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국 파시스트 연합 초대 당수 오스왈드 모슬리 Sir Oswald Mosley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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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lcolor=#fff><colbgcolor=#00247D> 본명 |
오스왈드 어널드 모슬리 경, 제6대 안코츠 준남작 Sir Oswald Ernald Mosley, 6th Baronet of Ancoats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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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생 | 1896년 11월 16일 | ||
영국 잉글랜드 런던 웨스트민스터 마이페어 | |||
사망 | 1980년 12월 3일 (향년 84세) | ||
프랑스 에론 오르세 | |||
국적 | 영국 | ||
직업 | 정치인, 사회운동가 | ||
재임 기간 | 랭커스터 공국 대신 | ||
1929년 6월 7일 - 1930년 5월 19일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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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lcolor=#fff><colbgcolor=#00247D> 부모님 |
부 5대 안코츠 준남작 오스왈드 모슬리 경[1] 모 캐서린 모드 에드워드 히스코트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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배우자 |
신시아 블란체 모슬리 (1920 - 1933,
사별)[2] 다이애나 밋포드 (1936 - 1980)[3]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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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녀 |
슬하 4남 1녀 장녀 비비안 모슬리 (1921 - 2002) 장남 니콜라스 모슬리 (1923 - 2017)[4] 차남 마이클 모슬리(1932 - 2012) 삼남 알렉산더 모슬리 (1938 - 2005) 사남 맥스 모슬리 (1940 - 2021)[5]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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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력 |
윈체스터 칼리지[6] (졸업) 샌드허스트 왕립 사관학교 (퇴학)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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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교 | 개신교 ( 잉글랜드 성공회) | ||
최종 당적 |
[[무소속(정치)| 무소속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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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원 선수 | 4[7] | ||
의원 대수 | 31, 32, 33, 34 | ||
지역구 |
해로 (31, 32, 33) 스메스윅 (33, 34)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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약력 |
영국 서민원 의원 (4선) 랭커스터 영지담당부 장관[8] 신당 당수 영국 파시스트 연합 당수 연합 운동 당수 유럽 국민당[9] 당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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군 복무 이력 | |||
복무 | 국왕 폐하의 군대 | ||
1914년 - 1918년 | |||
최종 계급 | 중위 (Lieutenant) | ||
참전 전쟁 | 제1차 세계 대전 | ||
훈장 |
1914–15 Star British War Medal Victory Medal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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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사진 중앙의 인물.
'A fight between several parties of the British people: Nothing of the kind! A fight between two or three big money combines, that and nothing else. Without the weight of money behind the party machines, in an electoral battle today determined purely by principle and by the number of active workers...British Union could fight and beat today the old parties over the whole electoral field. But you know and I know, the battle is nothing of the kind. The battle is between big money combines who spend a thousand pounds or more on every constituency they fight. Or when they speak democracy, they don't mean government by the people...they mean financial democracy, in which money counts and nothing but money.'
영국 사람들을 위한 수많은 당간의 싸움, 이건 그런 게 아닙니다! 돈 많은 둘셋의 연합간의 싸움, 그것뿐 아무것도 아닙니다. 오늘의 선거 대결은 규칙에 따라, 그리고 활동적인 노동자들의 수에 따라 결정된 것입니다... 영국 파시스트 연합은 옛 당들을 지역구에서 이길 수 있지만, 당신들도 알고 저도 압니다. 이 싸움은 우리가 알고 있던 그런 것이 아니라고. 이 대결은 큰 부자들과의 싸움입니다. 모든 지역구 선거에서 천 파운드 이상을 쓰는 사람들. 그들이 민주주의를 이야기할 때, 그들은 사람들에 의한 정부를 이야기하는 것이 아닙니다... 그들은 경제적인 민주주의를 이야기합니다. 돈만이 수단이 되고 돈 말고는 아무것도 없는.
1939년 7월 하원 연설.[10][11]
영국의 정치인.
