멕시코 혁명 Revolución mexicana Mexican Revolution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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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간 | ||
1910년 10월 25일 ~ 1920년 | ||
장소 | ||
멕시코 전역 | ||
원인 | ||
포르피리오 디아스의 독재 멕시코 국민 전반의 배외감정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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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전국 및 교전 세력 | ||
합중국군 멕시코 합중국 |
혁명군 [[멕시코 합중국| ]][[틀:국기| ]][[틀:국기| ]] 혁명군 [[멕시코 자유당| ]][[틀:국기| ]][[틀:국기| ]] 사파타 혁명군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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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휘관 | ||
포르피리오 디아스 빅토리아노 우에르타 펠릭스 디아스 호세 마리아 피노 수아레스 |
[[멕시코 합중국| ]][[틀:국기| ]][[틀:국기| ]] 프란시스코 마데로 [[멕시코 합중국| ]][[틀:국기| ]][[틀:국기| ]] 판초 비야 [[멕시코 합중국| ]][[틀:국기| ]][[틀:국기| ]] 에밀리아노 사파타 [[멕시코 합중국| ]][[틀:국기| ]][[틀:국기| ]] 베누스티아노 카란사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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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력 | ||
250,000~300,000명 | 255,000~290,000명 | |
결과 | ||
혁명군의 승리 | ||
영향 | ||
정국 혼란으로 정치인 및 혁명 지도자 대거 암살 1920년, 1924년 선거에서 노동당 압승 제도혁명당 창당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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피해규모 | ||
50만 ~ 100만명의 군인 및 민간인 사망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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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Revolución mexicana1910년 멕시코에서 장기 집권하던 독재자 포르피리오 디아스 정부에 대항하여 여러 세력들이 무장 투쟁을 일으키면서 시작된 혁명이다.[1]
2. 배경
포르피리오 디아스는 1860년대 프랑스 제2제국의 침략에 맞서 싸운 영웅 중 한 명[2]이었으며 이를 바탕으로 대통령에 당선되었다. 그의 재임 기간인 1876년부터 1911년까지를 포르피리아토(Porfiriato)라고 한다.[3] 디아스 정권은 산업을 진흥하고 외국의 투자를 유치하였으며 도로, 댐, 철도와 같은 인프라도 구축되어 산업의 진흥과 경제의 발전이 이루어지는 반면 빈부격차는 확대되었다.디아스 정권은 근대적인 국가의 체제를 정비하기 위해 토지의 등기 제도(title)를 추진했다. 하지만 멕시코의 원주민은 원래 토지 소유란 개념이 없었고 거의 모든 농민은 소유권이 확실하지 않은 마을 공동지에서 경작했다. 디아스는 '토지제도의 근대화'란 명목으로 이러한 소유권이 애매한 토지를 정부가 접수한 후 외국 자본과 대농장주에게 매각하는 정책을 추진하여 멕시코 농민의 대다수가 토지를 잃고 '페옹'이라 불린 농업 노동자로 전락했다. 돈을 버는 것은 대장원을 소유한 '아센다도스'(hacendados)와 같은 부유층뿐이었고 도시 노동자들이나 농민들은 가난에 시달려야 했다. 디아스는 정권을 유지하기 위해 '루랄레스'(Rurales)라고 하는 경찰 병력을 동원하거나 선거를 조작하는 등 독재 정치를 펼쳐나갔다. 토지를 되찾기 위한 원주민들의 싸움은 정부군 및 대농장주가 고용한 사병들에 의해 강제로 진압되었다.
디아스의 폭정에 반대하던 마곤 형제[4]는 1900년 반-디아스 신문인 《갱생》(Regeneración)을 펴냈지만 탄압이 심해져서 1905년 미국으로 옮겨야 했다. 또 마곤 형제를 비롯한 지식인들은 디아스가 권력을 잡고 있던 자유당(Partido Liberal)에서 갈라져 1905년 멕시코 자유당(Partido Liberal de México)을 조직했다.
노동자와 농민들도 가만히 있지는 않았다. 노동조합이 조직되기도 하고 여러 곳에서 파업이 일어났다. 1906년 미국 자본 소유였던 멕시코 북부 카나네아(Cananea) 구리 광산에서 미국인과 멕시코인 사이의 임금 차별을 이유로 파업이 발발했는데 디아스를 뒤에 업은 사측의 강경 진압으로 45명의 사상자가 발생하기도 하였다. 항구도시 베라크루스에서는 군인들이 파업 중이던 노동자를 총으로 쏴 죽이고 시체를 바다에 던져 상어밥으로 만들기까지 했다.
고령에도 권력욕을 놓지 못한 디아스는 1910년 대선 출마를 선언했고, 윌리엄 태프트 미국 대통령으로부터 지원을 약속받기까지 했다. 이 때 디아스의 대항마로 북부 지주 출신의 신흥 대농장주이자 청년 지식인이었던 프란시스코 마데로가 등장했다. 마데로의 지지세는 34년째 지속된 디아스 정권에 질린 여론에 힘입어 급속도로 성장했다. 이에 디아스 정권은 마데로를 체포하여 투표일을 산루이스포토시 감옥에서 맞이하게 했다. 디아스는 자신이 압도적 득표로 재선되었다고 선언했지만 아무리 봐도 부정선거였다.
선거가 끝나자 석방된 마데로는 미국 텍사스로 망명하여 10월 25일에 그의 지지자들과 함께 <산루이스포토시 계획>(Plan de San Luis)을 발표하여 봉기를 호소했고 이에 따라 마데로의 지지자들이 북부 치와와에서 봉기를 일으켰다.
