를 거치지 않고 미토 번에 직접 하사된 것은 막부의 입장에서 심각한 일이었다. 뒤이어 조정이 막부에 의한 정치 개혁과 양이(미국)의 대처를 요구하는 사태에 이르자, 막부는 공무합체의 일환으로 대정 위임론의 재확인, 제도화를 조정에 요구하게 되었다. 궁극적으로는 "'부의 명령이 곧 조정의 명령'이라는 사실을 확답받아, 막부 권력의 재강화를 목표로 둔 것이다.

유신지사에게 공무합체는 예전부터 주장된 광의의 여론이었다. 오쿠보 도시미치 카츠 카이슈 등의 개화파가 가장 적극적으로 대정봉환의 핵심 개념들을 주장하였다. 그러나 당시 아직은 막강했던 막부가 공무합체를 막부측에 유리하게 추진하여 이들의 주장이 현실화되지는 못하였다.

한편, 에치젠 번주 마츠다이라 슌가쿠, 사쓰마 번주 시마즈 나리아키라, 시마즈 히사미츠 등은 조정과 막부의 연대와 더불어, 그동안 소외되었던 도자마 다이묘의 유력 번들도 힘을 합쳐 거국일체의 체제를 만들자고 주장했다. 쉽게 말하면 도자마 다이묘들의 중앙 정치의 참여였는데, 보수적인 막부 중심의 공무합체파와는 당연히 대립했고 이 운동은 좌절됐다.

이해하기 쉽게 정리하면, 공무합체의 성격은 존황론(尊王) + 좌막(佐幕) + 개국(開國).

2.2. 도사 번의 대정봉환 건의

유신지사의 입장에서 공무합체를 구상하던 사쓰마 번은 웅번들의 정치 참가제도였던 참예회의(参預会議)(1864년)가 붕괴하여 막부의 내각과 충돌하고, 또 정치의 주도권을 막부의 요시노부에게서 웅번들의 연합체가 빼앗을려고 꾀했던 사후회의(四侯会議)(1867년)도 도쿠가와 요시노부의 정치력으로 무력화됐기 때문에, 제후회의 노선을 포기한 조슈 번과 함께 막부를 무력 타도하려는 노선으로 돌아서고 있었다.

이런 상황에서 토사 번의 고토 쇼지로는 게이오 3년(1867년) 사카모토 료마로부터 대정봉환론을 듣고 감명을 받는다. 사카모토의 선중팔책에도 영향을 받은 그는, 토사 번 간부인 테라무라 미츠나리, 마나베 마사무네, 후쿠오카 다카치카 등에게 대정봉환론의 채용을 주장했다. 이에 사쓰마 번의 가로(家老) 고마쓰 키요카도 등도 동의하여 6월 22일 삿토 맹약(薩土盟約)이 체결되었다. 이는 막부가 조정에 대정봉환하고 권력을 일원화하는 동시에 새 조정에 의사당을 설치하고 국사를 결정하자는 것으로, 의사당의 의원은 공가에서 제후·대신·서민에 이르기까지 보통 선거로 뽑자는 것으로 알려졌다.

대정봉환론은 이른바 평화적으로 정체 변혁을 이루는 구상이었는데 사쓰마 번이 이에 동의한 것은 요시노부가 대정 봉환을 거부하는 것을 상정하고 이를 막부를 토벌함의 빌미로 삼는 것에 있었다고 한다. 그래서 맹약에는 토사 번 상경 출병, 정이대장군직의 폐지를 건의서에 명기하는 것이 약속되었다.

고토 쇼지로는 곧바로 귀번하여 토사 번병을 인솔할 예정이었지만, 토사의 대체적인 여론은 대정봉환에는 동의하나, 상경 출병에는 반대하고 정이대장군직 폐지 조항 또한 삭제하기를 바랬다. 결국 이러한 입장차이로 9월 7일 삿토맹약은 유명무실해진다.

10월 3일, 토사 번은 막말 4현후인 야마우치 요도가 고토 쇼지로, 사카모토 료마에 의견을 종합하여 토사 번 단독으로 대정봉환의 의견 상서를 작성하여 도쿠가와 요시노부에 제출하였다.

