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결성 | 1973년 |
데뷔 | 1977년 9월 12일 |
활동시기 | 1977년 ~ 2008년 2월 |
장르 | 록 음악, 포크 록, 프로그레시브 록, 하드 록, 사이키델릭 록 |
멤버 |
김창완^(보컬, 기타)^ 김창훈^(베이스)^ 김창익†^(드럼)^ |
본관 | 김해 김씨 |
링크 | [1] | [2] | [3] | [4] | [5]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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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김창완(보컬, 기타), 김창훈(보컬, 베이스), 김창익(드럼)의 삼형제로 구성된 대한민국의 록 밴드.[6] 1977년 < 산울림 새노래 모음>로 데뷔했다.
산울림 삼형제는 어릴 적에 주말마다 방에 계란판을 붙여서 방음실로 만들고 싸구려 기타로 자기들이 만든 곡을 연주했다고 한다.[7] 이후 1977년에 MBC 대학가요제가 처음으로 개최된다고 하여 삼형제가 무이(無異, 평소와 다름없음)[8]라는 밴드로 대학가요제에 참가한다. 당시 김창훈은 샌드페블즈 5기 멤버(75학번)로 있었는데, 샌드페블즈 6기(76학번)에게 바톤 타치하고 무이로 들어오면서 자작곡 " 나 어떡해(이 곡은 산울림 2집에 리메이크되어 다시 실린다)" 를 샌드페블즈에게 주었다. 대학가요제 예선에서 무이는 "문 좀 열어줘(산울림 1집 수록곡)" 로 1위, 샌드페블즈는 "나 어떡해"로 2위를 기록했는데 김창완이 1975년 졸업생이라 재학생만 참가할 수 있는 규정에 걸려서 무이는 결국 탈락하고 제1회 MBC 대학가요제의 대상은 샌드페블즈가 탔다. 그후 이제 사회 생활을 할 나이가 되었기에 지금까지 해왔던 음악을 마지막으로 기념하는 의미에서 서라벌 레코드에 직접 방문해 데모 테이프를 줬다고 한다. 그당시 녹음하려면 비용이 200~300이여서 어떻게든 자비로 하려 하였으나 서라벌 레코드에서 그냥 무료로 녹음을 해준다 하여 계약서고 뭐고 그냥 바로 레코딩 날짜 약속을 잡았다고 한다. 그후 발매된 1집 레코드 판이 40만 장 팔린 것으로 추정되는데 당시 기준에서는 상당한 대박이었다고 한다. 이후 2007년에 선정한 한국 대중음악 100대 명반 5위에 뽑혔다. 참고로 7위가 산울림 2집이다.[9]
초기(1~3집)에는 펑크 록 느낌의 디스토션이 강한 공격적인 사운드를 많이 보여줬는데 이 스타일은 영미 록의 프로그레시브나 사이키델릭 성향과 비슷해 보이면서도 실제로는 어떠한 선대 록 음악의 성향도 받아들이지 않은 산울림만의 독창적인 작법이었다. 실제로 삼형제는 데뷔 전 대학 그룹 사운드가 흔히 하던 카피를 단 한 번도 하지 않았다고 한다. 대신에 처음 밴드를 시작할 때부터 작곡에 몰두 데뷔 시점에 이미 상당한 분량의 창작곡이 있었다.[10] 산울림의 초반이 그야말로 전설로 남게 된 것은 미숙한 실력과 부족한 장비를 가지고도 도달하였던 파격에 가까운 독창성 때문이다.[11] 오로지 외국 음악 카피만 하면서 자체 창작은 도외시하고 연주력에만 목 매달던 일부 음악인들에게 산울림의 등장은 그야말로 충격이었다. 직접적으로는 3집까지는 한국식 개러지 록의 탄생이라고 여겨진다.
또한 이들의 초기작은 " 대한민국 헤비메탈의 시작" 이라고도 평가된다.[12] 어떤 음악에도 영향받지 않았으나 한국 거의 모든 록커들에게 영향을 줬다. 지저분한 퍼즈톤 위에 깔리는 김창완의 나레이션에 가까운 나지막한 노래와 관조적인 가사는 그 당시의 대중들에게 상당히 충격이었다고 한다. 실험적임에도 불구하고 시대를 뛰어넘어서 사랑받는 강한 음악적 영향력을 가지고 있다.
중기와 후기를 거쳐가면서 산울림은 포크락과 디스코 등 딱 하나로 규정할 수 없을 정도로 다양한 장르를 넘나들며 다양한 음악적 실험을 하였고 계속적으로 많은 한국 록 뮤지션들에게 영향을 미친다. 이때의 발라드 노래들은 초기의 록적인 감성을 후퇴했지만 대중들의 많은 인기를 끌었다. 아이유가 훗날 리메이크했던 <너의 의미>가 바로 이 시기의 곡이다.
그러면서도 정규 앨범 사이사이에 < 개구쟁이>나 < 산할아버지>, <외계인 ET>와 같은 동요 앨범을 내기도 한다. 산울림의 또 다른 특징 가운데 하나로 비관적이고 시니컬한 노래와 어린이를 위한 동요를 동시에 작곡할 수 있는 다양한 감성을 소화할 수 있는 밴드라는 것을 들 수 있을 것이다.
2008년 1월 29일 드럼을 담당하고 있는 막내 김창익이 캐나다 직장에서 눈길에 지게차가 미끄러지는 바람에 지게차에 깔려 사망하는 불의의 사고가 있었다.[13] 이로 인해 김창완은 "산울림은 가족 밴드다. 막내가 이렇게 떠나 버린 이상 예정되어 있던 것 이상의 산울림의 이름으로 활동하는 건 없을 것이다."라고 언급했다. 이로써 산울림은 해체하고 긴 전설의 막을 내린다.
