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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수정 시각 : 2023-03-12 01:21:50

친다수윈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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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고트 왕국 가톨릭 군주
Chindasuinth | 친다수윈트
파일:친다수윈트.webp
제호 한국어 친다수윈트
라틴어 Chindasuinth
생몰 년도 563년 ~ 653년 9월 30일
재위 기간 642년 4월 17일 ~ 653년 9월 30일

1. 개요2. 행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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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서고트 왕국 가톨릭 12대 국왕.

2. 행적

바스크인의 거듭된 습격을 저지하기 위해 파견된 북방 고트군 사령관으로, 642년 귀족과 군대에 의해 왕으로 추대되었을 때 79세였다고 한다. 그는 그해 4월 16일 팜플라니아에서 국왕이 되었다는 것을 만방에 알린 뒤 툴레도로 진군했다. 11세기의 신학자이자 역사가 젬블루스의 시게베르트에 따르면, 친다수윈트는 톨레도로 진군해 툴가 왕을 붙잡아 삭발시킨 후 수도원으로 보내버렸으며, 이후 툴가의 운명은 알려지지 않았다고 한다. 반면 톨레도의 일데폰스는 친다수윈트가 귀족들로부터 지지를 얻어냈지만 주교들의 승인이 없었기 때문에 반란군으로 남았고, 툴가는 가까스로 왕위를 지키다가 사망한 후에야 왕이 될 수 있었다고 한다. 두 가지 이야기 중 어느 쪽이 사실에 근접한 지는 분명하지 않다.

그를 옹립한 귀족들은 그의 나이가 많으니 자기들 입맛에 따라 부려먹을 수 있다고 여겼을 테지만, 이것은 오판이었다. 그는 서고트 왕국의 단독 군주가 된 뒤 주도면밀한 모습을 보였다. 먼저 이베리아 남부 지역에서 일어난 반란을 곧바로 진압하고 'VICTOR'라고 새겨진 기념 주화를 메리다에서 주조했다. 뒤이어 귀족들을 꺾어버리기 위해 정력을 쏟아부었다. 프랑크 연대기 작가 프레데가르는 귀족의 반란을 영원히 종식시키겠다는 그의 열망에 대해 다음과 같이 설명했다.
스페인에 대한 그의 권력을 확신하고 왕을 전복하려는 고트족의 풍습을 잘 알았기 때문에, 그는 자신을 왕으로 옹립하는 데 기여했던 모든 자들을 하나씩 죽이도록 했다. 뒤이어 여러 사람이 유배지로 보내졌고, 그들의 아내와 딸들과 재산을 가까운 동료들에게 나눠줬다. 그는 고트 귀족 200명과 하급 귀족 500명을 처형했다. 그는 (군주를 해치는) 질병을 정복했다고 확신할 때까지 의심되는 사람을 처형하는 것을 멈추지 않았다. 그리하여 고트족이 그의 전임자들 아래에서 했던 것과 같은 음모를 감히 자신에게 하지 못하도록 만들었다.

친다수윈트는 귀족들을 가차없이 처단하는 한편, 지참금을 제한하는 정책을 추진했다. 이에 따르면, 지참금은 1,000 솔리디, 노예 10명, 여노예 10명, 말 10마리를 초과해서는 안 되며, 이를 초과하는 지참금은 전원 국가에 귀속되었다. 이는 귀족들이 결혼 동맹을 굳건히 다져서 자신에게 맞설 세력을 구축하려는 시도를 분쇄하기 위한 조치였다.

그는 여기서 한 걸음 더 나아가 지배층을 근본적으로 바꾸려 했다. 왕실로부터 작위를 하사받은 '법복 귀족'이 기존의 귀족들을 대체했는데, 이들은 모든 일을 할 때 왕에게 항상 감사해야 하고, 특별한 충성 서약으로 구속되었으며, 왕의 사람과 항상 동행해야 했다. 그들은 왕에게 봉사하는 대가로 반역자들의 노예와 재산을 챙길 수 있었다. 이에 기존의 귀족들 상당수가 나라를 떠났고, 많은 이는 성직자가 되었다. 643년에는 귀족 억압 정책을 합법화하기 위해 나라와 신민에 반대하는 자들을 처벌하는 특별법을 공포했는데, 이에 해당하는 자들 중에는 외국으로 도피한 자들도 포함되었다. 이 법은 공포 이전에 저지른 행위에 대해서도 소급 적용되었다.