영국 파시스트 연합 창립자이자 당수였다. 한국에서의 낮은 인지도와 상반되게 영국에서는 오늘날에도 모르는 사람이 없을만큼 유명한 정치지도자로, 진영에 따라 평가가 극에서 극에 달하는 인물이다. 영국
극우에게는 대부 격 인사로 평가되나[12], 그 외에는 영국 현대사 최악의 악인으로 자주 꼽히곤 한다.[13]영국 사람들을 위한 수많은 당간의 싸움, 이건 그런 게 아닙니다! 돈 많은 둘셋의 연합간의 싸움, 그것뿐 아무것도 아닙니다. 오늘의 선거 대결은 규칙에 따라, 그리고 활동적인 노동자들의 수에 따라 결정된 것입니다... 영국 파시스트 연합은 옛 당들을 지역구에서 이길 수 있지만, 당신들도 알고 저도 압니다. 이 싸움은 우리가 알고 있던 그런 것이 아니라고. 이 대결은 큰 부자들과의 싸움입니다. 모든 지역구 선거에서 천 파운드 이상을 쓰는 사람들. 그들이 민주주의를 이야기할 때, 그들은 사람들에 의한 정부를 이야기하는 것이 아닙니다... 그들은 경제적인 민주주의를 이야기합니다. 돈만이 수단이 되고 돈 말고는 아무것도 없는.
1939년 7월 하원 연설.[10][11]
2. 생애
여기서는 '제X대 안코츠 준남작' 식의 표현이 자주 사용되므로, 가독성과 구분을 위해 '제X대 준남작'으로 서술한다. |
2.1. 군 입대, 그리고 그 후
영국육군사관학교에 진학하지만, 동급생에 대한 과도한 사적복수를 계기로 퇴학당하고, 그 후 제1차 세계 대전에 참전. 왕립 제16 창기병부대에 징집되어 프랑스 부근 서부전선에서 싸우게 된다. 그러다가 비행단으로 옮겨가는데, 어머니와 여동생 앞에서 무슨 일을 하는지 보여주다가 추락하여 평생동안 절게 된다. 루스 전투 때 회복하지만 이후 사무직을 맡는다.1920년 5월 11일 신시아 커존과 결혼하지만, 그 과정에서 보수당에서의 지위 상승 및 그녀의 사회적 지위를 노렸다고 생각한 그녀의 아버지를 설득한다. 결혼식은 거대한 사회적 이벤트였으며, 하객 중에는 조지 5세와 그의 부인인 테크의 메리도 있었다.
그 후 인도 여행을 다녀왔고, 와중에 모한다스 카람찬드 간디를 만나기도 했다. 그러나 신시아가 1933년 병사하고 다이애나 밋포드와 재혼했다. 그녀와의 결혼식은 괴벨스의 저택에서 열렸으며 나치당 당수 아돌프 히틀러와 파울 요제프 괴벨스가 하객으로 참석했다.
2.2. 정치 활동
1918년 보수당에 입당, 정치 경력을 쌓기 시작한다. 1918년 서민원 의원 선거에서 해로우 지역구에 출마했는데 큰 경쟁자가 없었기에 쉽게 당선된다. 자유주의 신문인 웨스트민스터 가제트가 이 시기의 모슬리에게the most polished literary speaker in the Commons, words flow from him in graceful epigrammatic phrases that have a sting in them for the government and the Conservatives. To listen to him is an education in the English language, also in the art of delicate but deadly repartee. He has human sympathies, courage and brains.
서민원에서 가장 문학적으로 다듬어진 연설가. 경구적이고 보수당과 정부에 대한 언중유골적인 표현들이 말의 흐름에서 나온다. 그의 말을 듣는 것은 영어라는 언어의 교육이며 우아하지만 치명적인 재치. 인간적인 공감과 용기, 천재성을 보인다.
라는 평가를 내릴 정도로 말재주가 좋았다. 후에 보수당을 탈당하고
노동당으로 당적을 옮겼으며, 노동당에서도 당 내에서 급진파에 속하던
독립노동당에서도 활동한다.서민원에서 가장 문학적으로 다듬어진 연설가. 경구적이고 보수당과 정부에 대한 언중유골적인 표현들이 말의 흐름에서 나온다. 그의 말을 듣는 것은 영어라는 언어의 교육이며 우아하지만 치명적인 재치. 인간적인 공감과 용기, 천재성을 보인다.