3. 1차전: 반(反) 디아스 전쟁
<산루이스포토시 계획>은 무력에 의한 디아스 정권의 타도를 천명한 선언이었다. 미국에 있던 마데로의 주위에는 같은 생각을 가진 동지들이 집결했는데 그 사이 멕시코 국내에선 마데로에게 동조하는 운동이 차례로 일어났다. 11월 18일에 마데로의 동지였던 아길레스 세르당이 푸에블라 시에 있던 저택에서 무장봉기 준비가 발각되면서 경찰에게 구타당한 후 총에 맞아 죽었다.이를 계기로 멕시코 시티의 남쪽 모렐로스 주에서는 에밀리아노 사파타가 무장봉기를 일으켰고 북부 일대에선 프란시스코 "판초" 비야, 파스쿠알 오로스코 바스케스(Pascual Orozco Vazquez), 베누스티아노 카란사, 알바로 오브레곤 등이 차례로 무장 봉기를 일으켰다. 디아스 대통령은 80세를 넘겨 정치적 수완은 이전에 비해 떨어졌기 때문에 측근이 정치를 보좌하는 형국이었다.
멕시코 각지의 수많은 세력들이 '디아스 타도'라는 목표를 가지고 마데로를 중심으로 규합되었다. 그러나 흙수저부터 금수저까지 그 성격이 다양하였기 때문에 이는 디아스를 몰아낸 후에도 또 다시 싸움이 이어지는 원인이 되었다.
- 파스쿠알 오로스코: 치와와 주를 기반으로 한 혁명가. 그의 집안은 금광 사업을 통해 부를 축적하였다. 파스쿠알은 마곤 형제의 영향을 받아 혁명의 때를 기다리며 미국에서 무기를 수입해 오고 있었다.
- 아브라암 곤살레스 데 에르모시요 이 카사반테스(Abraham González de Hermosillo y Casavantes): 치와와 주의 가장 부유한 집안 출신인 정치가로, 치와와의 마데로 지지자의 리더였다. 판초 비야가 혁명군에 가담하도록 설득하였다.
- 프란시스코 "판초" 비야: 본래 농장 노동자의 아들이었으며 혁명 전에는 산적이었다. 멕시코 혁명에서 쌓은 명성을 통해 북부 농민들의 리더가 된다.
- 마곤 형제: 미하일 바쿠닌, 피에르조제프 프루동, 표트르 크로포트킨 등의 영향을 받은 아나키스트 형제. 멕시코 원주민 혈통이다.
- 에밀리아노 사파타: 남부 모렐로스 주를 중심으로 활약한 혁명가. 농민들을 대변하였으며 대농장주들에 대한 불신이 깊었다.
- 베누스티아노 카란사: 코아우일라 주의 중상류층 집안 출신.
프란시스코 마데로는 미국의 힘 또한 무시하지 않았다. 그는 동생 구스타보 아돌포 마데로 곤살레스(Gustavo Adolfo Madero González)를 미국에 보내 로비 활동을 펼치게 했다. 이를 통해 찰스 란네트 플린트(Charles Ranlett Flint)[5] 등의 재벌들의 지원을 얻을 수 있었으며 미국 정부가 멕시코 혁명가들에게 법을 덜 불리하게 적용하도록 영향을 끼쳤다.
북부 지역에서 메히칼리, 시우다드후아레스, 치와와 등이 혁명군의 손에 떨어졌으며 남부에서는 사파타가 쿠아우틀라를 점령했다. 혁명군의 세력이 넓어질수록 그 규모도 커졌다. 하지만 혁명군이 하나의 목표를 가진 건 아니었다. 마곤주의자들은 메히칼리와 티후아나를 포함하는 코뮌 자치정부를 세웠다. 이 자치정부는 디아스가 물러난 이후 마데로에 의해 진압된다.
혁명을 진압할 수 없었던 디아스는 결국 마데로와 협상을 벌였다. 그동안 '디아스의 평화'(Pax Porfiriato)와 영광의 환상속에 안주해 왔던 디아스 정권에게 전국에서 일제히 봉기하는 혁명군을 진압할 만한 군사적 준비가 제대로 갖추어져 있을 리가 없었다. 정부군인 연방군은 '무적의 군대'라는 명성의 이면에 군대 조직의 무능과 부패, 군 지휘부의 노쇠화 등 여러 가지 병폐들을 안고 있었으며 이러한 헛점들은 혁명군과의 전투에서 극명하게 드러났다.
주요 전투에서 정부군이 잇달아 패배하고 혁명군이 농촌 지방의 대부분과 시우다드후아레스를 비롯한 주요 도시들을 장악하게 되자 지방 군벌, 소농민, 상인, 관료층, 전문 지식인, 자본가 계층이 본격적으로 혁명 운동에 호응하기 시작했고 사태를 관망하던 미국이 점차 혁명군 측에 우호적으로 나서게 되었다.
1911년 5월 21일 체결된 시우다드후아레스 조약(Treaty of Ciudad Juárez)에 따라 5월 25일 디아스는 사임하고 파리로 망명했다. 이때 디아스는
"마데로는
호랑이를 풀어놓아 버렸다. 어디 잘 길들이는지 한 번 지켜보자."