여담이지만 활동 당시 유난히 심의 태클을 많이 받은 밴드 중에 하나다. 당시는 악보 검열, 가사 검열이 횡행하던 시절이었다. 하지만 산울림 음악을 들어본 사람들이라면 "아니 이게 왜 심의야" 하고 놀라겠지만 이게 다 그 심의 필터에 걸러져서 나온 물건이라고 한다. 참고로 심의 사유는 퇴폐 내지는 가사가 너무 슬프다 등등 대표적으로 1집은 모든 곡이 싸그리 심의에 걸렸고 "아니 벌써"의 경우 가사를 전체적으로 갈아 엎었다고 한다.[14] 김창완 본인의 말로는 개작 전 가사가 기억은 나지 않지만 굉장히 비관적이고 우울한 가사였다고 한다. 이외에 3집의 "내 마음"도 원래 "황무지"라는 제목이었다가 바뀌었다. 이후에 김창완이 그 울분(?)을 뒤에 풀어낸 노래를 김창완밴드의 산울림 리마인드 앨범에 묶어 발매했는데, 제목도 '금지곡'이고 노래 내용도 '인생 그거 쉬워요. 동물 학대하지 말고 자연을 지켜요.' 이런 내용이다. 사실 내용을 보면 지금도 19금 먹고 가사를 변경해야 할 암울한 곡들이 심히 많다(...).
2. 평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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록으로 노래한 청춘의 메아리
Mnet 레전드 100 아티스트
산울림은 1975년
대마초 파동 이후의 한국 락음악을 대표하는 밴드다. 유신정권의
긴급조치 9호에 의한 '대마초 파동'으로 인해 한국 락음악은 거의 뿌리가 뽑혀나갈 정도로 심각한 타격을 입었는데, 1980년대 중반 블루스, 하드락, 메탈 등이 언더그라운드에서 인기를 얻고 오버그라운드까지 올라와 재기하기까지 약 10년 간의 한국 락 음악의 암흑기를 대표하는 밴드로 꼽힌다. 보통 음악이라면 누군가에게 영향을 받고 또 영향을 주기 마련인데, 산울림은 활동 당시 '누구의 영향도 받지 않았으며, 누구에게도 영향을 주지 않은' 밴드로 평가된다. 오히려 전성기에서 한참 지나 90년대 후반부터 탄생한 밴드들을 산울림의 후계자로 평가할 정도다.[15]Mnet 레전드 100 아티스트
산울림한테 영향을 받은 후배들이 훗날 헌정 앨범을 내기도 했다. 신중현이 대한민국 최초 헌정 앨범이고 두 번째가 산울림이다. 산울림의 영향력은 한국을 넘어 일본으로도 전해졌는데 산울림, ' 신중현과 엽전들'의 일본인 카피밴드 '곱창전골'[16]이 있었을 정도다.
산울림의 경우 기본적으로 당시 서구에 생겨났던 프로토펑크에 60년대 사이키델릭을 얹은 사운드의 독창성, 그럼에도 여러 가지 장르 및 기법을 섭렵하고 시도했던 실험성 등이 높이 평가받는다. 물론 그들이 프로토펑크를 지향했던 것은 아니고,[17] 서구의 6070 시대 록의 화려함과 강렬함을 한국의 열악한 환경 및 설비 속에서 재현해내려는 각고의 노력 끝에 이러한 독특한 결과물이 탄생한 것이다.[18] 또한 앞에서 언급했듯이 80년대부터는 팝, 포크 지향적이고 한국적인 음악을 주로 구사하기도 했지만, 이 때는 오히려 록 밴드로서의 의미는 살짝 퇴색했다. 물론 후기가 꼭 팝적인 것은 아니고 오히려 프로그레시브적인 측면이 강해진 부분도 있지만, 삼형제가 나이가 듦에따라 훨씬 음악이 부드러워졌음은 부정할 수 없다. 그 결과 '한국적인 면'보다는 '록 밴드로서의 시대적, 음악적 가치', 즉 음악 개척자적인 면에 더욱 무게를 두는 외국 청자들은 주로 산울림의 초기 음악을 상당히 좋아한다.