노동당 당원으로서 모슬리는 재선에 성공하고 제2차 램지 맥도널드 노동당 내각에 입각해서 랭커스터 공국상이 된다. 하지만 노동당의 미진한 사회개혁 방침과 의견을 달리하여 탈당했고 신당(The New Party)을 창당하지만 총선에서 참패한다. 이 무렵은 대공황으로 영국 사회가 큰 위기에 빠지고 유럽 각국에서 파시즘 세력이 성장하던 시기로서, 그는 급격히 파시스트 성향으로 기울었으며 1932년 10월 1일 지지자들을 규합하여 영국 파시스트 연합을 창당한다. 영국 파시스트 연합은 좌익도 우익도 아닌 제3의 위치를 표방했으나 현실 정치에서는 극우의 역할을 했다. 좌익과 노동조합을 물리적으로 공격했으며, 당원들은 유대인을 물리적으로 공격하는 짓도 피하지 않았다. 모슬리와 BUF는 반유대주의에 있어서 독일 나치즘의 영향을 받아 시간이 지날수록 더 노골적인 반유대주의 색채를 보였으며[14], 당시 영국 유대인대표위원회(The Board of Deputies of British Jews)에서도 영국 파시스트 연합이 반유대주의 입장을 가지고 있다고 지적하였다.[15] #
To our members my message is plain and clear. Our country is involved in war. Therefore I ask you to do nothing to injure our country, or to help any other power. Our members should do what the law requires of them, and if they are members of any of the forces or services of the Crown, they should obey their orders, and, in particular, obey the rules of their service. . . . We have said a hundred times that if the life of Britain were threatened we would fight again.
당원들에게 나의 메시지를 간결하지만 분명하게 전달한다. 조국이 전쟁에 직면했다. 그러므로 나는 여러분에게 조국에 해를 입힐 어떠한 행동이나, 다른 나라를 돕는 행위를 하지 말기를 요청한다. 우리 당원들은 법의 요구에 따라야 한다. 우리 당원 중 군에 복무 중이거나, 국왕 폐하를 섬기는 사람이 있다면, 명령에 복종하라. 특히 복무의 규율을 따르라. ···(중략)··· 수백 번도 넘게 영국의 생명이 위협받는 일이 온다면, 우리는 맞서 싸울 것이라고 말해왔다.
1940년
5월 9일, 영국 파시스트 연합은 독일에 맞선 전쟁에 참전하겠다고 선언했으며 오스왈드 모슬리 본인은
홈가드에 지원하여 훈련 받을 것을 고려했으나
윈스턴 처칠 정부는 모슬리를 믿지 못하고 그를 지지자들과 함께 체포했다. 모슬리는
뮌헨에서
히틀러를 만난
네빌 체임벌린을 체포하라고 항의하면서 자신이
루스벨트와 낚시 여행을 간 적이 있으니
미국과 전쟁이 발발하면 그 때도 잡아넣을 것이냐며 정부를 조롱했다. 그러나 공무 상 이유로
히틀러를 만난 것과 사적인 결혼식에 외국의 파시스트를 초청하여 우의의 자리로 활용한 것을 동일선상에 있는 일이라고 할 수는 없었다.당원들에게 나의 메시지를 간결하지만 분명하게 전달한다. 조국이 전쟁에 직면했다. 그러므로 나는 여러분에게 조국에 해를 입힐 어떠한 행동이나, 다른 나라를 돕는 행위를 하지 말기를 요청한다. 우리 당원들은 법의 요구에 따라야 한다. 우리 당원 중 군에 복무 중이거나, 국왕 폐하를 섬기는 사람이 있다면, 명령에 복종하라. 특히 복무의 규율을 따르라. ···(중략)··· 수백 번도 넘게 영국의 생명이 위협받는 일이 온다면, 우리는 맞서 싸울 것이라고 말해왔다.