이렇듯 철저한 귀족 탄압으로 왕권을 강화한 친다수윈트는 교회의 권위를 사용하여 자신의 집권을 정당화하려고 노력했다. 그러면서도 교회가 왕권을 넘어서는 것을 허용하지 않았다. 그는 교회 망명에 대한 권리를 엄격하게 제한하는 법을 통과시켰다. 이에 따르면, 살인자는 교회에 숨어 있어도 처벌받아야 했다. 그는 교회의 일에 간섭하는 것도 주저하지 않았다. 톨레도 대주교 에우제니오 1세가 646년 사망하자, 그는 세비야 주교 브라올리온에게 편지를 보내 브라올리온의 심복인 에우제니오를 수도로 올려보내라고 요구했다. 브라올리온은 자신에게 충실한 사제를 톨레도에 보내지 않으려 했지만, 그가 자신의 소원은 곧 왕명임을 분명히 했기에 어쩔 수 없이 보내야 했다.

646년 11월 18일, 제7차 톨레도 공의회가 개최되었다. 이 공의회에서는 처음으로 세속 계급 인사들이 의사 결정에 참여했는데, 그중에는 그의 통치 5주년을 축하하는 문서를 읽고 기록을 보관하는 공증인도 있었다. 공의회는 왕의 칙령을 상당 부분 반영하고 강화했다. 6 43년의 특별법을 재차 공인하고, 세속적 형벌에 교회 형벌을 추가했다. 이리하여 왕을 적대시한 자는 잡히면 사형당할 뿐만 아니라 파문되었다. 이 조치는 주교를 포함한 모든 성직자에게 적용되었다. 여기에 왕에 대한 모든 비판은 범죄로 간주하고 재산의 절반을 몰수하는 처벌을 받을 수 있다고 규정했다. 그리고 공의회는 수도원 사제들은 교육을 잘 받지 못한 점을 들어 당국에 대한 어떠한 정치적 연설을 금지했으며, 톨레도와 가까운 곳의 주교들은 톨레도에서 적어도 일년 에 한 달을 보내라고 요구했다. 이 공의회에는 41명의 주교만이 참석했고, 타라코나 대표는 2명뿐이었으며, 셉티마니아 대표는 한 명도 참석하지 않았다. 이것은 교회 계층 내에 그에 대한 반감이 상당히 존재했음을 암시한다.

이렇듯 왕권을 다진 그는 법률체계의 완전한 재편을 목표로 삼고 사라고사 주교 브라올리온의 도움을 얻어 신 법전을 만들게 했다. 이 법안은 이베리아-로마인이 사용하는 알라리크 2세의 서약서와 고트족이 사용하는 리우비길드 왕의 법전을 완전하게 대체하기 위한 것이었다. 그는 왕국의 모든 주민을 민족의 구별 없이 하나의 신민 집단으로 만들려 했다. 이제 하나의 법률 체계가 이베리아 반도와 셉티마니아 전역에서 운영되기 시작했다. 이 작업은 그의 통치 기간 동안 지속되었지만 생전에 완료되지 않았고, 654년 아들 레케스윈트 치세 때 비로소 공포되었다.

그의 법은 국가의 경제 및 사회 생활의 모든 측면을 다루었으며, 왕의 행동 방식과 목표를 특정지었다. 사형과 재산 몰수는 반국가 음모에 적용되었으며, 반역 계획은 행위 그 자체로 분류되었다. 사형 선고를 받은 자는 비록 사면을 받더라도 의무적으로 실명형을 받아야 했다. 귀족과 성직자는 왕이 죽은 후에도 이 법을 준수해야 하며, 어떤 경우에도 국가의 적은 절대로 사면받을 수 없었다. 왕의 친구와 가족 뿐만 아니라 교회에 대해 왕이 제공한 선물은 향후 몰수될 수 없었다. 거짓 고발을 고의로 한 제보자는 엄중한 처벌을 받았다. 또한 그는 주인이 노예를 임의로 죽이는 것을 금지하는 등 하층 계급에도 신경썼다.

친다수윈트는 교육을 장려하기도 했다. 그는 사라고사 주교 타이온에게 로마에서 도덕과 철학에 관한 책을 가져오게 한 뒤, 이를 토대로 신민을 가르치게 했다. 백성들에게 자선 행위를 베풀었으며, 성 로마노스 수도원을 세우고 그곳에 아니 레키베르가를 안장한 후 나중에 그곳에 함께 묻히기를 희망했다.

친다수윈트는 제4차 톨레도 공의회에서 '귀족과 주교로 구성된 평의회가 왕을 선출한다'라는 조항을 폐기하고 649년 1월 20일 아들 레케스윈트를 공동 왕으로 세워서 후계자임을 모두에게 공개했다. 653년 9월 30일 90세의 나이로 사망하면서, 개인 재산을 빈민에게 골고루 나눠주라는 유언을 남겼다. 사후 아들 레케스윈트가 왕으로 등극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