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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리 안드로포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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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비에트 연방 공산당 중앙위원회 제4대 서기장
소비에트 연방 제8대 최고회의 상무회 주석
유리 안드로포프
Ю́рий Андро́пов | Yuri Andropov
파일:0e6b7dbe2a6e5497fc652969dc876220-1000.jpg
본명 유리 블라디미로비치 안드로포프
Ю́рий Влади́мирович Андро́пов
Yuri Vladimirovich Andropov
출생 1914년 6월 15일
러시아 제국 스타브로폴현 알렉산드롭스크군 나구츠카야역[1]
(現 러시아 북캅카스 연방관구 스타브로폴 지방 안드로포프군 솔루노드미트리옙스코예 나구츠카야역)
사망 1984년 2월 9일 (향년 69세)
소련 러시아 SFSR 모스크바 연방시
(現 러시아 모스크바 연방시)
묘소 크렘린 벽 묘지
재임기간 제4대 서기장
1982년 11월 12일 ~ 1984년 2월 9일
제8대 최고회의 상무회 주석
1983년 6월 16일 ~ 1984년 2월 9일
서명 파일:유리 안드로포프 서명.sv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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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lbgcolor=#cd0000><colcolor=#ffe400,#ffe300> 부모 아버지 블라디미르 콘스탄티노비치 안드로포프
어머니 예브게니야 다비도브나 플레켄시테인
배우자 타티아나 안드로포바
자녀 이고리 안드로포프, 이리나 안드로포바
학력 리빈스크 기술대학 ( 학사)
페트로자보츠크 주립대학 (역사학 / 학사)
페트로자보츠크 주립대학 (언어학 / 학사)
종교 정교회 ( 러시아 정교회) 무종교 ( 무신론)[2]
소속 정당
[[소련 공산당|]]
복무 국가보안위원회
1967년 ~ 1982년
최종 계급 대장 (국가보안위원회)
주요 서훈 사회주의노력영웅
레닌훈장 (4회)
10월 혁명 훈장
적기훈장 (2회)
노력적기훈장 (3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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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2. 생애
2.1. 서기장 취임 전2.2. 서기장 취임 후
3. 여담
3.1. 듣보잡?3.2. 기타
4. 둘러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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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파일:5d04be3b15e9f97843164064.jpg
친애하는 서맨사 양, 편지 잘 받았습니다.

편지를 보니, 서맨사 양은 정직하고 용기가 넘치는 게, 톰 소여의 친구 베키를 꼭 닮은 듯합니다. 서맨사 양의 동포 마크 트웨인이 쓴 유명한 소설에 나오죠. 우리 나라의 아이들도 백이면 백 톰 소여의 모험을 알고 또 즐겨 읽는답니다.

미국에도 우리 나라에도 핵무기가 있죠. 수백만 명의 목숨을 눈 깜짝할 새에 앗아갈 수 있는 무시무시한 무기랍니다. 하지만 우리는 절대로 핵무기가 쓰이기를 원치 않습니다.
– 미국인 소녀 서맨사 스미스의 편지를 받고 보낸 정성스런 답장의 일부이다. 전문은 서맨사 스미스 문서를 참조.

소련 정치인. 1982년부터 1984년까지의 소련 최고권력자로, 소련 공산당 제4대 서기장이자 소련 최고회의 상무회 주석을 지냈다.

안드로포프- 체르넨코 라인을 잇는 듣보잡 서기장 라인 멤버 중 한 명이지만, 한편으로는 흐루쇼프-안드로포프- 고르바초프로 이어지는 개혁파 서기장 라인의 한 축이자 자세히 알아가면 알아갈수록 레오니트 브레즈네프의 정책이 실패한 이후 소련 최후의 희망이었던 서기장. 실제로 그 당시 정치국원 중에 현실을 가장 잘 파악하고 있던 사람이 안드로포프였으며, 미하일 고르바초프 문서에 나오듯 고르바초프가 당 내에서 큰 권위를 가지지 못한 것에 비하면 안드로포프는 권위에서나 실력에서나 확실히 소련 최후의 희망이라 할 만하다. 당장 당 관료들이 체르넨코를 지지하는 와중에도 KGB와 군의 지지로 서기장이 되었을 정도였다. 그리고 그 안드로포프가 급사함에 따라 브레즈네프 계파였던 체르넨코가 집권하여 현상유지만[3] 1년을 하다가 죽게 되고 서기장의 자리는 미하일 고르바초프에게 이어진다.