영국 정부는 모슬리가 "똑똑해서" 반란을 일으키지 않을 것이라 생각했지만, 그 "똑똑함"에는 어차피 영국 파시스트 연합의 당세가 만에 하나 반란을 일으키려 해도 일으킬 수 없는 상황임을 모르지 않을만큼 모슬리가 상황 판단력이 있다는 의미도 포함되어 있었다. 영국 상하원 여러 의원이 그가 반역자가 아니라 대독 화평정책을 주장해왔기 때문에 투옥되었다고 인정했으나, 바로 그 대독 화평정책을 주장해왔다는 점이 그가 가지고 있는 문제의 핵심 중 하나였다.
수감 중 같은 감옥에 수감된 흑인 수인과 사이 좋게 지냈다고 한다. 물론 전쟁 후 흑인을 비롯한 소수 인종에 대한 그의 태도는 이민 문제와 관련하여 변하게 된다.
전쟁에서 나치 독일이 승기를 잃은 1943년 석방되어 가택연금에 처해졌으며, 1945년 종전 직후 가택연금에서 풀려나 자유인이 되었다. 오스왈드 모슬리는 정치 활동을 다시 시작하여 1948년에 옛 당원 및 지지자들과 파시즘 정당인 연합운동(Union Movement)을 창당했으나 전간기만큼 영향력을 회복하는데 실패한다. 모슬리는 전후(戰後) 창당한 연합운동의 이념에 반유대주의뿐만 아니라 새로이 반(反) 이민 인종차별주의를 포함시켰는데, 이는 특별히 제2차 세계 대전 후에 본격화된 흑인, 인도인, 파키스탄인 등 비(非) 유럽권 이민자를 표적으로 삼은 것이었다. 또한 전쟁 직후 비난 여론과 영국으로 피신한 유대인 난민의 강한 항의에도 불구하고, 오스왈드 모슬리의 연합운동은 반유대주의 선동을 포기하지 않았다. 특히 1962년 7월 31일에는 당원과 지지자들을 끌어 모아 다시 한 번 런던 동부 케이블가(街)에서 반유대주의 시위를 시도했지만 #, 시작한 지 10분도 안 되어 영국 경찰에 의해 해산되어 실패한다.
모슬리는 동부 런던 케이블 거리에서의 반유대주의 시위가 실패로 돌아간 그 해에 프랑스 파리로 이주했지만 1973년까지 연합운동의 당원으로 남았다. 파리에서 새롭게 유럽민족당(National Party of Europe)이라는 서유럽의 극우 정당 간 국제조직을 만들어 각국 극우 정당들 간의 교류를 꾀했는데, 이 생애 말년에 장 마리 르펜과 그의 국민전선과도 만남을 가졌다. 모슬리의 연합운동은 성공하지 못했지만 영국 극우파의 대부 격 인물로 그들 사이에서 적잖은 존경을 받았다.
2.3. 죽음
오스왈드 모슬리는 말년에 파킨슨병을 앓다가 1980년 12월 3일 프랑스 파리 교외 오르세에서 사망했다.3. 현대 정치에 준 영향
오스왈드 모슬리와 영국 파시스트 연합은 현재 영국 극우 세력의 모태로 인정된다. 영국 파시스트 연합은 전쟁 초반 영국 정부에 의해 해산되었고 종전 후 모슬리가 창당한 네오파시즘 정당[16]도 큰 영향을 미치지 못하다가 와해되었지만, 그 사상이나 인적구성에 있어서 뒤에 등장한 영국 극우 정당에 깊은 영향을 미쳤다. 특히 1967년 창당된 국민전선 (National Front)은 연합운동과 경쟁 관계에 있었지만, A. K. 체스터턴 등 옛 영국 파시스트 연합 당원이 간부진에 상당수 포진해있었고, 당의 이념에 있어서 모슬리와 그의 정당의 영향을 받았다.국민전선(National Front)은 1970년대 초 경제위기를 계기로 크게 성장하여 1974년 2월과 10월 총선에서 100명이 넘는 후보를 내고 검은 셔츠단을 흉내낸 의장대를 조직해 흑인, 인도인, 파키스탄인 등 소수 인종, 좌익, 노동조합을 물리적으로 공격하면서 영국 사회에 위세(?)를 떨쳤다. 특히 1976년에는 런던 동부에 루이셤 구 이민자 거주지에서 인도인, 파키스탄인, 흑인 및 좌익 세력과 대규모 충돌을 벌였지만 1936년, 1962년과 마찬가지로 원래 신고한 행진 경로를 완주하는데 실패한다.