라는 의미심장한 말을 남겼다. 디아스가 물러난 이후 새로운 대통령 선거가 치러질 때까지
프란시스코 레온 데 라 바라가 다섯 달 정도 대통령직을 수행했다.4. 마데로 정권
지지자들의 기대와는 달리 마데로는 대통령직을 원활히 수행할 수 없었다. 사실 이건 혁명 시작부터 보였던 조짐으로, 너무나 다양한 세력들이 그의 밑으로 모이다 보니 생긴 결과였다. 마데로는 민주주의의 이상과 형식에 과도하게 집착한 나머지 혁명 정부의 설립을 열망하는 혁명 세력들의 요구를 무시하고 디아스의 사임에 따라 대통령직을 승계한 데라바라의 임시정부를 승인했을 뿐만 아니라 연방군을 인정하고 우군이었던 혁명군의 해산을 추진했다. 이는 곧 디아스 정권의 관료와 군부를 인정하는 것으로서 정치 권력의 교체를 혁명의 전부로 인식하던 이상주의자 마데로의 한계를 나타냈다.디아스의 관료와 군대를 인정함으로써 정부 내에서 마데로의 입지는 극도로 불안정해졌고 혁명 진영 내부에서는 구 체제 인사들을 우대하고 혁명군을 소외시키는 마데로의 처사에 대한 불만이 분출되면서 결속력이 현저하게 약화되었다. 비록 디아스는 권좌에서 물러났지만 그의 지배 연합은 여전히 정계, 관료, 군부를 지배하고 있었으며 카우디요, 대농장주, 관료, 군부, 교회 등 수구 세력들은 사사건건 마데로를 비판하면서 반동의 기회를 엿보고 있었다.
마데로 대통령은 농민들 사이에선 인기가 있었지만 본질적으로는 대농장주 출신이어서 멕시코에 민주적인 제도를 도입하여 근대국가의 외형을 만드는 것에는 열심이었지만 빈부차의 해소와 토지개혁 등 농민들의 빈곤한 생활 개선에는 흥미를 가지지 않았다. 그러나 혁명에 참가한 농민들은 빵과 농지를 위해 싸운 것이었다. 마데로는 멕시코에 민주주의를 정착시키기 위해 언론의 자유를 보장하였고 노조 설립도 허용하였다. 그런데 이를 통해 노동운동이 활발해지자 그를 지원했던 해외 재벌들이 타격을 입게 되었다. 지방에서는 사파타를 비롯한 농민층이 토지 개혁을 요구했으나 마데로는 농지개혁에 대해 신중한 입장을 취했다. 사실 마데로 및 여러 혁명 지도자들이 대지주 출신이기 때문이기도 했다.
혁명에 참가했던 농민들은 마데로의 정책에 실망했다. 보수파도 그에 대해 환멸했는데 마데로는 디아스 같은 정치적 수완이 결여되어 있었다. 최초로 마데로와 결별한 것은 모렐로스 주에서 싸웠던 에밀리아노 사파타였다. 사파타는 1911년 11월 25일 "강탈당한 토지, 삼림, 수리 등의 재산은 정당한 권리를 가진 마을 및 국민들이 바로 소유해야 한다"는 <아얄라 계획>(Plan de Ayala)을 발표하여 마데로 정권에 반기를 들었다. 사파타는 <아얄라 계획>을 통해 마데로가 혁명의 적들과 야합하여 디아스 독재를 능가하는 새로운 형태의 독재 체제를 구축했다고 비난하며 디아스 시대에 수탈된 토지를 즉각 몰수하여 촌락 공동체로 환원할 것과 혁명 반대 세력의 재산을 국유화할 것을 선언했다. 또 토지 재분배와 보상, 자율적인 자치제, 지역적 전통에 따라 공유지 혹은 소규모 사유지 수여, 농업 은행의 설립 등 19세기 후반부터 농민들이 요구해 온 사항들을 모두 망라하였으나 역대 '계획'들과는 다르게 정권 장악을 목표로 설정하지 않았다.
<아얄라 계획>이 발표되자 토지 분배 공약에 관심을 가지고 있었던 여러 촌락의 지도자들이 합류하여 1911년 말부터 모렐로스와 푸에블라의 요충지들을 통제하면서 사파타 운동을 확산시켰다. 마데로 정권은 연방군을 출동시켜 무자비한 소탕 작전을 벌이는 한편 유화책을 구사해 가면서 사파타 세력을 분쇄하려고 했지만 잇달아 터지는 레예스, 오로스코, 바스케스 고메스 등등의 반란에 대처하느라 사파타 운동의 진압에 군사력을 집중할 수 없었으며, 농민들은 마데로 정권을 더 이상 신뢰하지 않고 있었다. 급기야 의회에서도 토지 개혁의 필요성을 주장하는 의견이 나오기 시작했고 마데로는 농장주들에게 자발적인 토지 분배를 호소하기에 이르렀으나 농장주들의 반응은 냉담했다. 마데로 정부는 이제 진퇴양난에 빠졌고 국민들의 불만과 분노는 점차 확대되었다.
북부에서는 마데로로부터 기대에 못미치는 보상을 받은 오로스코가 마데로를 적대하기 시작했고 1912년 4월 3일 마데로가 노동조건 개혁에 반대하자 이를 계기로 '콜로라도스'(Colorados, 적기군(赤旗軍))를 조직하여 반란을 일으켰다. 이러한 반란들을 진압하기 위해 마데로는 독재자 디아스 휘하에 있었던 군대인 연방군을 동원했다. 오로스코의 반란을 진압하기 위해 연방군 장군인 빅토리아노 우에르타를 보냈고 판초 비야도 종군했다. 오로스코의 반란을 진압하며 세력을 키우던 우에르타는 비야의 세력이 커지는 것을 우려해 말을 훔쳤다는 죄목으로 비야를 체포하여 사형을 선고했다. 비야는 겨우 미국으로 탈출했다.
