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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수정 시각 : 2022-12-26 12:31:43

테오도리크 1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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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고트 왕국 발티 왕조 5대 군주
Þiudarīks | 테오도리크 1세
파일:테오도리크 1세.jpg [1]
제호 한국어 테오도리크 1세
고트어 Þiudarīks
라틴어 Theodoric
생몰 년도 미상 ~ 451년 6월 20일
재위 기간 418년 ~ 451년 6월 20일

1. 개요2. 행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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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서고트 왕국 5대 군주. 서고트 왕국의 기반을 확고히 다지고 플라비우스 아에티우스와의 동맹을 굳건히 했다. 451년 6월 20일 카탈라우눔 전투에서 아에티우스와 함께 아틸라 훈족군과 맞서 싸우다가 전사했다.

2. 행적

테베의 올림피오도로스에 따르면, 그는 알라리크의 사생아였다고 한다. 헤르윅 볼프람은 <고트족의 역사>에서 그를 "젊은 벨티 왕족"이라고 지칭했으며, 토리스문드, 테오도리크 2세, 프레데리크, 에우리크, 리키메르 및 힘네리스 등 6명의 아들이 있었다고 기술했다. 이외에 그의 기원에 대한 정보는 알려지지 않았다. 아나 M. 히메네스는 발티 왕조의 혈통 존재 가능성을 뒷받침하는 5세기의 기록이나 고고학적 증거가 없기 때문에, 발티 왕조의 혈통은 테오도리크 1세부터 출발한다고 주장했다.

418년 말 서로마 제국으로부터 툴루즈에서 보르도까지 이어지는 남부 갈리아 일부 지역과 대서양 연안 지대를 정착을 허락받으면서 서고트 족 정착에 성공한 왈리아가 알려지지 않은 이유로 사망하고 그가 새 군주로 등극했다. 그는 선대가 확보한 땅에 동족을 정착시키고자 토지 분배에 관한 법전을 반포했다. <심판의 책(Liber Iudiciorum)>으로 명명된 이 법전에서는 서고트인이 전체 토지의 1/3을 받고 나머지는 로마인들이 가지도록 했으며, 로마인과 서고트족 사이의 토지 상속시 서고트족의 권리를 우선시했다. 다수의 학자들은 이로 인해 기존에 땅을 가지고 있던 로마인 상당수가 토지를 강제 몰수당했으며, 이는 로마인과 고트족간의 갈등을 부추겼다고 본다. 하지만 W.고파르트 등 일부 학자들은 분배된 땅은 전쟁으로 인해 버려지거나 소유자가 없거나 사용되지 않는 황무지였으며, 농사에 익숙하지 않은 고트족이 새로 받은 농지를 로마인들을 고용해 경작하게 했을 거라고 주장한다.

421~422년 카스티우스가 이끄는 로마군에 보조군을 파견해 히스파니아의 반달족과 싸우게 했다. 그러나 바이티카 전투에서 도중에 서고트군이 이탈해버리는 바람에 로마군이 패배했다. 볼프람에 따르면, 로마에게 정착을 허락받는 대가로 군대를 지원해야 하고 로마 황제에게 정치적으로 종속되어야 하는 점에 불만을 품은 테오도리크가 전투 도중에 배신하라고 지시했다고 한다. 그 후 서고트군은 지중해 연안을 따라 남쪽으로 계속 진군하여 상당한 영역을 확보했다. 423년 호노리우스 황제가 사망한 후 요안네스 발렌티니아누스 3세 사이에 내전이 벌어지면서 서로마 제국이 혼란에 빠지자, 그는 이 때를 틈타 갈리아 남부 해안으로 진격하여 425년 나르본과 프로방스를 공략한 뒤 아를 시를 포위했다. 그러나 발렌티니아누스 3세가 집권한 뒤 파견한 플라비우스 아에티우스 휘하 로마군의 반격으로 아를 공략에 실패하고 툴루즈로 후퇴했다.