국민전선은 영국 파시스트 연합처럼 거리 시위 운동에 있어 반대편에 거듭 밀리자 당세가 정체되더니 결국 약화되기 시작했고, 결국 마가렛 대처 집권 중인 1983년 분열하여 극우세력의 주도권을 영국국민당(British National Party)에 넘겨준다.[17]
최근에는 뉴질랜드 이슬람 사원 테러의 극우 성향 범인이 선언문에서 '자신과 가장 가까운 믿음을 가진 사람'으로 언급 했다.
4. 소속 정당
<rowcolor=#fff> 소속 | 기간 | 비고 |
|
1918 - 1922 | 정계 입문 |
[[무소속(정치)| 무소속 ]]
|
1922 - 1924 | 노선 차이로 탈당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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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24 - 1931 | 입당 |
신당
|
1931 - 1932 | 창당 |
|
1932 - 1940 | 합당 |
[[무소속(정치)| 무소속 ]]
|
1940 - 1948 | 정당 강제 해산 |
연합 운동
|
1948 - 1973 | 창당 |
[[무소속(정치)| 무소속 ]]
|
1973 - 1980 |
정당 해산 정계 은퇴 |
5. 선거 이력
<rowcolor=#fff> 연도 | 선거 | 선거구 | 정당 | 득표수 (득표율) | 당선 여부 | 비고 |
1918 | 제31회 영국 총선 | 해로 |
|
13,959표 (82.3%) | 당선(1위) | 초선 |
1922 | 제32회 영국 총선 |
[[무소속(정치)| 무소속 ]]
|
15,290표 (66.0%) | 당선(1위) | 재선 | |
1924 | 제33회 영국 총선 | 14,079표 (59.9%) | 당선(1위) | 3선 | ||
1926 | 1926년 영국 재보궐 선거 | 스메스윅 |
|
16,077표 (57.1%) | 당선(1위) | 3선 |
1929 | 제34회 영국 총선 | 19,550표 (54.8%) | 당선(1위) | 4선 | ||
1931 | 제35회 영국 총선 | 스토크 |
신당
|
10,534표 (24.1%) | 낙선(3위) | |
1959 | 제42회 영국 총선 | 켄싱턴 노스 |
연합 운동
|
2,821표 (8.1%) | 낙선(4위) | |
1966 | 제44회 영국 총선 | 쇼디치&핀스버리 | 1,126표 (4.6%) | 낙선(3위) |
6. 대중매체에서
BBC 드라마 피키 블라인더스 시즌 5에서 등장한다. 영국 정부를 파시스트 '혁명'으로 전복할 생각 중이며 도중에 주인공 토마스 쉘비와 조우하면서 일을 추진한다. 일단 동업 중이지만 서로 믿지는 않는 불편한 동맹 관계이다. 쉘비는 파시즘이 영국에 어떤 결과를 초래할지 예측하고 윈스턴 처칠과 공모하며 모슬리를 암살하려 하지만 고용한 암살자가 방아쇠를 당기기 전에 누군가에게 먼저 뒷치기를 당하여 암살은 실패한다. 하지만 모슬리는 암살 음모 자체를 모르는 듯하며 쉘비는 자기보다 더 큰 배후의 존재를 알면서 시즌 5가 끝난다.[18]전략 시뮬레이션 게임인 하츠 오브 아이언 4에서 영국을 파시스트 국가로 바꾸면 국가원수가 될 수 있다.[19] 아니면 에드워드 8세 루트를 타면 중간에 신문 기사로 에드워드와 월리스 심프슨의 결혼을 지지한다고 발표하고 에드워드 8세가 국가원수로 등극하면 같이 왕의 결혼을 지지해준 데이비드 로이드 조지, 윈스턴 처칠과 함께 정치 고문으로 고용할수 있다.