게다가 디아스 휘하의 장군이었던 베르나르도 도로테오 레예스 오가손(Bernardo Doroteo Reyes Ogazón)과 디아스의 조카인 펠릭스 디아스 프리에토(Félix Díaz Prieto)가 베라크루스에서 반란을 일으켰다. 레예스와 디아스는 군부의 명예가 마데로에 의해 실추되었다고 주장하면서 군부와 구체제 세력들에게 궐기에 동참할 것을 선동하였지만 그들의 반란은 베라크루스 경계를 벗어나지 못한 채 끝났다.
4.1. 마데로 정권의 최후
초기에 마데로에게 우호적이었던 미국마저 마데로 정권의 정치·경제적 불안정과 치안 유지 능력에 불만을 나타내면서 멕시코 내의 자국 자본을 보호할 강력한 정권을 물색하기 시작했는데 그 중심에는 멕시코 주재 미국 대사인 헨리 윌슨(Henry Lane Wilson)이 있었다. 헨리 윌슨은 마데로를 사사건건 방해하였을 뿐만 아니라 우에르타를 비롯한 반혁명 세력과 결탁하여 마데로 정권의 전복을 획책하는 등 멕시코 내정에 대한 주제넘는 개입으로 악명을 떨쳤다. 더욱이 마데로 정권은 반란 진압에 소요되는 비용을 조달하기 위해 방대한 규모의 국채를 발행함으로써 정부의 재정 압박을 가중시켰다.마데로 정권은 안팎으로 적들에게 포위되어 있었으나 마데로는 여전히 낙관적 이상주의에 사로잡혀 현실을 제대로 인식하지 못하고 있었다. 그러는 사이에 군부를 중심으로 한 반혁명 세력은 마데로 정권을 전복시킬 음모를 구체적으로 진행하고 있었다. 이미 1913년 초부터 연방군 장성들의 쿠데타설이 공공연하게 나돌고 있었으며, 마데로의 측근들조차 쿠데타의 가능성을 경고하고 나섰지만 마데로는 쿠데타 가능성을 일축하였다.
마침내 2월 9일 몬드라곤 소총을 개발했던 마누엘 몬드라곤(Manuel Mondragón) 장군의 주도하에 쿠데타가 일어나 19일까지 이어졌다. 우에르타 장군은 마데로 대통령의 명령을 받고 반란 진압에 나섰지만 실제론 진압하는 시늉만 하면서 대통령에게 충성하는 부대에겐 반란군을 향하여 무모한 돌격명령을 내려 큰 희생을 초래하게 한 후 그 힘을 소진하게 했다. 우에르타는 미국 대사관의 중개로 반란군과 내통하고 있었다.
2월 18일에 우에르타 장군은 스스로 쿠데타를 일으켜 마데로 대통령과 호세 마리아 피노 수아레스(José María Pino Suárez) 부통령을 체포 후 투옥했고, 목숨은 살려줄 테니 대통령직을 내놓으라고 강요했다. 마데로는 이를 수락했지만 대통령이 된 우에르타는 약속을 어기고 2월 22일에 마데로 형제와 수아레스를 살해했다. 이 시기를 비극의 열흘(La Decena Trágica)이라고 부른다.
5. 우에르타 정권
쿠데타를 일으켜 마데로를 축출하고 정권을 찬탈한 우에르타는 할리스코(Jalisco) 주의 하층민 출신으로 우연한 기회에 지방 유지들의 추천을 받아 사관학교에 진학하게 되었으며 디아스 정권의 신임을 얻어 출세에 출세를 거듭하면서 1910년 장성으로 진급했다. 우에르타는 디아스 정권의 토지 수탈에 항거하는 원주민 반란을 잔혹하게 탄압하여 악명을 떨쳤는데 그의 잔혹성과 과단성은 이미 모렐로스 농민군의 무장 해제와 오로스코 반란의 진압 그리고 마데로 처리 과정에서 여실히 드러났다.우에르타 정권은 디아스 체제의 복구를 지향했으므로 대농장주, 자본가, 교회 그리고 도시 상층부 계급으로부터 환영을 받았으며 군부와 관료 집단 역시 우에르타 정권을 지지했다. 대부분의 주지사들 역시 우에르타 정권을 승인했으나 마데로의 고향인 코아우일라의 주지사 카란사는 우에르타 정권에 대한 인준을 거부했다. 마데로의 후원자였던 치와와의 아브라암 곤살레스 주지사는 살해되었고 소노라의 호세 마리아 마이토레나(José María Maytorena) 주지사는 명확한 입장을 밝히지 않고 미국으로 피신했다. 한편 치와와에서 준동하던 오로스코는 우에르타 정권 지지를 선언했다.
'멕시코의 크롬웰'로도 불렸던 우에르타는 초기에는 디아스와 같은 비타협적 조치를 취하지 않고 정치범을 석방하는 등 제한적인 유화 정책을 폈다. 그러나 이러한 유화 정책이 별다른 실효를 거두지 못하고 또한 토레온 전투에서의 패배로 정권의 위신이 실추되자 독재 정권의 본색을 드러내면서 군사적 압력을 동원한 강압 정치를 펼치기 시작했다. 우에르타는 군대를 정권의 최후 보루로 인식하고 사회 전체를 병영 체제로 개편했다. 산업 생산은 군대의 물자 조달을 위해 재조직되었고 학교는 군인의 양성을 위해 재조직되었으며 연방군 조직을 강화하고 혁명군의 충원을 차단하기 위해 강제 징집(leva)을 실시했다. 그 결과 연방군의 규모는 디아스 정권 말기에 비해 10배 이상의 규모로 증강되었다.