산울림 음악에 '시대 정신'이 결여되어 있다는 비판이 있으나 이는 히트곡 몇 개만 들어본 피상적인 해석이다. 민중 가요를 제외하고 당시 소위 '시대 정신'이라는 것은 은유적으로 제시되는 경우가 많았고 엄숙한 시대 분위기에 경종을 울린 '아니 벌써'나 지극히 염세적인 분위기를 표출한 '먼 나라 이야기' 등의 시대적 의의를 가볍게 볼 수는 없다. 보다 직접적으로 산울림은 환경적 메시지를 담은 노래를 발표하기도 했다. 9집 앨범 아트 속 독수리는 공해의 습격을 의미하고 10집의 '독수리가 떴네' 역시 환경 오염이 언젠가는 인간을 해하리라는 뜻을 담고 있다. 김창완 개인적으로도 1990년대 초반 환경 관련 좌담회 방송에 패널로 출연하기도 했으며 실종 아동 관련 방송 프로그램 주제가를 만들거나 양심수 콘서트에서 노래하기도 하는 등 정치에 참여하지는 않았으나 꾸준히 사회 참여 활동[19]을 해왔다. 2010년대 이후는 한층 사회 참여 메시지가 활발해져서 김창완은 도호쿠 대지진이나 세월호 참사 당시 희생자들을 위로하는 노래를 만들었고 2012년 대선 때는 투표 독려곡 '투표하러 가야지'를 발표하기도 했다. 김창훈은 '첫사랑 광주야'[20] 라는 노래를 발표하며 민주주의의 의미를 강조하였고 본인의 유튜브 채널에 올린 영상에서 친일파와 군사독재 부역 시인의 노래는 부르지 않는다[21]며 상당히 직접적인 메시지를 내비치기도 했다. 즉, 산울림의 음악에 시대 정신이 결여된 것처럼 보이는 것은 그들의 음악 자체가 저항적이거나 사회 참여적이지 않았다기보다는 동요를 불렀다는 사실 때문에 '순수' 이미지로 소비된 탓이 크다. 평론가 박준흠도 김창완을 인터뷰하면서 이런 의견을 내비치자 당사자 김창완이 불쾌해했다. #
3. 역사
3.1. 1기: 독보적인 창작
가히 파격적이라 할 수 있는 독창성을 통해 전설의 반열에 오른 산울림의 초기 앨범들. 시대를 감안하여 듣는다고 해도 '구린' 프로듀싱 상태이며, 필을 살리기는 커녕 기본적인 박자도 맞추지 못하고 삑사리를 낼 정도로 처참한 연주력을 보여주지만[22], 오직 충격적인 독창성 하나로 전설이 된 작품. 이런 음악들은 1977년 당시의 영미권 음악에서도 찾아보기 힘든데, 당시 영미권 음악은 펑크 록과 디스코로 양분되어 격변기를 겪은 반면 산울림의 펑크와 사이키델릭 록을 결합한 특이한 음악세계는 당시 유일무이했다.[23] 1~3집 앨범은 외국 록 음반 수집가[24] 들에게까지 수집의 대상이 되고 있다. 대표곡은 "아니 벌써", "아마 늦은 여름이었을 거야", "내 마음에 주단을 깔고", "그대는 이미 나"[25], "나 어떡해"[26], "문 좀 열어줘", "청춘"[27] 등. 이 시기 산울림 음악을 특징짓는 요소는 김창완의 퍼즈기타와 콤보 오르간의 전면적인 사용을 통한 사이키델릭의 탐구였다. 참고로 앨범의 오르간 연주는 김창완의 사촌여동생인 김난숙씨가 연주하셨다. 3집의 타이틀곡 내 마음은 김창훈이 자다가 일어나서 만들었다고 하는데, 정작 자신은 자기가 어떻게 그 곡을 만들었는지 기억이 나지 않는다고 김창완이 자신의 라디오에서 밝혔다. #- 1977년 1집 《산울림 새노래 모음》 : 〈아니 벌써[28]〉, 〈아마 늦은 여름이었을 거야〉, 〈문 좀 열어줘〉
- 1978년 2집 《내 마음에 주단을 깔고》 : 〈 내 마음에 주단을 깔고[29]〉, 〈어느날 피었네〉, 〈 나 어떡해[30]〉
- 1978년 3집 《내 마음》 : 〈내 마음〉, 〈그대는 이미 나[31]〉
3.2. 2기: 김창완의 솔로 체제
두 아우의 군 입대[32]로 어쩔 수 없이 김창완 혼자 활동한 시기로 1기와 3기의 과도기적 성향을 보인다. 이 시기에 다양한 장르를 시도했다보니 이 시기의 곡들을 좋아하는 사람들도 꽤 많다. 대표곡은 "빨간 풍선", "오솔길", "창문 너머 어렴풋이 옛 생각이 나겠지요", "찻잔". 동요 1집의 "개구쟁이" 도 유명하다. 기존의 로킹한 밴드 사운드와 어쿠스틱 기타를 활용한 포크가 혼재되는 경향을 보인다.- 1979년 동요 1집 《 개구쟁이》
- 1979년 4집 《특급열차》 : 〈특급열차〉, 〈우리 강산〉
- 1979년 5집 《한낮의 모래시계》 : 〈한낮의 모래시계〉, 〈이렇게 갑자기〉
- 1980년 6집 《조금만 기다려요》 : 〈조금만 기다려요〉, 〈찻잔[33]〉, 〈창문너머 어렴풋이 옛 생각이 나겠지요〉
3.3. 3기: 김창훈과 김창익의 복귀, 인기 절정
1기의 퍼즈톤은 완전히 사라지고 사운드가 세련되어졌으나 그만큼 원초적이고 거친 에너지도 감소되었다. 이 시기의 앨범 중에서도 7집과 8집이 크게 성공했는데 8집이 다른 앨범들에 비해 상업적이라 그런지 은근 박한 평가를 받아 9집엔 강한 사운드의 록으로 회귀하는 모습을 보였다.[34] 이후 10집[35]을 끝으로 사실상 산울림의 공식적인 활동이 중단되었다. 대표곡은 "가지 마오", "독백", "청춘[36]", "먼 나라 이야기", "회상", "너의 의미"[37], "산 할아버지" 등으로 오늘날까지 불리는 아름다운 발라드 노래들이 이 시기에 많이 작곡되었다. 사운드는 보다 포크나 포크록에 가까워진 것으로 평가된다.- 1981년 7집 《가지마오》 : 〈가지마오〉, 〈독백〉, 〈청춘〉[38][39]
- 1981년 동요 2집 《산할아버지》
- 1982년 8집 《새야 날아》 : 〈새야 날아〉, 〈내게 사랑은 너무 써〉, 〈 회상[40]〉
- 1982년 동요 3집 《운동회》
- 1983년 9집 《웃는 모습으로 간직하고 싶어》 : 〈웃는 모습으로 간직하고 싶어〉
- 1984년 10집 《너의 의미》 : 〈너의 의미〉[41][42]