위의 게임의 모드인 카이저라이히에서는 잠깐동안 노동당 당원으로 있으면서 개량주의적인 램지 맥도널드 수상을 비판했던 탓인지 극좌 포지션으로 등장한다. 1925년 영국이 혁명의 불길로 물들자 왕당파가 다수였던 버밍엄을 연설로 친 혁명파로 만들어놓으며 내전에 결정적인 공헌을 한 뒤 의회가 해체된 직후에 TUC에서 최대주의자 파벌을 만들고 당수로서 활동한다. 카이저라이히 세계관에서는 생디칼리슴이 사회주의의 대세가 되어있지만 모슬리는 국가가 노동조합을 지배하고 주요 산업을 국유화하며 지도자 개인의 역할을 강조하는 등 생디칼리슴보다 더 급진적, 중앙집권적, 권위적인 고유의 사상, 전체주의(Totalism)를 창설하고 자신이 집권할 경우 이 사상을 바탕으로 영국을 개조한다.[20] 그와 함께하는 최대주의자 파벌에는 아이러니하게도 실제 역사에서 파시스트였던 신시아 모슬리[21], 윌리엄 조이스, 에즈라 파운드 등과 실제 역사에서 공산당이나 독립노동당 소속이었던 에릭 블레어, 킴 필비, 필 피라틴[22] 등이 한살림을 차리고 있다. 모슬리가 집권해서 TUC를 해체하고 스스로를 대호국경으로 지칭하며 이에 항의하는 시위대에 발포하는 등 막장 독재자로 나가기 시작하면 모슬리를 제끼고 에릭 블레어를 위시로 하는 최대주의자 내 반 모슬리 파벌이 집권하거나 블레어가 아예 모슬리를 암살해버리고 최대주의자 파벌을 해체해버리기도 한다.[23]
대중매체는 아니지만 영국 BBC에서 실시한 "최악의 영국인" 투표에서 10위에 랭크되는 불명예를 안게된 바 있다.[24]
제2차 세계 대전에서 영국이 패배하고 나치에 점령된 상황을 다룬 페이크 다큐멘터리 드라마 It Happened Here에서 잠깐 등장하는데 당연하겠지만 좋은 이미지로는 안 나온다. 제작 당시 있었던 동부 런던 케이블 거리 폭동 시도 사건을 의식한 듯한 모습으로 등장한다.
엘비스 코스텔로의 데뷔 싱글 'Less than Zero'는 오스왈드 모슬리를 비판하는 곡이다.
히틀러가 되었다에서는 독일과의 화평을 주장한 탓에 구금되었지만 전쟁 중 혼란을 틈타 지지자들의 도움을 받아 탈출했고 히틀러와의 접선에 성공한다. 이후 클라리지스 호텔에서 친독 방송을 하다가 아서 해리스의 톨보이 폭격 도중 충격파로 인한 파편에 관자놀이를 맞지만 무사히 살아남는다. 그리고 파시스트 영국의 총리가 된다.
조선, 혁명의 시대에서는 원래 역사대로 자기 장모랑 은밀한 관계라서 장인어른 커즌[25]의 외교적 비밀활동을 몰래 알고 있어서 정국을 흔들고 파시즘의 발흥을 위해 에드워드 8세의 성희롱 사실[26]을 데일리 메일에 전해준다.
7. 참고
[1]
14대 스트라스모어-킹혼 백작과는 사촌 지간인데, 이 사람의 딸이 바로
엘리자베스 보우스라이언(!)
[2]
결혼 전 성은 커즌.
커즌 라인의 창안자인 조지 커즌 후작의 둘째딸이다.
[3]
참고로
괴벨스의 집에서 결혼식을 올렸다.
[4]
3대 레븐스데일 남작 겸 7대 안코츠 준남작으로, 레븐스데일 남작위는 큰이모에게 상속받았다. 외할아버지 조지 커즌 후작은 아들을 두지 못해 후작위가 단절됐고, 대신 레븐스데일 남작위만 맏딸에게 물려줄 수 있었다. 아버지 사후 매우 비판적인 관점의 오스왈드 모슬리 전기를 냈다.
[5]
유명 레이싱 선수로
국제 자동차 연맹의 회장까지 지냈다. 2008년 회장 재임 중 섹스 스캔들을 일으켜 논란이 된적 있다.