우에르타의 정권 찬탈과 마데로의 피살은 흩어진 혁명 세력들을 다시 결집시키는 기폭제로 작용했다. 이미 3월에 우에르타 정권에 대한 승인을 거부한 바 있는 코아우일라의 카란사는 당분간 사태의 추이를 관망하는 한편 코아우일라로 진입하는 철도 노선을 절단하고 병력과 군자금을 조달하여 연방군과의 일전에 대비했다. 소노라 주에서는 마이토레나의 후임자인 이그나시오 페스케이라(Ignacio Pesqueira) 주지사가 우에르타 정권 타도를 선언하고 알바로 오브레곤을 지휘관으로 임명하여 연방군과의 전투에 돌입했다. 치와와 주에서는 곤살레스 주지사의 피살 소식을 접한 서민들이 혁명군의 봉기에 동참했고, 미국으로 망명을 가 있던 판초 비야는 치와와로 잠입하여 활동을 개시했다. 사파타와 모렐로스 혁명 평의회 역시 우에르타 정부를 불법 정부로 규정하고 우에르타 정권 타도를 목표로 군사 조직을 재정비했다. 이 외에도 혁명군의 봉기는 타바스코, 베라크루스, 미초아칸, 두랑고, 게레로, 콜리마, 타마울리파스, 사카테카스, 산루이스포토시 등으로 확산되었다.
6. 2차전: 반(反) 우에르타 전쟁
정치적으로 유능하지는 않았지만 카리스마와 대중적 인기가 있었던 마데로 대통령을 살해한 우에르타 장군이 정권을 잡자 마데로 지지파와 반대파를 불문하고 거의 모든 혁명파가 일제히 우에르타 정권 타도를 위한 봉기를 일으켰다. 모렐로스 주에서는 사파타가 다시 게릴라전을 전개했고 북부 일대에선 카란사, 오브레곤, 비야의 혁명파가 '호헌(護憲)혁명군'으로 집결해 카란사를 '혁명의 제1통령'으로 삼고 무장봉기를 했다.1913년 9월에 이르자 우에르타 정부는 안팎으로 위기 상황에 봉착하게 되었다. 안으로는 남북으로 압박해 들어 오는 혁명군의 공세에 정부군은 점차 수세에 몰리게 되었고 밖으로는 미국의 우드로 윌슨 행정부가 우에르타 정부의 후원자인 헨리 윌슨 대사를 소환하면서 우에르타 정부에 대한 승인을 차일피일 미루고 있었다. 우에르타는 10월 26일로 예정된 선거를 통해 합법 정부의 구색을 맞추려 했으나, 9월 말 1차 토레온 전투에서 비야군에 패배함으로써 정권의 안정성에 큰 타격을 입었다. 뿐만 아니라 비야군의 승리에 자신감을 얻은 마데로파 의원들이 그동안의 침묵을 깨고 우에르타 정권에 대한 비판에 나서게 되자 우에르타는 의회를 해산하고 110명의 의원들을 체포했다. 이로써 합법적 정부를 가장하려던 우에르타의 전략은 물거품이 되고 말았다.
여기에 설상가상으로 4월 21일 미국 해군이 베라크루스 항을 점령하는 사태가 벌어졌다. 미군의 베라크루스 점령은 독일 선적의 수송선 이피랑가(Ypiranga) 호에 적재된 무기의 회수가 표면상의 이유였지만 본질적인 이유는 그 동안 윌슨 행정부와 우에르타 정권 사이에서 발생한 일련의 갈등에서 비롯된 것이었다. 미군의 베라크루스 점령으로 우에르타 정권은 총 재정의 43.5%를 차지하고 있던 관세 수입 및 대외 무기 도입 창구를 상실함으로써 혁명군과의 전투에 막대한 차질을 빚게 되었다. 그러나 미군의 베라크루스 점령은 멕시코인들의 전통적인 반미 감정과 민족주의를 극도로 자극하여 곳곳에서 반미 시위와 우에르타 지지 시위가 발생하고 미국의 침공에 맞서 싸우기 위해 정부군에 의용군으로 지원하는 지원자가 쇄도하여 오히려 우에르타 정권의 입지를 강화시켜 주었다. 미군의 베라크루스 점령에 대하여 혁명군 내부에서도 입장이 엇갈렸는데, 비야는 미군의 베라크루스 점령을 지지했으나 카란사와 사파타는 적극 반대했고, 특히 사파타는 미국과의 전쟁을 위해 우에르타와 일시 휴전할 것까지 고려했다.
혁명군 가운데서도 가장 활약한 것은 치와와 주에 있던 프란시스코 '판초' 비야의 호헌혁명군 북부사단이었다. 비야는 1913년 10월에 계략으로 미국과의 국경인 시우다 팔레스를 탈취하고 이어서 주도인 치와와 시를 점령해 치와와 주 전체의 지배권을 장악한 다음 수도를 향해 남하하기 시작하여 1914년 4월에는 토레온, 6월에는 사카테카스를 점령하는 쾌속진격을 이어나갔다.