2.3. 대정봉환의 성립

요시노부는 토사 번의 야마우치 요도 번주가 제출한 견백서를 통해 건의를 받아, 10월 13일 교토 니조 성에 상경하여 있던 각 번의 대표인 40명의 중신을 소집하고 대정봉환을 자문했다. 이윽고 10월 14일(11월 9일)에 "대정봉환 상서"를 조정에 제출하고 상표의 수리를 강력히 촉구했다. 조정의 상층부는 이에 당황했으나 사쓰마 번 토사 번의 강한 압력이 작용하여 15일에 조의에서 칙허로 승인하였고, 요시노부가 대정봉환 칙허의 지시서를 하사받아 대정봉환이 이루어졌다.

대정봉환은 토막파의 기선을 제압하며 명목을 빼앗는 의도가 있었지만 상소에는 사쓰마 번 등의 최대 관심사인 장군직 사임에는 일절 언급하지 않아 요시노부는 막부의 우두머리로서의 지위를 잃지 않았다. 이에 격분한 사쓰마 번, 초슈 번이 대규모 군사 동원을 시작하자 비로소 10월 24일에 정이대장군 사직도 조정에 신청한다.

막부로서는 어차피 조정이 통치할 능력이 없기 때문에 형식적으로 정권을 반납하여도 여전히 조정이나 웅번을 압도하는 세력을 가진 도쿠가와 가문이 천황 아래의 새 정부에 참여하면 실질적으로 정권을 잡을 수 있다고 판단하였다. 그리고 조정에서는 좋든 싫든 통치할 능력이 없는 것이 사실이었으므로 위임했다던 권력을 반환받은 다음에도 국사 결정을 위한 제후 회의 소집 및 긴급 정무 처리를 다시 요시노부에게 위임하였다. 그리고 10월 23일, 외교에 대해서도 토막파의 조언으로 간신히 큰 맥점만 짚을 수 있던 조정이 결국 업무를 감당하지 못하고 외교문제까지 계속 막부가 중심이 되어 진행해도 좋다는 통지가 내려졌다.

이런 일이 계속되자 반환을 원했던 사쓰마, 초슈는 이들대로 뭐가 봉환된 것인지 알 수 없으니 분노가 확대되었고, 막부 측 번인 아이즈 번, 쿠와나 번, 키슈 번 등도 이들대로 어차피 이렇게 될 일을 사쓰마, 토사 번의 모략에 당해서 봉환한 것 아니냐는 반발이 확산되면서 대정봉환을 취소하라는 시위가 일어나게 된다.

2.4. 토막파의 대응과 보신전쟁

대정봉환이 천황에게 상주된 그날, 이와쿠라 도모미 천황의 이름을 빌려 사쓰마- 초슈 두 웅번에 밀서를 넣어 막부 타도를 명령하였다. 당시에는 이와쿠라 등의 토막(討幕)파가 조정 내의 주도권을 장악하지 못한 상태였고, 대정봉환이 이루어지더라도 향후 열릴 새 정부(공무합체 정부)는 요시노부가 주도할 것으로 예상되었다. 따라서 토막파는 우선 쿠데타로 조정 내의 좌막파 중심의 섭정 및 관백 기타 기존 직책을 폐지하고 체제를 쇄신하여 조정의 실권을 장악할 필요가 있었다.

밀서를 받은 토막파의 실행은 요시노부의 대정봉환이 신속히 조정에 받아들여진 것으로 일단 연기되었으나 사쓰마, 조슈, 게이슈(芸州)의 세 웅번은 다시 출병 계획을 짜고 토사 번 등을 포함하여 1868년 1월 3일 왕정복고의 대호령을 선포하였다. 제후회의를 주관하는 방식으로 권력을 놓지 않으려던 요시노부에게는 내대신 사직과 막부령 반납의 명령이 내려졌다. 요시노부는 일단 충돌을 피하기 위해 오사카성으로 옮겼지만 각국 공사들을 오사카성으로 불러 막부의 정당성을 주장했다. 한편으로 조정에는 칙령의 수위를 내대신 사직과 막부령 반납보다 좀더 낮추려고 여러 경로를 통해 교섭했다.

도쿠가와 요시노부는 결사항전을 주장하는 가신들을 진정시키며 다음 방책을 모색할 작정이고, 신정부측도 그러할 것인 점을 감안해야 한다고 보아 얼마간의 여유를 주어야 한다고 생각하였으나, 막부와 전쟁을 할 생각을 굳힌 사쓰마번이 에도 시내에서 도발을 감행하면서 과격파의 사쓰마 토벌론이 힘을 받아 마침내 쿠와나 번, 아이즈 번, 막부군, 신선조를 동원한 사쓰마 정벌이 선포되었다. 그러나 실질적인 목적은 교토를 봉쇄하여 신정부를 압박하고 정치적 우위를 되찾기 위한 공산이 컸다.