2. 생애

파일:external/s003.radikal.ru/6b98bb2b60f1.jpg
1975년 2월 23일, 소련 건군절 기념 정치국 회동에서 촬영된 사진[4]

2.1. 서기장 취임 전

1914년 6월 15일 러시아 제국 스타브로폴주에서 태어났으며, 페트로자보츠크 국립 대학 및 공산당 간부 학교를 졸업한 뒤 1939년 소련 공산당에 입당했고 겨울전쟁 이후 카렐리야-핀란드 소비에트 사회주의 공화국 콤소몰을 감독하기 위해 파견되었고 해당 SSR 중앙위원회의 제2서기로 선출되었다.
다른 전임 서기장들은 제2차 세계 대전에서 정치국원이나 못해도 정치인( 정치장교)으로서 한 자리 꿰차고 있었지만, 하지만 안드로포프는 역대 소련 서기장 중 유일무이하게 정치인이 아닌 파르티잔으로서 나치 독일, 핀란드군과 싸운 인물이며, 이 시기부터 조금씩 이름을 떨치기 시작했다. 다만, 이오시프 스탈린 대숙청 기간에 일시적으로 숙청되어 노역 생활을 하다가 복권된 흑역사도 있다.
파일:external/upload.wikimedia.org/Bundesarchiv_Bild_183-F0417-0001-028%2C_Berlin%2C_VII._SED-Parteitag%2C_1.Tag.jpg
1967년, KGB 의장 시절의 모습 (좌)[5]
제2차 세계 대전 후 외교 분야와 첩보 부문의 실력자로 떠오른 안드로포프는 1953년~1957년에 헝가리 주재 대사관의 참사관과 대사를 연속으로 재임했는데, 여느 소련 대사들과 달리 헝가리 곳곳을 여행하면서 헝가리의 일반 농민, 노동자, 지식인들과 광범위한 접촉을 가졌다. 1956년 헝가리 혁명 당시 헝가리 대사를 지내면서 소련군의 유혈진압에 결정적으로 관여했다. 그러나 한편으로는 1960년대, 헝가리의 부분적 자본주의 경제체제 도입을 묵인 내지는 지원해 헝가리 경제 부흥에 일조하기도 했다. # 소련의 유엔 대표부 차석대사를 역임했던 빅토르 이스라옐란은 그가 소련 외교 아카데미에 있던 시절에 강연을 하러 온 헝가리 대사 시절의 안드로포프를 만난 적이 있었는데, 유창한 헝가리어 실력과 헝가리 역사와 문학에 대한 대단히 깊은 조예를 보였고 강연이 대성공으로 끝났다고 한다. 강연이 끝난 후 이스라옐란은 안드로포프에게 헝가리 '반혁명난동' 때 '미제국주의'의 개입 여부에 대해서 그에게 질문했는데 안드로포프는 껄껄 웃으면서 그딴 것은 존재하지 않았으며 미국인들이 오히려 소련 대사관에 와서 정보를 구걸했다고 소련 공식 입장에 정면으로 배치되는 발언을 해서 깜짝 놀랐다고 회고했다. 그리고 임레 너지가 미제국주의의 간첩이라고 보고한 것이 다름아닌 안드로포프라는 것을 알게 된 이후 누구보다도 사실 관계 파악에 능하지만 정치적 필요에 맞지 않으면 가차없이 묵살할 수 있는 무서운 인물이라고 그를 평가했다. 귀국 후 1957년 3월 당중앙위원회 연락부장에 임명, 1967년까지 10년간 재임하였으며, 1961년 10월, 22차 당대회에서 당중앙위원회 위원에 선출되었다. 1962년 11월 전원회의에서 서기국 서기로도 선거되었다.