그런데 그 사이 우에르타 정권 타도라는 목표로 합류한 혁명파 내부의 대립이 격화되었다. 호헌혁명군의 '제1통령'이었던 카란사는 대농장주 출신으로, 혁명 전에는 코아우일라 주의 주지사를 지냈다. 그는 마데로처럼 민주적인 제도를 멕시코에 도입하는 것에는 열심이었지만 마데로처럼 대대로 대농장주 출신이었기에 농지개혁 등 사회개혁의 의지는 없었다.
한편 군사적인 공로자였던 비야는 극빈한 생활로 마적이 되었다가 이윽고 혁명군에 참여한 이른바 '비천한 출신'으로 사상적인 배경은 강하지 않았지만 대농장주에 대한 강한 적의에다 농지개혁의 필요성을 주장했다. 에밀리아노 사파타는 호헌혁명군과 별개로 독자적인 입장에서 싸웠는데, 그도 일관되게 농지개혁을 강하게 주장했다.
양자의 대립은 혁명군이 멕시코 시티를 눈 앞에 둔 상황에서 혼란스런 상태로 변했다. 양파의 사이에서 관계회복을 위해 노력한 자가 호헌혁명군의 북서사단을 이끈 오브레곤 장군이었다. 그도 대농장주였지만 마데로나 카란사와는 달리 가난한 생활을 경험했었고, 자수성가하여 부를 쌓은 인물로 생각이 유연하여 농민들의 빈곤한 생활개선과 농지개혁의 필요성을 잘 이해했다. 하지만 그의 조정 노력은 불발로 끝나, 양파의 관계가 회복 불가능한 상태가 되자 오브레곤은 카란사에게 접근했다. 카란사는 비야를 얽매기 위해, 진격하는 비야에게 갑자기 정지하라는 명령을 내리거나, 철도를 효과적으로 이용하는 비야의 전법을 막기 위해 석탄 공급을 하지 않는 등의 조치를 취했다.
이러한 와중에 토레온을 점령한 혁명군은 사카테카스를 목표로 정부군에 대한 총공세를 준비하고 있었다. 6월에 개시된 사카테카스 전투는 카란사의 독선적인 지휘권 행사와 그로 인해 표면화된 혁명군의 내부 갈등, 그리고 궁지에 몰린 우에르타의 최후 발악으로 말미암아 혁명군과 정부군 양측 모두 막대한 피해를 남긴 채 혁명군의 승리로 끝났다.
우에르타를 물리치고 멕시코 시티에 입성한 판초 비야와 에밀리아노 사파타를 찍은 영상. (0:53 경) 대통령궁에서 혁명 지도자들이 식사를 하는 모습. (1:14 경) 프란시스코 마데로의 장례식. 판초 비야가 울음을 터트린다. (1:37 경) 멕시코 시티를 떠나는 혁명군의 모습.
뒤이어 혁명군이 과달라하라와 산루이스포토시를 점령하고 멕시코시티를 압박해 오자 우에르타는 결국 디아스처럼 7월 15일 대통령직 사임을 발표하고 유럽으로 망명을 떠났다. 8월 15일 오브레곤군이 혁명군의 선봉으로 멕시코시티에 입성하여 연방군의 항복을 접수하였다.
7. 3차전: 농촌 vs 도시
혁명군은 승리했지만 비야•사파타파와 카란사•오브레곤파의 대립은 피할 수 없었다. 1914년 10월 혁명군의 대표자를 모아 아과스칼리엔테스 회의가 열렸다. 비야와 사파타는 이 회의에서 공동전선을 조직해 다수를 점한 사파타의 <세라야 강령>을 혁명의 공동강령으로 채택하여 카란사와 비야의 동시 퇴진을 결정했지만 카란사는 이를 무시하고 멕시코시티에서 베라크루스로 달아나 비야•사파타 파와의 전투에 돌입했다.1914년 11월부터 12월에 걸쳐 카란사•오브레곤파가 철수한 수도 멕시코시티에 사파타파와 비야파가 차례로 입성했지만 두 사람 모두 멕시코 시티에서 정권을 잡을 의지가 없어 바로 수도를 포기했다. 카란사파는 힘들이지 않고 수도를 탈환하여 다시 비야파를 쫓아 서쪽으로 진격했다.
카란사파와 비야파는 1915년 4월 5일부터 6일, 13일과 14일에 걸쳐 과나후아토 주 세라야 전투에서 격돌했다. 카란사파는 오브레곤이 지휘하는 북서사단 병력 약 11,000명에 화포 13문과 기관총 86정이 있었고 비야 파는 북부사단 병력 22,000명에 야포 30문 이상으로 병력은 비야의 북부사단이 우세했지만 오브레곤군의 기관총 86정이 결정적인 역할을 담당했다.
4월 5일과 6일 전투에서 오브레곤군이 패배하여 후퇴하는 듯 했지만 최종적으로는 비야가 자랑하던 기마돌격 전술을 기관총으로 격퇴함으로서 반격에 성공했다. 이어서 13일과 14일의 전투에서는 오브레곤이 제1차 세계 대전의 새로운 전법을 도입하여 전장에 참호와 철조망을 치고 비야의 기마돌격을 저지한 후 기관총으로 섬멸했다. 비야군은 붕괴하여 전사 4,000명, 포로 5,000명을 내고 화포를 모두 상실한 채 퇴각했다.