2021년 자살로 생을 마감했다.
[6]
보딩스쿨이며, 영국의 대표적인 사립중고등학교 중 하나이다.
[7]
33회 서민원 의원을 지내던 도중 의원직을 사퇴하고 재보궐에 출마해 당선되었기 때문에 실질적으로는 5선이다.
[8]
한국으로 치면 국무조정실장정도 되는 위치다.
[9]
중도우파 정당인
유럽 인민당과는 다르다. 이쪽은 National Party of Europe. 신파시즘 성향 정당들이 모인 정당으로 지금은 해산 상태다.
[10]
그러나 정작 영국 파시스트 연합의 선거 실적은 부진을 면치 못하였으며, 해산당하기 1년여 전인 이 시기에는 당세도 약해지고 있는 상황이었다.
[11]
현실 정치에서 극우의 역할을 맡지만, 미사여구는 '좌익'적이라고 착각할 수 있을 정도로 기득권 반대를 천명하는 것은 파시즘 정당 정치인의 전형적 모습이다. 프랑스 국민전선의
마린 르펜이 긴축 반대를 천명했던 것이 그 예이다.
[12]
대표적으로 2015년 조직된 영국 네오 나치 조직 "국민 행동"의 활동가 잭 렌쇼(Jack Renshaw, 전
영국 국민당 청년조직 대표)는 "우리는 제2의 모슬리가 필요하다"라고 발언하기도 했다.
[13]
2005년 BBC의 여론조사에서 최악의 영국인 10위로 꼽혔을 정도이다.
[14]
Richard Thurlow. Fascism in Britain: A History, 1918-1945. Revised paperback edition. I. B. Taurus & Co. Ltd., 2006. Pp. 28.
[15]
John D. Brewer. Mosley's Men: The British Union of Fascists in the West Midlands. Ashgate Publishing Limited; First Edition., 1984. Pp. 104.
[16]
1973년 해산
[17]
영국 국민전선은 지금도 있지만 당원 1,000여 명이 안 되는 군소정당에 불과하다. 물론 지금도 끊임 없이 거리 시위를 벌이는 등 분탕을 치고 있다.
[18]
시즌 6에서 모슬리 암살 계획 실패의 배후가 IRA였다는게 밝혀졌다.
[19]
싱글플레이에선 제국연방 루트가 성능이 좋아 영국에 파시스트 내전을 발생시키고 영연방 자치령들을 모두 흡수한다. 그러나 내전이 꼭 필수인 것은 아니며, 내전을 막고 진행할 수도 있다.
[20]
모슬리 자신은 이를 혁명이라고 주장한다.
[21]
상술된 바와 같이 오스왈드의 첫 부인. 현실에서 남편과 정치적 행보를 같이 했던 점이 반영된 것으로 보인다.
[22]
케이블가 전투에서
안티파들을 지휘했던 공산당 활동가
[23]
자신이 지지했던 모슬리에 의해
디스토피아가 도래한 것을 보고 슬픔이 빠진 블레어가
자살하는 경우도 있다.
[24]
다만 이는 현직 정치인이 제외된 투표 결과다. 영국의 Channel 4에서 현직 정치인까지 포함해 발표한 결과에서 모슬리는 25위 안에도 못들었다. 참고로 이 조사에서 1위는 당시 총리였던
토니 블레어. 3위는
마거릿 대처 전 총리. 이 외에도
알렉스 퍼거슨,
고든 램지,
찰스 3세,
리암 갤러거,
엘튼 존,
제레미 클락슨 등 (
폴 매카트니 같이 안티가 거의 없는 사람들을 빼면) 사실상 유명인들이 전부 다 리스트에 다 들어갔기 때문에 진지한 조사라고 보긴 어렵다.
[25]
정작 커즌은 아내만 믿기 때문에 아내가 사위에게 누설하는지는 꿈에도 모른다.
[26]
에드워드 8세도 친파쇼 성향이지만 성희롱 사실을 폭로해서 영국국민들에게 동정의 대상이 되게하고 에드워드 7세가 성희롱 할당시 정권을 잡은 자유당을 격하하려는 음모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