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개요
Afro-mexicans멕시코 국민 중 흑인을 말한다. 2020년 자가응답을 기준으로 한 통계 기준 2,576,213명으로 멕시코 전체 인구의 2.04%를 차지하는 것으로 조사되었으나, 실질적으로는 훨씬 더 많다는 것이 중론이다. 라틴아메리카 국가들은 자국 내 흑인 인구를 가급적 축소해서 발표하거나 혹은 자가응답에 기반한 조사에서 사회적 차별을 두려워해 자신이 흑인이라고 규정하지 않는 경우가 많다는 것을 감안해야 한다.
2. 이민사
멕시코 흑인의 역사는 에르난 코르테스의 아즈텍 제국 정복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코르테스가 지휘하는 콩키스타도르 가운데 포르투갈인 흑인 병사 혹은 무어인 전쟁 포로나 스페인 흑인도 일부 포함되어 있었던 것이다. 이들 중 군공을 인정받아 역사 기록에 이름을 남긴 사람들을 보면 출신 배경이 다양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흑인 콩키스타도르(스페인어)- 후안 가리도(Juan Garrido)[1] : 위에 그림에서 갑옷 입은 백인들 사이에 있는 흑인. 서아프리카 출신으로 포르투갈인들에게 납치되었다가 1510년 리스본에서 가톨릭으로 개종. 이후 스페인 콩키스타도르에 합류하였다. 군공을 인정받은 후 멕시코에서 최초로 밀밭을 일구고 흑인 노예들을 최초로 멕시코로 데려와서 광산 개발을 시도했던 사람으로 알려져 있다.
- 에스테반 엘 네그로(Estevan el Negro, Estevanico) : 자신의 출신 배경 관련해서 negro alárabe, natural de Azamor( 아랍화된 흑인, 아자무르 출신)이라는 기록 한 줄을 남겼다. 크리스토퍼 콜럼버스의 선단에 아랍어 통역 두 명이 탑승했다는 기록에서 보듯, 스페인이나 포르투갈 출신 탐사대들은 아랍어 통역을 일부 대동하는 경우가 많았다. 플로리다에서 탐험을 하다 배가 좌초되어 동료 2명만 살아남은 상태에서 원주민의 노예가 되었다가, 주술사로 전직한 후 탈출하여 미국 동부에서 서부로 횡단한 후 다시 남쪽으로 걸어가서 스페인 식민지로 돌아왔다.
- 베아트리스 데 팔라시오스(Beatriz de Palacios) : 무어인과 스페인인 혼혈로 여성 콩키스타도르였다.
하지만 이렇게 통역수로 뽑히거나 콩키스타도르로 군공을 세워서 출세한 흑인들은 다소 예외적인 경우였고, 아즈텍 제국이 정복된 이후 들어선 스페인의 식민지 누에바에스파냐에 정착한 흑인들은 대부분은 대서양을 통해 수입된 노예였다.
2.1. 대서양 노예 무역
자세한 내용은 노예무역 문서 참고하십시오.1518년 카를로스 1세는 플랑드르 태생의 한 총신에게 4,000명의 흑인 노예를 식민지에 공급해도 좋다는 특허장을 부여했다. 그후 스페인계 아메리카의 흑인 인구는 매년 8,000명의 비율로 증대하여 1620년이 되면 3만여 명에 도달하게 된다.
그러나 누에바에스파냐에서 노예의 수요가 높았던 지역은 주로 원주민 인구가 일찍이 전멸했던 쿠바 등 카리브해 섬 지역들이었고, 내륙은 노예 수요가 적었던 편이었다. 이를 반영하듯 누에바에스파냐 내륙 일대의 흑인 노예 가격은 1580년부터 1640년까지 400페소, 1650년경에는 350페소, 1750년에는 175페소로 점점 감소하였다.
17세기 초 멕시코에서 흑인 노예들이 봉기하여 상당한 세력을 구축했던 역사도 있다. 반란군 두목인 양가는 멕시코 만의 넓은 해안가 지역을 장악하여 부왕에게 협상을 강요하는 데에까지 이르렀다. 그러나 반란은 결국 무력으로 진압되고 말았다 그렇지만 이 반란에서 살아남은 자들은 허락을 받아 베라크루스 주에 산 로렌소 데 로스 네그로스 라는 흑인마을을 건설 했다.
대서양을 거쳐 아메리카 대륙으로 유입된 흑인들은 대부분 서아프리카 출신이다. 동아프리카 흑인들과 외모가 상당히 다르다. 19세기 중반 제2차 프랑스-멕시코 전쟁 당시 영국은 프랑스를 도와 참전하면서 영국의 보호국이던 이집트 측에 하청을 주었는데, 이집트 역시 자국의 식민지였던 "투르코-이집트 수단(Turco-Egypt Sudan)"에 하청을 주었고, 결국은 남수단 출신 병사 수백여 명이 멕시코로 파병을 갔던 역사가 있다. 이들은 서아프리카 출신 흑인들에 비해 피부색은 더 짙으면서 키는 훨씬 더 컸고, 서아프리카 출신 흑인들이 대체적으로 뚱뚱한데 비해 이들은 호리호리했기 때문에 현지인들에게 매우 이국적인 인상을 주었다고 한다.