멕시코 혁명의 승패를 가른 이 전투에서 카란사파는 5월에 트리니다, 6월에 레온을 점령하고 비야의 북부사단을 완전히 와해시켰다. 하지만 6월의 레온 점령 당시 비야 파가 쏜 대포가 오브레곤의 진영을 때리면서 오브레곤은 한쪽 손을 절단당하는 부상을 입기도 했다.
그러나 카란사파 내에서도 새로운 대립이 생겨났다(...). 카란사파의 장군들이 제정한 헌법은 카란사의 생각과는 달리 사유재산 절대사상을 부정하고, 대토지 소유자에게 국가가 개입해 농지개혁을 추진하는 길을 열면서 노동자의 권리보호를 주장하는 등 카란사의 적이었던 비야와 사파타의 주장을 대폭 수용한 진보적인 것이었다.
가난한 농민과 노동자들을 규합해 군을 실제로 이끈 장군들은 뒤에서 명령만 내린 카란사와 달리 멕시코의 민중들이 무엇을 원하는지 잘 알고 있었다. 이것이 훗날 멕시코 정치체제의 기본이 된 1917년 헌법이다. 혁명정권은 강력한 기반을 가진 가톨릭 교회를 적대시하여 정교분리 정책을 추진했고 외국인 사제의 활동과 종교교육 이외의 교육 관여가 금지되었다.
카란사는 사실상 이 헌법의 내용을 무시하고 정치를 진행했다. 비야파가 와해된 후 모렐로스 주의 산 속에서 게릴라전을 펼치던 사파타는 1919년 4월 10일 '사파타파로 돌아섰다'며 접근한 정부군 장교에게 피살되었다.
그 사이 카란사의 구심력은 급속히 저하되어 실질적으로 비야 파와의 전투를 지휘하고 유연한 사고로 농지개혁 등 사회개혁의 필요성을 강하게 인식하던 오브레곤 장군의 인망이 높아졌다. 이에 위기감을 느낀 카란사는 오브레곤을 정부에서 쫓아내고, 그런 후 대통령에 입후보하려는 것도 방해하여 그를 체포하기에 이르렀다.
1920년 1월 오브레곤은 고향인 소노라 주로 도주하여 4월에 카란사에 대한 반란을 선언했다. 거의 모든 장군들은 물론 비야파와 사파타파의 잔당도 오브레곤파에 가세했다. 약 한 달 만에 카란사 대통령은 수도인 멕시코시티에서 달아나 항구도시인 베라크루스로 향했지만 베라크루스 주지사도 오브레곤파여서 카란사는 푸에블로 산 속으로 도망치다가 반란군에게 피살당했다.
최종적으로 승자가 된 오브레곤은 1920년 6월의 대통령 선거에 입후보하여 당선되었다. 그 사이 오브레곤은 비야파와 사파타파의 잔당과 평화협상을 체결하여 두 파 모두 무기를 놓았다. 허나 판초 비야는 1923년 7월 23일 비서와 경호원을 태운 자동차를 스스로 운전하던 중 피살되었다.
거의 같은 시기 오브레곤의 후속 대통령의 자리를 둘러싸고 그의 충실한 부하로 오브레곤이 정식으로 대통령에 당선되기 전까지 임시 대통령으로 일한 적이 있던 아돌포 데 라 우에르타(Felipe Adolfo de la Huerta Marcor) 재무장관이 반란을 일으켰다. 일시적으로 데라우에르타가 우위를 점했지만 결국 오브레곤이 승리했다. 이 반란을 끝으로 멕시코 혁명의 전란은 이후 크리스테로 전쟁 등 약간의 전투 외엔 거의 종결되었다.
8. 크리스테로(Cristero) 전쟁
1917년 헌법이 제정되자 가톨릭 교회의 권한은 헌법에 따라 제약받았다. 1923년 쿠빌레테 언덕에서 호세 모라 이 델 리오(José Mora y del Río) 대주교의 주재로 성당 축성식이 열렸을 때 정부는 대주교의 강론 중 발언[6]을 문제삼았고 교황청에서 파견한 에르네스토 에우헤니오 필리피(Ernesto Eugenio Filippi) 대주교를 추방했다. 플루타르코 엘리아스 카예스 정부는 <헌법 130조>(카예스 법)을 제정해 가톨릭교회의 공개적인 활동을 금지했고, 가톨릭 진영은 카예스 정부의 정책에 반발해 크리스테로 전쟁을 일으켰다. 크리스테로 전쟁이 일어나기 직전에는 아나클레토 곤살레스 플로레스(Anacleto González Flores)가 1926년에 가톨릭 반란을 일으켰다가 1927년에 처형당했다. 그는 2005년에 아나클레토 곤살레스 플로레스와 7위 동료 순교자로 시복되어 복자가 되었다.'크리스테로'는 반란군의 구호인
"그리스도 왕 만세!
과달루페의 성모님 만세!(
¡Viva Cristo Rey! ¡Viva la Virgen de Guadalupe!)"
중에서 그리스도 왕의 스페인어 발음인 '크리스토 레이'(Cristo Rei)를 바꾼 단어로 한국어로 뉘앙스를 살려 번역하면 '
천주쟁이', '개톨릭'과 비슷한 단어다. 크리스테로 반란군은 게릴라전으로 멕시코 정부군을 공격했고 여성 조직으로
잔 다르크 여성 여단도 있었다. 한편 전쟁 중인 1928년에 헌법을 고쳐 재선에 성공한 전직 대통령 오브레곤이 미처 임기를 시작하기도 전에 가톨릭 테러범
호세 데 레온 토랄(José de León Toral)에게 암살당했다.1929년 에밀리오 포르테스 힐 대통령[7]과 크리스테로가 미국의 가톨릭 단체인 콜럼버스 기사단의 중재를 받아들이며 크리스테로 전쟁은 끝났다. 멕시코 가톨릭은 멕시코 정부의 주권을 인정했으며 멕시코 정부도 영적 부분에서 교회의 권리를 인정했지만 멕시코에서 가톨릭교회의 재산권은 1992년까지 제한받았다.