1967년 5월 시점에서 국가보안위원회(KGB) 주석은 브레즈네프와 함께 흐루쇼프 축출에 동참했던 블라디미르 세미차스트니였다. 그는 역시 KGB 주석을 역임했던 브레즈네프의 반대파 셸레핀의 측근이었는데, 브레즈네프는 셸레핀이 와병한 틈을 타서 정치국 회의를 소집하고 세미차스트니를 방청으로 참석시켰다. 그리고 KGB를 당중앙위원회에 더욱 밀착시키기 위해서 서기국 서기가 새로운 KGB 주석에 임명될 필요가 있다고 주장하면서 자신의 측근인 안드로포프를 전격적으로 신임 주석에 임명하고 세미차스트니를 숙청하였다. 충격을 받은 세미차스트니는 "더 밀착을 시킨다니 무슨 소립니까? 그렇다면 제가 언제 당에서 멀리 떨어져 있기라도 했단 말입니까? 저는 당중앙위원회 위원입니다. 제발 동지들..."이라고 정치국 위원들에게 애원했지만 브레즈네프는 "논의할 필요가 없어 보입니다."라고 묵살하고 그를 경질해버렸다. 그리고 1967년 5월, 안드로포프는 정치국 후보위원으로 승진하였으며 KGB업무에 집중하기 위해 서기국에서는 물러났다.

1973년 4월 전원회의에서는 정치국 위원으로 승진하여 상장 계급을 받았으며, 1976년에는 대장 계급을 받았다. 안드로포프는 소비에트 연방의 KGB 주석을 재임하면서 서구사상의 유입을 경계하여 매우 엄격한 검열 및 탄압 정책을 실시하였는데, 이론(異論)의 탄압, 반공 작가 알렉산드르 솔제니친의 추방, 물리학자이자 반체제 인권활동가인 안드레이 사하로프 박사의 연금 등이 안드로포프의 재임 시절에 있었던 일이다. 그리고 1970년, 괴벨스의 아내 마그다 괴벨스의 무덤 네오나치들의 성지로 전락할 것을 우려해 마그다 괴벨스와 6명의 자녀들의 유해를 다시 꺼내 불살라 버린 후 엘베 강에 뿌려버리라고 지시하기도 했다. 안드로포프가 KGB 주석으로 재임했을 때에는 스탈린 시절 처럼 사람들을 직접적으로 굴라그로 보내는 일은 줄어들었지만, 대신 반체제 인사들에게 일부러 정신병자라는 딱지를 붙인 뒤 정신병원에 가둬버리는 일을 하기도 했고 컨테이너에 감금시켜버리기도 했다. 육체에 해를 가하는 혹독한 고문은 거의 없었지만 대신 반체제 인사들에게 엄청난 정신적 고통을 안겨주는 정신적 고문 행위나 다를 바 없었다. 종교에 대한 탄압도 강경하게 시행한 것은 물론이고 동성애에 대해서도 증거를 조작하면서까지 강경하게 탄압하며[6] 서구 사상의 유입을 철저히 차단하고자 했다.

안드로포프가 소비에트 연방의 KGB 주석을 지내던 시절 서독 뮌헨에서 열린 1972 뮌헨 올림픽 도중에 검은 9월단이 일으킨 뮌헨 올림픽 참사가 터지자, '저런 상황이 소련에서 터지면 스페츠나츠만 믿어선 안 되겠구나' 하는 생각이 든 안드로포프는 KGB 내에 자체적인 무력조직 겸 대테러부대인 국내용 ' 알파 그룹'과 국외용 '빔펠 그룹(베타 그룹)'을 창설하였다. 대테러부대 창설에 별 관심이 없던 당시 소련 지도층의 모습을 생각해보면 나름대로 파격적인 결정을 한 셈이다. 재미있게도 이 두 대테러부대는 창설자가 나중에 서기장이 되었기 때문인지 몰라도 서기장에게 유달리 충성심이 강했는데, 훗날 소련 공산당의 보수파가 고르바초프를 축출하기 위해서 쿠데타를 일으켰을 때, 블라디미르 크류츠코프 당시 KGB 주석(정변의 찬동자)이 이들 부대에게 러시아 소비에트 최고회의 의사당을 점령하라고 지시했으나, 그 명령을 거부했다는 일화를 남겼다.