막부 출병의 소식을 들은 사쓰마- 초슈는 크게 동요하였으나 신정부는 이 전쟁을 사쓰마와 막부 간의 사전(私戰)으로 보아 토벌령 선포를 거부했고, 동원령을 각 번에 내리도록 했지만 사쓰마와 초슈 이외에는 토사번의 일부 병력만이 출병하여 병력면에서도 크게 열세였다. 막부는 프랑스식의 전습대를 비롯, 총동원 15,000명이 가능했지만 유신 웅번 측이 당장 동원할 수 있는 것은 고작 3,000명에 불과했다. 따라서 웅번 측은 비상시에는 천황을 데리고 교토에서 탈출할 계획까지 세워놓고 있었다.

두 세력의 긴장은 점차 높아지며 결국은 토바-후시미 전투로 대표되는 보신 전쟁이 발생하게 된다.

3. 대정봉환의 내용

臣慶喜謹而皇國時運之沿革ヲ考候ニ昔 王綱紐ヲ解キ相家權ヲ執リ保平之亂政權武門ニ移テヨリ祖宗ニ至リ更ニ 寵眷ヲ蒙リ二百餘年子孫相承臣其職ヲ奉スト雖モ政刑當ヲ失フコト不少今日之形勢ニ至候モ畢竟薄德之所致不堪慚懼候况ヤ當今外國之交際日ニ盛ナルニヨリ愈 朝權一途ニ出不申候而ハ綱紀難立候間從來之舊習ヲ改メ政權ヲ 朝廷ニ奉歸廣ク天下之公議ヲ盡シ 聖斷ヲ仰キ同心協力共ニ 皇國ヲ保護仕候得ハ必ス海外萬國ト可並立候臣慶喜國家ニ所盡是ニ不過ト奉存候乍去猶見込之儀モ有之候得ハ可申聞旨諸侯ヘ相達置候依之此段謹而奏聞仕候以上
陛下の臣たる慶喜が、謹んで皇国の時運の沿革を考えましたところ、かつて、朝廷の権力が衰え相家が政権を執り、保平の乱(保元の乱・平治の乱)で政権が武家に移りましてから、祖宗(徳川家康)に至って更なるご寵愛を賜り、二百年余りも子孫がそれを受け継いできたところでございます。そして私がその職を奉じて参りましたが、その政治の当を得ないことが少なくなく、今日の形勢に立ち至ってしまったのも、ひとえに私の不徳の致すところ、慙愧に堪えない次第であります。ましてや最近は、外国との交際が日々盛んとなり、朝廷に権力を一つとしなければもはや国の根本が成り立ちませんので、この際従来の旧習を改めて、政権を朝廷に返し奉り、広く天下の公議を尽くした上でご聖断を仰ぎ、皆心を一つにして協力して、共に皇国をお守りしていったならば、必ずや海外万国と並び立つことが出来ると存じ上げます。私が国家に貢献できることは、これに尽きるところではございますが、なお、今後についての意見があれば申し聞く旨、諸侯へは通達しております。以上、本件について謹んで奏上いたします。
폐하의 신하된 요시노부가 삼가 황국(皇國: 임금의 나라) 시운의 연혁을 고려한 바, 과거에 조정의 권력이 약해지자 재상 가문(相家: 섭정, 관백을 비롯한 여러 귀족들)이 집권했고, 보평의 난(호겐의 난과 헤이지의 난)으로 정권이 무가로 옮겨져, 조종(祖宗: 도쿠가와 이에야스)에 이르러서 더욱 더 총애를 받아, 2백여 년 후손이 그것을 이어왔습니다. 그리고 그 직을 받들어 왔는데, 정치의 부당함이 적지 않았고, 오늘날의 형세에 이르게 된 것도 전적으로 제 부덕의 소치이오니, 몹시 창피스럽기 그지없는 바입니다. 하물며 요즘은 외국과의 교제가 점점 활발해져, 권력을 조정에 하나로 모으지 않으면 나라의 근본이 성립되지 않을 것이니, 이제 종래의 구습을 고쳐 정권을 조정에 돌려드리오며, 널리 천하의 공의를 다해 성단(聖斷: 임금의 거룩한 결단)을 받들어, 모두 한마음으로 협력하여 함께 황국을 지켜나간다면 반드시 해외 만국과 어깨를 나란히 할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제가 국가에 공헌할 수 있는 것은 이것이 최선이긴 하오나, 아울러 향후에 관한 의견이 있다면 듣겠으니 진술하라고 제후에게는 통보해두었습니다. 이상, 본건에 대하여 삼가 아뢰옵나이다.