- 1984년 동요 4집 《동심의 노래》
3.4. 4기: 산울림의 종언
아우들이 각자 사업 등을 이유로 빠지고[43] 김창완 혼자 활동한 시기다. 실질적으로 김창완의 솔로 앨범과 맥락을 같이하지만, 김창완의 솔로 앨범이 포크를 주로 한 따뜻한 음악을 수록했다면 산울림의 후기작은 극단적으로 어둡고 고독한, 쓸쓸한 정서에 한계까지 닿아 있다. 특히 <그대 떠나는 날 비가 오는가>가 수록된 산울림 11집은 앨범 전체가 '비'라는 테마를 두고 만들어지기도 했다. 대표곡은 "그대 떠나는 날 비가 오는가", "안녕". 12집은 기존 산울림 답지 않게 너무 소프트한 곡들로만 채워져 있어서 인지 흥행에는 실패하였지만 이 앨범에도 "누나야","무감각"등과 같이 팬들 사이에서는 나름 인기있는 곡들이 수록되어 있다.- 1986년 11집 《그대 떠나는 날 비가 오는가?》 : 〈그대 떠나는 날 비가 오는가?〉, 〈내가 고백을 하면 깜짝 놀랄거야〉, 〈안녕[44]〉
- 1991년 12집 《꿈꾸는 공원》 : 〈누나야〉, 〈무감각〉
3.5. 재결성
신해철 등의 후배 뮤지션들에 의해 산울림의 재조명이 시작되고 트리뷰트 앨범이 제작되었고 다시 결성된 산울림의 13집은 초기 감성으로 회귀하여 많은 인기를 끌었다. 마침 국내 인디씬이 구체적인 모습을 갖추면서 아마추어적인 음악과 차가운 관조, 어린아이와도 같은 낙관의 정서가 떠오르던 시기기도 한데, 말할 필요도 없이 70년대에 산울림이 가지고 있던 바로 그 모습이다. 대표곡은 "기타로 오- 1997년 13집 <무지개>: 〈기타로 오토바이를 타자〉, 〈무지개〉
3.6. 김창익의 사망과 활동 종료 선언
2006년 산울림 전국투어 콘서트 이후 14집을 준비하던 2008년 1월, 막내이자 드러머였던 김창익이 이민간 캐나다에서 불의의 사고[46]로 세상을 떠나 산울림은 공식 활동을 종료한다.[47] 김창훈은 자신의 세 번째 솔로 앨범을 발표했으며 김창완은 김창완밴드를 결성하여 활동하고 있다.4. 음반 목록
4.1. 정규 앨범
* 산울림 1집(1977)
* 산울림 2집(1978)
* 산울림 3집(1978)
* 산울림 동요1집(1979)
* 산울림 4집(1979)
* 산울림 5집(1979)
* 산울림 6집(1980)
* 산울림 7집(1981)
* 산울림 동요2집(1981)
* 산울림 8집(1982)
* 산울림 동요3집(1982)
* 산울림 9집(1983)
* 산울림 동요4집(1984)
* 산울림 10집(1984)
* 산울림 11집(1986)
* 산울림 12집(1991)
* 산울림 13집(1997)
4.2. 정규 앨범이 아닌 편집 앨범과 기타 앨범들
- 1977년 <산울림 새노래 모음> (7인치 싱글)
- 1978년 <산울림 제 2집> (7인치 싱글)
- 1978년 <산울림 빨간 풍선> ( 옴니버스)
- 1978년 <X-mas carol> ( 옴니버스)
- 1979년 <산울림 영화음악집: 내일 또 내일>(7인치)
- 1982년 <애니메이션 슈퍼 삼총사 OST>
- 1983년 <이티 이야기>
- 1983년 <산울림 사랑의 발라드>
- 1983년 <산울림 ROCK WORLD>
- 1983년 <산울림 러브 사운드 (경음악)>
- 1983년 <산울림 록 사운드 (경음악)>
- 1983년 <산울림> (카세트 박스셋)
- 1984년 <산울림 컴퓨터 에어로빅>[48]
- 1986년 <산울림 스페이스 사운드 디스코> (12인치 맥시싱글)
- 1986년 <산울림 귀여운 소녀의 디스코> (12인치 맥시싱글)
- 1986년 <산울림, 김범룡 Disco Mix>
- 1987년 <산울림 Greatest Hits 1,2,3,4>
- 1989년 <The Best of Sanullim 1,2,3,4>
- 1989년 <산울림 동요왕국>
- 1996년 <하늘색 꽃병>
- 1996년 <초록색 대문>
- 1996년 <The Complete Regular Recordings In 1977-1996>
- 2005년 <산울림 다시 듣기 : 청춘, 위로, 추억>
- 2008년 <The Story of Sanullim: Complete Studio Recordings>
5. 시도한 장르
사이키델릭 록
• 1집~3집 시절의 곡들이 해당된다. 이후 12집까지는 다른 장르의 음악을 하다 13집을 발매할때 다시 사이키델릭 록으로 회귀했다.
• 1집~3집 시절의 곡들이 해당된다. 이후 12집까지는 다른 장르의 음악을 하다 13집을 발매할때 다시 사이키델릭 록으로 회귀했다.
포크 록
• 과도기 시절 몇몇 곡들과 동생들이 사업등을 이유로 빠졌을 때 김창완이 혼자 활동하던 시기인 11집, 12집 시절의 곡들이 해당된다.
• 과도기 시절 몇몇 곡들과 동생들이 사업등을 이유로 빠졌을 때 김창완이 혼자 활동하던 시기인 11집, 12집 시절의 곡들이 해당된다.
하드 록
• 두 동생들이 군대에서 돌아와 같이 활동하던 7집~9집 시기의 몇몇 곡들. 특히 9집은 전작이 상업적이라서 그런지 은근 비판 받았기에 록으로 회귀하는 모습을 보였다.[49]
• 두 동생들이 군대에서 돌아와 같이 활동하던 7집~9집 시기의 몇몇 곡들. 특히 9집은 전작이 상업적이라서 그런지 은근 비판 받았기에 록으로 회귀하는 모습을 보였다.[49]
프로그레시브 록
• 일반적으로 산울림의 곡들이 프로그레시브 록으로 분류되는 일은 잘 없지만 3집에 수록된 "그대는 이미 나" 라는 곡은 러닝 타임이 18분이 넘어가고 이외에도 산울림만의 독창성을 나타내는 곡 들이 많기에 가끔씩 몇몇 곡들은 프로그레시브 록으로 분류되기도 한다.