서구사상의 유입을 막고 반대파를 처단한 안드로포프였지만, 소비에트 연방의 KGB 주석으로 재직하면서 오히려 브레즈네프 시기를 소련의 위기라고 생각하였으며, 소련의 체제를 개혁하기로 굳게 결심하게 된다. 원래 브레즈네프의 후임 서기장으로 내정된 사람은 그의 최측근 겸 조력자였던 수완가 미하일 수슬로프[7]였지만, 1982년 1월, 브레즈네프보다도 나이가 많았던 그가 사망해버리자 후계자 자리는 공백이 되었고 결국 궁정 암투로 이어진다. 이 시기 브레즈네프의 의중이 무엇이었는지는 불분명한데, 그가 체르넨코를 지지했다는 증거와 안드로포프를 지지했다는 증거가 모두 있다. 브레즈네프를 옆에서 모시던 직원들은 사실 브레즈네프가 체르넨코와 안드로포프 둘 다 너무 늙어서 후계자로 부적합하다고 여겼다고 증언하고 있다. 사실 정치국 전체가 맛이 간 상태였는데, 티호노프는 폴란드 방문 중 계단에서 굴러떨어졌고, 그로미코는 회의 중 기절하였으며, 심지어 화장실에서 볼일 보다가 기절하는 바람에 경호원들이 문짝을 부수고 구출한 적도 있었다. 또 다른 유력한 후계자 안드레이 키릴렌코는 치매 증상을 보였다. 1977년 1월 정치국 회의에서는 정치국원들이 온통 골골거리느라 결원이 절반에 달한 적도 있었다. 브레즈네프의 전속 사진가였던 무사옐란은 이 개판을 본 브레즈네프가 64세의 우크라이나 제1서기 볼로디미르 셰르비츠키를 후계자로 선정했다고 증언했다. 하지만 브레즈네프가 이 계획을 공포하기도 전에 그는 사망하게 되었고, 자연스레 가장 유력한 안드로포프와 체르넨코의 암투로 이어진다. 체르넨코가 소련의 당정 관료조직의 지지에만 집중하던 것과 달리 안드로포프는 KGB와 군대의 신뢰를 받고 있었고, 국방장관 드미트리 우스티노프가 체르넨코에게 "나와 군대는 안드로포프를 지지한다"라고 대놓고 말하자 체르넨코도 단념했다. 결국 1982년 11월 브레즈네프가 사망하자 체르넨코는 당 내 단합을 위한 형식으로 안드로포프를 서기장직에 추천했고 안드로포프는 공산당 중앙위원회의 만장일치 지지를 받아 소련 역사상 최초로 최고지도자 사후 별다른 잡음 없이 순조롭게 서기장직을 계승한 사람이 된다. 1983년 6월에는 체르넨코의 추천으로 최고회의 만장일치의 지지를 받아 소련 헌법상의 국가원수인 소련 최고회의 상무회 주석에 선출되었다.
안드로포프에게 훈장을 수여하는 브레즈네프 (3분 18초부터)[8]
브레즈네프의 장례식에서 조사를 낭독하는 모습[9]

2.2. 서기장 취임 후

전반적으로 사회의 나사를 조였다는 평가가 많다. 브레즈네프 시절을 거치면서 해이해진 국가와 사회기강에 니콜라이 리즈코프 등 당시 브레즈네프 아래에서 일하던 개혁파 인물들을 동원해 구체적인 정책을 정했고 KGB와 밀리치야(인민경찰), 지구당을 동원하여 박차를 가하였다.

안드로포프는 취임 후 브레즈네프 시기의 정체된 노선에 수정을 가하면서 노동자들의 꾀병이나 무단결근[10]을 근절하기 위한 노동 규율의 확립[11], 경제적 탈집중화와 같은 실험적인 경제개혁 등으로 경제 생산력의 향상을 꾀했다. 실제로 이 때 실시한 경제개혁의 영향으로 브레즈네프 중후반기 내내 하락한 경제성장률이 반등해서 1985년까지 소련의 경제성장률은 다시 4%대를 기록하며 고질적인 성장률 저하 문제에서 벗어난 듯 싶었다.[12] 그러나 결국엔 1986년 유가폭락 시기부터 소련의 경제는 다시 침체기에 빠지게 되었다.

외교적으로는 강경노선을 추구함과 동시에 소련-아프가니스탄 전쟁으로 실추된 소련의 위상을 다시 복구시키기 위해 당의 원로 세력들을 갈아치우고 개혁 성향을 지닌 젊은 기술관료들이었던 고르바초프와 니콜라이 리즈코프[13] 등을 중용하기도 했다. 다른 한편으로 내부 체제 단속을 위해 이스라엘로 이민하는 소련 유대인의 숫자를 극소수로 제한했고, 문화·예술·언론을 탄압했다.[14]