관용 일본어 특유의 문어체(소로분, 候文)에다 언급하는 내용 자체가 직설적으로 말할 내용은 아닌지라 매우 간접적으로 언급하고 있어 적당히 보면 내용을 이해하기 어렵다. 현실적으로 이전까지 천황의 권위는 0에 가까웠으며, 막부가 일본 정부의 역할을 해오고 있었는데 그걸 '그동안 천황이 허수아비였으나, 이제 상황이 이러니 권력을 돌려준다'고 대놓고 말할 수는 없기 때문.

4. 대정봉환의 국가 구상과 의의

대정봉환에 따른 공무합체파의 정부 구성은 영국식 의회제도가 적절히 가미되어 있었다. 동양 최초의 민주적 정부 구상이라고 생각될 수도 있으나, 한계는 명확했다. 도쿠가와 가문 중심의 체계임이 명확했기 때문이다.

서구권의 관제를 본떠 삼권분립이 형식적으로는 존재하였다. 행정권을 공부(公府)가 가져가고(잠정적으로 사법권을 겸임), 입법권을 각 번 다이묘 및 제후들에 속하는 사무라이로 구성된 의정원이 가져가도록 하고 있으며, 천황은 상징적 지위에 머물렀다. 공부(公府)의 원수는 ' 대군(大君)'으로 불리며 도쿠가와가 당주(즉 요시노부)가 취임하면서 상원 의장을 겸하며 하원 해산권을 가지는 것으로 알려졌다. 군사(軍事)에 대해서는 당분간 각 번의 사병을 인정하지만, 몇 년 후에는 중앙 정부에 통합하기로 결정했다.

또한 고토 쇼지로는 요시노부에게 장차 군현제를 시행하라는 구상을 전했다.

오늘날 대정봉환은 평화로운 정권이양이라는 측면에서 많은 주목을 받으나, 사실상 도쿠가와 요시노부 커다란 정치쇼라는 것이 당대 그리고 역사가들의 판단이다. 동양 최초의 민주적인 정부 구상이었으나, 그것은 각 번 세력의 판도에 따른 나눠먹기에 지나지 않았다. 대정봉환을 통하여 사쓰마 요시노부가 그냥 정치판에서 아예 배제되기를 바라고 있었다. 물론 속셈을 모를 리 없던 요시노부는 그 안건은 슬쩍 빼고 대정만 천황에게 반환하였고, 이러한 사쿠라는 유신지사들의 야마가 돌게 만들었다. 어쩌면 무력적인 충돌은 당연했을지도 모른다.

정부가 하나였던 서구권에서는 이러한 상황을 신기하게 보고 있었다고 알려진다. 즉, 대정봉환은 조정과 막부라는 이원 정부의 한계점이 당대의 혼란에 휩싸이면서 표출된 것이다. 잠시 그 폭발을 늦춰보려는 도쿠가와 요시노부의 발버둥이 있었으나 종국에는 실패에 다다른다.

사카모토 료마가 대정봉환을 적극적으로 구상한 것으로 유명하나, 실상 그가 처음으로 고안한 것은 아니고 오쿠보 도시미치 카츠 카이슈 등의 공무합체 핵심 이론들을 적절히 끌어모아 정리한 것에 지나지 않는다. 그럼에도 그가 이 일련의 정치적인 사건에서 높은 중요도를 차지하는 이유는, 사쓰마 초슈 혹은 토사 극단파와는 다르게, 일단 도쿠가와 요시노부 중심의 공무합체 신 정부를 구상하고 이를 통해 향후 일본의 거취를 생각해보고자 하는 자세가 있었기 때문이다. 사카모토 료마는 흔히 알려진 바대로 일본 내부의 정치적인 투쟁을 극도록 혐오했으며 일본이 진정한 '하나의 일본'이 되기를 원했다. 료마의 바람대로 대정봉환을 통한 공무합체는 이루어졌지만, 결국 보신 전쟁이 벌어졌다는 점에서 료마는 아쉬워했을 것이다. 그러나 그는 대정봉환이 일어나고 1달 뒤에 오미야 사건으로 인하여 암살당했으니, 그의 꿈이 깨어지지 않았을 때 세상을 떠난 셈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