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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수정 시각 : 2023-01-04 16:00:29

아타나리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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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고트 왕국 테르빙기 왕조 3대 군주
Athanaric | 아타나리크
파일:아타나리크.png
제호 한국어 아타나리크
라틴어 Athanaric
생몰 년도 미상 ~ 381년
재위 기간 369년 ~ 381년

1. 개요2. 행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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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테르빙기 고트족 3대 군주. 고트족 고유의 신앙을 육성하고 기독교를 박해했으며, 동로마 제국을 상대로 전쟁을 벌였다.

2. 행적

콘스탄티누스의 고트족과 사르마티아 원정 당시 콘스탄티누스 1세의 로마군에게 패배하여 로마의 봉신이 된 아리아리크의 손자이자 콘스탄티노폴리스에 인질로 보내진 아오리크의 아들이다. 아오리크는 로마인들 사이에서 좋은 대우를 받았고, 그를 기리는 동상이 세워지기도 했다. 그러나 콘스탄티누스 1세 사후 동족에게 돌아간 아오리크가 340년대에 로마 제국의 영역을 지속적으로 침략했던 것을 볼 때, 그에게는 로마에 대한 적개심이 자리잡고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아타나리크 역시 이런 아버지의 적개심을 물려받아 로마에 대한 강렬한 투쟁 의식을 갖췄다.

아오리크가 언제 사망했는지는 명시되지 않았지만, 365년 프로코피우스 발렌스 황제를 상대로 반란을 일으킨 뒤 고트족에 지원을 호소했을 때 아타나리크가 고트족 지도자로 명시된 걸 보면 365년 이전에 사망하고 아타나리크가 뒤를 이었던 것으로 보인다. 아타나리크는 프로코피우스와 손을 잡고 3천 병력을 파견했지만, 프로코피우스는 366년 5월 진압군에게 패한 뒤 부하들의 배신으로 생포된 후 처형되었다. 고트족 부대는 이 소식을 듣고 귀환했지만 도중에 로마군에게 제압당하고 억류되었다.

아타나리크는 발렌스에게 "프로코피우스가 자신을 로마의 합법적인 통치자로 내세웠기에 콘스탄티누스와 맺은 협약(332년)에 따라 보조군을 파견했을 뿐이다"라며 그들을 돌려보내달라고 요청했지만, 발렌스는 묵살했다. 3천 명의 고트족 전사들이 어찌 되었는지는 전해지지 않으나, 아마도 좋지 않은 결말을 맞이했을 것이다. 이에 분노한 아타나리크는 트라키아를 침략하며 지방의 농장과 포도밭을 약탈하고 교회를 파괴했으며, 기독교 신자들을 처참하게 죽였다.

발렌스는 367년 봄에 도나우 강을 건너 고트족의 영역으로 들어섰다. 아타나리크는 정면 대결은 필패라고 판단하고 험지에 숨은 채 적군이 깊숙이 들어오기를 기다렸다가 허점을 찔러 급습한 후 반격이 들어오기 전에 사라지는 전법을 구사했다. 로마군은 일부 고트족을 죽이고 집과 들판, 농작물을 불태웠지만 고대했던 승리를 거두지 못했다. 결국 발렌스는 367년 가을 카르마티아 산맥에 숨은 적을 박멸하는 건 불가능하다고 판단하고 귀환했다.

368년 봄, 발렌스는 원정을 개시하려 했지만 다뉴브 강이 범람하는 바람에 중단했다. 그 대신, 그는 군대로 하여금 요새를 건설하게 했다. 369년, 강의 수위가 내려가자 원정을 재개했다. 아타나리크는 이번에도 같은 전술을 사용했지만, 로마군은 소규모 기동대를 각지에 파견하여 숨어있는 적을 포착하여 섬멸하는 전술로 맞대응했다. 아타나리크는 적이 분산된 점을 이용하여 지휘부가 있는 적군을 급습해봤지만 격파당했다. 하지만 발렌스 역시 적을 포위 섬멸하지 못했고, 전쟁은 소모전 양상으로 흘러갔다.