하지만 지병인 만성 콩팥병 악화로 정기적인 출근이 불가능할 정도였으며[15], 소련 최고회의 상무회 주석에 추대되었을 때는 연단에 오르는 그의 병약한 모습이 소련 사회에 충격을 줄 것을 우려하여 수락연설조차도 생략할 정도였다. 이 때문에 그는 재임 기간의 절반 이상을 병원과 크림반도의 요양소에서 보냈고 KGB는 그를 포함한 노쇠한 정치국원들을 위하여 레닌 묘소에 에스컬레이터까지 설치했다. 결국, 1983년 8월에 헝가리 공산당 서기를 접견한 이후 공식 석상에서 사라졌다. 안드로포프는 이렇게 되기 얼마 전부터 이미 고르바초프를 자신의 후임으로 생각하고 있었지만, 집권 기간이 너무 짧았을 뿐만 아니라 보수파의 수장인 체르넨코의 세력이 아직 강했기 때문에 이를 실현시키지 못했다. 병으로 쓰러진 이후에도 병상에서 국정을 챙기려고 했지만 이미 안드로포프의 명이 다했음을 알아챈 관료들은 대부분 체르넨코 편에 서고 있었다. 문제는 이 시기 체르넨코도 지병인 폐기종이 악화되어 가고 있었다는 것이지만...

하지만 고르바초프를 후임으로 삼는다는 생각은 좌절되었어도, 안드로포프의 재임기 동안 고르바초프가 중앙당에서 최고 권력자의 비호 아래 매우 성공적으로 요직을 수행하면서 인맥을 쌓은 것은 향후의 역사에 아주 중요하게 작용한다. 그동안 쌓은 실적을 바탕으로 체르넨코 정권 아래에서도 2인자가 될 수 있었는데 안드로포프의 집권기라도 없었다면 고르바초프가 정말 최고 권력자가 될 수 있었을지 영 의문스럽다. 임종하는 자리에 고르바초프를 불러다 놓고 아들 이고리의 장래까지 부탁할 정도로, 고르바초프와는 이미 평범한 직장 상사와 부하의 관계를 넘을 정도로 신뢰하는 사이였고 이는 안드로포프의 지지자들이 상당 부분 고르바초프를 지지하는 결과를 낳았다. 반대 급부로 체르넨코 계열이 고르바초프를 경계하게 되는 현상도 나타나기는 했다.

안드로포프는 만성 콩팥병으로 인한 패혈증 증상까지 나타나 결국 1984년 2월 9일 오후 4시 50분 69세의 나이로 사망하고 그 후임으로 장례위원장을 맡은 콘스탄틴 체르넨코가 취임했다. 안드로포프의 유해는 모스크바 붉은 광장 레닌 영묘 뒷편의 크렘린 벽 묘지로 이동하여 스탈린과 수슬로프의 묘 사이에 묻힘으로써 소련 공산당 내에서는 안드로포프를 높이 평가하고 있었음을 반영했다. 로널드 레이건 미 대통령은 비록 서로 첨예하게 대립했던 사이였지만 상대국 국가원수에 대한 존중의 차원에서 소련 대사관을 방문해 그에 대한 조의문에 서명했다.

3. 여담

3.1. 듣보잡?

보통 대한민국에서는 안드로포프에 관한 연구가 애초에 잘 되지도 않고 관련 서적도 없어서 안드로포프-체르넨코 계보의 듣보잡 서기장으로 자주 평가받는다.[16] 하지만 안드로포프가 1년 남짓한 치세에 한 것은 의외로 크며 사실 멀리 볼 것도 없이 고르바초프를 중용함으로써 소련의 개혁, 개방의 초석을 닦았다고 볼 수 있다.

사실 고르바초프의 급진적 개혁안인 페레스트로이카와 글라스노스트보다는 안드로포프가 조금 더 오래 살아서 집권하는 것이 소련 입장에선 최선이었고, 실제로도 안드로포프가 좀 더 오래 살아 있었다면 1991년에 소련이 무너지지 않았을 것이라는 설이 정설로 받아들여지고 있다.[17] 그렇게 됐다면 중국의 덩샤오핑처럼 공산당의 일당독재를 유지하면서 경제개혁과 성장에 올인하는 개발독재를 했을 가능성이 상당히 높다. 이 점은 당시에 안드로포프를 도와 체르넨코 사후까지 중앙위원회 경제부장을 맡은 니콜라이 리즈코프 역시 언급했다.