2.2. 혼혈화 및 동화
스페인인 남성과 흑인 여성의 혼혈 딸 물라타, 스페인인 남성과 물라타 사이의 혼혈 딸 모리스카 |
노예의 유입이 일찍이 감소하는 과정에서 누에바에스파냐 내륙 사회에 정착한 흑인들은 멕시코 현지인들과 지속적으로 통혼하며 동화되는 과정을 거쳤다. 스페인 본토에서 누에바에스파냐 식민지로 이주해오는 스페인 백인들은 절대다수가 남자였고, 이들은 식민지 현지에서 원주민 아니면 흑인 여자들하고 자손을 보곤 했기 때문이다. 하플로그룹 조사 결과 오늘날 멕시코인들은 평균적으로 7~8% 정도의 흑인 유전자를 보유하고 있다.
5번, 6번 그림에서 보듯 흑인 남성과 백인 혹은 백인 혼혈 여성 사이의 결혼도 드물게마나 있었는데 라틴아메리카 식민지에는 상술한 콩키스타도르의 사례들처럼 자유민 흑인 인구도 엄연히 존재했기 때문이다. 항구에서 짐을 하역하는 일에 노예를 동원하면 몰래 도망갈 확률이 높다는 이유로 주로 해방노예 흑인들에게 맡겼다.[4] 한 편 해당 그림에서는 피부색이 짙을 수록, 흑인에 가까운 혼혈인일수록 빈곤한 것으로 묘사된다.
당연하지만 수백여 년 전 대항해시대 당시에는 하플로그룹 조사나 친자검사 같은 것이 불가능했기 때문에 인종 구분은 외모를 기준으로 대충대충 이루어졌다. 이를테면 백인 7/8을 알비노라고 부르기도 하고 치노라고 부르기도 하고 백인 15/16을 토르나 아트라스라고 부르기도 하는데, 웬일인지 바로 위 그림에서는 토르나 아트라스가 흑인과 원주민 혼혈로 나와있다. 만약 항목 상단의 그림에 나온 여자 아이의 외모가 백인과 같았다면 그냥 백인 스페인인(Espanola)으로 분류되었을 것이다. 치노는 중국인이라는 뜻도 있고 누에바에스파냐의 필리핀 도독령에서는 멕시코인/페루인[5]과 중국인 혼혈을 토르나 아트라스라고 부르기도 했다. 한 편 필리핀과 멕시코 사이의 갤리언 무역의 선원 상당수는 네그리토[6]나 모로족 전쟁 포로였는데, 이들은 배가 아카풀코 항구에 정박하기 무섭게 배에서 내려 도망가는 일이 많았다. 이런 탈주노예들 역시 정착한 지역에서 외모에 따라 치노 혹은 네그리토 등등 다양한 이름으로 아무렇게나 불리곤 했다.
2.3. 멕시코 독립 이후
19세기 영국의 주도로 대서양 흑인 노예 무역이 금지되자 멕시코의 대서양 흑인 노예 인구 유입은 종말을 맞았다. 대신 미국에서 탈주한 흑인 노예들이 멕시코 국경을 넘어 정착하는 경우는 많았다.오늘날 기준으로는 아이티 출신 난민들이 멕시코를 통해 미국으로 밀입국하려다가 실패해서 아예 멕시코에 정착하는 사례도 자주 보이고 있다.
3. 분포
오늘날 스스로를 멕시코 흑인으로 규정하는 인구 대다수는 원주민 인구가 밀집한 멕시코 동남부를 중심으로 거주한다.4. 유명 인물
5. 관련 문서
[1]
스페인어 Garrido는 잘생겼다는 뜻이다. Juan은
요한에 해당
[2]
이 그림이 그려진 시기에 알비노/알비나라는 단어는 일반적인 그
알비노가 아니라 흑인 혈통 1/8, 백인 혈통 7/8 정도를 물려받은 혼혈인을 의미했다.
#
[3]
굳이 불륜이 아니더라도 백인 부부 사이에서 3~5세대 이전 흑인 조상의 외모 유전자가 갑툭튀하는 경우는 종종 일어나는 일이다.
#1
#2
[4]
비교하자면 당시 부두에서 노동하는 사람들의 노동 강도는 농장보다는 훨씬 빡세고 광산 노동자들보다는 조금 나았는데 광산 노동자들과 다르게 항만에서 일하는 사람들이 탈출하기 쉬웠음은 물론이다.
[5]
유럽에서 필리핀으로 다이렉트로 이동하기는 힘들었다.
[6]
작은 흑인이라는 뜻