9. 영향
멕시코의 민요로 잘 알려져 있는 < 라쿠카라차>가 높은 인지도를 얻은 계기다.플루타르코 엘리아스 카예스가 살아남은 혁명 지도자들을 모아 만든 제도혁명당은 2000년까지[8] 거의 70년 동안 독주체제를 구축했으며 라사로 카르데나스가 대통령으로 재임할 무렵에는 토지 개혁, 의무교육 확대, 석유 국유화와 같은 여러 개혁이 이루어졌다.
그레이엄 그린의 대표작 '권력과 영광'은 크리스테로 전쟁 당시 한 신부의 순교를 통해 인간성에 대해 다룬 작품이다.
10. 여담
멕시코 혁명의 주역들은 대부분 끝이 좋지 않았다. 참고- 포르피리오 디아스: 1911년 사임 후 망명, 1915년 프랑스 파리에서 사망.
- 프란시스코 마데로: 1913년 보수파의 쿠데타로 피살.
- 빅토리아노 우에르타: 1914년 사임 후 망명, 1916년 미국에서 사망.
- 베누스티아노 카란사: 1920년 반란군에게 피살.
- 알바로 오브레곤: 1928년 재선 성공 후 정부의 가톨릭 탄압에 분개한 가톨릭교도에게 피살.
- 에밀리아노 사파타: 1919년 위장투항한 정부군 장교에게 피살.
- 판초 비야: 1923년 정치적 반대파에게 피살.
- 아브라암 곤살레스: 1913년 반혁명파에게 피살.
- 파스쿠알 오로스코: 1915년 피살.
- 리카르도 마곤: 1918년 미국에서 방첩법(Espionage Act of 1917) 위반 혐의로 체포. 제1차 세계 대전에 반대하는 선전을 했다는 이유로 반역죄로 기소당함. 20년형을 선고받고 복역 중 1922년 미국 캔자스 주 레번워스 교도소에서 사망.
- 엔리케 마곤: 1954년 멕시코시티에서 사망.
- 헤수스 마곤: 1930년 멕시코시티에서 사망.
- 아돌포 데 라 우에르타: 1924년 미국으로 망명. 귀국 후 멕시코에서 여생을 보냄.
- 사투르니노 세디요[9]: 1938년 라사로 카르데나스 정부의 토지 개혁과 석유 국유화에 반대하는 반란을 일으킨 후 1939년 산루이스포토시 주에서 정부군에게 사살.
이탈리아 통일의 주역인 주세페 가리발디와도 약간 인연이 있다. 주세페 가리발디의 손자인 페피노 가리발디 2세는 프란시스코 마데로의 휘하에서 외국인 용병부대를 이끌고 혁명전쟁에 참여했다. 혁명 후 멕시코 정부에서는 이를 기념하기 위해 멕시코시티에 그의 이름을 딴 가리발디 광장을 세웠다.
11. 참고 자료
- 백종국, 《멕시코 혁명사》, 한길사(2005)
- 엔리케 크라우세, 《멕시코 혁명과 영웅들》, 까치(2005년 국내 출간)
[1]
프란시스코 마데로는
신해혁명 당시의
쑨원과 같이 단지 명망이 있어서 지도자로 추대되었을 뿐이다. 혁명 과정에서 기억되는 인물은
에밀리아노 사파타나
판초 비야지 마데로가 아니다.
[2]
당시 프랑스는
멕시코 제2제국이라는
괴뢰국을 세우고
막시밀리아노 1세를 황제로 앉혔다.
[3]
중간에
후안 네포무세노 멘데스가 두 달 동안 대통령직에 있었으나 존재감은 없었고
마누엘 곤살레스 플로레스가 1880~1884 동안 대통령으로 재임했으나 디아스의 정책을 충실히 이어받아 실행했다.
[4]
무정부 공산주의자인
시프리아노 리카르도 플로레스 마곤(Cipriano Ricardo Flores Magón),
엔리케 플로레스 마곤(Enrique Flores Magón),
가스파르 헤수스 멜초르 플로레스 마곤(Gaspar Jesús Melchor Flores Magón)을 가리키며 이들의 사상을 마곤주의(Magonismo)라고 부른다.
[5]
1850~1934. '
트러스트의 아버지'라는 별명을 가진 미국의 사업가. 디아스를 지지하던
존 데이비슨 록펠러와 경쟁 중이었다. 그가 세운 CTR 지주회사는 후일
IBM으로 발전한다.
[6]
그리스도가 종교적으로도 세속적으로도 '멕시코인의 왕'이라고 주장했다(출처는 백종국의 《멕시코 혁명사》).
[7]
1928년 사임한
플루타르코 엘리아스 카예스가
바지사장으로 내세운 대통령이다.
[8]
중간에 다른 정당이 있었으나 이 정당과 제도혁명당과의 차이는
더불어민주당과
민주평화당 정도로 대동소이했다.
[9]
아과스칼리엔테스 정부에 참가한 혁명군 지도자 중 한 명.