그 후 서로마 제국과 재협상한 끝에 아키타니아 세쿤다와 나르보네사 프리마 북서쪽 영역에 대한 주권을 인정받는 대신 지난 전쟁 때 정복한 땅을 반환했다. 430년 재차 아를 공략을 시도했지만 아에티우스가 개입하자 포기했고, 이후 양자는 한동안 평화를 유지했다. 그러던 435년 갈리아에서 바가우다이(농민)들이 반란을 일으켰고 436년 부르군트족이 갈리아 벨키카를 침공했다. 이리하여 서로마 제국의 갈리아 패권이 흔들리자, 그는 이 때를 틈타 로마와 동맹을 끊고 나르본을 포위 공격했다. 아에티우스는 훈족으로부터 기병 지원을 받아낸 뒤 437년 아에티우스는 부르군트족을 쳐부수고 평화 협약을 맺어 제네바 호수 인근으로 이주시킨 뒤, 자신은 바가우다이 토벌을 맡으면서 부관 리토리우스를 파견해 테오도리크와 싸우게 했다.

리토리우스는 훈족 분견대의 협력으로 나르본에서 서고트족을 격파하고 툴루즈까지 쳐들어갔다. 테오도리크는 툴루즈에서 농성했으나 무력으로 승리할 가망이 없자 가톨릭 주교에게 중재를 맡겼다. 그러나 리토리우스는 협상을 거부하고 공성전을 이어갔다. 서고트인들은 어떻게든 살아남기 위해 끝까지 항전하다가 리토리우스를 생포하는 큰 성과를 거두었고, 테오도리크는 며칠 뒤 리토리우스를 처형했다. 이에 아에티우스는 부관 아비투스를 툴루즈로 보내 평화 협약을 맺자고 제안했고, 그는 로마와 계속 대적하는 건 무의미하다고 판단하고 받아들였다.

429년 아프리카 속주를 로마로부터 빼앗은 반달 왕국 가이세리크는 아들 후네리크를 테오도리크의 딸과 결혼시켰다. 그는 이 결혼을 통해 반달 왕국의 지원을 받기를 희망했을 것이다. 그러나 442년, 가이세리크가 발렌티니아누스 3세와 평화 협약을 맺고 황제의 딸 에우도키아와 자기 아들을 약혼시키면서 문제가 발생했다. 가이세리크는 방해가 된 며느리를 제거하기로 하고, 444년 며느리가 아들을 독살하려 했다는 혐의를 뒤집어씌워 코와 귀를 잘라버린 뒤 서고트 왕국으로 돌려보냈다. 이리하여 첫번째 결혼 동맹이 실패하자, 수에비 왕국과 접촉하여 449년 수에비 왕 레치아르와 또다른 딸을 결혼시켰다. 레치아르는 툴루즈로 가는 길에 서고트 분견대의 지원을 받고 사라고사 일대를 약탈하고 일레르다를 공략했다.

451년 훈족의 왕 아틸라가 갈리아를 침략하자, 아에티우스는 아비투스를 툴루즈로 보내 지원을 호소했다. 그는 아틸라가 승리한다면 갈리아에 어렵게 정착한 동족의 입지는 위태로워진다고 판단하고 직접 군대를 이끌고 아에티우스와 합세하기로 했다. 그는 장남 토리스문드를 대동한 채 로마군과 합세했고, 로마-서고트 연합군은 카탈라우눔으로 향했다. 451년 6월 20일, 연합군은 훈족군과 격전을 벌였다.( 카탈라우눔 전투) 이 전투에서 로마-서고트 연합군이 승리하여 적을 진영에 가두었으나, 그는 전투 도중에 전사했다.

뒤이어 서고트군 지도자가 된 토리스문드는 아버지의 죽음에 대한 복수를 하고 싶어했지만, 아에티우스는 서고트군이 이대로 훈족을 격멸하면 갈리아 내 영향력이 지나치게 커질 테고 자신의 기반이 훈족에 있기도 했기에 "왕위 계승을 확고히 하려면 서둘러 본국에 돌아가야 하지 않겠느냐?"라고 권유했다. 토리스문드는 이를 받아들여 툴루즈로 돌아가 왕위에 올랐지만 2년만에 암살당하고 동생 테오도리크 2세가 새 군주로 등극했다.


[1] 테오도리크 초상화, 펠릭스 카스텔로 작.(1635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