물론 그 와중에 민주화 요구는 무참하게 짓밟았을 가능성이 높지만... 당장 이 양반이 KGB 주석 시절에 어떤 일을 했나 보면 답이 나온다. 그러나 확실하게 중산층 및 안정 지향 세력이 자리잡지 못한 상황에서 맞이하는 급속한 개혁과 민주화로 소련이 파멸한 것을 고려하면 당장은 몰라도 장기적인 소련의 미래를 볼 때 안드로포프의 점진적인 개혁정책이 효과적이었다고 볼 수 있다. 더군다나 소련의 안보 제1순위가 바르샤바 조약기구 회원국들을 (강제적으로라도) 유지해 완충지대를 확보하는 것이라는 것을 감안하면 소련의 안보를 위해서라도 필요한 인물이었던 셈.[18]

블라디미르 푸틴 대통령의 정치적 우상이라고 한다. 푸짜르라는 별명대로 장기집권하고 있는 독재자인 푸틴의 롤 모델로 과거 레닌의 사후 이오시프 스탈린의 정책과 브레즈넥브 이후 안드로포프 같이 옐친 시대의 러시아 연방의 느슨함을 다시 러시아판 철혈정책으로 잡아 관리한 측면에서 공통적인 모습을 보인다. 그러나 안드로포프가 소련의 장기적 존속을 위해 취했던 정책들을 보면, 빨간 물을 쏙 뺀 소련의 재현인 유라시아 연합을 구상하는 푸틴으로서는 안드로포프의 사례에서 참고할 사항은 많을 것이다.[19]

3.2. 기타

역대 소련 서기장 중 키가 182cm로 최장신이었다. 러시아의 지도자로 보자면 후에 187cm인 보리스 옐친이 나와서 깨지게 된다.

대한항공 007편 격추 사건 당시의 소련 지도자라서 한국의 신문 만평에서는 공공의 적으로 자주 나온다. 고바우 영감이 대한항공 007편 격추 사건에 대한 해명을 들으려고 하자 안드로포프가 마스크를 벗었는데 입이 없는 인간임이 밝혀지기도 했다. (1983년 9월 9일자 조선일보, 고바우 영감 제8890화) 당대의 만평에서 소련의 높으신 분이 이 캐리캐처를 자주 썼다.

그러나 이러한 낭만적인 이야기가 전개되던 당시에는 사뭇 다른 현실이 도사리고 있었다. 그 해 가을에도 냉전의 한가운데에 있는 한반도에서는 대한항공 007편 격추 사건, 아웅산 묘소 폭탄 테러가 터져 전국이 떠들썩해졌고[20] 세계를 멸망시킬 우발적 핵전쟁의 가능성이 또 한 번 세계를 스쳐 지나갔다.

이 시대를 다룬 실시간 전략 게임 워게임: 유러피안 에스컬레이션의 싱글플레이 에피소드 3 <에이블 아처>에서는 NATO의 기동훈련인 '에이블 아처 83'을 서방의 침공 준비로 오인한 유리 안드로포프가 철의 장막 전역에서 예방공세 웨이브를 시전한다. 사실 단순히 게임에서뿐만이 아니라 실제 공개된 자료에 의하면 이 당시 에이블 아처 훈련을 NATO측의 대규모 선제 공격의 신호로 오인하고 핵선제공격을 비롯한 선제 예방 공격을 실행 직전까지 간 적이 있다. 안드로포프는 병중에도 KGB를 통해 선제공격에 대비할 것을 지시하였다. 그러나 소련군이 내린 결론은 NATO가 선제 공격을 할 생각이 없다는 것이었고 이에 따라 대치 상황만 이어갔을 뿐 그 이상의 행동은 취하지 않았으며, 안드로포프는 3개월 후 사망하였다.

커맨드 앤 컨커 레드얼럿 2에 등장하는 소련군의 2인자 유리의 모티브가 되기도 했다. 상관인 알렉산더 로마노프의 모델이 전임 서기장인 브레즈네프라는 점을 보면 의미심장한 부분이다. 방법이 위험하고 잔인하고 사악할 뿐만 아니라 안드로포프와도 비교도 안 될 정도로 전 세계의 나사를 조이기는 했다.

안드로포프의 사망 후 출간된 미국의 루리 래넌의 만평에는 자신의 무덤에서 브레즈네프의 무덤에 마이크를 대고 인터뷰를 하는 장면이 나오기도 했다. 루니 래넌이 그린 만평 중에 하나가 바로 저 빨간 모자 만평이다.