• 일반적으로 산울림의 곡들이 프로그레시브 록으로 분류되는 일은 잘 없지만 3집에 수록된 "그대는 이미 나" 라는 곡은 러닝 타임이 18분이 넘어가고 이외에도 산울림만의 독창성을 나타내는 곡 들이 많기에 가끔씩 몇몇 곡들은 프로그레시브 록으로 분류되기도 한다.
이외에도 시도한 장르는 매우 많다.
6. 팬클럽
산울림 전성기 시절에는 우리나라에 아직 팬클럽 문화가 제대로 존재하지 않아서 공식적인 팬클럽은 없었다. 산울림 활동의 휴식기라고 할 수 있는 1995년 11월, PC통신 하이텔에 '산울림 음악사랑 모임-개구장이(SG128)'이라는 소모임이 생기면서 나중에 팬클럽으로 발전했다. 이 모임 초대 회장이 '황신혜 밴드'의 리더였던 김형태 씨였고 주요 멤버는 현재 김창완 씨의 매니저를 하고 있는 지명옥 씨와 그의 이종사촌 언니인 진숙경 씨였다.'개구장이'는 출발을 팬클럽으로 한 것이 아니라 그저 산울림 음악을 좋아하는 사람들이 같이 음악을 듣는 모임으로 출발한 것이기에 활동이 그다지 적극적이지 않았다. 그렇지만 차차 산울림을 좋아하는 열성 팬들이 가세하면서 나중에는 산울림 팬클럽을 자처하게 됐다. 특히 1996년 '樂 메이드인코리아"유니텔락콘서트 공연 이후 문막으로 이동해서 개구장이 팬들과 함께 뜨거운 하루 공연을 하면서 개구장이 회원은 물론, 산울림 당사자들도 큰 감흥으로 산울림 재활동 시기를 조율하기 시작했다.
산울림 음악사랑 모임 개구장이는 1996년 문막 공연이 중앙일보에 크게 기사화 되면서 홍보가 되어 회원이 많이 늘었고, PC통신 유니텔에도 개구장이 소모임 지부가 생겨서 하이텔 개구장이와 연합해서 같이 활동했다.
결국 산울림 탄생 20주년을 맞아 1997년 1년 동안 한시적으로 다시 활동하기로 하고 앨범 13집'무지개'를 발매하고 활동한 데에는 팬클럽 개구장이의 역할이 지대했다.
산울림도 그에 대한 감사의 뜻으로 개구장이 창립 기념일에는 3형제 중에서 참석 가능한(주로 맏형인 김창완) 멤버가 참석해서 노래를 불러줬고, 그 외에도 개구장이 회원을 위한 신촌 푸른굴양식장 공연 등을 별도로 해줬을 정도로 관계가 돈독했다.
1998년 이후 산울림은 공연이 거의 힘들었기 때문에 개구장이 정모는 한달에 한번씩 있었지만, 친목모임 성격으로 바뀌었기에 산울림에 대한 큰 기대를 품고 새로 가입한 팬은 이곳이 팬클럽인지 아닌지 분간하기 힘들 정도였다.
그래서 그들 중에 좀 더 팬클럽적인 활동을 지향하는 사람들이 개구장이를 탈퇴하고 새로 만든 팬클럽이 산울림매니아다. (2004년)
2004년에서 2007년까지 특히 2006년 세종문화회관에서의 산울림 30주년 기념 공연 때까지는 개구장이와 산울림매니아가 공존해서 활동했고, 회원들 중에는 양쪽 모두 가입해서 활동하는 경우도 많이 있었다. 겹치는 멤버도 많다 보니, 한동안 산울림 3형제 당사자는 개구장이와 산울림매니아를 구분하지 못하는 경우도 종종 있었고, 팬클럽에게 인사할 때 "개구장이에게 감사하다"고 해서 산울림매니아 회원들의 아쉬움을 사기도 했다. 2008년 김창익의 사망 이후 김창완이 산울림의 해체를 선언했다. 이때를 기점으로 개구장이는 사실상 해체 상태이고 이후에는 산울림매니아가 유일하게 남아서 팬클럽의 역할을 이어가고 있다.
산울림매니아, 약칭 산매, 링크는 여기. 2004년부터 라이브카페 등을 대절해서 산울림매니아 XX번째 이야기, 즉 정모를 여는데, 다른 팬카페 모임과는 다르게 김창완과 김창훈이 실제로 얼굴을 비추고, 그리고 생전에는 김창익이 실제로 얼굴을 비추기도 했
특히 김창훈과 김창익이 미주지역에 거주했을 때는 주변에 사는 산즐 회원(산즐은 산울림 즐기기라는 모임으로 앞의 개구장이, 산울림매니아와 멤버가 겹치지만 다른 팬클럽임)들과 함께 자주 식사를 하기도 했다고 하니, 다른 팬카페보다 훨씬 가수 본인의 참여율이 높다. 다만 김창익은 생전에 카페에 글을 쓴 적이 없었고, 김창완 역시 카페에 글을 쓴 적 없이 운영진과의 연락을 통해 간접적으로 이야기를 나누는 편...인데 딱 하나 썼다. 가입인사글. 유일하게 김창훈만이 카페에 3~4개월에 한 번씩 글을 남긴다.