결국 양자는 평화 협약을 맺기로 합의했다. 369년 9월, 그는 도나우 강 한 가운데의 배 위에서 발렌스와 평화 협상을 벌였다. 그 결과, 아래의 협약을 맺기로 합의했다.
1. 고트족은 로마 제국의 영역을 침범하지 않으며 모든 로마 인질을 돌려보낸다.
2. 로마인과 고트족의 교역은 도나우 강의 두 지점으로 제한한다.
3. 고트족은 로마로부터 보조금을 지불받는 대가로 보조군을 파견한다.
4. 로마는 고트족에 어떠한 간섭도 하지 않고 더 이상 군사적 침략을 벌이지 않는다.

그리하여 로마 제국과 화해했지만, 여전히 로마 제국에 반감을 품고 있던 아타나리크는 고트족 내부에 스며든 로마의 국교인 기독교를 뿌리뽑고자 했다. 그는 선조들이 믿는 신에게 희생제를 바치고 신성한 형상을 세우라고 명령했으며, 이를 따르지 않는 자는 거주지와 함께 불태웠다. 이리하여 많은 기독교 고트인이 살해되었는데, 그 중에는 고트족의 저명한 귀족이었으며 훗날 성인으로 시성된 사바스도 있었다. 그러나 이러한 박해 정책에 불만을 품은 이들이 프리티게른 알라비부스를 따르면서 고트족 전체가 양분되었다.

이후의 내전 양상이 어땠는지를 알려주는 기록은 없지만, 프리티게른이 발렌스에게 아타나리크를 물리치는 걸 도와달라고 요청한 것을 볼 때 아타나리크가 우세했던 것으로 보인다. 그러던 376년, 훈족이 고트족의 영역으로 쳐들어와 막대한 피해를 입혔다. 아타나리크와 프리티게른 모두 발렌스에게 도나우 강 이남으로 이주하는 것을 허락해준다면 얌전히 살겠으며, 훈족이나 다른 적이 침공한다면 제국의 포이데라티(외원군)가 되어 열심히 싸우겠다고 제안했다. 발렌스는 고심 끝에 지난날 제국을 침략하여 기독교인들을 박해했던 아타나리크와 휘하 고트족은 받아들이지 않고 프리티게른과 그의 추종자들만 제국 내로 진입하게 했다.

아타나리크는 도나우 강 이북의 고트족 영역에 남아 프루트 강과 도나우 강 사이에 방어선을 설치하고, 나중에 '아타나리크 성벽'으로 알려진 요새를 건설했다. 그러나 훈족의 침략은 이 정도 대비로 막을 수 없었다. 그들의 침략이 갈수록 가속화되면서 고트족의 터전이 모조리 파괴되고 수많은 인명피해가 양산되자, 대다수 고트족은 아타나리크를 버리고 프리티게른이 건너간 도나우 강 너머로 달아났다. 그는 여전히 자신을 따르는 소규모 전사들과 함께 트란실바니아에 있는 사르마티아 부족을 정복한 뒤 그곳에서 새력을 재건했다.

그러던 381년 1월, 그는 콘스탄티노폴리스를 갑작스럽게 방문했다. 요르다네스에 따르면, 테오도시우스 1세 황제와 평화를 협상하여 자신을 따르는 고트족이 로마를 위해 싸워줄 테니 정착시켜달라고 요청하러 찾아왔다고 한다. 파울루스 오로시우스 조시무스 역시 이에 동의한다. 반면 암미아누스 마르켈리누스에 따르면, 그는 동족들에 의해 추방되어 콘스탄티노폴리스에 망명했다고 한다. 테미스티우스 역시 그를 난민이자 탄원자로 묘사했다.

그는 381년 1월 11일 황제와 콘스탄티노폴리스의 저명한 귀족들의 환영식에 참석했지만 2주 후 갑작스럽게 사망했다. 테오도시우스 1세는 발칸 반도에서 횡행하고 있는 고트족을 진정시키기 위해 죽은 왕을 위한 성대한 장례식을 치르라고 명령했다. 그의 무덤은 무척 화려했으며 고트족의 방식으로 지어졌기에 장례식에 참석한 사람들을 놀라게 했다고 한다. 그 후 고트족은 382년 테오도시우스 1세와 평화 협약을 체결하고 로마 영내에서 독자적인 세력을 갖추고 보조금을 지원받는 대가로 보조군을 지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