러시아 야로슬라블 주에 위치한 리빈스크 시는 1984년부터 1989년까지 안드로포프의 이름을 따서 안드로포프 시라고 불렸다.
크루크(Круг) - 카라쿰(Каракум)
1983년 발표되어 전 소련을 강타한 VIA 크루크의 노래 '카라쿰'. 안드로포프의 부인과 아들이 빠진 노래로도 유명하며, 실제로 이 때문에 지나친 인기로 한 번 손을 보려 했음에도 불구하고 터치하지 못했다는 전설적인 일화가 전해진다.

외교와 첩보 분야에서 오래 종사한 만큼 모국어인 러시아어 외에도 영어, 핀란드어, 독일어, 헝가리어에 능통했다고 한다. 검소한 생활을 영위했으나[21] 자택의 서재에는 영어로 된 서적과 개인적인 취미로 수집한 30~40년대 미국 재즈음반이 가득했고[22], 아들인 이고리 안드로포프도 아버지의 영향을 받은 것인지 외교 분야의 중역으로 활약하며 군축협상 등의 대표로 나서기도 했다.

소련 해군 키로프급 핵추진 순양함 4번함이 유리 안드로포프로 명명됐는데, 러시아 해군에 들어서 표트르 벨리키로 개명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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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1875년 개업한 북캅카스 철도의 기차역. [2] 전임자 브레즈네프의 경우 종교 탄압정책을 완화하고 개인적으로는 러시아 정교회에 호의적이었으며 심지어 말년에는 정교회에 대한 신앙심을 가지게 되었다는 의혹도 있었지만, 안드로포프는 KGB 국장으로 재임했을 시절부터 철저한 유물론적 무신론자로 종교에 대한 강경한 탄압정책을 주도했다. [3] 원래 보통 전대 국가원수가 개혁파이고 그 뒤를 이은 후임의 성향이 전임자와 다르게 개혁파가 아닌 경우, 그 후임은 적극적인 변화를 추구하지 않고 현상유지만 하는 경우가 많다. 사실 뭔가를 정력적으로 추진하기엔 체르넨코 본인의 건강이 너무 나쁘기도 했고. [4] 등받이에 팔을 걸친 사람은 레오니트 브레즈네프 전임 서기장, 브레즈네프와 대화를 나누는 안경 쓴 사람은 미하일 수슬로프 공산당 제2서기, 브레즈네프 오른쪽에 대장 예복 차림으로 서 있는 사람이 안드로포프, 사회주의노력영웅 훈장을 단 정장 차림으로 서 있는 오른쪽에서 두 번째 사람이 콘스탄틴 체르넨코 후임 서기장이다. 체르넨코 왼쪽 뒤에서 누군가와 대화 중인 소련 원수 예복 차림의 사람은 드미트리 우스티노프 국방장관, 오른쪽에서 등을 보인 채로 앉아 있는 사람은 알렉세이 코시긴 내각총리이다. [5] 오른쪽부터 레오니트 브레즈네프, 에리히 호네커 [6] 심지어 증인들이 피의자에 대한 증언을 꺼릴 경우 그 증인까지 형사고발 당할 수 있었다. [7] 수슬로프는 확고한 공산주의자였으나 온건노선을 지향했고 안드로포프와 고르바초프를 도왔다. 고르바초프는 그를 원칙주의자지만 수구주의자는 아니었고, 욕심이 없으며 당내 대립과 다툼을 중화시킨 인물이라 평가했고 동시에 자신의 강력한 후원자였다고 언급했다. (고르바초프 자서전 <선택>) [8] 3분 30초를 보면 브레즈네프와 키스하는 걸 볼 수 있다. 이는 브레즈네프가 정치적 의도로 키스를 많이 하였기 때문이며, 21세기에도 유명하다. [9] 오른쪽엔 안드로포프의 최측근 드미트리 우스티노프도 있다. 