2008년에 김창완이 먼저 산울림의 해체선언을 해서 카페 분위기가 잠시 미묘해진 적도 있지만, 지금은 김창완밴드+김창훈+산울림 등등을 종합적으로 다루는 팬카페가 되었다. 매년 2월에 홍대 일대에서 정기 모임을 하니까, 참고 바람. 카페 운영진도 운영진을 가끔 선발도 하고, 못하는 사람들은 알아서 내려오기도 하는 등 큰 욕심 없이 운영을 하고 있다. 특히 매니저는 2년에 한 번씩 정기적으로 교체되고 있기도 하는데, 자주 번개를 열고 하는 등으로 운영진끼리 서로 연락처를 다 알고 있기 때문인 듯. 특성상 중장년층이 회원 대다수다. 역사가 오래되고, 탈덕이 거의 존재하지 않기 때문에 카페 개설때부터 지금까지 활동하는 사람들이 꽤 많다.
다른 팬카페에 비해 유독 도드라져보이는 점은 '산울림 어머님'의 존재. 산울림 삼형제의 어머니가 산울림 매니아 정모때도 참여하시고, 특히 김창완의 공연은 빠지지 않고 방문한다. 10만명이 모이는 락페는 물론 비오는 날 야외에서 열린 콘서트에도 방문하셨다. 80대의 나이인데, 2019년 현재에도 정정해서 김창훈의 신보 뮤비에 출연했을 정도.
7. 박스셋 사태
7.1. 산울림 박스셋 사태
산울림 박스셋은 1997년에 나온 <The Complete Regular Recordings>, 일명 "지구레코드" 판본이 있었다. 그런데 이 박스셋은 발매 이후에 나온 13집이 없고 무엇보다도 앨범 세 개 분량을 CD 두 개로 쪼개서 나눠놓는 만행을 저질렸다. 그래서 2008년 산울림의 새로운 박스셋이 나온다는 소식에 많은 팬들이 기대하고 있었다. 특히 오리지널 마스터 테입을 발굴하고 리마스터링을 거쳐서 제대로 된 LP 미니어쳐 형태로 나온다는 소식으로 "뭔가 제대로 하고 있구나"라는 기대를 가지게 했다.하지만 이것이 지구레코드 판본은 비할 바 못되는 최악의 사태로 치달을 줄은 아무도 생각하지 못했다.
우선 박스 문제. 인터넷을 통해 우선 박스셋을 받아본 사람 중에 바깥 박스와 안 박스가 너무 꽉 끼어서 빠지지 않는다는 소식이 전해져 왔다. 인터넷에 올라온 사진엔 17만 8천원이라는 거금을 주고 산 그것을 칼로 째고 손으로 뜯은 처참한 몰골이 올라왔다.
시작부터 삐걱거린 박스셋 문제는 레코딩의 실수 발견으로 최악의 국면을 맞았다. 최첨단 기술력을 동원하여 완성했다던 CD 레코딩의 마지막 순간에 곡의 볼륨을 서로 맞추지 않아 볼륨이 들쑥날쑥한 것이 발견된 것이다. 그것도 17장 CD 중 15장이 그랬고 로엔엔터테인먼트 측에서는 결국 전 CD의 리콜을 단행했다.
이것으로 끝이 아니다. 리콜된 씨디 중 1집과 10집에서 노이즈 문제와 트랙 문제가 발견되었고 로엔측은 절절한 사과문과 함께 1집과 10집을 재리콜하였다.
사태는 계속되었다. 7집에서 노이즈가 섞인 트랙이 또 다시 발견되었고 구매자들이 계속해서 문제를 제기하고 있지만 더 이상의 리콜은 이루어지지 않고 있다.
이 사태는 한국의 음반 시장의 한계를 여실히 드러낸 사건으로 평가받고 있다. 취지는 매우 좋았으나 전설의 록밴드의 역사를 관통하는 CD 17장 분량의 대규모 프로젝트를 진행하면서 마감에 쫓겨 제대로 확인되지도 않은 상품을 출시하여 결국 두 번의 대규모 삽질로 끝내고 말았다.
7.2. 2014 트릴로지 박스셋 사태
그리고 2014년 2월에 첫 3장만을 엮은 '산울림 트릴로지'라는 새 박스셋이 나왔다. 이번에는 전 박스셋의 흑역사를 넘어 제대로된 재발매반이 나올 것이라 기대되었지만, 발매 첫날부터 불만이 나오고 있다. 500장 한정이라는 말과는 다르게 500보다 큰 숫자가 새겨진 세트가 발견되었다. (댓글 참고)[51] 또, 전곡 오리지날 마스터 테입 사용이라는 말과는 다르게 로엔 박스셋의 음원을 그대로 사용했다는 주장이 나왔다.[52]8. 여담
- 힙합 뮤지션들이 산울림의 노래를 샘플링하기도 하였다.
- Dope Boyz - 우리 것 (2000)
- 산울림의 노래 아마 늦은 여름이였을 거야(1977, 1집)를 샘플링하였다. Dope Boyz - Enter The Dope World (2000) 앨범에 먼저 수록되었고, 그 후 컴필레이션 앨범인 2002 대한민국 (2002) 앨범에도 수록되었다.
- P-Type - 반환점 (2014) (프로듀서: Fascinating a.k.a. MC성천)
- 산울림의 노래 골목길(1977, 1집), 어느 날 피었네(1978, 2집), 내 마음에 주단을 깔고(1978, 2집)를 샘플링하였다. Timberland 6"(2014, 싱글)에 먼저 수록 되었고, 그 후 4번째 정규 앨범인 Street Poetry (2015)에도 수록되었다.