목소리를 잘 들어보면 이미 건강이 썩 좋지 못했음을 알 수 있다. [10] 스탈린 시대에는 그야말로 지옥같은 노동 환경을 구현했지만 흐루쇼프 시대부터는 직장분위기에 여유가 생기기 시작했는데 브레즈네프 시대 후반기에 들어서는 더욱 심해져서 아예 술에 취했다는 이유로 결근한다든지 직장인들끼리 입을 맞추어서 며칠씩 쉬는 경우가 적지 않았고, 아예 출근도장만 찍고 그냥 노는 경우도 있었기에 소련 산업 생산성에까지 영향을 끼치면서 큰 골칫덩어리였다. [11] 인민경찰(밀리치야)들을 시켜서 무단 결근자들을 닥치는 대로 잡아 직장에 집어넣었다고 한다. (고르바초프 자서전 <선택>) [12] 안드로포프가 추진한 정책인 '원칙과 질서' 캠페인은 현재까지도 러시아에서 인상 깊게 조명받는다. (고르바초프 자서전 <선택>) [13] 훗날 고르바초프 밑에서 소련 장관회의 주석으로 재직했다. [14] 이 시절 언더그라운드 음악 활동을 하다가 불이익을 받은 예술가들이 많다. 마스테르의 안드레이 볼샤코프, 데데테의 유리 셰프추크, 그라지단스카야 오보로나 예고르 레토프와 콘스탄틴 랴비노프 등이 대표적. 볼샤코프는 당시 몸 담고 있던 밴드 지그재그가 강제로 해산당했고, 셰프추크는 탄압을 견디다 못해 다른 도시로 도망쳤으며, KGB에 소환되어 신체 검사를 받은 뒤 복무 부적격 판정이 뜬 레토프는 정신병원에 감금당했고, 복무 적격 판정이 뜬 랴비노프는 강제로 입대당했다. [15] 만성 콩팥병 환자들은 일상생활에서 투석이 불가피한데 안드로포프 역시 마찬가지였다. 투석은 생존을 위해서라면 고통을 견디며 해야 하는 매우 힘든 과정이다. 안드로포프가 가면 갈수록 기력이 뚝 떨어지는 것도 당연한 일. [16] 사실 애초에 소련사 연구 학자가 많이 없으니 한국에선 스탈린이나 레닌 연구도 그리 많이 나온다곤 못하고 기껏해야 국제관계학적 차원에서 본 흐루쇼프 연구나 좀 있지 재임 기간 긴 브레즈네프 연구도 드물다. 하물며 재임 기간이 짧은 안드로포프나 체르넨코 연구는 당연히 적다. [17] 계속 살았으면 현실에서 소련과 공산권이 도미노처럼 무너진 1990년에도 70대 중반이었다. 이 정도면 고위 정치인치고는 나이가 지나치게 많은 것은 아니다. [18] 미하일 고르바초프 브레즈네프 독트린을 폐기해버리는 실수를 범했고 결국 바르샤바 조약기구 회원국들이 줄줄이 민주화를 이룩하면서 소련의 완충지대가 일거에 사라지게 되어 결국에는 소련마저도 붕괴하고 말았다. 고르바초프도 자신의 이러한 결정을 뒤늦게 후회할 정도였고, 중국공산당에게는 절대 성급한 민주화를 용납해서는 안 된다고 충고했다. 다만, 소련이 해체된 건 결국 러시아인의 비중이 너무 낮았던 것이 결정적 이유였다. 한족이 90%를 넘는 중국에 비하면 현재 러시아도 러시아인 비율이 80% 남짓인데 소련이 남았다면 얼마 안 있어 러시아인 비율은 50% 이하로 떨어졌을 테고 어찌되었건 간에 연방의 존속은 힘들었을 것이라는 주장도 있다. 미국과는 달리 소련은 소련인이라는 정체성을 창출하지 못했고 러시아인이나 아르메니아인같은 민족성이 더 우선시되는 나라였기 때문에, 소련이란 나라는 마르크스주의가 이데올로기가 아니게 되는 그 순간 국가로서 존속은 불가했을 가능성이 높다. [19] 물론 푸틴의 경우는 우크라이나 침공 이후 갈수록 안드로포프보다는 스탈린을 더 닮아 가는 모습을 보면 유라시아 연합이 과연 이루어질지는... [20] 탈북민 강명도 씨의 증언에 따르면 온건파인 브레즈네프에 비해 대서방 강경파였던 안드로포프는 북핵 개발을 지원하고 남침도 적극 지지했다고 한다. [21] 값비싼 소비재 수집의 취미를 지녔던 전임자 브레즈네프와 달리 대사 재임시절 선물받은 헝가리산 가구 정도가 제일 값나가는 가산이었다고. [22] 즈다노프 시절만 하더라도 소련에서 재즈는 규제의 대상이었지만, 재즈의 인기가 너무나도 컸던 나머지 스탈린 사후 소련에서 재즈는 아예 공식적인 음악 장르로 대접받았다. 그리고 서구에서 들여온 팝과 락이 (정확히는 정부의 규제에서 벗어난 언더그라운드 음악가들의 음악이) 그 뒤를 이어 규제 대상이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