- P-Type이 직접 '별에서 온 그대' 촬영장에 찾아가서 김창완에게 샘플링을 허락 받았다고 한다.[53]
- 당시 소속사였던 브랜드뮤직은 "산울림 곡이 힙합곡에 차용되는 경우는 이번이 최초로 샘플링을 통해 선대 뮤지션에 대한 존경을 담아내고자 했던 피타입의 의지가 표현됐다."라고 보도자료를 냈으나, 사실은 위에 적힌 Dope Boyz의 노래가 P-Type보다 14년 먼저 산울림 노래를 샘플링 했다.
- 2022년 10월부터 산울림의 LP 및 음원들이 리마스터 되어 정식으로 재발매되었다. 김창완이 직접 감수를 맡았다. 1집부터 13집, 동요집, 김창완과 김창훈 솔로앨범까지 모두 리마스터되어 음원사이트에 공개되었으며 전부 LP로 재발매되었다.
-
2023년 9월부터 산울림 결성 50주년 기념 프로젝트가 시작되었다. 결성 50주년인 2027년까지 총 50곡의 리메이크 음반이 차례대로 발매될 예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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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folding [참여 아티스트 및 리메이크작 목록]
[1]
공식 팬카페
[2]
네이버 팬카페
[3]
김창완 유튜브
[4]
시가 불러주는 음율을 따라가다-김창훈(음악인) 유튜브
[5]
김창완 밴드 인스타
[6]
김창완: 중앙고-
서울대학교, 김창훈: 용산고-
서울대학교, 김창익: 성남고-
고려대학교
[7]
이때 만든 곡이 1~3집에 있는 곡들로 그 덕에 1집이 나온 후 1년 만에 2, 3집이 연달아서 나올 수 있었다. 또 이때 카피하지 않고 자신들의 음악을 했기에 더 독특한 음악이 나올 수 있었기도 하다.
[8]
어릴 적의 김창완은 매우 염세적인 사람이었다고 하는데 밴드명에서도 그 느낌이 뿜어져 나온다.
[9]
저 리스트만으로도 산울림의 위치를 알 만한데, 10위권에 2개의 앨범을 집어넣은 것은 산울림 뿐이다. 한 밴드의 이름으로 100위권에 3개의 앨범을 집어넣은 것은 딱 3밴드뿐(개인을 포함하면
김광석과
정태춘이 포함된다.)이다.
언니네 이발관과
서태지와 아이들, 그리고 산울림이다(3집 73위). 단 2018년 제3차 선정에서는 3집이 빠져서 2개의 음반이 10위권을 유지한 것에 만족해야 했다.
[10]
이 때문에 데뷔 직후 1, 2, 3집을 거의 연달아 발표할 수 있었다.
[11]
들국화의 드러머였던 '주찬권'은 인터뷰에서 산울림에 대해 "창작력은 와방(최고)인데 연주가... 좀..." 이라는 발언을 했다. 이런 산울림에 자극받아서 창작과 연주가 완벽히 조화된 들국화가 등장했는지도 모른다.
[12]
3집의
'내 마음' 이라는 곡이 이런 인식에 영향을 크게 미친 것 같다.
[13]
김창완 밴드의 EP 앨범 <The Happiest>에 수록된 'forklift'가 이에 대한 노래다.
[14]
고친 가사도 '밤새 도록 친구들 끼리 술을 마시고 논다는' 뉘앙스라고 한다.
[15]
2000년대 밴드들로 따져보자면
장기하와 얼굴들은 산울림 후기앨범의 영향이 느껴지며,
갤럭시 익스프레스는 산울림 초기앨범의 영향이 느껴진다.
[16]
기타리스트
하세가와 요헤이는 이후
뜨거운 감자에서 활동하다가
김창완밴드에 합류하며 김창완과 함께 음악 활동을 하게 된다.
[17]
애초에 이 장르를 몰랐을 것이다. 프로토 펑크는 현지인 미국에서조차 인지도가 처참했고, 설사 한국으로 그러한 성향의 음반이 들어온다고 해봐야 검열되었을 게 뻔하다.
[18]
사실 이런 현상은 한국 뿐만이 아니라 전세계적으로 흔했다. 영미권이 아닌 나라에서 사이키델릭 록과 브리티시 인베이전을 자기 문화권에서 해석하려다가 독특한 혼종이 탄생하게 된 것. 아르헨티나의 알멘드라와 로스 가토스, 멕시코의 로스 둑 둑스가 대표적.
[19]
심지어 김창완 음악 세계 전체로 확장하면 노고지리 2집에서 상당히 직접적인 '자유'의 메시지를 느낄 수 있기도 하다.
[20]
김창훈과 블랙스톤즈 1집에 수록되어있다. 피처링으로 참여한 두 보컬 흠좀무한데, 싱어게인으로 유명세를 타기 전의
정홍일과
윤성.
[21]
시로 노래를 작곡해서 부르는데 친일파와 군부독재에 가담한 사람의 시는 부르지 않는다고 하였다.
[22]
정확히 말하자면, 이미 김창완의 기타는 완성되어 있었으나 김창훈의 베이스와 김창익의 드럼이 따라가지 못했다고 말하는 것이 옳다.
[23]
당장 대표곡 아니 벌써의 경우 음질이 웬만한 인디 펑크 록 밴드들, 그리고 90년대의 날것 그대로를 추구하여 고의적으로 믹싱을 하지 않은 날것의 음반을 발매한 그런지 밴드들보다도 좋지 못하지만 음악 자체로만 따지면 시대를 타지 않는 참신한 록 음악이다. 오히려 떨어지는 음질이, 산울림 노래들의 펑크스러움을 부각시킨다. 지지직거리는 소리가 말 그대로 노래에 완벽히 녹아든 것으로 이것이 특유의 감성을 자극하여 명작으로 인정받는다.
[24]
대표적인 외국인 산울림 팬으로
장기하와 얼굴들의 기타리스트
하세가와 요헤이가 있다. 산울림의 앨범을 구하기 위해 한국을 드나들며 한국에서 음악을 하게 되었다고.
[25]
3집 B면을 이 곡 하나로 채웠다. (당시 LP판 한 면의 최대 재생시간이 20분 쯤이라 그 정도로 멈췄다고 한다.) 게다가 A면에는 9분짜리 노래가 하나 들어가 있어서 3집에는 5곡의 노래밖에 없다. 김창완은 훗날 인터뷰에서 당시 회사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우리가 언제 이런 시도를 해보겠냐' 는 생각으로 강행했다고 회고했다. 실제 1970년대 수많은 록밴드들이
아이언 버터플라이 의 17분짜리 싸이키델릭 록 곡 '
In-A-Gadda-Da-Vida' 를 즐겨 연주했고, 이는 기타리스트의 실력을 재는 하나의 척도였다. 산울림은 카피만 하지 말고 우리가 직접 만들자는 방향을 보여준 것이다.
[26]
김창훈 작곡의 곡으로 샌드페블즈가 대학가요제에서 먼저 발표했으나 이후 산울림 2집에 리메이크 버전으로 실리게 된다.
[27]
산울림에 대해 잘 모르는 사람일지라도 한 번쯤은 들어봤을 정도로 굉장히 유명한 곡이자 전술된 곡들과 함께 산울림의 대표적인 명곡으로 꼽힌다. 일반 대중들에게는 응답하라 1988 OST로 유명하다.
[28]
아니 벌써, 해가 솟았나, 창문 밖이 환하게 밝았네
[29]
아라빅 스케일을 사용하는 퍼즈기타 솔로로 전주 3분을 연주하는 6분 7초의 넘버로, 명실상부한 대표곡 중 하나다.
나는 가수다 시즌 1에서
자우림이 리메이크해 2등을 차지했다.
[30]
샌드페블즈가 77년 대학가요제에서 대상을 받은 곡으로, 베이시스트인 김창훈의 곡이다. 산울림 2집 버전도 잘 알려져 있다.
[31]
18분 41초의 대곡.
[32]
두 명 모두 군악대로 입대했는데 군복무 기간 김창익의 드럼 실력이 일취월장했다고 작은형 김창훈이 밝힌 바 있다.
[33]
노고지리의 곡으로도 유명하다.
[34]
그러나 아쉽게도 9집은 큰 인기를 끌진 못했다.
[35]
이 앨범중 수록된 "너의 의미"가 크게 성공했다.
[36]
응답하라 1988 OST.
[37]
아이유가 리메이크한 그 곡이다.
[38]
김필이 리메이크하여 드라마
응답하라 1988에서 OST로 수록되었다.
나는 가수다 시즌 1에선
인순이가 리메이크하였다.
[39]
참고로 '독백'과 '청춘'은 초판 음반과 재판 음반의 녹음이 서로 다르다.
[40]
'길을 걸었지, 누군가 옆에 있다고 느꼈을 때 나는 알아버렸네' 델리스파이스가 리메이크하기도 했다. 바비킴이 나가수에서 부른 그 곡이다.
장범준이 드라마
시그널의 OST로 부르기도 했다. 특히 그가 부른 노래가 4회 재한(
조진웅 분)이 영화관에서 혼자 영화를 보며 죽은 첫사랑인 원경(
이시아 분)을 떠올리며 오열할 때 깔리는 데 조진웅의 눈물 연기와 노래가 한 몸처럼 어우러져 많은 시청자들의 눈물샘을 자극했다.
시그널의 많은 명장면 중 하나.
[41]
아이유가 2014년 발표한 곡 너의 의미 (feat. 김창완) 의 원곡이다.
[42]
참고로 이 음반도 '지금 나보다'와 '너의 의미'는 초판 음반과 재판 음반의 녹음이 서로 다르다.
[43]
식품공학과 출신의 김창훈은 해태에, 기계공학과 출신의 김창익은 대우자동차에 입사했다.
[44]
박중훈과
강수연이 주연한 영화
미미와 철수의 청춘스케치에 삽입된 노래이다. 안녕 귀여운 내 친구야 멀리 뱃고동이 울리면
[45]
이소라의 프로포즈에서 첫 선을 보였고, 그 해
MBC 창작동요제에서 '개구쟁이', '산할아버지'와 같이 부르기도 했다. 그리고 이것이 TV에서 볼 수 있는 산울림의 마지막 공연이 된다.
[46]
밴쿠버에서 김창익은 식품회사를 운영하다가 사고가 난 날, 눈이 많이와 직원들에게 사고 위험이 있으니 리프트(지게차) 사용을 하지 말라고 지시했지만, 예상치 않게 낮 12시쯤 물건이 들어 와 직원들의 안전을 우려해 본인이 직접 나서서 지게차 운행을 하다가 그만 눈길에 사고를 당해 사망했다고 한다.
[47]
산울림매니아 카페 등을 중심으로 김창익의 아들이 아버지를 대신하여 산울림 드럼을 맡는다는 소식이 나왔고, 성사 직전까지 갔었으나 김창완의 해체 선언으로 공식 활동을 종료하게 되었다.
[48]
카세트 테이프로만 나온 앨범이라 음원 확인이 어렵다.
[49]
이 앨범에 수록된 "소낙비"라는 곡은 후렴에 무려 3옥타브 미가 나온다.
[50]
아침창에서 김창완이 X디 대신 창완아저씨로 불리게 된 것도 관련이 있...는 듯?
[51]
#
[52]
(로엔반은 마스터 유실때문에 몇몇곡은 지구 레코드 CD 음원을 그대로 사용했다.)
#
[53]
그의 아버지인 드러머 '강윤기'는
과거 김창완 혼자 산울림으로 활동하던 시기에 레코딩 세션으로 참여했고 현재
김창완밴드의 드러머로도 활동 중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